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5권 18화 – 나는 빛을 바라보는 그림자였다
나는 빛을 바라보는 그림자였다
-빛과 그림자
빛에는 그림자가 따른다.
아무리 정도(正道)를 표방하는 곳이라 해도 모든 것을 깨끗하게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때문에 어두운 일, 더러운 일을 대신 처리해 줄 그림자가 필수불가결 이었다. 더러운 것을 치우는 자는 그 몸을 더럽힐 수밖에 없다.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한 더러움, 그는 그런 그림자 중 하나였다.
그는 고아였다.
어머니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한 조각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주변과 자신을 분리해서 인식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바다에 둘러싸인 곳에 서 있었다. 그곳은 섬이었다. 주변에는 자기 또래의 아이들이 수십 명이나 있었다.
섬에서는 밥과 옷과 잠자리가 제공되었다. 고아들에게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준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섬에 남고 싶으면 강해져라!”
섬을 관리하는 자들은 소년들을 모아놓고 그렇게 말했다. 편하게 먹고 입고 자고 싶으면 강해지라고. 그러면서 기본적인 무술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서로서로 싸움을 붙여 약한 아이들은 섬 밖으로 쫓아냈다.
그들은 복면 같은 건 쓰고 있지 않았지만 머리가 산발되어 있고, 수염이 지저분해서 쉽게 기억하기 힘든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복면을 쓰면 오히려 쓸데없는 의심을 키워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이들은 그곳을 어느 이름있는 상단의 호위무사 양성소쯤으로 알고 있었다. 어른들은 그 섬을 ‘요 람(搖)’이라 불렀다. 거기야말로 요람처럼 편안하고 따뜻한 곳이라는 뜻이니 끝까지 남아 있을 수 있도록 발버둥 치라는 의미였다.
약한 놈은 더 이상 요람에 있을 수 없게 된다. 요람에서 쫓겨나면 다시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고아로 돌아가는 것이다. 소년들은 필사적으로 경쟁했다, 그곳에 남 기 위해서.
그곳에 있는 이상 굶어 죽을 염려도, 얼어 죽을 염려도 없었다. 사고로 죽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 따윈 먹고 자는 생존 문제 앞에서는 별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 였다. 시간이 흘렀고, 아이들은 점점 성장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대여섯 살 먹은 고아들은 계속해서 섬으로 유입되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소년들은 강해져야 했다. 그리고 무자비해져야 했다. 소년들은 요람에서 고통을 배우고, 그 고통을 견뎌낼 인내를 배웠다. 아이들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서로서로 모두 번호로 부를 뿐이었다. 그의 번호는 사십칠호’였다.
탈락하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기술이 전해졌다. 자신에게 주어진 기술들, 그동안 배워온 지식들을 최대한 활용해 살아남아야 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바로 강한 자였다.
‘요람’이라 불리는 이 섬이 실제로는 무림맹의 비밀 첩자를 키우는 양성소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섬에 들어온 지 십 년이 지난 후였다. 그곳은 빛으로 가득 찬 백 도의 ‘그림자’를 키우는 곳이었다. 그들이 직접 나서서 하지 못하는 일을 대신해 줄 존재를 양성하는 곳이었다. 그들은 더럽혀지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었다.
당시 무림은 정천맹과 흑천맹의 균형과 천무학관과 마천각의 균형으로 인해 겉으론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겉으로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만큼, 보이지 않는 곳 에서의 물밑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천겁령이라는 무시무시한 적에게 공동으로 피해를 입고, 공동으로 대응한 이후 거의 구십 년이 흐른 때였다. 평화가 너무 길어지자 사람들은 위기에 대해 느슨해 졌고, 그 반동으로 다시 억눌렀던 욕심이 솟구치던 때였다. 공동의 이익보다는 백도나 흑도 모두 자기의 이익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고자 하는 욕구에 시달리 고 있었다. 그 다툼은 겉[表]으로가 아닌 속[裏]으로 진행되었다.
조용한 전쟁, 이른바 ‘냉전(冷戰)의 시대’였다.
이 조용하지만 치열한 경쟁의 역사는 벌써 삼십 년째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 치열한 암투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실력 좋은 그림자들이 필수불가결이었다. 실 력 좋은 고급 그림자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비밀 엄수와 충성심을 고양하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의 양육이 필수적이었다. 외부 영입된 그림자를 믿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낌없이 상승무공들을 풀었다. 그리고 머리를 맞대고 그림자의 암약에 적합한 무공들을 만들어냈다.
