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6권 3화 – 오(五). 다섯

비뢰도 26권 3화 – 오(五). 다섯

오(五). 다섯

-운도 실력?

그 순간은 무척 짧았다.

그러나 효룡에게는 그 시간이 마치 몇 달이나 지난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락비오는 운균을 돌려 나온 숫자에서 맨 첫타를 때리기 위해 천천히 주먹을 뒤로 빼고 있는 중이었다.

나온 숫자는 오(五). 이제 그는 비류연을 향해 다섯 발이나 먹일 수 있었다. 게다가 물러나면 지는 내기이다 보니 비류연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저 거구 의 강격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운도 실력이라면, 지금 비류연의 실력은 참으로 형편없다는 말이 된다.

‘저 녀석 과연 괜찮을까?”

평소라면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걱정하는 쪽이 오히려 바보 같게 느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럴 시간이 있다면 무림의 평화 같은 거창한 것이나, 이웃집 멍멍이가 아침밥을 챙겨 먹었는지 걱정하는 쪽이 오히려 더 낫다. 이 세계가 멸망해도 어쩐지 멀쩡히 살아 있을 것 같은 녀석, 그게 바로 비류연이란 친구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의 친구인 비류연의 특기는 뇌광 같은 ‘빠르기’였다.

어두운 하늘을 가르며 한순간에 번쩍이는 섬광처럼 쾌속무비한 보법으로 상대의 공격을 완전 회피하며 번개 같은 기술로 적을 쓰러뜨린다.

때문에 효룡은 이 친구가 무언가에게든 누군가에게든 맞는 광경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떤 공격도 이 친구의 몸을 침범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비류연은 손도 발도 모두 꽁꽁 묶인 상태였다. 그 족쇄의 이름은 다름 아닌 약속이었다. 이 약속을 무너뜨리는 순간, 비류연은 지게 된다. 하지만 이 내 기를 좋아하는 친구는 언제나 내기를 할 때면 그 규칙을 준수했다. 꼼수는 부렸지만, 규칙 자체를 어긴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내기를 한다는 것은 그 규칙에 동 의한다는 자신의 약속이 뒷받침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이 만든 규칙에 아무 생각 없이 순종적으로 따르는 것은 거의 혐오하다시피 하는 그였지만, 스스 로가, 그 자신이 동의하기로 한 약속에 대해서는 천금처럼 여겼다.

“그것은 신뢰와 신용과 관련되어 있거든. 돈을 벌고 싶으면 그것을 잘 유지할 필요가 있어. 신뢰와 신용이란 건 큰 재산이거든. 난 내 재산을 함부로 다룰 만큼 어 리석지는 않아.”

씨익 웃으며 그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지킨다고 하면 지킨다.’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해서는 힘과 의지가 필요하다. 그것을 지킬 수 없을 때는 그 말을 한 인간이 그 말을 지킬 수 없을 만큼 무능하고 무기력해졌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비류연이 자신을 무능력한 인간으로 만드는 데 죽어도 동의할 것 같지는 않았다.

“어떡할 건가, 친구?”

효룡은 초조한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비류연은 흔들림없는 눈동자로 두려움없이 락비오가 하는 꼴을 지켜보고 있었다.

락비오는 심리적인 압박이라도 가할 생각인지 자세를 매우 느릿느릿하게 잡았다. 그러나 그 동작에 실린 기세는 충분히 무시무시해서, 마치 폭풍 전의 고요를 연 상케 했다.

“준비는 됐나?”

사냥감을 눈앞에 둔 사냥꾼처럼 락비오가 웃었다.

“예전에.”

비류연이 짧게 대답했다.

“말해두지만 난 강하다고.”

“너무 기다리다가 하품만 나올 지경이야. 빨리 안 해? 아니면 한숨 자고 일어날 테니 기다리던가.”

비류연이 이죽거렸다. 락비오가 발끈했다.

‘상대를 더 자극해서 어쩌자는 건가, 이 친구야!’

효룡은 친구의 막무가내적인 행동에 조바심이 나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방금 말, 후회하게 해주마!”

락비오가 내뱉듯이 말한다.

“영원히 잠들어라!”

부우우우우우웅!

“철갑파쇄권(鐵甲破碎拳)!”

락비오의 강격이 공기를 찢으며 비류연을 향해 쇄도했다. 비류연의 도발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완벽한 일격 찌르기였다.

퍼억!

비류연의 허리가 그대로 앞으로 접혔다. 몸이 지면에서 떨어지며 들썩거린다. 순간적으로 호흡이 끊어진다. 효룡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귓가로 비류 연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락비오의 일격은 상상 이상으로 무시무시했다. 수만 번의 반복 훈련을 통해 습득한 일격임이 틀림없었다. 소위 말하는 일격필살의 권이었다.

“저 친구,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효룡의 마음속에 한줄기 그런 염려가 떠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만큼 방금 전 내질러진 일격은 절대적이라고 할 만큼 위력적이었다.

무겁다.

눈앞이 번쩍하며 폐부의 숨이 단숨에 빠져나간다. 파도 같은 충격이 신경을 불태우며 전신을 향해 미친 말처럼 내달린다. 호흡이 막히고 오장육부가 비틀리고 근 육과 뼈가 비명을 지른다. 평범한 무인이라면 단 일격에 칠공에서 피를 쏟고 즉사했으리라.

