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권 17화 – 당삼이 구타 사건
당삼이 구타 사건
이제는 시원하다 못해 가끔은 서늘함과 차가움을
느끼게 해 주는 바람이 산을 감싸듯 불어오고 있었다.
타는 듯이 불타 오르던 붉은 태양도 이제는 그 기세가 한풀 꺾이고,
오직 선선함으로 세상을 비추던 가을의 종반(終盤),
일련의 무리가 산에서 마을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허리에 장검이나 도(刀)를 차고 있거나 손에 창을 들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 같은 색상, 같은 모양의 흑삼을 걸치고 있었고 오른쪽 가슴 부근에 그 수(數)는 다 르지만 같은 연꽃 무늬가 수놓아진 것으로 보아 이들은 같은 무림 방파에 소속된 무사들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선두에서 호쾌하게 걷고 있는 사내, 강장한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 조금 전 그는 아미파(峨嵋派)에 예물을 전하는 임무를 완수했다. 예물이 가지는 의미와 중요성 을 생각해 볼 때, 국주께서 아미파에 예물을 전하는 일을 자신에게 맡겼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중시한다는 뜻과 같은 의미라 할 수 있었다.
이 사천 땅, 그것도 아미산 바로 코 앞에서 표국을 운영한다는 행위는 강화의 명문 거파이자 아미산 자락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아미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중양표국의 국주는 얼마간이나마 아미파에서 재간 몇 수를 전해 배워 아미의 속가 제자라고 자칭하는 실정이었다. 국주 인 십팔검(十八劍) 장우양은 남자이기 때문에 여인 중심의 문파인 아미파에서 정식으로 무공을 사사받지 못했지만은 꽤 많은 수의 재간을 용케 얻어 배운 처지였 다.
그의 별호인 십팔검은 절기가 검을 통해 발휘될 때 18번의 변화와 18개의 검영을 보여 준다고 해서 강호 사람들이 붙여 준 별호였다. 장우양의 18번 변한다는 검 식(劍式)도 아미에서 장우양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그래서 장우양은 스스로 아미의 제자라고 칭하면서 매번 이렇게 아미파에 예물을 보내고 있는 실정이었고, 아미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미 파에 예물을 갖다 바치는 일은 중양표국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일 중 하나였다. 가끔 일부 사람들이 명문 정파나 강호의 거대 문파는 아무런 수입이나 금전적 활동 없이 유지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도 인간인 이상 먹고살아야 되고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세상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활이라는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 법, 아무리 속세와 떨어져 도를 닦고 불경을 외는 도가(道家)나 불가(佛家)라 해도 예외일 수는 없다. 하지만 재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건이 아닌 다음에야 어딘가에 서 돈이라는 지극히 세속적인 물건을 생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한 것이 바로 기부와 예물이라는 명목의 사례비였다.
그나마 세속에 존재하는 크고 작은 문파들은 자신들의 문파를 유지하기 위한 자금을 얻으려는 수단으로 주점이나 기루 같은 숙박업이나 유흥업, 또는 표국 같은 사업을 운영하기도 했다. 또한 자신들이 영향을 미치는 영역 안에서의 약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사례비를 받기도 한다. 그리고 좀더 이름 있는 문파라면 제자를 받는 조건으로 사례비가 아닌 순수한 마음의 성금(?)을 챙기기도 한다.
