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3권 2화 – 뛰어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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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3권 2화 – 뛰어넘어라!!!

뛰어넘어라!!!

“자네들은 이제 왜 저 협곡이 ‘천간(天劫間)’ 혹은 ‘혈신일보(血神步)’라 불리는지 알게 되었을 것이네! 그리고 자네들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앞으로 치러야 할 시험이 무언가 하는 것도 말일세!”

그러나 비공답운 종쾌의 말과는 달리 대표단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채 멀뚱히 서 있었다.

“???”

아무래도 그의 말을 십분 이해하지 못한 탓인지 모두의 얼굴에는 의문 부호가 가득했다.

언뜻 보면 간단하게 추정될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의식한계를 벗어나는 일이었기에 한정되고 빈곤한 상상력으 로는 추정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단 한 사람! 비류연을 제외하고서!

“과연 재미있군요.”

흥미가 이는 얼굴을 하며 비류연이 대답했다. 반응을 보인 사람은 그 하나뿐이었다.

“오호! 과연!”

종쾌가 감탄했다.

“자네는 노부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모양이로군.”

“물론이죠. 한마디로 재주껏 저 협곡을 뛰어넘어 보라는 이야기 아닙니까!”

비류연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틀릴 수도 있다는 가정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대답이었다.

그러나 종쾌는 맞는 걸 일부로 틀렸다고 할 만큼 심술궂지는 않았다.

“바로 맞혔다네. 정답에 대한 상품이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일세!

종쾌의 격찬을 받은 비류연은 무척이나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하나면 되나요?”

비류연이 검지를 하나 들어올리자 종쾌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면 되네!”

종쾌가 박자를 척척 맞추며 맞장구를 쳤다. 이 둘은 이미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버린 듯했다.

“무, 무슨 이야기인 거죠?”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알 수 없는지 남궁상이 얼빵한 얼굴로 물었다. 어느 정도 대가를 각오하고 있었건만, 비류연은 예외적으로 궁상에게 면박을 주지 않고 해 맑은 미소까지 덤으로 얹어주며 상냥하게 대답했다.

“즉, 그건 네가 바로 저 혈신일보(血神-步)라 불리는 협곡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이야기지!”

눈물 날 정도로 친절하고 정확한 설명이었다.

“예? 저, 저요?”

남궁상은 손가락으로 턱을 찌르기라도 할 기세로 자신을 가리켰다. 왜 이 자리에서 자신의 이름이 거론돼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인간 의 안면 근육을 최대한 활용해 만든 그의 표정을 반추해 볼 때, 그는 지금 이게 제발 농담이라고 말해 줘! ‘라고 생각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비류연의 반응 은 매몰찰 정도로 시원스러웠다.

“응!”

스스스슥!

그 순간 마치 그의 몸에 오물이라도 붙은 것처럼 옆에 있던 친구들이 순식간에 1장 밖으로 멀어져 갔다. 튀는 불똥에 데고 싶지 않다는 뜻이 분명했다.

정의(正義)란 그릇된 일에 대해 잘못을 바로잡고, 그릇된 일을 배제하며, 약자를 보호하고, 그러면서도 강요하지 않는, 불의에 저항하는 순수하고 고결한 정신이 아니던가!

남궁상은 오늘 그 정의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어릴 때는 분명히 그렇게 배웠는데? 왜 현실은!

궁상은 절망했다. 그를 편들어주는 우방(友邦)은 눈 씻고 찾아봐도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희생양은 한 명으로 족하고 자신들까지 괜스레 연좌될 필요는 없다며 자기가 모르는 곳에서 대동단결(大同團結)이라도 한 것만 같았다.

폐허가 된 우정의 화원에 피눈물을 흘리며 서둘러 유일한 버팀목이라 할 수 있는 진령의 그림자를 찾았지만 그녀는 어디로 숨었는지 옷깃 한 자락도 볼 수가 없었

다. 

‘배신자들!’

남궁상은 그동안 긴 세월을 들여 쌓아왔던 우정의 허망함을 뼛속 깊이 느끼며 바람에 흩어지는 먼지 같은 동료애의 최후를 지켜보았다. 애처롭고 서글픈 마음에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저 노사님들께 물어봐야 되는 게 아닐까요? 이런 중대한 사안을 대사형 혼자서 결정할 수는…

그러나 궁상은 곧 자신의 방정맞은 입을 원망해야만 했다.

