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 더 네뷸러 (Over the Nebula) – 2화 : 손가락 깨물기
손가락 깨물기
변신의 힘으로 약 기운을 모두 씻어낸 케이토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모습, 그러니까 친절하고 품위 있으며 이곳 출신이 아니라서 가질 수 있는 거리감을 가진 매혹적인 이방인이 되어 감방을 나왔다. 하지 만 션의 경우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그의 손목은 큰 말썽 없이 잘 나았지만 그를 둘러싼 상황은 그렇게 쉽게 아물지 않았던 것이다.
션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모두 책임졌던 잔파드로스 신관은 자신 의 교육이 모자랐음에 대성통곡하며 션의 침대 머리맡을 지켰다. 그러 자 그의 고아들의 행색이 당장 초췌해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요란하 스 부인과 소란다스 부인 같은 친절한 부인네들이 열성적으로 달려들어 고아들을 돌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일도 아니었다. 아주 고약하게도 션을 치료하는 과정 에서 그의 겉옷 주머니 속에 든 유서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 얼 빠진 녀석이 유서에 적어놓은 ‘잔’이라는 이름을 설명해야 했고, 그러 자 얼마 있지 않아 대장장이 윙이 쭈뼛거리며 우리 사무실을 찾아 왔다. 에존하우어 가에서 단검 주문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주문서에서 규정한 단검의 조건은 퍽 인상적이었다. ‘몸 속에서 부러져도 좋으니, 뼈라도 자를 수 있을 만큼 예리하게’였다.
이파리 보안관은 반미치광이가 된 것 같았다. 이 소도시에서 율피 트 소란다스와 미레일 요란하스가 벌이는 분쟁보다 더 위험한 분쟁이 생긴 것도 처음인데, 하필이면 그것이 살인 계획이라는 사실은 이 가엾 은 오크를 극도로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절망은 때 이른 것이었다. 바탄 에존하우어는 다른 예 의 바른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이파리 하드투스 보안관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 사실은 보안관을 더욱 낭패한 지경으로 빠트렸다. 바탄은 일가친척과 하인과 지인들을 모조리 이 도시로 초청해 버린 것이다. 바 탄의 조카, 사촌, 팔촌 동생, 십년지기, 그리고 그들의 하인들 따위가 에 존하우어 가로 몰려오는 모습을 보며 나는 사직서의 초안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금번 본인은 일신상의 사정으로 부득이 소직을 사직코저 하오니…………..?’
하지만 이 경우 바탄 에존하우어의 안배는 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는 상대방의 종족 특성을 간과했던 것이다.
“전쟁? (하늘을 향해 오크의 전투 함성을 외치고) 좋아. 어디 해보자!”
이파리 보안관은 오크였고, 바탄 에존하우어를 진정시키거나 션 그 웬을 변호하는 일에 대해서는 죽을상을 지었지만 싸움의 냄새를 맡자 길길이 날뛰었다. 그는 송곳니를 씩씩하게 휘두르며 대로로 나섰다. 그 리고 에존하우어 패거리에게는 많은 수의 단검과 식칼과 몽둥이 따위 가 있었지만 장검은 없었다. 이미 말했지만 장검은 살인 무기의 차원을 넘어서 권위의 상징이다. 장검을 가진 자를 존경하고 두려워하도록 교 육받은 그들은 장검을 빗겨 차고 오크만이 지을 수 있는 악몽 같은 표 정으로 대로를 돌아다니는 보안관의 모습에 오금이 저리는 기분을 느 꼈다.
결과적으로 에존하우어 가에서 시장 저택에 이르는 1킬로미터 정도 의 대로는 소심한 이들은 제대로 걸어 다니지도 못할 정도의 긴장감으 로 가득 차고 말았다. 오크 한 명 대 수십 명의 사람이었지만 그 대치 는 팽팽했다.
그 정체 상태는 견디기 어려웠고 아무래도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자의 시간이 다가온 듯했다. 나는 구상 중이던 사직서를 마음속의 쓰 레기통에 던져넣고는 율피트와 미레일을 소환했다. 그들에게 모종의 놀 이를 가르쳐준 다음, 사직서 대신 유서를 구상하며 대로로 나아갔다. 율피트와 미레일은 나를 구원했다. 두 녀석은 각자 에존하우어 가의 손님들에게 다가갔고, 그들 중 코흘리개 어린애들을 경계하는 친구들 은 없었다. 내가 두 악동에게 가르쳐준 놀이는 대략 이러했다……………..
율피트:귓속말로, 하지만 다 들리게) 야, 저 아저씨 힘세 보인다.
미레일:귓속말로, 역시 다 들리도록) 뭘. 티르 아저씨는 위어울프도 때려잡았잖아!
그리고 소년 소녀는 순진무구한 눈에 동정의 빛을 가득 담은 채 이방인들을 바라본다.
두 악동은 내 주머닛돈에 가혹할 정도의 타격을 입혔지만 어쨌든 내가 원한 효과를 조장해 내었다. 타지에서 몰려온 자들 중에도 위어 울프를 쓰러뜨린 보안관 조수의 소문을 들은 자들은 적지 않았다. 자 기가 사지에 끌려 들어온 거라 판단하고 정신이 번쩍 든 뜨내기들은 앞다투어 이 도시를 떠나갔다.
대치는 삽시간에 우리 쪽에 유리해졌다. 초조해지고 분노한 바탄은 케이토를 끌어들인다는 어쭙잖은 시도를 감행했다. 만약 그것이 가능 했다면 난 사직서도 쓰지 않은 채 야반도주했을 것이다. 하지만 케이 토는 바탄에게 악보 한 부를 건넬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에이라에게 바치는 추모곡이었고, 퇴직한 음악 교수 랜돌 마타피가 그 것을 연주해 주었을 때 나는 눈물을 흘렸다.
이리하여 이 개척 도시 최악의 사태가 될 수 있었던 전쟁은 발발하 기도 전에 정의와 상식과 윤리의 옹호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이파리 보 안관은 솔직히 아쉬워하는 듯했지만 그 결과에는 만족했다. 하지만 바 탄 에존하우어는 이런 결말에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던 듯했다. 그는 소름 끼치는 얼굴을 한 채 시장 저택 주위를 배회했고, 그의 이웃들은 그런 모습에 많은 우려를 표했다. 버나드 교장이나 아인켈 우체국장, 심지어 잔파드로스 신관이 설득했지만 바탄은 션을 용서하지 않았다. 증오는 거창하지만 엉성한 모습에서 작지만 날카로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좋지 않았다.
션은 팔에 감긴 붕대를 살짝 어루만지며 미소 지었다.
“그러니 제가 세상을 없애도록 놔두시죠. 에존하우어 씨도 만족하실 겁니다.”
“신관님 앞에서도 그런 소리 하나?”
“아니요.”
“잘했어. 만일 그랬다면 자네가 자네 자신을 씹게 만들어줬을 거야.”
“그건 수수께끼인가요? 답을 모르겠군요.”
“자네 이가 왕창 빠져서 입속을 표류하게 되었을 거라는 뜻이야.”
션은 내가 끔찍이 싫어하게 된 그 메마른 미소를 또 지어 보였다. 나 는 내가 오크가 아니라는 사실에 분노를 느꼈다. 오크였다면 이 경우 전투 함성이라도 한번 질러보련만, 대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밤은 깊었고 거리엔 쏟아지는 달빛이 그득했지만, 바탄 에존하우어 는 아직까지도 골목 건너편의 처마 아래에서 시장 저택의 이 층을 노 려보고 있었다. 지독한 그레이엘프 같으니, 두 명의 예비 살인자가 션을 노리고 있었기에 이파리 보안관과 나는 번갈아 가며 션의 침실을 지켜 야 했다. 아마 이 도시의 젊은 애들에겐 요즘이 신나는 나날일 것이다. 나는 두 명의 예비 살인자 중 한 명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바보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죽겠다는 놈 죽게 내버려 두는 편이 간단한데.”
“예, 그렇지요.”
“케이토가 준 그 팔찌를 생각하고 너를 위해 수고하고 있는 우리들 을 좀 생각해 봐라. 그러고 나서 내 질문에 대답해. 왜 죽겠다는 건가?”
