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3권 14화 – 긴급 회의

비뢰도 3권 14화 – 긴급 회의

긴급 회의

거대한 원형탁자를 둘러싸고 도합 8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모두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 내는 것을 보니 일신에 한가락하는 범상치 않은 무공을 지닌 인물들임이 분명했다.

자단목으로 제작된 시가 은자 22냥의 가격이 책정되어 있는 값비싼 원탁을 둘러싼 8명 이외에도 상석에는 3개의 자리가 놓여 있었고, 그 중 2개의 자리는 이미 주 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빈 곳은 중앙에 놓인 가장 화려한 의자 하나뿐이었다.

자색 원탁을 둘러싸고 있는 8명의 인물들의 기운 또한 범상치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빈 공석 좌우를 차지하고 있는 2명에 비하면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 만큼 그 2명의 기운은 대단한 것이었다.

공석 우측에 자리한 인물은 수려한 용모에 차가운 인상을 풍기는 백의 귀공자로 손에는 한 자루의 섭선이 쥐어져 있었고, 공석 좌측에 위치한 사내는 특이하게도 3자루의 검을 등에 메고 있는 청삼 공자였다. 그 둘의 양 소매에는 똑같은 용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둘 다 영광스런 구룡의 일인이라는 표시였다.

그 둘이 지금 회의를 주도하고 있는 듯했다. 가장 중요한 자리가 비어 있기는 했지만 그 자리가 채워질 거라고는 거기 있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 자리 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비어 있는 것이다. 장내가 정돈되기를 기다렸다는 듯 백의 귀공자가 입을 열었다. 그는 지금 이들 8명에게 알릴 중대한 일을 가지고 있었 다.

“그럼 긴급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백의 공자가 선언했다. 그의 선언이 끝나자마자 화산파 출신의 화산일선녀 정하경이 자신의 궁금증을 입에 담아 보냈다.

“갑자기 저희들을 긴급 소집한 이유가 뭔가요? 군사.”

그들은 백의 공자를 군사라 칭하고 있었다. 그는 그들 조직에 있어서 두뇌와도 같은 역할을 수행해 왔고, 앞으로도 그보다 더 뛰어나게 일을 수행할 만한 사람이 없는 한 그는 그들의 군사가 될 것이다.

“군사라뇨? 그건 과분한 칭호로군요. 그냥 부회주라고 부르면 됩니다.”

군사란 칭호가 너무나 거창하게 들렸는지 백의 공자가 손을 내저으며 사양했다.

“그럼, 부회주. 저희들을 급히 소집한 이유를 알고 싶군요.”

“갑작스런 일이었다면 사과하지요. 혹시라도 일에 방해가 되었나요?”

백의 공자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의 뜻을 비추었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당치도 않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렇게 급작스럽게 저희 구정팔검(九正八劍)을 소환하였다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호기심에 물어 본 것뿐이에요. 제가 감히 어떻게 천무구룡 중 일인이자 형산파의 두뇌라고까지 불리는 형산일기 백무영 공자의 능력을 의심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겠어요.”

“그건 참으로 든든한 말이군요. 저를 그토록 믿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말은 한없이 온건하고 부드럽지만 아무도 그의 앞에서는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다.

지룡(智)형산일기 백무영. 그의 말 한마디로 형산파 전(全) 문도의 걷는 길이 바뀐다는 형산파가 배출한 초기재였다. 앞길을 막막하게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담 을 쌓아 거리를 두어서는 절대 좋을 일이 없는 사람인 것이다.

“여러분을 이렇게 소환한 이유는 바로 2명의 남자에 대한 대책 때문입니다.”

백무영이 말했다.

“2명의 남자라면… 하나는 분명 칠절신검 모용휘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칠절신검 모용휘는 요즘 그들 사이에 떠오른 가장 큰 화두 중 하나였으며, 그들 구정회가 가장 신경을 써서 주시하고 있는 인물이므로 당연히 2명 중 하나일 것이 다. 그렇다면 또 다른 하나는 누구란 말인가? 모용휘 말고도 그들이 신경 써야 할 만한 존재가 또 있었는지 의문스러웠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 다.

