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30권 1화 – 지령 그 일(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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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30권 1화 – 지령 그 일(一).

지령 그 일(一).

흑천맹의 모처.

사내는 은가면을 쓴 채 어둠 속에 조용히 서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마천각주라 불렸고, 또 다른 이들에게는 임시 흑천맹주라 불리는 자. 아주 소수의 몇몇에게만 그 진짜 명호로 불리는 사내가 보고서에서 손을 떼며 조용히 되물었다.

“‘그 녀석’이 산에서 내려왔다고?”

산에 틀어박혀서 좀처럼 내려오지 않던 ‘그’가, 술과 여자와 무공을 벗 삼던 한량 생활을 버리고 하산했다는 것은 오랜만에 흥미를 돋우는 내용이었다.

“네, 주인님. 곧 무창에 도착할 예정으로 보입니다.”

부복한 채 주인에 대한 절대 복종의 예를 취하고 있는 이는 얼굴에 철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바로 마천십삼대 제십일대 대장 은신무영존 철가면이었다.

“갈효혜· 역시 그녀의 짓인가? 아니면 칠성좌(座) 소집 신호를 본 탓일까?”

생각해 보면 후자일 리는 없었다. 칠성좌의 일인이 아닌 그가 굳이 그 소집에 즉각 응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그의 오지랖이 갑자기 넓어졌다고 가정하더라도 하산 시기는 너무 빨랐다. 그렇다면 일정을 당긴 이가 중간에 존재한다는 뜻이었고, 그런 일을 획책할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가 어디 있는지 아는 이조차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이토록 예상외의 방법으로 발 빠르게 움직일 자라면.

결국 답은 하나다. 갈효혜, 신마팔선녀 중에서도 지혜 주머니라고 불리는 그녀라면 충분히 일을 꾸미고도 남았다.

“어쩐지 내가 흑천맹주와 마천각주를 겸임한다고 해도 크게 반발하지 않더니, 이 때문이었나? 내세울 장기 말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서? 재미있군.”

은가면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은존은 화들짝 놀랐다. 그의 주인이 저런 식으로 웃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즐거워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드디어 그 여자들이 아끼던 비장의 패를 내놓았군.”

걱정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는 그의 주인이 무언가를 걱정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주인은 다른 이들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존재였지, 남에게 공포를 느끼는 그런 종류의 존재가 전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주군?”

잠시 긴 침묵이 돌아왔다.

“일단 면담 일정을 잡도록 하지. 만들어둔 애들로 전언이나 보내고.”

“수배해 놓겠습니다만, 아마 그와의 면담이 영원히 취소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여기 오기 전에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고작 그 정도라면 내가 직접 상대할 가치도 없지 않겠느냐?”

은가면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콰지지지직.

들고 있던 두루마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빙글빙글 회전하더니 하나의 점으로 빨려 들어가듯 은가면의 손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곧 푸스스, 그의 손아귀에서 검은 가루가 흘러내렸다.

가볍게 삼매진화를 일으켜 모두 태워 버린 것이다.

“존명.”

은신무영존 철가면이 고개를 깊이 숙이며 인사한 다음 어둠 속에 녹아들 듯 물러났다.

“만일 이곳까지 올라온다면………….”

홀로 남은 은가면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때는 조금 기대할 수 있겠지. 아주 조금은.”

어쩐지 그런 일이 생기기를 바라마지 않는 듯한 그런 말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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