“살아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또 그 이야기냐?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고? 하지만 그 이유라는 것 이 어디서 오는데? 살아갈 이유는 자기가 만들어 자기에게 선물하는 것일 텐데.”
“그렇겠죠.”
“그런데?”
“재료가 있어야 만들지요. 환상을 소재로 뭔가를 만드는 건 피곤해 요.”
“재료가 없다고?”
“부모는 없었고, 아내는 죽었고, 자식은 태어나지도 못했어요. 17년 동안 금치산자였고 2년 동안 도제였지만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다 시 무능력자가 되었지요. 내게 무엇이 남아 있지요? 도대체 뭘 가지고 살아갈 이유를 만들 수 있지요? 무엇을 가지고 제 점토판에 그림을 그 리지요?”
동정하고 싶었지만 분노가 먼저 다가왔다.
“그게 어쨌다는 거냐! 동정받길 원하는 거야? 그걸 원해? 세상을 몰 인정한 괴물로 만들어놓고 그 앞에 고꾸라져 벌벌 떠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 퀭해 빠진 눈과 텅 빈 머리만 있으면 되니까! 하지만 핏줄 속에 빨간 피가 흐른다면 주먹을 쥐고 두 다리로 일어설 줄도 알아야해!”
“티르, 집어치워요.”
“뭐라고?”
“팔다리가 다 잘린 사람에게 달리라고 말하지 마세요. 고통 때문에 우는 것이 고작인 사람에게 춤추지 않는다고 꾸짖지 말라고요.”
션의 멱살이라도 붙잡고 흔들기 위해 침대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러 지 못했다. 션이 눈을 활활 불태우며 나직하게 으르렁거렸기 때문이다. “그에게 세상이 해준 일에 감사하라고 말하지 마시죠.”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션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션은 괴성을 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움찔하며 두 팔을 들어 올렸 지만, 이 노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션은 왼손으로 내 손등을 할 퀴며 오른손으론 내 장검을 뽑아 들었다.
나는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내지르며 션의 어깨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션은 내 손 아래를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더니 그대로 침대 아 래로 굴러떨어졌다. 나는 허공을 끌어안으려 애쓰다가 그대로 침대 위 에 나동그라졌다. 가까스로 뒤를 돌아보니 션은 이미 똑바로 일어나 있 었다. 그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녕, 티르”
꽝!
잠깐 동안 나와 션 모두 얼빠진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폐하께 대한 벅찬 감사의 염을 느꼈다. 황제 폐하, 감사하나이다! 장검의 소지를 엄격히 제한하신 그 뜻이 세세만년 빛나리!
션은 내 장검으로 잽싸게 자기 목을 찌르려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장검을 처음 잡아보는 터라 그게 얼마나 긴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션은 칼몸으로 자기 이마를 호되게 때리고 말았다. 아마 머릿속에 불 이 번쩍했겠지. 겨우 정신을 차린 션은 칼자루 대신 칼날을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내가 몸을 날린 후였다. 션과 나는 서로를 끌어안은 채바 닥에 나가떨어졌다.
괴성, 인간, 비명, 그레이엘프, 욕지거리, 장검 등이 뒤범벅이 된 채 뒹 굴었다.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포옹이었지만, 녀석을 깔아뭉갠 채 장검을 쥔 오른팔을 거머쥘 수 있었다. 냅다 비틀어 올리자 션은 비명 을 질렀다. 그게 다친 팔이라는 것을 깨닫고 움찔했을 때 션의 왼팔이 날아왔다.
그레이엘프, 그것도 션같이 깡마른 녀석의 주먹에 맞아봤자 내가 꿈 적할 리가 없지만, 안타깝게도 션의 왼팔엔 케이토의 은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나는 휘청했고 그러자 션은 몸을 거칠게 흔들어 빠져나갔다. 빌어먹을 장검은 놓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션은 이번엔 칼날을 움 켜쥐었다. 칼끝은 정확히 목 쪽으로 향했다. 나는 입을 움켜쥔 채 냅다
고함을 질렀다.
“썩을, 안 돼에에에에!”
콰자자작 와장창!
내 비명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소리가 들려왔다. 션은 흠칫한 얼굴로 옆을 돌아보았고 나 또한 그곳을 보았다.
창문이 사라져 있었다. 창문이 있던 자리는 벽에 뚫린 구멍이 대신 하고 있었고 거기엔 푸른 달을 배경으로 거대한 늑대 인간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한 손엔 창틀째 뜯어낸 창문을 들고 다른 손으론 뜯겨나간 벽을 붙잡은 채 그는 형형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우우우……우!
“바탄이 어떻게 도망쳤는지 들어봤어? 자기 집까지 800미터를 눈 깜짝할 사이에 달려갔어. 그 친구 앞으론 시장 댁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을 작정인 것 같아. 물론 케이토 곁은 말할 것도 없고.”
이파리 보안관은 자못 즐겁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기분 에 동참할 수 없었다.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젠장. 지데와는 완전히 달랐어요. 그때는 대 낮이었고 지데는 훨씬 작았지요. 뭐 그래 봐야 저보다 더 컸지만. 하지 만 그 달빛 아래에 그 모습이라니.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것 같습니다.”
“그래? 자네가 그럴 정도라면 바탄은 확실히 포기했겠군. 그런데 말 이야 자네에겐 섬뜩한 경험이었겠지만, 동시에 유익한 경험이기도 하지 않을까?”
“예?”
“케이토 말이야. 변신했으면서도 자넨 건드리지 않았잖아. 션만 기절 시키고는 곧장 돌아갔지.”
나는 말하지 않았다. 케이토는 그때 분노 때문에 변신한 것이 아니라 급히 당도하기 위해 변신한 것이며, 따라서 이성적인 행동을 할 여 지가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봤자 우울한 이야기다. 그냥 이파리 보안관의 견해를 따르는 것이 즐거울 것 같다. 하지만 케이토의 다음번 변신 때는 내 장검이 다른 사람의 손이 아닌 내 손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날 밤 케이토는 이파리 보안관의 말처럼 곧장 돌아가지는 않았다.
“보안관님, 혹시 자살하고 싶었던 적이 있습니까?”
“넌 있냐?”
“없습니다, 한 번도.”
이파리 보안관은 코를 한번 실룩인 다음 말했다.
“두어 번 있었다. 한 번은 꽤 심각했지.”
“무엇 때문이었지요?”
“젊었을 적, 어떤 전쟁에 참가하고 있을 때였다. 머리 굴리지 마 넌 들어보지도 못한 전쟁일 테니. 어쨌든 그때 나 때문에 스무 명 가까이 죽게 된 일이 있었다. 그 일이 있고 한 달쯤 뒤 술 마시다가 죽은 자들 을 보게 되었지. 그때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그러지 않았습니까?”
“너무 취했거든. 자살도 못 할 정도로 술이 깼을 땐 전쟁도 끝나 있 었다. 죽은 자들도 더 보이지 않았고.”
나는 보안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투박한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는 죄의식에 괴로워하고 있지도 않았고 수치스러워하 고 있지도 않았다.
“션은 팔다리가 다 잘린 사람에게 달리라고 하지는 말라더군요. 뭐라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파리 보안관은 고개를 끄덕이고 뜨개질감을 들어 올렸다.
“미레일 앞니 사건 기억나냐? 워낙 별일이 다 있다 보니 이젠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지는군.”
“기억합니다.”
“세상을 굴러가게 하느라 공사다망하신 나의 조수여 달려가서 션 의 앞니를 확 뽑아주지 그러냐? 그게 아니라면 녀석 뒤통수에 박힌 자 살 충동이라도 좋고.”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몰라도 상관없어.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그런 일은 할 필요도 없고 해줄 수도 없는 일이야.”
“이웃이 해줄 수 있는 건 그냥 옆에서 소란을 부리는 것이 전부라는 말입니까?”
“그렇게 말하고 싶다면 그래도 좋아.”
“우리는 더 많은 일을 해줄 수 있을 겁니다. 소란 떨고 감시하고 보 호하는 것 이상으로, 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뭔가가 있을 거라고 요.”
“의미는 자기가 만드는 거야. 다른 사람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보안관의 말은 내가 션에게 한 말이었다. 그래서 잠시 동안 할 말이 없었다. 바로 그때 사무실의 문이 무지막지한 기세로 열렸다.
꽈광!