“그는 바로 비류연이라는 사내입니다.”

“비류연?”

그녀는 잠시 그 이름이 가리키는 인물이 누군지 금방 떠오르지 않아 잠시 자신의 기억집을 들추어 보아야 했다. 그제야 그녀는 그 이름이 바로 올해 승천무제 특별 전형 시험에서 우승한 사람의 이름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아 낼 수 있었다.

“그는 올해 특별 전형 시험에서 우승한 자가 아닌가요. 그가 부회주까지 신경 쓰게 만들 정도의 인물이었나요?”

“그가 군사까지 신경 써야 될 인물인지 아닌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우리 구파의 명예를 실추시킨 놈임은 분명합니다. 그에 대한 제재 조치가 따르지 않는다면 사람 들이 우리를 깔보게 될지 모릅니다. 특히 팔가회와 군웅문 쪽에서 말입니다. 그런 굴욕을 어찌 감수할 수 있겠습니까.”

비류연이란 이름이 거론되자 유달리 신경이 날카로워진 화산파 출신의 풍매검(風梅劍) 유규선이 언성을 높였다. 올해 특별 전형 시험에서 비류연에게 턱주가리를 얻어맞고 하악 분쇄 골절을 일으킨 사람이 바로 그의 동문 사제였으니 그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때 당한 사제는 아직도 죽과 물로 나날을 연명하고 있었다. “맞습니다. 그놈의 처우를 빨리 결정해야지만 관내에서의 우리의 위신이 설 겁니다. 때마침 저쪽의 행동은 실패로 돌아갔으니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비류연에게 두 번째로 무참하게 깨진―그 사람은 사지가 각기 꺾일 수 없는 방향으로 뒤틀어져 버렸다.―사제를 보유하고 있는 점창파의 파쇄검 역상 한도 함께 거들고 나섰다.

두 사람의 분통으로 회의가 약간 궤도를 벗어나려 하자 궤도를 바로 잡아 줄 필요성이 있었다.

“자자, 진정하세요. 물론 그를 그냥 놓아둘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떨어진 위신을 세우지 못한다면 어찌 정통 명문 구파의 후예라 칭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문 제는 그가 자꾸 이상한 인물들과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누굽니까?”

화산파의 유규선이 물었다. 그는 검술은 뛰어난데 성격이 급한 게 흠이었다.

“바로 쌍귀입니다.”

그가 말한 쌍귀란 천무쌍귀영 당철기와 천소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좌중들의 얼굴에 노골적인 불쾌감과 놀람이 뒤섞여 떠올랐다.

“그 사고뭉치들과 만났단 말입니까?”

점창파의 역상한도 놀라 되물었다. 백무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놀라긴 이릅니다. 이 정도에 놀라다간 그가 들어간 동호회 이름을 안다면 기절초풍할지도 모르겠군요.”

“설마!”

정하경의 화사하던 얼굴이 단번에 굳어졌다. 생각하기도 싫은 불쾌한 곳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가급적이면 자신의 귀에 그 이름이 들어오지 않았으면 하고 그녀 는 개인적으로 바랐다. 하지만 백무영은 잔인했다.

“예. 바로 애소저회입니다.”

“그건 무척 성가시고 불쾌한 일이군요.”

정말 최악의 사태였다. 일이 가장 최악으로 풀릴 때나 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그가 진성곤 임성진과 비연태와도 만났다는 얘기로군요.”

이제껏 잠자코 있던 청성파의 소천군이 말했다. 그도 구정팔검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검혼회 사대 검주이면서 구정회 구정팔검인 것이다. 그에게는 어제 예기치 못한 이유로 임성진의 도움을 받은 싫은 기억이 있었다.

