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3권 15화 – 천수탈혼 당평의 암기 강의 시간
천수탈혼 당평의 암기 강의 시간
“내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도록.
난 지금부터 여러분이 그 동안 품고 있던
기존의 고정되고 편협한 상식을 무너뜨리고자 한다.
자신의 상식 붕괴에 심한 타격을 입지 않기를 바라며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이야기는 시작부터 거창했다.
“보통 사람들은 무협지에 나오는 이야기가 불가능할 거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렇게 운을 뗀 당평이 찬찬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 그렇습니다.”
학생들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지금 시간은 강호에 존재하는 108가지 암기에 대한 사색’이라는 시간으로 사천당문 출신의 천수탈혼 당평이 수업을 담당하고 있었 다. 오늘이 첫 수업이라 그와의 첫 대면이었는데, 깡마른 체구에 음침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볼 때 전혀 호감 가는 인상이 아니었다. 생긴 것만큼 성격도 괴팍하다는 게 주위의 공통된 평가였다.
“무림과 관련이 없는 일반인뿐만 아니다. 주위로부터 고수라는 소리를 듣는 자들조차도 그 일을 거짓말이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요.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주제는 꺼내 놓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되는 것 아닌가.
“노사님, 근데 무엇을 말입니까?”
이야기를 할 때 하더라도 화제는 명확하게 제시해 주어야 되지 않겠냐는 항의였다.
“어? 내가 얘기 안 했나?”
얼빵한 물음에 40명의 관도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흠,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안법(法)에 관한 것이다.”
흑판에도 또렷하게 오늘의 학습이 무공과 오감의 관계’라고 적혀 있었으므로 모두들 다 알고 있는 수업 내용이었다. 물론, 수업은 수많은 암기 수법에 관한 대응 책과 사용법을 익히기 위한 시간이었다.
“보통 무협지를 보거나 타인에게서 전해져 내려오는 고수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사람들은 보통 한 가지 사실에 의문을 품게 된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바로 시간과 사고의 괴리다.”
“…..?”
관도들은 아직 뜬구름 잡는 식의 당평 노사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자네들도 모두들 한 번쯤 느낀 바가 있을 것이다.”
당평 노사가 다시 한 번 좌중을 둘러보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제부터가 본론이기 때문에 좀더 관도들의 집중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모용휘는 여전히 열심히 적극적으로 지필묵을 소모하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본 당평 노사의 입가에는 매우 만족스런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진정한 학생의 태도는 바로 저런 거야.’라고 주 장하고 싶은 미소였다.
“어떻게 분초를 다투는 대결장에서 그렇게 길게 생각할 수 있는가? 어떻게 목에 칼이 섬광처럼 날아오는데 상대의 초식과 무공을 판단하며 열심히 고민할 수 있을 까?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것은 거짓말이 아닐까?”
그제야 관도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를 표시했다. 그 점은 누구나 한 번쯤 무협지를 보면서 가져 보았을 만한 의문이었다. 특히, 인기 있는 절대 고수 전집(全 集)인 『천무삼성무록(天武三聖武錄)』이나 태극신군 무신 혁월린에 대해 다룬 인기 절정의 책 『무신절대기(武神絶代記)』를 읽으면 그런 대목이 많이 나온다는 것을 모두들 잘 알고 있었다.
이 시대 강호 무림의 문학이라 하면 전대 고수들의 일생이나 행적을 기록한 서책이 대부분 주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 특히 인기가 있는 게 백 년 전 천겁령의 마영 (魔影)에서 무림을 구한 태극신군 무신 혁월린과 천무삼성에 대해 다룬 글들이었다. 그들에 관해 수많은 작가들이 쓴 수많은 종류와 제목의 이야기들이 존재했다. 누구나 소싯적에 한 번쯤 필독해 보았을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당평 노사가 엄숙히 선언했다. 이런 옛 사실들을 기록한 무협 문학에 나오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 속의, 특히 분초를 다투는 생사의 격전장이나 비무에서의 주인공 은 왠지 느긋하다. 평범한 고수 – 고수는 이미 비범한 것 아닌가? 의 검이 눈 앞에 놓인 나무를 열여섯 동강을 내는 데는 한 번의 눈 깜박임이면 족하다.
