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비신검 전옥기
모든 학문이든 무공이든, 어떤 선(線)이 존재하는데,
그 선(線)은 노력만으로는 결코 넘기 힘든 어떤 경지의
경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 선은 꼭 하나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일 수도 있고 여럿일 수도 있다. 때때로 그 선이 하나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가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는 자신의 발목을 잡은 사람들도 부지기수였 다.
이른바 등용문(登龍門)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배움의 경계가 어떤 학문이든 나름대로 존재하는 것인데 특히 그 경계선이 중요시되는 곳이 바로 무학 분야였다. 그 선(線)을 넘기 위해서는 노력이나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천부적 자질과 재능, 운이 모두 따라 주어야만 겨우 가능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경계를 지나면 사람이 급속도로 줄어든다. 왜냐 하면 이 선을 넘은 사람들은 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범인(凡人)에서 초인(超人)으로 넘어가는 그 초입(初入)의 관문! 천무학관에선 오검룡이 그 첫 시작이다. 이때부터는 말 그대로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보통 어느 한 집단의 능력 분포를 살펴보면 어떤 곳이나 비슷한 양상을 띤다. 그것이 학문이든, 무공이든, 잡술이든 모두 마찬가지다. 이들 집단의 대부분은 가운 데가 볼록 솟은 언덕 모양을 이룰 것이다. 즉 중간이 제일 많고 최하위나 최고위의 실력자는 점점 밑으로 갈수록 그 수가 줄어드는 것이다.
천무학관의 실력 등급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2,000명 가까이 되는 관도들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오검룡 이상으로 제한되는 삼성무제의 참가자는 300명을 넘지 않는다. 그만큼 오검룡을 넘는 실력자의 수가 적다는 말도 되었다. 참가하지 않은 관도들까지 합쳐도 그 수는 아마 500명 이하일 것이다.
총 10단계의 검룡위劍龍位) 중에서 등급상으로는 정가운데에 위치하지만 실제적인 실력 분포를 따져 보면 앞쪽 4분의 3 지점으로 쏠려 있었다. 즉, 오검룡 이상 의 실력자는 2000명 가까이 되는 관도들 중에 4분의 1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총 4개 부문으로 나뉘는 삼성무제의 참가 분포도를 살펴보면, 우선 검성전(劍聖戰)에 사람이 제일 많이 몰린다. 전체 참가자의 5할에는 못 미치지만 4할 가까이 되는 128명의 인원이 검성전으로 대거 몰리기 때문이다. 정파에는 그만큼 검법을 수련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검후전 참가자가 제일 적다. 여관도의 수는 비율부터가 월등히 낮으니 당연한 일이였다. 그녀들이 오검룡 이상이 되는 것은 그만큼 요원한 일이기도 했다.
정리해 보면, 이번 삼성무제의 총 참가자는 총 284명으로 그 중 삼성대전 참가자는 64명이었다. 반면 검성전은 총 128명으로 다른 곳보다 월등히 그 수가 많았다. 제일 적은 검후전이 32명, 그 다음 적은 도성전에 각각 50명씩 참가하고 있었다.
계산해 보면 비류연이 삼성대전에서 우승하려면 총 일곱 번을 싸워 이겨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 중 한 번은 이겼으니 앞으로 여섯 번을 더 이겨야 삼성대전에 서 우승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한 번을 더 이기면, 그때서야 삼성무제 종합 우승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용휘는 비류연보다 한 번 더 많은 총 여덟 번 을 싸워 이겨야 검성전에서 우승할 수 있었다. 참가자가 많은 만큼 길이 더욱 험하기 때문이다.
이제 두 명 모두 겨우 첫발을 내딛었을 뿐이다. 아직 갈 길은 멀고도 험했다.
이렇게 갈 길은 멀고도 험난한 첩첩산중(疊疊山中)인데……. 문제는 본인이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것이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었다.
“케에에엑!”
비류연의 두 번째 상대인 무영각(無影脚) 조연일도 비류연의 묵금에 뒤통수를 얻어맞고 널브러졌다. 첫 번째 상대였던 단평이 맞은 부분과 똑같은 곳이었다. 그만 큼 주의력이 부족하고, 상대에 대한 정보 수집을 게을리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묵금의 희생자는 두 명으로 그치지 않았다. 저번의 추태(홍란의 관점에서)는 고의였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해 주듯이, 또 결코 그 승리가 운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듯이 묵금의 희생자는 늘어만 갔다.
