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0권 4화 – 나예린의 병문안

비뢰도 10권 4화 – 나예린의 병문안

나예린의 병문안

흠칫!

의약전을 나서던 빙검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찌푸려졌다.

염도와 예기치 않은 마주침을 그는 결코 기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염도도 흠칫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이내 원상태로 복귀했다. 빙검이 염도의 얼굴을 꼴 보기 싫다는 듯 외면했다. “어쭈!”

염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빙검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빙검은 그런 염도를 무시했다. 아무래도 그는 염도를 이 세상에 없는 존재로 여기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흥!”

염도도 그런 빙검을 같이 무시했다. 자신도 질 수 없다는 강박관념이 그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둘은 서로를 외면한 채 우뚝 멈춰 섰다. 염도와 빙검이 정면으로 마 주친 곳은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문턱 부근이었다. 두 사람이 외면한 채 동시에 스쳐 지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누군가 한 사람은 물러나야 했다. 그러 나 둘 중 누구도 먼저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나예린은 그런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복잡 미묘한 감정에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딴청을 부리며 염도가 말했다.

“여긴 웬일이신가? 혹시 사부님 병문안이라도 오셨는가?”

“사부님?”

신기하게도 빙검 노사의 사부는 강호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것은 염도 노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염도 노사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안단 말인가? 염도의 염장에 빙검이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염도의 입가에 걸린 비웃음이 자꾸 눈에 거슬렸다.

“사돈 남 말 하고 있는 거 아닌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말도 자넨 모르나?”

피차일반인 주제에 거들먹거리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흥! 자신이 부족했던 것을 남에게 화풀이하다니 어른답지 못하군.”

염도가 빈정거렸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나예린을 보며 말했다.

“예린아! 요즘은 사제가 사형에게 대드는 일이 아주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어 강호의 문제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풍문으로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빙검의 얼굴은 확연하게 굳어져 있었다. 무엇인가가 그를 동요시킨 게 분명했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군. 오래 바라보고 싶은 면상이 아니니 빨리 지나가게. 언제까지 사람 지나가는 길을 막고 있을 건가?” 그러면서 빙검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더 이상 염도와 대치하는 것은 시간 낭비이자 체력 낭비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제야 나예린은 이 기묘한 대치 상태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흠! 깨어났던가?”

염도가 턱으로 비류연의 병실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공손하게 물어도 대답해 줄까 말까 한 판국에 좋은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었다. “자넨 눈이 없나? 직접 확인해 보시게!”

빙검은 차가운 냉기를 풍기며 사라졌다. 염도의 얼굴은 울긋불긋했다. 나예린은 두 사람이 왜 이러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예의를 모르는 시건방진 사제라니깐!”

투덜거리는 염도의 불평불만 소리는 다행히 나예린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염도와 우연찮은 만남은 정말 최악이었다. 하마터면 이성이 날아가 버릴 뻔했던 터였다.

빙검은 의약전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후각을 마비시켜 버릴 듯한 강렬한 약향이 섞인 안의 공기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상쾌하고 쾌적한 공기가 그의 폐부 깊 숙이 흘러 들어왔다. 머리가 조금 맑아지고 이성이 차가워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제 앞으로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사방이 꽉 막힌 듯 탈출구가 없었다. 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감히 남의 도움을 요청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또한 개망신을 당하느니 차라리 비밀리에 비류연의 제자 노릇을 하는 게 나을 것도 같았다.

‘그 성질 더러운 염도도 하는데 나라고 못할 이유가 무에 있겠는가!’

하지만 아직은 그의 자존심이 심각한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 자존심을 죽여야만 했다. 이를 악물고, 필요하다면 혀를 깨물어서라 도, 약속은 약속! 신의 신의였다. 한번 한 맹세를 개인적인 자존심으로 깰 수는 없었다.

“큭!”

