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3권 6화 – 도제 용경의의 두 번째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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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3권 6화 – 도제 용경의의 두 번째 증언

도제 용경의의 두 번째 증언

“앞의 이야기는 두 다리 없는 종씨 늙은이에게 들었으리라 생각한다.”

폭언에 가까운 서슴없는 말에 좌중들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그러나 본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그후에 이야기는 이 외팔이 도객이 계속해주지.”

그와 함께 용천도의 맹위를 떨쳤던 우수의 소매가 바람에 펄럭였다.

“우리는 부끄럽게도 감히 누가 그의 수급을 베어 일약 강호의 영웅이 될 것인가 하는 허망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지. 첫 번째 관문은 실패가 되겠지만 그에게 상 당한 육체적 타격을 입혔을 터이고 우리는 상처 입은 사냥감만 잡으면 된다고들 생각하고 있었어. 단지 누가 그의 목을 베는 영예를 안을 수 있을지에만 관심이 쏠 려 있었다네. 참으로 오만했었지. ‘그’의 능력을 익히 알고 있던 우리가 어떻게 그런 대담함과 자신감과 오만감을 그때 당시 지닐 수 있었는지 아직도 의문이라네. 그건… 그래, 마치 열병 같았지…….”

“쪽수의 힘이었겠죠. 무리를 이룬 늑대는 사자도 이기니까요.”

비류연이 서슴없이 그 해답을 내놓았다.

“류연!”

너무나 거리낌없음에 나예린이 작은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이 사람은 왜 이리도 지나치게 거리낌이 없는 걸까? 그러나 비류연은 들은 체 만체다.

노인의 입가가 씁쓰레한 고소로 일그러졌다. 불호령이나 호통은 없었다.

“맞아! 자네 말이 맞아. 우린 그의 능력을 한참이나 과소평가했지.”

활기찼던 노인의 얼굴에 아픔이 스치고 지나갔다.

“난 244명의 도객들과 함께 이곳에 자리를 잡고 도진(刀陣)을 구성했다네. 종쾌는 자신의 첫 번째 관문에서 그자의 발길을 제지할 수 있다고 큰소리 쳤지만 난 종 쾌가 실패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

예상대로 ‘그’는 도제 용경의가 버티고 있는 두 번째 관문에 나타났다. 하지만 그의 몸에 단 한 군데의 상처도 없다는 것은 정말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때 도제는 종쾌에게 엄청난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때는 정말 종쾌를 잘근잘근 씹으며 욕을 바가지로 했지. ‘입만 산 바보 같은 놈, 그렇게 큰소리 탕탕 치더니 겨우 이 정도였냐! 뒈져버려!’라고 말일세.” 하긴 그때는 이미 종쾌가 살아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 ‘그’가 여기까지 올라온 것이 무엇보다 확실한 정황증거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나중에 종쾌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정말 놀랐지. 죽은 망자가 돌아온 줄 알았다네. 비록 두 다리를 잃어버린 다리 병신이 돼버리고 말았지만 말일세! 뭐 외팔이 병신과는 딱 어울리는 한 쌍이지만…….”

‘그’가 그들이 함정을 파고 올가미를 씌우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두 번째 관문으로 왔을 때 비로소 도제와 좌중들은 자신들의 예상이 한참이나 빗나갔음을 알았 다. 그는 헤엄을 즐기는 어부처럼, 산타기를 즐겨하는 등산가처럼 온몸에 여유가 넘쳐흘렀다. 마치 뒷동산에 산책이라도 나온 것 같았다.

“그의 눈에는 244명에 이르는 칼날의 숲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네. 그저 이름 모를 들꽃들이 옹기종기, 두런두런 피어 있고 이름 모를 관목들이 듬성듬성 자라 있 는 숲속에 놀이 삼아 걸어 들어온 것처럼 보였지.”

그는 두려움이란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천겁혈신의 머리를 지나가던 사과나무에 열린 사과처럼 수확의 시기가 오면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딸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겠나! 그 것이 아마 집단으로 몰려 있다는 군중심리의 맹점이자 무서운 점이겠지. 한 곳에 잔뜩 몰려 있다고 대가리 수를 믿고 그렇게 까불었으니 말이야. 철없는 짓이었지! 세상의 무서움을 모르고 말이야…….”