….너무 만만히 봤나.”

순간 희미해지려고 하는 의식을 다시 붙들어맨다.

‘화경(化)하나 제대로 펼칠 수 없다니…….’

이 무슨 꼴사나운 모습이란 말인가. 또 사부에게 이런 모습을 보였다가는 얼마나 비웃음을 당할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생각 이상으로 몸이 엉망진창이었다.

사부와 만나 묵룡환 중 하나를 빼앗긴 덕분에 기(氣)가 미쳐 날뛰었고, 그 기를 억지로 제어하는 도중에 나예린의 모친인 빙월선자 예청과 의도하지 않은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때 한 번 경혈이 엉망으로 뒤엉켰었는데, 그 후로도 일이 끊이지 않아 제대로 치료에 전념할 기회가 없었다. 덕분에 완벽하지 못한 상태로 칠상흔과 싸워야 했다. 그의 마지막 일도는 정말로 무시무시했다. 만일 조금의 실수라도 있었다면 자신이 당했을 것이다. 그때 남아 있는 거의 모든 힘을 소진했는데, 일이 벌 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나예린이 납치당했고, 그 후의 기억은 어쩐지 단편적이었다. 강물처럼 연속적으로 이어진 하나의 흐름이 아니라 기억이 동강난 동아줄처럼 단속적으로 끊어져 있 었다. 그런 상태로 다시 사부한테 대들었다가 화려하게 깨지고 말았다.

이미 몸은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지금 겉보기뿐만 아니라 안까지 엉망진창인 비류연의 몸으로는 그 충격을 제대로 흘려보내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다. 아직도 그의 몸 안에서는 제어할 수 없는 힘이 미친 용처럼 날뛰고 있었고, 그것의 제어에 거의 대부분의 힘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비류연은 평소의 반도 안 되는 힘밖에 낼 수 없었다. 육체적 손상과 내상이 지나치게 축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자존광대하기까지 한 강한 정신력이 육체의 그런 상태를 용납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날뛰고 싶었지만, 도무지 전면에 나서서 난동을 부릴 수 없는 상태. 억지로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지금 그는 푹신한 침상에서 요양이 나 하고 있어야 제격이었다. 그러나 나예린을 되찾기 전까진 그런 편안한 휴식은 있을 수 없었다.

철권의 충격이 근육과 뼈를 타고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간다. 뇌가 띵 하고 울린다. 힘을 흘려보낸다고는 했지만, 다리를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는 화경의 효과 도 미미했다. 미미하게 흘려낸 힘만으로도 단단한 청석 바닥에 거미줄 같은 금이 새겨진다.

그래도 밀려나진 않는다. 천 년의 세월을 버틴 굳건한 바위처럼 그 자리에서 버티고 선다. “크윽!’

입 안에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제 겨우 한 대.

아직 락비오의 공격은 네 대나 더 남아 있었다.

“휴우! 살았다.”

비류연이 락비오의 제일격을 버텨내자 효룡은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아직 안심하기는 일렀다. 아직 네 번의 공격이 더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효룡이 보기에 비류연의 상태는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는 듯했다. 그의 친구의 장기는 초고속의 신법을 이용한 회피 능력이지 맞고 맞고 또 맞아도 멀쩡한 맷집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지금까지 류연 저 친구가 누군가에게 얻어맞는 광경을 본 적이 있었나?”

기억을 반추해 보았으나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런 젠장!’

마음속에 쌓인 불안감이 더욱더 중첩되는 듯했다. 한 번도 목도한 적이 없기에 더욱더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얼마나 그의 맷집이 강한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의외로 엄청 약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이런 무식하고 거친 방식은 신속(神)의 공격을 자랑하는 비류연에게는 치명적인 독이었다.

비류연이 질 수도 있다? 평소라면 상상하지 못했던 일까지 상상하게 된다. 항상 그의 주변에서 흘러넘치던 여유가 지금은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미 져버린 자신은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무능력함에 다시 한 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내가 좀 더 신중했어야 하는데…….’

적을 얕보다가 패배했다. 입이 백 개라도 변명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더 걱정되는 것은 비류연 쪽이었다. 나예린이 납치당한 이후 그는 어딘지 이상했다. 전혀 평 소의 그답지가 않았다. 전혀 평소의 여유만만하고 오만하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말투부터가 다르지 않던가. 예전의 비류연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어쩐지 질 것 같지 않은 느낌이었는데, 지금의 비류연은 누군가에게 금방이라도 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보게, 류연, 포기해. 더 이상 공격을 받다가는 위험해!”

다급한 목소리로 효룡이 외쳤다.

“포기라고?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룡룡?”

“더 이상 그런 바보 같은 내기 하지 말란 말일세. 자넨 지금 정상이 아니라고.”

그러자 비류연이 효룡을 보며 씨익 웃었다.

“당연히 정상이 아니지. 나예린이 없어졌다고. 정상인 쪽이 이상한 거 아냐?”

왜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투로 비류연이 반문했다.

“내 말이 그게 아니라는 건 잘 알잖나?”

“몰라.”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비류연이 딱 잘라 대답했다.