“구두 서술을 통해 완성된, 가장 신빙성 있는 이야기로 인정받고 있는 일필읍천 진서월의 『천무삼성무록』 중 검성편을 짧게 인용해 보자.”
후에 천무삼성의 일인으로서 검성(劍聖)으로 추앙받은 신검협 모용정천이 척혈마검 초개현을 우연찮게 만난 건 장강의 나루터에서였다.
가증스런 악의 무리 중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던 척혈마검은 그 당시 매우 잘 알려진 천겁령의 중견 고수로서 정천맹의 젊고 힘이 넘치는 신(新) 기수 신검협 모용 정천을 두 눈 뜨고 용납할 수가 없었다. 수많은 정파 무림의 기개 넘치는 용봉 기재들의 피를 수십 동이는 퍼먹은 전적을 자랑하는 척혈마검 초개현의 저주스런 마 검척혈(血)이 피를 부를 준비를 하며 그자의 손에 잡혔다. 비겁하고 치사하며, 게다가 음흉스럽기까지 한 천겁령의 졸개답게 척혈마검 초개현은 예고 없는 공세 를 감행해 왔다.
“혈파검취(破劍聚)!”
선혈처럼 붉은 검기가 그의 저주스런 마검에서 뿜어져 나오며 떠오르는 태양 같던 신검협 모용정천의 생명을 위협했다. 하지만 신검협 모용정천은 천겁령 졸개의 치사한 검법에 동요되지 않았다. 그는 신중하게 대응하기 시작했다.
‘16개의 변화. 그 중 10개가 실초, 4개가 허초, 2개가 가변초로군! ‘
개자식 척혈마검 초개현이 펼친 치사한 검법은 수많은 정파 기재들의 성혈을 부른 가증스런 마검법 천겁령의 독자적인 검법 혈파검이었음을 신검협 모용정천은 파악했다. 또한 그의 신안(神眼)은 가증스럽고 저주스런 그 검법의 정체를 밝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척혈마검 초개현의 허점 또한 꿰뚫어 보았다.
‘으흠! 자세히 살펴보니 어깻죽지 밑이 비어 있군.’
허점을 놓칠 만큼 신검협 모용정천의 검은 무디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가장 효율적인 공격은 자신의 은하유성검법 중 절초인 은하만린임을 판단한 그는 서슴없이 은하유성검법의 절초 은하만린을 있는 힘껏 펼쳤다.
“은하만린(銀河萬燐)!”
저주스런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며 척혈마검 초개현의 팔은 신체 외부로 떨어져 나가 버렸다. 다시는 저주스런 마검을 잡고 정파 기협들의 생명을 위협할 수 없는 꼴좋은 신세가 된 것이다. 그리고 당황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초개현에게 신검협 모용정천의 마지막 일 검이 가해졌고, 그의 저주스럽고 더러운 생명은 하늘로 돌려보내졌다. 초개현의 혼은 지옥 구경을 하기 위해 그의 몸을 떠나갔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절정 고수와의 싸움에서도 주인공 모용정천은 수만 가지 생각을 하며 검을 휘두른다. 그런데 이게 거짓말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가? 어떻게 사람이 찰나의 순간에 수만 가지 생각을 다 하며 싸울 수 있다는 말인가.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사실이다. 여기에 거짓은 없다.”
아직도 잘 못 믿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학생들을 둘러보며 당평이 말했다.
“노사님, 그렇다면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이유가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효룡이 만인의 궁금증을 대변해 손을 번쩍 들었다. 당평은 그런 효룡의 용기 있는 행동을 마음 속으로 칭찬한 다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물론이다.”
천수탈혼 당평의 본격적인 강의가 시작되었다. 자기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지 모용휘는 어느 때보다 열성적으로 필(筆)에 묵(墨)을 묻혀 지(紙) 위에 열심 히 놀리고 있었다.
