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단외박(無斷外泊)
-운명의 장난
달이 기울며 밤이 깊어 간다.
천무학관 관도 기숙사인 검혼관의 취침 시각은 지난 지 이미 오래였다.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법!
오늘도 보람찬 하루를 마치고 관도들 모두 취침 상태에 들어갔다.
잠이란 시한부 가사 상태인 숙면을 통해 활기찬 내일을 보낼 힘을 축적하는 고귀한 행동이지만, 이 고귀한 행동을 내팽개친 채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밤이 깊어 가고 별은 그 빛을 더해 가지만 이 인간 비류연은 잠들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음! 달이 참 밝군.’
창가를 통해 바라보는 달이 무척이나 밝고 포근해 보였다. 은은한 월광이 밤의 장막을 드리우고 있었다.
“자애로운 달과 보석 같은 별! 이 둘과 낭만을 견줄 것은 역시 그것밖에는 없지!”
만일 그것이 없다면 이는 달과 별과 이 아름다운 밤을 모욕하는 무례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필요한 것과 행해야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무단외박(無斷外泊! 그리고 음주가무(飮酒歌舞)!”
비류연의 눈이 번쩍, 음흉하게 빛났다. 피곤은커녕 힘이 남아돌아 주체를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남아도는 힘을 자아 발전이나 무림 평화에 투 자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심야의 그림자가 나를 부른다. 밤의 어둠은 나의 이성을 가리고 은은한 월광이 나를 유혹하는구나.”
무단(無斷)이란 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저지르는 용기(勇氣)를 뜻한다. 그리고 뒤에 외박(外泊)이란 말이 붙으면 이것은 가증스럽게도 기숙사라 불리는 답답하고 지루한 우리와 같은 감옥을 빠져나갈 수 있는 영명한 지혜와 진취적인 행동력을 뜻한다.
무단외박은 젊은 그 나이 또래 남자 관도의 낭만이라 할 수 있었다. 딱딱한 규범에서 탈피하여 개인의 의지로 자유를 찾아 나서는 숭고한 행위가 바로 무단외박인 것이다. 불법, 규칙 위반도 포장하기 나름인 것이다.
지금 이 시각 비류연은 달과 별과 바람과 구름의 힘을 빌려 그 용기 있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 하는 것이다. 세간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극비리에 떠도는 정보 에 의하면 그 용기와 지혜의 우수한 조합물이 실행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여태껏 단 한 번의 실수도 없는 완전범죄였다고 한다.
완전범죄가 아니면 저지르지 않는다!
그것은 비류연의 투철한 신념 중 하나였다.
기숙사 생도들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도깨비로 불리는 규칙과 기강의 화신 철혈무정검 강하윤도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고 있었다. 관도들의 취침 시간과 사감의 취침 시간은 엄연히 달랐다. 불이 꺼진 이후에도 기숙사 전체를 돌며 잘못된 것이 없나 살펴야 하기 때문에 강하윤의 취침 시각은 자연 관도들보다 늦을 수밖에 없 었다.
게다가 오늘 강하윤은 숙직이 있는 날이라 숙직실에 동료 사감인 청성파의 정호유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요즘 그 조사관이 온 후 학관이 좀 소란스러워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허허허, 그래도 확실히 미인이더군요. 그렇지 않소이까? 보면 볼수록 미끈한 엉덩이하며…….”
“정 노사!”
정호유의 농짓거리에 강하윤이 약간 언성을 높였다.
꼭 그렇게 나이 헛먹은 것을 티내고 싶은 것인가?
청성속가 출신인 정호유는 유들유들한 면이 강한 자라 강하윤 자신하고는 궁합이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오늘 당직은 이 사람과 함께 서야 하기 때 문에 별수 없이 흰소리나 하면서 시간을 때워야 했다.
