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권 11화 – 철담비환 진조운의 이상한 최후

철담비환 진조운의 이상한 최후

멋들어지게 지어진 3층 누각의 맨 꼭대기 층.

그곳에 아담하게 꾸며진 방에서 순백의 미염을 지닌 위엄이 넘치는 한 노인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앞에는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중년인 한 명이 서 있었다.

순백의 미염을 지닌 노인은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용이 양각된 태사의에 앉아 있었는데, 그 존재만으로 만인을 압박하는 박력이 있었다. 흰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 오는 고희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뿜어져 나오는 박력은 결코 거짓된 것이 아니었다. 태사의에 좌정하고 있는 홍룡포(紅龍袍) 노인의 몸 전신에서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삼엄한 위엄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노인의 눈동자는 깊은 현기를 머금은 채 깊이 가라앉아 있었고, 머리카락은 색만 희다 뿐이지 20대 청년의 그것처럼 윤기가 흘러 넘치고 있었다. 게다가 얼굴 또한 홍안의 소년처럼 생기 가득했다. 세월에 잠식당한 노인들에게 으레 보이기 마련인 얼굴에 핀 검버섯이나 거미줄 같은 잔주름은 눈 씻고 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노 인의 내공과 수련 정진의 정도가 얼마나 깊은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노인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존재감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의 앞에 서 있기만 해도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해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에 겨울 것이다. 하지만 태사의에 태산같이 좌정하고 있는 노인의 앞에 흔들림 없는 거목처럼 서 있는 거대한 체구의 중년 사나이는 특별히 그런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흑의(黑) 중년인의 기(氣)도 노인과 쌍벽을 이룰 정도의 막강한 것으로 결코 뒤짐이 없었다. 홍룡포의 노인이 태산이라 한다면, 두 갈래로 거칠게 뻗은 검은 수 염이 인상적인 중년 사나이는 마치 철탑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체구의 소유자였는데, 그의 온몸에서는 강철같이 단단하고 강렬한 힘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게다 가 그의 번뜩이는 호안(虎眼) 같은 두 눈동자는 추상 같은 기운을 뿌리고 있었다.

“앉으시지요.”

“예.”

홍룡포의 노인이 중년인에게 자리를 권하자, 그는 사양치 않고 노인의 옆자리에 앉았다. 중년인의 신분이 범상치 않음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증거라 할 수 있었다. 현재 무림에서 홍룡포의 노인과 자리를 나란히 하고 앉을 수 있는 인물은 다섯 손가락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노인으로부터 반 경어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단 한 명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먼저 태사의에 앉아 있던 홍룡포의 백염 노인이 거친 대지 위에 우뚝 솟아 있는 철탑을 연상하게 하는 거구의 중년인에게 물었다.

“이보시게, 천관주, 일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천관주(天館主), 분명히 천관주(天館主)라 했다. 무림에 많은 학관이나 도관이 존재하지만 그곳을 맡고 있는 사람이 천관주라 불리는 곳은 당금 무림, 아니 이 세 상에서 오직 한 곳뿐이었다. 정도 무학의 최대 도량, 정도 무림에서 제2위의 세력을 자랑하는 와호잠룡의 대지 바로 천무학관(天武學館)이었다.

백도무림을 구성하는 3개의 거대 세력 중 1위는 두말할 것 없이 무림맹이었고, 그 다음 2위가 바로 천무학관이었다. 비록 두 번째로 큰 세력과 무력을 지녔지만, 잠재력에서는 능히 으뜸으로 꼽히는 곳이 바로 천무학관이 아닌가. 무림맹이 천무학관을 제치고 세력 1위인 이유도 따지고 보면 중심 구성원 대부분이 천무학관 출 신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강호 무림에서 천무학관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능히 짐작해 볼 수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철탑을 연상케 하는 강인한 인상의 흑의 중년인이 바로 그 이름 높은 천무학관의 관주로 있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래서인지 백도무림의 실질적 총수 라 할 수 있는 무림맹의 맹주 신분을 가진 노인도 동등한 지위를 가진 사람에게 말하는 것처럼 예의를 차려야 했다. 사실 지금 세월을 거슬러 가는 듯한 백발백염의 노 고수야말로 당금 백도무림의 실질적 총수라 할 수 있는 ‘백도 강호 무림 연합 연맹(白道江湖武林聯合聯盟)’, 통칭 무림맹(武林盟)의 맹주(盟主)를 맡고 있는 엄 청난 신분의 소유자였다.