거대 문파일 경우 상류층의 자식이 그 문파에 들어가기 위해 많은 돈을 기부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세속에 존재하는 문파가 아니라 그래도 진리 를 배우고 익히며 궁극적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무를 익히고 도를 닦는 곳이라고 자처하는 문파라면 대놓고 세력을 확장하거나 생계 유지 사업에 매달릴 수는 없 었다. 생계 유지만큼이나 체면도 이들에겐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이라고 이름 붙여진 도관이라도 시주나 공양은 받는다. 시주나 공양이란 자신의 성의를 나타내기 위해 부처님에게 바치는 일종의 성의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통의 절이나 도관들은 결국 이런 시줏돈으로 먹고살게 된다. 그런데 이런 절이나 도관이라도 한 수 가지고 있는 이름 난 무림문파라면 이 시줏돈이나 공 양이라는 명목 하에 들어오는 수익이 장난이 아니다. 엄청난 금액의 수입이 그들 문파로 들어오게 된다. 그것도 특정한 인물이나 문파로부터…
자금을 획득하기 위한 또 한 수로서 바로 속가 제자라는 존재가 있다. “잘 기른 제자 하나 열 자식 안 부럽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제가 이곳 문파에 몸을 담아 도와 무의 비법을 그 일부나마 얻어 배우니 이 은혜는 하해와도 같습니다. 갚아도 갚을 수 없는 광영입니다. 이에 불초 제자가 미약하 나마 결초보은의 생각으로 조그만 예물을 정기적으로 바치나니 이것으로서 그 하늘보다도 높고 바다보다도 깊은 은혜를 일부나마 삭감할 수 있다면 저의 크나큰 기쁨이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바치는 돈이 또 장난이 아니다. 제자가 문파에 몸을 담아 무를 배우고, 속세에 나가 배움으로써 성공하여, 옛적의 입은 은혜를 갚겠다는 데 그 정성을 어찌 감히 거절할 수 있겠는가. 내면이야 어찌되었든 표면상으로는 다 이와 유사하게 모든 일들이 처리된다. 그리고 그것이 무림의 관행이었다. 이런 꼴을 보고서 비류연이 나중에 한마디하였다고 한다.
“까짓 손짓 발짓 몇 개 가르쳐 주고 되게 생색내네. 나도 제자나 한 번 길러 볼까. 그거 짭짤하겠는데…….
어쨌든 그렇게 이익을 얻은 문파로서도 속세에 나간 제자가 어떤 고통에라도 시달리게 되면 당장 쫓아가 그 고통의 원인을 몇 번 적당히 만져 주고, 가끔은 세게 만지기도 하면서 제자를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힘에 의한 비호였다. 그리하면 그때부터 제자는 여태껏 낸 기부금이 아까워서 라도 자기 문파를 등에 업고 무척 설치기 시작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예물을 전하는 일은 거대 문파의 그늘에 있는 존재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신중을 기하는 행사였다. 강장한은 자신에게 맡겨진 큰 임무를 무사 히 수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기분이 째지다 보니 호기가 넘쳐나고 그러다 보니 아래 부하들에게 상관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야 할 필요성을 느 끼게 되었다.
“좋다, 기분 째진다. 전원 야춘루(夜春樓)로 집합! 오늘 술은 모두 내가 산다. 내려가서 마음껏 마셔 보자. 오늘 먹고 죽자고!”
야춘루(夜春樓)는 중양표국 근처에 있는 이름 난 주점으로 아가씨가 예쁘기로 정평이 자자했다. 예로부터 강호에 공짜 술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모두들 잡고 있던 무기를 하늘로 쳐올리며 환성을 질렀다.
“와~아!”
“역시 강 대(大)표두님이 최고입니다.”
““강 대(大)표두님은 화끈하시다니깐.”
“오늘 죽어 봅시다, 강 대(大)표두님.”
“마시자는 데 내일은 필요 없죠. 오늘 먹고 죽자고요, 강 대(大)표두님.”
부하 표사들이 모두들 들떠서 한마디씩 하는데 모두들 꼭 ‘대(大)표두님’을 집어넣으며 특히 대(大)자를 강조해서 불렀다. 강장한은 성격이 그리 좋다고는 못 하 는데 저번에 부하 표사 한 명이 강장한에게 그냥 ‘강 표두님!’ 하고 부르다가 죽도록 얻어터진 사건이 있었다. 강장한은 자신을 부를 때 대(大)자를 빼는 것을 무척 이나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 사건 이후로는 모두들 강 대표두님이라고 꼭 대(大)자를 넣어 부르게 되었고 같은 등급의 동료들조차도 강 대표두하며 대(大) 자를 꼭 넣어서 불렀다. 강장한의 성질이 더럽기는 하지만 실력으로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두들 대(大) 자를 강조해서 불러 주니 강장한은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 그런 그의 눈에 어깨에 물지게를 지고 올라오는 누더기 차림의 사내가 눈에 띄었다. 머 리는 제멋대로 자라 손질이 되어 있지 않은 산발에 옷은 너덜너덜하고 어깨에는 양쪽에 물통을 단 지게를 지고 있었다. 산길은 하나뿐, 올라가는 길도 내려가는 길 도 오직 하나뿐인 길이므로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한 명의 사내는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물지게를 힘들게 짊어지고 산을 올라오고 있는 사내는 이 사천을 호령한다는 독과 암기의 명문, 사천당가의 직손이자, 현 당문주의 세 명의 아들 중 막내인 당철영이었다. 그를 본 강장한이 기분 나쁘다는 투로 내뱉었다.
