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4권 23화 – 꿈 (24권 끝)

비뢰도 24권 23화 – 꿈

-깨어난 악몽!

“사형, 대결 한판하시죠.”

붉은 무복을 입은 소년이 목도 두 자루를 내밀며 씩씩하게 말했다. 청년은 피식 웃었다.

“하하, 넌 아직 멀었다, 멀었어. 십 년은 빨라!”

그렇게 말해도 소년은 물러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따악!

청년의 목도가 소년의 머리를 한 방 먹였다. 붉은 옷을 입은 소년이 벌러덩 뒤로 나자빠졌다. 소년의 머리에 금방 큰 혹이 생겼다. 그래도 소년은 눈물을 글썽이면 서도 울지는 않았다. 울음을 터뜨린 것은 안절부절못하며 대결을 지켜보고 있던 소년의 동생 쪽이었다.

청년은 머리를 긁적였다. 약간 미안한 감이 들었던 것이다. 어린 사제한테 너무 지나치게 상대한 게 아닌가 하는 죄책감도 들었다.

하지만 이 꼬맹이 녀석은 천재였다. 천재의 피를 정통으로 이어받은 순종마였다. 이렇게 발전이 빠른 녀석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어리다고 마냥 봐주고 있다가 는 언제 추월당할지 몰랐다. 아직은 머리를 움켜잡고 입을 삐죽 내미는 귀여운 후배지만 사자의 후예는 사자, 언제 그 이빨을 드러내 자신을 잡아먹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미안한 건 미안한 거였다.

“괜찮니, 봉아? 룡룡이도 그만 울고. 누가 보면 이 형이 널 때린 줄 오해할 것 아니냐?”

그의 입장에서는 오기가 있는 형 쪽보다 신마의 후예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순한 울보 동생 쪽이 더 다루기 힘들었다.

“아룡, 그쳐!”

형인 붉은 옷 소년이 외치자 동생 쪽이 놀랍게도 울음을 뚝 그쳤다. “우린 신마 할아버지의 손자야. 그러니까 함부로 울어선 안 돼!” 그리고는 당찬 눈빛으로 청년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쫙 펴 보였다. “그건 또 뭐냐? 다섯 판 더 하자고?”

질리지도 않냐는 표정으로 청년이 물었다. 승부는 불 보듯 뻔했다.

“오 년! 딱 오 년이에요, 사형! 오 년 안에 사형을 능가해 보이겠어요!”

얼씨구. 저 끝을 알 수 없는 자신감과 약간의 무모함과 지기 싫어하는 오기는 정말 사부님을 꼭 닮아 있었다. 그나마 그 괴팍함을 닮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청년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해봐라.”

그리고 다시 시야가 어두워졌다. 그때서야 그는 알 수 있었다, 그 청년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어두워졌던 시야가 다시 밝아졌다. 또다시 눈앞에 붉은 옷의 소년이 서 있었다. 그러나 키도 훨씬 커지고, 훨씬 늠름해져 있었다. 그리고 입가에는 그날과 다른 여 유가 맺혀 있었다. 시간 역시 눈 깜박할 사이에 오 년이 흘러 있었고, 소년은 어느덧 청년이 되어 있었다.

소년은 청년이 되었고, 더 이상 자신의 목도에 맞고 울상 짓지 않게 되었다. 지금 서로의 손에 들린 것은 오 년 전 그날과 다르게 날이 세워진 진짜 칼이었다. 벌써 몇 번인가 격돌했다 빠지고를 반복한 참이었다. 둘 다 지쳐 있었다.

“어때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적의 청년이 말했다.

“효봉, 이 녀석! 많이 늘었구나!”

적의소년, 아니, 이제는 청년이 된 효봉이 말했다.

“그때 말했잖아요, 오 년 안에 이겨 보이겠다고.”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냐, 네 녀석은?”

효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징한 녀석이었다.

“하아, 확실히 네 녀석은 늘었어. 하지만 아직 멀었다. 날 이기려면 아직 멀었어. 자, 가서 십삼도나 익혀서 다시 돌아와라.”