세 번째 상대였던 용아조(龍牙爪) 진패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비무를 모두 본 탓인지 상당히 뒤통수에 신경 쓰는 모습이었다. 앞서의 상대처럼 꼴사납게 널브러지 고 싶지 않다는 의지의 표명일 것이다. 허나 그건 단지 꿈으로 끝내야만 했다.
“커억!”
진패는 내장이 꼬이는 듯한 충격에 허리를 꺾어야 했다. 비류연의 묵금이 그의 뱃속에 정확하게 틀어박혔던 것이다. 언제 날아들었는지 보이지도 않았는데, 어느 새 깨닫고 보니 그것은 이미 자신의 배속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의 용아조(龍牙爪)는 먹이를 한 번 물어보지도 못한 채 발치(拔齒: 이빨을 뽑다)당해야만 했다.
“흐헉!”
세 번째 상대인 소림사 일연의 상태는 더욱 안 좋았다.
그는 턱이 바스러지는 고통과 함께 눈을 까뒤집어야 했다.
악기(樂器)인지, 흉기(凶器)인지 이제는 심히 의심스러운 비류연의 묵금은 신기루처럼 그의 턱 아래에서 솟아올랐다. 휘두를 줄 알고 대비하고 있었는데, 그의 대 비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아래쪽에서 튀어 오른 것이다. 마치 지렛대처럼……. 소림 72절예가 빛을 발할 겨를도 없었다. 그도 역시 비류연의 상식을 뒤엎는 변칙적 인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네 번째!
“뻑!”
“크아악!”
괴상한 비명이 비무대 위에서 터져 나왔다.
“또야?”
“또구만!”
“쯧쯧! 어찌 되려고 저러는지. 설마 했던 진주언가의 파풍창언가영마저 저리 맥없이 당하다니!”
구경하는 사람마다 모두들 혀를 차며 한 마디씩 했다. 지켜보던 화산비천응 문일기의 얼굴도 살짝 찌그러진 채 펴질 줄을 몰랐다. 이 자리에 홍란이 없는 게 천만 다행이라 생각되었다. 천음선자 홍란은 자신이 한 번만 더 그런 꼴을 봤다가는 주화입마에 빠질지도 모른다며 보러 오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선택은 탁월했다.
“아차! 또 해 버렸군! 또 저지르고 말았다. 쩝!”
비류연이 씁쓸하게 말했다. 아아! 고의가 아니라고 외쳐 봤자 누가 믿어 줄 것인가.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모으던, 진주언가의 파풍창(破風創) 언가영은 대자로 꼴사납게 나자빠진 채 눈을 까뒤집고 있었다. 그가 쓰러진 곳에서 옆으로 반장(半 丈)도 안 되는 곳에는 그 유명한 언가묵창이 쓸모없는 막대기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주인의 손을 떠난 이상 그것은 현재 막대기 정도의 가치밖에 없었다.
비류연은 입맛이 쓸 수밖에 없었다. 원래 계획은 이런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음공을 주무기로 들고 나왔는데, 번듯하게 음공을 펼쳐서 우승을 거머쥐면 어디 덧나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 동안 비류연과의 비무에서 쓰러진 사 람 중 정진 정명한 음공으로 쓰러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강력한 타격을 뒤통수나 배 또는 턱으로 고스란히 받아들인 후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기절했던 것 이다.
그러니 진짜 음공을 사용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이야기가 성립되는 것이다. 해서 상당한 화제가 되었다. 그의 무공이 혹시 음공이 아니라 격금술(擊琴術)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까지 흘러나오고 있는데다, 그 동안의 격전으로 운수대통(運輸大通) 격타금(擊打琴)이라는 별로 우아하지 못한 별칭까지 얻었을 정도였다. 모용휘 의 무위에 가려져 빛을 못 보고 있는,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이야기였지만 만일 천음선자 홍란이 들었으면 길길이 날뛰었을 이야기였다.
과연 저 무식하고 찝찝한 연승 행진을 누가 막아 줄 것인가?
좀더 품위 있는 비무대회를 진행시켜 줄 인물로 세인들은 비류연의 다음 상대를 주목했다. 그라면 비류연의 이 어처구니없는 사기성 연승을 저지해 줄 수 있는 충 분한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팔비신검(八臂神劍 전옥기!
