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2권 14화 – 멍멍이 가출사건

비뢰도 12권 14화 – 멍멍이 가출사건

멍멍이 가출사건

“아부지! 아부지!”

아이 하나가 쪼르륵 달려가 아버지의 바지를 잡아끌었다.

두 눈망울에 물방울이 일렁이는 게 영 심상치가 않았다.

“왜? 무슨 일이냐?”

“큰일 났어요! 큰일 났어요. 우리 집 노구(老狗)가 가출했어요.”

“뭣이라! 아니, 그놈이 복날도 다 지났는데 웬 가출? 내년이 지놈 차례인 줄 눈치를 챈 건가. 다 늙은 놈이 암놈이랑 바람났을 리는 없을 테고…, 끄으응! “

사내의 고민은 허리 춤이 풀려질 정도의 거센 잡아당김으로 인해 깨어지고 말았다.

“아부지! 아부지!”

다시 아이가 아비의 바지를 잡아당겼다. 아부지가 외쳤다.

“고만 잡아 당겨라. 이눔아! 왜 그렇게 달라붙어? 아비 바지가랭이 벗겨지겠다.”

아부지란 불린 사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아들의 말에 들었다.

“노구, 노구, 노구! 어서 가서 얼른 노구 찾아줘요!”

“지 맘대로 가출한 놈을 내가 무슨 수로 찾아! 지나가다 어느 배고픈 거지의 냄비에라도 들어갔겠지.”

아들의 움켜진 손을 떼 네며 사내가 말했다.

“으아아앙, 노구! 빨랑 노구 찾아줘요!

울먹이며 부탁하는 아들의 청을 거절할 수 없는지 사내는 쩔쩔 맸다.

“알았다, 알았어! 알았으니깐 제발 고만 좀 울어! 내 바지는 걸레가 아냐, 이눔아!”

하는 수 없이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노구 수색 작전을 벌여야만 했다. 그러나 마을을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노구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했다. 이곳저곳 탐문을 하다 가 수상하게 보이는 무림인들을 만났지만 남자는 곧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설마 저렇게 번듯하게 차려 입은 사람들이 그런 일을 했으려고……. 선두에 선 저 백의노인을 봐! 정말 고상하고 위엄이 넘치게 생겼잖아? 절대 그런 일을 했을 리가 없지. 암 그렇구 말고.’

게다가 다들 몸에 병장기 하나씩을 걸치고 있었다. 평범한 촌부인 남자에게 입이라도 벙긋할 용기가 있을 리가 없었다. 남자가 목격한 일단의 무림인들은 잔뜩 굳 은 얼굴로 마을을 빠져나갔다. 남자는 호기심에 잠시 지켜보다가 다시 노구 수색에 나섰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조그만 공터. 근엄한 얼굴로 빙검이 말했다.

“이걸로 될까요?”

“어떻게든 될 거예요.”

비류연이 대답했다.

“쳇! 좀더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 겨우 한 마리라니!

애석하기 짝이 없다는 투로 염도가 말했다.

“냄비는요?”

“벌써 노학이 구해 왔습니다.”

“양념은?

“산산이가 구해오겠답니다.”

“음!”

비류연은 무척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도 보충되고 부족한 양기도 채워지고, 게다가 맛도 좋고! 역시 환자들에게는 이게 최고죠!

환히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염도도 빙검도 그 의견에 이의는 없는 모양이었다.

“오랜만의 영양보충이 되겠군요.”

염도는 벌써부터 입안에 군침이 도는 게 기대가 대단한 모양이었다. 이미 건량은 지겨워질 대로 지겨워져 있었다. 따뜻한 국물이 있는 쫄깃쫄깃한 것이 먹고 싶은 희망에 부푼 것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아까 전에 그 개 잡는 깔끔한 솜씨, 정말 훌륭했어요.”

“과찬….입니다.”

빙검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먹거리 포획은 빙검의 공적인 모양이었다. 한쪽은 요리 준비로 부산했다. 적당한 크기의 돌을 둘러 받침대를 만들고 그 위에 솥을 걸었 다. 그 밑에 모아 온 마른 장작을 넣어 불을 붙였다. 일의 대부분은 주작단이 맡아 했는데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움직임이 일사분란하고 능숙했다.

딱딱! 부싯돌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드디어 장작에 불이 붙었다. 물 끓는 시간이 아득하니 길게만 느껴졌다.

이 작은 집성촌을 벗어나 고개 하나만 넘으면 이제 화산파의 영역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이제 목적지는 바로 코앞이었다.

흑도연합 무림맹 흑천맹 맹주집무실.