“뭐야, 저건 또?”
당철영은 심히 기분이 좋지 못했다. 조금 전 계곡에서 벌어진 훈련 때문에 물 위와 물 밑, 그리고 육지를 오락가락하며 힘을 잔뜩 뺀 상태였다. 이제 수련도 어느 정 도 막바지에 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처음과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어렵고 고단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수련에 능숙해져도 무슨 이유에선지 피곤하 긴 매양 마찬가지였다. 능숙해지면 덜 힘들어야 되는 것이 하늘의 이치인데도, 능숙해지는 것만큼 더 혹사시키니 계속 힘들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상황도 그랬다. 극렬한 훈련으로 있는 힘, 없는 힘 다 짜 내어져서 이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상태에서 물을 길어 오라는 사부의 말은 자신의 인격 을 심히 무시한 행동으로밖에 보이질 않았다. 당연히 기분은 매우 더러운 상태였고 그런 그의 귀에 자신을 가리켜 “뭐야, 저건 또?” 라는, 사람을 아주 무시하는 예 의 없고, 천박한 소리가 들려 왔으니 급기야 기분은 폭발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산을 내려오던 강장한 일행의 모습이 비쳤다. 순간 당철영 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무림인, 어느 방파지?’
그는 아미파 사람들과는 거의 접촉이 없다시피 했고, 그 이외의 무림인들도 이 산에서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근데 별로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군. 별 볼일 없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당철영의 곁으로, 그들 무리 중 한 명이 다가왔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하급 무사인 모양이었다.
“네놈은 뭐냐, 당장 길에서 비켜나라. 중양표국의 대표두이신 비풍도 강장한님이 지금 지나가신다. 그 더러운 몰골 눈 앞에 안 보이도록 빨리 치워! 으, 냄새하고는…….?”
표사 하나가 그를 길 한쪽으로 밀쳐 내려고 했다. 무례한 행동을 당한 당철영의 눈에서 순간 불꽃이 튀었다. 자신이 언제 이런 무례한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있었던 가. 단연코 확언하건대 사부 이후로 자신을 이렇게 대한 놈은 그 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아, 그전에는 사부가 있었군. 어쨌든 모두 각설하고 당철영 성격 에 이런 대접을 받고 그냥 있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의 두 눈에 살기가 어렸다. 당철영을 잡고 있던 표사의 동작이 흠칫하면서 굳어졌다.
“뭐, 뭐냐. 그 누 운 빛……. 빠, 빨리비켜…….”
다리가 후들거리고 혀가 굳어 버렸는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당철영의 눈빛에 완전히 쫀 것이다.
“네놈들이나 비키시지. 치워, 그 손.”
당철영이 자신을 잡고 있던 중양표국의 하급 무사의 손목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도저히 정상이라면 움직일 수 없는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표사의 팔을 꺾었 다.
“끄아아악!”
비명 소리와 함께 당철영의 어깨를 잡아 밀쳐 내려던 표사는 손목을 부여잡고 길 한쪽으로 나뒹굴었다. 당철영은 원래 성질이 급했다. 그의 머리에 김이 들어가서 귓구멍으로 연기가 나면 말릴 사람이 아무도 없는 처치 곤란한 자였다.
“이노무 새끼가.”
모두들 길길이 날뛰며 무기를 빼 들었다. 같은 동료가 당하는데, 멍하니 관전만 한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네놈, 뭐 하는 자식이냐.”
