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권 14화 – 무지막지한 삼복 구타 권법
무지막지한 삼복 구타 권법
파란 하늘은 그 안으로 사람들을 풍덩
빠트릴 듯한 자태로 빛나며, 맑고 깊게 펼쳐져 있었고
차갑고 투명한 계곡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시원한 소리를 내며 자신의 가야 할 길을 따라 유유히 흘러 내려오고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새하얀 구름 조각 사이로 비춰진 햇살은 투명한 계곡의 수면 위에서 부서져 수천 조각의 황금빛 파편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에 덩달아 호응이라 도 하듯 시원한 바람이 세상을 감싸며 불어오는 청명한 오후였다. 날은 맑았고, 그 힘은 생명의 활동력을 최고로 만들어 주는 듯했지만, 태양이 부서지고 있는 계곡 의 물가에는 이런 아름다운 날씨와는 상관없는 별다른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철퍽, 철퍽.”
“으아악. 아냐, 아니라고. 이게 아니란 말야. 도대체 이게 뭐냔 말이야.”
그녀가 기대한 건 결코 이런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에 오기 전부터 꿈꿔 왔던 이상은, 이미 장농 위에 앉아 있는 먼지처럼 헛되게 흩어진 지 오래였다. 팔이 저 리고 허리는 뻐근하게 아파 왔다. 어깨가 빠질 것 같은 지독한 고통이 미세한 신경을 통해 그녀의 머리 속을 엄습해 왔다. 그녀의 가냘픈 팔과 다리와 허리는 계속해 서 그녀의 머리 속으로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었고 그 위험 신호들을 모두 처리하느라 머리 속은 천연색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그녀의 왼손은 평평한 바위 위에 올려진 빨래를 잡고 있었고, 오른손은 특이하게 생긴 빨래 방망이를 힘껏 움켜쥐고 있었다. 보통의 빨래 방망이와는 다른 거무튀 튀한 색깔을 띠고 있는 이 빨래 방망이는 한 방에 바위라도 박살 낼 수 있는 무쇠로 만들어진 강철(鋼鐵)의 빨래 방망이었다. 이 강철 빨래 방망이는 크기와는 다르 게 무게가 50근이나 나가는 엄청나게 건방진 물건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방망이를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은 처음부터 계속해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당문혜, 사천당가의 여식으로 올해 나이 19세. 몸도 마음도 한창 때인 좋은 나이의 소녀였다. 무가(武家)의 여식으로 태어나 나이 7살에 무도(武道) 에 입문해 검을 잡았고, 3년 간 검을 익히며 무(武)의 기초를 다졌다. 나이 10살부터는 채찍을 잡아, 그 이후 당가문중(唐家門衆)으로부터 편법(鞭法)과 암기술을 전수받기 시작했다.
나이 14살에 여자는 집에서 얌전히 밥과 빨래나 할 것이지 건방지게 무공을 배우겠다니, 라며 여성 모독 발언을 한 어느 이름 있는 무림세가의 16살짜리 외동아들 을 개 패듯 팬 다음 한 대 더 때려 반쯤 죽여 놓기도 했다. 나이 열여섯에 실력이 사천당가의 소년 소녀들 중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어 여자의 몸으로 가문으로부터 비예(秘藝)를 전수받을 수 있는 자격을 손에 넣었다.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 칭하는 당문의 비전 독술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이 18세, 강호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하는 선망의 대상인 천무학관(天武學館)에 응시해 높은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합격, 뭇 사람들을 놀라 게 했다. 여자의 몸으로 천무학관에 들어간다는 것은 보통의 노력과 재능, 그리고 실력이 아니면 어림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무학관 2년차 중간 평가 성적이 상위권 안에 들어 이번 합숙 훈련에 참가하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지기를 갈망하고 있었고, 그래서 한번 다녀오게 되면 실력이 놀랄 만큼 비약적으로 향상된다는 이 합숙 훈련에 많은 환상을 품고서 참가했었다. 보다 더 강해지기 위해서…….
그런 그녀에게 느닷없이 빨래라니, 이 무슨 천지개벽할 개뼈다귀 같은 소리란 말인가. 무림 최고의 여고수를 꿈꾸는 그녀에게 겨우 빨래라니, 염라 대왕한테 사람 살려 달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퍽 퍽 퍽! 철퍽, 철퍽, 철퍽!”
“문혜야, 빨래 터지겠어. 좀 살살 쳐.”
당문혜가 화풀이라도 하듯 빨래를 내려치는 장면을 보다 못한 빨래 동료 단목수수가 터져 나가는 빨래들을 걱정하며 당문혜를 말렸다.
“내가 지금 살살 치게 생겼니? 그렇지 않아도 열 받아 죽겠는데.”
열을 받을 대로 받아 폭발하기 일보 직전인 당문혜는 애꿎은 단목수수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빽 질렀다.
“그래도 참아야지 어떡하니. 네가 참아.”
“내가 그냥 꾹 눌러 참고만 있을 상황이니? 수수 너는 화도 안 나? 우리들은 10일도 넘게 계속해서 빨래만 했다고, 빨래만.”
“어머, 빨래만 했다니. 딴 것도 많이 했잖아.”