“모르긴 뭘 모르나?! 이대로라면 자네는 죽어. 지금의 자네는 초조해하고 있다고. 평소 내가 아는 비류연이 아니란 말일세. 평소 자네가 하던 말을 잊은 건가? 지 금 자넨 말투조차 평소랑 다르다고. 자기 자신을 찾아, 류연! 정신 차리란 말이야!”

효룡의 마지막 말은 필사적이었던 만큼 비류연의 귀에 가 닿았다.

‘정신을 차리라고?”

자신이 남들한테 그 말은 한 적은 많이 있었다. 보고 있다 답답해서 해준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친구한테 듣기는 처음인 것 같았다.

‘내가 내가 아니라고? 초조함 때문에 나 자신을 잊었던 건가?”

아무리 나예린을 구하기 위해서라지만, 스스로를 잊어서는 곤란했다. 자신을 잃는다는 것은 곧 모든 것을 잃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비류연은 나예린을 잃어버린 뒤에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이상하게 기억이 단편적이었고, 부분부분들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제야 자신이 정말로 정신이 없었다는 것을,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잃어버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락비오가 한마디 거들었다.

“보고 있는 내가 다 애절하군. 자네 친구 말이 맞아. 그만 포기하는 게 어때?”

“포기? 그거 어느 나라 말인가요? 처음 듣는 말인걸요? 아니면 배추 포기 할 때 그 포기를 말하는 건가요?”

어깨를 으쓱하며 비류연이 반문했다.

“류연!”

지켜보고 있던 효룡의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어느새 비류연의 말투가 평소처럼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잃어버렸던 여유도 어느 정도 되찾은 것 같았다. 그 러나 락비오가 보기에 저런 말투가 된 것은 자신에게 겁을 집어먹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포기란 건 저항을 그만두고 넙죽 엎드려서 패배를 인정하는 걸 말하지.”

비류연은 주먹으로 손바닥을 딱 때렸다.

“패배? 아, 그건 들어본 적이 있군요. 나랑은 전혀 관계없는 말이고, 앞으로도 관계없을 말이지만 말이에요. 다른 사람한테는 많이들 선물해 줬거든. 다들 좋아 죽 으려 하더라고요. 댁한테도 곧 그 말을 선사해 주도록 하죠. 뭐, 너무 감격할 필요는 없어요.”

락비오가 발끈했다. 하지만 효룡이 보기에 저렇게 존댓말을 가장한 말투로 사람의 신경을 살살 긁으며 열받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평소 보던 비류연의 모습이었다. “뭐라고! 허세는 작작 부리는 게 어때? 그런 것치고는 꽤 힘든 것 같은데? 이 몸의 제일격을 막아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분발했다고 할 수 있어. 그러니 그만 포기 하는 게 어때? 약한 놈 괴롭히는 건 취미가 아니거든.”

가쁜 숨을 쉬는 비류연을 보며 락비오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아쉽지만 나랑은 정반대군요. 난 말이죠, 약한 놈을 괴롭히는 게 취미거든요. 그러니까 그만두지 않아요. 아직 덜 괴롭혀 줬거든요.”

락비오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솟아올랐다. 미간의 골이 더욱 선명하게 팬다.

“흐흐흐, 입만은 살아 있군. 몸 안은 엉망진창일 텐데 말이야. 하지만 입심이 아무리 좋아도 이기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

“그건 두고 볼 일이죠. 기대하라고요. 패배란 이름의 선물을 한 아름 안겨줄 테니. ‘철저한’과 ‘처절한’까지 덧붙여서 말이죠. 패배종합선물꾸러미라 할 수 있겠군

요.”

입 안에 피 맛을 머금고 있으면서도 비류연의 표정은 여전히 태연했다.

“이봐요, 덩치 씨. 두 방째는 언제 날리는 겁니까? 기다리다가 하품이 날 지경인데 갈 길이 바쁜 사람 붙잡고 패배시켜 달라고 너무 시간 끌지 말아줘요.”

그러자 락비오의 얼굴에서 무시무시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상당히 화가 난 듯했다. 어떻게든 저 이죽거리는 면상을 뭉개주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을 것 같았 다.

“그 말 곧 후회하게 해주마.”

“후회라……. 좋은 말이죠. 왜냐하면 항상 나의 적을 위해 준비된 말이거든요.”

부웅!

락비오의 두 번째 공격이 바람을 가르며 비류연의 몸에 직격했다.

퍽!

복부를 얻어맞은 비류연의 몸이 다시 한 번 경련하듯 들썩였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버티지 못하고 조금 뒤로 밀려났다.

끼이이이익!

비류연의 발이 밀려나는 힘을 버티자, 그 마찰로 인해 매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디디고 있던 청석 바닥이 쩌적 금이 가며 갈라졌다. 그러나 비류연의 뒷 발꿈치는 여전히 그어진 금 안쪽에 있었다. 좀 전에 말싸움으로 시간을 끌면서 내상을 조금 회복해 둔 게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아직이에요, 아직.”

소매로 입가를 한 번 훔치며 비류연이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억지로 뺨의 근육을 움직인 것에 불과했다.

“이 지독한 놈! 아직도 버티다니!”

“훗, 원래 남자는 물러나지 않아야 할 때를 알아야 한다고 하잖아요. 지금이 바로 그때란 거죠.”

“물러나지 않아야 할 때가 아니라 물러나야 할 때이겠지.”

