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벌 떠는 장홍
-물밀듯 밀려오는 후회라는 이름의 파도
“아아, 받아들이지 말걸…….”
장홍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이게 아닌데…….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크아아아악!”
장홍은 비류연의 말을 냅다 받아들인 자신의 결정에 대해 후회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잠시 미쳤었나? 그래, 분명 미쳤던 거야. 그러지 않고서는 이런 일을 냅다 맡았을 리 없잖아.
“지금이라도 그냥 돌아갈까? 못한다고 할까?”
애초에 비류연 그놈이 나빴다. 왜 그런 경우가 있잖은가, 선인이 착한 일을 하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데 악인이 선한 일을 하면 눈에 확 띄는 그런 경우 말이다. 이번 일도 그런 경우였다. 평소에 뻣뻣하고 지 잘난 맛에 사는 녀석이 고개 숙여 부탁하니 너무 기특해 보이는 게 아닌가.
원래 부탁할 때는 고개 숙이는 게 정상 아닌가. 그런데 정상을 정상적으로 했다고 흐뭇해하다니,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그래서 그 내용이 뭔지 깊게 곱씹 지도 않고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장홍은 죽고 싶을 정도로 두려웠다. 당장 꼬리를 말고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사나이의 자존심이란 게 대체 뭔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자신이 있었다. 후회막급이지만 이미 때는 늦었겠지.
비류연의 부탁은 간단했다.
“마천각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 필요해. 특히 지위가 높으면 좋겠어. 보니까 장 아저씨는 그 칠번대 대장 아줌마를 잘 알고 있는 것 같던데? 그 사람에게 도움을 좀 받았으면 좋겠어. 부탁해.” “어, 어, 어!”
그런 터무니없는 요구를 어찌 받아들였단 말인가. 스스로 무덤을 판 꼴이 아닌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고개를 끄덕인 후였다.
“자, 잠깐! 다시 물리면 안 될까? 방금 건 실수였어. 그런 짓을 했다가는, 나 죽는다고!”
그에 대한 비류연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괜찮아,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으니까.”
“이봐! 오늘이 내 제삿날이 되는 거라고. 남 얘기처럼 하지 마. 당사자가 앞에 있다고!”
“내년에 제사상 차려지면 음식은 먹어줄게.”
“뭐야, 먹기만 하고 땡이냐!”
“먹어주는 게 어디야. 그래야 명부(冥府)에서 덕을 쌓을 수 있는 거라고.”
이미 그의 이야기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그대로 계속 거부하면 칭칭 손발을 묶은 다음 제칠번대로 넘기겠다는 협박에 장홍은 어쩔 수 없이 순응하고 말았다. 현실 은 어디까지 잔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일까. 잔혹한 현실을 한탄해 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음에는 속나 봐라, 다음에는!
그래, ‘만약’ 다음이란 게 있긴 있다면 그때는 절대 속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그러나 그녀를 만난 후에 과연 자신에게 다음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
그는 장담할 수 없었다.
***
마천십삼대 제칠번대 소속 부대장, 진홍의 검희 석류하는 대(隊)로 접근하는 수상한 자를 발견하고는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누구지?”
상당히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부대 소속이 표시되어 있지 않은 복식으로 봐서 외부인이 분명했다. 저렇게 나이 든 얼굴이라면 천무학관 사절단 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무슨 중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안색이 무척 파리하고 아편 중독자처럼 손발을 부들부들 떨며 불안해하는 모습이 충분히 수상쩍었다.
“게다가 어디서 분명히 본 듯한 얼굴인데…….’
검병에 손을 올려놓으며 석류하가 외쳤다.
“잠깐, 거기 아저씨! 멈추세요!”
화들짝 놀란 그가 몸을 굳히며 석류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신이라도 본 듯 무척 놀란 얼굴이었는데,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안심한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 었다. 점점 더 수상했다.
“저희 혈봉대에는 무슨 일이시죠, 아저씨?”
약간 경계하며 석류하가 물었다. 가까이서 보니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것도 굉장히 안 좋은 일로 본 듯한 느낌이 드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엄청 굉장히 불쾌한 일이라 잊어버리려고 애쓴 탓에 그 당사자까지 함께 잊어버린 듯한 그런 미묘한 기분이었다.
“난 수상한 사람이 아니오, 아저씨는 더더욱 아니고. 난 이번에 천무학관에서 온 사절단 중 한 명인 장홍이라고 하오.”