도제는 그때의 실책을 후회하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후회가 절절이 느껴졌다.

그 순간 소슬한 바람이 좌중들의 어깨를 쓸고 지나갔다.

과연 천겁혈신이란 이름은 명불허전이었다.

244대 1임에도 그 누구도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어 말했다.

“여기는 날 재미있게 해줄 수 있는가?”

야생의 늑대들이 때로 사자(獅子)보다 무서운 것은 쪽수를 모아 군집을 이루기 때문이다. 무리를 지어 떼거지로 몰려다니는 늑대들에게는 아무리 힘세고 용맹한 사자도 길을 비켜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도진을 펼친 244명의 도객 중 그 누구도 자신들의 우위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244마리의 늑대가 단 한 마리의 사자를 누르지 못한 것이다.

아니, 그때 이미 그들은 244마리의 늑대가 아니라 244마리의 토끼로 둔갑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토끼는 244마리든 천 마리든 사자에게 아무런 두려움을 주지 못 한다. 단지 그것들은 사자의 노리갯감이나 간식거리가 되는 것으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뿐인 것이다.

“유희 준비는 끝났는가? 무엇으로 날 즐겁게 해줄 텐가?”

용경의가 앞으로 나서서 대표로 대답했다.

“우리는 당신의 칼놀림을 보고 싶소. 우리의 지배자로 어울린다고 생각한다면 여기서 그 도기(刀技)를 증명해 보이시오.”

“그는 크게 우리를 비웃었지. 무척이나 유쾌한 듯했네. 그러고는 비웃는 목소리로 말하더군.”

““차라리 물고기에게 헤엄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고, 원숭이에게 나무 타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게 더 빠르지 않겠나? 하찮군! ‘

비웃음이었지만 그 누구도 감히 그 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자신들을 추스르는 것만 해도 그들은 벅찼던 것이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증명해 달라면 증명해주지. 하지만 자신이 보지 못한 것, 보지 못했던 것, 그리고 볼 수 없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만 하지. 그 대가는 존재의 소멸. 과연 그만한 용기와 각오가 되어 있는가?”

“나는 아직도 그때 그 조소어린 눈빛을 잊지 못한다네! 깨어 있을 때는 물론이고 잠잘 때도 마찬가지라네. 아직도 그 눈빛이 어디선가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 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 그 눈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아니 벗어나기 위해 백 년 동안 이 자리를 떠나지 않았지만 나의 심신은 아직도 그때의 눈빛을 떨쳐버릴 수 없다네.”

갑자기 혈기방장하고 호쾌하기 그지없던 그가 순간 백 년은 더 늙어 보였다.

그때를 떠올리자 노인은 한없이 왜소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그런 그의 자신감 상실이 외부로 반영된 모양이었다.

“그 대가는 이미 각오했던 바였지! 희생 없는 결실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깐! 재롱을 부려보라는 말에 분노도 하지 못한 채 우리 는 약속된 진법인 이백사십사 군랑낭아살호진(二百四十四 群狼狼牙殺虎陣)을 펼쳤다네. 이름 그대로 조금은 비겁할지 모르는 진이었지만 그때는 아무도 그것을 비겁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리고 그자의 손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위로 들어올려졌지.”

이야기를 하다 말고 도제가 느닷없이 물었다.

“검진이나 도진의 무서운 점이 뭔 줄 아나?”

아무도 선뜻 그 화두에 답변하는 이가 없자 마침내 공인우등생 모용휘가 나서서 대답했다.

“다수로 소수를 상대한다는 점입니다.”

그 대답에 도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다수로 소수를 상대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유효하고 경제적인 동선(動線)을 창출할 수 있다는 점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다수의 기세를 하나로 모아 소수의 기세를 압도적으로 압박할 수 있다는 점이라네. 무형의 기세가 버둥거리는 나비를 옭아매는 거미줄처럼 그 몸을 속박하는 것이지. 대부분 그 기세 때문 에 싸워보기도 전에 지는 게 보통이라네. 그 다음은 그 결과를 확인하는 단순 작업일 뿐이지! 그러나……

도제의 시선은 어느새 다시 백 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그는 마치 아침산책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여유로웠다. 도제는 아직도 그때의 한 수를 잊지 못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가볍게 올려진 손! 그때는 그 손이 일으킬 가공할 결과에 대해 짐작한 이가 아무도 없었다. 올라갔던 손은 그저 올라간 만큼 다시 내려왔다.