바로 비류연의 다음 상대자의 이름이었다.
팔비신검(八臂神劍) 전옥기는 점창파(點蒼派) 15대 제자 출신으로 여태껏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아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그 자신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명문 중의 명문, 구대 문파의 직전 제자로 들어가 무도의 비밀을 배워 왔으며, 비전의 일부를 계승하여 현재 남부러울 것 없는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지닌 팔 비신검(八臂神劍)이란 별호는 그의 빠르고 화려한 검법을 잘 나타내 주고 있었다. 팔이 여덟 개로 보이려면 얼마나 화려하고 변화무쌍한 검술을 펼쳐야 하겠는가! 게다가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천무학관에 들어와 지금은 그 어렵다는 승급 시험을 통과하여 육검룡이 되었다. 해서 그는 별로 남부러울 게 없는 사람이었 다. 게다가 그만큼 자존심도 높았다.
그에겐 불치의 병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천상천하 유아독존병, 혹은 명문 우월증이라고도 불리는 지독한 병이었다. 이 병의 병증은 환자가 매우 오만하며, 출신 이 비천한 (출신이 확인되지 못하거나, 대문파에 속하지 않으면 무조건 비천하다 보는 경향이 명문 제자들 중엔 가끔 있다) 사람들하고는 절대 어울리지 않으며, 그 들을 눈 아래로 내리까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 그는 당연히 비류연을 눈 아래 두고 있었다.
어차피 명문의 순혈을 이은 그에게 비류연 따위는 단지 운 좋은 1학년 애송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당연히 그는 자신의 승리를 12할 이상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 녀석은 단순한 1학년 애송이에 불과할 뿐이다. 나 같은 명문 제자에겐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애송이…….?
비류연이 어떻게 앞의 네 싸움을 끌어 왔는지는 그의 관심의 대상에도 들지 못했다. 비류연의 비무 내용이란 것은 어차피 웃자고 하는 이야기판이나 술자리의 흥 을 돋우기 위해 요즘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 중 하나일 뿐이었다.
역시 요즘 제대로 된, 양식 있는 천관도의 관심은 모두가 다 청흔과 모용휘에게로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만나면 하는 얘기가 모두가 다 그들 이야기뿐이었다. 게다가 여러 사람들이 주위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삼성제를 모독하는 비류연을 작살내라고 부추기며 헛바람을 집어넣는 바람에 전옥기는 상당히 기고만장해 있던 상태였다. 게다가 비류연은 이미 첫 시합 때 나예린을 아는 척 한 이후 거의 모든 남자들의 적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전옥기는 그런 오기를 부릴 용기가 생겨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본인은 전혀 인식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 일이 일어난 것은 비류연의 다섯 번째 시합이 있기 바로 하루 전날의 이야기였다.
“그럼 자네만 믿겠네! 하하하하!”
“그럼, 그럼! 나한테 맡겨만 주라고, 그런 출신도 모르는 애송이 따위야 한주먹감 아닌가! 어찌 감히 대점창파의 제자인 이 몸을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이제 운만 으로 이길 수 있는 단계는 훨씬 지났어! 그런 녀석이 4회전까지 올라오다니……. 이번 삼성무제의 수준이 많이 낮아졌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한 손에 술잔을 들고, 자신을 둘러싼 여러 사람과 신나게 잔을 부딪치는 사람이 바로 점창파의 후기지수, 다음 대의 장문인 재목으로 정평이 나 있는 팔비신검(八 臂神劍) 전옥기였다. 이곳은 송풍루(送風樓)라 불리는 음식점으로 남창 요식 업계에서는 꽤나 알아 주는 곳이었다.
“하하하! 이 친구! 역시 호방하구만. 내일은 자네만 믿겠네. 지금까지 그 녀석 때문에 날린 돈만 해도 얼만 줄 아는가? 나뿐만 아니라 그 자식 때문에 판을 망친 친 구가 한둘이 아니라네. 설마 파풍창(破風創) 언가영이 그토록 허무하게 창을 꺾을 줄 누가 예상했겠나!”
