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정파 신진고수,
후기지수라면 눈에 불을 켜고
절치부심하는 각오로 임하는 것이
바로 이 화산규약지회(華山規約之會),
줄여서 화산지회(華山之會)라 불리는 대회였다
5년에 한 번 있는 정사흑백의
자웅을 겨루는 대전 중의 대전이었다
전 무림에서 가장 큰 행사라 불리기에
가장 합당한 행사라 할 수 있었다.
진혼제(鎭魂祭)
•향은 연기 속에 영혼을 담아 바람에 날려간다
붉은 제단 위에 올려진
청동향로에 꽂힌 향(香)이 자신을 불사르며
연기로 화해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조용히 타오르는 향연(香煙) 속에는 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져 있다. 그윽하게 타오르는 향의 연기를 타고 죽은 자의 영혼이 사자(死者)의 안식처로 무 사히 올라가길 바라는 간절한 열망!
수천의 염원을 담은 향이 스무 개의 영혼을 운반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불살랐다. 전사자의 혼을 위로하기 위한 제단이 자리한 진혼전(鎭魂殿)밖에 위치한 연 무장에는 수백 명의 무인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열병해 있었다. 수백 명은 족히 넘는 무사들은 모두들 초설(初雪)처럼 투명한 백의를 갖추어 입고 죽은 동료들의 넋 을 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숙연하다 못해 장엄함마저 느낄 수 있었다. 누구도 감히 웃거나 잡담하는 이가 없었다. 그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이글거리는 눈빛 으로 진혼전 안을 주시했다. 제단 위에 올려진 스무 개의 위패를 바라보며 타오르는 분노를 가슴 속으로 삭이고 있는 무사들의 안광은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여느 진혼제나 마찬가지겠지만 보통 식장 안을 감싸고 있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암울하고 음침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곳은 여타의 장례식장과는 확연히 다른 분 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연무장을 둘러싼 공기는 팽팽히 당겨진 시위처럼 긴장감을 유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긴장감은 사람의 가슴을 싸늘하게 만들 만큼 차가운 살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공기는 견딜 수 없이 무겁기만 했다.
이곳은 여타의 상갓집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장소였다. 보통 상갓집이라면 타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백색의 조의(衣)와 이마에 백건(白巾:흰 띠)을 두른 몸에 날이 시퍼렇게 선 도검류의 병장기를 휴대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병장기를 소지하고 있었고, 그들의 병기는 지금 싸늘한 살기마저 머금고 있었다.
“크으… 내 이놈들을..”
진혼전 안, 제례를 주관하고 있는 집제장로(祭長老)의 등 뒤에 서있던 노인 한 명이 불끈 쥔 주먹을 부르르 떨며 나직이 분노의 신음성을 내뱉었다. 평소 은신잠 행술을 가르치던 운해무영(雲海無影장위염 노사였다. 자신이 가르친 무사들의 주검을 보자 자식이 악도의 칼을 맞고 싸늘히 식어 돌아온 듯한 느낌에, 식어있던 장위염의 피가 뜨겁게 들끓었다.
분노의 힘은 세월의 흐름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끓어올랐다.
“삼십 년만의 참상(慘狀)인가…….”
분을 이기지 못하는 장위염의 옆에 서있던, 흰 수염이 가슴까지 오는 노인의 입에서도 나직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는 탄식과 함께 연신 애꿎은 수염만 쓰다듬고 있었다. 그로서는 그것이 나름대로 살기와 화를 다스리는 한 방편이었다.
“삼십 년 동안 이런 일이 없었거늘… 누가 감히 우리 천무학관에 이렇게 겁 없이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전원 몰살이라니… 그냥 믿기에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일 이로구나…….”
천무학관에서 후학들에게 검을 가르치며 반평생을 보낸 검노사(劍老師) 성청주는 짙은 비애가 서린 장탄식을 터뜨렸다.