“천무학관 사절단이라고요? 나이가 많아 보이시는데, 혹시 인솔자인 무사부님이신가요?”
“아, 아니오. 무 사부라니, 당치도 않소. 난 그저 일개 관도에 불과하오.”
“하지만 얼굴 나이가…….”
“얼굴이랑 나이 이야기는 그만 하면 안 되겠소, 아가씨?”
마음 아픈 곳이 후빔당한 장홍이 목소리를 높이자 그제야 석류하는 물고 늘어지는 것을 그만두었다.
“염도 노사님은 잘 지내고 계신가요?”
상당히 뜬금없는 질문인지라 장홍은 이 아가씨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하지만 남의 사생활이다 보니 대놓고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 물론 그분이야 한창 활동 중인 화산처럼 팔팔하시오. 그런데 그건 왜..
“아, 아니에요. 단지 궁금했을 뿐이에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석류하가 대답했다.
‘왜, 왜, 왜 얼굴을 붉히지? 부, 불안하게시리 왜 붉히는 거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설마……말도 안 돼! 그쪽이야말로 진짜 새빨간 아저씨잖아!! 아저씨 사 이에도 등급이 있다는 건가? 그런 건 인정 못해!’
아저씨는 다 아저씨 아줌마든 아저씨든 그건 이미 남성과 여성을 떠난 제삼과 제사의 성(性)이었다. 그건 일개의 생물이 아닌 거대한 집단 의식과도 같은 정신 생 물체인 것이다. 그러니 아저씨라는 것을 개별적인 생물로 판단하거나 개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시답지 않은 짓이었다. 아저씨 세계에 차별은 인정할 수 없었다. 그 래서 왠지 차별당하는 것 같자 기분이 몹시 나빴다.
“아저씨가 절대 아닌 ‘나[我]!’는, 단지 사람을 만나러 왔소이다, 아가씨!”
장홍은 이상하게 배알이 꼴리는 것을 꾹꾹 참으며 하하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어딘지 억지가 끼어 있는 웃음이었다. 상당히 초조하고 불안해하는 속내는 거짓웃 음으로도 쉽게 감추어지지 않았다.
“누구를 만나러 오셨죠, 아저씨?”
아저씨가 아니라니까, 이 아가씨가! 하지만 장홍의 의견은 간단히 묵살되었다.
“이, 이곳에 혈옥선자 옥유경이라는 분이 있는 걸로 알고 있소만.”
행여라도 혈나찰이라 불렀다가는 경을 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서 혈옥선자라고 칭했다.
“네, 저희 대장님이세요.”
대답하는 석류하의 목소리에는 존경의 염이 담겨져 있었다.
“아가씨, 기별을 넣어주겠소? 아저씨가 아니라 젊은 오빠인 난 여기서 기다리겠소.”
석류하는 잠시 망설였다. 정말 이 아저씨를 믿어도 되는 걸까? 자신이 아저씨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그 말부터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이 아저씨를? 그러나 그 망설 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단 대장님에게 온 손님이었다. 그녀의 선에서 거절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석류하는 마침내 웃으며 대답했다.
“잠깐 기다려 주세요, 아.저.씨!”
만일 장홍이 얼마 전 복도에서 옥유경의 깊고 풍만한 가슴 골짜기에 얼굴을 묻었던 그 장본인이라는 걸 깨달았다면 그녀는 장홍을 아마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당시 장홍은 옥유경의 시선을 피해 얼굴 가리기에 급급해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약간 떨어져서 따라가고 있던 석류하는 그의 인상착 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것이 말썽을 피하게 해주었다.
기별을 하고 대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붉은색 ‘혈린갑(血鱗鉀)’을 상체에 두르는 옥유경이 보였다. 혈린갑은 옥유경이 지닌 기보로, 특수한 기능을 가진 갑옷 인데, 이것을 두른다는 것은 완전무장을 하고 전투 태세에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류하냐? 지금은 바쁘구나.”
옥유경에게서는 날카로운 긴장이 느껴지고 있었다. 좀 전에 십이번대 대원으로부터 긴급 서신을 받은 탓인 모양이었다. 분명 수년 만에 울린 긴급 비상종과 관련 있는 게 틀림없었다.
‘정복을 입으시는 것으로 보아 대장회의에 가시는 건가?”
그래서 물었다.
