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9권 10화 – 후작을 호위하는 공작

후작을 호위하는 공작

크루마 제국과 코린트 제국 사이에는 지루한 소모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양쪽 다 간간이 타이탄이 모습을 드러내긴 했지만, 대규모 격전으로 연결되지는 않고 있 었다. 대부분의 전투가 쟉센 평원을 평정하려는 크루마군과 그 저항군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단순한 소모전이 주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코린트 제국의 경우 키에리가 생존해 있을 때의 군부(軍部)는 매우 강력한 힘을 자랑했었다. 키에리를 기점으로 까뮤, 리사, 그라세리안이 뭉쳐 코린트의 모든 것 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그들이 권력을 잡은 후부터 코린트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그라세리안의 능력으로 타국에 비해 뒤처져 있던 마법을 부흥시 켰고, 막강한 타이탄들을 대량 생산했다. 그리고 그 힘을 밑바탕으로 크라레스 제국 영토의 대부분을 빼앗았다. 그리하여 코린트를 세계 최강의 대국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집권 기간은 너무 길었다. 모두들 90세에 달하는 나이에 이르도록 50여 년에 가깝게 정권을 쥐고 있었으니 당연히 그에 불만을 품은 인물들이 나타 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른 제국들처럼 이들이 늙어서 은퇴할 가능성이라도 보였다면 그들도 이렇듯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로 서는 이번 기회를 이용하지 못한다면 자신들이 살아서 정권을 잡아 볼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

그라세리안이 행방불명되었고, 리사는 전사했으며, 키에리는 크루마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중상을 입었다. 최고 권력자들의 대부분이 갑자기 사라졌기에 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서 황제를 설득하여 키에리를 실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키에리의 경우 아들이 셋이나 되었고, 그들은 각각 뛰어난 실력에다가 키에리라는 배경에 힘입어 매우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첫째는 발렌시아드 기사단장, 둘째는 제1근위대 기사, 셋째는 제3근위대장.

키에리를 처형한다면 그 아들들까지 모두 다 없애 버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사실상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타국과 전쟁 중이었기 때 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마지막 남은 실력자 까뮤와 협상을 하기에 이른다. 전사로 발표하기로 하고 자살하는 것으로, 그 제의는 받아들여졌고 키에리는 권력의 전 면(面)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처음부터 승리를 자신하며 전쟁을 주장해 왔던 군부는 패전 덕분에 입지가 약화되었고, 현 황제의 먼 친척뻘이 되는 그로체스 공작이 권력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 다. 그가 자신이 쥐게 된 권력을 확고하게 다지기 위해 제일 먼저 행한 일은 크루마 제국과의 휴전이었다. 만약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승리를 거두게 되거나 또는 패 전을 하게 된다면 좋을 게 없었다. 특히 승리를 거두면 군부의 입지는 다시 강화될 것이 확실했기에 그것만은 막을 필요가 있었다.

“휴전…이라고?”

아연한 표정으로 되묻는 까뮤에게 깔끔한 복장의 젊은 무인은 다소곳이 답했다. 그 무인의 복장은 매우 화려했는데 오른쪽 가슴 윗부분에 푸른 늑대의 문장이 붙 어 있었다.

“예.”

로체스터는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허허…, 크루마 따위에게 땅덩어리를 뺏긴 채 휴전을 하려 한단 말이지. 이건 폐하의 뜻이신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키에리가 들으면 땅을 치겠군. 로젠, 너는 수도에 있었으면서도 그걸 막을 수 없었느냐?”

로젠은 분하다는 듯 답했다.

“불가능했습니다. 아저씨도 잘 아시겠지만 그로체스는 폐하의 인척(姻戚).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크라레스 기사단의 움직임을 좇느라 정 신이 없는 상태였구요. 그 녀석의 움직임을 알았을 때는 이미 칙명이 내려진 후였습니다.”

“허허헛, 기가 차서 웃음밖에 안 나오는군. 그래, 휴전의 조건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길, 여기서 조금 더 밀어붙이면 크루마를 자신들의 영토 안으로 몰아넣고 전쟁을 끝낼 수 있어. 지금 녀석들은 후방의 보급로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야. 그런데, 그런데…….”

로젠은 분해서 말도 잘 잇지 못하는 로체스터를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아마 그로체스 공작도 그걸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기에 휴전을 서두르고 있는 것이겠죠. 자신의 권력이 커지기 위해서는 먼저 폐하께 신뢰를 더욱 받아 내야 하니까요. 그 방법 중에 하나로 선택한 것이 휴전일 뿐입니다. 그런 후 나중에 자신이 사령관이 되든지 해서 쟉센 평원을 되찾는다면 영웅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계획 이겠죠.”

“정말 치졸해서 말이 안 나오는군. 언제 떠날 거냐?”

“아마도 내일 떠날 것입니다. 단지 저는 호위를 위해 따라왔을 뿐이니까요.”

“흐음, 도중에 암살해 버릴 수는 없을까? 그렇게 해서 그 책임을 크루마에 뒤집어씌운다면… 힘들구나. 만약 네가 호위로 따라오지만 않았어도 호위를 포함해 서 모두 다 죽여 버렸을 텐데.”

로젠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그 녀석은 그걸 잘 알고 저를 보냈을 겁니다. 아버님이 전사하셨기에 이번에 저는 대공(大公)의 작위와 발렌시아드 공국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런 제가 고작 후작

을 호위해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로젠은 멀리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델리피어 후작의 낯짝만 봐도 두 토막을 내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명을 내리신 이상 저는 따라야만 합니다.”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기사인 이상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이지.”

로젠은 시선을 다시 로체스터 쪽으로 돌려, 똑바로 그를 쳐다보며 나지막하지만 힘 있게 말했다.

“아저씨께서 제 목숨을 거둬 주실 수는 없을까요? 델리피어 후작 녀석과 함께……..

로체스터 공작은 그의 눈을 자세히 바라본 후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듯 중얼거렸다.

“그렇게는 할 수 없다. 먼 길 잘 다녀오거라. 겨우 그따위 일로 친구의 아들을 죽일 수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