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9권 7화 – 키에리 공작의 운명

키에리 공작의 운명

황혼이 저물어가는 붉은 들판. 아무리 붉은 황혼빛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들판은 너무나도 붉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혼이 저무는 들판에는 수백 구가 넘는 시체들 이 말의 시체와 함께 널려 있었고, 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피는 그야말로 작은 시내를 이룰 정도였다. 그 붉은 핏물을 받아들였음인지 대지의 색깔도 붉게 붉게 물 들어 있었다.

“뒤처리는 끝났나?”

까미유의 말에 옆에 서 있던 마법사는 멀찌감치 둘러본 후 답했다.

“옛, 백작 각하. 대충 끝난 것 같습니다.”

상대의 말에 까미유는 싫지 않은 듯 쑥스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아, 각하라는 존칭은 나중에 후작이 된 후에나 붙여 주게.”

“죄송합니다, 백작님.”

“죄송할 필요까지야 있겠나? 하하하”

까미유는 이제 더 이상 타이탄이라고 부를 수 없는 거대한 고철 덩어리를 찬찬히 바라봤다. 몇십 분 전에 자신의 적기사에게 파괴된 크루마의 타이탄. 그것은 겉에 미스릴을 입히지 않았기에, 울퉁불퉁한 대마법 주문이 드러나 있었다. 바로 크루마의 걸작 중의 하나인 골고디아였다.

“아직까지도 최신형들이 배치되지 않고 있는 걸 보면 크루마 녀석들은 우리들이란 존재가 별로 성가시지도 않은 모양이지?”

“이제 슬슬 놈들도 대비를 하기 시작했을 겁니다. 벌써 곳곳에서 파괴한 타이탄이 열대를 넘어서고 있으니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빨리 모두 모이라고 해.”

“옛.”

마법사가 공증으로 신호탄을 쏘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자그마한 불꽃이 하늘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 흩어졌던 기사들이 돌아왔다. 까 미유는 모여든 자신의 부하들을 차근차근 훑어봤다. 여섯 명의 기사들과 마법사 한 명이 자신이 거느린 소규모 부대의 전부였다. 물론 여기서 세 명은 그래듀에이트 였고, 마법사는 5사이클급에 달하는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 정도만 있어도 상대방 진영을 치고 빠지는 데 충분한 병력이었다.

다행히 아무도 부상당한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이런 소규모 부대에서는 한 명이 아쉬운 것이다. 이 근처의 반군 토벌을 위해 적들의 1개 기병연대(1천 명)가 파 견되었다는 정보를 듣고 까미유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이곳에서 매복했다가 기습을 가했다. 반수 이상의 적 기병들이 도주했지만 상대방 타이탄을 파괴한 만큼 소 기의 목적은 달성한 상태였다. 까미유는 다시 한 번 쓰러져 있는 골고디아를 아쉬운 듯한 눈길로 바라봤다. 저걸 가져가면 꽤나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지만, 지금 고 철 타이탄을 본국으로 옮길 시간이 없었다. 이제 이곳을 떠나면 또 다른 임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까미유는 모여 있는 부하들을 향해 만족스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두들 무사한 것 같군. 자 빨리 여기에서 벗어나자.”

“예, 대장(長)!”

까미유의 말에 마법사는 이미 그려 놨던 마법진 옆으로 다가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 마법진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이미 그려 놨던 것이었다. 혹시나 적의 병력이 너무 강하다면 대충 싸우다가 튀기 위해서였다. 마법진을 그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인지 마법사는 짧은 시간 내에 공간 이동 마법을 완성했고 곧이어 동료들 을 마법진 위로 올라오게 한 후 이동을 시작했다.

잠시 뿌연 빛이 번쩍인 후 까미유 일행은 목표지에 도착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방금 전 전투를 벌였던 곳에서 3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법진 위였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마법사는 통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본진이 나왔습니다.”

“안녕하셨습니까? 백작님.”

“그래, 자네도 잘 있었나? 뭐 별다른 사항은 없나?”

“예, 쟈코니아 이동 좌표 3045345, 1012456 지점에 적의 연대 병력의 통과가 예상되고 있습니다. 그곳의 적을 격멸한 후 흔적을 지우고 본대와 합류하라는 후작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상대 마법사의 말이 까미유에게 기대 어린 표정이 떠오르게 만들었다.

“이제 드디어 작전 개시인가?”

“예, 백작님. 여기저기 들쑤셔 놓은 덕분에 돌프렌 요새의 방비는 상당히 약화된 실정입니다. 내일 저녁, 작전이 실행됩니다.”

“알겠다.”

“그럼, 무운을 빕니다.”

“참, 발렌시아드 공작 전하께선 어떠시냐?”

돌연한 까미유의 질문에 마법사는 당황스런 표정을 지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답했다.

“예? 예…, 저…, 어젯밤 서거(逝去)하셨습니다.”

마법사의 말에 마법진 주위에 둘러서 있던 모든 사람들이 경악했다.

“뭣이? 그게 정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시신은?”

“일단 전쟁이 끝난 후까지 가매장(假埋葬)해 뒀다가 상태가 어느 정도 안정된 후에 코린티아시로 옮기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알겠다.”