성장한 장홍에게도 정식으로 고급 무공들이 전해졌다. 물론 충분한 사상 교육과 정신교육이 병행되었다.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한 가지 생각만 하도록 만들기 위한 교육이었다. 그림자에게 스스로 생각하는 머리는 필요없었다. 필요한 것은 주어진 명령을 어떤 의문도 없이 행할 수 있는 단호한 임무 수행 능력뿐이었다. 그 러기 위해서 최면과 암시를 병행한 정신교육이 필수였다. 이런 교육 과정은 흑도와 백도 모두 다를 게 없었다. 양쪽 모두 자기 체제가 정의라고 믿도록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최면과 암시가 잘 안 먹히는 체질을 가진 이도 나왔다.
장홍은 후자였다. 암시 학습과 사상 교육이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딱히 이곳이 싫지도 않았다. 어쨌든 이곳은 그의 집이었고, 나름대로 정도 들었고, 동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세상에 나가고 싶었다. 그러자 양성소장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섬에서 나가려면 강해져야 한다.”
과거에는 섬에서 남아 있기 위해 강해졌고, 이제는 섬에서 나가기 위해 강해져야 했다.
그로부터 삼 년 후, 그는 마침내 자격 심사에서 통과해 섬을 나올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무영 사십칠호’라는 암호명과 함께 ‘장홍식’이라는 가명을 받았다. 그 순
간부터, 이름없는 고아는 장홍식이라는 이름의 사내가 되었다.
그의 장기는 잠입이었고, 그가 맡은 임무도 잠입이었다. 그러나 적 측은 아니었다. 그는 아군들 한가운데 잠입해서 주변의 동향을 안에서 감시하는 감시자였다. 그 는 임무에 따라 천무학관에 들어갔다. 합격은 간단했고, 그는 천무학관의 관도가 되었다.
새로운 세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짜 이름을 받고,
가짜 신분을 받았다.
그리고 천무학관에 들어왔다.
그의 임무는 관도들 사이에 스며들어, 그들과 함께 지내며, 각 가문과 문파의 정보를 빼내는 역할이었다. 무림맹과 천무학관이 필요한 것은 흑천맹과 마천각의 정 보만이 아니었다.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구파일방과 팔대세가의 동향에도 한시라도 신경을 늦추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의 반발이나 불만을 적절히 억누르고,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 그것은 필수불가결한 처치였다. 이상만으로 움직이기에는 평화의 시간이 너무나 길었던 것이다.
가짜 이름에 가짜 신분이었지만 장홍은 즐거웠다. 어차피 그가 익힌 것은 은신잠행술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도의 무공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처절하게 단련한 인간 은 드물었다. 천무학관의 체계적인 가르침 속에 그는 한층 더 강해졌다. 삼성제에도 출전하고 화산지회에도 나갔다. 그의 이름이 학관 내에서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림자는 너무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는 주의를 받았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세인들의 주목을 받으며 빛의 한가운데 서 있으니 마치 자신이 빛인 것 같았다. 그 러나 그는 여전히 그림자였다. 그 사실을 잊으려고 할 때마다 조직에서는 그의 입장을 상기시켰다. 마음만 먹으면 조직은 그가 쌓아왔던 모든 것을 단숨에 허물어뜨 릴 수 있었다. 어차피 거짓 위에서 쌓아 올렸던 탑이다. 거짓이 드러나면 모든 것은 모래성처럼 단숨에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자신의 입장을 항상 잊지 말라는 경고 였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제부터 진짜 임무를 내리겠다.”
“진짜 임무요?”
“그렇다. 그동안의 실적 쌓기는 모두 이번 임무를 위한 것이었다.”
그동안 외부적으로 활약해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만든 것 역시 모두 계산된 일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자신이 쌓아왔던 모든 것 역시 거짓이었단 말인가? 무엇이 자신의 힘으로 이룬 것이고, 무엇이 아닌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마천각에 사절단으로 동행하라. 그리고 임무를 수행하라.”
“임무가 뭡니까?”
“흑도의 일곱 기둥, ‘흑칠주(黑七柱)’에 관한 정보를 모아라. 마천각의 인물들에게 가깝게 접근해 정보를 수집하라.”
그는 시키는 대로 마천각으로 향했다.
흑칠주(黑七柱).
흑도를 떠받치는 일곱 개의 기둥.