흑천맹주 갈중천은 눈앞에 놓인 두 개의 보고서를 살펴보고 있는 중이었다. 척 보기에도 태산 같은 거봉의 위엄이 풍겨져 나오는 사람이었다. 숯처럼 검고 강인한 두 눈썹 밑에 위치한 두 눈은 만 번을 단련한 명도처럼 날카로운 빛을 담고 있었다. 지금 그 두 가닥의 예기가 방금 지급으로 보고된 보고서 위를 샅샅이 훑어 내리 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마천각의 대표단이 화산에 거의 도착해 이제 곧 화산파의 안전 영역 안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그 부분을 지나 아래로 내려 가 대표단이 화산까지 가는 동안 미리 방비는 했지만 습격을 당해 사상자가 있었다는 부분을 읽어 내릴 때는 치솟아 오르는 분노에 눈썹이 위로 솟구쳤다. 그리고 마지막 ‘추적은 실패’라는 문구를 읽었을 때 그의 인상은 걷잡을 수 없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댄 채 짧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언제나 되어야 이들의 꼬투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인가? 몰래 추적자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또다시 실패였다. 주의하고 또 주의하며 완전을 기한다고 했 음에도 마찬가지였다. 번뇌가 담긴 깊은 한숨이 폐부 깊숙한 곳에서 내쉬어져 나왔다.

또 하나의 보고서는 화산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한 산에서 폭발음과 함께 타오르는 섬광이 목격되었으며, 그 후 그 산은 산불이 나서 사흘 밤 나흘 낮이나 타올 랐다는 정보였다.

“군의 화약창이라도 터진 건가? 아니면 화기 실험하다가 실수로 산에 불이 붙은 건가?”

화탄은 강호에서 사용이 금지된 물건이었다. 게다가 화약은 군의 최고기밀에 속하는 사안이었다. 나라의 엄중한 관리 하에 놓여 매우 조심스럽게 취급되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반출되는 일은 없었다. 특기할 만한 일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소홀히 대할 수도 없는 부분이었다. 게다가 그 위치가 하필이면 화산으로 가 는 길목이라는 점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좀더 자세하게 조사를 시켜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다음 번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바로 그때 집무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밖에서 한 명의 중년인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불청객은 아니었다. 그 남자는 흑천맹의 최고 두뇌집단인 흑천뇌(黑天 腦) 소속 일급 군사 문숙이었다.

갈중천의 미간이 살짝 접혔다.

“좀 더 조용하게 들어올 수 없나? 문 떨어져 나가겠네.”

그러나 얼마나 화급하게 들어왔는지 흑천맹주 갈중천의 말조차도 그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지금 중년인은 제대로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헉헉거리며 숨을 고르는데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중년인은 자신의 무례를 사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다급하게 외쳤다.

“매, 맹주님. 크, 크, 큰일, 큰일 났습니다! 헉헉헉!’

얼마나 긴박한 일이길래 저리도 호들갑을 떨며 혼비백산한 모습인 것인가? 기분이 상한 갈중천의 눈살이 확 찌푸려졌다.

“왜 그리 호들갑인가?”

눈살이 찌푸려지는 게 당연했다. 남 위에 서는 자는 다른 자들과 같이 쉽게 동요하면 안 되었다. 항상 냉정한 시선으로 사태를 올곧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지 휘부가 우왕좌왕 당황하면 그 조직은 단순한 오합지졸이 될 뿐이었다.

그는 항상 이런 교훈을 자신을 보좌하는 수뇌부들에게 주지 시켜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런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 주니 그의 불쾌지수가 높아지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그 앞에 쓰러질 듯 무릎 꿇은 군사는 그 사실은 어찌되어도 좋은 모양이었다.

갈중천은 그처럼 사색이 되어 당황하는 군사는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무엇이 철벽 빙하 같던 그를 동요시킬 수 있단 말인가?

“숨만 헐떡이지 말고 제대로 말해 보게. 그렇지 않으면 내가 무슨 일인 줄 어떻게 알겠나?”

그제서야 겨우 숨을 고른 남자는 급히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뭐, 뭐라고!

갈중천은 경악성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콰당’ 소리와 함께 자단목 의자가 뒤로 벌렁 넘어 갔다. 갈중천은 지금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했나? 다시 한번 말해 보게!”

한 번 더 묻는 것으로 보아 갈중천이 얼마나 경악해 하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다시 묻는다고 해서 내용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명령을 받은 군사는 자신이 했던 말을 반복했다.

“네, 다시 보고 드립니다. 태, 태, 태상맹주님께서 실종되셨습니다.”

“실종?”

갈중천의 반응은 격렬하기보다는 어이없다는 반응이었다.

“네! 시, 실종입니다.”

“원 사람이 농담도…….”

‘가려서 해야지.’라는 말은 굳이 붙이지 않았다.

“사실입니다.”

“그런 바보 같은!”

쾅!

쩌적!

비싼 탁자가 오늘 또 하나 그 생을 마감했다. 군사는 조용히 마음 속으로 방금 화풀이용이라는 거룩한 목적으로 장렬히 희생된 탁자의 목숨 값을 매겨보았다. “또 쓸데없는데 지출을 하게 되었군.’