스무 개의 위패 뒤에 놓인 스무 개의 관은 단 하나를 제외하고는 시신조차 들어있지 않은 빈 관이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시신마저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제 자들의 시신조차 거둘 수 없는 참담한 현실에 그들 무사부들은 더욱 흥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다못해 시신만이라도 온전히 거둘 수 있었다면… 그것마저 해주지 못한 자신들에 대해 그들은 지금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진혼제의 전체 분위기는 험악하기만 했다.
의식을 주관하는 천무학관주 철권 마진가의 얼굴은 눈에 띄게 굳어져 있었다. 가슴 속에 용암처럼 들끓는 분노를 표출시키지 않고 갈무리해 둘 수 있었던 것은 그 가 가진 무한한 인내력 덕분이었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생각해 분노가 치솟음에도 불구하고 분노를 직접적으로 터트릴 수 없었다. 무림에서 차지하는 그의 지고한 위치가 자신의 희노애락도 함부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지위가 높다 해서 함부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시켜서는 안 된다. 지위가 높다고 그런 권리가 있다고 착각하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남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추스를 줄 알고, 조심할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주변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의 감정변화에 주변의 감정이 휩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소한 언행 하나가 강호의 공분화(公憤化)가 될 수도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모를 만큼 그는 무능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지금 조용히, 그러나 누구보다도 강한 분노를 내심으로 삭이고 있는 것이다.
최근 아무리 흑도와의 관계가 안 좋다고는 하지만, 백 년 전 천겁혈세(天劫血洗) 이후 흑도와 백도의 관계는 속으로는 이를 갈고 있더라도 겉으로는 싸늘하고 가 식적이나마 미소를 지어주고 있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근 백 년 동안 냉전 체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나큰 사건 없이 지나올 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한 부대가 몰살당한 것은 엄청난 대사건이었다.
표리부동(表裏不同 :겉과 속이 다름)의 살 떨리는 긴장 속에서 표면상의 무혈(無血)과 어거지 미소를 억지연출(抑止演出)하는 평화가 근 100여 년 동안 계속되어 왔었다. 물론 중간 중간 몇몇 크고 작은 사건이 일어나 무림에 한바탕 피바람을 몰고 온 일이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정사가 정면으로 부딪친 일은 없었다. 그 런 소소한 일까지 일일이 따지자면 최근의 평화는 지난 삼십 년 동안의 평화라 할 수 있었다.
속으로는 이를 갈고, 치를 떨고, 칼을 갈아도 겉으로는 배시시…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정사는 거짓된 평화를 연기했다. 하지만 거짓된 평화도 유혈 낭자한 살벌한 현실보다는 천백 배 정도 나았기 때문에 다들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모두들 속에 내재된 불씨를 모른 척 외면해 왔었다. 억지로 응축만을 거듭한 용수철은 언젠가 그 반발로 더욱 세차게 튀어 오르는 법! 지금 강호는 그 반동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근 삼십 년 사이에 기타 군소 방파도 아니고 천무학관 직속 부대가 직격을 당한 일은 없었다. 흑도의 어떠한 정신적 외상 보유 과격분자라 할지라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성역! 그것이 바로 천무학관이었다.
그 자존심이 삼십 년 만에 또 다시 상처를 입었다.
솔직히 마진가는 현재 자신이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천무학관 사람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지만, 흑천맹에 직접적으로 항의는 하지 못하고 있었다. 용기의 부재가 아니었다. 힘의 열세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상징적인 면에서는 이보다 크면 컸지, 결코 작지 않은 일이 흑도의 중심이자 지주(柱) 흑천맹에도 일어났기 때문이다.
흑도사파의 신(神)! 패천도(天刀) 무신(武神) 갈중혁의 맏손자! 혈류(血流刀) 갈효봉의 죽음!
거기에 천무학관도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죄를 주장하고 모함을 목 놓아 외쳐도 증거가 없는 이상 상황은 그들에게 불리하 게 돌아가고 있었다. 당하는 쪽에서는 참으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깔끔하게 아무 뒤탈 없이 끝내려 해도, 이미 은원이 난마처럼 얽히고설킨 후라 불가능에 가까웠다. 여기서 더 얽힌다면 무림에 또 다시 한바탕 혈풍이 불어 닥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 명명백백(明明白白)한 일이었다.