“예, 염려 놓으십시오. 금년에 가장 뛰어난 아이들 64명을 뽑아 각각 16명씩 4개의 단을 구성했습니다. 4개 단을 각각 청룡, 백호, 현무, 주작 단으로 이름 지었지 요. 청룡단은 무당산으로, 백호단은 태산으로, 현무단은 화산으로, 주작단은 아미산으로 보낼 예정입니다.”

“어험, 아이들의 실력은 어떻습니까? 기대해도 되겠지요?”

“예, 64명 모두 관내에서 작년 1년 동안 가장 성적이 우수한 기재(奇)들입니다. 실력대로 청룡, 백호, 현무, 주작 순으로 나누었지요. 청룡단 소속의 아이들이 가 장성적이 우수하고 주작단 아이들의 실력이 가장 떨어집니다만 사실 그렇게 큰 차이는 없습니다. 어쨌든 학관(學)내에서 전체 평균 성적 64등 안에 드는 귀재들 이니 말입니다. 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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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뭡니까? 숨김 없이 말해 보세요.”

“저, 역시 주작단의 애들이 가장 밀립니다. 석차 50등 밑의 12명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다소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지 걱정됩니다. 50등 위로 동점자 가 2명이 있어 50등 이하 12명이 되었지요. 거의 대부분은 자기 문파의 후기지수 중 2인자가 아니면 3인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열등감이 심한 건 아 닌지 그 점이 걱정됩니다. 뭐 꼭 무공 실력이 성적순은 아닐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렇지요. 전체 성적이란 것은 학문, 예절, 이론 등 여러 가지를 종합해서 평가한 것이니 성적만으로 무공 실력을 평가할 수는 없겠지요……. 응, 12명? 근데 아 까는 한 단에 16명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 그 12명에 더해 그 애들을 인솔할 단장으로 구룡칠봉(九龍七鳳) 중에서 이룡 이봉을 보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16명이지요. 이번 합숙 훈련에는 구룡칠봉을 4

명씩 나누어 각 단을 인솔하게 할 생각입니다.”

“어험, 2년차 관도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일컬어지는 이룡과 이봉을 보낸다……. 나무랄 데 없이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관주!”

“과찬이십니다, 맹주! 3, 4년 위의 선배들을 제치고 구룡칠봉의 자리를 차지한 아이들이지요. 믿어도 될 겁니다.”

“저도 기대가 큽니다. 특히 올해 2년차 관도들의 실력은 선배들을 제치고 구룡칠봉의 이름을 쟁취할 만큼 출중한 실력의 소유자들 아닙니까. 근데, 그 애들을 가르 칠 사람을 누구로 정했습니까?”

“예, 주작단을 가르칠 사람으로는 철담비환 진조운에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오호, 던져진 철담은 하늘을 꿰뚫고 날아간 비환은 하늘을 찢는다는 그 철담비환 진 대협 말이오? 아직 정정하십니까?”

“예, 아직 멀쩡하십니다. 본인 말로는 회춘중이라고 큰소리치고 계십니다. 그 분이라면 애들을 잘 다스려 많은 가르침을 베풀어 줄 겁니다. 그러기 위한 합숙 훈련 이고요.”

“좋습니다. 관주의 결정을 믿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요즘 저쪽의 동태는 어떻습니까?”