그리고…, 붉은 길이 열렸다.

짙은 혈향과 함께 붉은 피로 이루어진 운무(雲霧)가 시야를 가득히 메우는 동안에도 도제는 한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인식할 수가 없었다. 팟!

따끔한 고통과 함께 오른쪽 볼에 긴 절상이 생겨나며 갈라진 피부 틈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당했는지 기억하려 해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이미 신체의 일부 중 하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뺨의 상처에서 오 는 만큼의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몽중(中)에 일어난 일이라도 되는 양 모든 것이 현실과 동떨어져 보였다. 몸이 의지할 곳 없이 세상을 부유하고 있는 듯했다. 자신이 두 발 딛고 서 있는 곳 은 현실이 아니라 꿈의 들판 한가운데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라? 악몽인가? 빨리 깨어나지 않으면…….’

그러나 그는 악몽의 가위눌림에서 결코 깨어날 수 없었다. 대신 눈앞이 캄캄해지며 전신의 신경을 태우는 듯한 충격이 그를 덮쳤다.

“그것은…, 그것은 사람의 기술이 아니었다네!”

아직도 곤히 자고 있던 자신을 벌떡 깨우는 가혹한 현실의 손찌검.

그때의 한 수만큼 두려운 한 수는 도제 용경의의 전 생애를 돌아봐도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기술, 초식이라 불릴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그가 본 것은 그저 암흑의 칼날처럼 어두운 검은 섬광뿐이었다.

도제라 불렸던 노인은 그때를 회상하며 애써 침착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그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고 있는 듯했다.

오한이 스멀스멀 대표단들의 몸을 타고 정수리 백회혈까지 기어올랐다. 공포는 활화산에서 분출되어 나온 시뻘건 초열의 용암이 되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돌멩 이처럼 집어삼킨 다음 한데 뭉뚱그려 녹여버렸다. 그것은 대자연의 재해와 같아 어떠한 저항도 무의미했다.

정지된 시간 속에 장식된 인형들처럼 사람들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 압도적인 신위에 아무도 선뜻 달려드는 사람이 없었다. 군랑낭아살호진의 핵을 맡고 있던 도제 용경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피의 길을 산책이라도 하듯 여유롭게 걸어갔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들의 주인은 석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 사람들 같았다.

그의 산책이 멈춘 곳은 거대한 윤기 나는 검은 벽이 병풍처럼 서 있는 곳이었다. 그 앞에 우뚝 멈춰선 그는 명도를 감정하는 감정사처럼 조심스레 손끝을 통해 촉 감을 느껴본 다음 손등으로 두드려 보았다.

그가 벽을 감정하는 동안 그의 등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었다. 자신의 배후를 상대에게 무방비로 내주는 것은 강호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일이었고 거기 에는 ‘나 죽여줍쇼!’와 마찬가지의 뜻이 담겨 있었다. 그자의 텅 빈 등은 향긋한 미녀의 다정한 손길보다도 더 무서운, 주체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기다리지 말고 얼른 공격하라고 도발이라도 하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도 선뜻 그 허점을 비집고 들어가 공격하려는 이가 없었다. 도제 또한 명령 내리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아직 그들은 농밀한 혈향에 취한 채 공황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딱 한 명 있었다. 그는 태도문(太刀門)이라는 당시 백도의 이름 있는 도문의 문주였는데 천겁령과의 싸움에서 다섯 명의 동생과 세 명의 아들을 잃은 사람이 었다. 명(名)은 문석태, 별호(別號)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큰 칼이라는 의미의 경인태도(驚人太刀)였다.

그리고 그는 그 별호만큼 좌중을 놀라게 했다. 보이지 않는 결계라도 펼쳐져 있는지 어느 경계선을 지난 그의 몸이 서른여섯 등분으로 깔끔하게 쪼개졌던 것이다. 비명도 없었고 튀는 피도 거의 없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심장은 철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할 것이다. 푸줏간의 고기가 솜씨 있는 주방 장의 원숙한 식칼에 썰려도 이렇게 깔끔하고 정갈하게 썰리지는 못할 것이다.

여전히 꿈의 연장 같은 이 상황을 사람들이 현실로 인식하는 데는, 아니 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후로는 감히 그에게 덤비려는 이가 없 었다.

