묵향 7권 8화 – 아르곤의 사신
아르곤의 사신
실바르에 대한 군사 재판이 벌어진 지도 이제 열흘이 지났다. 총독부에는 수많은 인부들이 득실거리며 새로이 단장을 한다고 난리였다. 총독부 정면의 주 정원(主 庭園)에 아름다운 꽃이 핀 화초들을 심었고, 도로도 깨끗하게 청소했다. 그리고 총독부 내부의 각 방들도 청소를 하고 사방에 낀 먼지들을 제거하는 대청소 작업을 한다고 하녀들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봄이 되면 겨울의 어둠침침했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대청소를 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이건 조금 달랐다. 국경에서의 소란을 빌미로 아르곤 제국에서 사신이 올 것이라는 통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신 일행은 먼저 치레아 총독부를 거쳐 스바시에 총독부, 그리고 황제를 알현한 후 코린트로 갈 예정이었다. 이것은 크라레스의 가장 중요한 부서들을 모두 눈으로 확인하면서 이쪽의 약점을 알아보겠다는 의도는 당연한 것이었다.
“사신 일행은??
“예, 내일 총독부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발레리 경이 보고했사옵니다.”
“내일이라……. 대단한 강행군이군.”
“예, 그러하옵니다. 전하.”
“모든 준비가 그 전에 끝날 수 있게 지시하게.”
“예, 전하.”
“참, 로니에 사제는 도착했나?”
“내일 아침까지는 도착할 수 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좋아, 이만 가 보게.”
친위기사단 복장의 무사는 이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는 소녀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네고 뒤로 돌아섰다. 50살은 되어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그 무사 의 옷에는 놀랍게도 웃기게 생긴 황금 드래곤의 문장과 함께 총독을 뜻하는 문장도 함께 붙어 있었다.
아르곤 제국에서 사신을 파견한 것은 명목상 국경을 침입해 들어온 크라레스 황제에게 그 위법성을 따진다는 것이었다. 치레아 지구와 아르곤 제국의 국경선이 되 는 말토리오 산맥의 끝자락. 이 부분에 이르러 서쪽 대륙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말토리오 산맥의 그 험준함은 매우 완화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람이 다니기에 길이 험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치레아나 스바시에는 과거부터 항구가 발달했고, 해상 무역이 성행했던 것이다.
이 말토리오 산맥에 살고 있는 오크들은 몬스터 치고는 꽤 머리가 잘 돌아가는지 이 산맥을 경계로 기가 막히게 숨바꼭질을 했다. 치레아에서 토벌군을 파견하면 아르곤으로 도망치고, 아르곤에서 토벌군을 파견하면 치레아로 도망쳤다. 그렇다 보니 토벌은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과거 치레아 왕국 시절 아르곤과 협정을 맺어 대대적인 토벌을 벌인 적도 있었지만, 이때는 몬스터들이 말토리오 산맥을 타고 저 멀리 크라레스 방향으로 도망치 는 바람에 실패했었다.
이러다 보니 무식하거나 또는 외고집이었던 오우거나 트롤들은 진작 말토리오 산맥 하단부에서 토벌되었지만, 생긴 것과 달리 꾀가 많은 오크들은 명맥을 유지하 는 수준을 넘어 아예 번성을 누리고 있었다. 토벌 작전이 거의 먹혀들지 않았기에 치레아나 아르곤은 아예 토벌을 포기하고 해상 무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실정 이었다.
이런 때 다크가 치레아에 부임했으니 당연히 여태껏 남아 있던 오크들에 대한 토벌 작전이 감행되었다. 오크들 외에도 치레아 반란군 놈들이 과거 오크들이 하는 짓을 본받아 국경을 왔다 갔다 하면서 못된 짓을 꾸미고 있었기에 그 양쪽을 모두 방치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크는 이들의 토벌에 1개 사단과 제2친위 기사단을 몽땅 털어 넣었다. 단기전으로 끝장을 낼 생각이었기에 타이탄까지 동원된 이 강도 높은 토벌이 시작되자 오 크들은 슬쩍 인간들이 쳐들어오는 방향을 가늠해 보고는 아르곤으로 대피했다. 하지만 이번 토벌군은 과거와 달리 아르곤 국경 안까지 들어와서 오크들을 학살, 완 전히 씨를 말려 버렸다.