침묵으로 지새는 당직보다 더 긴 당직은 없다. 당직(當直), 숙직(宿直), 근무(勤務)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며, 자신의 내면에 내재된 심리 시계와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과의 싸움에 약한 사람이 정호유였다. 때문에 그는 입을 놀리는 것을 절대 멈출 수가 없었다. 자신이 혀를 멈추는 그 순간 자기 내면의 시계도 함께 멈춘 다는 것을 그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루함을 상대로 한 전투의 전우로서 강하윤은 썩 좋은 동료라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정호유의 입은 평소보다 두 배는 더 많이 움직여야 했다.
“심심하군요. 이럴 때 사고치는 애라도 한 명 나왔으면 좋겠습니다그려! 예를 들어 무단외박 같은 거 말입니다.”
정호유는 웃고 있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지루함과 싸우는 것보다는 그런 사건과 싸우는 편이 훨씬 더 시간이 잘 가기 때문이다. 여 전히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숙직은 장난이 아닙니다. 정 사감! 그리고 우리 학관에 그런 막돼먹은 짓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항상 규칙을 준수하는 아이들뿐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없다니까 그러시네요. 없다면 없는 겁니다.”
철혈사감 강하윤의 어조는 여전히 단호했다.
“허허허! 저도 압니다. 그래도 혹시라도 나올지 모르는 천에 하나의 가능성을 생각해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가벼운 농담이죠. 설마 우리의 날카롭고 영민한 이목 을 피해 그런 간 큰 짓을 벌일 관도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천리지청술을 장난으로 펼치고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가벼운 농담이죠. 정 말 철 사감은 말이 안 통하는 분이군요. 허허허허!”
정호유가 점잖게 웃었다.
보통 강하윤은 같은 동료 노사들에게도 철(鐵) 사감으로 통하고 있었다.
강하윤의 말대로 이들은 두 손 놓고 농담 따먹기만 하며 밤을 지새우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귀와 감각은 항상 사방을 향해 열려 있어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도 주 위의 모든 움직임을 살펴볼 수 있었다.
만일 무단외박이라는 청운의 꿈을 품은 이가 있다면, 이들 절정고수 두 명의 이목을 뚫고 나가야만 한다. 목숨을 걸 자신이 있는 이들이라면 도전할 가치는 충분했 다. 그러나 최근 들어 도전하는 자도 거의 없고 성공하는 자도 드문 게 이 일이었다.
물론 모든 일이 그러하듯 예외는 있었다.
이 둘이 한가로이 이런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고 있을 때, 비류연은 이미 그들의 감각 청취 범위를 벗어난 이후였다.
이 두 사람이 자랑하던 천리지청술도 비류연의 기척을 잡아내는 데는 실패한 모양이었다.
무단외박을 결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1각 정도의 준비운동과 호흡 가다듬기가 필요하다. 이때 속으로는 ‘절대 성공’을 빌며 각오를 다지는 것이다. 만일 사감의 눈 에 걸릴 경우 치명적인 감점 요인이 되므로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은밀성과 신속성이다. 그리고 평상시 사감들의 움직임은 알아두는 게 결행하는 데 편하다.
물론 결행할 때에는 호흡 하나 밖으로 새어 나와서는 안 된다. 은밀성 다음으로는 과감성이다. 일의 진행 도중 마음이 흐트러지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 마음의 흐트러짐은 곧 신체의 흐트러짐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소한 실수도 이곳에서는 즉각 실패로 이어질 염려가 있으니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모든 일에는 마무리가 중요하다. 즉 다음날 확실히 제 시간에 복귀해 수업에 늦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괜한 꼬투리를 노사들에게 남겨 주어서는 안 된 다.
그만큼 절정고수의 이목을 피해 무단외박을 감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장애와 난관도 많았다. 그러나 비류연은 백향관마저도 들락날락한 몸! 이 정도쯤은 누워 떡먹기였다.
천무학관의 철통같은 경비는 거의 완벽에 가깝다. 최소한 근무 시간에 조는 사람은 없으니깐 말이다.