마진가의 속 타는 가슴을 몰라주는 듯, 야속한 경문 소리만이 낭랑하게 엄숙한 식장 안에 울려 퍼졌다.
마진가는 커다란 번민으로 속앓이 하는 가슴을 안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상대로 수뇌부들의 얼굴은 연무장에 열병해 있는 제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 도로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모두들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이 막중하고 엄청무비한 사태에 대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감히 함부로 말을 붙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건드렸다가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상황이라 애꿎은 피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당파 출신의 집제장로 운허진인이 경문을 읊으며 의식을 집전하는 가운데, 낭랑한 경문 소리가 바람을 타고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무겁게 가라앉은 장내의 공기에 아랑곳 하지 않고 운허진인은 계속해서 진혼제를 진행했다. 그에게는 다음 순서를 진행해야 할 막중한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침울한 분위기에 진혼 주문 소리가 더해지자 장내의 공기는 더욱더 무거워졌다.
“위령(慰靈)!”
제사를 주관하는 운허진인이 다음 식순을 외치자, 십수 명의 악사들이 금(琴), 소(簫), 피리 등 갖가지 악기를 들고 들어왔다. 진혼전은 무척이나 넓은 곳이라 남녀 혼성조로 구성된 악사들이 모두 들어와 자리하기에 충분한 장소를 제공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악사들이 빙그르르 둥근 원을 그리며 자리를 잡자 필연적으로 가 운데 공간은 동그랗게 빌 수밖에 없었다.
찌릉! 찌릉!
맑게 울리는 방울 소리!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오색 비단으로 교구(嬌軀)를 감싸고, 갖가지 금은세공의 장식품으로 몸을 치장한 여인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목에는 오색의 보석으 로 장식된 목걸이가 걸려있고, 가느다란 우윳빛 손목과 발목에는 은령(銀)이 달린 황금의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그 자태는 너무나 아름답고 신비로워 마치 천상 의 선녀가 하계에 강림한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순간 싸늘할 정도로 조용한 침묵이 장내를 뒤덮었다. 모두들 말을 잃은 채 넋을 잃고 그녀의 미태(態)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정결하고 순수한 광채, 고결한 기 품, 눈부신 자태, 시리도록 하얀 백옥의 피부.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들 정도로 눈부신 려태(麗態)! 천상의 미!
그녀는 바로 나예린이었다.
“오오오오오!”
사람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진심어린 감탄사가 그들의 벌어진 입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평상시 기능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가장 수수한 무복(武服)으로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최고의 비단에, 최고의 솜씨로, 최고의 장신구를 달아 최고로 꾸며놨으니, 그것은 이미 현세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사람들이 넋을 잃고 혼을 빼앗기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진혼제와는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을 만큼 화려한 복장이었지만, 여기에 불만을 표하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이것 역시 엄연한 의식의 일부임을 모두들 잘 알고 있 었기 때문이다. 불만은커녕 그들은 오히려 열광하고 있었다. 비록 진혼제 중이라 겉으로 내색하지는 못하고 속으로 발산하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사뿐사뿐 걸어오는 발걸음의 자태와 그 가련함에 장내의 사람들 모두 넋을 잃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진혼검무(鎭魂劍舞)!
죽어버린 무사의 혼령을 위로하는 검으로 추는 춤!
챠라라라랑!
맑고 선명한 검명음(劍鳴音)을 내며 그녀의 애검 옥령(玉靈)이 검집에서 뽑혔다. 시리도록 눈부신 예기를 머금고 있는 우윳빛 검신이 햇살을 부수며 찬연히 빛을 발했다.
“챙챙!”
이윽고 악사들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스윽!
악사들의 연주에 맞춰 나예린은 허공 중에 조용히 일검을 그었다. 이 세상에 오직 그녀와 그녀의 검만이 존재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지루할 정도로 느린 검이었다. 한번 휘둘러지는 데만도 일 년의 시간이 걸릴 것 같은 느린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음률이 고조되어 가면 갈수록 음률에 화 답이라도 하듯 그녀의 검도 점점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애검이 검광을 번득이며 맑고 깨끗한 광휘(光輝)를 허공 중에 흩뿌렸다. 검과 음률이 하나가 되어 멋진 조화를 이루었다.
