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9권 8화 – 내 친구의 원수

내 친구의 원수

똑똑.

“무슨 일이냐?”

자다가 깬 미네르바가 짜증스런 목소리를 내자, 문밖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 전하, 긴급 통신이 도착했사옵니다.”

“긴급 통신? 말해 봐라.”

부하는 문밖에서 조심스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예, 30분 전, 돌프렌 요새에 수감 중이던 전쟁 포로들이 탈출했사옵니다.”

“뭣이? 그게 사실이냐?”

“예, 전하. 아마도 소수의 공격대가 침투해 들어와서 구출해 간 모양이온데, 어디로 도망쳤는지 현재로서는 추측 불가능이라고 하옵니다.”

미네르바는 너무나도 원통한지 이빨을 갈며 외쳤다.

“제기랄, 잘들 노는군. 피해는?”

“예, 강력한 공격 마법에 의해 요새 일부가 파괴되었고, 사상자死傷) 3백여 명 정도가 발생했다고 보고받았사옵니다. 일단 대기 중인 기사들을 파견했사옵니다 만, 후속 조치에 대해 하명해 주십시오.”

미네르바는 이불을 다시 뒤집어쓰며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후속 조치? 후속 조치 따위가 필요할 리가 없잖나? 놈들은 보나마나 죽자고 내뺐을 게 뻔하고, 아마 흔적을 따라가면 쟈크렌 요새로 이어져 있겠지. 쓸데없이 그 런데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만 잠이나 자게나.”

“예, 전하.”

발자국 소리가 점차 문 앞에서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미네르바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또다시 코린트 놈들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포로들을 좀 더 빨리 본국으로 보내 버리는 거였는데…, 제기랄!”

미네르바는 천장을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요새 사령관으로 임명된 쥬크노 남작은 모든 비밀 통로를 발견해 냈고, 그곳에 대해 철저하게 방비를 하겠다고 보고했었어. 그렇다면 그때 발견되지 않은 비밀 통로가 있었을까? 있을 가능성도 있겠지. 하지만 돌프렌 요새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철저하게 심문했었고, 고위급 장교들까지 족쳤는데 새로운 통로가 있었을까? 에잇 제기랄, 잠이나 자자. 없었다면 하수도라도 기었겠지……”

불편한 심사를 억누르며 미네르바가 억지로 잠을 청하고 있을 때, 거기서부터 엄청난 거리에 떨어져 있는 어떤 남자 또한 게릴라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었다.

“제기랄, 이놈의 게릴라는 끝도 없군. 이래서는 진격은커녕 보급로를 유지하는 것도 버거워. 진격 속도를 줄이더라도 차근차근 확실하게 뿌리를 뽑아 나가는 수밖 에 도리가 없겠어. 그렇지 않나?”

질문을 받은 마법사는 상대를 향해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게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되옵니다, 전하.”

“그렇다면 지시를 내려라. 이번에 새로이 투입되어 진격 중인 사단들에게 명령해서 한 마을 한 마을 철저하게 색출하여 격멸하라고 전해. 그리고 각 사단에 콜렌 기사단의 타이탄을 두 대씩 지원해 줘라. 그리고 기사 네 명씩하고…….”

“옛, 전하.”

“크로나사가 넓긴 넓군. 현재 본국에서 동원 중인 군사력으로는 현상 유지하기도 힘들 정도로 넓어. 영토를 장악하지 못하면 이런 땅덩어리 위에 기사단을 주둔시 키는 것은 무의미해.”

“그렇사옵니다, 전하. 이번에 올라온 보고로는 제16경장 보병사단에 파견 나가 있던 오너가 게릴라를 토벌하던 중에 철십자 기사단의 마크가 붙은 크라메(0.85) 를 한 대 파괴했다고 들었사옵니다. 아마도 놈들이 본격적인 게릴라전으로 응수해 오는 것이 아닐까요? 그에 대한 대비도 해야만 하옵니다.”

크라레스의 기사들은 거의 30여 년간 크로나사 평원을 되찾기 위해 피땀 어린 훈련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그들 대다수는 그래듀에이트 시험에 응시할 자격조차 박탈당한 채 역사의 전면(面)에 나서지도 못하고 오로지 수련만을 받았다. 그에 비해 다른 국가의 기사들은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여 각종 업무를 처리하고, 무도 회에 참석하는 등 시간 낭비를 일삼았기에 아무리 코린트의 기사들이 강하다고 하지만 크라레스의 기사들보다는 질적인 면에서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놈들에게 신경 쓰기 힘든 처지야. 어떻게 한다? 놈들의 주력 부대가 크루마에 묶여 있는 이때를 최대한 이용해야 하는데 말이야. 그러기 에는 군사력이 턱도 없이 부족해. 이런 때 전방에서 타이탄을 더 빼낸다는 것은 자살 행위야.”