“우연일세, 우연! 그 자식이 운이 좋았던 거지. 내가 들은 이야기로는 아마 파풍창 언가영이 그 전의 시합 때 내상을 크게 입었던 모양이야! 자네들도 알지 않나? 언가영의 바로 전 상대가 추영신보(追影神) 이학림이었다네.”
전옥기가 말하자 모두의 얼굴에 ‘그러면 그렇지’하는 얼굴들로 변했다. 드디어 그들이 이해할 수 있고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들었기에 그들은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역시! 과연 그랬었군. 저번 시합에서 애송이한테 너무 쉽게 당한다 했더니……. 그런 사정이 있었군! 몸놀림이 귀신같이 빠르다는 추영신보(追影神步)가 상대였 으니 무리도 아니었지. 두 사람의 실력이야 박빙이 아닌가!”
술을 물처럼 들이키던 황소 같은 거구의 사내가 한 마디 하자 다들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언가영과 이학림의 비무는 비류연과 의 시합이 있기 벌써 3주 전의 이야기였다. 그 정도 기간이면 조섭에만 잘 힘쓴다면 웬만한 부상은 모두 다 회복될 기간이었다. 그렇기 위해서 반 년이란 긴 시간 동 안 삼성무제를 진행하는 것이 아닌가.헌데도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제대로 비류연이 실력으로 이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이학림에게 당한 상처 때문에 할 수 없이 승리를 내줬다고 비류연의 실력을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듣고 있으니 너무한 거 아닙니까? 보는 눈이 없군요!”
순간 술자리를 가득 메우던 웃음 소리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한껏 험담 중에 있던 이들이 어느새 눈빛을 날카롭게 빛나며 건방진 목소리가 튀어나온 방향을 주시 했다.
“누구냐?”
이마에 두 개의 띠를 교차로 맨 미청년이 당당하게 자신을 밝혔다. 그는 등 뒤에 쌍둥이처럼 똑같은 쌍검을 교차해 메고 있었다.
“소생은 효룡이라고 합니다.”
노려보는 전옥기의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효룡은 담담하게 그의 눈빛을 받았다. 전옥기는 자신의 앞에서도 태연하게 서 있는 효룡을 탐색하듯 한번 훑어보고 는 말했다.
일단 그가 밝혀낸 것은 우선 이 녀석은 구대 문파의 제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원래 그가 처음 보는 사람을 파악하는 방법은 바로 상대방의 출신 성분이었다. 그것은 그의 가장 절대적인 판단 기준 중 하나였다. 둘째는, 그가 팔대 세가에도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거대 명문 정파나 팔대세가 같은 거대 세력은 자신의 몸에 소속을 나타내는 독특한 표식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문자든, 옷의 색깔이든 예외는 없었다. 전옥기 그도 점창파의 제자로서 자주색 무복을 입고 있었다. 효룡의 몸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는 것으로 보아 별 대수롭지 않은 허접한 문파의 제자임이 틀림없다는 결론이 나름대로 나왔다.
그 다음 그가 생각한 것은 이래서 명문이 아닌 잡것들은 안 된단 말이야, 라는 오만방자한 생각이었다.
“보아하니 1학년생이로구나. 선배들이 하시는 말씀 도중에 끼여들다니 너무 건방지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사람을 깔보는 듯한 전옥기의 태도에 효룡의 쌍심지가 칼날처럼 세워졌다. 그의 입가에는 옅지만 비웃는 태도가 역력한 미소가 띠어졌다.
“그럼 선배라는 대단한 분이 본인을 앞에 두고 그렇게 모함을 일삼아도 된단 말입니까?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후배 보기에 낯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효룡의 말은 추호도 꿀림이 없이 당당했다.
“누가 본인이란 말이냐?”
지지 않겠다는 듯, 어디서 건방을 떠느냐는 듯 전옥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럼 저기 앉아 있는 저 사람은 누구란 말입니까?”
효룡의 손가락이 자신들 일행이 앉아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그곳엔 사태를 조용히 주시하고 있는 장홍과 그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윤준호, 그리고, 상황이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열심히 통닭을 뜯고 있는 비류연이 앉아 있었다. 일이 터졌는데도 열심히 음식물 절삭 분해 작업에 여념이 없는 비류연이었 다.
전옥기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설마 본인이 직접 곁에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술에 취하다 보니 중간에 올라온 비류연 일행을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다. 듣지 않는다면 모를까, 당사자가 듣고 있는데 그런 험담을 늘어놓는 것은 전혀 명문 제자답지 않은 행동이었던 것이다.