당문혜의 말실수를 친절하게 정정해 주는 단목수수였다.
“으이그,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게다가 딴 거란 게 도대체 뭐야? 구슬 꿰기, 나물 캐기에다 남자들이나 하는 장작 패기, 모두가 잡일 아니냐구! 그게 도대체 무 공수련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죽도록 잡일만 시키는 거야? 게다가 그 모든 일들을 지금 우리 손과 발에 달려 있는 이 무식하게 무거운 묵환을 차고 해야 했잖아. 우 린 무공을 익히러 온 거지 중노동을 하러 온 게 아냐. 알겠어? 온몸이 아프고 삭신이 쑤셔 죽겠다고!”
당문혜는 그 동안 쌓이고 쌓였던 모든 불만을 단숨에 토해 내고 있었다. 긴 시간 동안 염원해 왔던 기대가 단 한 순간에 허물어지는 것을 경험한 그녀는 모든 일에 대해 극히 예민하게 변해 있었다. 그 동안 쌓인 불만이 넘칠 정도로 많았던 모양이다.
“나도 아파, 나도 아프긴 마찬가지라고. 나도 지금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온몸이 아파 미칠 지경이야.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잖아, 응? 처음에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잖아.”
우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단목수수가 말했다.
“수련으로 몸이 힘들어지는 건 관계없어. 아니 그거야말로 바라고 바라던 바야. 하지만 이건 아냐. 이런 잡일 때문에 몸이 혹사당한다는 건 정말이지 참을 수 없 어.”
당문혜의 가느다란 눈초리가 치켜 떠올라지면서 까만 눈동자에는 살기가 번뜩거렸다. 왠지 그 옆에 앉아 있자니 온몸으로 으스스한 한기를 느끼는 단목수수였다. ‘이런 화가 많이 났나 보네. 정말이지 계집애가 펄펄 끓는 주전자 같단 말야.’
당문혜를 진정시키지 않았다가는 살인 사건 하나쯤은 쉽게 터질 것 같다고 생각한 단목수수는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어머, 그래도 우리만 빨래하고 있는 건 아니잖아? 딴 사람들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 뭐. 진 소저도 지금 위에서 밥을 짓고 있잖니! 남궁 소저와 설옥이도 함 께.”
칠봉(鳳)의 둘인 아미파의 진령, 진 소저와 남궁세가의 남궁 산산, 남궁 소저도 잡일인 식사 준비를 하고 있고, 거기에 더해 화산(華山)의 화설옥도 같이 밥을 짓 는 중이니 너도 이젠 화 풀고 그만 참으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 정도로 분노를 진정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는지 당문혜의 불평은 계속되었다. 아직 분노의 불길이 잡히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그쪽은 요리라고 요리. 차라리 그쪽이 낫지 우린 이게 뭐야. 볼썽 사납게 빨래가 뭐냔 말이야. 그래도 같은 잡일이라면 그쪽이 훨씬 낫지. 하녀들도 아니 고, 왜 우리가 빨래를 하냔 말이야.”
당문혜의 이런 불평을 듣고 있던 단목수수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얘기했다.
“어머, 문혜야. 그건 네가 요리 시험을 볼 때 밥을 새까맣게 태우고 국을 소금물로 만들었기 때문…
웁!”
조심스럽던(?) 단목수수의 말은 당장 당문혜에 의해 허를 찔렸다.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과거지사가 나오자 소리를 빽 지르며 중지시킨 것이다.
“시끄러워, 그런 너도 반찬을 태웠잖아! 도무지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썰어진 야채들을 볶는다는 미명하에 말이야.”
당문혜의 폭언에 단목수수는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다. 수고를 무릅쓰고 자신들이 현 상황에 처하게 된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더니, 감사는 못할망정 자 신을 망신 주는 그런 폭언을 하다니. 그러나 화가 좀 난다고 해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수는 없는 법. 일단은 인내를 갖고 참기로 했다.
“어머, 내가 아무리 집안에서 요리를 못 배웠기로서니 같은 처지에 그렇게 면박까지 줄 건 없잖니! 너 자꾸 그렇게 불평만 하다가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노 소 협이 어떻게 당했는지 벌써 잊었어?”
순간, 노 소협이라는 단목수수의 한마디에 당문혜는 흠칫했다. 찰나지간에 그녀를 잠식한 공포와 두려움으로 몸이 굳어진 탓이었다. 아직도 눈 앞에 생생한 그 날 의 광경, 잊혀지지 않는 그 날의 피. 자신에게 그런 일이 닥친다면.. ..? 상상만 해도 온몸에 오한(惡寒)이 들고,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며, 팔에서는 드르륵 소름이 돋아났다.
개방의 직전 제자 노학, 나이 19세. 성별(性別) 남(男).
그 사건이 있었던 날은 그들이 이곳에 온 지 4일째 되던 날이었다. 그들에게 자신을 사부님이라고 부르라고 시킨 사람은 무슨 이유에선지 좀, 아니 많이 괴팍해 보 였다. 첫날, 사부는 지랄같이 무거운 묵환을 그들에게 주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그 후 그 사부님이라는 사람은 이번에 불가항력적인 사고가 발생하는 바람에 천 무학관으로부터 합숙 훈련 지원금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단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니 즉시 돈을 내라는 것이었다. 물론 상당히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결론은 마찬가지였다.
