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5권 16화 – 긴급 대장회의

비뢰도 25권 16화 – 긴급 대장회의

긴급 대장회의

-마천십삼대의 대장들

보통 대장회의는 제십이번대 대장 철가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십이번대야말로 첩보와 정보를 담당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의 대장은 대대로 철가면을 써왔는데 그것은 스스로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그 때문에 다들 철가면이라 불렀지만, 정식 명칭은 따로 있었다.

은신비영(隱身秘影) 은존(隱存).

진짜 이름이라기보다 공인된 명칭에 가까웠는데, 부르는 명칭조차 없으면 불편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일 뿐이었다. 십이번대는 첩보와 정보를 담당하는 곳, 이곳에 서 본명을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있을 존(存) 자를 쓰고 있지만, 본인이 진짜 쓰고 싶은 것은 아무래도 存(존)’보다는 높을 ‘尊(존)’ 자였다. 대단한 자신감이 아 닐 수 없다.

과거를 버리고 그림자 속에 숨어든 자들, 그것이 바로 십이번대의 본성이었다.

“침입자의 수는 현재 스무 명이나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중 대부분이 천무학관의 사절단원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각 내에 남아 있던 천무학관의 잔존 세력과 결탁하여 그 수를 더 늘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들이 굳이 강제로 성문을 강행돌파까지 하며 침입할 이유가 있나? 사절단이면 통행증도 있을 텐데?”

사자의 갈기같이 찢어진 승복을 입고 목에 거대한 철염주를 건 거한이 물었다. 그의 가슴에는 ‘삼(三)’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삼번대 대장 ‘현장’으로, 파계 신승이라 불리는 자였다. 키도 크고 강철침 같은 검은 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었지만, 그 머리만은 맨들맨들했다. 과거 소림사의 제자였다가 파문되었다는 소문도 있 었지만, 본인은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그의 목표 중 하나가 백팔나한진의 파훼라는 데 이견을 다는 자는 없었다. 그래서 그 목표가 창랑대의 최강 진법 창조 계획과 충돌돼서 서로 사이가 안 좋았다.

“그것도 모르나? 통행증이 없는 놈이 있었겠지.”

구번대 대장 창랑(蒼狼)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그는 푸른 옷을 입고 있었는데, 가슴에는 ‘구(九)’자와 늑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날카롭게 초승달처럼 휘어 진 칼날이 세 개씩 박힌 철조를 양어깨에 견갑처럼 차고 있었다. 그의 독문병기라 할 수 있는 한 쌍의 ‘창랑월아조였다. 현장은 매우 못마땅한 시선으로 창랑을 바 라보았다. 그는 현장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피 묻은 살코기를 뜯어 먹고 있는 늑대처럼 씨익 웃었다. 시비를 건다면 언제든지 받아줄 수 있다는 태도로 이빨을 숨기지 않았다. 험악해지려는 공기를 은존이 무마시켰다.

“창랑 대장의 말이 맞습니다. 그들 중 두 명은 통행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외부인이었습니다.”

“그들의 신분은 밝혀졌나?”

“그중 한 명이 자신이 지난 화산지회의 우승자인 비류연’이라고 밝혔다고 하오. 나머지 한 명은 아직 어린 소녀인데 아직까지 별다른 정보가 없습니다.”

“호오, 그것참 흥미로운 소식이로군요. 하지만 소문에 의하면 그 비류연이라는 자는 허풍쟁이에 기회주의자라고 하던데? 이번에도 우연히 무주공산된 산의 정상 을 차지했을 뿐이라던가 뭐라던가?”

“과거 별명 중 하나가 운수대통 격타금이었다고 합니다.”

첩보부대의 대장답게 그는 비류연에 대해서는 꽤 많은 정보들을 수집해 둔 모양이었다.

“이야기만 듣기로는 그다지 별 볼일 없는 자 같은데?”

“하지만 화산지회의 화재를 진화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신비의 인물이 바로 그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신비의 고수 ‘신풍협(神風俠)’이 그 녀석이라고?”

신풍협. 그는 지난 화산의 겁화를 진압한 장본인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 신비의 고수였다. 그런 소문이 돌게 된 이유는, 미친 화룡처럼 날뛰던 골짜기의 화염을 제압해 준 것에 대해 사람들로부터 감사를 받은 천무삼성이 남긴 말 때문이었다.

“응? 우리한테 감사할 필요 없다네. 왜냐하면 그거 우리가 안 했거든. 우린 사실 포기하려 그랬지.”

“맞아. 이번에는 진짜 죽는가 보다 했지. 상당히 화끈하던걸.”

“하지만 살아 있잖아요?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죠. 이번에 배운 게 많아요.”