재정 조언자로서 그는 무척 탐탁치 않았지만, 씨근덕거리는 맹주를 향해 그런 위험한 충고는 하고 싶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로, 어디로 가셨단 말인가? 이런 일은 이제껏 한번도 없었던 일이거늘…….?

그의 아버지이지만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힘든 존재였다. 그가 흑천맹의 맹주임에도 불구하고, 무신마 갈중혁은 그에 있어 그런 존재였다. 무슨 나쁜 일을 당했다 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를 해꼬지할 능력을 일신상에 지니고 있는 이는 현 강호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유일한 지기이자 무이(無二)한 경쟁자였던 무신 혁월린이 40년 전 홀연 실종된 후 20년 가까이 상심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20년 전 어느 날 갑자 기 우울한 얼굴로 술을 마시며 슬퍼했다.

오늘 무(武)를 논할 상대를 영원히 잃었다고. 아버지의 슬픔을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주위의 시달림이 싫어 몰래 은거하신 걸 겁니다. 혈신이 없는 이상 누가 그분에게 해를 입힐 수 있겠습니까?”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갈중천은 생각했다. 병마 따위가 그 몸을 정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력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와 동등한 능력을 가진 자에게 허무한 죽음 따위가 찾아올 리 없다고 그는 믿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이제 다시는 그를 만나 술잔을 나누지 못할 듯한 예감이 드는구나. 나는 느낄 수 있다. 그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그러나 여전히 갈중천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무리 하늘같은 아버지의 말이었지만 신용이 가질 않았던 것이다.

“그냥 감일 뿐! 확인되지 않은 사실입니다. 아버님께서 이렇게 정정하신데 그분께 별 일이라도 있겠습니까. 심려 놓으십시오.”

“……”

흑도의 하늘은 침묵한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아버지는 흑천맹주 자리에서 물러나 은거를 시작했다. 같은 날 그는 흑천맹의 맹주가 되었다.

그가 알기로는 그 날 이후, 아버지 갈중혁이 자신의 은거지에서 나온 적은 한 번도 없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20년만의 외출이 아무런 통고나 기별도 없이 이 루어지다니……. 설마 그런 일이야 없겠지만 불안의 그림자가 짙어지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자네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나?”

상념에 잠시 빠져 있던 갈중천의 시선이 군사를 향했다.

“예에?”

군사가 찔끔하며 대답했다.

“빨리 안 찾으러 가고 여기서 멀뚱멀뚱 인형처럼 왜 서 있는 거냐고 묻는 걸세!’

범 같은 두 눈에서 비수처럼 예리한 섬광이 번뜩이며 노성이 터져 나왔다.

“당장 사람을 풀어 아버님의 행방을 탐문하도록! ”

“예, 옙!”

갈중천의 일갈에 군사가 부랴부랴 달려 나갔다. 흑천맹주는 혀를 차며 그 허둥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말 가출이라도 하신건가?”

이 질문에 대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천각심처(處)

대공자는 자신이 들고 있던 보고서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하얀 꽃잎처럼 찢어진 종이가 허공중에 날렸다. 섬뢰마검 동방학 사망, 잔뢰마도 공패 중상, 비사신군 모사령 행방불명. 그 외 혈쇄, 혈창, 혈궁이 사망했다.

뼈아픈 손실이었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타격이기도 했다. 치사한은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송구스럽다는 듯 벌벌 떨고 있었지만 대공자는 그곳으로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러나 대공자가 다른 한 장의 보고서를 받았을 때 그의 분노는 순식간에 환희로 탈바꿈 했다. 한빙지옥처럼 차갑고 냉정하던 대공자의 입에서 대소가 터져 나온 것은 정말 보기 드문 놀라운 광경이었다.

“으하하하! 이 보고가 정녕 사실인가요?”

“그 때문에 공 봉공께서 죽음 직전의 위기까지 몰리셨다고 하니 사실이 분명합니다.”

여전히 이마를 돌바닥에 찧은 채 치사한이 대답했다.

“좋아요, 좋아! 이것이 사실이라면 앞의 피해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크나큰 보배같은 성과로군요. 그동안 꼭꼭 숨어서 우릴 짓누르던 방해물이 깨끗이 이 세상 에서 사라졌다니 말입니다. 이제 어떠한 장애도 우릴 막을 수 없을 겁니다. 그 둘 중 어느 한쪽만 없어도 그것은 없는 것도 마찬가지니까요.”

“그…, 그렇습니다. 이제 그분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이 강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 눈엣가시들은 많이 남아 있지요. 치 군사!”

대공자가 부드럽게 치사한을 불렀다. 화는 이미 거의 다 풀린 모양이었다.

“예! 하명하십시오.”

차갑게 빛나는 얼음 칼날 같은 눈동자가 깊은 어둠 속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준비를! 직접 화산으로 가겠습니다.”

“존명!

치사한이 더할 나위 없이 공손한 자세로 부복하며 대답했다.

마침내 그가 직접 움직이기로 결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