아르곤은 오크들이 말살당했다는 게 반가웠고, 또 상대가 자신들의 영토 안까지 들어와서 전쟁을 일으킨 것을 더욱 반겼다. 이로써 새롭게 일어서기 시작한 크라 레스 측과의 외교 협상에서 매우 우위에 설 수 있는 명분이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아르곤은 철저한 비밀 유지를 한 채 사신들을 파견했다. 물론 상대방의 평소 준비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사신 파견에 대한 문서는 사신이 국경을 통과할 때쯤 전달되었고, 다크는 이 난데없는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데 3일의 여유밖 에 없었다.
총독부에서 뒤늦게 붙여 준 경갑 기병 1백여 명의 호위를 받으며, 여섯 필의 말이 끄는 호화로운 마차와 아르곤의 경갑 호위 기병 50기(騎)가 도착했다. 말들도 지 쳐 있고 가볍게 무장한 무사들의 갑옷에 먼지가 뿌옇게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강행군을 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마차가 서자 그 안에서 약간 창백한 안색의 사제 복장을 한 인물 세 명이 내렸고, 갑옷을 입은 세 명의 무사들이 호위하며 뒤따랐다. 이 세 명의 무사들은 특이하게 도 검을 차고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대신 허리에는 금박을 입힌 신성 문자들이 빽빽이 아로새겨진 20센티미터 길이의 짧은 막대기가 하나씩 달려 있었다. 바 로 이것이 성기사(聖騎士)의 상징인 오라 소드(Aura Sword)였다.
신성한 샤이하드의 권능(權能)을 표시하는 이 검은 성기사가 잡아야만 그 신성한 위력을 낼 수 있으며, 검보다도 예리한 공격력과 웬만한 마법은 모두 막아 내는 강력한 방어력을 지니고 있었다. 성기사들은 오라 소드가 뿜어내는 그 영롱한 푸른 불꽃을 보며 자신의 깊은 신앙심을 자랑했고, 그 불꽃의 강도가 더욱 강해지도록 열성적으로 샤이하드를 섬겼다. 오라 소드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꽃의 강도는 바로 각자가 지닌 신성력의 척도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총독부 안으로 안내되어 방을 배정받았다. 총독부는 과거 치레아 왕궁이었기에 총독부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호화로웠다. 사제들을 방까지 안내해 준 후 무사는 공손하게 말했다.
“총독 전하께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식사 시간은 6시 정각입니다.”
“알겠소.”
“그럼 편히 쉬십시오.”
무사는 제법 궁중 예절이 몸에 익은 듯 매끄럽게 인사를 건넨 후 물러갔다. 사신 일행은 일단 땀과 먼지로 더렵혀진 몸을 깨끗하게 씻은 후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 고 다시 모였다.
“예상외로 대단한 인물인 모양입니다, 대신관님.”
그 말에 아직 20대 초반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아주 수려한 얼굴을 가진 젊은이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외모는 강력한 신성력에 의해 미화되어 있는 것으로, 지금 그의 나이는 62세였고 아르곤 안에서도 상당한 고위직에 있는 인물이었다.
“호오, 야스퍼 형제도 그렇게 생각했나? 직접 그 인물을 만나 보기 전에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겠더군. 아무리 아름다운 예술품이라 해도 적국의 왕비들을 그린 초상화들을 복도에 걸어 놓은 걸 보면 대단한 배짱이 있는 인물임은 확실한 것 같더군.”
“하지만 대신관님, 호위 무사들이나 여태껏 관찰해 본 이곳 주둔군의 경우 그렇게 군기가 강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특히 호위 무사들의 경우 잡담에다가, 밤에 경계 서는 군사들이 졸기까지…….”
그러자 오라 소드를 차고 있는 성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모네타 형제,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건 군(軍)을 잘 모르셔서 그런 생각을 하신 겁니다. 이리로 오는 도중에 저는 시민들을 살펴봤습니다. 그들은 약 간 불안한 듯한 표정이었지만 딱딱하게 굳어 있지는 않았고, 병사들을 봐도 겁에 질려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 병사들이 매우 잘 통제되어 이번 전쟁에서 민중 들에게 거의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이곳 왕궁도 아주 자잘한 것까지 피해 없이 멀쩡하다는 말은 군기가 대단히 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보에 의 하면 치레아 침공전에 동원된 용병사단은 두 개 정도입니다. 용병들이 그 정도로 통제된다면 정규군은 보나마나지요.”