“류연! 자네도 뭐라고 한 마디 해 보게!”
효룡은 비류연을 돌아보며 말하다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음냠. 무가……, 마리……야? 우걱우걱!”
지금 비류연의 입 안에는 음식물이 가득 들어 있는데다, 그의 혀는 음식 맛을 보느라 정신이 없는 관계로 언어 구사에 사용할 여분의 능력이 없었다.
“그럼 당사자도 할 말이 없는 것 같으니 우린 이만 가 보지. 할 말이 있으면 비무대 위에서나 하게나! 그럴 용기가 있다면 말이야! 하하하하하!”
그리고는 너 따위한테 허락은 들을 필요도 가치도 없다는 태도로 무리를 지어 성큼성큼 주루를 빠져나갔다. 비류연의 이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맥이 빠져 버린 효 룡은 더 이상 사태를 끌어갈 힘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대치 상태는 어영부영 뒤로 넘어가고, 전옥기 일행도 약간 찔리는 게 있는 터라 무리를 지어 주루를 빠져 나 갔다.
“저래서 천박한 것들은 안 된다니까! 사내놈이 자존심도 없어 가지고…….”
주루를 내려가면서도 한 마디하는 걸 잊지 않는 놈들이었다. 그것을 놓칠 비류연 일행이 아니었다. 아마 일부러 들으라고 한 말이 분명했다.
“자넨 분하지도 않나? 어떻게 그렇게 태연히 음식물을 집어넣고 소화시킬 수 있나? 자넨 저런 놈들에게 당한 모욕보다 먹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
화난 목소리로 비류연을 홱 돌아본 효룡이 따지듯이 말했다. 속에서 열불이 끊어올랐던 것이다. 감히 벌레만도 못한 것들이 가소로운 배경 하나 믿고 날뛰는 꼴이 라니! 복장이 뒤집혀 비류연에게 따지고 들었던 것이다.
홧김에 소리쳐 본 것뿐인데, 비류연의 대답은 걸작이었다. 그 대답을 들은 효룡은 하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리며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다.
“당연하지! 모처럼 효룡과 장홍, 이 두 친구가 격려 차원에서 공짜로 호화찬란한 저녁을 사 줬는데 얼른 안 먹으면 아깝잖아. 저런 녀석들하고 실랑이 벌이다가 내 가 먹을 양이 줄어들면 그거야말로 큰일이지. 간만에 제대로 된 식사, 충분히 즐겨야 하지 않겠어! 이런 사치는 드물다고…….”
여전히 절삭 작업에 전심 전력을 기울이며 태평스럽게 말하는 비류연이였다.
설마했는데 진짜로 시비를 가리는 것보다, 자존심을 세우는 것보다, 지금 뜯고 있는 닭발 한 짝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 아닌가! 무인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사 고 방식이었다.
사실 오늘 이 자리는 그 동안 연전연승한 비류연을 축하 겸 격려하는 의미에서 장홍과 효룡이 준비한 저녁 식사 자리였다.
그런데 열심히 식사에 집중하고 있는 도중 귀를 간지럽히는 이야기가 들려와서 쳐다보니 선배라는 작자들이 후배이자 대전 상대인 비류연을 깎아내리는 데 여념 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효룡이 발끈하고 나섰던 것이다. 격려차 데려온 곳인데 본의 아니게 험담이나 들어야 했으니 비류연에게 미안했던 것이다.
그런데 제3자가 오히려 열내고 있는 판국에 정작 당사자라는 놈은 음식물 섭취에 여념이 없는 게 아닌가!
“왜 가만히 있었나? 자넨 그럴 사람이 아니잖은가? 뭔가 다른 생각이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조금 전까지 비류연을 안줏거리 삼아 열심히 씹으며 판을 벌이던 전옥기 일행의 빈 자리를 바라보며 효룡이 물었다. 그런 소리를 다 듣고도 가만히 있는다면 배알 도 없는 놈으로 찍히기 십상이었다. 물론 효룡이 알기론 비류연은 절대 그런 쪽의 부류하고는 연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가만히 있었다는 게 더 신기했다.