까미유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곧장 마법사에게 말했다.

“본진으로 돌아가자.”

“예? 하지만, 임무는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지금 발렌시아드 대공 전하께서 서거하셨다는데 그따위 거나하게 생겼어?”

“하지만…….”

“닥치고 빨리 이동용 마법진이나 만들어.”

까미유의 역정 어린 말에 마법사는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예, 백작님.”

느닷없이 나타난 까미유를 보고 제임스는 그가 급히 나타날 줄 이미 짐작이나 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앉게.”

의자를 권하며 제임스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여러 개의 잔들 중 하나를 꺼내어 브랜디를 한 잔 가득 부었다. 물론 자신의 앞에는 반쯤 마시다 남은 잔이 하나 놓여 있었다. 까미유는 미소 짓는 제임스의 표정과 잔에 가득 부어져 있는 짙은 호박색 액체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의자에 앉기가 무섭게 질문을 시작했다.

“언제 돌아가셨나?”

“아마도 새벽 두 시 정도…….”

“그럼, 자네는 거기 없었나?”

“아니, 옆에서 도와 드렸지. 오늘 아침에 있었던 장례식도 주관했었는걸.”

제임스의 대답이 상당히 비비 꼬인 것이 특이했기에 까미유는 다시금 물었다.

“도와 드려? 뭘?”

“임종을.”

그 말에 충격을 받은 까미유는 더듬거리며 외쳤다.

“설마…, 자살이란 말인가? 왜?”

멍청한 표정을 짓는 까미유를 바라보며 제임스는 히죽이 미소 지었다. 그러다가 제임스는 슬쩍 일어서는 까미유의 옆에 앉은 후 귓속말로 속삭였다.

“살아 계셔.”

“뭐?”

경악한 듯 외치는 까미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제임스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쉿! 누가 듣는다구. 살아 계시지만 대외적으로는 돌아가신 거야.”

“그렇다면 적들을 속이기 위해서?”

제임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속삭였다.

“아니, 아군들을 속이기 위해서지. 멍청한 황제 폐하께서 칙명을 내리셨어. 아버지에게 패전의 책임을 묻고자 하니 수도로 최대한 빨리 귀환하라는 것이었네. 물 론 벌이 뭔지는 짐작하겠지?”

“참수형(斬首刑)인가?”

“당연히. 로체스터 공작 전하께서 아버지의 구명 운동을 위해 수도로 달려가셨지만 실패하셨어. 내 목숨을 살리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고 하시더군.”

“그렇다면 그로체스 공작 그 자식이!”

“제발 목소리 좀 죽여.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이제야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대충 눈치 챈 까미유를 향해 제임스는 핀잔을 준 후 다시 나지막한 어조로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그 녀석 말고 또 누가 있겠나? 너구리같은 밥맛 떨어지는 녀석이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정권을 잡아 보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는 거겠지.”

“그래서? 대공 전하께서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따르셨다는 거야? 적이 얼마나 강했었는지는 자네도 잘 알잖아. 그리고 로체스터 전하도. 상대방의 전력으로 미뤄봤을 때 주력 부대가 살아서 후퇴한 것만도 아레스(Ares : 전쟁의 신)께서 도운 것이었어.”

“누가 그걸 모르나? 하지만 칙명이 내려왔어. 일단 폐하께서 말씀하신 이상 그것이 아무리 잘못된 것이라고 해도 우리들이 기사인 이상 지켜져야 해. 그 때문에 아 버지께서 수도로 귀환하시겠다는 걸 만류한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자네는 아나? 로체스터 전하께서 만류하신 덕분에 떠나실 결심을 하신 거야.”

까미유는 주위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방 주위를 다시 한 번 빙 둘러본 후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렇다면 시체는? 잘못 처리하면 들킬 수도 있어.”

“걱정하지 마. 아버지께서는 어젯밤 자결하신 것으로 했어.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하신 것으로 되었지. 영예로운 전사자로 처리되었기에 나 한테까지 화가 미치지 않은 거야. 로체스터 전하께서 힘을 쓰신 덕분이었지만……. 그런 분의 시체를 확인하겠다고 여기까지 날아올 정도로 간 큰 놈은 없어. 그리 고 죄인도 아니고 영예로운 전사자의 시체를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하지만 장례식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멋지게 할 필요가 있었거든. 그래서 밖에 나가서 아 버지하고 체형이 비슷한 녀석을 하나 죽였지. 마법으로 얼굴 모양을 약간 변형한 후 장례식에 써먹었기에 부하들도 눈치 채지는 못했어. 나중에 몇 달 정도 지난 후 이장(葬)하기 위해 파내면 다 썩어서 알아볼 수 없을 테니까 뭐 뒤탈도 없을 거야.”

“그렇다면 그 마법사 녀석의 입을 막아 두는 것이 좋겠군.”

까미유가 살기 띤 어조로 나지막이 말하자 제임스는 미소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후후…, 걱정 마. 아버지와 함께 갔으니까 말이야. 아직도 치료 마법을 좀 더 받으셔야 하니 잘되었지 뭐.”

“누군데?”