“바로 그렇습니다. 일이 더 이상 꼬이게 되면 아무리 나라고 할지라도 그 엉킨 실타래를 완벽히 풀 수 있다고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겐 발 등에 떨어진 불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백무영이 말했다.

“칠절신검 모용휘 말이군요…….”

드디어 자신이 바라던 화제로 이야기가 넘어가자 정하경이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애소저회 같은 불쾌한 이야기보다 훨씬 발전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좀 과장하자면 우린 지금 매우 심각한 위기 상황에 몰려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군웅팔가회(群雄八家會)에 밀려 패배의 고배를 마시는 수모를 겪을지도 모릅 니다.”

“설마 진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믿진 않아요.”

정하경의 말처럼 군웅팔가회에게 전통을 자랑하는 자신들의 구정회가 밀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는 한 사람도 없었다. 지난 10년 간 각고의 노력 끝 에 오직 우승만을 이어 왔다. 이제 와서 선배들의 피땀어린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과오를 범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세상사란 모르는 거지요.”

은근한 어조로 백무영이 말했다. 그들의 속을 한번 떠보려는 행동이었다.

“말도 안 됩니다. 어떻게 군웅팔가회 같은 떨거지들한테 전통과 정통을 자랑하는 저희 구정회가 우승을 도난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기우는 거두어 주십시오.” 곤륜파의 구양진이 핏대를 세우며 열변을 토했다. 하지만 백무영은 다시 은근 슬쩍 발을 한 발짝 뒤로 뺐다.

“아닙니다. 그런 오만이 패배를 부를 수 있는 가장 큰 원인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저쪽도 전통 있는 명가의 자손들이자 이름 높고 재능 출중한 강호 백도의 후기 지 수들입니다. 그런 그들을 편이 다르다 해서 깔보는 건 좋지 못한 버릇입니다.”

말은 바른 말이지만 신기하게도 바른 말에는 듣는 사람을 발끈하게 하는 신비한 힘이 깃들여 있는 모양이었다.

“부회주의 그런 태도야말로 너무 소극적인 게 아닐까요?”

구양진의 반격에도 백무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될 줄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유유자적이었다. 너스레를 떨 여유까지 있는 모양이었다. 백무영이 겸연 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냉철한 인상의 그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저도 구 소협의 말에 동감입니다. 그런 모습은 전혀 부회주답지 않아요.”

항상 냉철함을 잃지 않던 정하경도 오늘따라 왠지 소극적이고 위축된 행동을 한다고 느꼈다.

“이런 이런, 오해를 사고 말았군요. 전 지금 구 소협의 부주의함을 책망하자는 게 아닙니다. 더욱이 소극적이라니요. 전 그저 상대를 인정해 줄 줄 알아야 한다는 거죠.”

쓴웃음을 지으며 백무영이 정하경을 달랬지만 그녀는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흥! 이젠 소극적이다 못해 아예 소심하시기까지 하군요. 실망했습니다.”

그녀는 완전히 토라져 버렸고, 수습할 길이 없는 것 같았다. 정하경과 백무영의 대립으로―거의 정하경의 일방적인 공격이었지만ᅳ장내의 분위기는 어색한 침묵 의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래서인지 누구 하나 의견을 제시할 분위기가 형성되지 못하고 있었다. 심연 속에 던져 넣은 철괴 덩어리처럼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제대로 된 의견 따위가 나올 리 있겠는가.

분위기가 침체되다 보니 백무영은 분위기를 환기시켜야 할 절실한 필요성을 느꼈다. 이래서는 회의 진행이 무척이나 어렵게 될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럼 긴급 회의를 소집한 의의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회의 속행을 위해 정하경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자, 칠절신검 모용휘는 그가 이곳에 입관하기 전부터 무림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름입니다. 아무리 소문이 과장되었다 해도 그에 관한 소문을 종합한 결과를 보 면 오히려 소문이 부족한 감이 있다고 여겨질 정도의 인물입니다. 그런 그를 무시한다는 것은 온당한 처사가 못 되지요.”