그건 그들 사이의 농담이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열두 초식으로는 절대 자신을 쓰러뜨릴 수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사형, 왜 이러십니까. 열두 개로도 충분합니다. 열세 번째는 아직 남겨둬야 해요.”

“왜?”

“그건 할아버님 이길 때 써먹어야 하니까요!”

“푸하하하하하하!”

진지한 얼굴로 농담을 하니 이럴 때는 웃어줘야 할 것 같았다. 저 녀석의 할아버지가 누군가, 바로 전 무림에서 신마라 추앙받는 무신마 갈중혁 그분이 아닌가. 그 런 할아버지한테 이기려 들다니, 정말 어쩔 수 없는 녀석이었다.

“네 녀석들이 십삼도를 익힌다면 가능할 수도 있지.”

등 뒤쪽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깜짝 놀란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의 바로 곁에 어느새 노인 한 명이 서 있었다. 겉보 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결코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다가는 큰코다치는 수가 있었다. 이 노인이야말로 흑도의 신으로 군림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사, 사부님을 뵙습니다!”

“소손이 할아버님을 뵙습니다.”

두 사람이 황급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인사했다. 하늘처럼 높은 분이라 수년을 대해도 아직도 여전히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나마 그보다 좀 더 편안한 반응을 보 인 사람은 효봉이었다.

“헤헤, 다 들으셨어요?”

“그럼, 이놈아. 그렇게 크게 떠드는데 안 들릴 줄 알았느냐? 꿈도 야무지구나!”

쯧쯧, 혀를 차며 노인이 면박을 주었다. 그러나 손자의 재롱을 보는 듯한 눈빛은 인자로웠다.

“헤헤, 화나셨어요?”

노인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제발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구나. 나도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말 좀 구경해 보자. 할 수 있겠느냐?”

“물론이죠. 이 소손만 믿으십시오!”

효봉이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치며 호언장담했다.

“하하하하하, 그래야 내 손자지. 벽한, 네 녀석은?”

통쾌하게 홍소를 터뜨리던 노인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무, 물론 믿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자신이 없었다. 그가 올라야 할 태산은 너무나 높았다.

“정말이냐?”

영 미심쩍다는 눈빛으로 노인은 그를 바라보았다. 하긴, 자신감이 깃들어 있지 않은 목소리로 상대의 신뢰를 얻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자기도 믿지 않는데 남을 어떻게 믿게 할 수 있겠는가. 노인은 단숨에 그의 망설임과 불신을 읽어낸 것이다.

“쯧쯧, 신마의 제자란 녀석이 그렇게 패기가 없어서야 되겠느냐?”

다들 경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를 이렇게 꾸짖을 수 있는 것도 이 노인 한 사람뿐이었다. 그의 마음에도 야망이 있고 포부가 있고 목표가 있었다. 다만 그 가 로막고 있는 벽이 지나치게 높을 뿐이었다.

“노부는 말이다, 나보다 대단한 제자에게 빌붙어서 편하게 사는 게 인생 목표다. 그러니 제발 좀 노부를 뛰어넘어 노부가 짊어진 귀찮음을 좀 나눠 가졌으면 좋겠 다. 제자랑 손자 좋다는 게 뭐냐? 노부도 말년에 덕 좀 보자.”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부님.”

그가 제일 두려운 것은 그의 하늘 같은 사부를 실망시키는 일이었다.

“소손만 믿으세요. 할아버님의 노후는 제가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여전히 큰소리 하나는 떵떵치는 녀석이었다. 확실히 아무리 혈육이라 해도 신마 앞에서 주눅 들지 않는 그릇의 크기는 본받을 만했다.

“제발 그래 주거라. 노부가 보지 못한 광경을 너희들이 보여주면 좋겠구나, 열세 번째 도를. 하지만 될 수 있으면 이 늙은이가 죽기 전에 부탁한다. 꼬부랑 할아버 지가 되기 전에.”

“맡겨주세요!”

