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백 년 전에 한 남자가 있었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홀연히 나타났다네.
아무도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했지.
물론 처음에는 누구도 그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았네.
그런 일은 언제나 있었던 일이었으니까.
사람들은 모두들 그를 두려워했지.
급기야는 그의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돋고, 오금이 저릴 정도가 되고 말았다네.
때문에 모두들 그 이름을 내뱉는 것조차 금기시하게 되었네.
사람들은 두려움과 공포와 절망을 담아 그를 ‘천겁혈신’이라 불렀다네.
질투의 불꽃
“류여어언! “
구정회의 쌍절(絶) 중 하나이자 형산파의 최고 기대주인 지룡(智) 백무영은 나예린의 절규하듯 외치는 소리를 확실히 들었다.
그 목소리는 맑고 깨끗했으며, 은빛 거울 위에 수정 같은 빗방울이 음률을 연주하며 떨어지는 듯한 그런 미성이었다. 또한 그것은 심연의 호수처럼 깊고 담비 털처 럼 고왔으며, 듣는 사람을 매료시키는 마력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목소리는 다급함과 놀람, 공포와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예전에 그 목소리는 북쪽 얼음의 대지에서 불어오는 북풍한설(北風寒雪)처럼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 시린 바람에 감정의 잔재가 실렸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 다. 그런 목소리가 어느새 입춘 첫 햇살을 받은 시냇물처럼 녹아 내려 저토록 위태롭게 떨리다니! 그 차갑던 목소리가 저렇게 다양한 감정을 담고 높게 울려 퍼졌던 적이 과거에도 있었던가?
그의 기억으로 반추해 볼 때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 아마 애소저회의 집요한 가인집중밀착감시 기록(佳人集中密着監視 記錄 : 실크로드 건너편의 벽안국(碧眼國) 에서는 ‘스토킹 레코드’라고 부르고, 이를 전문적으로 행하는 프로페셔널을 ‘스토커’라고 칭하는 모양이다.)에도 나와 있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그동안 나름대로 수많은 여성을 편력해 보았다고 내심 자부하는 그로서도 처음 들어보는 맑고 아름다우며 신비하면서도 매혹적인 목소리라는 것 에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었다.
그때 백무영의 눈에 친구 위지천의 이상한 모습이 들어왔다.(아직까진 소원하긴 해도 절교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힌 채 자신의 두 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인생에 절망하고 생을 자포자기한 자살자를 연상시키는 그런 모습이었다. 수백 개 의 화살이 장마 비처럼 쉴 새 없이 떨어지고, 회전하는 칼날이 쇠사슬을 타고 광폭하게 떨어져 내리는 이 위험한 순간에 저렇게 멍하니 있는 짓은 삶을 위한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것과 진배없는 미친 행위였다.
백무영은 옛 절친한 친우의 행동이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사방에서 몰려오는 생명의 위협과 끊임없는 공격 때문에 더 이상 그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십 발의 화살이 그의 목숨을 노리며 달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겨우 뾰족한 쇠붙이가 달린 나뭇가지 따위에 맞아 죽는다면 사문의 조사님들을 뵐 면목 이 없을 것이다.
사문에 대죄를 지을 수는 없기에 그는 시선을 다시 돌려 자신을 위협하는 공격부터 단호하게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의 검이 바람을 가르며 차가운 검기를 뿌렸다.
“흐흐흐…….”
위지천은 연신 괴소를 흘리며 핏발 선 눈으로 자신의 텅 빈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깨끗한 빈손이었지만 붉게 충혈된 눈 때문인지 마치 피에 물든 것처럼 벌 겋게 보였다. 분명히 자신의 몸에 붙어 있는 팔의 연장선상에 위치한 손이건만 지금 그의 눈에는 천길 낭떠러지의 바닥만큼이나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언제 그녀가 저토록 안달하며 다급하게, 자신의 제어를 잃고 소리친 적이 있었던가? 평상시 일상적인 대화조차 제대로 하기 힘든 그녀가 말이다.
위지천은 검은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질투에 눈이 멀 것만 같았다.
“크크크큭! 크크크큭!”
이성의 끈을 놓고 감정의 격류에 심신을 내맡긴 현재 그의 모습은 광인(狂人)의 그것이나 별다름이 없었다. 지금 그에게 올바름을 추구하는 이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완전한 방심 상태였다.
퍽! 퍽! 퍽!
눈 없는 화살이 멀뚱한 표적 하나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그의 곁을 스치며 바닥에 세차게 꽂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이대로 죽을 생각인 것인 가?