락비오가 핀잔을 주었다.

“물러나야 할 때? 그게 언젠데요? 그런 ‘때’ 나는 모르는데.”

락비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모른다니 애석하군. 그렇다면 내 주먹으로 알게 해주지. 단, 그 대가는 죽음이다. 후회하지 마라!”

락비오는 다시 한 번 정중세의 자세를 잡았다.

가장 안정된 자세이나 그렇기 때문에 실전에는 절대 쓸 수 없는 자세였다. 가장 안정되어 있는 만큼 순발력 면에서 아무래도 부족한, 이른바 연습용 자세이기 때문 이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강력한 권력을 낼 수 있는 자세였다.

락비오의 권세는 그 어느 때보다 진중했다. 정신을 집중하고 힘을 모아 상대의 생명을 끊는 필살의 일격을 날리기 위한 자세였다.

효룡이 보니 그의 주변의 공기가 소용돌이치는 것 같았다. 어떤 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효룡은 잘 알고 있었다.

저 밑바닥의 내공까지 끌어올려 육체를 활성화시키고, 그 내력을 주먹 끝에 모아 당겨진 활시위에 걸린 화살처럼 온몸의 근육과 내력이 팽팽해져 있을 때 나타나 는 현상이었다.

“저걸 맞으면 아무리 비류연이라도…….”

지금 비류연의 상태로는 저 일격을 막아낼 방도가 없었다. 근골과 피부를 단련하는 외문기공을 익힌 적이 없는 비류연에게 있어 상대의 공격에 대한 직접적인 방 어는 기를 이용한 ‘경기공(硬氣功)’과 ‘화경(化勁)’ 두 가지가 주를 이룬다.

그러나 저런 정면 일직선 찌르기는 화경으로는 부족하다. 게다가 거의 자리에 못 박혀 있어야 하는 지금 같은 경우에는 화경이 거의 효과가 없다. 있는 그 자리에 서서 상대의 공격을 상쇄시키는 공부는 매우 고난이도의 수법으로 어지간한 초절정고수도 해내지 못하는 일이었다.

경기공이 풀려 버리고 호신강기가 해제된 육체는 그저 야들야들한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런 고깃덩어리는 단 일격에 분쇄되어 버릴 뿐이다.

“자,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포기해라. 그리고 나의 힘, 나의 정의 앞에 무릎을 꿇어라. 그러면 넌 살 수 있다.”

“요즘은 그런 것도 살아 있는 거라고 하나 보죠? 그런 꼴사나운 모습은 이쪽에서 사양하겠어요.”

“어리석은 놈.”

“오, 요즘은 입으로 주먹을 내지르나 보죠?”

빠직!

다시 한 번 도발한다.

“죽어라!”

철갑파쇄권

정권 찌르기

금강권拳) 일격살(擊殺)!

부웅!

공기를 찢으며 주먹이 날았다.

퍼—억!

무자비한 권격음이 울려 퍼졌다. 그다음 적막이 공간 전체에 가득 찼다. 효룡은 눈을 크게 부릅떴다. 비류연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버티고 서 있었다. “버틴 건가!”

효룡이 흥건히 땀에 젖은 주먹을 쥔 채 외쳤다. 조마조마하게 오그라든 심장이 다시 펴지려고 하는 순간.

스르르륵!

그러나 효룡의 안도도 잠시, 곧 비류연의 몸이 도끼에 찍힌 나무처럼 뒤로 넘어갔다.

“안 돼에에에에에에에에!”

몸이 쓰러지고 있는데도 비류연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마치 석상처럼 그대로 굳어 있었다.

“정신 차려, 류연! 자세를 바로잡아!”

그러나 효룡의 외침은 그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서서히 뒤로 넘어가는 비류연은 완전히 정신을 잃은 듯했다. 아니면 이미…….

“정신 차려! 류연, 나 소저를 구해야지!”

우뚝.

뒤로 그대로 넘어가던 비류연의 몸이 바닥과 한 뼘을 남겨놓은 상태에서 그대로 멈추었다. 손을 짚지도 않았고, 무릎은 쭉 펴진 채 그대로였다. 그런데도 보이지 않는 손이 잡고 있는 것처럼 딱 한 뼘을 남겨두고 공중에 떠 있으니 보고 있던 락비오와 효룡 모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이럴 수가! 철판교의 신법인가?”

철판교는 무릎을 편 채 바닥에 바짝 붙을 정도로 몸을 뉘었다가 다시 일어나는 특수한 신법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

효룡은 곧 그 사실을 부정했다. 철판교치고는 체공 시간이 너무 길었던 것이다. 어떤 철판교도 바닥에 거의 달라붙기 직전의 상태로 저렇게 오랫동안 떠 있을 수는 없었다.

더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바닥에 거의 붙어 있던 비류연의 몸이 아무런 반동도 없이 그대로 다시 원래의 자세로 돌아왔던 것이다. 어찌 보면 마치 강시가 일어나는 듯한 그런 모습이라 상당 히 괴기스럽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이번만큼은 락비오도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전 일격을 맞고도 다시 일어나다니……. 네, 네놈, 대체 정체가 뭐냐? 호리호리한 주제에 무쇠로 된 강시라도 되냐?”

“어허, 이렇게 초절정의 미소년 강시를 본 적이 있어요? 난 진짜 사람이라고요, 십전완미(十全完美)의.”