바닥까지 길게 드리워져 하늘거리던 소맷자락이 나선을 그리며 그녀의 몸을 환상적으로 휘감았다. 바람을 타고 격렬히 흐르는 소맷자락이 뭇사람들의 시야를 어 지럽힌다. 나예린의 몸이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새하얀 백무가 그녀의 주위를 떠돌기 시작했다.
천상의 선녀가 하계에 강림하여 춤을 추니 어떤 이가 그 가려(佳麗)함에 넋을 잃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허공을 우아하게 헤엄치던 검이 선풍을 일으키듯 유려한 나선을 그렸다. 비어있는 새하얀 화선지 위에 마치 그림이라도 그리는 듯 아름다운 춤사위였다. 선연(鮮 然)한 검기가 허공 중에 새하얀 궤적을 그린다. 그녀의 가녀린 우수에 쥐어진 검신을 타고 처연한 한기(寒氣)가 흐른다.
옥령에서 뿜어져 나온 한기가 새하얀 백무를 이루며 그녀의 주위를 휘감고 올라갔다. 극한까지 고조된 음률 속에서 나예린의 검무는 점점 더 속도를 더하며 절정 (絶頂)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미 중인(人)들은 지켜보는 단계를 지나 검무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그녀의 검무에 혼이 매료된 사람들은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에 따라 심장이 요란스레 쿵쾅거리고 전신의 피가 점점 더 빨리 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검무에 푹 빠져 그 안에 끌려들어가 흥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내는 점점 더 열기가 고조되어 갔다.
눈물이 흘러내릴 정도로 아름다운, 세상을 하얗게 바꾸는 검무. 허공을 휘젓는 검 끝에서 서늘한 비애가 숨을 쉬고 있었다. 진혼전을 가득 메운 음률이 중인들에게 구구절절이 가슴을 저미는 슬픔을 느끼게 하였다. 그리고 그 슬픔을 새하얗게 승화시킨 나예린의 절대적 아름다움.
공기마저 숨을 멈추는 애절함에 모두들 넋을 빼앗기고 말을 잊었다. 그녀의 몸이 점점 더 나선을 그리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음률을 연주하던 악사들도 그녀의 검무에 빠져들어 혼신의 힘을 다하여 격렬하게 연주하고 있었다. 혼을 불사르는 듯한 격렬한 연주에 땀방울이 공중에 비산하였 고, 그녀의 춤 또한 그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차츰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제 눈으로 따라잡기 힘들 정도의 격렬한 회전을 나예린은 보여주고 있었다. 바람이 그 녀의 몸에 휘감기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팽이처럼 빠르게 회전하던 그녀의 몸에서 한줄기 검광이 수평으로 뻗어 나왔다.
지이이이잉!
공기를 진동시키는 일검이었다.
하늘과 땅을 반으로 가르는 듯한 일검과 함께 그녀의 춤은 끝났다.
“딩!”
음률이 멈췄다.
공허한 침묵이 찾아들었다. 아무도 먼저 나서서 이 감미로운 침묵을 깨려고 하는 이가 없었다. 아직도 사람들은 좀 전의 황홀경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 이다. 침묵은 생각보다 길었다. 그리고 반각 후!
“우와와아아아!”
장내가 떠나갈 듯한 열광적인 함성이 터져 나왔다. 진혼전 내는 열광과 흥분으로 뒤범벅된 감동의 도가니였다. 장내를 팽팽하게 지배하던 슬픔과 분노마저 어디론 가 날려버릴 정도였다.
“우와아아아아! 천무학관 만세! 만세! 만세!”
드높은 함성과 함께 전의가 불타오른다.
공손일취는 진혼제를 마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진혼전을 나섰다. 삼십 년 만에 최대 규모로 열린 진혼전을 나서는 원로원주 검존(劍尊) 공손일취의 발걸음은 천
근의 신발을 신은 듯 무거웠고 그의 안색은 시체를 연상시킬 만큼 침중했다.