“암기술 이하 모든 무공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것은 바로 눈이다, 눈! 안법의 단련이야말로 모든 무공 각 장의 기초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수련인 것이다. 눈은 정(情)과 기(氣)의 통로이다. 눈은 내면 세계와 외부 세계와 통하는 통로이기에 많은 혼탁한 기운들이 이곳을 통해 드나들 수 있다. 그리고 다양한 색채와 기기묘묘한 모양들은 우리를 현혹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내공 수련과 명상에 몰입하려 할 때 눈을 감는 것이다. 정신이 외면으로 향 하는 것을 막고 내면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 모두들 경험이 있으니 쉽게 이행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여기까지는 효룡도 이해가 가능한 부분이었다. 당평 노사의 강의는 계속되었다.
“눈을 뜨고 있으면 피로가 쉬이 오게 된다. 자신의 정신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활동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열린 시각을 통해 막대한 양의 정보가 우리의 뇌 속 으로 흘러 들어오고, 우리의 뇌는 좋으나 싫으나 할 수 없이 막대한 양의 정보를 처리하는 중노동에 시달린다. 그것이 피로로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그 러나 눈을 감고 있으면 피로는 쉽게 오지 않고 오히려 쌓여 있던 피로도 풀리게 된다. 한번 시간 잡아 해 보면 충분히 체험해 볼 수도 있는 일이다. 눈을 감고 있으면 정과 기는 내면의 세계에 갈무리된다. 정과 기가 내면의 세계에 축적되는 것이 용이해지는 것이다. 너희들 정도 수련을 쌓았다면 모두 이것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 이라 믿는다.”
물론 여기 있는 천자조 전원은 그러한 경험을 다 가지고 있었다. 평범에서 비범으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끔 이 단계에서 영영 정신 못 차리고 미쳐 버리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위험 요소쯤은 이미 각오하고 시작하는 일이다.
모두들 굳게 침묵한 채 당평 노사의 강의를 귀기울여 듣고 있었다. 당평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무공과 가장 연관이 깊은 감각을 꼽으라면 시각, 청각, 촉각, 이 3가지를 꼽을 수 있다. 눈이 세상과 통하는 창이듯 귀 또한 세상과 연결된 또 하나의 통로이다. 물 론 태양과 달, 물과 불과 바람과 흙의 음양 오행을 느낄 수 있는 촉각도 제쳐 둘 수 없지. 그러나 귀나 촉각은 눈과 달라서 조절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세상의 온갖 사 념들이 귀를 통해 들어와 우리를 혼란시킨다. 그러나 그런 것에 결코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잡념은 눈과 귀와 피부의 감각을 통해 우리의 몸 안으로 들어 와 마음을 혼란으로 몰아넣는다. 물론 맛있는 냄새나 황홀한 맛으로 미각과 후각을 혼란시킬 수도 있지만 이 3가지만큼 치명적이지는 않다. 이 혼란과 잡다한 상념 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명상이라는 것이 필요한 거다.”
안법 강의를 하다가 청각, 촉각으로 넘어간 비약된 강의는 갑자기 내용이 명상 쪽으로 흘렀다. 도대체 천수탈혼 당평이 하고 싶은 궁극적인 얘기가 무엇인지 아직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당평의 강의는 계속되었다.
“명상은 뇌리에 떠오른 수만 수억 가지의 상념들을 가지 치듯이 하나 둘 쳐 내어 종국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을 최고의 완성으로 본다. 우리의 몸과 그 내면은 신비하고 오묘하게도 거대한 소우주 그 자체이다. 인간은 그로 인해 끝없이 광활하고 거대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 에는 끝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깊고 광활한 궁극의 세계다. 내면의 관조(觀照)와 깨달음으로 정신은 끝없이 비상하여 빛보다 빠르게 찰나의 순간에 내면의 소우주, 이 끝없는 무한의 대지를 가로질러 신(神)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 내면의 관조와 명상을 통한 정신의 단련과 구도를 통해 우리의 정신은 날개를
달고 끝없이 비상하게 된다. 끝이 없는 내면의 소우주, 무한의 우주를 찰나의 순간에 끝없이 비상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육감을 뛰어넘는 궁극의 감각 ‘제7감을 얻 을 수 있게 된다.”