“근위 기사를 투입하면 어떨까요? 청기사 한 대면 놈들을 상대하는 데 충분할 것이옵니다.”

“근위 기사를? 하기야 열 대 중에서 한 대 정도 꺼내는 거야 별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폐하께서 허락을 하실까?”

“아마도 허락하실 것이옵니다. 그렇게 못한다면 지금 수도에서 대기 중인 유령 기사단 분대를 쓸 수도 있사옵니다. 원래는 크라레인 공방전 때 합류할 예정이었사 오나 그쪽으로 빼도 상관은 없을 것이옵니다.”

““몇 대나 되지?”

“테세우스 여덟 대이옵니다.”

“테세우스 여덟 대라……. 좋아. 그중 네 대만 쓰기로 하지. 그 네 대는 수도에 주둔하면서 언제든지 출동할 수 있도록 하고, 적들의 타이탄이 나타났을 때 파견 나 간 타이탄이 그놈을 잡고 시간을 끄는 동안 그쪽에 합류하여 놈을 때려잡는 것으로 하자.”

“좋은 생각이시옵니다, 전하.”

“그리고 만일을 대비해서 폐하께 허락을 받아, 근위 기사 한 명도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대기하라고 하면 되겠지.”

“옛, 전하.”

“이제 대충 정리가 끝났군. 자네도 눈 좀 붙이게. 이거 매일매일 이래서야 몸이 버텨 내지를 못하겠군.”

“예, 전하. 그래도 초전(初戰)부터 어느 정도 잘 풀리고 있다는 것에 희망을 걸어야 하겠죠. 안녕히 주무시옵소서.”

“자네도 잘 자게나.”

마법사가 인사를 하고 방에서 나가자 그는 방 한쪽에 놓여 있는 낡은 침대 위에 거의 쓰러지듯 누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낮은 코고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 작했다.

이렇듯 영토를 점령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완벽하게 점령된 땅, 즉 자신들의 영토인 경우 문제가 없었지만, 타이탄 전투를 통해 상대의 주력 부대만 몰아 낸 점령지는 매우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만약 이 전쟁이 치레아나 스바시에 점령처럼 빠른 시간 내에 적의 수도를 점령하고, 국왕이나 황제를 처형해 버렸다 면 구심점을 잃어버린 게릴라의 활동은 저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서로가 변방의 땅덩어리를 집어삼킨 국지전일 뿐이었기에 각 지역을 관할하고 있 던 영주들은 끝까지 저항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나라가 이런 것 때문에 아르곤 제국을 겁내는 것이다. 만약 코린트가 아르곤을 점령한다는 가정을 세운다면 그건 별로 어려울 것이 없었을 것이다. 아르곤 성 기사단의 타이탄 전력은 그렇게 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영토를 점령한 후에는 어떻게 될까? 지방 영주들만이 아닌 전 국민들로 이루어진 광신도들과 타이탄이 없는 성기사들을 상대로 싸워야만 했다. 그야말로 거의 대부분의 국민들을 학살하고 나서야 그 영토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많은 병력과 기사들이 그 드넓은 아르곤의 대지에 퍼져서 싸워야 할지 상상하기도 힘들다. 그 때문에 아무도 아르곤을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군사력이 약한 아르곤에게 침략을 당할 걱정도 할 필요 없으니 더 잘된 것이었지만.

“수고했다.”

“맡은 바 소임을 다했을 뿐이옵니다, 전하.”

“자네들이 해낸 일 덕분에 병사들의 사기도 많이 올라갔어. 잘해 주었다. 이리 앉거라.”

로체스터 공작은 밖에다 대고 외쳤다.

“포도주를 좀 가져오너라.”

“예.”

로체스터 공작이 기거하고 있는 방은 흔히 성주의 방이 그러하듯 요새 내의 탑 꼭대기에 있었다. 6층에 이르는 탑을 통과해 들어오려면 밑에 층층이 배치되어 있 는 경비병들을 지나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취해지는 조치였다. 그 때문에 로체스터 공작이 머무는 방의 창문을 통해 웅장한 쟈코니아 산맥의 장관이 숨김없이 드러 나 있었다.

“어때? 경치가 대단히 좋지? 사방이 쓸모없는 산들인데도 이렇듯 눈을 즐겁게 해 주니, 그렇게 쓸모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 그리고 만약 이 산맥이 없었다면 크루마군은 쟈코니아 전체를 삼켰겠지.”

“그렇군요.”

“키에리가 떠난 것은 정말 유감스런 일이야. 이제 남은 본국의 마스터는 너희들과 나뿐이구나. 하기야 세월이 더 흐른다면 몇 명이 더 탄생할 수 있겠지만 너무 늦 “어.”

“예.”

하녀가 포도주와 잔들을 놔두고 절을 한 후 물러가자, 공작은 세 개의 잔에 포도주를 따라 권한 후 입을 열었다.