보안관과 나는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맹렬한 기세를 이기지 못한 문짝은 기어코 떨어져 나갔고 그 뒤에서 사무실로 뛰어든 것은 우체국장 아인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내가 다급히 질문했는데도 아인켈은 탁자를 짚은 채 씩씩거릴 뿐 아무 대답을 못했다. 죽을 힘을 다해 달려온 것이 분명하다. 그의 얼굴 을 들여다본 우리는 이 트롤의 얼굴이 공포에 질려 있음을 깨닫고 충 격에 빠졌다. 저 강대한 트롤을 이렇게 떨게 만든 일이 과연 무엇일까? 우리가 재촉하자 아인켈은 온몸의 힘을 끌어모은 듯한 기세로 외쳤다.
“흑사병!”
마하단 쿤은 자칫 노움으로 착각되기 쉬운 모습이었지만 사실은 인 간 난쟁이였다. 그리고 그의 직업은 시종이었지만 동시에 호위 무사이 기도 했다. 전자는 난쟁이에게 그럭저럭 어울리는 일이겠지만 후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옛이야기에는 외팔이 무사나 심지어 장님 전 사의 이야기까지도 등장하지만, 그런 황당무계한 이야기들 속에서조차 도 난쟁이 검객의 이야기는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마하단 쿤은 호위 무사처럼 행동했고 호위 무사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 다도 손에 든 장검으로 불쌍한 우편마차 마부를 위협하고 있는 점에 서 그의 무사다움이 확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더 가까이 오면 베겠다.”
마하단은 키 큰 마부를 땅에 무릎 꿇게 하고는 그 뒤에서 마부의 머 리카락을 움켜쥔 채 나직이 말했다. 꽤 볼거리가 될 만한 광경이었지만, 우리 예절 바른 시민들에겐 좀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분별 있는 우리 시민들은 그래서 골목이나 집안, 달구지 같은 곳에 숨어서 마하단을 바라보았고 텅 빈 대로에는 마차와 마하단, 마부, 그리고 우리 둘 이외 엔 아무도 없었다.
내가 주위를 둘러보는 동안 보안관은 붙잡혀 있는 마부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 어쩌자고 장검을 가진 자를 마차에 태워준 건가?”
마부는 우리 시민들보다는 훨씬 침착한 상태였다. 험로를 달리며 별 의별 상황에 맞닥뜨리는 우편 마차의 마부는 대가 셀 수밖에 없다. 목 에 칼날이 닿아 있는 난처한 상황이었지만 마부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장검 소지 허가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안관님.”
보안관과 나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소지 허가증이라고? 일반인으로 서 그런 걸 받는 사람이 있긴 있었군. 하지만 저 난쟁이가 어떻게 그걸 받을 수 있었을까? 이파리 보안관은 눈살을 찡그리며 마하단에게 말 했다.
“장검 소지를 허가받았다면 당신은 분명 모자람 없는 인격을 가졌 다는 말일 텐데. 그런데 왜 이런 무도한 짓을 하는 건가? 당신에게 그것 을 허가해 주신 분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느 곳의 명망 높으신 영주 시거나 고귀한 신분의 귀족이겠지. 당신이 그분께 어떤 잘못을 저지르 는지 알고 있는 건가?”
마하단의 얼굴에 아픈 표정이 스쳤다.
“그분께는 내가 직접 벌을 받을 거야. 보안관. 하지만 난 지금 내 행동을 취소할 수 없어.”
이파리 보안관은 그들 뒤편에 멈춰 있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흑사병 환자가 있다고?”
“내 주인님이시다. 그분은 치료를 받아야 해.”
숨죽인 비명 같은 것과 신음성, 그리고 문을 걸어 잠그는 소리 같은 것이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왔다. 주위를 돌아보자 골목길과 달구지, 그 리고 여물통 뒤에서 시민들의 모습이 싹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달 아나지 않은 몇몇 시민들은 분개하여 고함을 질렀다. 물론 그들을 들어 오게 했다간 우리 다 죽는다는 내용이었다.
이파리 보안관은 수심에 찬 표정으로 마하단과 마부를 번갈아 바라 보았다. 이파리 보안관의 얼굴을 돌아본 순간 봄의 오후 속에 서 있는 데도 옷 속의 어깨가 부르르 떨려왔다. 나는 보안관이 어떤 결정을 내 릴지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귀신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마하단 역시 알 고 있을 것 같다.
이파리 보안관은 장검을 뽑아 들었다.
“들여보낼 수 없다, 마하단. 그 마부를 놔주고 주인과 함께 이곳을 떠나라”
“제기랄, 그게 이곳의 도덕인가!”
“가슴 아픈 일이며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황제의 법 은 흑사병 환자에 대한 배제를 인정한다, 마하단, 그리고 황제의 법이 아니라도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도시 전체를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 다. 흑사병에 걸린 네 주인을 구할 가능성은 너무 적고 이 도시가 위험해질 가능성은 너무 많다. 도저히 허락할 수 없어.”
“내가 나가지 않겠다면?”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마. 그 마부를 죽인다 해도 내 결심은 바뀌 지 않는다. 그러니 괜한 사람 죽이지 말고 그냥 포기해.”
마부의 얼굴이 침통하게 바뀌었다. 하지만 존경스럽게도 비명을 지 르거나 울음을 터뜨리지는 않았다. 위험 속을 살아가는 우편 마차의 마부들에겐 유가족에 대한 보상금이 약속되어 있다지만, 그리고 이런 경우 침착하게 있는 편이 훨씬 똑똑한 행동이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 을 고려하더라도 마부의 절제는 대단했다. 충성스러운 마하단은 인질 을 잘못 선택했다.
그런데 왜 마하단 쿤의 얼굴에 좌절감이 떠오르지 않는 것일까. 마하단은 실망하지 않았다. 장검을 쥔 손이 떨리지도 않았고 분노 하여 욕설을 퍼붓지도 않았다. 오히려 만족하는 기색을 띠며 보안관을 노려보았다.
“우리 주인님을 구할 가능성이 적다고 했나, 보안관 하지만 주인님 을 쫓아냈다간 이 빌어먹을 도시가 구제될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질 텐 데. 그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 주겠어?”
“무슨 말이지?”
“여행자에게 불친절한 마을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나? 엉? 그런 이야 기 들어본 적 없나? 고귀한 자를 욕보인 무지한 것들이 어떤 징벌을 받게 되는지 모르냐고!”
“네 주인의 권세나 지위 같은 걸로 나를 겁주려는 거라면 헛수고하고 있다고 말해 주겠다. 네 주인이 파사디아의 공작이라 할지라도 나는 내 결정을 번복하지 않아. 어차피 그럴 리도 없지만.”
이파리 보안관은 안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하단, 고매한 인물인 척하고 싶었다면 하인이나 수행원들을 좀더 준비하지 그랬나. 그리고 우편 마차를 얻어타는 대신 고급 육두 마차 같은 것을 타고 왔어야지. 사람 볼 줄 모르는 우리 가련한 것들에겐 그게 더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텐데.”
이번엔 짓궂은 웃음소리와 조롱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하지만 마 하단은 여전히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분노 어린 눈으로 사방을 쏘아보 았고 그러자 비위를 긁는 그 웃음소리가 서서히 사라져갔다. 대로가다 시 고요해졌기에 마하단의 외침은 더 사납게 들렸다.
“내 주인님은 마법사이시다!”
때론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어쨌든 내가 인간임을 부정할 수는 없 다 마하단의 말이 떨어진 순간 그들 뒤에 있던 우편마차가 내 눈엔 지 옥에서 달려온 장의 마차처럼 보였다. 마차에 묶인 말들이 어찌나 사납 게 보이던지 순간 나는 그 말들이 육식성이 아닐까 하는 망상에까지 빠져버렸다. 유황 냄새 풍기는 검은 안개 같은 것도 보인 것 같고, 무시 무시한 웃음소리 같은 것도 들려온 듯했다.
하지만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보자 그것은 낡은 차체에 짐과 우편 물 행낭이 어지럽게 묶여 있고 그 위로 황야의 먼지가 잔뜩 쌓여 있는 보통의 우편 마차일 뿐이었다. 검은 안개 따위는 흔적도 없었다.
“마법사라면, 까로 트랙스?션 그웬을 찾아온 건가?”