그리고 자신들은 지금 그 용을 포획 내지는 제거해야 하는 용잡이인 것이다. 마지막 말은 그녀를 위한 말이었다. 그녀를 달래고 어르기 위한 말. 그녀의 기분을 상 하게 했다가는 재수습하는 데 엄청난 노력과 인내가 요구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백무영은 차마 그 끔찍한 사태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의 존재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우리 구정회 최고위가 모여 앞일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아직 1학년 애송이입니다. 이래서야 마치 우리 들이 지레 겁먹고 대책 회의를 열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매우 불만스런운 얼굴로 형산파 출신의 정수형이 말했다.

“대책 회의라고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그가 누군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그래 봤자 1학년 신입 관도 아닌가요?”

“쯧쯧, 너무 성급하시군요. 그가 누구의 손자이며 후계자인지 벌써 잊었습니까?”

백무영이 한 가지 사실을 상기시켜 주자 그제야 그녀의 얼굴이 당황하며 일그러졌다. 그녀는 자신이 그 동안 강호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를 잊고 지냈다 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러자 그녀는 더 이상 백무영의 의견에 토를 달 수가 없었다.

“제가 너무 성급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하겠군요. 그는 어쨌든 그분의 손자이니깐 말입니다.”

정하경은 순순히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백무영은 살짝 미소 지어 보이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렇다고 너무 자책하지는 마세요. 그럼 제 마음이 아프니까요. 우리 측으로서는 매우 애석하고 통탄스럽게도 그는 그분의 가장 아끼는 손자이자 후계자입니다. 그리고 그분에게서 나오는 그 대부분의 애정은 핏줄보다는 그 재능에 기인한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물증도 있지요. 그렇다면 그가 월반 수업을 미리 받았다 해도 틀린 생각은 아니라고 여겨지는군요.”

“그렇다면 부회주께서는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하고 있다는 겁니까?”

화산파의 유규선이 끼여들며 물었다.

“설마라고 생각되고, 또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가정입니다. 하지만 만일 재수 없이 운 나쁘게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번에 정말 엄청난 노력과 무던한 애 를 쏟아 부어야 할 테니까요. 절대 우리 측 입장으로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이번 삼성제(三星祭)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군.”

여지껏 백무영의 옆에 앉아 침묵으로 일관하던 청흔이 입을 열었다. 그는 무당파 출신의 초기재였다. 회주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당할 수 없다는 검도 고수였다. 백무영 자신도 무학 방면에 있어서는 한 수 접어 주는 처지였다. 아직 방관자적 자세를 다 버리지는 못했지만 그는 백무영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정확히 알고 있 었다.

자단 목제 원탁을 둘러싸고 있는 8인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다시 정하경이 말했다.

“그렇다면 부회주께서는 그가 태어나자마자 받은 개정 대법은 물론이고, 그분으로부터 내공전수까지 받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계시는 거군요.”

개정 대법이라는 것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유아에게 실시하는 일종의 기공술로, 전신의 기맥(氣脈)을 활성화시키고 근골을 바꾸어 무공을 익히기에 적합한 상승의 몸을 만드는 것이었다. 유아기에 시술받아야 그 효과가 극대적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인체 내에 속세의 사기(邪氣)가 끼여들어 기맥이 막히는 걸 막아 주 기 때문이다. 사기 침투 예방 차원에서 행해지는 시술이라 할 수 있었다.

즉, 일반인보다 훨씬 수월하게 서너 배는 빨리 내공 증진의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일종의 혈도 기맥 도로 공사라고 할 수 있다. 울퉁불퉁한 자갈길보다 뻥 뚫 린 포장 도로에서 더 빠른 이동이 가능하듯이 개정 세수 대법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기가 다니는 길을 다듬고 포장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받아 보길 원하는 기연(奇緣)인 것이다.