‘그’는 그 벽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물론 사람들은 그 벽이 어떤 벽인지 잘 알고 있었다. 웬만한 도검으로는 상처 하나 나지 않는 무쇠보다도 단단한 벽이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기념서명이라도 하나 남겨야 할까?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시끄러운 개들을 조용히 시키기 위해서는 때론 주인의 위엄을 보여줄 필요가 있을지 도 모르지!

그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바위 위에 가져다 댔다.

슈슈슈슈슉!

쇠보다 단단하다던 바위의 자존심이 산산조각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파악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그의 주위 로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검기가 거미줄처럼 뿜어져 나왔다 신기루처럼 사라졌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감각의 착각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거울처럼 매끄럽던 검은 바위벽의 표면에 거미줄 같은 무수한 상처가 만들어져 있었다.

잠시 후 마침내 자신의 할 일을 마친 그가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응? 아직도 거기들 서 있었나?”

수치로 인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말 한마디 대꾸할 수 없는 자신이 한없이 비참해졌다.

“아직도 계속해서 덤빌 용의가 있는가?”

응답 없는 메아리처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용의도 용기도 없는 모양이로군. 차라리 덤볐으면 좋았을 것을.

물론 덤비면 모두 저 세상으로 보내주겠지만 귀찮아서 그만두겠다는 그런 투였다.

도제의 무릎이 털썩 접혔다. 그의 두 눈에서 통한의 눈물이 닭똥처럼 흘러내렸다. 태어나서 이런 수모와 치욕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 무능하고 무력 하게 느껴지는 것도 처음이었다.

“이제 그만 올라가도 되겠나?”

그가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오, 올라가시오.”

당시 이름 있는 도문(門)의 고수라는 고수는 몽땅 끌어모아 심혈을 기울여 만든 진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발동되어 보기도 전에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참담한 실패였다.

도진의 구성원 중에는 명문의 종사급에 해당되는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도제의 결정에 반발하지 않았다. 그저 하늘을 볼 면목이 없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땅바닥만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사실 ‘그’의 행동은 지금 이 자리에서 몽땅 망가뜨려버리면 나중에 가지고 놀 장난감이 없어지니까 할 수 없이 남겨놓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의 이런 행동이 불러일으킨 치욕감이라는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노부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지. 그때만큼 자신들이 초라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네! 그리고 다들 약속했지.”

그것은 말이 필요 없는 약속이었다.

“그때 그 자리에서 있었던 일은 불문에 붙일 것!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 것!’

만일 그때의 진실이 밝혀지면 체면과 명예를 중시하는 강호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마 그 사실이 드러났다 해도 그 당시에는 그들을 비 난하는 이가 없었을 것이다.

“……”

무거운 침묵이 거대한 돌덩이처럼 좌중을 내리눌렀다. 암울함이라는 장막이 그들 주위를 빙 둘러쳐져 있는 것 같았다.

“자네들도 눈치챘다시피 이게 바로 그때의 그 벽일세. 즉 이 벽에 남아 있는 것이 바로 그 상흔이라네. 백 년의 풍상 속에서도 아직까지 생생히 남아 있는 당시의 증거지. 노부는 요즘도 이걸 볼 때마다 그때의 일이 꿈이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되새기곤 한다네. 그만큼 그때의 일은 비현실적이었지.”

눈과 귀와 심장 속에 새겨진 그 한 수를 노인은 두 눈에 흙이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이것을 겁흔벽(劫痕壁)이라고 이름 부른다네!”

도제는 검은 벽을 손으로 가리키며 계속 말했다.

“사실 최초에 노부가 그에게서 느낀 감정은 공포보다는 경외감이었다네.”

압도적인 한 수에 담긴 경이적인 신위! 그것은 그가 추구하는 극강(極强)의 도(道)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가 떠나기 전에 남긴 말이 있었지. 이 한 수를 파훼할 수 있다면 언제든지 도전하라!’그래서 나는 이곳에 앉아 이 벽을 지키며 초식의 파훼법을 찾고 있었네. 그리고…….”

“그리고?”

“이런 말도 덧붙였지.. 으으으으!”

백 년의 시간을 단숨에 도약해 되살아난 분노가 그의 마음에 불꽃을 일으켰다.