“그래, 보안관. 네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마법사를 박대하고 내쫓을 정도로 대담한가? 이 도시에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저주가 내리길 원 한다면 그렇게 해봐! 모든 집에 불이 나고 가장 사랑받는 사람들이 죽 어가고 역병과 기근과 가뭄과 홍수가 일상이 되길 원한다면 네 그 잘 난 판단대로 해봐!”
나는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자세히 보니 검은 안개가 여전히 있 는 것 같다………….. 하지만 이파리 보안관은 코를 한번 쓱 훔친 다음 고개 를 끄덕였다.
“자네 고향 이야기하는 건가? 뭐 향수병이야 방랑자의 고질병이지.” 대담하여라, 나의 송곳니 근사한 보안관이여. 아무리 마술에 관심이 없는 오크지만 저렇게 담담할 수가 있나. 마하단 쿤은 기가 막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눈을 가늘게 뜨며 외쳤다.
“안 믿는다는 것이로군. 증거를 봐야겠다는 거냐?”
“그런 말은 한 적 없는데.”
“아, 보고 싶다는 것이로군. 좋아, 보여주지. 거기 옆에 있는 녀석, 보 안관 조수인가? 칼 좀 쓸 줄 아나?”
이파리 보안관은 어깨만 으쓱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 고 나는 웃지 않기 위해 배에 힘을 잔뜩 줘야 했다. 군수품 밀반출이라 는 창피스러운 전력이 있기 전까진 제국군의 검술 능력 향상을 책임지 던 자에게 ‘칼좀 쓰느냐?’는 질문은 너무 웃기지 않는가.
하지만 마하단은 아직 가장 웃기는 말을 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덤벼라! 네가 나를 이긴다면 순순히 떠나겠다.”
잠시 동안 보안관과 나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마하단을 바라보았다. 마하단은 작은 얼굴 가득히 노기를 피워올리며 우리를 보고 있었지만, 어떻게도 두려움을 느끼긴 어려웠다. 아주 가까스로 이파리 보안관의 입이 열렸다.
“그런 식의 대결엔 찬성할 수 없다.”
“뭐가 찬성할 수 없다는 거냐! 어차피 내가 계속 저항하면 무력을 행사할 거 아냐? 늦든 이르든 할 일이잖아. 왜? 이 난쟁이가 무서운 거 냐? 엉?”
마하단은 그렇게 외치며 마부의 등을 걷어찼다. 마부는 땅에 엎어 진 자세 그대로 부리나케 기어갔고 그러자 마하단과 나 사이엔 꽤 의 미심장한 공간이 생겼다. 하지만 그 공간 저편에 있는 난쟁이의 모습 은 나를 퍽 한심하게 만들었다. 나는 고개를 내두르며 장검을 뽑아 들 었다.
“처리하겠습니다, 보안관님. 장검을 압수한 다음 강제로 추방하지 요.”
이파리 보안관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눈 앞에 펼쳐진 현재를 외면한 채 과거의 비망록에만 코를 박 는 처사에 호의를 가져본 적이 별로 없다. 하지만 그때 나는 내가 비 웃어왔던 그 감정의 포로가 되어 있었던 듯하다. 칼자루를 쥘 때까지 나는 보안관 조수였지만, 칼을 빼 들고 시민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 며 마하단을 향해 걸어갈 때는 이미 제국군 검술 사범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 풋내기들. 너희들은 모두 쓰레기다. 그런 모욕적인 언사는 당치 도 않다는 듯이 눈살 찡그리지 마라. 너희들의 정체를 말해 줄까? 고향 에서 힘깨나 쓴다는 이야기 들으며 자라왔겠지. 그래서 분수도 모르고 제국군에 들어왔겠지. 자, 이제 날아가는 새의 똥구멍을 쑤실 정도로 높은 그 콧대를 내밀어 봐라. 뭉개줄 테니까. 원한다면 둘이서 덤벼도 좋아. 너희들의 사범이 정박아를 상대한다는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면 셋이서 덤벼보라고 충고하고 싶다. 세 놈은 모아야 한 놈 구실 할 것 같이들 생겼으니까’
마하단이 난쟁이가 아니었다면 이런 오만한 생각까지 떠올리진 않 았을지도 모르겠다고 변명해 본다. 그러나 마하단은 분명히 난쟁이였 고, 그 시절의 나는 월간 훈련 계획표를 구상하면서도 신병셋 정도는 작살낼 수 있었다(그 셋 중 트롤이나 오크가 섞여 있다면 약간 더 바빠야 했 지만 결과는 변함이 없다.).
결정적인 문제. 내 실력은 그다지 퇴보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하단 쿤은 보통 난쟁이가 아니었다.
마하단이 발을 구를 때까지만 해도 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 만 마하단이 장검을 내뻗었을 때 내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제 아무리 용을 써도 내 복부 이상은 공격 목표가 될 수 없을 거라고 여겼 지만, 마하단의 첫 번째 공격은 놀랍게도 내 목을 겨냥하고 있었다.
“티르!”
이파리 보안관의 비명이 들려왔을 때야 내가 무엇을 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혹독한 반복 훈련으로 근육에 새겨놓은 검술이 내 목숨 을 구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내 체면을 구했다. 마하단은 나를 죽일 생 각까지는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마하단의 검을 아슬아슬하게 쳐낼 때 나는 죽다가 살아난 기분을 느꼈다. 마하단 역시 꽤 놀란 듯했다. “어떻게!”
마하단과 나는 똑같은 말을 외친 다음 그런 서로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우리는 또다시 외쳤다.
“……!”
두 번째로 외친 말들은 서로 내용이 달랐기 때문에 처음처럼 명료하게 들리진 않았고, 그래서 우리는 동시에 신음을 흘렸다. 나는 턱으로 마하단을 가리켰다.
“먼저 말해.”
“고마워. 어떻게 그걸 막아낸 거냐고 물었는데.”
“아, 그래? 난 어떻게 그렇게 뛰어오른 거냐고 물었어.”
“잘 봐!”
이런 망할 자식. 마하단은 뛰어오르는 대신 아래로 세차게 뛰어들 며 검을 뿌렸다. 난쟁이라서 유리한 점이 있긴 있었다. 보통은 생각하기 힘든 낮은 궤도에서 공격이 들어왔으니까. 뒤로 뛰어 그것을 피한 다음 있는 힘껏 검을 내리찍었다.
그리고 막힐 리가 없는 곳에서 내 검이 막혔다.
나는 얼빠진 눈으로 내 검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하단의 검에 막혀 내 얼굴 앞의 허공에 멈춰 있었다. 검을 맞댄 채의 이런 힘겨룸은 칼싸움에선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상황이지만, 마하단은 난쟁이지 않은가. 높이가 맞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특별히 허리를 더 숙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마하단이 발판 위에 올라온 것도 아닌데 그와 나의 검은 서로 정확하게 맞물려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나는 있는 힘껏 검을 밀어 마하단을 뿌리친 다음 공포 섞인 절규를 외쳤다.
“공간이 일그러진다?”
마하단의 얼굴에 경탄이 스쳤다.
“허. 보통은 쓰러지기 전까진 알아차리기 어려운데.”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라.
바닥이 비스듬한 방이 있다. 바닥이 낮은 쪽에 키 큰 사람이, 그리고 높은 쪽에 키 작은 사람이 서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머리는 천장과 비 슷한 거리를 두게 된다. 사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이 모습을 볼 경우, 주의 깊게 보지 않는다면 그는 바닥이 비스듬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두 사람의 키가 같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사실은 방이 일그러져 있는 것이다.
마하단의 주위에서는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의 근처에 간 내 검은 느려지고 낮아졌다. 하지만 내 쪽으로 날아오는 마하단의 검은 정반대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갑자기 빨라지는 검, 느닷없이 솟아 오르는 공격. 차라리 눈을 감고 싸우는 것보다 못했다. 보통 사람과 싸 우는 것과 똑같다고 여기면 될 테지만, 몸 주위로 호전적인 날붙이가 춤추는 상황에서 현상과 실체를 분리하여 후자로써 전자를 해석하는 고등한 정신 활동을 시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나는 뒤통수를 호되게 맞고 졸도했다.
‘난쟁이에게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는 법’ 어쩌고 하면 사람들은 그것이 일종의 경구라고 생각할 것이다.
의식은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돌아왔다.