호기가 끓어오른 갈효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할아버님은 꼭 보시게 될 겁니다! 왜냐하면 제가 보여 드릴 테니까요! 할아버님 노후의 최대 적은 무료함이 될 겁니다. 제가 보증하죠.”

“어허, 사제, 무슨 소릴 그렇게 하나? 이 사형을 옆에 두고 새치기 하지 말게!”

그제야 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그가 외쳤다.

“아니에요, 제가 먼저예요.”

“내가 먼저라니까 그러네. 넌 아직 일러.”

“그럼 내기할까요?” “좋지. 기한은?”

“십년!”

신마라 불리우는 이가 백 년에 걸쳐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를 십 년 안에 도달하겠다는, 어찌 보면 참으로 터무니없는 발상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젊은 혈기에 그게 가능할 거라고 믿었다.

“좋아! 약속하지.”

하나 그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그리고 그의 사제도 사부 이외의 존재에게 끝없는 절망감을 맛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지독한 패배감과 공포, 그 자체인 그 경험 은 아직도 악몽이 되어 밤마다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자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그것을 보지만 않았더라면… 그의 인생이 이렇게 뒤틀리지는 않았으리라.

“그런데 그자가 어떻게 생겼지??

어떤 자의 인영이 떠올랐다. 하지만 얼굴은 지워진 듯 보이지 않는다. 저 빈 얼굴 안에 어떤 얼굴이 있었는지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기억 속에서 도려내진 듯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못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알 수 없다. 그가 계속 뭐라고 입을 열어 말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그 얼굴을 보려고 시도했다.

암흑! 깊이를 측정할 수 없는 암흑이 그곳에 있었다. 그의 잣대로는 측량할 수 없는, 그것은 밤하늘과 같은 거대함이었다. 왜일까? 그를 보고 있으면 어떤 존경심 과 절망감이 동시에 생겨났다.

“나는 이자를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볼 수가 없었다.

‘누구지? 누구지??

반드시 기억해 내야 할 것 같은 사명감이 새하얘진 의식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스윽!

등을 돌리고 있던 그자가 돌아섰다. 그자의 얼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자의 목 위는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비명을 내질렀다. 알 수 없는 공포가 그의 신경을 좀먹 어갔다. 한시라도 빨리 그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그러나 몸이 거미줄에 묶인 곤충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서서히 다가온 그자가 아무 형상도 없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제 보이는 것은 그의 입술뿐이었다. 그 입술이 뭐라고 움직이며 무슨 말을 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는 다시 한 번 미친 듯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는 공포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리고는 끊이지 않을 것 같은 비명을 지르며 번쩍 눈을 떴다. ‘헉헉헉! 여긴…… 어디지?”

빛 때문일까? 눈이 따가웠고, 온몸은 식은땀으로 홍건히 젖어 있었다. 눈에 익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칠상흔은 겨우 자신이 있는 장소를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바로 자신의 대기실이었다.

“누구지?”

누군가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선은 하나가 아니었다. 아직 감각이 완전히 돌아오진 않았지만 서넛은 되는 것 같았다.

맨 처음 들어온 얼굴은 여자의 몸으로 놀라운 힘을 발휘해 그를 꺾어 엄청난 충격을 정신과 육체 양면에 안겨준 연비라는 여인이었다. 왜 자신을 쓰러뜨린 자가 자 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걸까? 그러나 연비를 봤을 때의 놀라움은 그다음 사람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칠상흔은 반쯤 의식이 든 상태에서 불에 데인 듯 화 들짝 놀랐다.

‘왜? 왜? 왜?’

왜 다른 누구도 아닌 백도무림맹 맹주가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건가? 그가 기절해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세 번째 사람으로 시선을 옮긴 순간, 그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운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언제나 죄송스럽게 생각하던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흰머리와 흰 수염은 그날과 똑같았다. 노인이 물었다.

“나를 기억하느냐?”