“음냠냠! 뭐 내일 뼈가 좀 저리겠지 뭐……. 어차피 그런 녀석이야 식후 간식거리도 안 된다고! 껍질만 번드르르했지, 알맹이는 하나도 없는 게…, 영…, 부실해 서… 씹을 맛도 제대로 안 나는구만. 뼈는 튼튼한가 모르겠네…….?”
열심히 히죽히죽 웃으며, 열심히 닭발 뜯는 데 일심(一心)인 비류연을 보며 효룡이 의아한 듯 물었다. 뭔가 귀에 걸리는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거 자네가 들고 뜯고 있는 닭발 이야긴가, 아니면 방금 전 나간 그 녀석 이야긴가?”
“글쎄?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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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룡의 질문에 그저 씨익 웃으며 얼버무리는 비류연이 왠지 밉게 보이지 않는 효룡이었다.
비무 당일! 보무도 당당히 비무장에 나타난 전옥기는 뭔가 자신의 신경을 잡아 끄는 의아함을 느껴야 했다.
전옥기가 느끼기에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우선 그의 시선을 확 잡아 끈 것은 비류연 주위에 포진하고 있는 17명의 한 무리 무인들이었다.
그 중 단 한 명을 빼고는 그도 확실히 알고 있는 얼굴들이었다. 아니, 그들은 현재 천무학관에서 너무나도 유명한 사람들이었기에 모르려 해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들이 왜 여기에 와 있단 말인가? 왜 와 있지??
그들은 요즘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실력 면에서 크게 떨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지명도 면에서는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그것은 자신도 인정하는 바였다. 누가 뭐래도 그들은 지금 천무학관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신룡봉황들이었기 때문이다.
자신 정도의 실력자와 한낱 비천한 출신의 애송이와의 싸움에 관전 나올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 물론 그가 알기로도 그랬다.
‘왜 저들이 저 애송이의 주위를 저렇게 둘러싸듯 모여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설마 저들의 목적이 저 애송이란 말인가…….?? 갑자기 그의 눈이 확 커졌다. 뒤통수를 후려치듯 번뜩이는 생각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사제?!’
그렇다면 절대 방심할 수 없었다. 주작단과 저 정도로 친분 관계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저 애송이를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까지가 팔비신검 전옥기의 상상력의 한계였다. 매우 상식적인 사고 전개였지만. 그가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그걸 상상할 수 있으면 그놈이 바로 미친 놈이라 보면 틀 림이 없다. 정신 상태 검증 따윈 거칠 필요도 없이 말이다.
그런데 전옥기는 안 봐도 좋을 것을 봐 버리고 말았다. 안 보기라도 했으면, 그리고 못 본 척이라도 할 수 있으면 마음이라도 편하련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 다.
“헉! 저…, 저게 뭔가?! 내가 지금 헛것을 봤단 말인가?”
하도 의심스러워 두어 번 눈을 비벼 봤지만 아무런 이상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럼 방금 그건 대체 뭐란 말인가?
전옥기는 안타깝게도 비류연이 무심결에 주작단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구룡의 일인 뇌전검룡 남궁상의 머리통을 시원스럽게 후려갈기는 것을 보고야 만 것이 다. 그 장면을 본 후 이제 저 애송이 녀석은 죽은 게 확실하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뒤통수를 얻어맞은 남궁상은 명성과 실력에 걸맞지 않게 그저 실실거리며 웃고 있 는 게 아닌가!
전옥기는 혹시나 해서 눈을 두세 번 비벼 보고 뺨도 꼬집어 봤지만, 시력에도 별다른 이상은 발견되지 않고, 비틀어 잡아당긴 뺨이 얼얼할 정도로 아픈 것을 보니 꿈은 더욱 아니었다.
‘그렇다면 내가 방금 이 두 눈으로 목도(目睹)한 게 도대체 뭐란 말이냐?”
수많은 의문 부호들이 그의 뇌수 속을 사정없이 휘저어댔지만 마땅한 결론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방금 그것을 못 본 것으로 하기로 했다. 분명 시합 전 의 작은 긴장 때문에 헛것을 본 것이리라.
“착각이겠지……. 하하하!”
그러나 아무리 자기 최면을 걸어 봐도 이미 그의 웃음에는 맥이 완전히 빠져 있었다.