“흐음, 골지 형제가 아주 좋은 것을 지적했군. 아마 그 지적대로일 거야. 예상외로 치레아 총독은 상당한 인물인 것 같은 생각이 드니까 말일세. 그리고 오는 길에 여러 시민들을 만나 얘기를 나눠 보니 세금도 많이 내렸고, 전쟁 전보다도 물가는 더욱 안정되었다고 하더군.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된다면 크라레스는 상당히 강력 한 국가로 자라게 될걸? 어쨌든 이렇게 성장 가능성이 큰 나라가 본국의 옆에 있다는 것은 별로 좋은 일이 아니지.”
치레아의 총독은 익히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전쟁의 신전에 등록된 그래듀에이트도 아니었고, 여태껏 크라레스의 권력의 핵심부에 있던 인물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하늘에서 쿵 하고 떨어진 존재였던 것이다.
스바시에 총독인 루빈스키 공작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그는 30여 년쯤 전 크라레스 국왕의 절친한 친구였고, 또 뛰어난 무사라고 알려져 있었다. 지금 갑자기 높은 자리에 등용된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했다. 하지만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의 경우, 전쟁이 치레아의 승리로 끝나자 갑자기 공작의 칭호가 주어지면 서 총독으로 등장한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각국의 첩자들이 그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위해 날뛰었지만 얻은 것은 거의 없었다. 있다면 치레아가 예상외로 잘 다스려지고 있다는 정도였을 뿐이다. 그렇기에 이번 아르곤 사신단이 베일에 싸인 두 총독을 직접 만나 보고 그들에 대한 평가를 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했다. 사신단의 핵심 인물들은 약속된 저녁 식사 시간이 될 때까지 남은 시간을 의논에 의논을 거듭하면서 새로운 인물에 대해 토론했다. 그러다 보니 대략적으로 이런 인물일 것이다’라는 가상적인 인물상까지 만들어 버렸고, 그와 식사를 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생각이 대충은 맞았다는 것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웃기지도 않은 골드 드래곤의 문장을 가슴에 단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은 대략 50세는 되어 보였다. 이제 서서히 탈색되기 시작하는 금발 아래로 드러난 넓은 이마 에 깊게 새겨진 굵은 주름살은 자신의 연륜을 자랑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의 행동에서 은연중에 나타나는 황궁 예절을 본다면 황궁과도 꽤나 관련이 있거나, 아니면 자라면서 황궁 예절을 일정 기간 교육받았음이 틀림없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약간 실례였지만, 사제들은 상대의 마나를 느낄 수 있는 신성 주문을 살짝 사용했 고 그 결과는 놀라웠다. 공작은 전쟁의 신전에 등록되지 않은 그래듀에이트였기 때문이다.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제가 치레아 총독인 다크 폰 그래지에트…, 에… 로니에르입니다. 이리로 앉으시지요.”
사신들은 무심결에 습관적으로 공작이 ‘그래지에트’라고 했다가 얼버무리는 것을 듣고 이 공작의 배경을 얼핏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지에트라면 지금 크라레스 황족의 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래지에트’라는 숨겨진 성을 통해서 그가 황족이고, 또 뭔가 황실의 스캔들에 의해 여태껏 역사의 전면으로 나올 수 없었던 것이라고 자연스레 짐작할 수 있었다.
크라레스의 황족인 그래지에트 가문은 과거 뛰어난 무가(武家)였고, 그 혈통이 계승되는 탓인지 탁월한 무인들을 많이 배출했다. 현재 크라레스의 황제인 ‘프랑크 폰 그래지에트’도 그래듀에이트일 정도니까 말이다. 그러니 만큼 스캔들을 통해 생산된 자식이라 해도 그 혈통이 계승되지 않을 리는 없었던 모양이다. 혈통이 계 승되지 않았다면 사생아가 될 리는 없을 테니까…….
“그래, 여행은 즐거우셨습니까? 하기는 그렇게 빨리 오셨으면 구경할 시간도 거의 없으셨겠군요.”
“폐하께서는 크라레스 군대가 국경을 침범한 것을 매우 언짢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폐하께서 저에게 그 사실을 따지고, 또 이제 새로이 국경을 접하게 된 만큼 몇 가지 사항도 조정하고, 이 모든 것을 빨리 처리할 것을 명하셨기에 저희들은 서둘러 올 수밖에 없었지요. 저도 갑작스레 분부를 받은 일이라……. 통고를 늦게 드려 서 죄송합니다.”