그 험상궂던 일곱 개의 깊은 상처가 패어져 있던 칠상흔의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칠상흔이란 사람을 알고 있는 자 라면 누구나 놀라며 경악해 마지않을 일이었지만 그로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어떻게든 입을 열어 사죄부터 하려는데 아직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아, 아, 죄, 죄’라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혁중노인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흑도의 전설 역시 이런저런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어, 어찌… 제가 감히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그의 눈물은 마치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보고 있는 사람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렇게 누워 있을 생각이냐?”

그러자 비로소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칠상흔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아직 일어나는 건 무리예요.”

그러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칠상흔은 억지로 일어났다. 여전히 중심을 잡지 못해 비틀거리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를 부축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금 부축하며 그 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칠상흔의 몸이 혁중노인 앞으로 허물어지듯 무너졌다.

“부, 불초 제, 제자가 사부님을 뵙습니다.”

혁중노인은 침묵한 채 그 절을 받았다.

“……”

혁중노인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엎드려 벌벌 떨고 있는 칠상흔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정녕 네 사부가 맞느냐? 그리고 너는 정녕 내 제자가 맞느냐?”

“크흐흐흐흑!”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던 칠상흔의 두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구 년 동안 아무런 연락도 없어서, 사부가 제자를 찾게 해? 이 무정한 놈!”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죽을 죄를 졌습니다. 이 불초한 제자를 죽여주십시오! 저는 살 가치가 없는 놈입니다!”

혁중노인의 움직임이 딱 멎었다. 그리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나라.”

칠상흔은 감히 일어나지 못했다.

“어서!”

혁중노인이 소리치자 그제야 칠상흔이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송구스러워 감히 혁중노인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닥쳐라! 이 한심한 놈!”

부우우우웅!!

대갈일성과 함께 성난 주먹이 칠상흔의 뺨에 직격했다. 부상 중인 칠상흔은 이 장 거리를 날아가 벽에 부딪쳤다.

쾅!

엄청난 굉음에 연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 여기서 송장 하나 치우겠군.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대형, 그러다 사람 잡겠습니다.”

멀쩡한 사람도 맞으면 골로 가는 일격이다. 그런 것이, 이미 너덜너덜한 부상자에게로 향했으니 나백천의 걱정도 당연한 것이었다.

“흥, 이 정도론 안 죽어! 힘 조절 정도는 했다.”

확실히 그 말대로 칠상흔은 용케 살아 있었다. 그는 얼얼한 뺨을 부여잡은 채 멍청한 눈으로 혁중노인을 바라보았다.

“사, 사부님…….”

혁중노인의 화는 아직 가라앉이 않았다.

“에라이 이 한심한 놈! 내가 죽은 네놈을 보기 위해 여태 찾아다닌 줄 아느냐? 살아 있는 네놈을 찾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 고생도 모르고 죽는다는 소 리를 씨부렁거려? 오냐, 이놈! 내 손에 죽어볼 테냐? 다리 몽뎅이를 댕강댕강 분질러 줄까?”

시끈덕거리는 혁중노인을 나백천이 뜯어말렸다.

“대형, 예전 성질 나옵니다. 좀 진정하시죠.”

“죄송합니다, 사부님.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않겠습니다.”

“알면 됐다. 노부가 널 찾은 이유는 알고 있겠지?”

.예.”

힘없는 목소리로 칠상흔이 대답했다. 그가 도망친 과거 때문에 그의 사부가 그를 찾아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럼 묻겠다. 그날, ‘피의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냐?”

칠상흔은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저, 그 ‘피의 밤’이란 게 뭐죠?”

연비가 옆에 있던 나백천에게 소곤소곤 귓속말로 물었다.

“자넨 그런 것도 모르나? 바로 구 년 전, 혁 대형의 장손인 갈효봉이 미쳐서 날뛴 날이라네. 수많은 이가 갈효봉의 칼부림에 죽었지. 그리고 그를 생포하기 위해 또 다시 많은 피를 흘렸다. 그 뒤의 이야기는 알겠지?”