십전완미, 완전수 십(+), 즉 모든 것이 완벽할 정도로 아름답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의식 과잉까지…….”

저런 상태에서 저런 자존광대한 헛소리를 늘어놓을 수 있는 녀석이 존재할 수 있다니, 락비오는 어이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들킨 것 같은데, 사실 고백하자면 난 불사신이에요. 덤으로 보다시피 미소년이고. 줄여서 불사미소년. 그러니까 이 정도로 쓰러지지는 않아요.” “이거이거 정체가 들켜서 참 곤란하네, 어허허’라고 말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주룩!

뻔뻔하게 말하는 비류연의 입가를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그럼 그 피는 대체 뭐냐?”

그러자 비류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소매로 피를 훔치며,

“아, 참고로 이건 댁한테 당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나 같은 미소년은 원래 좀 병약하거든요. 가끔 흰 소복에 피를 토하기도 하지요. 콜록콜록.” 일부러 고개를 돌리며 기침하는 시늉을 했다.

자칭 병약 미소년은 물론 개구라였다. 게다가 입고 있는 옷은 하얀색이 아니라 검은색이었다. 덕분에 기침과 섞여서 나온 피는 잘 보이지 않았다.

“병약? 어디가? 게다가 불사신이라며?”

세상에 병약한 불사신이란 것도 있단 말인가? 듣도 보도 못한 개념이었다.

락비오는 마천각 내에서도 비류연 정도로 튼튼한 녀석은 본 적이 없었다. 죽일 생각으로 쳤는데도 죽지 않은 주제에 병약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었다. “확실히 놀랍군. 다시 봤다. 이제껏 이렇게까지 나를 놀라게 한 건 네가 처음이다.”

이렇게 된 이상 락비오도 비류연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무학관의 도련님들을 완전히 무시할 건 아니었나 보군.”

그동안은 천무학관을 그저 배경이 그럴싸한 도련님들만 다니는 곳이라 생각했는데, 비류연 같은 놈도 있는 걸 보면 생각과는 다른 곳인 모양이었다. 비류연이 천 무학관에서 예외 중의 예외라는 것을 그는 잘 몰랐던 것이다.

“아직아직 멀었어요. 난 그런 처음, 전혀 되고 싶지 않아요. 기왕 처음이 된다면 댁을 쓰러뜨린 처음이 되는 쪽이 취향이라 할 수 있죠.”

자신이 만만하다 못해 흘러넘쳤다. 무뚝뚝하던 락비오의 미간에 다시 깊은 골이 패었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부정한다.

“난 불가능한 걸 가능하게 만드는 게 취미 중 하나라서 말이죠. 그런 말을 들으면 더욱 의욕이 나는 체질이라 이를 어쩌나.”

비류연이 웃었다.

“곧 쓰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잘도 지껄이는구나.”

입만 산 놈이라는 욕이었다. 확실히 효룡이 보기에도 지금 비류연의 안색은 무척 창백했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비류연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 는다.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조금 만 더 있으면……..

그리고 그 순간이 왔다.

‘좋아! 드디어!’

수그러져 있던 비류연의 허리가 곧게 펴진다. 창백하던 얼굴에 핏기가 돌고 온몸에 힘이 흘러넘친다. 그리고 입가에 엷게 덧바르듯 번져 나가는 미소. 락비오의 마 음을 심히 불편하게 만드는 그런 미소였다.

“뭐냐? 회광반조냐?”

불쾌한 어조로 락비오가 이죽거렸지만 비류연은 그에 대해서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아, 이제야 겨우 준비가 끝났네.”

비류연이 입 안에 고인 피를 뱉어내며 투덜거렸다. 그렇게 깔끔한 상태는 아니었다. 내장이 진탕돼서 엉망진창이었던 것이다.

“무슨 준비가 끝났다는 거냐?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군.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면 안 되겠나?”

“쯧쯧, 불쌍하게도 뇌까지 근육으로 차서 그런지 쥐새끼처럼 소통력이 떨어지는 모양이군요.”

그러면서 눈가를 훔치는 시늉을 한다.

“날 모욕할 셈이냐! 난 쥐새끼가 아냐. 그런 하등한 동물이랑 비교하지 마라!”

락비오가 붉으락푸르락 안색을 변모시키며 외쳤다. 쥐새끼랑 비교된 게 어지간히 치욕적이었던 모양이다.

“날 즐겁게 해준 답례로 이번에 예언을 하나 하죠, 적중률 삼십 할(300%)의!”

“예언?”

“슬프게도 이제 댁의 주먹은 더 이상 나에게 닿지 않아요.”

그것은 예언이라기보다 일종의 선언이었다.

“뭐라고?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 요즘 유행이냐?”

비류연은 살짝 웃으며 대꾸했다.

“슬프게도 우리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이 있거든요. 그 강의 이름이 뭔지 혹시 알아요?”

“뭐냐, 그게?”

“수준 차.”

히죽 웃으며 비류연이 짧게 대답했다.

“이젠 정신까지 오락가락하는 모양이군.”

락비오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난 아주 멀쩡해요. 게다가 물론 진심이고. 정직이 내 신조거든요.”

“지금 꿈꾸나? 그 꿈, 지금 당장 깨어나게 해주지.”