그럼 누가 했습니까, 란 질문에 그들은 이렇게 답했다.

“그건 못 가르쳐 줘. 그 젊은이가 말하지 말랬거든.”

“약속은 약속이지. 한가하면 자네들이 알아들 봐.”

그 이후, 그 신비의 젊은 청년 고수는 ‘신풍협’이라 불리게 되었지만, 그게 단순한 천무삼성의 장난이라는 의견도 심심찮게 있었다. 그런 활약을 한 젊은이가 스스 로를 당당히 밝히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게다가 천무삼성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한 일을 해낼 수 있는 젊은 고수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다는 의견이

상당히 지배적이었다. 대중들은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하고 이해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덕분에 초반에 들끓던 신풍협에 대한 관심도 지금은 타다 남은 잿불처럼 수 그러든 상태였다.

“물론 믿을 만한 소식통들은 다들 이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말입니다. 지나온 그의 행적으로 볼 때 그런 이적에 가까운 업적이 가능할 리 없다는 것 이지요.”

“그럼 텅 빈 수레 아닌가?”

“다만 천무삼성들이 그자를 꽤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유가 뭐지?”

“재미있기 때문이라더군요.”

“강한 것하고는 상관없잖아?”

“천무삼성의 호감을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놈이 어떤 놈이든 상관없지 않나? 오랜만의 사냥감이잖아?”

“구번대 창랑 대장님께선 왠지 즐거우신 듯하군요.”

은존이 물었다.

“침입자잖아. 싸울 기회가 생겼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 그동안 실전이 너무 부족해서 불만이었거든. 우리 창랑대는 좀 더 실전적인 훈련을 하고 싶었는데, 좀처럼 기회가 안 생겨서 고생 좀 했지. 애들이 따분해도 하고. 이번 침입자는 좀 쫓을 맛이 있었으면 좋겠군. 피가 끓지 않나?”

사실 돌연한 침입자에 대해 흥분하고 있는 것은 비단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다른 부대의 대장들도 반응은 대체로 무척 긍정적이었다. 침입자에 대해 긍정적이라 는 것이 이상했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약간의 가벼우면서도 들뜬 흥분이 총대장실 안에 감돌았다.

“제사번대 생사무허가 불락구척 대장님께서는 하실 말씀 없으신지요?”

다른 대장들의 의견들도 들어볼 필요가 있기에 은존이 물었다. 좌석에 앉은 채 가만히 앉아 있던 구 척 장신에 얼굴에 사선으로 상처의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 다.

“싸움이 시작되면 환자들이 늘겠군.”

참으로 무심한 어조였다.

“그래서 걱정이라도 되나?”

“아니,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네. 환자가 늘면 부하들에게 좋은 연습거리가 될 테니까. 다양한 부상을 당해주면 좋겠군. 다양한 연습이 되게 말이야.”

간단하게 말해 환자가 많아지는 편이 그들로서는 연습도 되어 오히려 좋다는 뜻이었다.

“제이번대 천변만화장 철혼 대장님께서는 어떠십니까?”

“응? 나? 나 같은 늙은이야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 애들 무기야 뭐 좀 상하겠지만, 가끔 피도 먹여주고 그래야 하지 않겠어? 좋은 검이라도 손에 넣으면 좀 가져와 보고. 특이한 기문병기 같은 걸 쓰는 사람이 끼어 있었으면 좋겠군. 수집물에 넣게 말이야.”

특이한 기문병기나 명검명도만 손에 넣으면 어찌 돼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제삼번대 현장 대장님은 어떠십니까?”

“거기 소림사 애들이 끼어 있나?”

그의 관심은 오로지 소림사뿐인 듯했다.

“소림사 출신으로 보이는 무승이 한 명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러자 현장의 눈이 반짝 빛났다.

“호오, 그래? 그럼 선배로서 교육을 좀 시켜줘 봐야겠군. 요즘 애들 물이 어떤지도 궁금하고 말야.”

침입자가 침입했다는 사실에는 별 불만이 없는 모양이었다.

“육번대 무명 대장님, 대장님께선 하실 말씀 없습니까?”

반쯤 졸고 있는데 자신이 호명되자 무명은 깜짝 놀랐다.

“아, 나? 아니, 난 그냥 가서 자면 안 될까? 요즘 잠이 자꾸만 많아져서……..

“기각합니다.”

“적들이 우선 사해도를 향했다면 잘된 일 아닐까? 자잘한 일은 애들한테 맡겨놓으면 그만이고…….”

“만일 실패하면요?”

“설마 그런 무능한 짓을 저지르진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때 가서 막아도 늦지 않다고 보는데? 어차피 대인원도 아니잖아?” “아무리 커다란 둑도 작은 구멍 하나로 무너질 수 있는 법이지요.”