“혹시 대장회의에 참석하시나요?”
“그래, 그것도 대지급이라는구나.”
좀 전에 옥유경이 받았던 서찰은 오른쪽 탁자 위에 보란 듯이 펼쳐진 채 놓여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제가 시중을 들었어야 하는데… 죄송해요, 대장님.”
“괜찮다. 나도 손이 있는데 이 정도는 혼자 할 수 있다. 신경 쓰지 말거라. 부대장의 일이란 게 대장을 보좌하는 거지 대장 뒤치다꺼리해 주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우린 육번대가 아니다. 나 역시 육번대가 아닌 칠번대 대장이고.”
석류하의 머릿속에서 마천십삼대 중 가장 불쌍한 부대장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육번대 부대장 장소옥이 잠시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상당히 축복 받은 부대장이었다.
“어쨌든 다른 손님을 받을 때는 아닌 모양이네요. 돌아가시라 전하겠습니다.”
“응, 손님이 왔다고?”
“네, 별일 아니에요. 장홍이라는, 아저씨처럼 생긴 분이 오셔서 면담을 요청했지만, 그런 아저씨, 지금은 바쁘니 돌아가시라고…….”
그 순간 가죽 토시를 팔뚝에 차던 옥유경의 동작이 우뚝 멎었다.
“바, 방금 누구라 했느냐?”
석류하는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당장 돌아가라고 하겠습니다.”
“아니, 이름 말이다. 그자의 이름.”
다그치듯 묻는다.
“장홍이라고…….?
그녀의 상관이 귀신처럼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자 석류하는 자신이 무엇가 큰 실수라도 한 것 같아 목소리가 저절로 작아졌다.
“만나겠다. 안내하거라!”
서릿발 같은 냉기가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대지급 서신이…….”
대지급이라는 것은 이각(30분) 안에 총대장실로 집합하는 뜻이었다. 다른 업무를 볼 여가는 없었다. 그러나 옥유경의 의지는 바위처럼 단단했다. “만나겠다고 했다!”
“어떻게 되었소, 소저? 만나준다고 하오?”
기별을 전하러 갔던 석류하가 돌아오자 장홍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따라오시지요.”
석류하의 그 말에 장홍이 눈을 크게 떴다.
“저, 정말 만나준다고 했단 말이오?”
“대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시다.”
그리고는 몸을 홱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따라올 테면 따라오라는 태도였다.
“자, 잠깐 기다리시오.”
그녀를 놓칠세라 장홍이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녀는 칠번대의 본관을 지나 오른쪽으로 이어진 회랑을 지나갔다.
“아, 안에서 만나는 것 아니었소?”
“……”
석류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후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었다가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그곳에 작은 월동문 하나가 나타났다. 그 문 위에는 ‘연무 (鍊武)’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고, 오른편에는 ‘대장전용’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아무래도 대장 전용의 개인 연무장인 모양이었다.
“여깁니다.”
석류하가 먼저 문 안으로 사라졌다. 남겨진 장홍은 망설임 때문에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눈을 질끈 감고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차마 눈을 뜰 용기가
없어 한참을 감고 있었다. 순간순간이 마치 영겁의 시간 같았다. 말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너는 여기서 다른 대원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거라!”
그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장홍은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연무장의 한가운데에 붉은 무복을 걸치고 왼쪽 허리에 검을 찬 채 당당한 자세로 옥유경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장내에 내려앉은 무거운 침묵에 석류하는 가슴이 답답해 숨도 쉬기 힘들 지경이었다. 옥유경과 장홍은 서로 마주 본 이후 단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대장이 입을 열지 않는데 주제넘게 자신이 나설 수도 없었다. 하지만 왠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다 함께 불편해지는 느낌이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석류하는 옥유경의 옆얼굴을 살짝 훔쳐보았다. 옥유경은 그녀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마치 마천십삼대의 열두 대장 중 한 명이 아니라, 보통의 평범한 여인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명약관화한 동요가 분노와 함께 그 속에 깃들어 있었다. 이 복잡무쌍한 감정을 단 한마디로 축약한다면 ‘한(恨)’이라 칭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 오다니, 배짱 한번 좋군요! 죽고 싶어 찾아왔나요?”
첫마디부터 옥유경의 말은 살벌했다.