기가 찼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천무학관에서부터 여기 아미산 입구까지는 말을 타고 왔었다. 아미산과 천무학관은 거리가 꽤 멀었기 때문 에 시간과 체력을 아끼기 위해서 말을 타고 온 것이었다.
이곳에 도착한 다음 몇 달 동안은 말을 사용할 일이 없어 모든 말들을 마방(馬房)에 팔기로 결정했다. 그때 매매의 흥정을 금영호가 맡았었는데 그의 수완이 대단 해 꽤 비싼 값에 거래를 할 수 있었다. 쌍방 모두 만족스런 거래였다. 집에서 배워 온 상술이 효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덕분에 모두의 수입이 꽤 되던 상황이었 다.
하지만 주머니가 채워졌던 것도 잠시, 이내 모두 털리고 말았다. 말 한 마리당 은자 10냥은 넘게 받고 팔았으니 은자 160냥은 족히 걷어 간 셈이었다. 게다가 말 판 돈만 가져간 것도 아니었다. 꽤나 돈이 있고 행사한다는 집안들에서 자식들이 먼 곳 간다고 쥐여 준 돈 중 거의 3분지 2 이상을 사부님이라는 사람이 털어 간 것이 다. 수행에는 돈이 필요 없다는 것이 유일한 이유였다.
돈이란 요물은 사람의 눈을 흐리는 존재이며 마음을 심란하게 하여 수행을 방해하는 요물이니 몸에 지니고 있지 않는 게 좋다며, 아무렇지 않게 모두의 돈과 패물 들을 걷어 갔다. 그러나 그들은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었다. 틀린 말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공 수련과 수행을 위해 이곳에 온 몸들이고, 자신들의 눈 앞에서 돈을 걷어 가고 있는 사람은 조금 미심쩍기는 하지만 자신들을 더욱 더 강하게 해 줄지도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많이 뜯긴 사람은 역시 금영호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신분은 상계(商界)에서도 1~2위를 다툰다는 금호상회의 외동아들이었다. 입고 있는 복식만 보아도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는 확연했다. 구하기 어렵다는 고급 보라색의 비단옷, 옷소매에는 금색의 실로 화려한 호랑이가 수놓아져 있고 허리에는 번쩍이는 보석들이 박혀 있는 황금 옥대가 매여져 있었다.
그 옥대에는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요란한 검집이 매달려 있고, 황금 수실이 달린 값비싼 보검이 꽂혀 있었다. 아쉬운 게 있다면 얼굴이 받쳐 주질 않아서 사람 을 가린다는 보라색의 비단 옷감과 묘한 불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보라색이란 귀공자의 색으로 사람을 좀 많이 가린다. 쭉쭉 빠진 귀공자가 입으면 그보다 어울리고 귀품 있는 색도 없건만, 지금 금영호처럼 볼에 살집이 좀 두툼하게 붙어 있는 사람에게는 정말이지 사양하고픈 욕망이 들게 하는 쥐약이나 다름없는 색이 었던 것이다.
어쨌든 정말 비싸 보이는 놈이라는 것이 금영호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금영호는 옷과 검을 제외하고는 모두 압수를 당했다. 가진 게 많으니 빼앗긴 것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의 4배는 가볍게 넘는 액수였다. 말 판 돈 이외에는 따로 돈을 내지 않은, 아니 내지 못한 사람은 무당의 현운과 개방의 노학뿐이었다. 무당파는 검소함을 미덕으로 삼고 있는 문파였기 때문에 이번 수련행에서 노잣돈 이외에는 현운에게 내어 준 돈이 없었다. 노학은 말 그대로 직업이 거지였기 때문에 털어도 나올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알거지였다. 아무 것도 낼 것 없는 그들을 바라보던 사부의 눈이 심상치 않았던 것을 당문혜는 분명히 기 억하고 있었다. 그 눈빛의 의미는 잘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들에게서 그렇게 돈을 걷어 간 – 뜯어 갔다는 표현이 차라리 어울리는 사부님이 뭔가를 가르쳐 주기는 제대로 가르쳐 주었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 다음 날 부터 그들이 한 일은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스러운 일들이었다.
이틀째 되던 날.
가짜 사부 비류연은 합숙소 뒤뜰에 마련되어 있는 연무장으로 그들을 불렀다. 뭐가 좋은지 비류연의 얼굴은 싱글벙글, 웃음이 가시질 않고 있었다. 어제 거둬들인 수익이 심상치 않았던 탓이었다.
“두말하진 않겠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수련 과정으로 들어가도록 하겠다. 모두 정신 똑바로 차리도록 하거라. 알겠느냐!”
“예, 사부님!”
우렁찬 목소리가 연무장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들 16명 중 누구도 지금 지옥보다 더한 나락이 입을 떡 벌리고 그들을 열렬히 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 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불행이었다.