그러나 이를 시술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내공을 지닌 절정 고수 3인 이상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시술자 측에서 꺼려 하는 감이 있었다. 게다가 이 개정 대법 은 유아기에 받아야 시술도 훨씬 더 쉽고 그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일반 성인의 몸은 몸 안에 쌓이고 쌓인 축적된 사기와 노폐물이 기맥을 틀어막고 있기 때문에 그걸 뚫는 데 유아의 두서 배나 되는 엄청난 힘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시술 후에도 그 효과가 미비한 편이라 들인 노력이 다 허무해질 지경이었다.

그런 5만 명에 한 명 꼴로 받는다는 그 절세 대법을 태어나자마자 시술받은 사람이 바로 모용휘인 것이다. 그런데 거기다가 설상가상으로 내공전수까지 받았다면 최강의 방해물로 급부상하여 그들을 괴롭히기에 부족함이 없을 터였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는 천무삼성(天武三聖) 중 일인인 검성(聖) 모용정천 대협의 가장 아끼는 손자니까 말입니다.”

“그건 정말 최악의 가정이로군.”

구양진이 씹어뱉듯 말했다. 그 자신도 백무영이 그 정도로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었다. 그렇다면 부회주 겸 구정회의 두뇌인 백무영이 호들갑을 떠는 것도 이해 못 할 바가 아니었다.

“천무삼성 중 일인인 검성 모용정천 대협의 후계자 격인 칠절신검 모용휘가 대해 같은 검성의 내공까지 그 일부를 전수받았다면 사태는 정말 최악이라 할 수 있 군. 우린 우리의 명예 지키기에 급급하겠군. 언제 땅에 떨어질지 누가 알겠나.”

“그건 너무 성급한 판단이오. 좀 자중하시오.”

“천무삼성을 기리며 그 후계자를 뽑는다는 성격이 강한 삼성제에 검성의 후계자가 참가한다니 매우 흥미진진한 일이 아닐 수 없군요.”

화산일선녀도 거들고 나섰다. 상황을 좀더 악화시켜 보고 싶은 것일까?

“우리 구파가 비록 천무삼성 중에 단 일인도 배출하지 못했던 암울한 과거가 있지만, 그 치욕을 씻기 위해 지난 백 년을 바쳐 노력해 왔습니다. 그 노력의 결정체로 우리는 십 년 전부터 단 한 번도 삼성제에서 우승을 놓쳐 본 적이 없습니다. 이 불패의 명예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지켜야 합니다. 선배들이 쌓아 온 명성과 명예 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린다면 어떻게 사문과 선배들께 고개를 들 수 있겠습니까. 전 그런 용기가 생길 것 같지 않군요.”

“동의합니다. 우리는 더욱 수련에 정진하고 맹진해야 합니다.”

백 년 전 천겁 혈세의 암흑기에서 무림을 구한 천무삼성 중에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것은 구파로서는 씻을 수 없는 수치였다. 모두들 입으로는 쉬쉬하며 내색 하고 있지 않지만 그때 구파가 입은 정신적 충격과 피해는 천겁령에게 당한 것 못지 않게 컸었다.

그 충격은 가슴에 피멍으로 짙게 남아 있었다. 세월이 흐른다고 지워질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천겁령과 혈신이 사라진 그날부터 구파는 제자들의 수련에 박차 를 가했다.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기 위한 처절한 채찍질이 시작된 것이다. 정파의 기둥과 전통을 자처하던 그들이 받았던 수치를 씻어 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절치부심, 와신상담의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길 오십 년, 팔대 세가에 밀렸던 예전의 성세를 되찾은 구파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더 박차를 가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치욕과 오욕의 세월로부터 팔십 년, 그들은 팔대 세가와 다른 거대 문파를 억누르고 또다시 무림의 정점으로 떠오를 수 있게 되었다. 자만하고 있던 팔대 세가와 여타 거대 문파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기득권을 다 빼앗기고 빈털터리 신세가 된 이후에야 정신을 차린 팔대 세가와 명문정파는 제정신을 차리고 반격을 준비했지만, 그들은 이미 정상 고지를 향해 달 리고 있었으니 따라잡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리하여 상황은 반전되어 이젠 팔대세가 쪽이 구파의 그림자를 쫓아가는 꼴이 되어 버렸다. 다시 한 번 정상 탈환을 위한 술래잡기가 시작된 것이다. 팔십 년 전과 다른 것은 술래가 서로 바뀌었다는 것, 단지 그뿐이었다.