근묵자흑(近墨者黑)!

팔은 안으로 굽지 밖으로 굽지 않으며, 가재는 게 편이었던 것이다.

염도가 남궁상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잘 해라! 날 실망시키지 말고! 안 그러면 죽는다!”

죽는다고? 그러나 그가 염도를 실망시켰을 때는 아마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부탁하네!”

빙검은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왜 아무도 이 결정에 이의를 달지 않는 것인가?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구원자를 찾았지만 그럴 만한 존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치명적인 결론은 번복되지 않았다.

‘난 이대로 살해당하고 마는 것인가?’

왜 또다시 이번에도 나인가? 남궁상은 그 점을 도저히 그냥 묵과默過 : 세 치 혀가 매끄러움에도 벙어리인 것처럼 입 닥치고 모른 척 넘기다)할 수가 없었다. 수상 했다. 물씬 풍겨 나오는 음모의 냄새를 그는 도저히 간과看過: 쌍 눈깔 멀쩡함에도 장님인 척하다)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단순한 피해망상일 수도 있었지만 주위 정황은 그의 심증에 확신을 더해 주고 있었다.

다시 자신이 지명(指名 : 격벽폐쇄식 주점에서 아가씨를 찍어 고르는 행위가 아니다)당했다. 과연 현재의 실력으로 저 반대편 땅을 살아서 밟을 수 있을까?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궁상은 자신의 실력을 과신할 만큼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 미래는 절망적일 정도로 회의적이었다.

아직 진령에게 청혼도 하지 못했는데……. 신혼초야도 못 보냈는데……. 이대로 죽기에는 앞으로 남은 창창한 인생이 너무 애처로웠다.

짐작 가는 일은 하나 있었다.

역시 자신의 별호 때문인가? 그는 낙뢰곡에서 있었던 비뢰쌍마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아 참! 이제는 비뢰쌍마가 아닌 건가? 그들은 그날 이름을 잃었다. 생명은 가까스로 보존했지만 대신 명예와 체면을 잃어버린 것이다.

역시 대사형은 말을 하지 않고 있을 뿐이지 자신의 별호에 불만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을 향한 대사형의 셀 수 없는 ‘갈굼’이 모두 납득이 갔 다.

‘뇌전검룡(雷電劍龍)!’

평소 과분한 별호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설마 이런 곳에서 이런 식으로 자신의 발목을 잡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이런 곳에서 살해당할줄이야…….

곱씹어 생각할수록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역시 분수를 몰랐기 때문인가! 역시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는 이름을 얻었다고 희희낙락(喜喜樂樂)거리는 게 아니었다.

자기 내면의 기나긴 방황을 끝낸 사내는 시선을 들어 협곡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미 희망이 고사(枯死)해버린 그의 눈에는 생명의 꿈틀거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새 궁상은 억센 풀들이 무성한 풀밭 위에 외로이 남아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다른 이들은 이미 저만치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후 흥미진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친구들은 저 멀리 안전한 곳에 앉아 목청을 돋우어 응원전을 펼치고 있었다. 한숨이 나올 만큼 훌륭하고 눈물나는(?) 우정이었다.

몇몇은 그가 실패할지 성공할지에 대해 내기라도 하고 있는지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그 중심에는 아니나 다를까 대사형 비류연이 있었다. 그는 과연 어디다 돈 을 걸었을까? 틀림없이 내가 실패한다는 쪽에 걸었겠지? 죽음이 임박해서 그런지 쓸데없는 데까지 괜히 신경이 쓰였다.

협곡의 반대편은 암벽으로 이루어진 풀 한 포기, 초록의 그림자 한 조각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단애(斷崖)였다.

조금 고개를 들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반대편 협곡의 끄트머리를 볼 수 있었다. 저쪽이 이쪽보다 약 칠, 팔 장(丈) 정도 더 높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즉 이 협곡의 틈새가 비록 이십 장 정도라 해도 저 반대편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거리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제길, 진짜 머네!’