“누구기는…, 죠드지. 원래 처음 아버지의 상처를 치료한 사람은 메니테스였는데, 아버지로서는 죠드 쪽이 더 좋았던 모양인지 의식이 깨신 후에는 죠드로 바꾸라 고 지시하셨지. 물론 메니테스는 아버님이 자살하신 것으로 알고 있어. 그러니까 별 문제는 없을 거야.”

“호위 기사는?”

“아버지께서 거절하셨어. 죄인에게 무슨 호위가 필요하겠느냐고……. 기사의 맹세를 저버린 자신은 더 이상 기사가 아니라고 하셨지. 기사로서 자격도 없는 자신 이 호위를 받는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라고 하시면서 떠나셨지.”

“제기랄! 적들이 코린트를 집어삼키려고 설치는 이때, 권력 투쟁이나 하고 있다니! 멍청한 자식들!”

열 받아서 외치는 까미유를 바라보며 술잔을 들고 쭉 들이켠 제임스는 또다시 한 잔 더 따르면서 말했다. “누가 아니래나? 자네도 술이나 한잔하게. 나도 지금 기분이 더럽구먼. 그런 의미에서 한 잔 더 해야겠어.” “그래, 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위대한 무인을 위해서 건배.”

까미유가 술잔을 높이 들고 외치자 제임스도 그것에 찬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자네 말 한번 멋지게 하는군. 그래, 건배!”

그날 밤 늦게까지 둘의 술자리는 계속되었다. 잘못되었다는 것이 뻔한지 알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기사인 이상 기사의 맹세(Oath of the Knight)’를 저버릴 수 는 없었다. 현실을 탈피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그들을 더욱 과음하도록 만들었다.

“큰일 났습니다.”

다음 날 점심때쯤 마법사가 뛰어 들어왔을 때 제임스와 까미유는 아직도 테이블 위에서 엎어져 자고 있었다. 그들의 주위에 굴러다니고 있는 수많은 빈 병들이 그 들이 마신 술의 양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제임스는 아직도 술에서 덜 깬 얼굴을 천천히 들었다. 부스스한 그의 긴 머리카락이 시선을 가렸기에 그는 거친 동작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젖혔다.

“무슨 일이냐?”

아직도 약간 꼬부라진 음성으로 말하는 제임스를 향해 딱하다는 시선을 보내며 마법사는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레토 경께서 전사하셨습니다.”

레토는 제2근위대의 명성에 어울리는 매우 뛰어난 기사였다. 크루마가 기사보다는 마법사가 강한 나라라면 코린트는 크라레스와 마찬가지로 오랜 옛날부터 기사 가 매우 강력한 대국이었다. 오죽하면 이 강대한 제국이 코타스 공작이 합류하기 전까지 고급 타이탄이라고는 생산조차 못 해 봤겠는가? 이번 전쟁에서 크루마의 강력한 신형 타이탄을 막아 낼 수 있었던 것도 기사 개개인의 실력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강한 기사들 중에서도 최고라고 할 수 있는 근위기사단 소속 기사가 전 사하다니? 제임스는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뭐라고? 레토가? 어떻게 된 일이냐?”

“예, 예정된 시간이 지났는데도 연락이 안 되어서 정찰을 내보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긴 막대기에 거꾸로 매달린 시체들을 발견했답니다.”

“거꾸로 매달아 놨다고?”

“예, 각하. 레토 경과 함께 갔던 기사들과 마법사였습니다. 정찰조의 보고로는 시체들은 거의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고 그 밑에는 목이 없는 레토 경의 시체가 있었

답니다. 주위에는 수많은 타이탄 발자국들이 찍혀 있었는데, 아무래도 열 대 이상이 동원된 것 같았답니다.”

“타이탄의 종류는?”

“예, 놈들의 신형 한 대하고 나머지는 카마리에였답니다.”

“흑기사 한 대. 정말 딱 좋은 먹이였겠군. 제기랄.”

마법사는 품속에서 뭔가 종이쪽지를 꺼내어 제임스에게 건넸다. 제임스는 아직도 숙취가 풀리지 않은 손으로 천천히 펴며 물었다.

“뭔가?”

“레토 경의 시체 곁에 떨어져 있었다고 하옵니다.”

제임스는 쪽지를 펴다가 말고, 마법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그건 그렇고 정찰 나간 녀석들에게 흔적은 깨끗하게 지우라고 지시해 뒀겠지?”

“예, 일곱 군데의 이동 마법진을 거쳐서 이동해 왔습니다. 물론 숯을 사용했기에 흔적을 발견당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제임스는 쪽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좋아. 허…, 본보기를 보이는 것이니까 알아서 꺼지라고? 빌어먹을 자식들!”

제임스는 종이를 꾸겨서 집어던지며 말했다.

“오늘 저녁에 출동할 수 있도록 모두 준비해 두라고 해.”

“예? 레토 경께서 전사하셨는데, 움직이실 겁니까? 위험하지 않을까요?”

의아한 듯이 물어오는 마법사를 향해 제임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오늘 놈들도 공을 세우고 기분이 좋을 텐데, 이런 때 뒤통수를 치는 게 더 좋아.” “알겠습니다, 후작 각하.”