익숙지 않은 광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빛이 감도는 기둥과 천장, 그리고 벽에 걸려 있는, 농기구도 아니고 대장간 연장도 아닌 묘한 모습 의 도구들. 목공소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사냥꾼의 오두막 에나 걸려 있을 법한 저 거대한 뿔은 뭐지? 그리고 저 커다란 솥은 왜 기분 나쁜 하얀 얼룩으로 가득한 것일까. 이것들이 대관절 무엇이냐고 묻는 내 눈의 질문에 대답해 주기 위해서 내 뇌는 과거의 기억들을 뒤 적거려야 했다.
구스룬 프리모 궁장의 공방이었다. 안도의 한숨과 더불어, 지옥의 기괴한 고문 도구쯤으로 보이던 것들이 평범한 연장과 활 만드는 재료 들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에도 우당탕거리는 소리는 계속되었고, 그래서 난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하단 쿤이 활과 화살 무더기를 끌어안은 채 달려가고 있었다. 마 하단은 그것들을 창문 아래 쏟아놓더니 곧 다른 무더기를 들고 와 그 옆의 창문에도 쏟아놓았다. 아무래도 그 난쟁이가 공방을 요새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문을 보자 기대한 대로의 모습, 그러니까 탁자와 의자, 궤짝 등으로 막혀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마하단 쿤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어쨌든 공방 중앙의 기둥에 묶어놓는 것이 큰 방식의 귀빈 대접이라고 보긴 어려울 것이다.
어깨너머를 돌아보자 내 반대쪽엔 이파리 보안관이 묶여 있었다. 불쌍 하게도 머리 한쪽이 찢어진 채 기절해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내게 말 을 걸어왔다.
“정신이 들었어요?”
션 그웬이 물그릇을 든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션? 여기서 뭐 하고 있냐”
“저 난쟁이는 도와줄 사람을 요청했지요. 그리고 어차피 제 손님들이잖아요.”
“그 물은 나 주려고?”
“죄송하지만, 아뇨. 조금만 기다리세요.”
션은 몸을 돌렸다. 넓은 작업실 저편에는 어울리지 않는 검은 휘장 같은 것이 늘어져 있었다. 션은 그 휘장을 들어 올렸다. 짧은 순간 그 뒤편을 볼 수 있었지만, 온통 검은 그림자들뿐이라 보이는 것이 별로 없었다.
션이 휘장 안으로 사라지고 나서 얼마 후 맹렬한 기침 소리와 토하 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격한 신음과 흐느낌. 그리고 짧고 비틀린 침묵. 뒤이어 모골이 송연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분노하는 비명이었다.
곧 션이 빈 물그릇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나는 션의 셔츠 앞섶에 묻 어 있는 피 섞인 노르스름한 액체를 보며 몸을 떨었다. 내 시선을 알아 차린 션은 자신의 셔츠를 내려다보곤 손수건을 꺼내어 차분히 닦아내었다.
“그 뒤에 누구냐? 까로 트랙스?”
“al.”
“그 사람은 흑사병 환자다.”
“알고 있어요. 물 가져다드릴까요?”
“사양하지.”
션은 다시 그 우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걸어가려던 션은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쥐고 있던 손수건을 내려다보았다. 션의 손 안에 구 겨져 있는 하얀 손수건이 왠지 꽃처럼 보였다.
그 손수건이 션의 얼굴 쪽으로 올라갔을 때 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미친 짓 집어치워!”
하지만 션은 손수건에 코를 파묻고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잇소리를 내며 몸부림을 쳤지만 밧줄은 헐거워지는 기색조차 없었다.
“티르, 얌전히 있지 못하겠나? 난 지금 자네에게 예절 교육까지 시 킬 여유는 없어.”
고개를 돌리자 마하단이 이마를 훔치며 내 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다시 돌아보니 션은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마하 단에게 화내기로 했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나? 황제 폐하의 관료를 이렇게 다루고도 무사할 줄 알아?”
마하단은 내 협박을 무시한 채 자신이 할 말만 꺼내었다.
“주인님께서 쾌차하신 다음, 저 그레이엘프 친구와 함께 여기를 떠나겠다. 자네와 보안관은 그때까지 내 인질이야. 얌전히 있겠다면 해를 끼치지는 않겠어.”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흑사병 환자와 한 지붕 밑에 있는 처지에 그보다 더 반가운 말도 없군.”
“자네와 보안관이 먹고 마실 건 다른 식기에 따로 만들어오라고 명 령했어. 그리고 자네들은 저 휘장 너머로 갈 필요가 없고. 그래도 전염 이 된다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내가 더 이상 손써 줄 수 있는 부분 은 없어. 있다면 알려줘 고려해 볼 테니.”
“꽤 친절하시군.”
비아냥거린 것이었지만 마하단은 그것을 오해했다.
“속임수를 쓴 것 때문에 미안해서 그래.”
“속임수?”
“칼 쓰는 거 보아하니 자부심 있는 칼잡이였을 것 같더군. 그러니만 큼 난쟁이에게 졌다는 것이 가슴 아프겠지. 하지만 그럴 필요 없어. 그 건 공정하지 못한 싸움이었으니까. 자넨 자네의 검만 가지고 싸웠지만, 내겐 내 검뿐만 아니라 주인님이 걸어주신 마법도 있었지.”
“그게……, 마법이었나? 자네 주위의 공간이 일그러지는 거?”
“그래. 나는 내가 원할 때 그렇게 할 수 있어.”
나는 공간을 자유롭게 지배한다는 식의 이런 말을 거의 믿을 수 없 었다. 후두부를 대가로 내주면서 확인하지 않았다면 그런 이야기에 귀 를 기울이는 것 자체를 거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뒤통수가 너무 아팠고, 마하단의 태도 또한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주인님은 내가 무사가 될 수 있게 해주셨지. 난 싸움꾼이 아냐, 티 르. 폭력에 매료되는 그런 성격은 아니지. 하지만 난쟁이라는 것은 온 갖 조롱의 대상이지. ‘목소리는 들리는데 보이지 않는군. 어디 있나?’ ‘잠깐 기다려! 사다리를 내려줄 테니까, 올라와서 이야기하자고’ ‘죄 송합니다만, 손님. 저희 여관의 목욕탕에는 구명 부이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지라 손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이런 농담 들어봤나? 난 지겹게 들 었어. 그런 난쟁이가 자기 손으로 일반인을 거꾸러뜨릴 수 있다는 것이 어떤 기분이었을 것 같나? 그건 굉장한 선물이었어. 폭력을 휘두를 수 있다는 것에 고마워하는 것이 아냐, 티르. 그건 자존심과 긍지, 자기에 대한 자신감의 문제야.”
“이해할 것 같군.”
“그래서 난 주인님을 포기할 수 없어. 흑사병보다 더한 병이라 할지 라도 난 그분을 지키고 보호할 테고 그것을 위해선 무슨 일이라도 할 거야. 그러니 자넨 나를 협박하거나 설득하려면 어떤 말이 좋을까 따 위 고민할 필요는 없어. 완전히 무가치한 일이니까.”
마하단의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은, 필요하다면 수소 에게서 우유를 짜낼 수 있는 자의 눈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하지만 그 녀석은 보내줘.”
“그 녀석?”
“션 그웬. 그 애는 아무 상관 없잖아. 주인의 간병은 자네 스스로 하라고.”
“그건 곤란해. 난 자네들을 감시하고 이 공방을 지켜야 하거든. 그래 서 누군가 대신 주인님을 간병할 사람이 필요해. 그리고 그 친구를 위 해 흑사병이 창궐한 대지를 건너시다가 저렇게 되신 주인님을 생각할 때 난 다른 누구보다도 션 그웬을 원하게 되더군.”
외치고 싶었다. 그 녀석은 너나 네 주인을 도우려는 게 아냐. 흑사 병에 걸리려고 온 거라고! 하지만 그때 바깥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 고 마하단은 창가로 달려갔다. 그가 활과 화살을 집어 드는 모습을 보 고는 약간 어이없는 기분을 느꼈다. 저 팔로 시위를 당겨봐야 얼마나 당기겠나?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마하단은 주위의 공간을 일그러뜨 릴 수 있다. 그렇다면 시위를 약간만 당겨도 무서운 힘으로 발사되지 않을까.