의외라는 표정으로 강장한이 당철영을 향해 물었다. 아무리 하류라지만 그래도 명색이 무사였다. 그것도 자기가 가르치던 놈들 중 하나였다. 표사는 항상 몸을 단 련해야 했다. 실력은 곧 자신의 목숨과 직결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표국에 몸을 둔 표사들에게 실력의 향상이란 곧 개인의 수명 연장, 즉 장수 만세를 뜻하는 것이 고, 표국의 입장에서 볼 때 표사들의 실력 증가는 곧 위험도 감소(減少), 즉 안전도 증가를 뜻하고 그것은 곧 성공률 증가를 의미했다. 성공률이 높아진다는 것은 실
패할 확률이 줄어듦을 뜻하고, 실패가 적어진다는 것은 곧 손해 배상비의 지출이 줄어듦을 의미하므로, 돈 나가는 일이 적어진다는 의미심장(?)이다.
쉽게 간단히 요약해서, 핵심만 찔러 얘기하자면 돈을 더 잘 벌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다. 넉 자로 요약하면 ‘수익 증가가 된다. 그러므로 표국에서는 매일 표사들 을 단련시키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강장한도 대표두의 직책을 맡고, 아래 부하를 거느린 입장으로서 당연히 부하들을 단련시킬 의무가 있었다. 방금 손목이 꺾여 쓰러진 놈도 자신이 가르치던 녀석 중 한 명이었다. 그런 녀석을 간단히 한 번에 꺾었다. 미루어 짐작해 볼 때 뭔가 한 가닥 하는 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네놈 뭐 하는 자식이냐?”
“닥치고 덤비기나 해, 새끼야.”
지난 근 다섯 달, 정확히는 넉 달하고 다섯 날 동안 당철영은 별로 좋다고 할 수 없었던 성격이 더욱 거칠어져 있었다. 이것은 비단 그에게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 다. 같이 온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 정도가 틀릴 뿐이지 어김없이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모두들 악덕한 사부 때문에 성격이 많이 바뀐 상태였다. 그래서 그런지 나오는 말도 거칠고 난폭하기만 했다. 난폭한 말은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마음에 입은 상처는 분노로 표출된다. 분노한 표사 한 명이 장검을 들고 달 려들었다.
“이 새끼, 죽어.”
당철영은 달려드는 표사의 검을 오른발 하나만 뒤로 빼는 것과 동시에 허리를 틀어 가볍게 피했다. 그리고는 목표물을 잃어 휘청거리는 놈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 “큭.”
달려든 표사는 배를 움켜잡으며 쓰러졌다. 두 놈이 더 달려들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모두 배를 움켜잡고 땅바닥에 쓰러져 구르는 신세가 되었다. 소득 없이 몇 명이 더 달려들었지만 당철영은 위태위태해 보이는 발걸음으로 모두 피한 다음 발로 녀석들의 뱃가죽을 차 주고, 주먹으로는 대갈통을 날려 주었다.
“제법 하는군. 믿는 구석이 있다 이거구먼.”
여태껏 보고만 있던 강장한이 허리춤에서 도를 뽑아 들고 천천히 다가왔다. 부하들이 달려드는 족족 쓰러지니 이제는 자신이 나서야만 할 상황이 만들어져 있었 다. 대장은 나중에 늘 등장하는 법, 강장한이 다가와 당철영을 마주 보며 말했다.
“내가 상대해 주지.”
진부한 대사였다.
‘대장인 놈인가 보군. 젠장, 힘이 하나도 없는데…….?
훈련으로 너무 혹사당했던 터라 지금 당철영은 움직이기도 힘겨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기세가 꺾임은 곧 패배를 뜻하기 때문이었다.
‘당철영, 강한 모습을 보여!’
스스로 마음을 추스르고 당철영은 물지게를 벗어 길 한쪽에 내려놓았다.
“간다!”
강장한은 친절하게 예고까지 해 주며 공격했다. 강장한의 도가 원호를 그리며, 자신의 어깨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어, 별로 빠르지 않군.’
강장한의 도가, 그 움직임이, 거짓말 안 하고 다 보였다. 그 동안의 대련하던 상대, 즉 주작 단원들의 검이나 도에 비교해 보았을 때, 정말 그의 도는 너무 느렸다. 실제로 강장한의 도가 그렇게 느린 게 아니었지만 당철영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 것이다.
“스윽.”
“어.”