먼저 비류연이 행한 일은 식사당번을 뽑는 일이었다. 일단 식사 준비는 여성들의 몫이라며 여자 단원들 중에서 뽑기로 했다. 이때 도전자 중 하나인 사천당문의 여걸 당문혜는 밥을 몽땅, 그리고 홀라당 태워 버려, 피땀 흘려 정성껏 곡식을 가꾼 농민들의 눈에 피눈물이 철철 흐르게 했고, 이름 높은 단목세가의 여식 단목수수 는 아까운 반찬들을 그 형체와 존재 의미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마구 썰어 버린 다음, 성이 안 찼는지 그 잔해와 파편들을 모두 불태워, 이 세상에 그들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말살시켜 버렸다. 아까운 밥값과 반찬값만 날린 꼴이 된 것이었다.
비류연은 불같이 분노하며 그녀들을 질책했는데, 순전히 태워진 밥과 반찬값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이때 실수를 문책받았던 당문혜의 변명 또한 가관이었는데, “쌀이 먼저지 물이 먼전지 헷갈려서 실수한 것뿐이라구요!”
라고 말해 주위를 더욱 더 황당하게 만들었다. 이때 옆에서 같이 문책을 받던 단목수수는 조용히 입 꾹 다물고 묵비권을 행사해,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 라도 간다는 옛 격언을 몸소 실천해 보였다. 참으로 장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튼 당문혜와 단목수수는 시험에 불합격했고 개울가에서 빨래나 해야 하는 처지 가 되었다.
이런 저런 곡절 끝에 식사 당번으로는 어디선가 신부 수업을 받았는지,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어 주위를 감동시킨 진령과 남궁산산, 그리고 화설옥이 뽑혔다. 나머지 여자들 둘인 황보옥연과 모용취는 식용 가능한 나물들을 캐러 산을 헤집고 돌아다녀야 했다. 식비를 아끼기 위해 비류연이 생각해 낸 방법 이었다.
현기증 날 정도의 출혈적 지출을 감내해 낸 비류연에겐 절약만이 살 길이었다. 하나도 절약, 둘도 절약, 셋도 절약이었다. 그리고 다음은? 바로 당근 ‘착취’였다. 비류연은 모용취와 황보옥연에게 먹을 수 있는 식물과 먹을 수 없는 식물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준 다음 몇 가지 나물들을 견본으로 나누어주고 산에 올라가 나 물들을 캐 오라고 시켰다. 이때 길 안내 겸 유능한 약초 채집꾼으로 당문의 당철영을 함께 붙여 주었다.
당철영은 독과 암기로 유명한 사천당문의 직계 자손인 만큼 독초와 약초 등에 대한 지식이 남달라, 식물들의 효능과 쓰임새에 대해 누구보다도 깊고 해박한 지식 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물 채집과 함께 약초도 같이 캐 오라며 당철영을 붙여서 보낸 것이었다. 물론 채집해 온 약초는 마을의 약방과 의원에 팔아 넘길 예정이 었다. 하지만 나물 캐기라고 해서 마냥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미산이 좀 험한 산인가. 험하기로 소문난 중원 오악(五嶽) 중에 한 자리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는 험한 산지이다. 게다가 그들의 팔목과 발목에는 하나에 50근씩 이나 나가는 묵환이 차여 있으니, 처음에는 거동(擧動)은 고사하고 미동(微動)도 못 할 지경이었다. 합이 200근이나 되는 엄청 무식한 짐을 지고 가파른 산길을 오 르는 게 쉬운 일일 리가 없었다. 당철영과 두 여자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며 산을 돌아다녀야 했다. 그래서인지 첫날에는 수확이 거의 없었다. 무사히 귀환한 것만 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을 장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은 식사당번들이나 빨래 당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손목에 차여 있는 묵환의 무게를 주체하지 못해 반찬들은 위태위태한 식칼의 횡포 아래 엄하게 잘려 나갔으니 – 난자당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 이런 상황에서는 제대로 된 요리가 나올 수 없었다. 당연히 요리는 아주 이상한 몰골이 되고 말았다.
도마가 그 형체를 유지하고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니 그 상황을 능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형체는 보존했지만 기능은 상실해 버린 – 표면이 온통 갈라져 두 번 사용 하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 도마는 땔감 이상의 다른 소용은 없었다. 그래도 그런 악조건을 딛고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들은 칭찬받아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녀들은 칭찬받지 못했다.
먹을 수 있는 음식뿐만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라면 어떤 괴이하고 무시무시한 형태가 되어 나온다 해도 먹어야 했다. 사실 그것은 지독하게 비인도적인 고문이 아 닐 수 없었다. 음식 섭취라는 일련의 행위가 생존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마치 죽기 위한 행위 같았다. 그나마 먹고 죽지 않은 것에 대해선 그 끈질긴 생명력이 칭찬 받을 만했다. 그만큼 끔찍했단 소리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 비류연이 그녀들을 칭찬했을 리 만무했다. 비류연은 먹고 난 후 죽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들을 내 버려두고 자기만을 위한 식사를 직접 따로 마련해야 했다.
특히 비류연은 인피 면구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태(소태나무과(科)의 낙엽 활엽 교목, 산중턱, 골짜기에 주로 남, 높이는 1장 반 정도. 초여름에 황록색 꽃이 피고 초가을에 핵과를 맺음. 과실은 맛이 매우 쓰고 위약, 살충제 등으로도 쓰인다. 고목(苦木)이라고도 한다.) 씹은 표정으로 과묵하게 밥을 먹었다. 그런 그를 보는 마음 여린 그녀들로서는 얼마나 가슴 졸이는 일이었겠는가?