한 번 호되게 당한 전적이 있는지라 구파는 술래에게 다시 잡히는 전적을 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므로 열심히 그들의 뒤를 쫓아오는 술래에게 항상 잊지 않고 주 의를 기울이는 게 당연했다.

“그렇다면 모용휘는 검성전에 출전할 게 분명하군요.”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그렇다면 그가 삼성 대전에도 참가할 것 같습니까?”

“그것은 아직 확정된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태까지의 전례를 살펴보면 충분히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정 사실이라고 받아들여야겠지요. 그 가 아주아주 큰 부상을 당하기 전까지 말입니다.”

삼성 대전이란 무엇인가?

삼성제는 천무삼성의 무위와 업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창설된 대회이므로 각각 3분야로 나누어 실시되고 있다. 즉, 천무삼성인 검성(劍聖)과 도성(聖), 그리고 삼성 중 유일한 여성인 검후(后)의 후예를 자처하는 인물들을 뽑는 검성전, 도성전, 검후전 3부분으로 나누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어지는 제약도 많았다. 그 것은 기념 행사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물론 규모는 엄청 크다.ᅳ무기가 한정되어 있었다. 즉, 검성전에는 검만을 쓰는 사람들이, 그리고 도성전에는 도를 쓰는 사람만이, 그리고 검후전에서는 또 검을 쓰는 여성만이 참가가 허락되었다.

이렇게 제약이 가해지자 여기저기서 당연히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사천당가의 반발은 극심했다. 그들은 어떻게든 끼고 싶은데도 까다로운 조건과 제약이 그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아무리 해도 독(毒)과 암기(暗器), 그리고 정식 무기라면 고작 편鞭: 채찍)을 쓰는 그들이 끼여들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정 열적으로 물밑 공작을 시도했다. 명문을 자청하는 그들로서는 삼성제에서 소외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강호에서 사천당가가 차지하는 비중은 높았으므로 그들의 물밑 공작은 의외로 쉽게 먹혀 들어갔다.

“삼성제는 천무삼성의 정신을 잇는 것이지, 무기를 잇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라는 그들의 피를 토하는 열변에 무림맹과 천무학관 측에서도 받아들이기로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타협안이 마련되어 검성전, 도성전, 검후전은 존재하면서 삼성 대전이라는 무제한 비무 대회가 하나 더 생겨난 것이다.

누구나 참가할 수 있고 무엇이든 사용할 수 있는, 자신의 모든 기량을 쏟아 부을 수 있는 시합이었다. 가끔 삼대(三大) 성전에 참가한 이들도 이곳에 참가하는 경우 가 자주 있었다. 이것은 며칠 간격을 두고 비무 대회가 치러지는데, 삼성 대전이 가장 마지막에 치러지기 때문이었다. 검, 도, 후 전에 출전해 우승한 이들은 거의 모 두가 이곳에 참가하는 게 그 동안의 관례였다. 극심한 부상을 당해 거동이 불가능해지기 전에는 말이다. 하지만 학관 주최로 개최되는 대회이므로 살상은 절대 금지 였고, 심한 살초의 사용 또한 금지였다. 때문에 심한 중상을 입는 부상자는 적은 편이었다.

“이번 검후전은 누구를 밀어 줄 생각입니까?”

소림 출신인 일영의 질문은 백무영을 잠시 고민에 빠트리게 했다. 그쪽은 아직 명확하게 확정된 계획이 없었기 때문이다.

“글쎄요. 그건 좀 어려운 질문이군요.”