진혼전(鎭魂殿)은 혼령을 달래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곳으로 자연사가 아닌 공무중 사망자가 발생했을 시에 열리는 곳이다. 공무중 사망자가 발생했을 시, 이번 처럼 전사자의 위령을 위한 진혼제를 여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냥 자연사한 분들의 제를 올리는 장소는 조혼전(弔魂殿)이라고 따로 정해져 있었다.
조혼전과 진혼전은 가지고 있는 역할부터가 틀렸다. 조혼전이 그저 죽은 이의 넋을 기리는 곳이라 하면, 진혼전은 망자의 넋을 기리고 죽은 이의 원한을 달래는 것 이외에 살아남은 이들의 투지를 불태우는 역할 또한 갖고 있었다.
옛날부터 이렇게 대대적으로 진혼제를 지내는 데에는 격노(激怒)로 불타는 아군의 가슴에 기름을 끼얹고, 사기를 고양시키려는 목적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뚜벅뚜벅!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공손일취의 발걸음에는 깊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약간의 책망과 적에 대한 끝을 알 수 없는 미증유의 분노! 내딛는 발걸 음에 대지가 비명을 지르며 요동친다.
그는 말없이 푸르고 시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노안에 짙푸른 하늘이 가득 들어왔다.
“내가 그들을 죽인 것인가?”
수족이 몸에서 잘려나간 느낌이었다. 항시 곁에서 자신을 보필하던, 수족처럼 부리던 수하가 이처럼 왕창 죽은 일은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살아서 이름을 남 기지 못하고, 죽어서는 시신조차 남기지 못한 이들을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왜냐하면 그들은 첩보조이기 때문이다. 정파든 사파든 첩보조가 살아서 이름을 남기는 경우란 없었다. 그들은 항상 태양의 그늘과 밤의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이 들이며 비밀 엄수는 그들의 가장 큰 화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죽었다면 이름 정도는 남겨주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정파란 곳이었다. 흑도 같았으면 첩보조나 밀정의 죽음 따위는 어둠 속에 그냥 묻어 두었겠지만 정파를 자청하는 이들이 결코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비록 그들이 이름을 지우고, 세상에 그 존재마 저 지운 이들이라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삼십 년 만에 다시… 강호에 피바람이 불어 닥칠 것인가.”
삼십 년 전, 일명 깃털과의 전쟁이라 불리던 천겁우 준동 비사 이후로 처음 닥치는 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사 모두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 다.
백 년 전 있었던 피의 악몽 천겁혈세(天劫血洗) 이후 정파와 사파는 티격태격하면서도 나름대로 평화를 유지하며 그럭저럭 잘 지내왔다. 그러나 그로부터 70년 후 마침내 어설픈 줄다리기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강호의 평화는 의외의 복병에게 커다란 철퇴를 얻어맞게 된다. 70년 동안의 완벽한 매복에 성공한 복병들 은 바로 천겁령의 추종 잔존세력 천겁우(天劫羽)였다.
삼십 년 전에 있었던 깃털들과의 대대적인 싸움, 일명 천겁우 궤멸작전. 통칭 털 뽑기 작전이라 불리던 대대적인 무력 행동이 있었다.
깃털이란 무엇을 의미함인가? 여기서 깃털이란 무림에서 저주받은 이름! 천겁령의 잔존세력과 숨겨진 추종세력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천겁령의 실질적 지배자이 자 모든 것이었던 천겁(劫) 혈신(神) 위천무가 행방불명되어 생사가 불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천겁령은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 끈질기게 잔존세력을 남겼다. 그 들이 바로 천겁우! 몸통에서 떨어져 나온 이들이라 해서 통칭 ‘깃털’이라 명명되었다.