그래도 남궁상은 진령을 비롯한 식사당번들이 만들어 준 음식을 먹으면서 진심으로 하는 소린지, 입 발린 소리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맛있군요. 더 먹고 싶은데요!”
라고 말하며 위로를 아끼지 않으려고 했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남궁상은 애써 무시했다. 얼굴이 벌게지는 것만은 막을 길이 없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여자 단원들이 이러할 때 남자 단원들이라고 해서 순탄한 하루를 보냈을 리가 없었다. 아니 남자라는 이유로 여자들보다 더 힘겹고 고된 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비 류연이 남자들에게 시킨 일은 단순 무식하게 몸으로 때우는 일이었다. 비류연이 가장 먼저 지시한 일은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 온 다음, 그 나무들을 패 놓는 일이었 다.
그런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끼도 달랑 두 자루뿐이었지만, 그 도끼라는 놈들 또한 모두 100근은 족히 됨직한 무식한 무게를 자랑했다. 손목에 차여 있는 묵환의 무게도 제대로 다룰 수 없는데, 도끼를 제대로 들 수나 있을지 걱정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지니고 있던 내공을 있는 대로 끌어올리고 젖 먹던 힘 – 유식하게 말하면 ‘선천지기’까지 있는 대로 짜내야만 간신히 도끼를 들고 장작 패는 시늉이나마 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사내들은, 사내들대로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혼신의 힘은 물론이고 젖 먹기 전의 힘이라도 모두 사용하지 않으면 비류연이 요구한 작업의 극히 일부분이라도 소화 해내기 힘들었다. 덕분에 첫날은 모두들 할당량과 목표량의 3분지 1밖에 채우지 못했고, 할당량은 모두 내일로 미루어져 그 날 다 하지 못했다고 거기서 그냥 끝 낼 비류연이 아니었다 – 다음 날 해야 할 일만 잔뜩 늘어난 꼴이 되고 말았다.
그 다음 날 남녀 단원들은 모두 전날의 휴유증 – 전날 노동의 대가이기도 하다 – 으로 지옥의 전신 근육통을 당해야만 했다. 몇 년 전 비류연이 맛보아야 했던 그 처 절한 고통을 그들도 겪은 것이다. 단 하루의 막가는 노동이 20년 가까운 수련과 연마의 시간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무공이란 비급 한 번 쓱 읽어 보고, 검 한 번 휘두르고, 주먹 한 번 내지르며, 발 한 번 구른다고 저절로 익혀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 무공의 수련과 힘(반력(反)] 에 견딜 수 있는 육체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단련해야 하고, 또한 꾸준한 진기토납과 정신 집중을 통해 몸 안에 천지자연의 힘을 축적시켜야만 한다. 그만큼 무학 (武學)이란 뼈를 깎는 인고와 노력의 끊임없는 과정인 것이다. 그런 무학의 길이라는 무도를 걸어온 그들이 단 하루의 노동을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20년 연공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자 그들에게 있어 처음 겪는 좌절이기도 했다.
비류연이 그런 그들을 저녁에 모두 모아서 시킨 일은 구슬 꿰기였다. 자신이 아직도 사부의 등살에 못 이겨 부업으로 계속하고 있는 이 구슬 꿰기를 가르치면서, 그들에게도 사부가 자신에게 보여 주었던 것과 똑같은 시범을 보였다. 그도 사부처럼 20개의 구슬을 허공에 던진 다음 일순간 구슬들의 중심에 있는 조그만 구멍에 은침을 찔러 넣어 모든 구슬들을 꿰뚫을 수가 있었다. 비류연도 한 번의 출수로 하나씩의 구슬 목걸이를 만들 수 있는 실력을 지니게 된 지 이미 오래였다.
이 정도의 난이도 높은 시범을 보이면 누구나 놀라기 마련이다. 절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 모두들 놀라는 것 같았다. 비류연은 여 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감탄사가 그렇게 달콤할 수 없었다. 기분이 그만이었다. 자신이 놀란 토끼 눈으로 사부를 바라보았을 때 사부가 느낀 기분이 이런 기분이었 나, 다시 한 번 음미해 보았다.
마침내 너도나도 구슬 꿰기를 해 보는데 누구 하나 단 한 개의 구슬이라도 은침으로 꿰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래도 이 일에 가장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사람은 바 로 사천당가 출신의 당철영이었다. 당철영은 구슬 꿰기를 직접 해 보고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철영 그 자신이 누구인가? 종가(宗家)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사천당문(泗川唐門)의 직계 후손이었다. 당문은 강호인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독과 암기의 명가(名 家). 그들 사천당문 앞에서 감히 독(毒)과 암기(暗器)에 대해서 논하는 간 큰 문파나 무림인은 없었다. 목숨이 아까운 탓이었다. 누구나 제 한 목숨은 소중하기 마련 이니 말과 행동을 항상 조심했다. 그만큼 당문은 독과 암기에 대해 조예가 깊었고 그들의 실력은 강호에서 누구나 인정하고 있었다.