백무영의 시선이 화산일선녀 정하경 쪽을 슬쩍 향했다. 하지만 이내 시선을 거두고는 말했다.

“우선 상대 측에 누굴 내보낼까 하는 게 매우 중요한 일이겠죠. 우선 경계해야 될 인물은 칠봉의 일인인 남궁소소와 같은 칠봉인 검각의 그녀가 있겠지요. 지금으 로선 그녀 둘이 저쪽의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입니다. 아, 물론 저희 측 소저들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시 한 번 묘한 미소를 동반한 백무영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자신은 그녀를 믿고 있으니 자신을 실망시키지 말아 달라는 의미심장한 눈빛이었다.

“저희 측에서야 물론 구정 팔검 중 일인인 화산일선녀 정하경 소저가 나가시겠죠. 그리고 칠봉 중 한 명인 아미파의 진령 소저도 있겠군요.”

“그녀는 생각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진령의 이름이 거론되자 정하경이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평소 그녀에 대해 많은 불만을 안고 사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스스로 구정회를 떠나 이상한 조직에 가입했어요. 그 묵환회인가 뭔가 하는 이상한 데서 군웅팔가회 녀석들과 어울리는 그녀를 저와 대등하게 비교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아주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오른 모양이었다. 이럴 때 여자의 성질을 건드리는 것은 바보 얼간이나 하는 짓이기에 잠자코 있기로 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백무영은 순순히 동의했다.

“이번 회의의 목적은 그 2명에 대한 여러분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삼성제 준비에 좀더 심혈을 기울일 것을 부탁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방심은 금물입니다. 좀더 위기감을 느껴 주시고 수련에 정진하십시오. 올해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모두의 노력이 필요한 시기라고 여겨집니다. 회의가 끝나고 청 소협은 남아 주세 요. 따로 할 말이 있습니다.”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청삼 공자 청흔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청 소협은 백무영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구정회의 무를 담당하는 기둥 삼절검 청흔을 가리키 는 말이었다. 공식적인 자리였으므로 호칭에 신경을 쓴 것이다.

긴급 소집된 회의가 끝나고 모두들 각자 맡은 바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를 떴다. 텅 빈 방 안에 남은 건 삼절검 청흔과 형산일기 백무영뿐이었다. 조용 히 그리고 깊게 백무영이 청흔을 바라보았다.

“청흔,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백무영이 조용히 물었다.

“그를 상대하는 것 말인가?”

“내 생각이 기우였으면 좋겠지만, 자네가 아니면 힘들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군.”

“빗나간 적이 없는 자네 예감이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준비를 해야 되겠군.”

청흔은 순순히 인정했다. 아직까지 그의 예감이 빗나간 경우를 본 적이 없었고, 확률적으로 볼 때 다음 기회도 별로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자네의 네 번째 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네.”

청흔이라 불린 청년은 백무영의 그 소리에 흠칫했다. 그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졌다.

“설마 그 정도란 말인가?”

“충분한 가능성이 있네. 그러니 자네를 이렇게 따로 부른 것 아니겠나. 모두들 자네의 세 번째 검이 무섭다는 것은 잘 알지만, 자네의 네 번째 검에 대해선 그 존재 조차 모르니 말일세.”

“그걸 아는 것은 사부님과 자네뿐이야.”

그 외에는 그 사실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완성된 지도 얼마 안 되었거니와 쓸 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네의 우정 어린 믿음엔 언제나 감사한다네. 이런 차가운 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하는 사람은 자네 한 사람뿐이지.”

그의 주위에는 항상 그와 거리를 두려는 사람들뿐이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나의 믿음과 우정엔 변함없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게나.”

“고맙네.”

백무영은 진심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항상 그는 자신의 믿음이 되어 주었다.

“참! 왜 도성전에 대한 이야기는 아까 꺼내지 않았나? 우리 구파가 검에는 강하지만 도에는 약하다는 걸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그 사실을 백무영이 모른다면 이 세상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물론일세. 그 동안 항상 도성전에서 위기에 몰렸다는 사실과 우승을 향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해 왔다는 사실은 절대로 잊지 않고 있다네.” 갑자기 백무영이 청흔을 보고 씨익 웃었다. 그로서는 보기 드문 형태의 미소였다.