“만약을 대비해서 로체스터 전하께 타이탄 몇 대를 더 지원받는 게 좋지 않을까?”

걱정스럽게 말하는 까미유를 향해 제임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호쾌하게 답했다.

“뭐 하려고. 그쪽도 지금 크루마의 주력 부대와 대치 중이야. 괜히 전하께 부담감을 드리고 싶은 마음은 없어.”

제임스는 시선을 저 멀리 있는 돌프렌 요새로 돌렸다. 돌프렌 요새는 과거 가므 왕국 침공군이 기지로 사용했던 코린트 제국의 북동쪽 관문 역할을 하던 대형 요새 였다. 타이탄의 공격에도 어느 정도는 견딜 수 있도록 요새 전체는 잘 구어진 벽돌로 만들어져 있었고, 상당수의 대타이탄 방어 장비까지 갖춰져 있었다. 돌프렌 요 새는 1차 전쟁 이후 크루마군에게 함락되었고, 지금은 크루마 침공군의 후방 보급 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크루마군의 모든 보급 물자는 긴급 수송품을 제외하고 는 미란 국가 연합을 통과하여 이곳 돌프렌을 거쳐 수송되고 있었다.

“수고하게나. 만약 발각되어서 일이 어려워지면 연락해. 지체 않고 달려갈 테니까.”

“그러지.”

“도중에 길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하고…….”

제임스의 얼굴을 향해 종이쪽지 같은 것을 펄럭이며 까미유가 장난스레 말했다.

“뭐, 이게 있는 한 걱정할 필요는 없어. 만약 놈들의 타이탄이 투입되면 뒤를 부탁해.”

“알았어, 걱정 말라고. 불꽃놀이가 시작될 때까지, 우리들은 여기에서 대기하지. 작전이 성공하고 나면 어디서든지 알아볼 수 있게 큼직한 불꽃을 부탁해.”

만약을 대비해 뒤를 받쳐 주기 위해 남아 있는 무리들을 뒤로하고, 까미유 일행은 요새를 향해 출발했다. 요새를 향해 출발하기 전에, 마법사인 스타키는 일단 요 새 안으로 침투해 들어갈 모든 동료들을 향해 하이드 마나 포스(Hide Mana Force)와 하이드 매직 포스(Hide Magic Force)의 주문을 걸었다. 이 정도 규모의 요새 인 경우 경비병들과 기사 외에도 몇 명의 마법사들이 경비에 동참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뷰 매직 포스나 뷰 마나 포스 따위의 주문을 사용해서 장시간 경비를 서고 있을 골 빈 마법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변덕이 생겨서 주문을 이용해서 한번 둘러본다면 끝장이었기에 미리 대비를 해야 했던 것이다.

요새에 점점 다가가면서 까미유 일행은 엄청나게 행동에 조심했다. 가장 앞서 나가는 마법사 두 명이 뷰 매직 포스의 주문을 통해 마법이 걸린 트랙들을 공들여 우 회하면 뒤따르는 일행들은 앞서 간 마법사의 발자국 위를 그대로 밟으며 따라갔다. 하지만 마법 트랙의 수는 우려했던 것만큼 많지는 않았다. 크루마 쪽도 지금 파 괴된 타이탄을 재생산하기 위해 고위급 마법사들의 대부분이 본국으로 소환되어 있는 상태였기에 이곳에 있는 마법사들은 수나 질에서 상당히 떨어졌기 때문이었 다.

희미한 달빛 아래로 드러나는 요새의 외곽은 상당히 많이 파괴되어 있었다. 크루마의 주력 부대는 일단 코린트 기사단들이 후퇴한 후 격렬한 저항을 해 대는 이곳 돌프렌 요새를 보급 기지로 써먹기 위해 우선 함락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주력 부대는 시간 절약을 위해 우회하여 진격하고, 그들을 뒤따르던 후속 공격대가 시간을 들여 여러 가지 계략을 써서 요새를 함락하는 통상적인 전법을 쓴 것이 아니라 주력 부대가 힘으로 밀어붙여 단시간 내에 함락시켰다. 그렇기에 돌 프렌 요새는 상당 부분 파괴된 상태에서 점령되었고, 아직 보수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돌프렌 요새는 처음부터 코린트 쪽에서 건설한 것이었기에 한밤에 찾아든 손님들은 이미 그 내부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돌프렌 요새의 한쪽 구석 으로 다가간 일행이 힘주어 밀어젖히자 그르르릉 하는 낮은 소리와 함께 비밀 통로의 문이 열렸다. 요새 외곽에서 좀 더 안으로 들어서는 비밀 통로도 있었지만 그 쪽은 침입자를 대비하여 방비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기에 요새에 가장 가까운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비밀 통로를 택한 것이다. 내부를 슬쩍 살펴본 마법사는 뒤쪽을

향해 이상 없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그 비밀 통로 안으로 한 명씩 들어가기 시작했다.