강호제일로 인정받고 있는 당문(唐門)의 으뜸 가는 비기로는 단연 암기술을 꼽을 수 있다. 암기술은 독술과 함께 오늘의 사천당가를 존재하게 한 일등 공신임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그럼 암기 수법을 익히는 데 가장 필요한 능력은 무엇인가? 그건 바로 뛰어난 안력(眼)과 빠른 손속이다. 물론 암기에 실어 던지는 내공의 힘도 중요하다. 내공 이 부족하면 암기의 살상력이 떨어지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독이나 약품에 의존하게 된다. 그것은 당문 무인에게 있어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독과 암기를 따로 사용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었다.
쪼잔하게 생긴 미세한 암기에 독을 발라 사용하는 치사한 짓을 일삼지 않았기에 무림에서도 당문을 명문정파로 인정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암기(暗器)를 익히는 데 있어 안력(眼力)의 단련은 필수였다.
물론 당철영 자신도 그 수련 과정 모두를 거쳤다 자부하고 있었다. 날아오는 젓가락에 적혀 있는 글자를 읽는 것은 물론 돌아가는 회전판에 적혀 있는 글자도 줄줄 읽을 수 있어야만 비로소 암기(暗器)를 잡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본격적으로 암기를 다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전에는 암기 근처에 가는 것조차 허락되 지 않는 엄격한 규율을 지닌 곳이 바로 사천당문이었다.
뛰어난 안력(力)과 함께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빠른 손놀림은 꾸준한 수련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다. 물론 당문도 자신들의 암기술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더욱 빠른 손속과 더 빠른 속도를 얻기 위해 여러 가지 수련 방법을 개발했고, 지금도 꾸준히 연구 발전시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당가의 직계인 자신이 허공에 던진 구슬 하나 꿰지 못했다는 것은 다시없는 수치였다.
그래도 배운 가락이 있어서인지 남들보다는 조금 나아 보이긴 했다. 단원 중에는 구멍 그림자조차 보지 못한 사람들이 수두룩했으니 말이다. 당철영은 암기와 안 력(眼)에 관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만큼 뚜렷하진 않지만 희미하나마 회전하는 구슬의 중심을 포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눈이 따라 줬으면 뭘 하겠는가. 그의 몸은, 아니 그의 몸에 달려 있는 손은 그것을 따라 주지 못했다. 손목에 차여 있는 묵환이 족쇄처럼 늘어붙어 그 일을 방해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손에 제약이 가해 졌다 하지만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은 역시 부끄러운 일이었다.
이런 감정은 그의 누이인 당문혜도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혀를 깨물고 죽고만 싶은 그런 수치심을……. 그녀도 지금 자신과 같은 심정일 거라며 스스로 위안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험한 일을 겪으며 시작한 본격 수련의 첫날 – 말로만 본격 수련의 첫날이었다. 모두들 그 사실을 심히 의심하고 있긴 하지만 은 이렇게 지나가게 되었
다. 다행히 아직은 모두들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어라, 목숨은 붙어 있네? 강도가 약했나? 내일은 기대해도 좋아. 오늘은 너무 약했지. 그냥 맛보기였어!”
물 먹은 걸레처럼 널브러져 있던 주작 단원 16명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한마디였다. 덕분에 주작단 전원은 오늘 할 수 있는 개인의 자살과 내일 있을 타살 사 이에서 심각한 고민에 빠져야만 했다.
그 다음 날도 예고대로 지옥과 지옥의 근육통이 연속되는 세상이었다. 사흘째도, 나흘째, 또 그 다음 날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일일천추(日日天樞)란 무엇 인가를 뼛속 깊숙이 느끼고 있었다. 지옥의 근육통을 이기고 지내는 하루하루가 천 일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그들의 인내도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었다.
수련 사흘째 되던 날 저녁. 아직 해가 서산의 능선에 걸려 있는 시각…….
드디어 16명의 단원 중 한 명인 개방 거지 노학의 인내는 한계에 달하고 말았다. 원래 거지란 성질을 꾹 눌러 참고 살아가는 족속이 아니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이 것저것 헤집으며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거지였다. 좋게 말하면 자유롭고 나쁘게 말하면 참을성이 없는 족속인 것이다. 여기 그런 성질의 표본이 되는 거지가 하나 있었으니, 이 모범적인 거지의 이름이 바로 노학이었다.
더 이상 무지막지한 생활을 참지 못한 노학은 끝내 폭발했다. 잡고 있던 도끼 자루를 내팽개치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비류연에게 거세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속으로 삭이고 있었던 게 많았던지 언성이 높았다. 비류연의 귀청이 떨어져라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악을 쓰고 대들었다.
비류연의 입장에서 보자면 싸가지가 깨진 쪽박 같은 못난 제자 한 놈이 하늘 같은 사부에게 대드는 천인공노할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난 더 이상 못 참아! 언제까지 우리들이 이런 잡일을 해야 됩니까? 이게 뭐냐고요? 우린 이런 잡일이나 하려고 이런 멀고 먼 아미산 깊은 곳의 훈련소를 찾아온 게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무공 수련이지 이따위 쓸 데 없는 잡일들은 아니라고요. 아시겠습니까? 난 때려 죽여도 더 이상 이런 잡일 못 합니다. 이 이상 우리들에게 잡일을 시키면서 무공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합숙 훈련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천무학관으로 돌아갈 겁니다!”
