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8권 6화 – 미란 국가 연합

미란 국가 연합

미란 국가 연합은 다섯 개의 왕국들이 모여 이루어진 국가다. 서쪽으로는 강대국 코린트 제국, 동쪽으로는 강대국 크루마 제국의 사이에 끼여 있는 다섯 개의 왕국들. 이들이 어느 한쪽, 또는 몇 개씩 양쪽의 강대국들에 흡수, 통합되지 않고 살아남은 이유는 그 두 강대국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크루마와 코린트가 그 오랜 시간 국경을 사이에 두고 있으면서 단 한 번도 충돌하지 않은 이유가 이 완충 지대 덕분이었다. 완 충 지대가 없었다면 아마도 오래전에 크라레스와 코린트처럼 대규모 전쟁이 터졌을 게 분명했다.

이 작은 다섯 개의 왕국들은 일단 강대국의 사이에 끼인 채 살아남아야 했고, 그들이 살아남는 길은 중립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로가 뭉치는 방법뿐이었다. 그 때문에 등장한 것이 바로 이 ‘국가 연합’이다. 미란 국가 연합은 다섯 개의 국가를 다섯 명의 왕들이 통치한다. 그리고 5년 주기로 국가 연합의 의장(長)을 선출하여 그가 국가 연합을 이끌어 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의장은 연임이 가능하기에 통상의 경우 한 번 의장으로 추대된 후 큰 과실이 없다면 종신토록 의장직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 관례였다.

다섯 명의 왕들 중 가장 능력이 뛰어난 왕이 의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나이가 많은 인물이 의장이 되는 이 독특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미란 국가연합의 의장이 가진 힘은 다른 왕들보다 조금 더 발언권이 강하다는 정도뿐이었다. 그렇기에 아직까지 별 말썽 없이 잘 유지되어 오고 있었다. 의장의 힘이 약하다는 것은 평상시에는 유리한 점이 많았지만 전시에는 그 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기에 크라레스가 멸망했을 때,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 30여 년쯤 전에 전시에는 모든 권력을 의장에게 집중시킨다는 법안을 통과시킨 바 있었다.

미란 국가 연합은 두 강대국 사이에 끼여 있어서 불리한 점도 많았지만 유리한 점은 더욱 많았다. 양대 대국의 사이에서 중개 무역만 해도 엄청난 부 를 축적할 수 있었다. 코린트의 경우 바다를 가지지 못한 내륙 국가였기에 모든 물자는 육로, 또는 운하를 통해 운송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미란 국가 연합의 5개국 토란, 가므, 쟈렌, 스므에, 알렌 왕국 중에서 현재 미란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은 가므 왕국의 국왕 지크프리트 데 가므 3세 였다. 가므 왕국의 수도는 마로니카라는 아름다운 호반 도시였다. 그곳에 단 한 번이라도 가 본 사람이라면 호수 옆에 세워져 있는 거대한 규모의 왕 궁을 아마 죽을 때까지 기억하게 되리라. 미란 국가 연합 자체가 무역을 통해서 모두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기에 각각의 왕궁들의 규모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장엄하고 호화찬란했기 때문이다.

성내의 수많은 문들에는 최소한 두 명 이상의 근위병들이 붉은색과 금은색의 수실을 사용한 호화로운 복장으로 창을 든 채 경비를 서고 있었고, 복 도를 쭉 따라가면 좌우 양쪽에 아름다운 그림이나 조각물들이 빈틈없이 배치되어 자신들의 부를 자랑하는 듯했다. 수많은 방들과 복도가 얽히고설켜 서 처음 와 보는 사람이라면 안내자 없이는 길 잃어버리기 십상인 곳이었다. 또한 5개국에서 엄선한 기사들로 이루어진 의장 직속의 라이오네 기사 단이 똬리를 틀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각국에서 네 명씩, 제1기사를 제외한 랭킹 2위부터 5위까지의 기사들이 모인 집합체가 라이오네 기사단이었다. 겨우 20대만이 생산된 근위 타이탄 라이온을 지급받게 되는 이들 라이오네 기사단은 사실상 근위 기사단이나 마찬가지였고, 대우 또한 그러했다. 대개의 국가들의 경우 타이탄을 전쟁 도구 정도로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지만 이곳 미란 국가 연합은 조금 달랐다. 50년 전에 한참 이름을 떨치던 매우 고명한 조각가였던 리카르도 파바네 가 외장 장갑을 설계했다고 전해지는 라이온은 전쟁에 사용하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외형을 치장하는 데 금과 은, 그리고 보석까지 사용된 라이온은 거의 예술품에 가까웠다.