희망이 고사한 빈터에 절망이 찾아들었다.

“혹시…, 발판 같은 건 없습니까?”

자신을 압도하는 웅장한 자연의 위엄 앞에 목을 움츠리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남궁상이 물었다.

“걱정 말게! 사람을 안일하게 만드는 그런 편의시설 따위는 이곳에 없다네!”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남궁상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기…길도, 디딤대도 없는 저곳을 맨몸으로 뛰어넘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제가 비록 농담을 즐기기는 하지만 그런 터무니없는 말로 사람을 웃기려 하지는 않 았습니다.”

“농담이라니? 자네 지금 무슨 중차대한 착각이라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절대 농담이 아니니 심려 놓으시게! 길이 없으면 만들어서 건너가면 되는 것 아니겠나?

아직도 자신의 코앞에 들이닥친 현실을 수용할 수 없었다. 청년은 또다시 반박했다.

“진짜 건너요? 진짜로?”

“뭐가 잘못됐나? 알 만한 사람이 당연한 걸 왜 자꾸 묻고 그러나? 사실 생각 같아서는 백 년 전의 상황을 좀더 생생하게 재현하기 위해 쇠뇌 발사 기관을 설치해야 만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도 있었지. 시험 도전자가 협곡을 도약하는 순간 일제히 발사되도록 말일세! 그러나…, 그 제안은 기각되고 말았다네! 안타까운 일이었지. 너무 무리한 요구는 하지 말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거든!

엄청난 일을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내뱉은 종쾌를 대표단 모두는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무리한 요구? 지금도 충분해요!’라고 남궁상은 발작적으로 외치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억제했다.

“왜 그러나? 한 명! 딱 한 명만 저곳을 건너갈 수 있으면 되네. 얼마나 쉬운 조건인가? 물론 밧줄을 사용하거나 타인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네. 그 이외에는 다 되니 알아서 방도를 강구해 보게.”

남궁상이 아무런 대꾸도 없이 침묵하자 종쾌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앞에 왔던 다른 곳 아이들이 이미 이곳을 수월히 건넜다네. 즉 건너는 게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이야기가 입증된 셈이지.”

남궁상은 물론이고 천무학관 대표단 모두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그런 중요한 사실은 미리미리 좀 말하란 말입니다!’라며 버럭 소리치고 싶은 것을 십 년 분의 자제력을 일순간에 소모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억누를 수 있었다.

“그, 그렇다면 마천각 대표단이 저희들보다 먼저 도착했단 말입니까?”

남궁상이 경악한 얼굴로 반문했다.

“그런 셈이 되겠지. 먼저 도착했을 뿐만 아니라 먼저 건너가기도 했지. 어여 하지 않고 뭘 그리 꾸물대는가? 여기서 밤이슬을 맞으며 오늘 밤을 지새울 셈은 아니 겠지? 이래봬도 산속이라 밤에는 매우 춥다네.”

“으으…음 넓군!”

다른 표현은 모두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졌다. 염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협곡 반대편까지의 거리를 대충 어림잡아 보았다.

15장? 아니다. 20장은 족히 될 성싶었다. 게다가 솟아오른 반대측 높이만 해도 칠, 팔 장은 족히 되어 보였다.

그러나 그 사이는 얇은 무명실 한 가닥도 놓여져 있지 않았다. 그저 이름 모를 산새들만이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정신없이 날아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산새들의 집단 서식지라도 있는 걸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저히 뾰족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걸 어떻게 궁상이가 넘을 수 있다는 거지?’

제자나 다름없는 아이라 그의 능력에 대해서는 이제 그의 친부모인 남궁세가주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는 염도였다.

비류연을 통해 염도와 인연을 맺은 이후 그동안 남궁상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진보라기보다 진화라 불러야 마땅할 발전이 었다. 아마 그의 부모라 할지라도 그의 진면목을 보고 나면 놀라 까무러칠 것이다.

그러나! 이번만은 염도로서도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젊은 생명 하나를 엉뚱하게 위로 올려 보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염 도는 비류연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만만!

요즘 들어 이제야 겨우 저 자신만만 덩어리에 대해 일부나마 이해하기 시작한 염도였다.