“허허허, 일을 하다 보면 그러실 수도 있지요. 모든 것을 윗사람들이 결정했는데, 그것을 행하는 아랫사람에게 죄가 있겠습니까? 그건 그렇고 자, 차린 것은 별로 없지만 많이 드십시오.”
사신들의 입장에서도 그날 저녁 식사는 꽤 만족스런 것이었다. 치레아가 바다에 접한 곳이다 보니 담백한 해산물 요리가 많았고, 그중 상당수는 아르곤식으로 요
리된 것들이었기에 그들은 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었다.
샤이하드의 경전에 의해 사제들은 곡물(穀物)로 만든 술은 금해야 했지만, 포도주는 유일하게 예외였기에 식사 중에 모두들 약간씩 포도주를 마셨고, 식사가 끝난 후에 간단한 안줏거리와 함께 브랜디를 마실 때쯤에는 분위기가 매우 부드러워져 있었다. 브랜디는 알콜 성분이 40퍼센트 정도로 매우 높지만, 이것도 포도주를 증 류한 것이었기에 넓은 의미에서 포도주에 포함시켰다.
“이번에 본국이 귀국의 영토를 침범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오크들이 워낙 영악해서 토벌을 하기만 하면 귀국 영토로 도망치니 그들을 격멸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으니까요.”
그 말에 대신관도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건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통보를 하여 사전에 양해를 구했어야지요. 갑자기 1개 사단급의 병력과 10여 대의 타이탄이 국경 지대를 넘어 왔으 니, 그 일대 주민들이 피난을 가고 난리가 났었으니까요. 통보를 해 줬다면 이쪽에서도 대비를 하고, 또 일부 병력을 파견하여 국경에서 그들을 격멸할 수도 있었을 게 아닙니까?”
물론 대신관의 말에는 약간 어폐가 있었다. 그전 치레아 왕국이 존재할 때에도 그런 걸 몰라서 토벌을 못 했겠는가?
오크는 보석이나 귀금속 따위, 또 각종 장신구를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위장이 튼튼하지 못하다. 즉, 오크에게는 식량 외에 다른 약탈품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크들이 산적질을 하면서 모든 것을 털어 갔던 이유는 일부 못된 상인 녀석들이 오크들이 강탈한 것을 식량과 바꿔 줬기 때문이었다. 이 상인들로 서는 이게 엄청난 이득이 남는 장사였기에 토벌에 대한 소문이나 기타 병력 이동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면 오크들에게 고자질을 했고, 오크들은 그것에 따라 행동했 다. 그러니 양쪽에서 협동해서 공격하는 것은 이론상 좋긴 하지만, 기밀유지는 두 배 이상 어려웠기에 결과적으로는 이론으로만 가능한 착상이었다.
하지만 일단 국경을 허락 없이 침범했고, 또 크라레스보다는 아르곤이 더 강대국이었기에 그걸 대놓고 따질 수 없었다. 그렇기에 대화는 이런 식으로 진행될 수밖 에 없었다.
“허허, 대신관님. 그건 정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위에서 통보된 작전이 원체 시일이 빡빡하다 보니 귀국에 통보하는 것을 깜빡한 것이지요. 이번 작전은 1개 사단 의 경장 보병과 제2친위 기사단을 전부 동원했습니다. 아마 오크 토벌전 중에서 최고로 많은 병력이 동원되었을 겁니다. 그러다 보니 준비할 것도 많았구요. 어쨌든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허허, 결과가 좋으니 잘된 것이지요. 그래 오크는 몇 마리나 잡으셨습니까?”
“예, 대략 1만 5천 마리 정도 잡았습니다. 크라레스 지구에서도 콜렌 기사단을 동원해서 위에서 아래로 훑었으니까 이제 산맥에 살아남은 오크는 없다고 보시면 되겠지요.”
“하하, 다행이군요. 이제 산길을 위협하던 놈들이 없어졌으니 산길을 통한 무역도 재개되지 않겠습니까?”
“예, 그렇지요.”
“하지만 교역이 증가된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에 따라 밀수출입(密輸出入)도 성행할 테니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예, 국경의 경비를 철저히 하면 문제없을 겁니다. 사제님, 그건 그렇고 브랜디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치레아에서 생산되는 브랜디는 매우 맛이 좋지요.”