조금 있다가 이파리 보안관도 깨어났다. 대범하긴 하지만 역시 오크 였던 보안관은 자신이 무력한 상태로 묶여 있다는 것에 주체할 수 없 을 정도로 노여워했다. 나는 그를 달래기 위해 시민들이 곧 우리를 구 하러 와줄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파리 보안관의 생각은 나와 정반대였 다(어쨌든 보안관의 분노는 가라앉았다.).
“글쎄, 그 사람들은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하고 겁먹을지는 몰라도 우 리를 구하려고 하지는 않을 거야.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를 못할걸. 그 리고 나 역시도 그걸 바라지는 않고, 그 사람들에게 너나 내가 신세를 질 수도 있고 도움받을 수도 있는 사람으로 비춰지면 단둘이서 이 도 시의 치안을 맡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나는 신음을 토했다. 이파리 보안관의 지적은 정확했다. 양 떼들이 양치기 개를 구출하기 위해 늑대에게 덤벼든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양치기 개 입장에서도 그걸 바랄 수는 없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어떻게 양 떼들에게 짖어대겠는가. 이파리 보안관은 마하단 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낮게 속삭였다.
“우리가 이 도시에서 기대를 걸 수 있는 사람은 세 명뿐이다.”
“셋?”
“율피트와 미레일이 우선 포함되지.”
“…인정합니다만, 구출 작전 도중 인질 사망 어쩌고 하는 결과는 달갑잖으니 세 번째에 모든 기대를 걸겠습니다.”
“네가 가장 믿는 사람, 케이토. 그 사람이라면 분명히 나서줄 테고 마하단이 아무리 신기한 마법을 자랑한다 한들 위어울프를 만만하게 여기진 못할 거다. 난 사실 왜 아직까지도 케이토가 움직이지 않았는 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어.”
“보안관님, 고백할게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어!”
“아직 고백 안 했는데요?”
“미리 꾸중한 거야. 무슨 멍청이 짓을 했는데?”
“케이토가 시장님 저택의 환기 상태를 개선했을 때 말입니다. 션을 기절시킨 다음 케이토는 그냥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흐음, 너를 공격했냐?”
“예”
“너 시체라고 보기엔 상태가 너무 좋은데 거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여.”
“케이토를 쓰러뜨린 다음 지니고 있던 안셀의 약을 먹였습니다. 그 약 효과를 보고는 쓸 만할 것 같아서 한 병 가지고 있기로 결정했거든 요. 지금쯤 그 친구는 나비를 향해 앞발, 아니 손을 휘둘러대고는 있을 지언정 우리를 구할 생각은 떠올리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케이토를 어떻게 쓰러뜨렸다는 거냐? 너 그때 손에서 칼도 놓은 상태였잖아.”
“그래서 죽이거나 죽임당하지 않은 거지요. 케이토와 저 양자에게 행운이었습니다.”
케이토를 감옥에 가둬뒀을 때 나는 그의 은팔찌를 가지고 놀다가 그것을 여닫는 법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죽인 위어울프의 약혼자와 칼도 없이 맞상대하게 되었을 때 나는 감히 저항할 생각을 못 한 채 무조건 션에게 몸을 날렸다. 케이토가 나를 휴대 간편한 크기 로 조각내기 직전 나는 가까스로 션의 왼팔에서 팔찌를 벗겨내어 내 팔목에 채울 수 있었다. 그다음부터 내가 한 일은 내 소중한 추억, 그러 니까 군수품 밀반출이라는 중범죄를 저질러서라도 기쁘게 해주고 싶 었던 사랑스러운 여인에 대한 추억을 죽을 힘을 다해 계속 떠올리는 일 뿐이었다.
“그 은팔찌는 확실히 교감을 이루더군요. 케이토는 지데에 대한 슬 픈 추억과 제가 보낸 혐오감 사이에서 지독한 혼란을 겪다가 무력하게 쓰러졌습니다.”
“참 잘했다. 그럼, 우린 자력으로 이 상태를 벗어나야 되는 것이군.”
서너 시간이 지난 후 우리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즐기는 망중한이 아니냐며 서로를 위로해야 했다.
보안관의 예상대로, 그리고 마하단으로서는 당혹스럽게도 이 도시 의 아무도 이 공방 안의 상황 개선을 위해 전투 행위를 개시하지 않았 다. 물론 이 도시의 존경받는 유지들이 먼발치에 나타나 그들이 안전하 냐, 우리는 그들의 석방을 애타게 원한다, 그들을 풀어주면 당신이 그곳 에서 주인을 간병하는 것을 돕겠다 등으로 외치긴 했다. 나와 보안관은 그 마지막 말이 명백한 진심일 거라 여겼지만 마하단은 그렇게 믿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이 앓는 소리를 내며 화살 한 대를 하늘로 쏘아붙였고 혼비백산한 유지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 다 마하단은 그저 션의 거처라는 점 때문에 이 공방을 점거한 것일 테 지만 그것은 매우 훌륭한 결정이었다. 이 도시 내의 장검 소지자가 모 두 억압된 상태에서, 프리모 궁장의 공방은 실질적으로 이 도시의 무기 고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이 공방은 소음 때문에 시내에서 조 금 떨어진 언덕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훌륭한 요새지라고 할 수도 있다. 마하단은 포로를 괴롭히는 성격은 아니었고 시민들은 그의 요구대 로 음식을 꼬박꼬박 가져왔다. 실제로 편하다면 편한 상황이었고, 그래 서 보안관과 나의 공포는 두 가지뿐이었다. 첫 번째는 안셀이 자신을 협상의 대가나 전격 구출 작전의 귀재로 여기게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신의 가호인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두 번째는 흑사병에 감염되 는 일이며 이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까로가 빨리 나으 라고 빌기 시작했다. 고백하자면 빨리 죽는 쪽도 좋다는 심정이었지만 보안관과 나 모두 상대방의 의중을 짐작하면서도 그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런 말을 꺼내기엔 마하단의 태도가 너무 극진했다.
그리고 션이 있었다.
션의 태도는 마하단을 기쁘게 만들었고 우리를 미치게 만들었다. 션은 많은 시간을 휘장 너머에서 보내었고 그가 그 안에 있는 동안 내 내 나는 검은 휘장을 노려보았다. 반대쪽에 묶여 있던 보안관이 부러 울 정도였지만 고개를 돌릴 수는 없었다. 신음과 헛소리, 그리고 간혹 터져 나오는 신성 모독적인 욕설들. 까로 트랙스의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그가 보통 대가 센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몽 롱한 상태에서도 그는 자신의 고통에 욕설을 퍼부을지언정 우는소리 를 내지는 않았다. 흑사병 환자가 그 정도로 거칠게 굴 수 있다는 것부 터가 이미 놀라운 일이긴 했지만. 그리고 션이 휘장을 들어 올리며 밖 으로 나올 때, 나는 그를 험악하게 노려보면서도 그의 얼굴에 어떤 병 색도 떠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흑사병이 갑자기 쓰러지는 병이라는 것도 무시한 채 하지만 션은 물이나 수건, 시민들이 가져온 강심제 등을 챙겨 들자마자 곧장 휘장 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전염의 공포를 물리칠 수 없었던 나는 그를 멈춰 세우지 않았다.
바깥을 경계하고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서이긴 하지만, 마하단은 휘 장 안쪽으로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의 충성심을 조롱 하는 언사는 꺼내지 않았다. 보안관과 나를 돌보는 사람이 저 검은 휘 장 안으로 들락거리는 것은 절대로 반대였으니까.
끊어질 정도로 잡아당겨진 듯한 하루가 지났다.
“오늘로 닷새째야.”
“차도가 있으신가?”
“나으실 거야. 말 그만하고 입이나 벌려.”
나는 마하단이 떠먹여 주는 스튜를 받아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급 성 전염병인 흑사병은 발병 후 닷새면 죽든 살든 결판이 난다. 그렇다 면 오늘이나 내일 안에 무슨 일이든 일어나겠지. 밤새 소름 끼치는 비 명과 저주를 내질러 대며 우리의 안면을 방해하던 까로는 해가 떠오르 자 지쳐 잠이 들었는지 조용했다. 내가 식사하는 동안 무료해하던 이 파리 보안관이 갑자기 말했다.