절대로 무모한 도박은 하지 않는 비류연이었다. 왜냐하면 무모한 도박은 경제적 손실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손해 볼 짓은 죽어도 하지 않는다는 게 비류연의 신조 였다. 반대로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죽어도 하는 것 또한 비류연의 신조이기도 했다. 그리고 염도 본인이 아는 바로는 그가 이제껏 도박과 내기에서 져본 적이 한번 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역시 잘못 건 건가…….’

갑자기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슬슬 비류연과 몰래 내기 건 은자 열 냥이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염도였다. 그러나 곧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야! 얼음땡이 그 자식도 저 녀석이 실패한다는 데 걸었어! 이번만큼은 내가 이길 거야!

그러나 그동안 크고 작은 내기의 전적을 살펴보자면 177전 177패! 단 한번도 비류연에게서 돈을 긁어내 본 적이 없었다. 비류연과는 두 번 다시 돈과 관련된 내기 를 하지 않겠노라 스스로 다짐도 해봤지만 자의와 타의, 자율 혹은 강압에 의해 또다시 비류연과 내기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내가 왜 그랬을까?’ 다시 한

번 반성하는 염도였다. 사실 수많은 도박꾼들이 도박판에서 패가망신하는 이유와 일맥상통하게 염도 또한 패배의 전적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욱더 승리에 대한 집 착이 끝 가는 데를 모르고 높아졌던 것이다.

그런데 비류연의 가장 무서운 점은 항상 말도 안 되게 터무니없는, 패배가 확실시되는, 승산(勝算)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도박에서 무슨 묘수를 부렸는지 기적처럼 이긴다는 것이다. 오오! 그렇다면 남궁상이 안전하다는 이야기?

순간 기뻤지만 금세 다시 시무룩해졌다.

“어라? 그럼 본좌가 또다시 패전견(敗戰犬 : 싸움에 진 개)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잖아!’

‘축하합니다! 178전 178패!’라는 현혹의 메아리가 그의 귓가에서 세차게 울려퍼졌다. 결코 달갑지 않은 상황. 갑자기 화장실에서 뒤를 안 닦고 나온 것처럼 뭔가 굉장히 이상야릇하고 찜찜했다.

‘얼래? 그러고 보니 나는 과연 저 녀석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걸까, 실패하기를 바라는 걸까?’

남궁상이 성공하면 그는 또다시 내기에서 패하고 덤으로 피눈물 같은 은자까지 뺏긴다. 반대로 실패하면 십중십전(中) 그는 사망 당첨이지만 비류연으로부 터 첫 승을 따낼 수 있다. 그러나 제자나 다름없는 녀석이 사망 당첨되는 걸 바라는 사부는 이 세상에 없다. 아마도!

갑자기 계산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뭐가 이렇게 복잡해?’

자신의 모순된 생각을 발견한 염도의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기 시작했다. 내가 겨우 이 정도의 인간이었던가? 갑자기 너무나 원초적이고 본능적이며 순수하고 정직한 자기 자신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덩달아 인간에 대한 심한 회의가 일었다.

“저어기, 갑자기 궁금해지는 게 하나 있는데요…….”

남궁상은 용기를 내어 말문을 열었다.

“응? 뭔가?”

“혹시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노인은 잠시 어이가 없는 듯했다. 초롱초롱 간절하게 빛나는 저 두 눈에 담긴 걱정근심이 무엇인지는 환갑 두 번 지낸 폭삭 늙은 그의 눈치로도 금방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노인이 크게 홍소를 터트렸다.

“허허허허허! 알 만한 사람이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다하다니! 걱정 말게나! 절대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깐 말일세.”

남궁상도 안심한 듯 덩달아 함께 웃었다.

“하하하하하! 그렇죠? 그럴 리가 없겠죠! 제 생각이 기우였던 것이 틀림없군요. 설마 저 밑에 아무런 안전장치도 사고 대비책도 없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일(言語道 斷이겠죠.”