“자, 들게나.”

“예.”

“그건 그렇고 통신상이라서 별로 말을 못 했다만, 그때 부탁한 것은 뭐냐? 왜 크라레스 침공군에 대해 조심하라는 것이지? 그 때문에 지금까지는 그냥 지켜보고만 있는 형편이다만….

“예, 그때 아버님을 쓰러뜨린 검객은 크라레스에서 파견 나온 인물이었사옵니다. 그리고 크라레스는 엄청난 위력의 타이탄까지 생산해 냈고요.”

로체스터 공작은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흐음…, 크라레스였었나? 그렇다면 크로아 공작인가?”

“크로아 공작이라니요?”

두 젊은이가 무슨 말인가 하여 되묻자 로체스터는 회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크라레스의 크로아 가문은 정말 대단한 무가(武家)였지. 그때 그 크로아 공작의 목을 벤 것이 나였으니까 말이야. 자신이 타고 있던 카프 록시아가 파괴되어 밖으로 끌려나왔을 때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크로아 공작과 몇몇 기사들이 목숨을 걸고 끝까지 막아 낸 덕분에 크라레스 황 제가 도망칠 수 있었지. 아마도 그의 아들이나 손자들 중에서 걸출한 녀석이 나올 수도 있겠지.”

까미유는 공작이 잠시 말을 멈춘 틈을 이용해서 끼어들었다. 원래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에서 대화가 어긋나고 있었던 것이다.

“험험, 저…,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크로아가 아닌데요? 로니에르라고 하옵니다, 전하.”

“로니에르? 그런 가문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가만…, 요 근래에 치레아에 부임했다는 총독의 성이 로니에르였던 것 같군.” 대충 로체스터 공작이 기억하고 있는 것 같자 제임스가 곧장 대꾸했다.

“예, 바로 그 인물이옵니다.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

“크라레스에 그런 뛰어난 무가가 또 하나 있었던가?”

“그런 모양이옵니다. 제가 코타스 공작 전하 실종 사건 때문에 뒷조사를 하다가 알아낸 이름이니까 말이옵니다.”

“그놈이 코타스의 실종과 관계가 있다고?”

“예.”

“그렇다면 그 녀석은 내 친구 두 명을 없앴다고 봐야겠군. 키에리를 죽일 실력이라면 코타스도 가능했을지도 모르지.”

“예, 그런데 로니에르 공작은 너무 수상하옵니다. 그 용모도 그렇고, 그 실력도 그렇고, 또 그렇게 강력한 실력을 가진 인물이 요 근래에 갑자기 등장했다는 것도 그렇고, 또 그녀가 가지고 있는 타이탄도 수상하고.

제임스의 말에 로체스터는 의외라는 듯 반문했다.

“그녀라고? 여자라는 말이냐?”

“예, 많이 봐 줘야 열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가녀린 소녀죠.”

로체스터 공작은 말도 안 된다는 듯 부인했다.

“그건 말도 안 돼. 무술의 경지가 올라갈수록 젊어질 수 있다고는 하지만 어려질 수는 없어.”

“마법을 사용한 게 아닐까요? 젊어지는 마법 같은…….”

“그건 아닐 거야. 마법사나 신관이 아닌 이상 마법을 계속 유지하기는 힘들어. 또 자신이 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하더라도 가녀린 소녀의 몸을 가진다는 것은 미친 짓이야. 검의 파워는 근력과 무게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네가 가녀리다고 하는 걸 보니 대충 어떤 몸매인지 짐작이 가는데, 그런 몸매로는 절대로 파워를 낼 수 없어. 수련을 거치다 보면 자연히 근육은 적당하게 붙게 되는 것이고, 또 자신이 익힌 무술에 알맞은 몸체를 만들어 가게 되는 것이지.”

“그럴까요?”

““까미유.”

“예, 전하.”

“너는 그 로니에르라는 인물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해라. 아버지가 누구인지, 그 가문에서 가장 뛰어났던 검객은 누구인지, 누구에게 검술을 배웠는지, 뭐 그런 것 들을 말이야. 알겠느냐?”

“옛, 전하.”

까미유를 향해 로체스터 공작이 지시를 끝내자 제임스가 공작을 향해 물었다.

“그렇다면 크라레스 쪽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옵니까, 전하.”

“그렇게 강한 상대가 크라레스에 있다면 그냥 놔두는 편이 좋을 것 같군. 괜히 싸워 봐야 남는 것도 없어. 본국의 동맹군 타이탄 3백여 대를 전멸시킨 살라만더 기 사단을 거느린 나라라면, 싸워봤자 결과는 뻔해. 그냥 게릴라전으로 몰고 가는 것이 좋을 거야. 기사는 강하지만 군사력은 약하니까 그 점을 철저히 이용하면 되겠 지.”

“예,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