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연의 첫 공식전
비류연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뭐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옆에 서 있던 남궁상이 공손히 물어 왔다.
지금 비류연의 수발은 고스란히 남궁상의 몫으로 돌아가 있었다.
“기다리고 있어.”
들뜬 목소리로 비류연이 말했다. 마치 어린애 같은 표정이었다.
“누구를 말입니까?”
“나예린 소저!”
“예에?”
남궁상뿐만 아니라 주작단 전원의 시선이 비류연에게로 꽂혔다.
효룡, 장홍도 이 자리에 있었다면 예외는 아니었겠지만 그들은 지금 반대편 자리에 가서 앉아 있었다. 아직 그와 주작단과의 관계를 남들에게 밝힐 수 없었기 때문 이다.
“하하하하! 농담이시죠?”
맞을 줄 알면서도 왜 그런 말을 내뱉었을까? 남궁상은 아차했다. 징벌은 금세 가해졌다.
“따악!”
경쾌한 소리가 남궁상의 뒤통수를 악기(樂器)삼아 울려 퍼졌다.
“넌 내가, 이 대사형이 시답지 않게 거짓말이나 할 사람으로 보이냐? 네 녀석 두 눈이 제대로 박혀 있는지, 시력에는 이상이 없는지 차곡차곡 확인 절차를 밟아 줄 까?”
사뭇 위협적인 어투에 반항할 테면 반항해 보라는 그런 눈빛이었다. 그랬다간 아작을 내 주겠다는 의미가 듬뿍 담긴……
남궁상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한다면 분명히 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란 걸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궁상이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아…, 아니요!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 그 누구보다 대사형을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하하하! 설마 대사형이 하신 말씀에 감히 의문을 품을 수가 있겠 습니까! 누굽니까? 감히 대사형의 일언에 의문을 품는 사람이!”
남궁상은, 자신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듯, 혹여 그런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적발(摘) 색출(出)하겠다는 태도로 주위를 매섭게 휘휘 둘러보는 것이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옛날 같지 않게 아부도, 능청도 많이 는 남궁상이었다.
“그래? 그 마음 잊지 않는 게 좋아!”
비류연이 싱긋 웃으며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남궁상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제야 남궁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분이 오실 거라고 확신합니까? 그 소저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부동(不動)으로 유명한데요?”
“편지를 보냈어!”
별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비류연이 말했다. 당연한 것을 왜 묻나 하는 그런 말투였다.
너무 자신만만하고 확신에 차 있어서, 순간 듣고 있던 남궁상도 정말 그대로 되는 것으로 생각이 들었다. 허나 그는 이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편지요? 겨우 그 정도로 그렇게까지 확신하시는 겁니까? 제가 알기로도 하루에 나예린 소저에게 전해지는 편지만 해도 수십 통이 넘습니다. 과연 와줄까요?” 결론은 물론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지 않은가! 이미 나름대로 결론을 지어 놓고 있는 남궁상이었다.
“답장도 왔거든!”
“예? 서… 설마…….”
믿을 수 없다는 듯 남궁상이 외쳤다. 설마 여태껏 빙백봉 나예린으로부터 답장을 받았다는 남자 이야기는 어느 풍문으로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난 공불락(難攻不落)의 빙성(城)이라 칭하고 있는 게 아닌가. 혹시 위조 편지가 아닌가 하는 의문까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때 그의 등 뒤에서 웅성웅성 큰 소란이 일었다. 사람들의 동요가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왜 여기저기서 감탄사와 탄성이 터져 나오는 것일까? 뒤통수가 따끔 거렸다.
그때 비류연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등 뒤를 가리키며 보란 듯이 말했다.
“봐! 왔잖아! 내 말 맞지!” “에이, 설마……. 헉!”
설마 했던 마음으로, 농담이겠지 하는 심정으로, 그래도 명색이 대사형이니 속아 주는 척은 해야겠지 하는 갸륵한 마음가짐으로 고개를 돌리던 남궁상은 헛바람을 들이켜고 말았다. 정말 그의 눈에 빙백봉 나예린의 모습이 들어왔다.
보는 사람을 숨막히게 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 같은 미모(貌). 그 속에 담겨 있는 날카롭고 차가운 이성(理性). 묘하게 사람 마음을 흥분시키게 만드는 불가 사의한 향기(香氣)!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사내들이 일제히 벌떡 일어나서 앞을 다투어 그녀에게 길을 비켜 주고 있었다. 한덩어리로 뭉쳐 있던 인파가 반으로 쫙 갈라졌다. 앞자리로 가셔서 편안하게 보세요, 라는 의미였다. 나예린은 살짝 고개를 숙인 후 그들이 만들어 준 길을 유유히 걸어갔다.
사내들은 황공스런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녀를 힐끔힐끔 훔쳐보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 이런 때가 아니라면 언제 그녀를 눈 앞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겠는 가. 오늘 여기 모인 사내들은 횡재한 것이다. 빙봉영화수호대 대원들이 선두에 서서 길을 열어 주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부탁하지도 않아도 알아서 처리하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이런 부담스러운 일들 때문에 더욱 사람이 몰려 있는 곳을 기피하는 처지였다. 그런 만큼 그녀의 이번 관전은 매우 예외적이며 충격적인 일인 것이다.