미란 국가 연합의 의장을 만나러 가게 되면 거대한 접견실 좌우에 그날 비번인 여덟 명의 기사들이 놔두고 간 여덟 대의 라이온을 볼 수 있다. 이게 자신들이 돈이 많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라고 욕하는 인물들도 있었고, 접견실 좌우에 그 거대한 쇳덩어리를 세워 둬서 상대를 심리적으로 압박하 는 유치한 술수라고 욕하는 인물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외형과 강력한 존재감에 자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대부 분이 미란 국가 연합의 국민들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지름 3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원형 탁자를 사이에 두고 다섯 명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원형 탁자 위에는 토란, 가므, 쟈렌, 스므에, 알렌 왕국을 합해 놓은 길쭉한 형태의 미란 국가 연합이 상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종이 위에 그린 것이 아니라 탁자에 파놓은 형태였기에 그렇게 정밀하지 는 못했다. 이 원탁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다섯 명이 현재 미란 국가 연합을 이끌어 가는 왕들이었다. 그들은 뭔가 큰 일이 벌어졌을 때는 이렇듯 서로가 같은 위치임을 상징하는 원탁에 둘러앉아 회의를 벌이곤 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습니다, 의장. 이제 단안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말에 의장이라 불린 사내, 즉 가므 왕국의 국왕 지그프리트 데 가므 3세는 주위를 천천히 돌아본 후 힘주어 말했다.

“본 연합은 여태껏 모든 결정을 다수결로써 집행해 왔소. 그렇기에 지금 본 연합이 처한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겠군요. 그렇지 않소?” “그렇습니다.”

“그럼, 자네가 정리를 좀 해 주겠나? 다수결을 하기 쉽도록.”

“예. 첫째, 코린트와의 동맹입니다. 그리고 둘째 코린트를 막기 위해 크루마와 동맹을 맺는 것이죠. 셋째가 있다면 좋겠지만.

어느 정도 간단명료하게 정리가 되자 가므 3세는 입을 열었다.

“좋아. 자네들도 알다시피 첫째 안건을 선택한다면 크루마는 멸망할 수밖에 없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본 연합은 거대한 코린트 제국의 내부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지. 아마도 몇 년 지나지도 않아 본 연합은 코린트에 흡수될 것이네.”

“코린트가 동맹국을 집어삼킬 수 있을까요? 그리고 동맹을 맺을 때 어떤 일이 있더라도 본 연합을 침략하지 않겠다는 약정서를 받아 낸다면 어떻겠 습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국가 간의 일에서 약정서 따위는 휴지 조각에 불과해. 약정서를 지키도록 위협할 만한 힘이 본 연합에 있다면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그건 무의미하지. 얼마 전에 코린트 연방에 소속된 작은 왕국, 트루비아가 멸망하는 것을 보고 자네들은 느낀 점이 없었나? 지금 현 시점에서 코린트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나라는 하나도 없어.”

“그렇다고 크루마와 손을 잡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코린트는 곧장 본 연합에 대군을 투입해 올 것입니다.”