당평의 강의는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모용휘의 필기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비류연은 그가 어떻게 눈을 당평에게 고정한 채 붓만 따로 화선지 위 를 오자 하나 없이 놀릴 수 있는지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명상과 관조를 통해 정신을 단련하고, 시각을 포함한 오감을 극한까지 단련하고 육감을 벼리면 인체의 감각 기관이 최고조에 달해 새로운 또 하나의 감각을 얻을 수 있다. 깨달음과 수행이 병행되어야만 얻을 수 있는 궁극의 감각인 것이다. 자네들, 이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게 무엇인지 알고 있나?”
느닷없이 당평이 학생들에게 질문했다.
“빛입니까?”
효룡이 대답했다. 내 그럴 줄 알았다는 태도로 당평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의 속도다. 쉽게 생각해서 생각의 속도라고 보면 된다. 전신의 감각과 정신이 극한까지 단련되면 인간의 내면과 외면은 다른 시간을 가 지게 된다. 즉, 육체의 행동을 생각이 앞지르는 것이다. 사고의 물결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이 세계를 파악하고 그 정보를 우리의 뇌에 전달해 주면 우리 뇌는 그것 을 분석하고 판단하여 앞으로의 행동을 결정 짓는다. 난 그 경지를 가리켜 절대 영역, 초감각, 또는 천관(天觀)이라고 부른다.”
당평의 설명에 수많은 수련을 거쳐 온 그들도 다들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당평은 학생들의 불신에 좌절하지 않았다.
“이 경지에 다다르면 이 감각을 사용했을 때 세상의 시간이 느려지는 듯한 착각을 받게 된다. 우리의 정신이 빛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생기는 괴리감 이다. 우리의 몸은 마치 물밑 수백 장 아래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둔중하고도 묵직하게 느껴진다. 이 절대 영역 초감각 경지에 도달한 사람만이 내가 아까 예시로 든 이야기의 모용정천 대협처럼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초인적인 반응 속도를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사님께서는 이미 그 경지에 오르셨다는 얘깁니까?”
유심히 강의를 듣고 있던 효룡이 손을 번쩍 들고 당돌한 질문을 했다. 당평의 이야기가 마치 경험담을 말하는 것처럼 확신에 가득 차 있었기에 추측해 본 것이다. “아니. 나도 아직 절대 영역의 완전한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 애석하지만 아직 초입일 뿐이지. 하지만 천무삼성과 천관주님, 그리고 맹주님은 이미 예전에 이러한 경지에 올라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개인차는 있다.”
절대 감각의 초입이라 해도 범인들과는 하늘과 땅 차이의 실력이다. 일단 이 능력을 지니면 웬만한 공격에서는 상처를 입지 않는다. 게다가 더불어 초인적인 반응 속도까지 지니게 된다.
“또한 이 경지의 요긴한 점은 내공 수위와는 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즉, 내공의 큰 증진 없이도 감각의 수련만으로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건 정말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무공의 증진과 함께 필수적으로 달라붙는 내공의 증진 없이도 도달할 수 있는 경지라는데 어찌 구미가 당기지 않겠는가.
“이 경지에 도달하기까지는 그 전에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천관(觀)의 초감각 상태가 되면 전신 신경이 극한까지 날카로워지기 때문에 자칫 잘 못하면 미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절대 고수들도 항상 이 천관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정신이 붕괴해 버릴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인데… 여기까 지는 다 좋다…….?
“그런데… 할(喝)!”
천수탈혼 당평의 손에서 한 무더기의 비침(飛)이 빠른 속도로 뿌려졌다. 목표는 바로 비류연이었다.