듣고 있던 석류하는 깜짝 놀랐다. 옥유경이 장홍이라는 아저씨에게 마치 오래전부터 아는 사람인 것처럼 말을 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걸까? 자신이 여기에 있어도 되는 걸까? 석류하는 갑자기 이 자리가 한없이 불편해졌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평소에 느물느물하던 장홍도 쉽게 입이 떼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는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끙끙거리며 여기까지 왔는데 용건 정도는 밝 혀야 했다. 하지만 막상 마주 대하고 보니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겨우겨우 용기를 짜내 입을 연다.
“도움이 필요하오.”
장홍의 목소리는 기어들어 가는 듯했다.
“도움? 지금 도움이라 했나요?”
옥유경은 기가 막혀서 말도 잘 안 나오는 듯했다. 장홍은 그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미친 짓인데, 그녀가 보기에는 어떻겠는가. 그를 참으 로 뻔뻔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만둘 수도 없었다.
“그, 그렇소. 마천각 내를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오.”
“설마 좀 전에 비상종에 울린 것, 당신들 탓은 아니겠죠?”
날카로운 어조로 힐문한다. 어림짐작일지는 몰라도 예리한 감이었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맞아요, 틀려요? 그것만 말해요.”
“마, 맞소.”
장홍이 얼떨결에 대답했다.
“하아…… 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런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른 거죠? 당신, 죽고 싶어요? 하긴 여기에 날 만나러 온 걸 보니 죽고 싶은 것 같긴 하군요.”
“나예린 소저가 납치당했소. 그녀를 구출하려다 보니…….?”
빠직.
“지금 다른 여자를 구하기 위해 내 앞에 나타났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건가요!”
그녀가 폭발했다. 소리치는 그녀의 말속에는 예리한 칼날이 벼리어져 있었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가 점점 더 높아져 주변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고 있 었다. 그 기운 탓인지 장홍의 안색이 급격하게 파리해졌다.
“아니… 그게 아니라……. 오해요, 오해!”
“오해? 그런 허접한 변명은 이 검에다 대고 하시지, 이 난봉꾼!”
챙!
뽑혀져 나온 혈나찰 옥유경의 검이 붉은 검기를 뿌렸다.
“으헉!”
기함을 터뜨리며 장홍이 급히 몸을 뒤로 뺐다.
‘저 아저씨, 아직 살아 있네??’
그 모습을 보고 석류하는 상당히 놀랐다.
부지불식간에 내질러진 혈옥선자의 절초 ‘혈봉일침’을 장홍이 피해낸 것이다.
‘저 아저씨, 겉보기와 다르게 상당한 실력자네. 저런 아저씨처럼 생긴 자에게 저런 숨겨진 실력이 있을 줄이야…….’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가지고 판단하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아저씨가 아저씨인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지만.
“확실히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단 말이야…….”
옥유경이 이렇게 불같이 화를 냈던 일이 얼마 전에도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그 순간 흐릿했던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바로 그 색골!”
석류하의 두 눈에서 불꽃이 화르르 타올랐다.
“오호, 뻔뻔스럽게 피하시겠다?”
“아니, 이건 어디까지나 본능적으로…….”
“그 본능 때문에 젊은 처자의 뒤나 쫓아다니는 건가요?”
“오해요, 오해. 쫓아다니는 게 아니라 납치를 당해서 구출하려는 것뿐이오.”
“사내들은 다 똑같아요. 그저 예쁘기만 하면 다들 정신을 못 차리죠! 죽어버려요!” 파라라라라락!
다시 한 번 혈나찰 옥유경의 검이 붉은 꽃잎을 뿌리며 장홍의 전신으로 쇄도했다.
혈봉검무
제이초
쌍봉화려
두 마리의 벌이라기보다 두 마리의 독사처럼 사나운 공격이 장홍을 향해 쇄도했다.
장홍은 피하기에 급급했다.
“진짜 오해라니까 그러시오! 나를 좀 믿어주시오!”
날카로운 검초가 웅웅 벌떼 소리를 내며 달려드는 걸 피하며 장홍이 외쳤다.
“지금 나보고 당신을 믿으라고요?”
살다 살다 그런 개소리는 처음 들어봤다는 투로 옥유경이 반문했다.
“칠 년 사 개월 동안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도 없었던 당신을?”
장홍의 안색이 시커메졌다.
“아니, 그건 그러니까..”
찔리는 게 많은지 장홍의 말끝이 흐려졌다.
“다 필요없어요! 당신이 해줄 수 있는 건 딱 하나뿐이에요.”