오늘 여기 이 자리에 주작단 전원이 불려 나온 이유는 매우 단순 명쾌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비류연의 비무 응원이라는 참으로 거창한(?) 명목 때문이었다. 참가도 못하는 거 이왕지사 그렇게 된 거 응원이라도 하라는 게 비류연의 주장이었고, 폭력과 탄압에 의해 안 나올 수 없게 된 주작단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응 원 구호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주작단이 이번 삼성무제에 참가하지 못하게 된 것도 그 원류를 거슬러 가 보면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비류연이 때문아닌가. 그가 청룡 단과 주작단과의 싸움을 부추겼기에 이번 삼성무제에 참가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사형의 시합일 날 감히 사제들이 응원 오지 않는 게 천하 어느 나라의 법도냐고 주먹을 거침없이 뒤흔들어대는 비류연 앞에, 배겨날 재간이 불쌍한 주작단에게 있 을 리 만무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매번 비류연의 시합 들러리를 서는 신세가 되었다. 해서 비무대 위에 모아져야 할 시선을 오히려 주작단원들이 가져가는 경우도 있었다. 모두들 왜 저들이 저기에 있는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떡하겠는가! 힘 없는 자의 설움인 것을…….
과연 주작단원들이 비류연의 노리개 신세를 면하는 날이 과연 오기나 할 것인가? 어쩌면 일생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상엔 참 멍청이가 많다. 오늘 전옥기를 보며 비류연이 내린 결론이었다. 어찌도 이리 어리석을 수 있을까? 참 신기했다.
설마 명문 정파의 제자라는 간판만 있으면, 근육이 두 배로 늘어나는 것일까? 아니면 뼈가 두 배로 단단해지는 것일까? 아무런 혜택도 없다. 단지 비전(秘傳)에 의 해 축적된 기술이 있고, 그것이 다른 곳이 가진 것에 비해 효과가 빠르고, 유용할 뿐이다.
죽었다 깨어나도 간판이나 배경이 자신을 공짜로 환골탈태시켜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종종 이것을 착각하는 머저리들이 있다. 전옥기도 그런 부류에 속하는 녀석 이었다. 지금도 비무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괘씸하게 자신에게 삿대질을 하는 게 아닌가. 역시 정신 교육이 꼭 필요한 녀석이었다.
“그 머리는 도대체 뭐냐? 지금 날 무시하는 것이냐?”
전옥기의 검지손가락이 치렁치렁하게 내려와 눈 전체를 가리고 있는 비류연의 앞머리를 가리켰다. 그의 기다란 앞머리는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라 여겨졌던 것이 다.
“글쎄 필요하면 자른다니까요. 아니면 능력이 되면 잘라도 좋아요. 하지만 이번 비무에서 굳이 자를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네요.”
치렁치렁한 앞머리 아래로 보이는 붉은 입술에 미소를 담아 싱긋 웃으며 비류연이 말했다. 아직까지 비류연은 그 누구 앞에서도 한 번도 앞머리를 자를 필요성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미우나 고우나 사부인 영감탱이의 당부도 있었다.
“감히 무학의 요체이자 생명인 안법(眼法)에 스스로 족쇄를 채우다니, 네놈이 제정신이냐? 도대체 이유가 뭐냐? 구대 문파(九大門派) 중 하나인 대점창파(大點蒼 派)의 직전 제자인 본인을 무시하는 것이냐?”
전옥기가 대뜸 호통을 쳤다. 구대 문파의 제자인 자신이 출신도 모르는 애송이한테 철저히 무시당했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그건 그의 상상력 영역 내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참 대(大)자 좋아하는 분이네요. 구대 문파가 밥 먹여 주나요? 왜 어제부터 자꾸 구대 문파와 명문 대파를 자꾸 들먹여요? 짜증나게!”
비류연의 비뚤빼뚤하고 심드렁한 대꾸를 들은 전옥기의 얼굴이 분노에 시뻘겋게 변했다.
“닥쳐라, 시끄럽다! 입만 살았구나. 빨리 이유나 말해라. 안 그러면 베겠다.”
베긴 뭘 벤단 말인가? 자신 있으면 한 번 해 보라지. 그냥 무시해 버리는 비류연이였다.
“이유라? 그러고 보니 앞머리를 기르기 시작한 게 아마 그날부터였지…….”
그의 긴 앞머리는 별것 아닌 장소에서부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