정신적인 지주가 행방불명되고 수뇌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사실들이 의심될 정도로 이들의 저항은 거세고 또한 은밀했다. 이 은밀함이야 말로 정파 최대의 적 이라 할 수 있었다. 햇빛 아래의 적은 두렵지 않으나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날아오는 칼은 그 수가 아무리 적다해도 충분히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정파와 사파는 백 년 전 맺은 협약에 의거하여 공동전선을 펴기로 합의하고 대대적인 깃털 탐색작전을 펼쳤다. 정사의 정보조직 구 할이 투입되어 펼쳐진 대대적인 색출(索出) 작전이었다. 당시 그림자 정보업계의 보이지 않는 엄청난 희생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희생은 발표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어둠에서 태 어나 어둠에서 살고, 다시 어둠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생명과 바꾼 한 줄의 정보를 남긴 채!
그리하여 2년간의 대대적인 색출작업 끝에 천겁우의 본거지가 밝혀졌고 당연한 수순으로 대규모 토벌 작전이 전개되었다. 70년 만에 다시 펼쳐진 기념적인 정사 공동연합작전(正邪共同聯合作戰)이었다.
통칭 털 뽑기 작전!
그러나 정사공동전선을 펼친다 해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넘어야 할 산은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의외로 천겁우의 저항은 거셌다. 정파든 사파 든 너나 할 것 없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그 피해의 대부분은 깃털과의 정면충돌에서 입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등 뒤를 맡겼던 동료로부터 당한 피해였다. 때문에 너무나 허망하고 비통한 피해였다.
어느새 천겁우의 세력은 정사 내부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있었던 것이다. 정사를 막론하고 동료에 대한 불신이 싹트는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었다. 막대한 동료의 피와 희생을 대가로 마침내 제 2차 정사연합체는 깃털들을 박멸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피해는 뼈아플 정도로 큰 것이었다. 그리고 무림에 씻을 수 없는 상처 와 공포를 남겼다. 아직 강호에서 천겁령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회상하기 싫은 공포! 그들의 건재함을 가장 난폭하고 요란스럽고 잔인한 방법으로 남긴 것 이다. 잊혀져가던 악몽에 피칠갑을 해준 꼴이었다.
불끈!
공손일취는 피가 날 정도로 손아귀를 꽉 움켜쥐었다. 그 안에는 천리추종 수독고가 남긴 마지막 생명, 그가 흘린 마지막 피가 담긴 흔적이 남아있었다.
‘기다리게!’
결심을 다지며 공손일취는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부우!
비류연의 볼은 때 아닌 바람으로 잔득 부어있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지켜보는 남궁상의 이마에 땀이 삐질삐질 맺혔다. 갑자기 눈앞이 암담해졌다.
좀 전부터 볼이 잔뜩 부어있는 것을 보니 불만이 속으로 차츰차츰 층층이 쌓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일년 반 동안 질리도록 곁에서 봐온 남궁상은 대번에 자기 대 사형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크… 큰일이다!’
남궁상의 머리 속에서 요란한 경고성이 울렸다. 이럴 때는 재빨리 비류연 반경 백장 밖으로 물러나는 게 신상에 이로웠지만 지금은 몸을 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 다. 이 상태로 계속 불만과 짜증이 쌓이다가 폭발하기라도 하면 수습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그를 엄습했다. 그런 불행무쌍한 사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미연에 방지해야만 했다. 그것이 현재 그의 의무였다.
코앞에 들이닥친 비상사태에 대한 위기 대처와 사태 해결을 위해서는, 우선 사건 발생의 원인부터 추적해 들어가야 했다. 진혼전 안에서 식이 진행될 때만 해도 비 류연의 심경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대사형의 심경이 변한 것은 나예린 소저의 황홀하고 성스럽기까지 한 검무가 있고 난 후였다. 나예린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비류연은 별다른 감정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아름답게 치장한 나예린을 보고 기뻐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검무가 끝나고 나서는 계속 저 모양이었다. 남궁상은 중간 과정을 기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진령이 알면 경을 칠 일이지만, 그 자신도 나예린의 검무에 혼이 매료되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진령에게는 절대로 알려서는 안 될 일급 기밀이었다.