““다음에 만날 때는 재미있는 놀이상대가 돼 있었으면 좋겠군! ‘그자는 그렇게 말했다네.”

겨우 그 정도 존재밖에 되지 않는 자신들의 현실을 깨닫는 게 얼마나 참담하고 가혹한 일이었을지 명백했다.

빙검의 상식은 지금 크나큰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공간 속에 남아 있는 검기(劍氣)!

‘그’가 새겨놓은 공포의 잔재는 백 년이 지나도록 비바람의 풍화에 굳세게 견디며 그 공포를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빙검은 아직도 이 상흔 하나하나에서 전해 오 는 전율스런 검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실로 무시무시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한 가지 단면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대단하고 무시무시한 공포로 점철된 인물인지 능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챵!

빙검이 느닷없이 검을 뽑아 쥐었다. 만년빙을 깎아 만든 듯 차갑게 빛을 발하는 푸른 검신을 타고 투명할 정도로 푸르스름한 검기가 맺혔다. 공기마저 얼어붙게 만 드는 한기가 창백하게 빛나는 검극을 중심으로 사위로 뻗어나갔다.

몇몇 관도들이 얼어붙는 한기에 몸을 움츠렸다.

“호오!”

도제의 눈에 이 ‘검잡이’에 대한 경탄이 잠시 떠올랐다.

참(斬)

소리도 없이 검이 휘둘러졌다.

오석(烏石)의 벽에 또 하나의 검흔이 새겨졌다. 앞에 남긴 도흔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의 것이었다. 지켜보던 관도들의 입에서 감탄과 경탄이 어우러진 찬

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정작 빙검 자신은 만족스럽지가 않다.

그 옆에도 몇몇 다른 도전자들의 검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마 이 중에는 도제의 것도 있으리라.

깊이는 훨씬 얕았고 폭은 훨씬 더 두꺼웠다. 날카로운 맛이 부족했다. 원본과 대조해 봤다.

‘그가 남겨놓은 검흔에는 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불가해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말로는 설명하기 힘들지만 각각의 상흔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백 년의 세월이 시간의 강물로 흘러갔다지만 졌다는 느낌이었다.

잠시 자신의 웬수가 하는 꼴을 잠자코 지켜보던 염도가 몸을 움직였다. 빙검이 저런 행동으로 관도들의 탄성을 자아내고 있는데 자기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위 기 위식이 든 것이다. 그리고 경쟁심도 발동되었으리라.

어쨌든 각설하고 얼음땡이가 자신의 콧김 닿는 곳에서 잘난 척하는 꼴은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염도가 겁흔벽 가까이 다가가자 먼저 주작단들이 뒤로 조금 물러났다. 그것은 오랜 경험에서 얻어진 생활의 지혜였다.

“흠!”

그는 빙검에게 도전적인 눈빛을 한번 보낸 다음 도제 용경의에게 권하며 간략하게 예를 표했다. 같은 도객으로서 선배에 대한 예의였다. 그것은 무척 염도답지 않은 행동이었기에 그를 아는 몇 사람을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스릉!

그의 도집에서 불꽃을 응집시켜 만든 듯한 붉은 도신이 드러났다.

이윽고 일렁이는 불꽃색 도기가 도신 전체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홍염(焰)의 도극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열기에 몇몇 관도들이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검염 기(劍焰氣)였다.

도제의 눈이 또 한번 크게 떠졌다.

콰콰쾅!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 산이 흔들리고 대기가 진동했다. 빙검의 검이 누구보다 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염도의 도는 누구보다도 큰 굉음을 일으켰다.

“콜록, 콜록!”

뿌옇게 솟아오른 먼지 구름이 사람들의 호흡을 잠시 곤란하게 만들었다. 주작단만큼 뒤로 물러나지 않은 사람들은 튕겨져 나오는 자잘한 돌멩이에 몸뚱이를 고스 란히 헌납해야 했다.

“응? 아니 자네, 벽을 도끼로 찍었나? 무슨 도흔이 이 모양인가?”

도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척 보기에도 두 사람의 차이는 확연했다. 빙검의 검흔이 실처럼 가늘고 예리하며 깔끔하다면, 염도의 도흔은 거대한 도끼(巨斧)로 냅다 찍은 듯 굵고 깊고 거칠었 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거력만은 확실히 느껴졌다.

“역시 섬세하지 못한 아저씨라니깐!”