“마하단 자네는 듣기 싫은 이야기일 테지만, 혹 말일세. 저 분이 돌 아가시면 14대나 전수되던 마법도 대가 끊어지는 건가?”
마하단의 숟가락이 내 이를 강타했다. 손으로 입을 감쌀 수는 없기 에 턱을 가슴에 파묻어 가며 괴로워하는 동안 마하단은 슬픈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되겠지요. 너무 큰 손실입니다. 7400년 동안 축적되어 왔던 지혜가 사라진다는 것은……………”
“뭐? 잠깐, 자네 단위 하나 착각한 거 아닌가?”
“아닙니다.”
등 뒤에서 끔찍해서 하는 신음이 들려왔다. 나 역시 어이가 없어서 이의 아픔을 잊을 정도였다.
“마하단, 7400년이라고 했나? 그거 혹시 엘프 삼 왕국 시대 아닌가? 아니면 혹 시인(人)들이 거인들을 부려 대방벽을 쌓던 시절인가?”
“역사에 조금 약하군, 티르, 대방벽은 9000여 년 전에 완성되었어. 엘프 삼 왕국 시대가 맞아 우리 주인님의 시조인 사카 둠바는 삼 왕국 을 떠돌던 마술사였지. 물론 당시에는 별 대단한 인물은 아니었으니까 자네나 보안관님은 모르겠지만.”
“7400년을 14대로 나누면 1대가 대충 500년이 좀 넘는다는 말인데. 엘프가 섞여 있었나?”
“그래, 이건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전통이야 국가들 중에도 이렇게 오랫동안 이어진 국가는 없어. 감히 말하지만, 우리가 신전을 짓고 신에 게 제를 지낸 것도 이 전통에 비해 보면 최근의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신성 모독적인 성격은 주인과 종복이 공유하는 것인가 보다. 아니면 주인의 성격에 종복이 물든 것일까.
“수천수만 명의 사람들이 애정을 보내는 국가조차도 그렇게 오랫동 안 존속할 수는 없어. 하지만 겨우 열네 명이 이룩해낸 일을 봐, 티르. 내게 걸려 있는 이 마법을 보라고. 그들은 공간의 비밀을 파헤치고 그 것을 지배하는 경지까지 왔어. 아무도 돕지 않는 가운데, 그들 외로운 열네 명이 자신들의 평생을 바쳐 사람들의 지혜를 여기까지 이끌어왔 단 말이야. 그들이 어디까지 갈 수 있겠나? 그들은 벌써 내 주위의 작 은 공간이나마 공간을 일그러뜨리게 되었어. 언젠가는 수천수만 킬로 미터를 일그러뜨려 단숨에 이동하고 하늘을 날아 달과 별을 만질 수 있게 될지도 몰라. 저 찬란한 성운 너머, 눈에 보이지도 않는 곳까지 사 람들을 데려가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야. 이건 몽상가의 백일몽 이 아냐. 그들은 할 수 있어!”
마하단은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그가 다시 마법을 사용하고 있 는 것이 아닌가 착각될 정도였다. 그의 주위 공간이 일그러지며 그는 더 이상 작지 않게, 아니 심지어 거인처럼 보였다. 그렇다. 그는 다른 시 간에 부활한 거인이었다. 그는 단순히 개인적인 은혜 때문에 주인을 보 살피는 것만은 아니었다. 대방벽을 쌓았던 거인들처럼, 그는 주인의 방 벽이 되어 사람들의 미래를 지키고 싶었던 모양이다.
“자네는 그것을 볼 수 없어, 마하단 여기까지 7400년이라면, 자네가 말하는 그 날은 앞으로 1만 년은 지나야 올지도 모르지. 그건 생각해 봤나?”
“그게 무슨 상관인가?”
상관없겠지. 보안관과 나는 뜨개질을 한다. 마하단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덕분에 스튜가 식어버린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정오 무렵, 션이 밖으로 나와 마하단을 불러들였다. 마하단은 휘장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션이 만류했다.
“들어오시지 말고 밖에서 들으라고 하셨어요.”
마하단은 움찔하여 션을 바라보다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 다. 그리고 그는 휘장에 얼굴을 가져갔다. 휘장 너머로부터 뭔가 웅얼 거림 같은 것이 들려왔지만 거리가 멀어서 우리는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마하단의 표정이 계속 어두워지는 것은 똑똑히 보였다. 마하단은 한참 동안 아무 대답 없이 듣기만 하다가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는 공방 가운데에 서서 생각에 잠긴 표정으 로 바닥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마하단은 우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 근방에 관한 일이라면 당신들이 가장 잘 알겠지요. 보안관님.”
“무슨 일인가?”
“이 도시나 또는 가까운 도시에 마술사가 있습니까?”
“마술사? 그럼 자네 주인은…….”
“주인님께서는 마법을 전수하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전 주인님이 낫기를 바랍니다만, 그분께선 더 이상 모험을 할 수가 없다시는군요. 더 지체하다가 자칫 의식이 혼미해지기라도 하면 끝장이니까요.”
“티르에게 듣기로, 그건 대단히 확률이 낮은 일이라고 하던데.”
“예, 그래서 원래는 차분하게 후보자를 고르고 면밀히 자질을 검사 한 다음에 시도하실 계획이었습니다만, 이렇듯 상황이 급하게 되었으 니 그럴 여유가 없군요.”
이파리 보안관은 동정심이 물씬 묻어나는 어투로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군. 안됐지만 이 근방엔 마술사가 없어.”
등 뒤에 묶여 있던 보안관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마하단의 얼굴
이 일그러지는 것은 잘 보였다. 마하단은 다급하게 말했다.
“하나도 없단 말씀입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마술사들은 자 신이 마술사임을 숨기기도 합니다. 짐작이 가실 만한 이유 때문이지요. 또는 자신이 마술사임을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남달리 날씨를 잘 맞 춘다거나 이상하게 카드를 잘하는 사람이라도 없습니까? 혹은 대형 참 사에서 홀로 살아남은 사람이라도?”
“그러니까 비정상적으로 운이 좋은 사람? 내 조수가 혹 그런 쪽에 해당할지도 모르겠구먼. 분노한 위어울프와 두 번이나 맞닥뜨리고도 아직 살아 있으니”
글쎄. 내가 운이 좋다면 이런 개척 도시까지 흘러와 보안관 조수나 하고 있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마하단 역시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티르는 아닙니다. 이 친구의 재주는 마술이 아니라 그냥 호되게 단 련된 검술과 좋은 판단력입니다. 직접 칼을 부딪쳐봐서 압니다. 다른 경우는 없습니까? 제발 깊이 생각해 주십시오. 7400년의 전통이 끊길 판국이란 말입니다. 부담을 드리고 싶진 않지만, 이건 온 세상 사람들 을 위한 일입니다!”
마하단만큼 필사적이지는 않았지만 나와 보안관은 그것이 안타까 운 일이라는 점에는 동의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도시에서 일어난 행운 을 경쟁적으로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두 가지 사실에 놀 랐다. 이 조용한 소도시에 이렇게 많은 행운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리 고 그 행운들이 너무도 평범하다는 사실에 우리 사무실에 꿀이 떨어 졌을 때 요란하스 부인이 ‘우연히도 산딸기 잼을 만들기로 결심한 것 은 분명히 행운이다. 하지만 그 잼병을 들고 달려오던 미레일이 율피트 가 설치해 놓은 허방다리에 빠져 병을 깨먹은 것은 어떻게 해석할까? 우리들이 거론한 행운은 모두 이런 수준이었고 우리들의 열거가 계 속됨에 따라 마하단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졌다. 붉으락푸르락하던 난쟁이의 얼굴이 노르스름하게, 마침내 시커멓게 변하는 모습을 보자 이 도시에 넘쳐나던 마술사를 우리가 모두 살해하기라도 한 듯한 기분 이 들었다.
“정말 미안하네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렇게 놀랍고 충격적인 일 같은 건 없는걸. 다른 경우라면 인생이 원래 그런 법이라고 말해 줬을 테지만 지금은 그렇게 말 못 하겠군.”
마하단은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일어났다. 그는 휘장 쪽으로 걸어 가 섰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뒤 로 약간 돌려 기둥 반대편에 묶인 보안관에게 속삭였다.
“왜 그러셨습니까?”
보안관은 무슨 말이냐고 되묻지는 않았다.