천무학관 관주라는 어마어마한 신분을 지닌 중년인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 그만큼 신경 쓰이게 하는 골치 아픈 일이었던 것이다.

“마의 하늘(摩天〕 말씀이십니까? 글쎄요, 아마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우리 애들에게 대항할 애들을 기르고 있겠지요. 아직 자세한 정보는 없습니다만 그쪽도 상당 한 전력을 키우고 있는 듯싶습니다.”

“그렇겠지요. 어쨌든 이번 수련 훈련은 학관의 전통을 자랑하는 행사이니만큼 잘 처리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현재 학관(學)내에서 가장 촉망받는 후기지 수들입니다. 이 정도 무림 내에서도 마찬가지구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모두 관주만 믿겠습니다. 곧 멀지 않은 듯싶습니다.”

“휴우, 날씨 한번 덥군. 목이 칼칼한데 어디 근처에 계곡 같은 게 없으려나?”

아직 5월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날씨가 무더웠다. 태양은 찬란히 빛나며 대지를 맹렬히 달구고 있었고, 더위를 몰아내 줄 바람은 어디론가 종적을 감춘 채 한 점도 불어오지 않았다. 구름 한 점, 바람 한 점 없는 맑은 날이라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었다. 목적지를 찾아 산을 오르던 철담비환 진조운은 왠지 심한 갈증 을 느꼈다.

‘허허, 나도 이젠 늙었나? 겨우 이 정도로 피곤한 데다 갈증까지 느끼다니…….”

강호 백대 고수(百代高手) 중에서도 수위(首位)를 차지한다는 자신이었다. 아무리 머리카락과 수염이 하얗게 물들었고 이제 곧 팔순 잔치를 치를 나이가 되었다고 하지만 절정으로 무공을 익혀 노화 순청의 경지에까지 다다랐다는 자신이 겨우 이 정도 산행(山行)으로 피곤함과 갈증을 느낀다는 게 우스웠다. 이번 길도 그의 실 력을 높이 평가한 천무학관에서 간곡히 부탁하여 가는 길이 아닌가. 그런 처지에 겨우 이 정도 산행으로 갈증을 느낀다는 것이 진조운에게는 자연의 조화(또는 심 술)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도 하늘은 진조운의 편이었는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터벅터벅 산길을 걸어가던 진조운의 귓가에 멀리서부터 맑고 시원한 물소리가 잡혔다. 능선 하나는 족 히 넘어선 먼 거리로부터 들려 오는 미약한 소리였지만 진조운의 귀를 속일 수는 없었다. 그의 귀는 훨씬 전부터 물소리를 잡아 내기 위해 혈(血耳: 혈안과 비슷 한 뜻)가 된 지 오래였다. 천리지청술만은 못 하지만 그래도 범인의 수배를 뛰어넘는 고수의 청각이 이를 놓칠 리가 만무했던 것이다. 진조운은 지체없이 물소리를 쫓아 산길을 비호(飛虎)처럼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점차 청량하고 세찬 물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 왔다. 아마도 폭포가 근처에 있는 모양이었다. 물소리를 쫓아 한 식경 정도 뛰어야 했던 진조운이 찾은 것은 멋 진 절경 속에 그림처럼 존재하는 아담한 폭포였다. 흰 포말을 일으키며 출렁이는 수면 주위는 병풍처럼 밋밋한 바위로 둘러싸여 있었고, 폭포 건너편도 3장 정도 되 어 보이는 높은 암벽이 둘러싸고 있어 그야말로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기암괴석의 병풍 속에 갇힌 폭포라고 해도 과히 틀린 표현이 아니어서 보는 이의 마음을 절 로 시원하게 해 주었다.