그런 그의 발뒤꿈치 쪽을 향해 흙바닥을 기며 몰래 다가온 독사 한 마리가 독아를 번뜩였다. 그것은 이 협곡 안에 둥지를 틀고 사는 이곳의 주민이 아닌 다른 땅에 서 다른 것을 먹고 살아온 이방인이었다.
이것이 품고 있는 독은 보통 독사의 십수 배에 달했다. 게다가 그 독은 어떤 것의 명령에 의해 휘둘러지는 사악한 검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 무리를 빠져나온 뱀에 게 있어서 목표는 어떤 것이 되었어도 좋았다. 단지 이 멍한 남자를 선택한 것은 일단 가깝고, 또한 축 처진 모양새를 보아하니 저항이 적어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 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과연 현명한 판단이었다.
검은 비늘의 독사가 하얀 한 쌍의 독니를 빛내며 사나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아니, 날아들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스윽!
찰나, 번뜩이는 검광과 함께 위지천의 발을 한 치 앞두고 독사의 머리와 몸통이 가느다란 혈선을 그리며 반쪽으로 갈라져 버렸다. 독사의 잘린 단면으로부터 검붉 은 피가 배어져 나오며 위지천의 옷에 붉은 얼룩을 점점이 찍었다.
위기의 순간에 검을 휘둘러 그를 구한 이는 바로 삼절검(三絶劍) 청흔이었다. 한때 이들은 백무영과 더불어 천룡삼우(天龍三友)라 불렸던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 이름이 퇴색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그들의 우정은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져, 이제는 과거의 잔흔(殘痕)만이 쓸쓸함과 함께 남아 있을 뿐이었다.
“흐흐흐흐, 크크크큭! 키키키킥! ‘
생명을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위지천은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자괴와 조롱이 섞인 괴소를 입술 사이로 연신 흘려보내고 있 었다.
주위가 짙은 암흑으로 가득히 둘러쳐지기라도 한 듯 이제 그의 시야에는 옛 친구마저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설마 긴장으로 미쳐버린 건가?’
청흔은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가끔 첫 전투에 참가한 초심자에게서 이런 정신질환자가 나온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극도로 예민해진 신경이 피와 고통 과 죽음이라는 거센 충격으로 발기발기 찢겨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추측을 부정하는 청흔이었다. 그가 알기로 위지천은 그 정도로 나약한 마음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청흔은 어느 순간 위지천의 괴소가 멎어있음을 깨달았다.
조용히 고개를 치켜든 위지천과 시선을 마주친 순간, 청흔은 심적 충격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의 두 눈동자는 희망의 그림자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사자(死者)의 눈처럼 허무와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큭큭큭. 쓸데없는 짓을 했군, 친구. 그냥 죽게 내버려뒀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는 편이 훨씬, 훨씬 더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심장에 수만 개의 대못이 박히는 듯한 이 아픔을 안 느꼈어도 되었을 텐데 말이야. 이제는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잖아? 왜냐하면 이제는 죽고 싶지 않거든! 그 대신…….?
섬뜩하리만큼 차갑고 냉소적인 목소리로, 마치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중얼거리던 위지천은 다시 한번 자신의 두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순간 그는 붉게 보이는 자신의 두 손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짜증스러웠다. 그리고 그는 붉게 보이는 자신의 두 손이 비류연이라는 그 빌어먹을 자식의 피로 물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 다.
미칠 듯한 갈증이 그의 입안을 바싹 태웠다. 그 빌어먹을 자식의 가슴을 도려내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선혈만이 이 타오르는 갈증을 식힐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갈 증을 식힐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라도 서슴지 않고 영혼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체할 수 없는 질투심과 죄책감이 만나 그의 정신 속에서 사납게 소용돌이쳤다. 이 사나운 소용돌이 속에서 죄책감은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산산이 부스러지고, 그 빈자리를 견딜 수 없는 증오가 대신 채웠다.
참을 수 없는 광기의 회오리가 그의 심신을 휘감았다. 그것은 그의 약해질 데로 약해진 정신과 이성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그러나 그의 이런 변화를 눈치 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멀리서 쏟아지는 화살들과 고군분투하고 있는 백무영은 물론이고, 바로 곁에서 그를 지켜본 청흔마저도 그의 마음이 서서히 마(魔)에 잠식되어 가 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위지천의 마음속에서 지금까지 힘겹게 유지되던 어떤 가느다란 선 하나가 어느 순간 ‘뚝’ 끊어져 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