신경 안 쓰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이는 수많은 사내들의 시선이 그녀의 기분을 착잡하게 만들었다.
“너무 그렇게 넋을 빼고 뚫어지게 쳐다보지 마라. 닳는다.”
멍하니 시선을 고정시킨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 남궁상에게 비류연이 경고했다. 비류연은 친절하게도 또 하나 경고를 잊지 않았다.
“게다가 너 그러고 있으면 령이가 가만 안 놔둘 걸? 네 신변에 대한 위협도 걱정해야 되지 않겠니? 명색이 무림인인데 말이야! 너무 주의력이 부족하구나.”
그제야 흠칫하며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남궁상이 고개를 돌려 진령을 찾았다. 주위에 없기를 바랐건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게다가 뚫어지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윽! 헉!’
왠지 그녀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얼굴을 보니 왠지 뾰로통한 게 심하게 삐친 것 같았다. 일이 잘못된 건가? 남궁상은 그녀의 사나운 시선에 독사 앞의 생쥐처럼 오돌오돌 떠는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흥!”
남궁상은 통한의 마음으로 자신의 실책을 반성했다. 다음부터는 절대 조심해야 되겠다고 맹세하며, 일을 이렇게 만든 원인 제공자인 대사형을 원망하며 비굴한 웃 음으로 헤헤거릴 수밖에 없었다.
현재 그에게 남은 유일한 돌파구이자 피난처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헤헤…, 아, 저진…진 소저. 그러니까… 이건, 저어…….”
“흥!”
진령은 완전히 토라진 듯 고개를 홱 돌려 그녀의 얼간이, 남궁상을 외면함으로써 그의 가슴에 강력한 일격을 가했다. 한숨만 푹푹 나오는 남궁상이었다. 그의 이름 에 걸맞은 궁상스러운 모습이었다.
“아이고 내 팔자야.”
남궁상의 찌를 듯한 원망도 모르는지 하늘은 얄미울 정도로 맑고 높기만 했다.
“노사님! 대사형이 너무 무모한 것 같지 않습니까?”
현운이 그들 옆에서 함께 관전 중인 염도(焰刀)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묵금을 들고 간 것이 일견하기에도 무모해 보였던 탓이다. 그들이 아미산 합숙 훈련 시절 사부에게서 보고 배운 것 중에 음공에 관한 것은 하나도, 한 줄도, 한 마디도 없었다. 있었다고 굳이 우긴다면 ‘그래도 멋을 부리려면 뭐니뭐니 해도 금(禁)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한 정도였다.
헌데 이번엔 그 사부로부터 절기를 물려받았다는 수상하기 짝이 없는 대사형의 인연에도, 사문 무공의 족보에도 없는 금(琴)을 들고나간 것이다. 꼴에 음공을 펼 쳐 보이겠다면서…. 은근히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사형에겐 다른 절기가 버젓이 있는데……. 권(券)을 쓰는데 혹시나 금(琴)이 방해되지 않을까요?”
삼복구타권법(三伏毆打拳法)이 무섭긴 무서웠던 모양인지, 아직도 비류연의 진신절기는 권(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현운이었다. 아니, 현운뿐만 아니라 주작단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헌데 염도의 반응은 현운에게는 좀 뜻밖이었다.
“흥! 저 괴물딱지 놈이 어떤 놈인데 이런 데서 지겠느냐! 쓸데없는 기대 따위는 갖지 말고 구경이나 열심히 해라!”
안 들린다고 그래도, 명색이 사부인 비류연을 놈이라고 마구 부르는 염도였다. 그로서는 일종의 분풀이였다. 어린애 같은.
비류연이 얻어맞는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볼 만한 통쾌한 구경거리임이 틀림없지만,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딱지가 겨우 여기서 진다는 건 더더욱 상상도 못하 는 일이다. 어떤 녀석이 아무리 천운(天運)을 대량(大量)으로 얻었다 해도, 감히 그를 이길 수는 없다는 게 염도의 판단이었다.
과연 누가 있어 저 얼굴에 맺힌 여유만만한 웃음을 없애 줄 수 있을 것인가!
“둥둥둥!”
시작을 알리는 북 소리와 함께 이제 막 비류연의 첫 번째 공식적인 비무(比武)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무모하군요!”
묵금을 들고 비무대에 올라선 비류연을 본 나예린의 첫 관전평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따끔거리는 시선의 화살을 애써 무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지?”
독고령도 이내 동감을 표시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1학년 후배 녀석의 행동은 무모하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었다. 비무 대회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것을 들고 나온 것이다.
“자신의 진신절기가 아닌 금(琴)이라니……, 의외로군요!”
“그럼 사매는 저 녀석의 진신절기가 뭔지 안단 말이야?”
사내에게 도통 관심이 없는 그녀가 어찌 1학년 애송이의 무공 체계를 알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접촉할 기회도 없었을 텐데…….