연비는 물론 잘 알고 있었다. 그 후 갈효봉은 어떤 지하 감옥에 유폐되었고, 모종의 사건 때문에 그곳을 탈옥한 갈효봉은 무당산에서 천무학관 합숙생들을 습격했 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결말도 잘 알고 있었다.

“잠깐, 거기 두 사람 좀 떨어져서 말하시죠.”

그때 예청이 끼어들어 지적했다. 다른 여자라 가까이 붙어 있는 게 별로 좋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직도 말할 수 없느냐?”

“……”

“그럼 또다시 도망칠 테냐? 지금부터 다시?”

칠상흔의 몸이 흠칫 굳었다. 그리고는 떠올렸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한 것을. 칠상흔은 힘겹게 지난 구 년 동안 봉인되어 기억을 떠올리며 있던 입을 열었다. “제, 제자는…… 그, 그자와 만나고 말았습니다.”

입을 떠듬떠듬 여는 칠상흔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공포가 드러나 있었다. 그는 정말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지난 구 년이란 시간도 그 공포를 희석시켜 주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그자란 게 대체 누구냐?”

누가 있어 무신마 갈중혁의 제일제자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는 공포를 선사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천재라 불리던 그의 손자를 미치게 만들 수 있었는가?

“그자는…… 그자는 괴물입니다. 아니, 그 말만으로는 그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시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형체가 없는, 얼굴이 없는,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사람의 심장을 움켜쥐고 찢어버릴 수 있는 그런 괴물이었습니다.”

“그자가 누구냐?”

혁중노인이 다시 한 번 추궁했다.

“그자는…….”

칠상흔은 어떻게든 입을 열려고 하는데 입이 잘 열리지 않는 듯했다. 그 모습 보고 있던 혁중노인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동안 찾아 헤매던 단서가 바로 앞에 있었다. 그 일에 숨겨진 내막을 알고 싶어 그는 지난 구 년 동안 끈질기게 제자의 행방을 탐문했던 것이다.

“컥!”

칠상흔이 이야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목을 움켜쥐며 괴성을 터뜨렸다. 깜짝 놀라 살펴보니 어느새 안색이 푸르스름해져 있었다.

“설마 독(毒)?!”

칠상흔의 급격한 상태 악화로 볼 때 십중팔구 틀림없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원체 내공이 높고 독에 대한 저항력이 강해 별 반응이 없었지만, 현재 부상을 당해 저항력이 전무하다시피 한 칠상흔에게는 치명적이었다. 그의 체내를 돌며 그를 지켜주던 내공은 지금 연못에 고인 채 꼼짝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던 것이다. 흐르 지 않는 물은 자신을 침범하는 독에 무력할 뿐이었다.

“이럴 수가! 인기척은 없었는데!”

그래도 가장 먼저 움직인 사람은 산전수전독전을 다 겪은 노련한 노강호인 혁중노인이었다.

서둘러 칠상흔의 혈도를 짚어 독이 사지백해로 뻗어나기는 것을 막은 다음, 가부좌를 틀고 앉아 칠상흔의 등에 양손 대고 진기를 불어넣어 독을 강제로 한데 모았 다.

“우웩!”

칠상흔이 검은 피를 토해냈다. 그러자 푸르스름하던 그의 얼굴이 조금씩 혈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연비와 나백천과 예청은 수상한 자가 염탐할까 봐 최대한 감각을 넓혀놓았다. 십 장 안의 소리라면 머리카락 한 올 떨어지는 것까지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누가 무신마와 무림맹주 나백천의 이목을 속이고 독을 살포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이기도 하죠. 이건 이미 현실이라고요. 인정하고 싶든 그렇지 않든.”

연비는 숨을 멈추고는 날아올랐다. 그가 달려간 쪽은 문이 아니었다. 천장과 벽에 나 있는, 겨우 주먹 하나 들어갈까 말까 한 자그마한 통풍구였다. 연비는 재빨리 손발을 휘둘러 통풍구 주위의 벽돌을 부수어 그 조각들로 구멍들을 막았다. 일곱 개나 되는 구멍이 한순간에 틀어 막혔다. 그리고는 착지하며 말했다. “당했군요. 방심했어요.”

