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2권 9화 – 백 년 전의 마인

비뢰도 12권 9화 – 백 년 전의 마인

백 년 전의 마인

– 쌍마 출현

빙검의 검과 동방학의 검이, 염도의 도와 공패의 도가 불꽃을 일으키며

격렬하게 부딪치자 땅이 울리고 대기가 찢어질 듯 비명을 질렀다.

너무나 다급한 상황이었기에 염도와 빙검 두 사람은 어찌된 영문인지 차분하게 파악할 시간조차 없었다. 무조건적으로 부딪쳐 이 두 노인의 검과 도를 막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강하다!’

최초의 격돌에서 염도는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마 강호에 초출한 이후 지금까지 도를 부딪쳤던 사람 중 가장 강한 자였다.(물론 뭐가 뭔지 아직도 감이 안 잡히는 비류연은 비교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홍염(紅)을 쥔 손에서 느껴지는 손아귀가 찢어져 나갈 듯한 거대한 압력이 그 강함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감히 소홀히 할 수 없는 이 도기의 폭풍우에 정 면으로 대적하면서도 염도는 한 가지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어라? 좀 이상한데…….’

상대방의 강함은 확실히 인식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면으로 대적하는데 있어 힘의 부침이 없었다. 예전이라면 분명 힘겨웠을 것이 분명한 상대임에도 의외 로 맞서기가 수월했다.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실력이 증진된 자신을 그제서야 알게 되자 그는 그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내가 언제 이렇게 강해졌지?’

도초가 마음먹은 대로 손끝에서 풀려 나갔다. 내공을 방출하고 회수함에 따른 어떠한 무리도 없었다. 마치 강을 타고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이런 기가 막힌 일이!”

그동안 한 것이라고는 비류연의 제자가 되어 무지막지하게 혹사당한 것뿐인데 언제 이렇게 강해졌단 말인가? 몇 년 전부터 자신의 무공이 증진되기보다 점차 정 체되어 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던 염도였다. 그 때문에 고민도 많이 하고, 혹시나 해결책이 있을까 싶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일부러 시빗거리를 만들며 비 무행을 벌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좌절도 맛보았다. 그 맛은 시큼털털하고, 쓰디썼다. 두 번 다시 맛보고 싶지 않은 그런 맛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을 번뇌하게 만든 난제가 어느 순간, 기가 막힌 일이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해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방치해 두었던 엉킨 실타래가 스쳐지 나가는 바람결에 풀린 것이나 진배없었다. 자신이 직접 경험해 보고도 도저히 믿지 못할 일이었다.

“강함에 대해 집착할 때는 강해지지 못하고, 강함에 대한 집착을 버리자 강해지다니…….”

참으로 모순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약한 녀석들과 싸울 때는 별로 느끼지 못했는데 진정한 강자랑 싸우자 확연히 그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다행히 나예린은 염도 덕분에 위험에서 빠져나와 한숨 돌린 것 같았다.

“효룡은?”

단숨에 절벽 위에서 밑바닥까지 뛰어 내려온 비류연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효룡을 안은 채 망연자실해 있는 이진설은 효룡만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평소에 호감을 느끼던 남자가 자신 때문에 이런 끔찍한 모 습이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가 느끼는 죄책감과 상심(傷心)은 엄청난 것이어서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답답해진 비류연은 직접 움직여 효룡의 경동맥에 두 손가락을 갖다 댔다.

“휴우~”

희미하지만 다행히 맥은 뛰고 있었다. 코에서 미약한 숨결이 느껴진다. 이마에서 흘러나오던 피도 어느새 멎어 있었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제서 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비류연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염도와 공패의 싸움은 여전히 격렬하기 짝이 없었다. 땅이 깊게 파이고 자갈과 흙이 허공중에 사납게 날아다녔다. 도와 도가 부딪치는 소리가 협곡 안에 요란스럽 게 메아리쳤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예린이 심연한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지막지한 건 여전하군요. 아직도 저 급한 성질을 고치지 못하다니…, 아니면 영원히 고칠 수 없는 걸까요?”

“누구 말인가요?”

어느새 다가왔을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비류연의 목소리에 나예린이 되물었다. 그녀는 이제 장내에서 한 발짝 떨어져 네 사람의 격전을 지켜보고 있던 중이었다. 그녀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백 년 전의 전대고수와 현 시대의 명망 높은 고수들 간의 대결을 지켜보기 위해 우르르 몰려들고 있었다. 다들 손에 땀을 쥐고 이 싸움을 지켜보았다. 지금 그들의 눈앞에 그들이 도달해야만 할 한 단계 높은 경지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수준 높은 비무는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 래서인지 모두의 눈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글쎄요, 누굴까요?”

곁에 다가온 비류연이 싱긋 웃었다.

“예린, 상처는 없어요?”

“예, 전 괜찮아요.”

그녀의 대답에 비류연은 안심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이군요. 저들은 그나마 아직 여기서 살아 돌아갈 희망이 생겼으니까요.”

만일 눈곱만한 생채기라도 생겼으면 이곳에 뼈를 묻어야 한다는 이야기였지만 나예린은 잠시 비류연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검술, 이 검기! 어디서 많이 본 검기인데…….”