여러 가지 상념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자 다시 한 번 극심한 통증이 찾아왔다. 그는 가슴을 움켜잡았다. 빙검은 앞섶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짙은 어둠이 깔렸다.

“아직도, 란 말인가?”

아직도 심장부위에 찍힌 낙인은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푸른 낙인.

남의 주먹이 자신의 심장을 뒤흔들었음을 증명하는 증거!

빙검은 이 푸른색 멍울이 마치 노예의 낙인처럼 느껴졌다.

“이 무슨 터무니없이 부끄러운 일이란 말인가…….”

그는 거칠게 가슴팍을 움켜잡았다. 운명의 신은 너무나 잔혹했다.

염도는 물론이고 나예린에게도 눈은 제대로 달려 있었다. 병실로 들어선 나예린의 눈이 순간 크게 떠졌다. 엄청난 부상으로 혼수 상태라고 들었던 비류연이 자신 의 생각과는 달리 깨어나 있었던 것이다. 그를 보는 순간 그녀는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그녀는 ‘다행이야’라고 안도하는 자신의 마음에 흠칫 놀랐다. 왜 자신 이 비류연의 건강 상태에 영향을 받아야 하는가? 그럴 만한 이유가 무엇인지 혼란스러운 나예린이었다.

환하게 밝아지던 나예린의 얼굴이 금방 어두워진 것은 비류연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방금 전 빙검 앞에서 보였던 생기발랄한 모습은 온 데간데없고 왠지 초췌하고 허약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비류연이 ‘일부러’ 이렇게 했다는 것이었다.

“깨어나셨군요, 비 공자! 다행이에요.”

“하하하! 소저께서 걱정해 주시는데 언제까지나 침상에 누워 있을 수는 없죠. 소저가 병문안을 왔는데, 누워 있는 그런 결례를 범할 수야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비류연은 슬쩍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전신에 힘이 없는 게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였다. 마치 오랜 투병 생활에 지쳐 버린 병든 서생 같았다.

‘저… 저런 가증스러운……!”

아프긴 언제 아팠다고 저런 중환자 행세를 한단 말인가. 염도는 기가 막혀 뭐라 할지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걱정하신 모양이군요, 나 소저.”

자신을 바라보며 힘겹게 웃는 그 모습에 나예린은 왠지 마음 한구석이 따끔했다.

“제가 왜 당신을 걱정했다고 생각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군요.”

당황한 나예린이 차갑게 말했다.

“후우, 그런가요? 그럼 아무 근심 걱정 안 하시는 분이 이곳에는 웬일이신지 모르겠네요. 이 약 냄새, 고름 냄새 풀풀 풍기는 곳에 말이죠. 걱정되니깐 오신 것 아 닌가요? 사실 저와 소저 사이에 개인적인 감정을 빼면 이곳을 방문하실 이유가 전혀 없을 텐데요?”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 그건…….?

나예린이 다시 당황하자 비류연은 더 이상 그녀를 궁지에 몰아넣지 않기로 했다. 이런 때는 예술적인 긴장의 완급 조절이 필요한 것이다. 너무 여인을 구석으로 몰 아서는 안 된다. 지나친 부담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연애의 철칙이었다.

“괜찮습니다. 소저께서 이곳에 오신 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일단 이 정도로 만족하죠. 이건 예상외의 성과였으니까요.”

사실 나예린의 병문안은 비류연의 기대 밖의 일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부랴부랴 이렇게 병자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순간적인 연기로 이렇게 나예린이 속아 넘 어가는 것을 보면 비류연의 연기는 상당한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염도 노사님도 마찬가지고요.”

비류연이 염도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병색이 완연한 비류연의 얼굴이 염도는 너무 부담스러웠다.

“허허허, 별 말을.”

“네가 시킨거잖아!’라고는 죽어도 말 못하는 염도였다. 비류연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병문안이 아니라 왼손에 들고 있는 바구니일 터였다.

“병문안 선물일세!”

염도는 음식 바구니를 비류연의 침상 옆 탁자에 올려놓았다.