마지막 검명음과 함께 나예린의 검무가 끝났을 때 남궁상은 마치 미몽 속을 헤매다 온 듯한 느낌이었다. 아직도 그의 가슴속에는 아련함의 잔재가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비류연의 얼굴에 뚱함이 나타난 것을 발견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그렇다면 비류연은 나예린의 검무에 관해 불만을 표출시켰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아름답고 신비스럽기까지 한 검무에 도대체 무슨 불만을 품을 건덕지가 있단 말인가?”
보통 인간의 일반 보편적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남궁상은 겁도 없이 무심결에 생각을 밖으로 흘리고 말았다. “대사형? 좀 전부터 도대체 뭐가 불만이십니까?”
말을 내뱉고는 남궁상은 ‘아차’ 했다. 너무 직설적인 화법이었다. 그러나 이미 배는 나루터를 떠난 이후였다.
“마음에 안 들어!”
뾰로퉁한 목소리로 비류연이 말했다.
“아니 뭐가요? 설마 나 소저의 그 아름답고 신비로운 검무가요?”
딱!
마침내 비류연은 남궁상에게 알밤을 먹이고 말았다.
“그럴 리가 있냐, 이 바보야!”
터무니없는 건 묻지도 말라는 말투였다. 그렇다면 검무에 직접적인 불만은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럼 도대체 뭐가 불만이십니까?”
아직도 얼얼한 이마를 부여잡고 남궁상이 울상을 지었다. 언제나 예측불허의 인간을 상대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엄청나게 피곤한 일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
아직도 비류연의 부어오른 볼은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깐 그 불만이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답답한지 남궁상이 가슴을 탕탕 쳤다.
““너무 예쁘잖아!”
비류연의 대답은 달랑 그것 하나였다.
“그것의 어디가 도대체 화낼 사유가 될 수 있는 겁니까? 화란 삐뚤고 올곧지 못한 것에 대한 감정의 정당한 표출이 아닌가요?”
비류연이 이유라고 내놓은 것은 너무도 이유답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너무 예쁘니깐 같이 보기 아깝잖아!”
여전히 뾰루퉁한 목소리였다.
“예?”
비류연이 뚱한 얼굴로 토로하는 불만을 들은 남궁상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이럴 때는 보통 혼자 보기 아깝다고 그러는 것 아닌가요?”
“아니 왜? 어째서 내가 내 것의 아름다움을 남과 공유하는 불합리함을 겪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요컨대 나누면 두 배 세 배 되는 기쁨을 절대 나누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나예린의 아름다움이 다른 이의 눈을 즐겁게 한다는 사실이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전에 걸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 대사형의 것이 아닙니다!”
빙백봉 나예린이 어느 한 남자의 것이 된다는 것은 수백의 천무학관도뿐 아니라 수천에 달하는 남자 무림인들이 분노를 터트릴 이야기였다.
“미정(未定)일 뿐이야! 벌써 예정(豫定)이 된!”
쀼루퉁한 얼굴로 비류연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는 나예린의 려태에 대한 독점권을 주장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원래 미인의 마음만큼 손에 넣기 힘든 것도 없죠.”
쑥맥 남궁상이 진령과 사귀기 시작하더니 감히 남녀 관계에 대해 아는 척을 했다.
“불가능은 가능으로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도 몰라? 그녀의 입술의 부드러움과 달콤함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서 나뿐일걸?”
“예에?”
남궁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뭘 그리 놀라나?”
“그… 그… 방금 하신 그 말씀이 사실입니까?”
“그럼 내가 지금 너하고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을 만큼 한가해 보이냐?”
“하지만 어떻게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궁상이의 입이 붕어처럼 뻐끔거렸다.
“너도 령이랑 입맞춤했으면서 왜 그렇게 화들짝 놀라?”
남궁상의 얼굴이 순간 발갛게 변했다.
“그… 그거하고 이건 사정이 다르죠!”
어떻게든 차별성을 주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사상과 철학이 전혀 먹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똑같아! 넌 진령이랑 맘대로 뽀뽀해도 되고 나는 안 된다는 부조리의 극치를 달리는 불합리한 법이 이 세상 어디 있는 법이냐? 다르긴 뭐가 달라?” “그… 그래도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남궁상은 말발로는 언제나 비류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남궁상은 아직 비류연의 밥이었다.