백도로 보면 팔대세가에 해당하는 곳이다. 원래 십삼주였으나, 백 년 전의 천겁혈세 이후 여섯 가문이 멸문하고 일곱 가문만 남아 아직까지 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들이 흑도무림에 미치는 영향력은 아직도 지대하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더 강화하기 위해 인재 영입에 망설임이 없었다. 흑도무림이란 원래 실력 으로 모든 것을 얘기하는 곳이었다. 때문에, 가문이든 출신이든 상관없이 최우선으로 여기는 것은 실력이었다. 그리고 인재 영입을 위해서는 정파 출신이라 해도 망 설임없이 받아들이곤 했다. 구십 년간의 평화와 몇 년 전에 있었던 무림맹주 나백천과 칠주의 하나인 ‘월하가’의 장녀 빙월선자 예청의 전격적인 결혼도 이런 분위 기를 더욱 부채질했다. 이제 백도와 흑도의 교류라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천겁혈세로부터 구십 년, 내키지는 않지만 정사 흑백은 겉모습만이라도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삼성제와 화산규약지회에서 맹활약을 펼친 장홍식의 이름도 이미 흑도 안에서 파다하게 퍼져 있어 많은 가문들이 그를 노리고 있었다. 특히 그가 집중적인 관심을 받게 된 이유는 그에게 아무런 연고가 없는 탓도 컸다.
그는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지고 땅에서 불쑥 솟은 것처럼 어떤 유명 문파나 세가의 제자도 아니었고, 유명 고수의 제자도 아니었다. 명문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그가 화산규약지회에서 삼위를 먹은 것 자체가 거의 기적 같은 일이었다. 개인의 능력과 실력을 중시하는 흑도로선 더욱더 그가 탐날 수밖에 없었다. 연고가 없는 만큼 끌어들이기도 수월했다. 그런 식으로 전향하는 자도 꽤 있었다. 구파일방이나 팔대세가가 아닌 고수라면 자신의 출신에 얽매이지 않고 완전히 가문에 동화될 수 있었다. 지금은 선(善)과 악(惡)이라는 이분법적인 관점이라기보다, 일종의 세력전이었던 것이다. 계산에 밝은 흑도의 가문들이 그를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그리고 영입 중 가장 간단한 방법은 바로 결혼이었다.
마천각에 사절단으로 간 이후, 그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혼담에 당황해야만 했다. 그리고 당시 갑작스럽게 제시된 혼담에 당황한 것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싫어요.”
가문에 불려가 아버지 혈봉만천 옥진 앞에 앉은 소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거부의 의사를 표했다. 아직 어리지만, 가슴은 나이 또래에 비해 무척이나 풍만한 소녀였 다. 하지만 큰 가슴에 비해 소녀의 눈빛은 한 마리 사나운 말벌처럼 날카로웠다. 그녀의 눈빛에서는 반항의 기색이 물씬 풍겨나고 있었다. 자유롭게 살고 있던 그녀 에게 갑작스럽게 내려진 혼인 이야기 때문이었다.
“왜 꼭 저죠?”
“별 뜻은 없다. 그저 같은 나이 아니냐? 나이가 같은 쪽이 오히려 더 편하게 대할 수도 있겠지. 접근도 쉽고.”
딸의 반항기를 읽고는 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무턱대고 화부터 내지 않았다. 강하게 억누를수록 더욱 크게 반발할 거라는 걸 읽은 탓이다.
‘거짓말!’
그녀는 속으로 외쳤다.
“너도 이제 과년한 나이가 되지 않았느냐. 이참에 좋은 혼인 상대를 물색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 안 그러냐?”
“절대로 싫어요. 그리고 전 절대로 혼인하지 않아요.”
자신의 몸이 도구로 쓰이는데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아무리 결혼이 정략의 도구로 흔하게 쓰이는 시대였지만 옥유경은 싫었다. 하지만 관습에 저항하기 위해서 는 ‘능력’이 필요했다.
‘강해져야만 해!’
자신의 의견이 묵살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그녀는 더욱 강한 힘을 원했다. 마천각 최대 여자 파벌인 칠공주파에 들어갔던 것도 그런 생각에서였다.
어차피 칠공주파는 남성을 극도로 꺼리고 배제하는 곳이었다. 남성을 찍어누르고 이기는 것만이 여성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있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사고방식이었다.
이 사고방식이 옥유경은 그다지 싫지 않았다.
무림은 ‘힘’이 지배하는 곳,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먹힐 뿐이었다. 남자와 대등해지기 위해서는 보다 강한 힘이 필요했다.
비록 그녀에게 재능이 있고 또래보다 월등한 실력이 있었지만, 아직 가문에 거역할 만큼 능력은 겸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가문을 거부할 만한 능력도, 배짱도 없었다. 그저 소소하고 작은 반항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설마 이 아비가 딸자식에게 나쁜 일을 꾸미겠느냐? 혹시 그가 너의 운명의 상대일지 누가 알겠느냐? 일단 만나보거라. 그다음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자꾸나.” 그녀는 그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가문의 속박을 끊기에 그녀의 능력은 아직 너무 보잘것없었다.