그러나 적은 인원으로 드넓은 천무학관 전체를 경비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성벽 위로도 정기적으로 보초병이 순찰을 다니지만, 인원이 적은 만큼 순찰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에 틈은 나타나게 마련이다. 때문에 그 허술한 틈새를 사방팔방 에 거미줄처럼 배치해 놓은 기관장치로 보충하고 있었다. 취침 시각이 지나면 죽음의 함정이 천무학관 전체에 펼쳐지는 것이다. 그것이 이곳 천무학관을 완벽한 철 벽의 성채로 만드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비류연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무용지물이었다. 비류연은 애써서 땀 흘려 기관장치들을 만들고 어떻게 하면 매순간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을까 배 치에 힘쓴 장인들의 노고를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비류연은 단 다섯 번의 도약으로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어 여섯 번째 도약으로 최종 장애물인 여덟 장 높이의 성벽을 유유히 뛰어넘을 수 있었다. 경험이란 참으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어서 이 짓도 많이 하다 보니 늘어서 행하는 데 아무런 거침이 없었다. 초반의 긴장감 따위는 이제 참새 눈곱만큼도 느낄 수 없었다.
벽호공(壁虎功:일명 도마뱀 신공이라고도 불리는 것으로, 아무런 받침 없는 벽을 타고 넘을 수 있는 무공의 일종)을 사용할 것도 없었다.
이날 밤하늘에 떠 있는 달과 별은 천무학관의 성벽을 아무런 제지 없이 월담하는 비류연의 유유자적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고자질하지는 않았 다.
“여긴 언제 봐도 휘영청 밝군! 좋아! 좋아! 지상의 별들이 술에 취해 나를 반기는구나!”
휘영청 밝은 것은 달만이 아니었다. 대로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주가(酒街)에서 내건 갖가지 초롱불들이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모습은 대지에 내려온 별무리를 연상시켰다. 게다가 이 지상의 별들은 사람들에게 술까지 제공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엔 염도랑 함께 왔었지…….”
저번에 정기적으로 행해진 밤 외출을 빙자한 무단외박은 염도도 공범이었다. 역시 무사부인 염도랑 함께 있으니 여러모로 편리한 점이 많았다. 술값도 굳고 발각 될 위험도 없고…….
‘오늘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것을… 그런 식으로 거절하다니…….”
그 점이 못내 아쉬운 비류연이었다.
“바쁩니다. 아주 바빠요. 요즘은 제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하루에 몇 번씩 칼을 드는지 모릅니다. 반으로 가르면 혹시나 몸이 두 개가 되지 않을까 해 서요. 내가 지금 이토록 과다한 업무에 시달리는 것도 모두가 다 밉살스런 사부 당신 때문이라구요.”
“아니 왜요? 갑자기 생사람은 왜?”
어리둥절해진 비류연이 반문했다. 이렇게까지 인신공격을 당하면 억울한 게 당연지사였다.
“사부가 나한테 주작단 하룻강아지들을 떠넘기지만 않았어도 이런 과중한 업무에 시달릴 일은 없었을 겁니다.”
힐끔 어깨너머로 살펴본 그의 책상에는 서류가 한 무더기나 쌓여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현기증이 일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때문에 오늘은 상대해 줄 수 없군요. 내일까지 주작단 녀석들에 대한 종합적인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니까요. 이 녀석들 내일 두고 보자. 감히 이 몸을 이토록 힘들 게 만들어?”
빠드득! 빠드득!
자신에게 이런 과중한 서류 업무를 부과한 원흉들에 대한 적개심이 그의 전신에서 폭출되었다. 가장 근원적인 원흉에게는 화풀이를 할 수 없으니, 두 번째 원흉들 에게로 그 화살이 집중되었다.
아무래도 주작단의 내일은 암울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비류연이었다. 물론 그 암울함의 근본적 원인이 자신이라는 점은 간과해 버리고 말이다.
“그래도 아쉽긴 아쉽군!”
역시 항상 곁에 있던 물주가 잠시 자리를 비웠더니 옆구리가 허전했다.
“오늘은 철저히 혼자서 놀아 볼까!”
열심히 일하는 나이 든 제자를 대신해서 젊은 사부가 한껏 놀아 주기로 작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