“이런이런, 이해가 안 돼요? 그렇게 어렵나? 그럼 역시 쥐새끼 맞나 보네. 이해력이 지나치게 떨어지는 것 같으니 쉽게 얘기해 주죠. 아주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댁 의 주먹은 이제 더 이상 나한테 닿지 않는다는 이야기예요.”

아무렇지도 않은 평이한 어조로 그렇게 선언했다. 너무나 긴장감없는 말투였기에 락비오는 그 말을 이해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이해한 다음 에는 ‘하아?’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헛소리였군. 날 좀 재미있게 해주나 했더니, 실망했다.”

락비오는 비류연의 말을 믿지 않았다. 자신은 멀쩡히 서 있는 반면 저 앞머리에 가려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녀석은 너덜너덜 걸레짝이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어딜 봐도 그의 승리는 확정적이었다.

“믿든 안 믿든 상관없어요. 어차피 현실이라는 건 한 개인의 부정 때문에 변하거나 하는 법은 없거든요. 얼마든지 부정해도 좋아요. 그게 바로 험난한 현실을 견디 지 못하는 가련한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책이죠. 이해해요. 암, 이해하고말고요.”

비류연이 상큼한 어조로 이죽거렸다.

“패─배─자─라고! 라고! 라고!”

“어라, 이제 가는귀도 먹었나요? 다시 한 번 듣고 싶다면 얼마든지 들려줄 수 있는데. 댁의 정체성 회복을 위해. 자, 시작합니다. 패배자. 패배자. 패배자. 패배자!” 너의 정체성은 패배자 그 자체이며 그 이외에 다른 무엇도 될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런 말을 듣고 얌전히 있을 인간은 적어도 이 마천각 내에는 없었다. “닥쳐라!”

락비오의 일갈이 대청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의 부리부리 시퍼렇게 뜬 두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패배자.

그 말은 그가 가장 싫어하고 혐오하는 말이었다. 그는 패배자가 되지 않기 위해 그동안 힘을 길러온 것이다. 패배자의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해서.

“방금 그 말로 인해 너의 죽음은 확정되었다. 생포할 필요 없이 이 자리에서 사망시켜 주마. 사인(死因)은 격살(擊殺)이다!”

락비오가 노발대발할수록 비류연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더욱더 짙어졌다.

“잘 못하는 말로 어떻게 하려고 애쓰지 말고 주먹을 써요, 주먹을. 어차피 그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잖아요? 안 그래요, 덩치 씨? 자, 해봐요. 얼른 해보라고요! 난 여기 있어요. 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잖아요. 그러니 쳐요, 쳐보라고요. 이 겁쟁이 씨!”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타인의 화를 돋우는 데는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 비류연이었다. 그런 그와 말싸움을 한 시점에서 이미 락비오의 패배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말 로는 졌지만, 그에게는 아직 내공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주먹이 남아 있었다.

“이 노오오오옴! 피떡으로 만들어주마!”

그리고 이 순간 진짜로 비류연이 말한 준비가 완전히 끝났다. 비류연은 활짝 폈던 다섯 손가락을 천천히 오므렸다.

락비오의 철갑권이 다시 한 번 공기를 찢으며 비류연의 얼굴을 향해 쇄도해 왔다. 지금까지 일부러 배만 때려온 것과는 전혀 상반된 행동이었다.

“피해, 류연!”

기겁한 효룡이 외쳤다.

저런 일격이면 비류연의 머리통은 삼층에서 떨어진 수박처럼 붉은 속살을 드러내며 산산조각 날 게 분명했다.

그러나 비류연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주먹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라?”

느리다.

느려도 너무 느렸다. 일거에 폭발한 분노가 고스란히 실린 주먹이었다. 살의로 똘똘 뭉친 주먹이었다. 지금 이 일격이면 무엇이든 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물며 인간의 말랑말랑한 두개골 따위는 일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태풍과도 같은 위력을 지닌 일격이 주먹을 뻗으면 뻗을수록 점점 더 약해지더니, 마침내는 아무런 해도 없는 산들바람으로 바뀌었다.

툭!

전력을 다해 내지른 주먹이 비류연의 이마에 닿아서 낸 소리는 허탈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더 이상은 주먹을 뻗으려 해도 뻗어지지 않았다.

“이, 이럴 수가! 마, 말도 안 돼!”

락비오는 지극히 평범한 반응을 보였다. 비류연은 황당함으로 가득한 그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좀 전까지 락비오의 연타에 괴로워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 진 후였다.

“봐요, 예언이 적중했잖아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고 금세 현실을 부정하면 안 되죠. 그런 게 패배자들의 전매특허거든요.”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그런 얼굴이었다.

방금 전 일격도 겨우 닿았다기보다 일부러 닿게 해줬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락비오는 주먹을 거둬들였다. 이번에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내뻗었던 권격을 회수할 수 있었다. 좀 전과 같은 저항은 어디에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수많 은 의문들이 그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하지만 역시 답은 나오지 않는다.

“믿지 못하겠어요? 그럼 다시 한 번 해봐도 상관없어요. 물론 그래 봤자 소용없겠지만.”

아직 락비오에게는 한 번 더 공격할 기회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비류연은 그래 봐야 쓸모없으니 포기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난 못 믿겠다!”