비밀 통로 안은 썩은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평상시에 이 비밀 통로는 ‘비밀 통로’가 아닌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고, 그것이 이 통로의 주된 용도였다. 바로 ‘하수도’였다. 성 외곽으로 통해 있는 ‘진짜 비밀 통로’는 포위되었을 때 탈출용, 또는 적의 후미를 기습하는 군대의 이동을 위해 건설되었다. 그렇기에 다수의 군인 들이 신속히 이동할 수 있도록 큰 규모로 만드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 말은 들킬 가능성도 컸고, 또 그런 비밀 통로에 대해 역으로 치고 들어올 적에 대한 대비 또한 충분히 되어 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요새 안을 거미줄처럼 가로지르는 하수도망은 다르다. 일단 쓰레기와 물이 충분히 잘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 크지만 사람이 통과하기는 힘들 정도로 좁 은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사람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넓게 만들어야 한다면 침입을 막기 위해 굵은 쇠말뚝이 가로질러 설치된다. 돌프렌 요새는 거의 성이라고 부 를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매우 컸기에 거기에서 하루 동안에 나오는 오물의 양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렇기에 하수도의 구멍은 꽤 넓은 편이었고, ‘이론적으로는’웬 만한 구멍은 다 사람이 기어 다닐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하지만 언제나 이론과 실제는 다른 법. 비밀 통로야 어느 정도 폭만 된다면 사람이 충분히 기어 다닐 수 있을 정도지만, 하수도는 완전히 달랐다. 왜냐하면 그 구멍 으로 사람이 기어 다니라고 뚫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덕분에 까미유 일행은 하수도 안을 기기 시작한 다음부터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간신히 머리통만을 꺼낼 수 있는 상황에서 천천히 이동했다. 그리고 어떤 곳은 주둥이를 억지로 위로 들어 올려야 구린내 나는 공기를 간신히 흡입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아예 잠수를 해야만 이동이 가능한 곳도 아주 많았다.

“제기랄, 지독한 곳이군.”

모두들 하수도 안을 기어 다닌 덕분에 꼴이 말이 아니었다. 조금 전에는 아예 그 더러운 물속을 몇 분간 잠수하면서 통과했기에 입속에까지 오물이 들어온 듯 찝찝 했다.

“스타키, 빛!”

“예, 대장.”

스타키가 마법을 이용해서 희미한 빛을 뿜어내는 자그마한 구슬 같은 것을 만들어 내자 까미유는 그 빛 아래에 종이쪽지 같은 것을 펴 들었다. 머리통만 물 위에 내놓고 그 위로 살펴보는 것이었기에 힘들기는 했지만, 이것보다 더한 수련도 견뎌 낸 그였기에 별 어려움은 없었다. 그가 펴든 것은 종이처럼 보이지만 사실 매우 얇게 공들여서 가공된 양피지(皮紙)였다. 양피지 위에는 수많은 선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여기 돌프렌 요새의 모든 비밀 통로들이 기록되어 있는 지 도였다. 놈들이 포로로 잡은 기사나 마법사들을 모두 다 이곳 돌프렌 요새로 이동시켰다는 것을 알아내자마자 로체스터 공작에게 부탁하여 본국에서 마법진으로 긴급입수한 것이니만큼 그 신뢰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얼마 전에 수중을 통과했으니까 대충 이쯤이겠군. 그러면 지하 감옥은 다음에 나오는 두 번째 갈림길에서 오른쪽이다.”

불빛을 끄고 또다시 기어서 앞으로 전진. 통로의 거의 반 이상이 오물에 잠겨 있는 만큼 이동 속도는 지독하게 느렸다. 더듬더듬 모두들 앞으로 나가고 있을 때 그 들은 오물의 질이 좀 더 걸쭉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우웩! 이거 뭐야?”

“에휴…, 냄새.

“후각도 좋으시군. 아직도 냄새를 맡을 수 있다니…….”

모두 낮게 한마디씩 투덜거리게 만든 이유는 오물의 양이 아니라 질이었다. 여태까지는 그래도 반쯤 썩은 물이었는데, 이번에는 아예 걸쭉한 분뇨 덩어리에 걸린 것이었다. 그래도 소변하고 함께 섞인 것이었기에 통과가 불가능할 정도로 걸쭉하지는 않았지만, 그 냄새와 감촉은 도저히 참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똥 덩어리가 둥둥 떠다니는 하수도를 통과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이곳으로 왔겠는가?

“제기랄, 이래서 제임스 자식이 나를 보고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던 거였군.”

까미유가 투덜거리면서 앞으로 나가고 있을 때, 제일 앞서 가고 있던 기사가 속닥거렸다.

“두 번째 통로입니다.”

“좋아, 빨리 그리로 이동해라. 도저히 못 참겠다.”

하지만 악취와 그 걸쭉한 내용물의 밀도(密度)는 더욱 심해졌다. 바로 그 똥 덩어리들이 흘러나오는 곳이 그들이 이동하고자 하는 곳이었던 것이다.

“우욱, 지독하군.”

속이야 메슥거리든 뒤집어지든 그건 생각 외로 접어 두고 모두들 분뇨더미 속에서 머리통만을 꺼내 놓고 서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목표로 한 지점에 가 까워질수록 끼익끼익 하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그들이 바짝 접근하자 긴 로프에 매달린 큼직한 통들이 끼익거리는 소음을 흘리며 지하 저 아래쪽에서 위로 줄줄이 올라오며 똥물을 퍼내고 있는 중이었다.