적은 상당히 고단수였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실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적은 가장 유효한 방법을 택했다. 애초에 접근하지 않고 기척을 느낄 수도 없는 먼 거리에서 장거리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다행히 알아차리는 게 늦지 않고 대처 가 빨라서 주요 증인인 칠상흔이 죽지는 않았지만, 이미 혼수상태에 빠져 뭔가를 말할 수 있을 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혁중노인의 재빠른 응급처치로 목숨을 구했지 만, 정신이 들려면 한참 있어야 할 듯했다.

“어떻게 된 거지? 나랑 대형의 이목을 속이고 접근한다는 건 불가능할 텐데?”

그러나 그들이 한 방 먹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했다. 그들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지금의 칠상흔은 더 이상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요, 그래서 그들은 접근하지 않았어요. 다만 먼 곳에서 한꺼번에 ‘독무(毒霧)’를 흘려 넣은 거예요, 통풍구를 통해서. 그것도 무색무취한 독약으로 일반 고수

들에겐 큰 영향이 없지만, 현재 부상 중인 사람한테는 딱 치명적일 정도의 양으로 말이죠.”

그것은 자신들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수법이었다.

‘적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곳 원통투기장에 대해 자세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인 게 분명해.’

이곳이 생소한 자가 이런 은밀한 수법을 쓰는 건 불가능하다는 게 연비의 판단이었다. 좀 더 조사해 볼 필요가 있었다.

‘설마 이 투기장 전체가 적의 앞마당이라면…….’

순간 연비의 몸이 질풍처럼 움직였다.

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대기실의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엄청난 속도로 대기실을 빠져나간 연비는 자신의 몸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력으로 건물 반대편에 위치한 자 신의 대기실을 향해 달려갔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고, 진기가 미친 말처럼 날뛰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만일 손을 쓴 곳이 칠상흔의 대기실만이 아니라면!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한기가 등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예린!’

연비는 자신의 몸이 망가지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달리고 또 달렸다. 그 빠르기가 얼마나 쾌속한지 연비가 스쳐 지나가는데도 사람들은 사나운 바람이 한차례 몰 아쳤다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우지끈!

가장 빠른 속도로 최단시간에 자신의 대기실에 도착한 연비는 문짝을 잡아 뽑았다. 그리고는 지체없이 안으로 달려들어 갔다.

텅! 쾅!

등 뒤의 벽에 날아가 부딪친 문짝이 천둥같이 요란 소리를 내더니 돌벽에 박힌 채 그대로 고정됐다.

“윽!”

연비는 급히 소매로 코와 입을 가렸다. 대기실 안에는 짙은 연기가 안개처럼 깔려 있어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연비는 가리고 있던 소매를 살짝 뗀다 음 코와 입으로 안개를 반 모금 들이마셨다. 위험천만한 감별법이었다. 그러나 마음이 급한 연비한테는 이런저런 수단을 느긋하게 궁리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다행히 독무(毒霧)는 아니로군.’

칠상흔에게 사용한 것이랑은 다르게 이 안개의 정체는 수면향이었다. 그러나 안심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아직 연비는 두 사람의 안위를 확인하지 못했다. 감각을 날카롭게 전개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나 숨어 있을지 모를 암습자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철퍽!

그때 연비의 발에 무언가 끈적끈적한 것이 밟혔다. 연비의 눈이 크게 커졌다. 방금 밟은 것은 피였다. 코를 막고 있던 탓에 발견이 늦은 것이다. 그 피는 한 발짝 반 정도 떨어진 벽 쪽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군가 벽 아래 쓰러져 있었다. 붉은 피는 그 사람의 복부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매화꽃을 닮은 분홍빛 비단옷이 지 금은 석류처럼 새빨간 붉은 빛깔로 물들어 있었다.

“준호!”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연비는 당장 달려가 쓰러진 윤준호를 일으켜 세웠다. 윤준호는 여전히 윤미의 모습 그대로였다.