로니에르 공작은 민감한 사안에 이르자 그다음에는 무슨 말이 나올 줄 대강 짐작하고는 살짝 대화를 딴 방향으로 돌렸다. 하지만 사제는 노골적으로 그걸 무시한 채 그 문제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예, 고맙습니다. 아주 맛이 좋군요. 에…, 국경의 경비만 철저히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지요. 국경에다가 아무리 병력을 많이 배치한다고 해도 그 모든 걸 단속 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그들을 따라 범죄자들이 밀입국할 가능성도 높습니다.”
“예.”
“그래서 하는 말인데, 지금 말토리오 산맥 말단에는 무역로 세 곳이 있지요. 이 세 곳을 제외한 모든 통로를 폐쇄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역로는 좀 더 통행이 편리 하게 포장을 해야 하구요. 본국에서는 그사이에 여섯 개의 마을을 건설하고 몇몇 교통의 요지에 요새를 건설한 후 산적들로부터 통행인들을 보호함과 동시에 밀무 역을 근절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귀국은 어떠신지?”
“그야 당연히…, 그렇게 해야겠지요. 그런데 사제님, 저는 이곳 치레아를 관리하기 위해 파견되었을 뿐, 국경 문제에 대한 권한은 없습니다. 그건 그렇고 요즘 해 상 통행로에는……..”
공작이 약간 더듬거리며 또다시 대화를 회피하려고 했지만 사제는 아주 집요했다. 여기서 승기를 잡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치레아 국경 문제에 치레아 총독에게 권한이 없다면 누구에게 있겠습니까? 공작 전하에게 그 정도의 권한이 있기에 본국의 국경을 침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거야…….”
“귀국이 하기 힘들다면 통로의 경비는 우리 쪽에서 해도 상관없습니다. 물론 도로를 포장하는 비용의 반은 귀국이 부담해야 하겠지요?”
로니에르 공작은 지금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사제를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보고 있었다. 이게 사제인지 상인인지, 아니면 고도의 협잡꾼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사실 이놈의 국경 문제에 대해서는 대화하지 않기를 빌고 있었다. 그는 엄청난 권한과 권력을 가진 ‘진짜’ 공작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쪽에서 주춤거 리는 걸 이용해 이제 아예 대놓고 국경의 노른자위를 빼먹으려 들다니……. 만약 자신이 진짜 공작이었다면 그 사제를 향해 욕이라도 한바탕 퍼부었을 것이다. 으 이그…….
“에…. 당연히 본국 국경 내의 도로는 본국이 치안을 책임져야 하겠지요. 어떻게 그런 힘든 일을 귀국에게만 맡길 수 있겠습니까? 허허허, 본국의 일을 걱정해 주 셔서 감사합니다만, 그에 대해서는 폐하께서도 신경을 쓰고 계십니다.”
국경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꽤 오랜 시간 토론이 오고 갔지만 사실상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대국 아르곤과의 국경선이 되는 산맥의 도로를 잘 포장해 둔다는 것은 크라레스로서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 도로가 상업용으로만 이용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
문이다. 도로 위로는 당연히 군대도 이동할 수 있었고, 그 속도는 비포장도로에 비해 월등히 빠를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대화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쪽은 아르곤이었다. 감히 약소국 따위가 자국의 영토를 침범해 들어왔다는 약점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쪽 다 표정은 온화하게 미소를 짓고, 말투 또한 부드러웠지만 양쪽의 입장은 달랐다. 한쪽은 완전히 칼만 안 든 강도였고, 한쪽은 강도에게 작은 것 하나라도 뺏기지 않으 려고 기를 쓰는 입장이었다.
한동안의 두뇌 싸움. 성격이 지극히 단순한 ‘진짜’ 다크였다면 아마 단 5분도 참지 못했을 위선과 거짓이 난무하는 대화는 드디어 끝이 났다.
사실 샤이하드의 경전에 거짓말을 하는 것은 엄금하고 있지만 사실을 숨기고 건너뛰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그렇기에 아르곤에서 파견된 사제들 은 절대 거짓말은 하지 않았지만, 교묘하게 현실을 숨기거나 또는 그 부분을 언급하지 않고 대화함으로써 상대를 기만하는, 아주 고차원적인 화술을 구사했다. 그 덕분에 표면상으로는 화기애애한 대화였지만 사신들이 숙소로 돌아가자 ‘가짜’ 다크 로니에르 공작 나으리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아침 일찍 모든 일을 맡겨 놓고 사라져 버린 ‘진짜’를 저주한 것을 탓할 수는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