물이란 것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성이나 요새의 안에 있는 모든 배수로는 처음 시발점에서 시작해서 제일 마지막에 밖으로 통하는 곳까지 약간의 경사를 가지게 만들어 원활하게 배수가 이루어지도록 만들어 놓는 것이다. 하지만 필요에 의해 아래에서 위로 오물을 끌어 올려야 할 때도 있 다. 대부분의 경우 성이나 요새에는 지하 구조물을 잘 만들지 않는다. 만약 만든다면 창고 종류가 대부분이기에 거기에서 오물이 나올 일이 없었지만, 지하 감옥의 경우는 얘기가 다르다.

감옥 안에 살고 있는 죄수들도 사람인 이상 먹고 쌀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되면 지하 깊은 곳에서 만들어진 오물들을 배출할 방법 또한 마련해 둬야 했다. 그렇다 면 힘들여 오물 배출할 방법을 강구할 것이 아니라 감옥을 지상에 만드는 것도 고려해 봄직도 하겠지만, 지하에 만들어 두는 것이 감옥으로 들어올 침입자들을 방비 하기에 훨씬 더 편하다는 것과 고문할 때 비명 소리가 밖으로 새 나가는 것을 막기에 좋다는 점을 들어 과거부터 감옥을 지하에 만드는 것을 선호하고 있었다. 

“지하 감옥에서 나오는 오물을 퍼내는 곳입니다.”

“과연, 감옥의 죄수들이 물을 많이 쓸 리도 없을 테니까 이렇게도 내용물이 뻑뻑한 거였군. 스타키! 밑으로 내려갈 준비를 해.”

스타키는 저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기계 장치로 서서히 올라오고 있는 긴 로프에 연결된 오물통들과 그 오물통이 통과하는 수직 통로를 세심하게 살펴봤다. 이 수 직 통로는 올라오는 통만 있을 뿐, 아마도 내려가는 통들은 저 뒤쪽에 또 다른 통로를 만들어 둔 것 같았다. 이 요새를 어떤 미친놈이 설계했는지 모르겠지만, 침입 해 들어오는 사람들도 좀 배려해 줘야 할 게 아닌가? 수직 통로는 아무것도 잡을 것이 없었고, 통로의 태반을 통이 차지하고 있는 바람에 만약 내려가다가 통을 붙 잡기라도 하면 이 통을 움직이고 있을 노예가 갑자기 무게가 꽤 무거워졌다는 것을 눈치 챌 가능성이 컸다.

“예, 백작님. 그런데 저 정도 공간으로는 통들을 헤치면서 내려가기 힘들 것 같은데요? 통로의 태반을 통들이 차지하고 있잖습니까?”

스타키의 항변에 까미유는 퉁명스레 대답했다.

“알게 뭐야. 지금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저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지. 그 방법은 마법사인 자네가 생각해 내.”

이리저리 한참을 궁리하던 스타키가 방법을 생각해 냈다는 듯 속닥거렸다.

“페더 폴(Feather Fall) 마법을 쓰면 되겠군요. 몸무게를 깃털처럼 가볍게 해 주니까 통을 대충 잡고 헤치면서 내려가도 저 통을 움직이고 있는 녀석들이 눈치 채 기는 힘들 겁니다.”

“좋아. 그게 좋겠군. 빨리 내려가자구. 속이 메슥거려서 죽을 지경이니까 말이야.”

일행들은 모두 마법사들의 도움으로 아래쪽으로 간단하게 내려올 수 있었다. 물론 자신들이 밑으로 내려올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통들을 밀어내야 했지만 여태껏 걸쭉한 곳을 헤치며 다닌 것에 비하면 그건 결코 어려운 축에 들어가지도 않는 작업이었다.

“바닥입니다.”

그들이 내려선 곳은 거대한 지하 탱크였다. 지하 탱크의 벽면에 꽤 높은 위치까지 오물이 차올랐던 표시가 있는 걸 보면 탱크가 어느 정도 차면 퍼내는 방식을 취 하는 모양이었다.

지하 탱크의 내용물이 얼마나 걸쭉한지 페더 폴 마법이 아직 풀리지 않은 그들의 몸이 수면 밑으로 내려가지도 않고 있을 지경이었다. 큼직한 통들이 소음을 흘리 며 그 밑에 고인 오물을 위로 위로 천천히 퍼 올리고 있었다. 이리저리 구석을 살펴보던 부하들이 말했다.

“좌우에 통로가 있기는 하지만 너무 작습니다.”

부하들이 가리키는 곳을 봤을 때 그곳에는 한 사람이 기기에도 빠듯할 정도의 구멍 두 개가 뚫려 있었다. 아마도 그 구멍들이 감옥 밑을 가로지르는 배수구인 모양 이었다. 이리저리 밖으로 나갈 방법을 궁리하고 있을 때 끼익거리며 소음을 흘리던 물통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이제 웬만큼 퍼냈으니 멈춘 모양입니다. 아마도 적당히 오물이 차오르면 그때부터 다시 퍼내기 시작할겁니다.”