남궁상은 참 재미있는 농담에 오래간만에 한참 웃는다는 듯이 통쾌하게 웃었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파안대소하던 종쾌는 더 이상 웃지 않고 있었다. “걱정 말게, 걱정 마! 저 절벽 밑에 안전망 따위를 안일하게 설치해 자네들의 투지와 각오를 무디게 만들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 말일세!’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는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순간 남궁상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예에? 그럼 저 밑에는 도전자의 생명유지를 위한 아무런 안전장치도 되어 있지 않다는 그런 말씀이십니까?” 더 이상의 황당한 말로 저를 난처하게 만들지 말아주세요, 라는 깊고 간절한 뜻이 담긴 말이었다.

그러자 종쾌는 괴생물을 보는 듯한 눈초리로 남궁상을 쏘아보았다. 궁상은 찔끔했다.

“자네는 혹시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문다는 옛 속담을 들어봤는가?”

“예! 물론 들어보았습니다만. 그것이 이번 이야기와 도대체 무슨 관계가…….”

“관계가 있지! 그것도 아주 밀접한 관계가 말일세!”

남궁상의 말을 단호하게 자르며 종쾌가 외쳤다.

“위의 속담은 바로 인간이 극한상황에 몰리면 평상시보다 수십 배에 달하는 잠재능력을 발휘한다는 아주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네!”

남궁상의 표정이 어이없음의 물결에 삼켜지며 어벙하고 바보스럽게 변했다.

“저, 그건 좀 잘못된 해석 아닌가요? 내재(內在) 의미가 너무 확대해석된 것 같은데요? 게다가 그 속담의 주체는 쥐이지 인간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자 노인은 책망어린 시선으로 미숙한 젊은이를 쳐다보았다.

“사소한 것은 넘어가게나, 사내대장부가! 쥐나 인간이나 다 같은 생물 아닌가. 게다가 인간이 극한의 상황에 몰리면 한계 이상의 능력을 발휘한다는 이야기는 이 것 외에도 기타 발견 사례가 적지 않네! 때문에 안전그물망 따위로 도전자가 겨우 획득한 극한상황과 그 때문에 발생되는 결의와 각오, 투지를 무디게 만드는 참혹 한 짓을 어찌 경망되이 저지를 수 있겠는가!”

노인의 생각과 의지는 천 년 세월을 지나온 거암처럼 확고부동했다.

“음음! 그럼 그렇고말고!”

옆에서 비류연이 다 납득하고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설마 동조한단 말인가? 대표단들의 어이없어 하는 시선이 비류연의 몸에 사정없이 꽂혔지만 그는 아무런 감각도 감흥도 없는 모양이었다.

“이, 이렇게 억지스러울 수가…….?”

가슴 속 마음의 호수에서 절망이 소용돌이쳤다. 그러나 남궁상은 한번 더 용기를 짜내보기로 했다.

“그러니깐 노 선배님의 말씀은…, 만일 저기에 도전했다가 떨어지게 되면…….”

종쾌는 남궁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는 데도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답해주었다. 용기는 가상했지만 결과는 확인사살.

“자네는 생긴 것답지 않게 당연한 것을 계속해서 묻는군, 그래! 떨어지면 죽는 거지 뭘 어떻게 하겠나? 혹시 운이 좋아 물속에 떨어지면 행여나 만분의 일 확률 정 도로 살아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러니 일찍부터 희망을 버리지는 말게나!”

노인은 저 만분의 일이란 확률이 천 배나 축소시킨 것이라고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남궁상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다시 한번 깎아지른 낭떠러지 아래를 바라보 았다. 노인의 단언대로 인명의 귀중함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그물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저 밑바닥으로부터 이리저리 삐죽이 솟아 있는 암초들에 부딪치며 세차게 흘러가는 계곡 물소리가 반향을 일으키며 들려왔다.

너무 깊고 너무 어두웠다. 이 위에서는 물 색깔조차 구분할 수 없다. 그저 암흑과 어둠이 거대한 아가리를 벌린 채 이제나저제나 떨어질 먹이를 기다리고 있는 듯 한기괴하고 끔찍한 형상이었다.

남궁상은 다시 한번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시험삼아 꽤나 묵직해 보이는 돌멩이 하나를 협곡 아래로 떨어뜨렸다.