그 동안 눌러 두었던 울분을 있는 대로 토해 내자 노학은 속이 뻥 뚫린 듯한 상쾌함을 느꼈다. 일단 시작은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뒷일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 만.
“오호, 너 지금 나한테 반항하는 거냐?”
제자의 반항이라……. 이 흥미진진한 사태에 비류연은 가슴이 아파왔다. 때문인지 비류연의 이마에 있는 실핏줄이 툭툭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상당히 화가 많 이 난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은 채 웃고 있었는데 그게 더 공포스러웠다. 아무튼 용서할 수 없었다. 절대 용서될 일이 아니었다. 옛날 부터 스승에게 대드는 제자치고 멀쩡한 놈 하나 없었고, 잘된 놈도 없었다.
“그래요, 반항하는 겁니다. 난 더 이상은 납득할 수 없단 말입니다. 가르쳐 줄 겁니까, 안 가르쳐 줄 겁니까?”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쌓인 불만이 뭐 그리도 많은지 노학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무공을 배우고 싶다고?”
비류연의 눈이 가늘게 모아졌다. 그의 눈빛이 왠지 심상치 않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잠자코 지켜보니 노학이라는 거지 새끼, 하는 짓거리가 사부에 대한 예의라 고는 눈곱의 때만큼도 없는 놈 아닌가. 하늘 같은 사부에게 대드는 제자의 모습을 바라보는 비류연의 머리 속에는 많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개방에서는 거지 새끼들을 다 저렇게 교육시키나? 개방 거지들은 다 그래? 거지면 다야? 저런 놈은 맞아야 해. 한두어 대 얻어터져야 정신을 차리지. 그래, 맞 아.”
비류연은 노학을 상대하기 위한 앞으로의 행동에 대한 결정을 잠정적으로 내렸다.
‘적당히 만져 주자.’
비류연이 미소를 지으며 생글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듣는 이의 모골을 송연하게 하는 그 무언가가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무공을 배우고 싶다고?”
“예.”
“그래, 오냐. 내 그럼 한 수, 무공을 가르쳐 주마. 그럼… 잘 봐.”
“슈욱!”
순간 노학의 눈 앞에 있던 비류연의 신형(身形)이 희뿌연 잔상(殘像)을 남긴 채 순식간에 사라졌다. 노학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이럴 수가. 대체 어디로…….”
노학은 경악했다. 짧은 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노학의 머리 속을 동시에 헤집고 다녔다. 하지만 그의 무딘 시선이 비류연의 신형을 쫓기란 해가 남서쪽에서 뜨는 것보다 더 불가능한 일이었다.
“스윽!”
다음 순간, 노학의 코 앞에 비류연의 신형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찰나지간의 일이었다. 방어는 엄두도 못 낼 가공할 속도였다. 이어지는 비류연의 우렁찬 외침. “삼복 구타 권법(三伏狗打拳法)!”
비류연의 입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합이 만땅이었다. 화가 많이 났는지 고함 소리 또한 매우 컸다.
“파바박, 퍽퍽, 두두두, 빠샤빠샤, 뚜쉬.”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맹렬한 속도로 비류연의 주먹이 노학의 전신에 작렬했다.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할 것 없이 불쌍한 노학의 온몸 구석구석은 공 평하고 넉넉하게 비류연의 주먹 세례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세게 얻어맞는 데도 불구하고 노학의 몸은 뒤로 밀려 나가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오히려 수직으
로 몸이 조금씩 떠올랐다. 덕분에 한 대의 에누리도 없이 퍼부어지는 전권을 노학은 모두 몸으로 고스란히 받아 내야 했다. 그건 정말 지옥이었다. 끊어지지 않는 주 먹질이 파도가 되어 노학의 몸으로 밀려들어 갔다. 문자 그대로 피와 살이 튀는 밤이 연출되는 순간이었다.
삼복 구타 권법(三伏狗打拳法)이라니? 구타狗)권법, 복날 더위에 개 패는 권법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노학은 태어난 후 이렇게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맞아 보기는 처음이었다. 자신이 속해 있는 개방에도 방주비전(幇主秘傳)으로 은밀히 전해져 내려오는 ‘타구봉법’이라는 개 패는 오묘한 비법이 있었다. 노학 자신도 개 방방주인 용취개의 둘째 제자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비전의 타구봉법을 견식할 기회가 있었다. 그의 사부인 개방 방주 용취개가 자신의 무공 실력과 배움의 성과를 알아 본답시고 노학을 자신에게 덤비게 한 다음 그 타구봉법으로 자신을 개 패듯 패 버린 전적이 있었다. 그때의 쓰라린 추억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던 노학으로서는 타구봉법보다 더 무시무시하고 강력한 개 패는 법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다는 굳은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생각은 오늘 이 순간을 기점으로 철저하게 수정되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타구봉법만큼, 아니 그보다 더 강력한 것이 분명한 개 패는 법에 전신을 난타당하고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온몸으로 직접 체험해 본 결과 삼복 구타 권법에는 타구봉법처럼 신기한 오묘함은 없었지만 여기에는 그걸 대신할 만한 강력한 단순무식함이 있었다. 이 단순 무식하기 그지없는 경쾌한 주먹질은 눈 씻고 봐도 도저히 피할 길을 찾을 수 없는 무서운 권법이었다. 피할 길을 찾을 수 없 으니 그 주먹을 고스란히 다 맞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원래 삼복 구타 권법(三伏狗打拳法)은 비류연의 사부가 스스로 창안한 독창적인 권법으로 모두 삼부(三部)로 이루어진 권법이었다. 3초식이 아니라 1부, 2부, 3부 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는 점이 이 권법의 특이할 만한 점이었다. 초식이 아닌 부분으로 나눈 이유는 이 권법에 형식이나 초식이란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 문이었다. 힘과 속력, 그리고 약간의 요령이 그 전부다.