동방학의 얼굴이 가볍게 일그러졌다. 그는 좀 전에 빙검과 검을 부딪쳤던 자신의 검과 그 충격으로 떨리는 손을 지긋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지금 노인은 풀리지 않 는 난제를 눈앞에 둔 미궁 속을 헤매는 듯한 학자가 되어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까의 쌍검을 쓰는 청년도 그렇고…, 오늘 따라 이 자리에는 왜 이리도 자신이 여전에 겪어봤던 무공들의 흔적들이 많이 보이는 것인지? 게다 가 더더욱 마음에 안 드는 점은 두 가지 다 똑같이 자신에게 한때 쓰라린 패배와 지워지지 않는 공포를 안겨 주었던 가장 무시무시한 무공들이라는 점이었다.

좀 전의 쌍검은 내륙의 공기 속에 섞인 바다바람의 소금기처럼 그 흔적이 미약했지만, 이번 것은 푸른 대양의 한가운데 떠 있는 배의 갑판에 서 있는 것처럼 그 향 기가 뚜렷했다.

그만큼 흔적이 뚜렷한데도 불구하고 검과 검이 불꽃을 일으키며 부딪치는 그 순간 확실히 분간하지 못했던 것은 빙검의 그 기술이 세월이 지나며 또한 그 자신에 맞게 개량에 개량을 거듭하는 변천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기술이 반쪽 자리였기 때문에 더욱더 노인의 혼란을 가중시켰던 것이기도 했다. 이런 느낌을 받은 것은 비단 동방학뿐이 아니었다. 그의 오랜 동반자인 공패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네놈들은 도대체 뭐하는 놈들이냐?”

두 노인은 동시에 소리쳤다. 두 노인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태극신군과는…, 무슨 관계냐? ”

얼음으로 뒤덮인 무저갱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으스스한 목소리로 동방학이 물었다.

“그, 그걸 어떻게?’

깜짝 놀란 염도가 눈을 부릅뜨며 되물었다.

“염도!

빙검이 소리쳤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제서야 염도는 ‘아차하며 자신이 크나큰 실수를 범했음을 깨달았다. 적의 유도심문에 어리석게도 넘어가 버리고 만 것이다.

“흐흐흐, 과연 그렇군. 과연 그래! “

공패가 흉소를 흘리며 웃자 볼 살이 가볍게 뒤흔들렸다. 과히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동방학의 눈은 더욱더 깊고 차갑게 빛났다.

“귀하들은 누구시요?”

빙검이 물었다. 그는 감히 소홀히 할 수 없었기에 그의 목소리에는 짙은 경계심이 깔려 있었다.

“태극신군과 관련이 있는 자라면 우리들의 이름을 물을 자격이 되겠지. 노부는 동방학이라고 하네.”

“흐흐흐, 노부는 공패다!

두 명의 뚱뚱하고 마른 노인, 검과 도를 쓰는 한 쌍. 여기까지라면 이에 해당되는 사람이 수십 명이 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름이 동방학과 공패라면 이야기는 다 른 차원의 것이 된다.

“서, 설마 당신들은…….”

염도와 상대할 때 이외에는 항상 냉정하고 차분하던 빙검이 그 답지 않게 격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누구야? 얼음탱이, 자네 저 늙다리들이 누군지 아나?”

염도가 옆에서 재촉했다.

“빨강머리! 선지피 뒤집어 쓴 머리를 한 주제에 하찮은 실력을 믿고 너무 겁이 없구나!”

공패라고 자신을 소개한 노인이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빠직!

염도의 관자놀이가 요동치듯 꿈틀거렸다. 이마에 핏대가 선 염도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냅다 뛰쳐나가려는 순간 빙검의 손이 그를 제지했다.

“경거망동하지 말게. 무턱대고 덤벼들어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닐세!”

빙검의 두 눈은 비할 데 없는 진지함으로 가득 차 있었고, 청은색 눈썹 밑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처럼 예리한 시선은 경계심으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 냉정무 쌍한 얼음동상이 이 정도로 신경을 빠짝 세우고 긴장한 채 조심하는 모습은 이제껏 본 적이 없었던 터라, 염도는 눈발 날리는 한겨울에 찬물로 머리꼭대기부터 뒤집 어 쓴 듯한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과연 저들이 어떠한 존재이기에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얼음탱이를 이토록 동요시킬 수 있는가? 머리꼭대기까지 차올랐던 분노가 단숨에 싸늘하게 식었다.

동방학의 입가에 잔잔한, 그러나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과연! 기특하게도 자네는 우리들이 누군지 아는 모양이로군. 우리들이 뿌린 공포가 아직도 말라죽지 않고 싹을 틔우고 있는 것을 보니 감개무량하군. 노부가 바 로 섬뢰마검(閃雷魔劍) 동방학일세. 그리고 저 친구가 노부의 하나뿐인 지인인 잔뢰마도(殘魔刀) 공패일세. 백 년 전 사람들은 우리들을 비뢰쌍마(飛雷雙魔)라 불렀지!”

그 순간 비류연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들을 향해 날아가 꽂혔다.

‘비이~뢰에(飛)?’

스스로를 비뢰쌍마라 칭한 그들의 소개는 비류연의 시간을 5년 전 그때 그곳으로 돌려놓았다. 머리카락에 가려진 그의 눈동자 속에서 역행한 시간의 파편이 망막 가득히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