이때 비류연은 한창 기온 온화하고 바람 상쾌하며 습기 쾌적한 대자연의 놀라운 조화에 감동하며 거의 반쯤 수면 상태의 명상에 들어가 있었다. 대우주의 의지(意 志)와 인체의 생리 활동을 당돌하게 거스를 만큼 비류연은 모질지 못했기에 순순히 대자연의 순리와 법칙에 순응하기로 하고 육체의 욕구에 따라 수면을 취하고 있 었던 것이었다.
대우주의 의지에 순응하며 화창한 대자연과의 친화를 꾀하는 비류연의 모습이 당평 노사의 눈에는 천인공노할 짓으로 비쳤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리하여 당평 노사는 자신이 왜 천수탈혼이라 불리게 되었는지 맛보기를 보여 주기로 결심하고 곧장 실행에 옮겼다. 자신의 피 토하는 열강을 들으면서 딴청을 부린 학생에 대한 무지막지한 징계였다. 천무학관에는 옥현진인처럼 온화의 극치를 달리는 인물도 있었지만, 당평처럼 과격하고 불같이 급한 성질을 지닌 노사도 있었다.
어쨌든 위험했다. 아무리 독이 발라져 있지 않다 해도 암기에 대해서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수탈혼 당평이 던진 암기인 것이다. 모순되게도 만일 당평이 암 기의 고수가 아니었다면 징계의 의미로 비침을 날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던진 암기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당평은 서슴없이 비침을 뿌린 것이다. 맞아도 비류연이 죽지 않도록 목표와 힘을 조절해 두고 있었다.
하지만 날아가는 수십 개의 비침의 예상 목표물인 비류연도 잠자코 있어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대로 앉아 산 채로 고슴도치 신세가 되는 것은 사양이었다. 세 상모르고 꿈나라 방문 기행문을 작성하는 것처럼 보이던 비류연의 손이 물 흐르듯 움직였다. 어느새 비류연의 눈은 떠져 있었다.
“이럴 수가!”
당평뿐만 아니라 교실 내의 모든 학생들이 함께 놀랐다. 비류연의 손이 허공 중에서 수십 개로 나뉘며 지척까지 날아 들어온 암기들을 모두 잡아챘기 때문이었다. 믿어지지 않는 묘기였다.
어지간한 충격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는 편리한 분뢰수가 있었기 때문에 비류연은 주저하지 않고 손을 놀렸다. 자신의 수업에서 한눈이나 팔면서 오침이나 즐기고 있던 불량학생 비류연이 설마 자신의 수법을 이토록 감쪽같이 쉽게 막아 낼 줄 몰랐던 당평 노사는 너무나도 놀라고 말았다.
“응? 무슨 일이시죠?”
비류연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뻔뻔스럽게 질문을 해, 당평 노사의 혈압을 대폭 올려놓는 쾌거를 거두었다. 하지만 당평은 체면상 자신의 당황스러움을 드러낼 수 는 없었다.
“어흠, 자네. 지금 내가 던진 비침이 모두 몇 개인가?”
가을 추수철 방아질하듯 쿵덕쿵덕 뛰는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며 당평이 물었다. 뭔가 꼬투리 잡을 게 없나 하는 심정으로 물어 본 말이었다. “64개입니다.”
망설이지 않고 비류연이 대답했다. 하지만 틀렸다.
“무슨 소린가? 64개라니? 난 그렇게 많은 비침을 던진 기억이 없네. 지금 누굴 속이려 드는 겐가?”
자신이 던진 비침의 수가 정확히 32개였음을 기억하고 있는 당평 노사는 내심 잘 걸렸다고 생각하며 비류연을 다그쳤다.
“하지만 64개가 맞는걸요. 확인해 보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비류연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흠집 하나 나 있지 않았고, 그것을 본 당평 노사는 또 한 번 크게 놀라고 말았다.
당평은 당장에 달려가 확인했다. 거짓말이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비류연의 손에 든 물건을 받아 본 당평 노사의 눈은 예기치 않은 경악으 로 물들었다.
“이… 이럴 수가…….”
당평 노사의 고개가 비류연을 향해 홱 돌아갔다.
‘괘씸한 놈!’