당철영의 오른쪽 어깨 부근이 살짝 베여 피가 흘러나왔다. 검을 마저 피하지 못한 것이다. 도속이 빠르지 않게 보여서 충분히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피하지 못했다니. 순간 당철영은 황당했다. 물론 강장한의 도법에 무슨 대단한 현기(賢氣)가 있어, 당철영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베인 것은 아니었다. 합숙 훈련의 성 과로 안력(眼)은 극도로 발달되어 상대의 도를 능히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의 몸 상태가 신경의 반응을 미처 따라가지 못해서 생긴 현상이었다. 당철영은 상대의 도를 파악하여 어느 곳으로, 언제 오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육체가 극도의 피로에 지친 탓에 중추 신경으로부터의 반응 전달을 제대로 이행하질 못했 다.
다시 왼팔과 왼쪽 허벅지, 오른쪽 다리 순으로 깊지는 않지만 칼에 베여 상처를 입었다. 계속해서 반응에 몸이 따라가질 못했고 그만큼 상처도 점점 더 깊어졌다. 이대로 계속 당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자신의 목을 노리며 날아든 도를 몸을 숙여 재빠르게 피한 당철영은 바닥에 깔려 있던 자갈돌 하나를 집어 강장한에게 잽싸 게 던졌다.
“앗!”
“어?”
앗, 소리는 당철영의 의외의 공격에 놀란 강장한의 놀란 외침이었고, 뒤 부분은 돌을 던진 당철영 자신도 놀랄 정도로 돌이 느린 속도로 날아간 사실에 충격을 받 아 내뱉은 탄식이었다. 지금 그에 손에 차여 있는 묵환은 방해만 되는 무거운 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힘이 모두 빠져 있던 상태에서, 40근이 넘는 묵환까지 차여 있었기 때문에 원래의 위력과 속도가 나올 리 만무했다.
하지만 당철영에게 느렸지만 강장한에게는 느린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오히려 너무 빨랐던가? 강장한은 돌을 막아내지는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것으로 위기를 넘겼다. 날아드는 돌을 쳐 내지 못했다는 것은 강장한의 반응이 그만큼 느렸다는 이야기였다.
둘 다 당황했지만 먼저 정신을 수습한 쪽은 당철영 쪽이었다. 당철영은 당황한 강장한이 돌을 피하려다 자세가 흐트러진 것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달려들었다. 도
의 사정거리, 상대방의 도가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거리 안으로,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하여 순간적으로 파고 들어간 당철영은 주먹으로 냅다 강장한의 대갈통을 후려갈겼다.
“빡.”
“홱.”
강장한의 대갈통이 왼쪽으로 돌아갔다.
“빡.”
“홱.”
이번에는 대갈통이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푸오!”
드디어 강장한의 입에서 피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당철영은 쉬지 않고 강장한의 전신을 후려갈겼다. 5개월 동안 배워서 남은 건 힘밖에 없었다. “받아라, 삼복 구타 권법(三伏狗打拳法)!”
당철영의 주먹이 강장한의 전신을 난타했다. 그 동안 입은 상처에, 그곳에서 흘러내리는 피값을 받아 낼 듯 강장한의 전신을 마구 패기 시작했다. 당철영의 네 번 째주먹이 강장한의 아구창을 향해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뒷골에서 번갯불이 번쩍거렸다.
“칵.”
당철영의 입에서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뒤에서 보다 못한 표사 한 놈이 들고 있던 창으로 당철영의 뒤통수를 내려친 것이었다. 피로에 지쳐 감각이 둔해져 있던 당철영은 미처 이 싹수머리 없고 비겁한 행동을 눈치채지 못하고 고스란히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당철영의 눈 앞이 캄캄해졌다.
‘칵… 독(毒)까지 바라지 않아도, 하다못해 암기라도 하나 있었으면……
당철영의 몸이 서서히 앞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당철영의 주위로 표사들이 몰려들었다.
“야, 밟아.”
“본때를 보여 주자고.”
“빈대떡으로 만들어 주마.”
“난 파전이 좋은데…….”
“주책이야, 어물전이 더 맛있어.”
그리고는 쓰러진 당철영을 빙 둘러싸고 구타하기 시작했다. 한 반 각쯤 지났을까? 열심히 무지막지하게 당철영을 구타하며 분풀이를 하고 있던 강장한이 말했다. “야, 물 부어.”