‘염도 노사가 남 병문안할 때 위문품까지 챙겨올 만큼 세심한 사람이었나?”

나예린은 또 한 번 의아함을 느껴야 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염도 노사는 평상시 자신이 보아온 염도 노사와는 너무나 느낌이 달라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뭘 이런걸 다! 잘 먹겠습니다.”

비류연이 활짝 웃으며 바구니를 받았다. 음식을 보자 생기가 도는 모양이었다. 이것은 그가 매우 고대하고 있던 물건이었다.

“허허허! 별 말을…….”

“가지고 와야 할 음식 목록까지 빼곡하게 적어준 주제에!’라고는 죽어도 말 못하는 염도였다.

“자! 나 소저도 좀 드셔보세요?”

비류연이 바구니 안에서 사과 하나를 힘겹게 꺼내들며 나예린에게 권했다. 힘겨운 몸짓으로 건네주는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나예린은 그 사과를 받아들 수밖에 없 었다. 명배우 뺨치는 연기였다.

“막 혼수 상태에서 깨어났는데 이렇게 부담스런 음식을 먹어도 되나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빨간 사과를 바라보며 나예린이 물었다.

“네?”

나예린이 뭐라고 묻는지도 모른 채, 그의 손은 바쁘게 바구니를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비 공자? 방금 전 들고 있던 전병은?”

다시 시선을 비류연에게 향한 나예린이 놀라 되물었다.

“네? 무슨 사과요? 전 기억에 없는데요? 잘못 보신 거겠지요.”

비류연이 동작을 멈추고 나예린을 바라보았다. 그의 텅빈 손은 바구니 바로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녹아 없어질 듯한 엷은 미소를 지으며 비류연은 그 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나예린은 비류연이 금방 손에 전병 하나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 아니?”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째였다. 여러 번 연속으로 착시 현상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잠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쳐다보니 또다시 비류연의 손에 들려 있던 음식 물이 방금 전 전병과는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번에는 한과였다.

나예린은 마치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 어리벙벙했다. 다시 비류연을 살펴보았지만 그에게서는 어떠한 의문점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공간으로 음 식물이 계속 사라져 버리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알 수가 없군. 분명히 지금 몸 상태로는 죽도 먹기 힘들 텐데…….?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걸 바라보는 염도는 더욱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 저런 괴물이…….’

나예린이 잠시 한눈파는 사이 염도는 그 놀라운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은 도저히 저렇게 빠른 속도로 못 먹을 거야! 속임수도 아니고 손 안의 음식을 통째 입 안으로.

바구니가 동이 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점점 더 줄어가는 바구니 안의 음식물들과 그 주된 원인인 비류연을 번갈아 바라보며 나예린이 말했다. “왠지 제 걱정이 무의미했다고 여겨지는 것은 저만의 착각인가요?”

그녀가 그런 생각을 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오오! 역시 걱정을 하긴 하셨군요!”

비류연이 나예린의 말에서 꼬투리를 잡았다.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그나마 다행이군요.”

나예린이 차갑게 대답했지만 비류연은 개의치 않았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시작이 반이라 했으니 우린 지금 반보다 더 가까이 온 거군요. 남은 거리야 차츰차츰 줄이면 되겠죠.”

마냥 태평하기만 한 비류연이었다.

나예린과 염도가 다녀간 뒤… 잠시 후.

비류연의 병실에는 텅 빈 바구니 하나가 놓여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빼곡히 들어 있던 음식물들은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때문에 염도는 내일 사 올 음식물의 목록을 다시 받아야만 했다. 목록을 받는 것만 해도 열 받는 일인데 더 열 받는 것은 목록만 있고 돈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돈은 모두 염도 주머니의 몫이었다. “사흘을 굶었으니 세 배는 더 많이, 더 빨리 먹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빙그레 웃으면서도 염도에게 뻔뻔스럽게 할 말은 다 하는 비류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