이 실험은 비류연과 염도, 빙검에게까지 흥미를 유발시켰는지 그들 삼인 또한 절벽가에서 함께 귀를 기울여 보았다.

쉬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한참을 떨어져 내려가던 돌멩이는 곧 서서히 절벽 사이로 부는 바람에 묻혔다가 점점 더 아득히 멀어졌다.

퐁!

마침내 돌멩이가 물에 떨어진 것은 소리 듣기를 포기했을 바로 그쯤이었다. 엄청난 청각수련을 쌓은 그들이었기에 들을 수 있었던 아주 작은 소리였다. 남궁상은 돌멩이 대신 그 자신을 그 자리에 대치시켜 보았다. 저 돌멩이의 운명이 자신의 운명이 되었을 때 과연 어떻게 될까 하는 상상에 몸을 실었다.

쉬우우우우우!

차가운 바람이 그의 얼굴을 때리며 팔층 지옥 밑바닥까지 연결된 듯한 어두운 바닥이 점점 더 자신에게로 다가온다. 죽음의 신이 스산한 미소와 함께 환영하듯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떨어진다. 떨어진다. 떨어진다. 그리고…, 계속 떨어진다.

잠시 남궁상은 멍하니 자기만의 세계에 완전히 동화되고 말았다.

“너 지금 뭐하냐?”

“네! 아직 떨어지는 중입니다.”

여전히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채 남궁상이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물론 비류연은 이해하지 못했다.

남궁상이 자신만의 세계에서 깨어난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크아아아악! 허어어어억!”

“뭐야? “

“뭐냐?”

“누구냐?

챙! 챙!

챠랑! 챠랑!

슉!슉!

느닷없이 터져 나온 괴성에 염도와 빙검은 물론이고 비류연과 멀리 떨어져 있던 대표단들까지 깜짝 놀랐다. 얼마나 다급하고 끔찍한 비명이었는지 일순간 암살자 들이 재습격해 온 줄 알았던 것이다. 간신히 어이없는 돌발사고였음을 알게 된 후 제각기 뽑아든 병장기를 다시 회수하기는 했지만 남궁상에게 의혹어린 시선이 향 해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화들짝 놀라 현실 세계에 돌아온 남궁상의 얼굴은 사후 세계를 방문하고 돌아온 듯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탈색된 상태였다. 게다가 전신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 어 있었다. 부릅떠진 그의 충혈된 두 눈이 지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허억! 허억! 허억! 헉헉헉!”

남궁상은 폐가 터질 것처럼 숨을 거칠고 가쁘게 몰아쉬었다.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했다.

“고기다짐…….?”

“뭐?”

비류연이 미약한 목소리를 제대로 듣기 위해 좀더 귀를 기울였다.

“빨간… 고기다짐…….”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궁상이가 중얼거렸다.

‘뭔 소리야?’

그러나 비류연의 의혹에도 남궁상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도대체 뭘 보고 돌아온 거지? 이상한 녀석!”

비류연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녀석! 많이 망가졌군!”

돌발상황을 일으켜 주위의 이목을 단숨에 끌어들인 남궁상이 안정을 되찾은 것은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른 후였다. 점점 더 현실이 피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서 떨어져서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은 참으로 시건방진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안 돼! 패배주의는 아무 것도 낳지 못해! 긍정적! 긍정적!”

남궁상은 연쇄반응처럼 줄줄이 이어지는 불길한 상상을 내쫓기라도 하는 것처럼 세차게 도리질치며 자신에게 다짐하듯 외쳤다.

“괜찮아! 여기 떨어져도 살아날 수 있어! 밑에는 물이야! 밑에는 물! 초고수가 되려면 한 번쯤은 반드시 절벽에서 떨어져야 한다는 옛말도 있잖아! 힘내라, 남궁 상! 이건 아무 것도 아냐! 넌 살 수 있어!

자기 최면을 통해 샘솟는 공포를 틀어막고 억제하려는 듯 남궁상은 주문 낭송이라도 외는 것처럼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소리는 비류연에게도 잘 들렸던 모양이다. 그는 가볍게 한마디만 해주었다.

“그치만 밑은 암초투성이인걸?”

‘헉! 이미 정해졌다는 건가?’