“그렇겠지. 그건 그렇고 어떻게 밖으로 나가지?”

“조금 위험 부담이 크더라도 벽을 부수고 나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겠는데요?”

“할 수 없지. 될 수 있으면 조용하게 처리할 수 있나?”

“그건 염려하지 마십시오.”

스타키는 제3근위대 소속의 정예 마법사답게 목표 지점을 한 곳 정한 후 세 개의 마법을 걸었다.

일단 사일런트(Silent) 마법을 걸어 굉음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막은 후 오브젝트 리미테이션(Object Limitation : 목표 제한) 마법을 이용하여 목표물 외에 화기(火氣)가 미쳐서 부상자가 생기지 않도록 막았다. 그런 다음 큼직한 파이어 볼(Fire Ball)을 날려 벽을 박살 내 버렸다. 하지만 그 거대한 불꽃이 벽을 거의 반쯤 녹이고 반쯤은 박살 냈는데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까미유는 벽이 박살 나는 순간 구멍을 통해 밖으로 뛰쳐나갔다. 혹시나 밖에 경비병이 있을 가능성도 있었기에 그의 몸놀림은 엄청나게 신속했다.

스타키는 자신이 사용한 마법의 소리만을 차단했을 뿐, 그 빛까지 차단한 것이 아니었기에 폭발에 따른 빛은 지하 4층 거의 전체에 걸쳐 뿜어졌고, 도대체 무슨 일 인가 하고 경비병 몇 명이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다.

“이봐, 아까 번쩍하지 않았어?”

“도대체 무슨 빛이지?”

웅성거리며 두 명의 경비병이 다가오는 것을 순간적으로 포착한 까미유는 그쪽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뛰어들었다.

슉!

은빛 궤적을 남기며 까미유의 검이 거의 빛의 속도로 움직인 찰나 두 경비병의 몸이 토막 나며 허물어졌다. 놀라울 정도의 쾌검이었다. 까미유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혹시나 빛을 본 또 다른 경비병이 있는지 알아 보기 위해 몸을 날렸다.

잠시 후 까미유는 슬쩍 한숨을 내쉰 후 구멍으로 다가가서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가 쥐고 있는 검에 살짝 묻어 있는 핏방울이 일이 어떻게 끝났는지 대신 말해 주 고 있었다.

“모두들 나와.”

까미유의 지휘에 따라 일곱 명의 기사들은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적의 경비병들을 해치우기 위해 위층으로 달려갔다. 까미유가 제압하고 돌아온 것은 지하 4층뿐 이었기에 그 위층들도 제압해 둘 필요가 있었다.

이곳 지하 감옥은 지하에 4층에 걸쳐 건설된 대단히 규모가 큰 감옥이었다. 전쟁 전에는 국경을 몰래 통과하려다가 잡힌 밀수자, 도망자, 정치범 따위로 득실거렸 기에 이 정도로 규모가 컸던 것이다. 하지만 전쟁을 통해 그 주인이 코린트에서 크루마로 바뀐 지금 범법자들보다는 전쟁 포로들로 득실거리고 있었다.

까미유를 비롯한 모든 기사들이 감옥 전체를 장악하기 위해 움직이는 동안 마법사 두 명은 각각 공간 이동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포로들 을 탈출시키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몇 분 지나지도 않아서 까미유는 어슬렁거리며 돌아와 마법진이 얼마나 그려졌는지 확인했다. 스타키는 그런 까미유를 슬 쩍 바라봤다가 폭소를 터뜨렸다. 까미유는 평소에 매우 깔끔한 멋쟁이였는데 똥 무더기를 뒤집어쓰고 코를 이상하게 실룩거리고 있는 모습이 매우 재미있게 보여 졌기 때문이었다.

“이봐, 스타키. 네 녀석 꼴도 나하고 똑같으니 비웃지 말라구. 그건 그렇고 다 되어 가?”

“예, 곧 끝납니다.”

“좋아, 이제 녀석들을 풀어 줘야겠군.”

검을 이용해서 감옥 문을 부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경첩 부분이나 열쇠가 있는 부분만 검으로 잘라 내면 어김없이 문은 열렸기 때문이다. 하나 둘씩 피곤 에 찌든 동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에는 기사도 있었고, 마법사도 있었다. 그리고 부근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다가 잡혀온 귀족들도 많았다. 하지만 용병(傭兵) 들이나 정규군 병사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귀족이 거느린 사병(私兵)의 주축을 이루는 용병들의 경우 포로로 잡힌 후에는 상대방과 흥정을 해 서 그쪽의 용병으로 뛰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고, 정규군 병사들의 경우 본보기로 처형해 버렸기 때문이다. 원래가 게릴라 활동의 주축이 황제에게 충성심을 가진 일 부 귀족들이었기에, 귀족도 아닌 놈들이 그들에게 협력하면 어떤 대가가 주어진다는 것만 확인시키면 주민들의 협력을 막을 수 있었기에 흔히들 사용하는 방법이 었다.