“크루마의 황제에게 그것을 타진 중이야. 만약 서로 동맹을 맺게 된다면 어느 정도의 군사력을 지원해 줄 수 있는지 말일세. 본 연합의 군사력은 겨 우 10개 보병사단, 4개 기병 여단이다. 거기에 4개 용병 사단까지 합해 봐야 코린트와 상대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도 해 볼 수 없는 수준이지. 하지 만 만약 크루마 쪽에서 그에 준하는 병력을 파견해 준다면 일단 전쟁 억지는 될 수 있을 듯도 해.”

“만약 전쟁 억지에 실패한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된다면 본 연합은 두 강대국의 전쟁터가 될 겁니다. 아무리 본 연합이 정격 출력 이상의 타이 탄 123대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기사단의 질이나 수에서 도저히………….”

“그렇다고 크루마가 멸망하도록 놔둘 수는 없지 않겠나? 코린트의 손을 들어 준다고 하더라도 코린트는 본 연합에 동맹군 파병을 요청해 올 테지.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걸 거절할 입장은 못 돼. 크루마가 무너진 후에 그걸 빌미로 시비를 걸어 올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동맹군 파병이 현실로 들어난다면 크루마가 선제공격을 가해 올 수도 있어.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어쨌든 이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비껴갈 수 있는 길은 없다네. 알겠나?”

쟈렌의 왕이 의장의 말에 한숨을 쉬며 푸념을 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이군요. 어떻게 해서든지 두 국가의 전쟁을 막아야 합니다. 알카사스에 중재를 요청해 보시지 그러십니까?” “그것도 해 봤다네. 하지만 알카사스는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대량의 군수물자를 팔아먹을 궁리만 하고 있어. 30년 전의 크로나사 대전 이후 그렇 게 대규모의 전쟁이 없었다는 게 그들로서도 문제겠지.”

“하지만 본 연합의 경우 알카사스에서 타이탄을 전량 들여왔지 않습니까? 로메로, 노리에, 타이거, 라이온. 모두 다 알카사스에 의뢰해서 제작 또는 구입한 것들인데요. 그것들을 장만한다고 본 연합에서 알카사스에 준 금(Gold)은 막대한 양입니다.”

“어쩔 수 없지. 모두들 자국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일세. 오늘 저녁에 크루마에서 전권대사(全權大使)가 오기로 되어 있네. 자네들도 동석 할 텐가?”

“일단 그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제 서서히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입니다.”

밝은 적색이 주를 이루는 비단 제복에 금색 수실을 이용해 멋을 더한 화려한 복장. 거기에다가 금과 은, 보석이 수놓아져 있는 보검까지 허리에 찬 것이 라이오네 기사단의 정식 복장이었다. 만약 이런 복장을 하고 시내를 돌아다닌다면 모든 이들의 이목이 집중될 듯도 하겠지만, 왕궁에서는 그렇 지 못했다. 왕궁의 문을 지키는 경비 무사들조차도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풍요로운 미란 국가 연합이었기 때문이다.

왕궁의 아침은 7시에 시작된다. 7시에 경비 무사들의 교대식이 벌어지고 있을 때 궁녀들은 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고, 정확히 8시가 되면 각 식당에 서 무사들이 모여 식사를 하게 된다. 물론 왕족들이나 지체가 높은 양반들은 침실에서 식사를 하게 되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때 식사가 각 방에 배달 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또 그날 대기했던 2개 조의 라이오네 기사단 기사들이 국왕의 접견실 좌우에 네 대씩의 타이탄들을 정렬시키는 것도 7 시 정도다. 타이탄을 반납한 기사들은 이틀간 자유 시간을 얻게 되고 자유 시간을 즐긴 기사들은 앞으로 사흘간의 근무를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다. 5 일 중에 3일을 일하게 되는 이 순번이 언제 정해졌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모두들 예전부터 그래왔다는 말로 넘어가는 걸 보면 매우 오래된 것임에 는 틀림없다.