비류연의 목소리는 무엇인가를 이미 기정사실화하려는 듯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따라 비 오듯 흘러내렸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떨어지면 당연히 죽는걸! 아무나 절벽에서 떨어져서 살아남는 줄 아니? 하늘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절벽에서 떨어져 서 살아남을 수 없는 거란다.”

위로나 격려로 용기를 북돋아주지는 못할망정 힘겹게 남은 불씨와 그 불씨를 다시 일으키려는 노력에 가차없이 찬물을 끼얹는 비류연이 원망스러웠다.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돌멩이에도 힘없는 개구리는 내장을 진상하며 격살당하는 법!

눈물이 핑 돌았다.

뿐만 아니었다. 현실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냉혹했다. 그의 사적인 감상 따위는 거치적거리기만 할 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듯했다.

종쾌가 다시 한번 재촉한다.

“뭐하는가, 자네? 빨리 안 뛰고? 뒤에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누군가 한 명은 저편으로 건너가서 줄사다리를 이쪽으로 내려줘야 한다네! 그러기 싫으면 발걸음을 돌려서 돌아가고.”

천길 낭떠러지가 거짓도 농담도 아닌 현실이 되어 그의 앞에 가로 놓였다. 협곡의 저편 언덕이 밤하늘의 달과 별만큼이나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마치 자신이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다른 세계의 다른 장소 같았다.

이때 그의 초조한 눈에 진령의 얼굴이 들어왔다. 걱정 때문인지 안색이 무척 좋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신혼초야는 고사하고 아직 그녀에게 매파(媒婆)를 보내 정 식으로 청혼도 못하지 않았는가! 그가 예전에 남몰래 수립해두었던 장래 삼십 년 오순도순 계획’은 아직도 걸음마 단계였다.

남궁상의 눈이 굳은 결의에 의해 날카롭게 번득였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역시 그만두자!’

무모와 용기는 구분되어야 하는 법!

남궁상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냉큼 비류연을 향해 돌아섰다.

모종의 결의로 잔뜩 응고되어 있던 남궁상의 얼굴이 더운물에 설탕 녹듯 스르륵 풀렸다.

“헤헤헤! 대사형!

남궁상은 호수 위에 반사되는 빛의 편린처럼 지나치게 반짝반짝거리고 일렁일렁거려, 때로는 사람들의 속을 울렁울렁 미식거리게 만드는 눈동자로 비류연을 물 끄러미 바라보았다.

생사의 간두에 서 있었던 탓일까? 이 무모한 행동으로 미루어보아 이미 이성을 상실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어째 상태가 참으로 양호해 뵈지 않았다.

스스로 온정과 애정이 넘친다고 자부하고 있는 자칭 평화주의자 비류연은 매몰차게 제자 겸 사제라는 희한한 이중관계를 지닌 이 청년을 매몰차게 내치지 못했 다.

그는 그저 상냥하게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해 줄 뿐이었다.

“궁상아!”

봄날의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 그것은 남궁상의 가슴에 희망의 불꽃을 활활 지피는 풀무질이기도 했다.

“예! 대사형!”

그의 어깨를 희망의 북처럼 힘차게 두드리며 비류연은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너도 무가의 자손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았겠지?”

여기서 비류연은 잠시 한 호흡을 쉬었다.

치렁치렁한 앞머리를 피해 빠끔히 드러난 쥐 잡아 먹은 듯한 붉은 입가에 점점 짙어지는 소름끼치는 미소를 보며 남궁상은 자신의 마음에 드리워진 불안의 그림자 가 점점 더 농밀하게 증식 확장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그림자는 점차 빛이 드리워졌던 영역을 잠식해 들어가 빛과 희망으로 둘러쳐져 있던 장벽을 넘어 긍정적인 사고와 희망이 은혜 깊은 빛을 뿌리고 있던 하얀 영역까지 범람, 침범하기 시작했다.

비류연은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사자는 자신의 새끼를 강하게 키우기 위해 만장단애에서 떨어뜨린다!”

그 순간 남궁상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존재하는 전부를 겸허히 받아들인 다음 조용히 돌아섰다. 오늘따라 유달리 그의 두 어깨가 힘없이 축 처져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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