비류연이 투덜투덜 옷의 먼지를 털며 딱 한마디로 평했다.

두 사람의 우열은 끝내 판명되지 않았다. 너무나 성향이 틀린 무공이라 흔적만으로는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일도단애라 불리던 도제 용경의라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검흔은 누구 것입니까? 오랜 전 것이 아닌 새로 생긴 것처럼 보이는데요?”

모용휘가 겁흔벽에 새겨진 검흔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폭은 넓고 정교한 맛은 없지만 무시무시한 힘과 기세가 담겨져 있었다.

“호오, 눈썰미가 좋군! 그건 마천각의 한 아이가 남긴 것이라네.”

‘마천각(閣)!’

이 세 음절의 말에 좌중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들이 앞으로 맞닥뜨려야 할 상대인 것이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몽땅 그 검흔을 향해 쏠렸다. 적 의 능력을 먼저 알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는 이야기와 같았다. 너나 할 것 없이 한 가닥 검흔을 기초로 상대방의 실력을 유추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마천각의 대표단들은…….?”

염도가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질문했다.

“아! 그 애들!!”

역시 제2관문마저도 무사히 통과한 것인가 하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을 때 전혀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걔네들! 묻혔어.”

무척이나 평온한 목소리. 아주 간단하고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 대한 문답의 한 부분 같았다.

“무, 묻혔다니요?”

처음에는 도통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때문에 도제는 힘들게 그들의 이해를 도와야만 했다. 노인을 쓸데없이 혹사시킨다고 투덜거리며.

단 한마디로 이해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은가! 두 마디 세 마디 구구하게 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혀를 놀려 말을 하게 된 이후 오해를 밥 먹듯 하는 동물이다. 때문에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세세한 설명이 필요불가결할 때가 있다. 특히 독해력이 턱없이 부족한 인간들에게는 말이다.

도제도 수고를 감수하기로 했다.

“땅에 ‘파! ‘묻혔다는 이야기라네.”

“땅…이라니요?”

백도의 미래를 어깨에 짊어진, 그러나 별로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않은 것 같은 청년들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렇게까지 상세하게 설명해줬는 데도 아직도 이해를 못한단 말인가? 이제 도제도 조금 짜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대화만큼 답답하고 짜증스러운 경험도 드물다.

“식자들은 매장(埋葬)이라고도 하지.”

“허억!”

마침내 그들은 이해했다.

“어떻게 그, 그런 일이..

젊은 동량들이 생명의 소중함을 역설하기 위해 항의했다. 노인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약한 놈들이 이 강호에서 살아남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허약한 놈은 쓸모없는 것과 일맥상통하지. 허약한 놈을 먹여 살릴 만큼 강호는 절약을 모르거나 무 절제하지 않다네.”

비정하지만 참으로 경제 원칙에 철저한 논리 전개였다.

“아마 저기쯤이었을걸? ”

“허어억!’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그의 손가락 끝으로 날아갔다.

그러고 보니 땅이 채 다져지지 않은 듯 보이기도 했다.

아마 한 명 한 명에게 자신의 안락한 묘자리를 열(熱)나게 파도록 한 다음 깔끔하게 전원 매장시켜버렸으리라!

과연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惡魔)!

오만가지 상상이 그들의 뇌에 존재하는 방대한 사고구조 속에서 뛰어놀았다.

“지금껏 묻은 것만 해도 두 개 거대문파 세력쯤은 족히 될걸?

“허어어억!”

심각성이라고는 귀 씻고 들어봐도 없는 목소리. 도제는 건성으로 그냥 찔러만 보고 있는 중인 것이다.

“사실 말이야, 그 시체들은 밤만 되면 희미한 이불보를 뒤집어쓴 허깨비가 되어 나와서 자기들만의 독특한 무공을 선보이지. 원한과 저주가 담긴 무공 시연이라 네. 그들 원혼의 일초 일초에는 ‘그’를 무찌르기 위한 집념이 담겨 있지. 가끔 눈을 개안시킬 만한 초식들도 나온다네. 배울 게 정말 많지! 노부 또한 지난 백 년 동안 그것들을 보며 내 무공을 진전시켜 왔다네!”

이번에도 아니나 다를까.

“허어어어억!”

점입가경되는 경악성이 또다시 터져 나왔다.

“이럴 수가!”