“그게 뭐요?”
“오늘 여기서 죽어주는 것!”
쉐에에에에에엑!
다시 한 번 옥유경의 검이 윙윙 사나운 말벌 떼의 날갯짓 같은 소리를 내며 검기를 뿌렸다.
마천십삼대 제칠번대, 혈봉대라 통칭되는 이곳에는 아름답지만 사나운 붉은 여왕벌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그 여왕벌의 이름은 바로 혈옥선자 옥유경, 학생들 사 이에서는 혈나찰이라 불리는 여인이었다. 그 여인의 검법이 바로 ‘혈봉검(血蜂劍)’이었다. 검초를 펼칠 때마다 벌떼가 무리 지어 날아다니는 듯한 소리가 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리고 지금 사나운 혈봉이 피를 구하며 윙윙윙윙,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혈봉검무
비전 오의
봉침밀밀
사나운 울음소리와 날카로운 찌르기가 병행된 초식으로, 소리로 상대의 정신을 흐트러뜨리고, 그 빈틈으로 검을 찔러 넣는 수법이었다. 옥유경의 애검 ‘적봉(赤 蜂)’의 검신 끝에 뚫린 세 개의 구멍은 이 소리를 보다 강하게 증폭시키기 위한 장치 중 하나였다.
장홍은 피하고 피하고 또 피했다. 그의 신법은 굉장히 특이해 치명상을 입을 것 같으면서도 아슬아슬하게 공격들을 피해냈다. 때로는 베었다고 생각했는데 허상인 경우도 있었다. 마치 환술이라도 쓰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피하는 게 한계인 듯. 아직 한 번도 제대로 된 반격은 못하고 있었다.
“왜 반격을 안 하는 거죠? 날 무시하는 건가요?”
윙윙윙윙!
검속을 늦추지 않으면서 옥유경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난 당신을 공격할 수 없소……. 당신을 다치게 할 수는 없소.”
“흥, 다치게 할 수 없다고요? 거짓말쟁이!”
“나, 난 진심이오.”
장홍이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옥유경이 사납게 소리쳤다.
“몸만 다치게 하지 않으면 끝인가요? 내 마음을 다치게 한 건요? 그건 다치게 한 게 아닌가요?”
억눌린 한이 담긴 목소리, 지난 세월의 분노가 그 외침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그건…….?
장홍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마음의 동요가 육신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입을 열어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교가 붙은 듯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죄책감 이라는 아교가 그의 입과 혀를 봉하고 있었다.
“왜 그날 내 앞에서 사라진 거죠? 왜?”
옥유경의 입이 힘겹게 열렸다. 좀 전에는 그렇게 사납게 외치더니 지금은 오히려 애잔하기까지 하다. 그녀 역시 혼란스러운 것이리라.
“……..”
그 일에 대해서라면 장홍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이 돌아오길 기다렸는 줄 알아요? 문 앞에 서서 삼 일 밤낮을 기다렸어요.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눈물 흘리며……. 하지만 당신은 끝내 돌아 오지 않았죠. 왜 그랬죠? 왜! 그리고 왜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난 거예요! 난 모든 걸 잊었는데, 겨우 모든 걸 정리했는데, 왜!”
“……”
침묵하고 있는 장홍이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알아요?”
그러나 이 년이 지나고 삼 년이 지나도 장홍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도 돌아오고 싶었소.”
“그런 개소리를 말이라고 하나요? 칠 년 사 개월 동안 소식 한 번 없었던 주제에!”
쉬잉! 번쩍!
다시 한 번 붉은 검광이 공간을 가득 메운다. 일 초일 초에 한이 서린 일격이었다.
“미안하오. 정말 미안하오.”
장홍은 미안하다는 말 이외에 다른 말은 할 줄 모르는 사람 같았다.
“미안하면 닥치고 죽어요!”
푸욱!
혈봉검법의 숨겨진 찌르기 ‘암침(暗)’이 장홍의 어깻죽지를 꿰뚫었다.
뚝뚝!
땅바닥에 방울방울 핏방울이 떨어졌다.
“왜…… 왜…… 피하지 않았죠?”
적봉을 쥔 옥유경의 손이 그녀의 목소리만큼이나 세차게 떨렸다. 설마 이 정도로 얕은 공격에 장홍이 당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예전 에 그녀는 한 번도 장홍을 이겨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겁쟁이였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