철담비환 진조운은 서서히 시원하고 경쾌한 소리를 자랑하는 폭포를 향해 다가갔다. 타는 듯한 갈증을 해소시켜 줄 청량한 축복이 되리라 믿었던 이 폭포가, 그에 게 어떤 운명으로 다가오고 있는지도 모른 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갑자기 철담비환 진조운의 목이, 하늘을 쳐다보는 듯한 모양으로 뒤로 홱 젖혀졌다. 순간, 진조운은 정신이 아득해져 갔고, 눈 앞에는 별무리가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춤을 추듯 맴돌았다. 그는 단지 맑고 깨끗한 계곡 물로 입과 뱃속을 적시고 그 차가운 물을 손에 담아 시원하게 세수를 하고 있던 중 이었다. 수상 방뇨나 혹은 그보다 큰 볼일 같은, 수질을 오염시키는 벼락 맞을 일은 절대로 하질 않았다. 그런데 그런 모범적이고 도덕적인 그에게 너무나 어처구니 없고, 설명할 수 없으며, 뭐라 위로조차 할 수 없는 찰나(刹那)의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갑자기 물 속에 묵직한 무엇인가가 튀어나와 세수를 하고 있던 철담비환 진조운의 얼굴을 그대로 강타했다. 세수 세안(洗手洗顔)이라는 것은 얼굴 표면에 묻은 불 결한 물질을 닦아 내는 행위로 물을 더럽히는 자에 대한 수신(水神)의 말없는 질책이었을까? 아니면 소리 없는 분노였을까? 진조운의 눈 앞에서 화려한 불꽃이 번 쩍거렸다. 동시에 그의 의식은 그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는 거센 충격에 휩싸여 몸조차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물 속에서 아닌 밤중의 홍두깨처럼 튀어나와 철담비환 진조운의 얼굴을 사정없이 뭉개 버린 것은 한 덩이의 수박만큼이나 커다란 바위 덩어리였다. 진조운의 이마 를 맹렬히 강타한 바위 덩어리는 그대로 진조운의 면상 위 1장 허공 위까지 치솟아 올라갔다가 이내 추진력을 소실하고 아슬하게 허공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승천 을 포기한 바위 덩어리는 자연의 법칙과 순리대로 당연하게 지상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바위 덩어리가 떨어지는 낙하 예정 지점에는 타의에 의해 고개를 뒤로 젖히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철담비환 진조운의 면상(面像)이 고스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꽝!”

다시 한 번 돌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수박 만한 바위 덩어리를 용감하게 얼굴로 들이받은 철담비환 진조운은 얼굴에 동그란 바위 덩어리를 올려놓은 채, 볼썽 사 나운 모습이 되어 서서히 뒤로 자빠지기 시작했다. 바위 덩어리와 자신의 머리통 사이의 강도(强度) 실험에서 패배한 진조운의 뒤통수가 지면과 충돌한 것은 필연 이라 할 수 있었다.

“퍽!”

철담비환 진조운의 머리가 지면과 부딪치는 순간, 진조운의 뒤통수로부터 전해지는 뾰족하고 날카로우며 강렬한 번개가 그의 뇌리를 온통 하얗게 뒤흔들어 놓았 다. 그와 함께 진조운은 간신히 잡고 있던 마지막 의식의 끈을 놓고 깊고 아득한 암흑의 세계로 서서히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철담비환 진조운의 얼굴에서 굴러 내려온 동글동글한, 하지만 엄청나게 무겁고 단단해 보이는 바위 덩어리는 경사진 면을 따라 다시 물가를 향해 데굴데굴 굴러갔 고 퐁하는 소리와 함께 물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물보라 소리만 아련히 울려 퍼지는 곳에는 한때 진조운이라 불리던 이가 큰 대(大)자로 뻗어 누워 있을 뿐 이었다.

한 가지 다행한 일이라면 철담비환 진조운 자신은 더 이상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햇빛은 따스하게 대지를 비추고 시원한 바람은 초록의 대지를 조용히 감싸안았으며, 그 속에서 산새들이 평화로이 노래하던 청명한 5월의 어느 날 오후, 어느 산중의 이름 모를 계곡에서 일어난 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