입가에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출혈 탓인지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다량의 출혈은 옆구리 쪽이었다. 서둘러 혈도를 짚어 출혈을 막았다. 아 직 숨은 붙어 있었다. 적의 칼이 스쳐 지나가서 출혈은 심하지만 내장이 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연비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방 안 어디를 둘러봐도 윤미 이외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준호! 준호! 정신 차려, 준호!”

얼마나 다급했는지 지금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고 평소의 목소리로 윤준호를 불렀다. 응답이 없었다. 그러나 연비는 조금 전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 아야 했다.

“준호!”

짝!

“정신 차려, 준호!”

짝!

연비는 윤준호의 뺨을 세차게 때리며 그의 이름을 연신 불렀다. 연비의 손바닥이 십여 차례 지나가고 윤준호의 볼에 시뻘겋건 자국이 찍혔을 쯤에 반응이 있었다

 “류연…..?”

ܕ܂

감았던 눈을 반쯤 뜨며 윤미가 물었다. 그러나 눈을 뜨자 그곳에 있는 것은 비류연이 아니라 연비였다. 윤미는 어리둥절했다.

“분명 류연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

그제야 연비는 자신이 평소처럼 행동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 차려요, 윤미! 나예요, 연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어서 대답해요. 린은 어디 있죠?”

다시 연비로 돌아온 그는 윤미의 어깨를 붙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나, 나 소저는 어디 있죠?”

윤미가 인상을 찡그린 채 당황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묻고 싶은 건 내 쪽이라고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죠?”

아직도 수면향의 기운이 남아 있는 탓인지 윤미는 기억이 뒤죽박죽인 모양이었다.

“가, 갑자기 사방에서 이상한 안개가 뿜어져 나오더니…… 저도 모르게 정신이 혼미해지더라고요. 서둘러 귀식호흡을 펼쳤지만, 조금 때가 늦었죠. 그때 괴한들 이 나타났어요. 전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죄송해요. 죄송해요. 나 소저를 지키지 못했어요. 죄송해요. 그, 그들이 나 소저를 납치해 갔어요!”

“뭐라고!”

연비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순간 연비의 몸이 튕겨 나가듯 문밖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는 복도의 양쪽을 빠르게 살펴보았다. 그러나 어떤 기 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쾅!

연비의 주먹이 돌벽을 파고들어 갔다.

“…….”

쾅쾅쾅쾅쾅!

주먹이 내질러지면 내질러질수록 벽의 금은 더욱 가늘고 촘촘해졌다.

믿고 싶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연비는 망연자실했다. 정말로 나예린이 납치된 것이다. 연비는 미칠 것만 같았다. 아무리 진정해 보려 해도 전혀 진정되지 않 았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 혁중노인과 나백천이 칠상흔을 들쳐 엎고 달려오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인가?”

나백천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

연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표정에서 나백천도 불길함을 느꼈는지 안색이 대변했다.

“무슨 일인가? 우리 예린이는 어찌 되었나?”

나백천이 다급한 목소리로 윽박지르며 대기실 안으로 달려들어 갔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무림맹주라 해도 없는 나예린을 찾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뒤돌아서 연 비를 바라보는 나백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리 연비라 해도 그 눈을 마주 보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린은…… 납치당했습니다.”

나백천의 몸이 휘청였다.

“이놈!”

나백천은 손을 들어 연비의 뺨을 때리려 했다. 연비는 가만히 있었다.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나백천은 내려치던 손을 멈추었다. 뺨을 시원스럽게 때린 다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두 사람을 진정시킨 것은 혁중노인이었다.

“둘 다 진정하게.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나예린, 그 아이가 어디에 있고, 누가 데려갔는지 알아내야 하지 않겠나. 아직 시간을 얼마 되지 않았어. 반드시 쫓아갈 수 있을 걸세.”

그 말이 맞았다.