“언제나 남보다 한 발짝 앞서 가는 사람이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되는 법이지.”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모습이 마치 닳고 닳은 전문가 같은 말투였다.
‘주제가 좀 틀린 것 같은데…….’
남궁상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빙봉영화수호대는 물론이고 천무학관 내 전 남자관도들의 공적이 되고 표적이 되어 생명의 노림을 받는다 해도 할 말은 없겠군요.”
왜 그렇게 수많은 사내들이 대사형에게 악의를 품고 있었는지 남궁상은 이때까지도 정말 순진할 정도로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남궁상은 이쪽 방면에 대해서 는 백치랑 친구해도 좋을 만큼 아는 게 쥐뿔도 없었다.
“먼저 침 바르는 게 임자야!”
저 얼토당토않은 자신감의 원천은 도대체 어디에서 근거한단 말인가? 여전히 상식선에서는 도저히 불가해한 사람이었다.
“여기서는 어디다가 침을 발랐느냐, 그 위치가 더 문제라고 생각되는데요…….”
남궁상은 혼자만 들리게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도 충분히 위험 수위를 넘고 있는데, 큰소리로 말했다가 대사형에게 갈굼 당하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때 멀리서 물끄러미 비류연의 어린애 같은 행동을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그는 바로 구정회 문무쌍절의 일인인 청흔이었는데, 그의 눈엔 깊은 회의(懷疑)가 가 득했다. 지금 현재 자신이 보고 있는 비류연의 모습은 지난번 보여주었던 그 엄청난 모습과는 심각할 정도로 괴리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도대체 저자의 정체가 뭐란 말인가?”
청흔은 그날 자신이 목격한 믿을 수 없는 일을 떠올려 보았다.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손에 땀이 한 움큼 쥐어진다.
‘어떤 게 그의 진정한 모습인가? 지금 보여주는 것과 그날 보여준 것 중 과연 어느 것이 그의 진정한 본모습이란 말인가? 과연 내가 그날 본 것이 꿈이 아니란 말인 가?”
청흔도, 백무영도, 그리고 열여섯 명의 주작단도 무당산에서 돌아온 이후, 사방에서 끊임없이 몰려드는 사람들의 질문에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전면적인 묵비권을 행사했다. 모두의 마음은 한결 같았다.
‘난 거짓말쟁이 바보는 되고 싶지 않아!’
이것이 바로 이들의 공통된 욕망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했다. 그걸 말하는 순간 자신은 허풍쟁이, 거짓부렁의 대가가 되어 버린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 무서운 철각비마대를 돌려보낼 수 있었나요??
“정말 존경합니다. 어떻게 철각비마대 녀석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까??
‘그들이 얌전히 돌아가긴 돌아갔습니까? 그들은 적을 전멸시키기 전에는 결코 기수를 돌리는 법이 없다고 들었습니다만??
쉴새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무수한 질문. 그러나 대답할 조그마한 건더기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전법(法)은 무엇이었습니까?”
“전법은 무슨……!?
“주로 사용한 무공은 무엇이었습니까?”
‘무공은 무슨……!?
“어떤 류의 무공이 그들에게 유용하던가요?”
‘개뿔이……!”
그리고,
“도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가르쳐주세요!”
“가르쳐주세요!”
“가르쳐주세요!”
그러나 결코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히고 싶지 않다는 애로(隘路)사항 때문에, 장마철 범람하는 강물처럼 천지사방에서 몰려드는 질문 홍수에도 청흔은 입을 굳게 다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긋지긋한 소리에 귓구멍이 아파옴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후우…….?”
절로 깊은 한숨이 내쉬어졌다.
꿈에도 잊혀지지 않는 그날의 일, 그날의 장면, 그리고 그날의 신위(神威)… 그리고 그날의 잊혀지지 않는 무모함!
아직도 그날의 일은 눈 안에 각인된 듯 선연하기만 했다.
뇌리 속에 화인(印)처럼 또렷하게 찍힌 영상! 당분간, 아니 평생 잊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넘겨졌던 기억의 책장이 다시 펼쳐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