지미 크로스비는 성의 한쪽 구석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근무의 마지막 날은 야간 근무를 하는 것이 관례였기에 밤 을 새웠다. 하지만 그는 오늘 아침 부족한 잠을 만회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는 서둘러서 기사단 제복을 한곳에 벗어 놓은 후 옷장에서 새 옷을 꺼내 입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옷을 벗어서 정해진 곳에 놔두면 하녀가 와서 세탁을 한 후 다림질까지 깨끗하게 해서 옷장 안에 넣어 두게 된다. 그는 시민들이 보통 즐겨 입는 옷을 입은 후 짧은 단검을 옷 속에 감춘 후 서둘러서 밖으로 나갔다.

이곳 미란 국가연합은 코린트와 크루마라는 양 대국의 사이에 위치한 만큼, 많은 양의 화물 외에도 수많은 여행자들이 거쳐 가는 교통의 요충지요, 관광지였다. 오래전부터 미란 국가 연합의 국왕들은 여행객들이 뿌리고 지나가는 돈의 액수가 상당하다는 것에 착안하여 일찍부터 수많은 관광 도시 들을 개발해 왔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요양을 한다든지 관광을 위해 이곳을 들르는 인구가 증가 추세에 있었다.

미란 국가 연합에서는 관광지의 평화로움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될 수 있다면 무장을 한 채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을 금지시키고 있었다. 또 엄청난 돈 덕분에 막대한 군사력까지 보유하고 있으므로 몬스터라든지 산도적 따위는 애당초 말살시켜 버려 매우 평화로웠다. 간혹 여행객들이 자신들의 무 장 때문에 국경경비대원들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우호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만약 자신의 검 따위를 모포 같은 것 으로 돌돌 말아서 등에 지고 다니지 않는다면 아예 국경 통과가 되지 않는다는 데야 그들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지미 크로스비는 서둘러 말을 몰아 목적지로 달려갔다. 그가 달려가는 길은 대부분의 주요 도로가 그렇듯 시멘트와 돌을 이용해 잘 포장되어 있었 다. 한 시간 반쯤 달려 목적지 부근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일부러 말에서 내려 포장되지 않은 흙길로 말을 걷게 하면서 조용히 끌고 갔다.

“빠진 것은 없지?”

“예, 아씨. 그 질문 벌써 세 번째라구요. 가만히 좀 기다리십시오.”

그늘진 곳에 세워져 있는 작지만 화려하게 치장된 마차에 앉아서 기다리기가 지루했던지 예쁘게 차려입은 소녀가 문을 열고 아래로 내려섰다. 그러 자 재빨리 반대편 문이 열리며 늙은 하녀가 우산을 들고 달려 나왔다.

“모자를 쓰고 나가셔야죠. 이런 더위에 햇볕을 쪼이면 주근깨가 생긴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습니까? 그리고 이 장갑도 끼세요.”

늙은 하녀가 억지로 모자를 씌우고 장갑을 끼우자 그녀는 그걸 벗으려고 들며 말했다.

“안 그래도 더운데 답답해.”

하녀는 그녀를 제지하면서 엄격하게 말했다.

“답답해도 숙녀가 되시려면 참으셔야죠. 마님도 제 속을 어지간히 썩이시더니만…………. 일단 결혼하시고 나면 안 하셔도 되니까, 제발 결혼 전까지는 하시라니까요.”

“하지만…….”

그녀의 말은 무시무시한 하녀의 눈초리에 의해 쑥 들어가고 말았다.

“알았어, 알았어. 할게. 하면 될 거 아냐.”

소녀가 투덜거리면서 모자와 장갑을 제대로 끼자 하녀는 소녀가 보지 못하도록 살며시 미소 지으면서 우산을 건넸다.

“우산도 쓰세요.”

“알았어.”

“미리 일러둘 말은 아무리 크로스비 도련님이 좋더라도 12시까지는 집으로 돌아가셔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도련님을 점심 식사에 초대하시든 그렇 지 않든 그건 아씨 마음대로 하실 수 있지만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점심은 좀 늦게 먹어도 상관없잖아?”