포로들은 풀려나오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에 앞서, 구출하러 온 사람들의 꼴을 보고는 잡을세라 기겁을 하는 꼴들이었다. 모두들 똥통에 빠졌었는지, 지독한 악 취들을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옷이건, 머리카락이건 곳곳에 누런 것들이 묻어 있었다. 그것을 보고 구출하러 온 인물들의 안색이 씁쓰리하게 변했다. 고생고생해 서 구해 주러 왔는데, 마치 문둥병자라도 만난 듯 안색이 변해서 슬금슬금 피하는 꼴을 보니 결코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저기 감옥 문이 열리면서 거의 3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들자 마법사들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예상을 훨씬 웃도는 숫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 중에 서 상당수의 마법사들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오히려 탈출에 도움이 되었다. 포로로 잡혀 있던 마법사들은 마나를 부리지 못하게 처리된 팔찌를 풀어 주자 서둘러 일 행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저마다 마법진을 그려 대기 시작했다. 곧이어 수십 명의 마법사들에 의해 수십 개의 마법진이 그려졌을 때쯤에는 충분히 모두들 한꺼번에 탈출할 수 있을 것이 확실해졌다.

“모두들 주문을 외우기 시작해!”

까미유의 허락이 떨어지자 마법사들은 저마다 주문을 외워 대기 시작했다. 물론 목표지는 이곳에서 거의 3백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강 위였다. 마법 사들은 똑같은 위치를 목표로 공간 이동함으로써 발생하게 되는 참사(慘死)를 일으키지 않도록 서로 간에 충분한 토의를 거친 후였다.

마법진이 완성되자 저마다 이동을 시작했고, 그때쯤 감옥 위쪽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울려오기 시작했다. 물론 이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눈치 챈 녀석들이 막아 놓은 문을 부수고 난입해 들어오려고 하는 것이다. 까미유는 위쪽을 힐끗 바라봤다. 사실 이 정도 마나의 폭풍이 일어나면, 마나를 부리는 자라면 간 단히 눈치 챌 수 있을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반수 정도는 아직까지도 이동을 못 하고 있었다. 체력이 많은 덕분에 벌써 이동 마법을 성공시킨 스타키와 아이가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안 까미유는 재빨리 지시했다.

“스타키, 자네는 할 수 있는 최강의 공격 주문을 준비해라. 그리고 아이가스는 또다시 이동 마법진을 준비해라. 우리들이 탈출할 것 말이야.”

“예.”

“옛.”

까미유가 데리고 온 두 명의 마법사는 저마다 대답한 후 각기 주문을 또다시 외우기 시작했다.

“대장, 문이 부서지려고 합니다.”

제일 위쪽에서 감시하고 있던 부하가 외치자 까미유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답했다.

“빨리 내려와. 빨리!”

지하 감옥의 복도 높이가 그렇게 높지 않은 만큼 이 안으로 타이탄을 끌고 들어올 수는 없었다. 아마도 위쪽에서 문을 부수려고 하는 놈들은 갑자기 나타난 적들 때문에 매우 당황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준비 다 되었습니다.”

“위에 올라갔던 녀석들이 돌아오는 대로 스타키는 위쪽으로 마법을 날려라. 그리고 곧장 이동이다.”

“옛.”

“아이가스, 준비되었나?”

“예.”

이때 저쪽에서 네 명의 기사가 검집을 덜그럭거리지 않게 꽉 잡고는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스타키는 그들이 꽤 거리를 좁혀 오는 그 순간 마법을 발동시켰다.

“익스플로우(Explosion : 폭발)!”

시뻘건 불빛이 스타키의 손에서 뻗어 나가는 그 순간, 기사들은 저마다 최대한의 속도로 마법진 안으로 달려 들어왔고, 제일 마지막 녀석이 슬라이딩을 통해 마법 진 위로 미끄러져 올라왔을 때 아이가스는 이동 마법을 시작했다. 천장이 강력한 마법에 의해 박살이 나면서 화염이 위로 치솟아 올랐고, 또 일부 벽들은 무너져 내 리며 밑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까미유 일행은 그 벽돌에 깔려 죽지 않고 빛을 뿜으며 사라져 버렸다.

쿠콰콰쾅!

엄청난 빛과 함께 불꽃이 밤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요새의 일부가 붕괴되었을 정도로 막강한 위력을 지닌 불꽃 덕분에 주위가 한순간 밝아졌다가 다시 어둠 속에

묻혔다. 요새 위에는 수많은 병사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고, 몇몇 인물들은 불이 붙은 곳을 끈다고 물통을 들고 달려가고 있었다. 아닌 밤중에 갑자기 시작된 이런 난리법석을 멀찍이서 바라보던 제임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제임스는 뒤쪽에 서 있는 기사를 향해 말했다.

“저 녀석은 언제나 저렇게 화려한 걸 좋아한단 말씀이야. 안 그래, 오스카?”

“물론이죠, 대장. 저런 난리통 안에 들어가서 휘저으실 생각이십니까?”

제임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만에, 내가 끼어들 여지도 없겠다. 돌아가자.”

“예.”

마법진이 번쩍 빛나면서 우글우글 모여 있던 기사와 마법사들이 흔적을 감췄다. 일단 ‘불꽃놀이’가 시작된 이상 까미유가 임무에 성공했을 게 분명한데, 여기서 어기적거리고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