“호오, 과연 그들이 이 두터운 제방에 작은 구멍을 뚫을 정도의 실력이 될까?”

두 사람의 대화에 창랑이 끼어들었다.

“그건 두고 볼 일이지. 하지만 방심은 좋지 않아. 일단 천무학관에서 가려서 뽑은 자들이니까 말이야.”

현랑이 나직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가려서 뽑았다는 그것 잘됐군요. 흥미로운 사냥감이 될 것 같거든요.”

창랑이 혀로 입가를 핥으며 웃었다.

“그 안에는 팔대세가의 후계자들과 구대문파의 기명제자도 끼어 있습니다.”

“호오, 그 자기 땅에만 안주하는 밥버러지들의 후예 말인가? 그거 정말 전도유망한 침입자들이군. 사냥할 맛이 나겠어. 세상이 넓다는 것을 가끔 맛보여 줘야 항상 고기가 썩지 않고 싱싱한 법이지.”

“일단 지켜보도록 할까? 과연 그들이 네 개의 섬을 모두 통과할 수 있을지.”

“몇 개나 통과할 수 있을지 내기할까, 우리?”

“다들 태평하군.”

그때 회의가 시작되고 지금까지 꾹 다물려 있던 총대장의 입이 열렸다. 나직하지만 힘이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도열해 있던 대장들의 시선이 일제히 상좌에 앉은 총대장에게로 향했다. 그는 피처럼 붉은 적포를 두른 채 오만하게 앉아 대장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동안 너무 평화라는 독에 찌들렸나? 긴장들이 많이 느슨해져 있군. 그건 좋지 않아.”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그 안에는 서서히 증식하는 괴물 같은 힘이 서려 있었다.

마천십삼대 총대장 천패마풍 백천절.

겉보기에는 나이를 쉽게 짐작할 수 얼굴에 검은 수염이 가슴까지 드리워져 있고, 두 눈이 칼날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 적포인이야말로 길들여지지 않은 열두 마리 야수의 우두머리로, 격이 다른 압도적인 존재감을 가지고 이 야수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본인은 체면을 중시하는 편이야. 마천각이 아무나 드나들어도 되는 곳이라고 무시당할 수는 없어. 왜냐하면 체면이 깎이니까. 체면이 깎이면 여기저기서 얕보게 돼. 그리고 난 얕보이는 게 싫어. 알겠나?”

순간 그의 온몸에서 엄청난 기파가 뿜어져 나왔다. 순간 총대장실 전체에 사나운 바람이 몰아친 듯했다. 나름 강자라고 자부하는 이들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만 큼 강력한 존재감이었다.

“단 한 명도 남김없이 처리하도록. 알겠나?”

거부를 용납하지 않는 목소리였다.

“천무학관과 외교 문제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십이번대 대장 은존이 확인차 물었다.

“상관없어. 각주한텐 내가 말해놓지. 자네들은 자네들 할 일만 하면 돼. 마천십삼대가 무엇 때문에 만들어졌다 생각하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 열로 도열한 대장들의 얼굴을 한 번씩 훑어본 후 백천절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바로 ‘적’을 무찌르기 위해서야.”

그리고 잠시 간격을 둔 후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바로 ‘적’이지. 적의 섬멸, 자네들은 그것만 생각하면 돼. 나머지에 대해선 생각할 필요가 없어. 그건 나나 각주가 알아서 할 문제니까. 생각할 필요도 없고, 때문에 책임질 필요도 없지.”

조용한 눈빛으로 좌중을 한번 훑어보았다.

“척살령을 발령하겠다.”

설마 그런 최고 수준의 강경책이 나올 줄 예상치 못했던 대장들은 깜짝 놀랐다.

“척살령을 말씀이십니까?”

“문제가 엄청 커지겠는뎁쇼? 물론 나야 싸움이 커지면 좋긴 하지만.”

창랑이 큭큭 웃으며 말했다.

“각주님의 재가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척살령을 내리기 위해서는 각주의 허가가 필요했다. 이렇게까지 문제가 커질 여지가 다분한 문제를 과연 결제를 해줄 것이냐가 문제였다.

“나머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했을 텐데? 대장 직을 반납하고 싶나?”

“……”

반론이 곧 잠잠해졌다. 더 이상 입을 여는 이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그는 만족했다.

“이상으로 회의를 마치겠다. 해산.”

폐회를 선언하자 각 부대의 대장들은 부대장을 대동하고 총대장실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게 된 마천십삼대 총대장 백천절은 그대로 좌석에 앉은 채, 칠(七)이라 쓰여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텅 비어 있는 자리.

대장회의가 모두 끝날 때까지, 제칠번대 대장 혈나찰 옥유경은 나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