“대책이 있다는 말이군.”

“자네의 눈치도 많이 좋아졌군. 그녀가 생긴 덕분인가?”

갑자기 청흔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한눈에 그의 마음 속에 싹튼 당황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자네도 이제 우스갯소리를 할 수 있게 되었군. 이젠 조각상 신세는 한 발자국 벗어난 건가?”

자신을 당황하게 만든 백무영에게 청흔도 반격의 복수를 했다.

“하하! 내가 졌군.”

백무영, 자신이 그나마 마음을 열어 놓을 수 있는 친구라면 오직 청흔뿐이었다. 냉철한 이성으로 무장된 자신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오는 청흔이 백무영은 마 음에 들었다. 그의 결벽증이 청흔만은 용서해 주는 모양이었다.

“그 녀석은 요즘 뭐 하고 있나?”

여자 얘기가 나온 김에 청흔이 한 번 물어 보았다. 돌연 백무영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여전하네.”

백무영의 대답에 청흔도 안색이 굳어졌다.

“그래. 여전히 그녀의 주위를 돌고 있단 말이군.”

“그럴 친구가 아닌데 어쩌다 그 지경이 되었는지…….”

“점점 더 심각해지는 모양이군. 좋지 않은 현상이야.”

백무영은 도저히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 여자를 광적으로 쫓아다니며 호위라는 명목 아래 붙어 있는 그의 행동이 못마땅했다. 청성파 최고의 인재라 고 불리며 칭송받던 녀석이 뭐가 아쉬워 그런 행동을 한단 말인가. 그런 그의 행동이 백무영의 마음에 들 리 없었다.

“문제는 그 녀석 혼자뿐만이 아니란 얘기지.”

“자네도 그 얘길 들은 모양이로군. 빙봉영화수호대라는 호위대가 생겼다고 하더군.”

“그리고 그 수장이 그 녀석이지.”

“정말 할 일이 없었던 모양이로군. 그녀의 마성 같은 미모와 매력을 인정하긴 하지만 요즘 들어 너무 심한 것 같아.” 세 번을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녀를 받들겠다는 광신도들의 머리 속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그녀의 잘못이 아니지 않은가. 꽃의 잘못이라 해 봐야 아름다운 용모와 향기를 가졌다는 것뿐 아니겠는가.”

잘못이라면 꿀따러 갔다가 꽃에 홀려 정신을 못 차리는 벌들에게 있었다. 그도 굳이 꽃의 선천적인 아름다움을 탓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로 인해 야기된 결 과가 아쉬울 뿐이었다.

“그 향기와 미가 치명적인 독이 될 수도 있지.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말이야. 그녀를 완전히 우상처럼 숭배하는 모양인데, 누군가 그녀를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한바탕 대소동이 일어나겠군.”

“설마 그녀를 건드릴 만한 용기를 가진 자가 이곳에 있겠나?”

청흔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랬다간 광신도들한테 곧바로 저승행을 선고받겠지. 자네도 조심하게나.”

화제가 점점 더 어두운 구렁텅이로 직진하자 백무영은 황급히 화제의 고삐를 틀어 버렸다.

“걱정 말게. 나에겐 그녀가 있으니깐.”

청흔은 부끄러운 말을 잘도 당당히 했다.

“그건 정말 다행한 일이군. 여자 때문에 자네까지 잃고 싶지는 않아. 잃어버린 친구는 여자에게 스스로 홀린 그 녀석 하나면 충분해.”

“걱정 말게나. 그리고 나의 그녀는 다르다네.”

청흔이 호언장담했다. 이런 부끄러운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백무영 앞이라 가능했다. 다른 사람 앞이었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일이다. “어련하시겠나.”

백무영은 현명하게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