비류연으로부터 자신이 던진 비침을 받고 보니 놀랍게도 정확히 그 수가 64개였다. 비류연의 계산은 정확했다. 문제는 자신이 던졌던 비침의 길이가 전부 반으로 줄어들어 있다는 데 있었다.
“이… 이놈! 내가 아끼는 비봉침(飛蜂針)들을…….”
천수탈혼 당평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의 비봉침은 순은을 섞어 만든 것으로 침끝의 날카로움에 특히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었다. 비봉침은 그 크기가 작은 만큼 좋은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없이 세밀한 작업이 요구되었다. 그런데 그것을 무려 32개나 동강내 놓다니…….
당평 노사는 잠시 동안 허탈감과 분노, 그리고 놀라움으로 뒤섞여 말을 잃고 가만히 침묵했다. 비록 자신이 아끼는 비봉침의 종말은 마음 아픈 것이었지만 솔직히 감탄한 점도 없잖아 있었다. 설마 자신이 던진 비봉침을 그토록 정확하게 읽고 받아 낼 줄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비류연의 실력을 보고서 뭐라고 추궁할 말이 없었다.
결국 당평 노사는 비류연의 오침에 대해 내심 속을 끓이면서도 한마디 말도 못하고 수업을 계속했다. 비류연의 딴청 때문에 잠시 끊겼던 수업의 흐름은 다시 계속 되었다. 비류연 때문에 당황한 자신을 수습하기 위해서라도 당평 노사는 서둘러 수업을 속개했다.
“잠깐 불미스런 사태에 의해 수업이 지연되었다. 이 절대 영역의 초감각과는 다르게 세상에는 용안(龍眼)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용안이란 게 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일종의 예지안이다. 어찌 보면 절대 영역과 비슷하다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 성질은 전혀 다르다.”
“예지안?”
“그렇다. 혹은 독심안이라고 보면 된다. 이 절대 영역 천관의 초감각이 후천적인 특정 수련을 통해 궁극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용안은 선천적인 능력에 기 인한다 할 수 있다. 세상에는 상대의 마음이나 행동을 읽을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에 가득 차 있는 기운들과 정보 들을 무의식중에 해석하여 비록 짧은 순간의 앞이지만 짧은 미래를 예견하고 사람의 마음을 개인의 허락 없이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
당평 노사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런 사람이 정말 있습니까?”
순간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있다니, 믿기 힘든 일이었다. 만일 정말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남에게 패할 일도 없지 않겠는가.
“자넨 지금 나를 의심한다는 이야긴가?”
당평 노사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며 윤준호를 째려보았다. 그 눈은 점심 식사 거리를 눈 앞에 둔 독사처럼 날카로웠다.
“아… 아닙니다.”
소심한 윤준호에게 그의 시선은 너무 버거운 것이었다. 윤준호는 즉시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부정의 뜻을 표했다. 당평 노사의 예리한 안광이 그제야 조금 강도를 낮추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만일 다행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을까? 비류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습적으로 윤준호의 코 앞에 철침을 던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윤준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그리고 다시는 당평 노사의 말에 토를 달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직접적인 체험을 통한 인생의 산 경 험을 맛봄으로써 얻은 소중한 교훈이었다.
“비록 그 확률이 수백만 분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용안의 소유자는 분명히 이 세상에 존재한다. 그들은 비록 극소수이지만 만일 그들의 능력이 무공과 결합되어 나타난다면 그 결과는 정말 무시무시할 것이라 예상된다. 상대방이 다음에 사용할 기술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가 검을 든다면 그 위력이 어떻겠는가. 용안이 란 바로 그런 능력이다.”
암기 강의의 담당 노사인 천수탈혼 당평은 용안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었다. 전설이나 전래되는 설화에는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능력이지만 실제로 그런 거짓말 같 은 능력이 현존하는지는 아직 의문스러웠다. 하지만 그 정도의 인물이 확신하는 것으로 보아 정말 이 세상에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다음에 혹시나 용안의 소유자 를 우연찮게라도 만나게 되면 조심에 또 조심을 해야 한다는 신신당부로 당평 노사의 강의는 끝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