“그게 뭔지 몰라도 음공(功)이 아닌 것만은 확실합니다.”
선풍검룡 위지천을 쓰러뜨린 한 수는 분명 음공이 아니었다. 그 한 수를 바로 눈 앞에서 목격한 그녀였다.
“너무 이 대회를 무시하는 처사로군! 지겠지?”
당연하게 유추되는 결과였다. 그녀뿐만 아니라 여기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일단 두고 보기로 하지요. 이기기도 어렵겠지만 진다고는 더더욱 생각하기 힘듭니다.”
“사매, 너답지 않구나. 너무 높게 평가하는 것 아니냐? 저런 녀석!”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독고령은 계속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저런 별 볼일 없는 녀석의 실력을 두둔한다는 것은 자신의 사매답지 않았다. ‘비전절기를 숨기고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일까? 그렇다면 정말 무모한 사람이로군.’
나예린의 생각도 어느 정도 남들과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1차전에서 떨어질 상대라면 더 볼 것도 없는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나마 천무학관 내에서 비 류연의 실력을 일부라도 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녀의 생각으로 선풍검룡 위지천은 절대 1회전에서 패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웅성거리는 경악의 소리와 집중되는 사내들의 따갑기까지 한, 그래서 독고령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시선을 제외한다면 독고령의 예상은 대강 맞아 떨어졌다. 그녀의 사매와 함께 다닌 지 벌써 1년 반,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사내들의 시선 다발이었다.
비류연에 대한 관전석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거의 움직이지 않는, 비무(比武)든 뭐든 어떤 행사에도 거의 얼굴을 보이지 않던 천무제일미 빙백봉 나예린이 움직 인 것이다. 그것도 알려지지도 않은 무명의 애송이 시합에 얼굴을 내비친 것이다.
사내들은 경악했다. 이윽고 무시무시한 질투(妬)의 불길로 온몸을 불사르기 시작했다. 해서 비류연의 승리를 바라는 자가 주위에는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아주 극소수(極少數)를 제외하고……
헌데 단 하나 독고령의 예상이 틀린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당사자인 비류연의 태도였다.
관전객(觀戰客) 들의 따가운 눈총과 시기심어린, 질투에 불타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 중심에 서 있는 비류연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너무나 태연하고 의기양양 해서 보고 있는 독고령이 다 의아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비류연은 놀랄 만한 일을 또 한 번 그녀의 눈 앞에서 저질렀다. 거의 전 천무학관도가 모여 있다시피한 비무장 안에서 나예린에게 아는 체를 한 것이었다. 그것이 천무학관에 소속된 반수 이상의 남자들을 적으로 돌리는 행위라는 것을 알고도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이 독고령은 의문스러웠다.
“나 소저! 올 줄 알았어요!”
비류연은 함박 웃음을 지으며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그 대가가 뭔지 비류연은 알고나 있을까? 1학년 애송이가 그들의 우상에게 아는 체를 했다는 것은 만인의 공 분을 살 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수십 개의 질투의 무리를 결성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들은 결코 비류연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비류연이 무슨 일을 예전에 저질렀는지 대충이나마 알고 있는 나예린의 친위대원들은 더욱더 격분해서 날뛰 었다.
“우우우우! 죽어라!”
“이봐! 저런 녀석, 일검에 목을 쳐버려!”
관전석의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고, 야유 소리 또한 점점 높아졌다. 모두 비류연 개인에게 쏟아지는 야유(楡)와 질시(疾視),그리고 살기(殺氣)였다.
“여긴 바보들이 많네요!”
광분하는 관객들을 소 닭 보듯 한번 훑어본 비류연의 한 마디 소감이었다. 삼성무제 참가자 중에도 나예린을 사모하는 그녀의 추종자가 당연히 있을 것이다.
비류연의 첫 대전 상대 해남파(海南派)의 쾌환검(快幻劍)단평도 그 중 한 명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는 눈에서 불똥을 튕겨내고 있었다. 비류연은 몰랐고, 알 생각 도 없지만, 그 또한 빙봉영화수호대의 일원으로, 나예린의 추종자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상태를 보아하니, 십중팔구 이성(理性)의 끈이 돼지 꼬랑지만큼도 남아 있지 않은 모양이다.
“둥둥둥!”
“개시(開始)!”
푸른 깃발이 내려가고 시합 개시를 알리는 북 신호와 함께 상대가 사정없이 살기 듬뿍 담긴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시작부터 최절초에 해당하는 쾌검살초를 펼쳤다. 해남파의 검은 빠르고, 그 변화가 기괴막측한 환검(幻劍)의 묘책을 장기로 삼고 있었다. 지금 단평의 모습은 해남파의 진수, 남해36검(南海三十六劍)을 전 력을 다해 남김없이 보여 주겠다는 의지가 명확했다.
아예 죽이려고 단단히 작정한 듯 달려드는 모습이었다. 과연 세인들이 보기에 그 빠르기는 명불허전이었다.
‘얼레?”
그제야 비류연은 자신이 간만에 실수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지금 후회하기엔 조금 때가 늦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