여기서 주먹을 내린다는 것은 스스로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힘을 정의로 숭앙하는 자신의 신념을 꺾는 일이었다.

그오오오오오오!

내공이 한곳에 집중되자 락비오의 우권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검에 검기가 맺히는 것과 같은 요령이었다.

이제 그는 좀 전보다 수배나 더 강한 위력을 낼 수 있었다. 어떻게든 적을 아작 내겠다는 의지가 그곳에 담겨 있었다.

“받아라!”

쿵!

요란한 진각과 함께 락비오의 오른발이 내디뎌지며, 동시에 엄청난 회전이 걸린 락비오의 우권이 돌풍을 일으키며 비류연을 향해 날아갔다. “이야아아아아아아아아압!”

한 치의 방심도 없는 완벽한 일격이었다. 하얀 권광이 번뜩였다. 그리고……

툭!

이번에도 락비오의 일격은 비류연의 얼굴 가죽 표면에 살짝 닿는 게 고작이었다. 락비오는 속으로 고함을 질렀다.

‘좀 전과 똑같은 감각이다!’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그의 몸을 칭칭 동여 감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 정체까지는 알 수 없었다. 발버둥 치면 발버둥 칠수록 그것은 그의 몸을 더욱더 조여왔다.

“이건 대체…….?

이 보이지 않는 실이 운명의 끈처럼 그를 속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운명의 실을 잡고 있는 이는 락비오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너냐?”

비류연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번져 나갔다.

“눈치도 느리긴. 나 이외에 또 누가 있겠어요?”

비뢰도(飛刀) 오의(義)

괴뢰(傀儡)의 장(障)

주망포박(蛛網捕縛)

그것이야말로 지금 락비오의 몸을 속박하고 있는 기술의 정체였다. 그러나 아직 락비오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이미 거미줄에 걸린 먹이 신세 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어느새 다섯 번의 공격을 모두 마쳤다는 것을. 비류연은 이미 물어보지도 않고 운균(돌림판)을 돌리고 있는 중이었다.

“자, 잠깐만!”

뭔가 분명히 이상했고, 그 점을 짚고 넘어가야 했다. 그러나 그의 제지를 비류연은 귓등으로도 들은 척하지 않았다.

“으응? 뭐라고요? 요즘 귀가 잘 안 들려서…… 콜록콜록!”

다시 한 번 병약한 미소년 자세로 기침을 한다.

“잠깐, 잠깐, 기다리라니까! 이봐, 기침하고 귀하고 무슨 상관이야?”

그러나 비류연은 여전히 못 들은 척 연신 가짜 기침을 터뜨릴 뿐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온 숫자는 일(一).

락비오의 일격을 막느라 운을 다 써버린 탓인지 그의 남은 운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당황하던 락비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안됐군.”

그걸로는 절대로 날 쓰러뜨릴 수 없다, 그런 자신감이 서린 얼굴이었다. 그러나 비류연의 생각은 달랐다.

“글쎄요? 이걸로 충분할 것 같은데?”

비류연의 앞머리가 순간 보이지 않는 바람에 흩날리며 황금빛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드러난다. “이 내기, 나의 승리군요!”

터ᅳ엉!

비류연의 주먹이 자신과 상대의 중간 허공을 때렸다.

허공을 때렸는데도 굉음이 울려 퍼졌다. 마치 두꺼운 벽을 때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다음 순간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보이지 않는 손에라도 들린 것처럼 락비오의 거대한 몸이 바닥으로부터 한 뼘 정도 붕 떴다. 그러더니 맞바람을 맞은 연처럼 뒤로 스르륵 밀려갔다. 좀 전 같은 폭 발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 어,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멈춰!!!”

급당황한 표정으로 락비오가 외쳤다.

‘금강반탄신공’이 듣지 않다니, ‘강순천갑’이 작동하지 않다니!

무적의 갑옷이라 할 수 있는 ‘강순천갑’은 명백히 공격을 받고 있는데도 여전히 침묵한 채 그대로였다. 이대로면 이제 한 치만 더 뒤로 물러나면 금을 넘게 된다. “이, 이게 무슨……. 천근추!”

락비오는 급히 천근추를 발휘해 붕 떠 있는 몸을 땅에 내려놓으려 했다. 그러나 천근추를 발휘했는데도 몸은 그대로 한 뼘 정도 뜬 채였다. 게다가 공중에 떠 있는 데도 발바닥에서 반동이 느껴졌다. 무언가 묵직한 것이 그의 발을 받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압! 당할까 보냐!”

그는 더욱더 내공을 끌어올려 천근추의 위력을 배가했다.

쿵!

다행히도 이번에는 효과가 있었다. 청석 바닥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그는 겨우겨우 바닥에 내려앉을 수 있었다. 그러나 비류연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지워지지 않 은 채 그대로였다.

미소 띤 얼굴로 비류연이 선언했다.

“저런. 내가 이겼네요.”

놀란 락비오가 자신의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어, 어느새…….?

이미 그의 발은 금 뒤로 반 보 물러나 있었다. 명백한 그의 패배였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충격은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이 기술은 대체 뭐냐?”

마치 산들바람에 실려 옮겨진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냥 단순한 격공장(隔空掌)이죠.”

격공장.