멍하니 있던 연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순간적인 감정의 폭발로 이성을 상실하다니, 정말 자기답지 못한 행동이었다. 발작적인 흥분과 감정의 휩쓸림은 냉철한 정신 상태에서 볼 수 있는 것을 볼 수 없게 한다. 그렇게 되면 즉각적인 대응이 오히려 늦어지는 것이다. 벽을 걸레로 만드는 것은 분풀이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사 태 해결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나예린을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 귀신이라는 소리를 듣든,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라고 듣든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자들은 어느 쪽으로 갔죠?”

다시 윤미에게 다가간 연비가 윽박지르듯 소리쳤다. 당장이라도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용암을 삼키기라도 한 듯 타는 듯한 갈증이 밀려왔다. 어금니가 맞물리게 으드득 소리가 났다. 지금 연비의 형색은 마치 귀신 같았다.

“저… 전 그때 정신이 혼미했어요. 어지러웠죠. 나 소저도 조금 괴로운 듯했어요. 뭔가가 이상했죠. 그때 나 소저가 위험하다고 저한테 소리쳤어요. 피하라고. 그 때, 문이 열렸어요. 그자가 들어왔죠. 붉은 옷을 입은 괴한이었어요. 얼굴에는 무슨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았아요. 그자는 엄청난 고수였어요. 한 번 보는 것만으로 도 심장이 오그라들 것 같은 무시무시한 존재였어요. 그 붉은 옷의 괴한은 흑의복면인 하나를 대동하고 왔는데 그가 절 막았어요. 전 싸웠지만 정신이 혼미했기 때 문에 제대로 검을 휘두를 수 없었어요. 전… 막으려 했지만… 막으려 했지만……. 죄송해요. 죄송해요.”

윤미는 눈물을 흘리며 연신 죄송하다고 외쳤다.

그러자 연비가 강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금 울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해요. 뭔가를 떠올려 봐요. 그자의 정체를 짐작할 만한 걸 떠올려 봐요!”

그 말은 윤미에게만이 아니라 연비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우선 거친 풍랑에 휩싸여 있던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분노에 휩싸인 마음이 아니라 거울처럼 맑은 명경지수의 마음이었다. 이대로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한 채 무작정 뒤지고 다닐 수는 없었다.

“자, 기억해 내봐요. 당신은 할 수 있어요!”

윤미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외쳤다.

“맞아요! 그자 중 하나는 붉은 옷을 입고 있었어요! 피처럼 빨간. 그리고… 그리고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었어요.”

“가면? 무슨 가면이었죠? 어떻게 생겼나요?”

“음.. 잘 기억이 안 나요.”

“또 다른 건요?”

윤미는 인상을 찡그리며 자신이 보았던 것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기 않고 필사적으로 혼란한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자 번뜩 뇌리 속에 떠오르는 광경이 있었다.

“마, 맞아요. 하나 기억났어요.”

“뭐죠?”

다급한 목소리로 연비가 물었다.

“붉은 옷을 입은 그자는…… 그자는…… 한 팔이 없는 외팔이었어요!”

윤미의 말에 혁중노인과 나백천과 예청이 동시에 흠칫하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지금 두 사람은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외, 외팔이라니…… 서, 설마…….”

나백천과 예청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빠져나갔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게 현실이 된다면 그건 정말 너무나 끔찍한 악몽이 될 것이다. 그런 일은 이 하늘 아 래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건 연비도 마찬가지였다.

“그자의 팔은 어느 쪽이 비어 있었나?”

나백천이 윤미의 양쪽 어깨를 세차게 움켜쥐며 물었다. 이성이 거의 마비된 것이다. 그자가 만약 외팔이라면 어느 쪽이냐가 지금은 무척 중요했다. 만일 왼쪽 팔이 없다면 그나마 최악 중의 최악은 면할 수 있을 터였다.

“오, 오른쪽이요. 틀림없이 오른쪽이었어요!”

털썩!

그 말을 들은 예청은 그만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두 부부 모두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연비는 애타는 목소리로 사라진 나예린의 이름을 불렀다.

“예리이이이이인!”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사라졌다고 믿었던 사악한 악몽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비뢰도』 제25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