표사 한 명이 당철영이 벗어 놓았던 물지게에 걸려 있던 물통을 들고 와 물을 끼얹었다. 약간 정신이 들려고 하는 당철영을 보며 강장한이 말했다.
“야, 먼지 날 때까지 패!”
강장한이 애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좋아, 젖은 몸을 얼마나 때리면 먼지가 나는지 실험해 보자고.”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표사들이 호응하기 시작했다. 다시 모두들 당철영을 둘러싸고 당철영의 몸 위에 발길질을 해 대기 시작했다. 인정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 봐 도, 떼다 만 눈곱만큼도 없었다. 때는 이때다 싶어 모두들 아까 얻어맞은 복수를 마음껏 해 대고 있는 중이었다. 창대 뒤끝으로 머리를 찍어 내리는 놈도 있었다. 사 지가 밟히고, 등이 찍히고 배가 차이고……. 그렇게 약 일 각 정도의 시간 동안 열심히 당철영의 몸을 구타한 표사들은 이제 더 이상은 패기가 귀찮아진 것인지, 아 니면 마무리를 하기 위해서인지 모두 동작을 멈추었다.
제일 앞장서서 제일 심하게 당철영을 구타하던 강장한이 이들을 멈추게 하였기 때문이다. 당철영은 더 이상의 미동도 없이 죽은 듯이 땅바닥에 패대기쳐진 채 쓰 러져 있었고, 그의 전신에는 이미 성한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죽여 버릴까요!”
눈이 찢어진 표사 한 명이 물었다. 이미 얻어터질 대로 얻어터져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로 만들어 놓고서는 고작 하는 말이 ‘죽여 버릴까요?’였다. 왠지 자신의 마 음과 깊이 부합되는 좋은 의견을 내놓은 부하를 바라보는, 한쪽 눈 주위가 벌게지고 입가에 피를 머금은 강장한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이놈한테 당한 수하가 도대 체 몇 명인가. 지금 이 주위에 성한 놈은 한 놈도 없었다. 다들 이놈에게 맞아서 한 군데 이상씩 당했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비슬거리던 놈이. 으으… 콱, 죽여 버려!’
살심(心)이 끓어올랐다. 아까 두들겨 맞았던 몸이 아파 왔다. 자신은 이놈과 일 대 일 대결을 펼쳤기 때문에 남들보다 성하지 않은 곳이 훨씬 더 많았다. 아까 맞 았던 괴상한 이름의 그 뭐냐 삼복견몸보신, 어쩌고 하는 무공에 당한 타격이 컸다. 만일 부하들이 도와 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지금쯤 저 세상에 가 있을지도 몰랐 다.
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검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러다 이내 강장한은 검을 검집에 도로 꽂아 넣었다. 화가 난다고 마음내키는 대로 할 수는
없었다. 방금 검을 잡았던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는 도리질 쳤다.
“아미산에서 살인을 할 수는 없지. 됐다, 이 새끼도 이 정도 맞았으면 정신을 차렸겠지. 그냥 가자.”
그렇다. 여기는 다른 산도 아닌 아미산이고 산 위엔 바로 9대문파의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아미파가 있었다. 그런 아미파의 영역인 아미산에서 시비가 붙어 상대방을 죽인다는 것은 아미파의 체면을 깡그리 무시한 처사였다. 아미산에서의 칼부림에 의한 살인을 아미파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자비를 가르침으로 하는 부처님을 모시는 아미파의 정문 앞에서 살인 사건이 나면, 체면이 있지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일이 있어도 사건을 해결 하려 들 것이다. 아미파, 이름 석 자에 먹물 칠을 한 놈들을 아미에서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아미파에 미움을 받을 수는 없었다. 만일 이놈을 죽였다가 들키면 표국 문 닫는 것은 당연지사고, 심하면 목까지 달아날 지경이 될지 몰랐다.
그래서 살심을 누르고 그냥 인원을 수습해 하산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의식 불명 상태로 쓰러져 있는 당철영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구타를 당 했으니 몸도, 뼈도, 정신도 성치가 않아 그대로 두면 짐승 밥이 되든지 얼어서 죽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