허공을 격해서 임의의 한 점에 충격(장력)을 전달하는 장법으로, 이른바 장풍이라 불리는 무공이다. 산을 격해 건너편의 소를 친다는 상급 발경법 격산타우(隔山 打牛)의 최상급 단계로, 벽이나 사람이나 철판이나 흙이나 물이 아닌 공기를 매질로 삼아 힘을 먼 곳의 한 점으로 보내는 기술인 것이다.

“이, 이런 격공장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비록 격공장이 최절정의 고수들만이 쓸 수 있는 상승의 발경법이긴 하나, 그는 어떤 충격도 느낀 기억이 없었다. 외부의 충격을 받았다면 강순천갑이 어김없이 반 응했을 터였다.

“아, 그건 댁이 너무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아서 말이죠. 손을 대면 안 될 것 같더라고. 그래서 손 안 대고 댁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 전체를 옮겨 버린 거죠. 이른바 공간째로 옮겨 버린 거라고나 할까요?”

그 설명에 락비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공간째로 옮겼다고? 말도 안 된다. 그런 게 어찌 가능하단 말이냐?”

비류연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이거참, 당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좀 곤란한데.”

그 말에 락비오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긴 직접 보여주는 것 이외에 어떻게 더 명확히 증명할 수 있겠는가. 락비오는 단순한 만큼 승복해야 하는 것엔 승복하는 사 내였다.

“조, 좋다. 이번에는 내가 졌다.”

“잠깐, 이번에는이라니?”

기묘한 불안을 느낀 비류연이 항의했다.

“물론 이(二)회전이 있다.”

“이회전? 그런 이야기 들은 적이 없는데요?”

“난 너희 둘과 싸웠다. 이른바 너희에게 두 번의 기회를 준 거지. 실제로 저쪽의 형씨는 졌고.”

유구무언인 효룡은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친구의 발목을 잡다니……. 너무나 분하고 부끄러웠다.

“그러니 나에게도 두 번의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어? 그래야 공평하지.”

“이런이런, 여기 공정한 판관 나리 한 명 나셨네요.”

비류연이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며 투덜거렸다. 그때였다.

“닥쳐라! 난 판관 따위가 아니다!”

락비오가 일갈했다. 대청 서까래가 부르르 진동할 정도로 엄청나게 큰 소리였다. 너무 시끄럽다 보니 비류연과 효룡도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호오? 그냥 지나가는 말이었을 뿐인데 왜 그렇게 과민하게 반응하실까? 뭐, 찔리는 거라도 있나요?”

미간을 찌푸리며 비류연이 다시 한 번 구시렁거렸다. 힐끗 본 락비오의 얼굴은 불에 달군 석탄처럼 시뻘겋게 변해 있었고, 호흡도 상당히 거칠었다.

“난 판관이 아니다. 난 판관이 싫다.”

“아니, 그건 또 왜요? 범법 예비생도인 흑도 출신이라서?”

락비오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아니, 우리 아버지가 그 빌어먹을 판관이었지.”

정진정명한 흑도의 유망주라 할 수 있는 락비오의 아버지가 판관이었다는 사실에 비류연과 효룡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난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주제에 정의를 떠드는 그자들을 혐오할 뿐이다. 그놈들은 무력할 뿐이야.”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는 락비오를 향해 비류연이 다시 머리를 북북 긁으며 말했다.

“자자, 진정해요, 진정. 왜 그렇게 판관을 혐오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도 없지만, 지금은 사실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아요. 난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내 가 두려워서 자꾸 미루는 게 아니라면 빨리 이회전을 하는 게 어때요?”

순간 락비오의 두 눈에서 한광이 번뜩였다.

“오냐, 빨리 죽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지.”

삐이이이이이익!

락비오가 손가락을 입에 물고 휘파람을 불자 건물 양편의 문이 열리며, 그곳으로부터 무장을 한 같은 복장의 무사 수십 명의 일사불란하게 달려들어 와 벽 양옆에 가지런히 섰다. 모두 가슴에 십(+) 자가 수놓아져 있는 그들은, 한번 훑어본 것만으로도 족히 팔십 명은 되는 듯했다.

“열어라!”

건물의 네 모퉁이에 있던 무사들이 여럿이 힘을 모아 줄을 당기자 그그그긍, 하는 소리와 함께 막혀 있던 천장이 양옆으로 열렸고, 그 안에서 무언가가 매달려 있 는 것이 드러났다. 그곳에는 무척이나 무거워 보이는 거대한 석괴(石塊)들이 쇠사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준비가 모두 끝나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 며 약간 질려 있는 비류연과 효룡을 향해 락비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석괴압살관에 온 걸 환영한다.”

육중한 석괴들은 사람의 몸보다 훨씬 크고 거대했다. 저런 게 만일 피와 살로 된 인간 위에 떨어진다면 단숨에 짜부라져 버리고 말리라. 얼마나 거대한지, 그것을 매달고 있는 쇠사슬이 끊어지지나 않을까 위태롭게 여겨질 지경이었다.

저런 위험천만한 걸 천장 위에 달아놓다니, 이놈들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게다가 대체 저런 위험한 걸로 뭘 어쩔 생각인 거지? 딱히 짐작가는 데가 없었다. 

“자, 이회전을 시작해 볼까.”

두 사람을 돌아보며 이번에는 락비오가 히죽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