“믿을 수 없어!”

“정말 놀랍군!”

“나도 가능할까?

“그 신선함만큼은 높은 점수를 줘야 해!”

여기저기서 여러 가지 의견들이 돌출적이긴 하지만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튀어나왔다. 어쨌든 진지한 대화가 오가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도제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노인의 관자놀이가 지끈거리고 있었다. 노환은 아니라는 데 전 재산을 걸 수 있었다.

“후우. 제발 좀 이런 거에 너무 간단히 속아 넘어가지 말게나. 노부가 혼자 재미있어서, 그리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 계속 속이게 되지 않나!

사형장의 죄수처럼 산발한 머리에 송충이처럼 굵은 눈썹, 황소의 목도 단숨에 벨 듯한 대도, 달빛을 받아 시퍼렇게 빛나는 칼날 같은 부리부리한 호목(虎目), 야성 이 숨쉬는 곰 같은 거구.

도제 용경의가 좌중을 훑어보며 푸념했다.

“이봐! 젊은이들! 자네들은 노부가 잔혹무도한 살인마처럼 보이나?

침묵!

일순 말을 잃은 좌중들은 내심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생명유지를 위해 아무도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에휴.”

도제는 다시 한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한숨에 빈 소매가 펄럭거리는 듯했다.

“농담이라고 말할 생각이었는데..

농담이 진실된 대답이 되어 돌아오면 사람은 무척 난처해진다.

“그런데 이 두 번째 관문의 시험은 무엇입니까?”

“뭐? 아아! 시험! 으음…….?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좋아! 이렇게 하지. 자네들 중 한 명이 저기 저 마천각의 아이가 남긴 도흔보다 솜씨 좋은 도흔을 남기면 인정해주겠네.”

모용휘가 나서려고 하자 도제가 얼른 제지했다.

“어디서 검 나부랭이를 든 녀석이 도전하려고 하는 건가? 노부가 도흔이라고 한 말을 못 들었나?”

“도나 검이나 같은 칼 아닙니까? 구분을 두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끄응.

도제는 대답할 말이 궁색한 모양이다. 옹색한 변명은 체면상 금물이었다.

“마음대로 해라! 마음대로!”

마침내 도제는 항복하고 말았다.

“제가 한번 해보죠.”

그때 새치기를 하고 나선 사람이 있었다. 그는 군웅회주 마하령의 직속친위대 신응대(神鷹隊)의 대주 폭풍도 하윤명이었다. 그의 절기인 표류도법(飄流刀法)의 위 맹함은 삼성무제 공동우승으로 명성을 떨친 바가 있었다.

슈욱!

겁흔벽으로 다가간 하윤명이 망설이지 않고 발도했다.

카앙!

“실패군!”

결과를 보지도 않고 용천명이 말했다.

보통의 석벽이었다면 하윤명의 칼날이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만큼의 소리가 울려퍼졌다는 것은 그만큼 일도가 매끄럽지 못했다는 것을 뜻했다.

파르르.

애도를 움켜쥔 그의 손이 떨렸다. 벽은 예상보다 훨씬 더 단단했다.

“이보게, 젊은이! 자네는 어떻겠나? 자네라면 가능하겠나? 도에 마음을 둔 사람이라면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지!”

사람들 사이에 섞여 멍한 표정으로 겁흔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효룡을 향해 회의노인이 말했다. 나지막한 그 목소리에는 힘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힘은 한 사 람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수의 한 명이자 한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던 이진설이 대꾸했다.

“할아버지, 무슨 엉뚱한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이 사람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효룡의 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효…….”

이진설이 다급하게 손을 뻗었지만 빈 허공만을 움켜쥘 뿐이었다. 멀어져가는 그의 등을 쫓아가려 하지만 노인이 지팡이를 들어 제지했다. 가벼운 한 동작이지만 그녀는 모든 움직임의 가능성을 빼앗겨버렸다. 울타리에 갇힌 양처럼 그녀는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산발한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초점이 맞지 않는 다른 세계를 향해 있는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아직 제정신으로 돌아온 건 아닌 듯싶다. 사람들을 헤치고 벽을 향 해 걸어가는 효룡의 등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이 날카롭고 심원한 빛을 발했다.

“아직 무인으로서의 본능은 살아 있는 모양이군!”

회의노인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 곁에 있던 이진설마저도 들을 수가 없다.