“안 됩니다.”

“응, 그런데 좀 늦는 것 같네?”

“말 돌리지 마세요. 분명히 아셨어요?”

“응. 알았다니까.”

짜증스런, 그러면서도 초조한 목소리로 대답하면서도 소녀는 길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쯤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릴 때도 되었는데 하면서. 이때 그녀들의 등 뒤쪽에서 살며시 접근하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우선 뒤쪽에 있는 하녀의 입을 막은 후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알렸다. 하녀 는 엄청나게 놀라기는 했지만 접근 중인 이방인에 대해 소녀에게 알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크로스비라는 악동이 기어 다닐 때부터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장난기를 익히 알고 있었고, 또 저 정도쯤은 젊은이들 간에 주고받을 수 있는 유희에 포함시켜 주는 아량 또한 있었기 때문이다.

“우와!”

“끼아아악!”

엄청 놀랐던 소녀는 괴성을 질렀던 상대가 누구라는 것을 알자, 주먹으로 상대의 가슴을 가볍게 때리며 칭얼거렸다.

“아악! 미워 죽겠어. 왜 이제 오는 거예요?”

“교대식 끝나자마자 쉬지 않고 달려오는 길이야. 많이 기다렸어?”

“응.”

“오랜만에 산책이나 하러 갈까? 요즘 꽃들이 많이 피어서 경치가 좋거든.”

“예.”

크로스비는 소녀의 보폭을 생각하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그녀 또한 그의 옆에서 사이좋게 걸어가며 정답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숙녀와 함께 걸을 때는 상대와 팔짱을 낀다든지, 손을 잡는 것조차도 할 수 없었다.

지미 크로스비는 소녀와 즐거운 한때를 보낸 후 헤어질 때가 다 되어서야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저어…, 내일 약속은 지킬 수 없겠어. 내일부터 한동안 비상 대기에 들어가야 하기에….”

소녀는 지미와 함께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런 말을 듣고 언뜻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오빠하고 오빠 친구들이 얘기하는 것을 언뜻 듣기는 했지만, 혹시 전쟁이 벌어지는 거예요?”

“아니! 아니, 저어 아직은 확실한 것을 알 수 없어. 일단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내일부터 비상 경계령이 내려진다는 사실뿐이야.”

“그럼 한동안 만나지 못하겠네요.”

“응.”

“혹시 저하고 다음에 만나지 못하고 전쟁터에 가실 수도 있다는 건가요?”

소녀는 아직까지도 전쟁을 벌일 상대국이 어느 나라인지 알 수 없었다. 예전에도 몇 번인가 미란 국가 연합의 기사단이 전쟁 중인 동맹국을 돕기 위

해 몇 명의 기사들을 파견한 적이 있었다. 소녀는 근래 1백 년이 넘도록 평화를 지켜 온 미란 국가 연합이 전쟁터가 될 수 있다는 것까지는 생각도 하 지 못했다. 그만큼 미란 국가 연합은 평화롭고 풍요로운 국가였다. 그녀는 단지 지미가 어쩌면 동맹국에 파견되어 전쟁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될지도 몰라.”

“그럼・・・, 그럼 이걸 저 대신이라고 생각하고 가져가세요. 몸조심 하셔야 돼요.”

소녀는 자신의 목에 감겨 있던 스카프를 풀어 남자에게 건넸다. 지미는 소녀의 스카프를 소중하게 받아서 품속에 집어넣은 후 다정한 어조로 말했 다.

“알았어. 그럼 이제 가 볼게. 잘 있어.”

“예, 안녕히…………

지미 크로스비는 약혼녀의 집에서 관례상 한계점에 가까운 시간에 서둘러서 나왔다. 원래 숙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는 해가 지기 전에 나와야 했다. 하지만 소녀도, 지미도 이게 서로 간의 마지막 만남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