각 삼부는 초복(初伏), 중복(中伏), 말복(末伏)으로 나뉘어져 있고 이 삼부를 합쳐 삼복(三伏)이라고 칭한다. 나뉘어진 각 부(部)의 위력은 단계를 넘어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우선 초복(初伏) 단계로 패면 상대의 전신을 적당히 만져 주게 되는데 그러면 상대편은 반죽음 상태가 된다. 중복(中伏)은 초복보다는 좀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 는 부분으로 여기에 당하면 상대는 초주검 상태, ‘저승길까지는 앞으로 한 걸음’ 상태가 된다. 마지막 부분인 말복(末伏)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기에 당하면 말 그대로 개죽음당하게 된다. 여기서의 개죽음은 싸구려 죽음이나 혹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개처럼 맞아 죽는다는 얘기 다.
복날을 앞두고 보신탕을 준비할 때 개를 개 패듯 팬 다음 잡으면 고기가 연해진다는 설이 있다. 물론 설(說)은 설일 뿐이다. 하지만 이 낭설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것이 바로 이 이름도 거창 요란한 삼복 구타 권법(三伏狗打拳法)이었다. 그러니 이 권법에 당하면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아프다는 사실만은 정진정명(正眞正明)의 진실임에 틀림없다.
노학은 많이 아팠다. 극심한 고통이 그의 온몸을 물어뜯고 있었다. 눈탱이는 밤탱이가 된 지 오래고 얼굴은 부어 올라 원래 얼굴이 어떠했는지 윤곽조차도 잡을 수 가 없었다. 전신 타박상에 온몸이 시퍼런 멍투성이, 그나마 골절이 없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반죽음 상태인데도 뼈는 상하게 하지 않는 절묘함. 비류연의 말에 따르면 그게 바로 이 기술의 오묘함이며 진미(眞味)라고 한다.
초복(初伏)은 피부와 근육만을 상하게 하지만, 중복(中伏)은 뼈를 끊고, 말복(末伏)은 목숨을 끊는다. 이것이 바로 구타법(狗打法)의 진정한 위력이었다. 노학은 3 일 동안 간호를 받고 겨우 침상에서 일어날 수 있게 되었고, 그 후로는 비류연 앞에서는 물론이고 다른 이들 앞에서도 불평을 내비치는 일이 결코 없었다. 또한 비류 연 앞에서는 비루먹은 강아지 마냥 설설 기며 다녔다.
그 사건(일명 ‘노학 구타 사건’)은 그때의 참상을 목격한 다른 모든 사람들의 입까지도 동시에 봉쇄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 사건 이후 비류연의 귀로 불 평불만이 접수되는 일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 날의 일은 모두의 가슴에 깊이 남아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당문혜와 단목수수는 그 날의 악몽을 떨쳐 버리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좌우로 흔들었다. 당문혜의 입은 이미 저절로 닫혀져 열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ECH CCH CCH!”
산 위쪽으로부터 맑고 청아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예, 뭐 하니? 정신 차려.”
“응?”
단목수수의 말소리와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그녀를 상념에서 깨어나게 했다. 당문혜는 아직도 그 날을 잊을 수 없었다. 그때 자신의 얼굴 위로 튄 피는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 따끈한 피의 감촉, 붉게 물든 시야, 절대 두 번은 사양하고 싶은 경험이었다.
“난 그렇게 되지 말아야지.’
당문혜는 속으로 조용히, 그리고 깊게 읊조렸다. 차츰 마음이 진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겁을 먹은 두더지처럼 극렬하던 불평은 어디론가 도망쳐 찾아 볼 수가 없었 다. 공포가 화를 누른 것이리라.
“땡땡땡!”
단목수수는 조금 전부터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당문혜를 재촉했다.
“문혜야, 빨리 가자. 집합 신호야. 짧게 세 번씩 울리는 걸 보니 식사 시간을 알리는 소리일 거야. 어서 가야지.”
“알았어.”
당문혜와 단목수수는 하던 빨래를 주섬주섬 챙긴 후 서둘러 합숙소 건물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빠른 속력으로 뛰어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 지만 아직 경공을 발휘하여 빠른 속력을 내기에는 무리가 많았다. 멀어져 가는 그녀들의 등 뒤로 자연의 투명함을 지닌 계곡이 시원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앞으로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것은 오직 하늘과 비류연만이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