***
그때 아버지의 말을 들은 것이 실수였다고 그녀는 후회했다. 그때 그 말에 순순히 따르지 않았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을.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랑 만나게 될 자리에 오지 못하도록 손을 써달라고 칠공주의 언니들에게 부탁한 게 실수였을까?
아니면 언니들의 저지를 뚫고 유유히 약속 시간에 맞춰 나온 그를 다르게 보게 된 게 실수였을까?
아니면 그가 다른 남자들처럼 자신의 큰 가슴에 시선을 빼앗겨 물끄러미 쳐다보지 않는 것에 호감이 간 게 실수였을까?
아니면 자기를 이기면 결혼해도 좋다고 당돌하게 말했던 게 실수였을까?
이 남자라면 자신이 알던 남자랑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게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실수는 그녀가 그를 사랑하게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녀도 천상 무림의 여인이었고, 무림의 여인은 강한 힘에 끌리게 마련이었다. 게다가 그 는 어쩐지 주위의 가문이나 세력만 믿고 날뛰는 멍청이들과는 달랐다. 그는 아무런 연고도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길을 개척하고 지금의 자리에 올라선 입지전적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옥유경의 이상형이 바로 그런 가문이나 세력에 얽매이지 않고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우연찮게 장홍식은 그녀의 이상형이었던 것이다.
* * *
장홍식 역시 오랫동안 섬에만 갇혀 있다 보니, 세간의 상식에 대해서 무지했다. 특히 연애 관계라는 것에 대해선 젬병이었다. 거기다가 정상적인 혼인 절차가 어떻 게 되는지 알 리도 없었다. 그가 배운 것은 오직 강해지는 법과 그림자처럼 자신을 숨기는 법, 그리고 정보를 들키지 않고 빼내는 법뿐이었다. 그러니 주위에서 혼담 이 쏟아질 때 그가 얼마나 당황했겠는가.
결혼이라는 게 뭔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자신과는 아주아주 먼 나라 이야기였다. 요람에서도 세상의 상식은 극히 일부밖에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것도 세상 물정에 너무 어두우면 주위에 수상하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 가르친 것에 불과했다. 수상한 짓을 하다 보면 정보 수집에 차질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그걸 미연에 방지하자는 차원에서 가르친 상식에 불과했다. 그중에 연애하는 법과 결혼하는 법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옥유경이 ‘나를 이길 수 있다면 결혼해 도 좋아요’라고 했을 때, 그게 흑도 특유의 혼인 전통인 줄 알았다. 그리고 조직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혈봉가의 정보를 획득하라’라는 단서를 달았기 때문에 결혼을 하면 보다 정보에 접근하기 쉽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세상의 상식과 도덕이 당시의 그에게는 무척이나 결핍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척 강했다. 확실히 큰소리칠 만했다. 가문에서 벗어나가 위해 발버둥 치며 쌓은 실력이 허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십수 년 동안 살아남기 위해 발버
둥 쳐왔다. 게다가 그 밑바탕에 천무학관의 가르침을 흡수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상승무공에 대해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옥 유경이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는 아직 가문 안에서 안주하고 있는 아가씨였던 것이다.
그에게 패한 옥유경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지만, 그를 다른 눈으로 보게 되는 계기가 됐다. 이런 남자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도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결혼은 자연스럽게 진행되었고,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두 사람은 결혼해 있었다.
수많은 실수와 실수들이 중첩된 끝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
그런데……
그런데……
“왜 날 버렸죠? 왜 날 떠난 건가요? 왜? 왜?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된 건가요?”
“그, 그건 결코 아니오. 맹세코 아니오.”
“그럼 왜죠?”
장홍이 괴롭게 입을 열었다.
“당신을 위해서였소.”
기어들어 가는 듯한 그 소리에 옥유경의 얼굴이 대변했다.
“헛소리! 사랑한다면 옆에 있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사랑하니까 떠난다니! 정말 멋진 개소리군요. 또 다른 헛소리는 없나요?”
“나에게…… 나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오.”
“예상치 못한 일? 그게 뭐죠?”
“내가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것이오.”
“거짓말!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아요! 그러니 날 떠난 거예요!”
옥유경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믿지 못하겠지만 사실이오. 당신과 지냈던 시간이, 그림자로서 살아야 했던 나에게는 가장 눈부신 시간이었소.”
“그런데 왜? 왜!”
옥유경이 외쳤다.
“그대로는 나는 당신과 나란히 설 수 없었소.”
그리고는 괴로운 마음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빛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