캉!

막 세 번째 도전자가 실패를 한 참이었다.

“뭐야? 병신 주제에 감히 어딜 나서려는 거야?”

사람들을 제치며 앞으로 나가려는 효룡을 밀치며 한 관도가 불평을 터트렸다. 그는 군웅회의 사람이었다. 때문에 비류연은 물론이고 그와 어울려 다니는 그 일당 들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군웅회에 있어 비류연이란 죽이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살려두는 그런 존재였다.

그러나 그 남자의 다음 말은 이어질 수 없었다.

“어디 다음 말도 계속 지껄여 보시지요?”

사랑하는 여인만큼 강한 것은 없다고 했던가?

자신의 목을 싹둑 가위질할 기세로 애교스럽게 붙어 있는 두 자루의 쌍검에서 전해지는 서슬에 몸서리치며 남자는 울상이 되어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세치 혀를 가볍게 놀리면 어떤 모종의 꼴을 당할 수 있는지 좋은 교훈이 되었을 것이다.

‘역시 너무 오랫동안 나쁜 환경에 방치해둔 걸까?’

독고령은 귀엽고 발랄하기만 하던 이진설의 과격무쌍한 행동에 어이가 없어 하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갑자기 자신의 사매가 심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회의노인은 젊은 처자의 용감무쌍한 행동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고, 두 발짝 옆에서 여차하면 그 남자의 아구창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던 장홍 또한 쥐고 있던 주먹을 살며시 풀었다.

“자네도 한번 해볼 텐가?”

“……”

침묵으로 대답하며 효룡은 등에 멘 쌍검 중 하나를 뽑아 들었다. 지금 그를 움직이는 것은 뇌리 속에서 울려퍼지는 하나의 목소리였다. 거부할 수 없는 명령. 지금 그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한 노인의 목소리였다.

“분명히 실패할 게 뻔해! 자신의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녀석이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러나 그 소리는 효룡의 귓바퀴를 타고 넘어가는 공허한 울림일 뿐이었다. 대신 몇몇의 친구들을 발끈하게 만들었 다.

그 순간 효룡이 검을 휘둘렀다.

무아지경 속에서 펼쳐진 일검이었다. 그리고 그 일검은 그의 육체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한 무공을 끄집어냈다.

핏빛 붉은색 검기가 현란하게 번뜩이는 가운데 검은 석벽에 길다란 검흔이 새겨졌다.

순간 회의노인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방금 그 혈광은 도대체 뭐였지?”

항상 효룡과 붙어다니던 장홍으로서도 처음 보는 검기였다.

불쑥 내뱉은 도제의 한마디도 장홍으로서는 쉽게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검을 들고 도법을 펼치다니 특이한 젊은이로군! “

그렇게 말하고 용경의는 효룡이 남긴 검흔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만일 실력이 조금이라도 모자란다면 절대 통과시켜 줄 생각이 없었다.

“으음…….”

한참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도제가 마침내 입을 열어 말했다.

“이 정도로는 아직 멀었어!”

순간 좌중들 사이에 실망의 기색이 완연해졌다. 특히 가장 실망해서 풀이 죽은 것은 마음 속으로 그를 열렬히 응원하고 있던 이진설이었다. 지금의 효룡으로는 힘 들다고 생각한 그녀였지만 한편으로는 천상계에 사는 모든 신들의 이름을 차례로 주워섬기며 그의 성공을 빌었던 것이다.

그때 도제의 입이 다시 열렸다.

“하지만 그 나이에 비하면 나름대로 꽤 훌륭하다 할 수 있지. 좀더 다듬으면 쓸 만하겠어.”

“그, 그럼?”

염도의 되물음에 도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합격이다!”

환성이 터져 나왔다.

비류연은 이런 일들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듯 마치 검은 벽의 내부까지 꿰뚫어보기라도 할 것처럼 벽만을 바라보았다. 합격이든 통과든 그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그런 태도였다.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있을 수 없어…….”

그 모습을 본 사람이 있었다. 용경의였다. 갑자기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겁흔벽에 손바닥을 가져다대는 비류연의 등 뒤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한데 겹쳐졌던 것이다.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말도 안 돼!’

도제는 곧 자신의 생각을 전면 부정했다. 그런 일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방금 자신이 느낀 것은 착각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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