“넌 왜 그랬냐?”
“보안관님과 같은 이유인 것 같습니다만.”
“그래, 나도 그렇다. 솔직히 좀 무섭다.”
보안관은 시원하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이 늙은 오크가 검을 더 들 수 없게 되면 정말 슬플 거라 생각되는 부분이었다. 그가 보 안관이고, 내가 조수인 편이 항상 근사하겠는걸.
“안타깝긴 하지만, 15대나 16대쯤에 어린애 뺨 치고 과자 뺏어 먹을 인물이 섞여버리기라도 하면 그건 더 지독한 재앙이 될 것 같더라.”
어쨌든 우리 둘 다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보안관이 율피트 에게 일어난 행운을 이야기하면 나는 미레일이 그것을 어떻게 훼방 놓 았는지를 말했다. 그리고 내가 안셀이 어떤 행운으로 새 직업을 얻었는 지 이야기하면 보안관은 그 새로운 직업이 어떤 어이없는 결말에 봉착 했는지를 이야기했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리고 객관적으로 봐 서 이 도시에 마술사라 불릴 만한 사람은 전혀 없지만, 그럼에도 마음 이 무거웠다.
“정말 끔찍한 바보짓을 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한데요. 그들이 정말 우리들을 저 성운 너머까지 데려다줄지도 모르잖습니까.”
“글쎄. 난 오크 경전에 단어 하나 더 추가하고 마음의 부담을 잊기 로 했다. 너도 그러면 어떻겠냐?”
“세상에 필요 없는 것은 영웅, 현자, 성자, 그리고 마법사입니까.” 내 늙은 오크는 만족한 듯 낄낄거렸다. 물론 마하단에게 들리진 않 을 정도로.
우리는 거인이 아니다. 마하단이 1만 년 후의 거대한 꿈을 바라볼 때 우리는 내일이나 모레쯤 그들이 무슨 변덕을 부려 세상에 화를 끼 칠지 모른다고 걱정한다. 마하단에 비한다면 난쟁이인 것은 우리 쪽 이다.
“예?”
마하단의 외침에 우리는 깜짝 놀라서 휘장 쪽을 바라보았다. 마하단 은 휘장을 들어 올리려는 듯 그것을 움켜쥐고 있었다. 하지만 안쪽에 서 무슨 명령이 떨어진 듯했고 그러자 마하단은 차마 휘장을 들어 올 리지 못했다. 대신 그는 목소리를 더욱 낮춰서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 했다. 다급하다는 것 말고는 알아듣기 어려운 대화가 계속되는 가운데 보안관과 나는 불안을 느꼈다. 제기랄, 우리는 속인 것이 아냐. 이 도시 에는 마술사가 없어. 그건 분명한 사실이야.
그러나 마하단이 검을 뽑아 들었을 때 난 사실을 숨겼음을, 그러니 까 내가 마술사임을 고백해야 되는 게 아닐까 하는 황당한 망상에 시 달렸다. ‘감히 날 속이다니! 네가 바로 마술사였잖아!’ ‘자, 잠깐! 난 내가 잘생겼다는 것과 머리가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마술까지 부린
다는 것은 몰랐어! 이미 충분히 잘났는데 어떻게 더 잘난 내 모습을 상상했겠어……!’
마하단은 밧줄을 끊었다.
고대의 영웅이나 노래 속의 주인공이 아니었던 우리는 마하단에게 달려든다거나 하는 모험을 시도할 수는 없었다. 그보다는 하루가 넘게 묶여 있던 팔다리를 주무르느라 바빴다. 천천히 일어난 이파리 보안관 은 마하단을 똑바로 바라보며 질문했다.
“이건 뭐지?”
“나가십시오.”
“자네와 자네 주인은 마법 전수를 포기하는 건가?”
“장검은 문 옆의 짐꾸러미에 있습니다.”
마하단의 얼굴은 거의 우는 것 같았다. 어쨌든 자상하게 상황을 설 명해 줄 만한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이파리 보안관은 눈살을 찌푸린 채 그를 바라보다가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이곳을 격리하겠네. 음식과 물은 계속 보내주겠어. 흑사병이 퍼지 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을 때까지 자네와 자네 주인, 그리고 션은 시내 쪽으로 접근할 수 없어. 혹 필요한 것이 있다면 화살에 편지를 묶어 날 리게.”
“감사합니다.”
“자네 주인이 쾌차하시길 바라겠네. 그럼.”
이파리 보안관은 곧장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조금 늦게 일어난 나는 마하단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우리들에게 흥미를 잃은 듯 멍한 시선으로 검은 휘장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서 말했다.
“자네 주인이 나으시면 다른 곳에서 마술사를 찾아 전수를 시도할 수 있을 거야, 마하단. 그러니 너무 실망하지 마라”
마하단은 멍한 시선을 그대로 내게 돌렸다. 그 눈 안에서 해석될 수 있는 감정을 찾긴 어려웠다. 그가 대답을 하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했을 때, 마하단은 갑자기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말했다.
“이어져야 해.”
“응?”
“끊어져선 안 돼.”
“……완전히 동의하진 못하겠지만, 자네 마음은 이해해.”
마하단은 내 대답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공방 한쪽에 놓여 있던 목재 더미로 걸어가서는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곤 얼굴을 가린채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공방 밖으로 나왔다.
이파리 보안관은 공방 바깥의 언덕바지에 서 있었다. 내가 곁에 다 가가 설 때까지 보안관은 가만히 선 채 아래쪽 시내를 바라보고 있었 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추측해 보았고, 그 대답은 내가 생 각하고 있던 것에서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시무룩한 어조로 질 문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죠?”
“모르겠다, 젠장”
“며칠 산이나 돌아다녀 볼까요? 발병하는지 안 하는지 보게. 그게 안전할 것 같은데.”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전염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상태로 시내에 내려간다는 것은 살인 행위다. 보안관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위의 야 산을 바라보았다.
“뭐 이제 초여름이라 할 수 있으니 야외에서 버티는 거야 큰 문제는 없겠다만, 일단 사람들에게 알리긴 해야 할 것 아니냐.”
“흐음. 그럼 일단 내려가 보도록 하죠. 조금 더 가면 윙켈의 대장간 이 나오지요? 그 앞의 느티나무에서 고함을 질러보지요. 가까이 가진 말고요.”
“그 생각도 해봤는데 윙켈의 대장간은 끔찍하게 시끄럽잖아. 우리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방법도 없으니 일단은 그렇게 해보자.”
그래서 우리 둘은 초여름의 언덕길을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빠르 게 걷기는 어려웠다. 아직까지 다리를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았거니와 빨리 걸을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천천히 햇살 속을 가로질러 갔다. 들판에서 피어오른 아지랑이들이 그 너머 보리밭을 물결치는 바 다로 바꿔놓고 있었다. 그 어디쯤 네펜지스 강이 흐르고 있겠지만 나 는 도저히 보리밭과 강물을 구분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그쪽엔 관심도 없었다.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보안관과 나는 공방을 흘끔 흘끔 뒤돌아보았다. 잠시 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아깝다는 생각이 계속 듭니다, 보안관님.”
이파리 보안관은 송곳니를 톡톡 두드리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역시 이를 뽑아줄 손 빠른 친구 하나가 있는 편이 좋겠나?”
대답하기 어려웠다. 이제 나는 이파리 보안관의 말을 이해할 수 있 었다. 행동하는 영웅에 대한 갈망은 거꾸로 보면 자신은 행동하지 않겠 다는 뜻이다. 앞장서서 어린애의 이를 뽑아주는 사람부터 새로운 지평 을 여는 선구자는 모두 행동하지 않는 자의 노예일지도 모르겠다. 마하 단에 비하면 난쟁이인 우리들이지만, 현실적으로 모두가 거인일 수 없 다면, 우리는 난쟁이의 보폭에 맞춰 10만 년의 걸음을 걸어야 되지 않 을까. 저 찬란한 성운이 암흑을 불사르는 그곳으로 갈 때도 모두 함께 걸어가야 하지 않을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성운 대신 작열하는 태양이 하늘을 불사르고 있었다. 현기증이 느껴졌지만 나는 고개를 숙이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팔다리가 다 잘려도.”
이파리 보안관은 내 혼잣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질문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션 그웬, 이 어리석은 녀석아. 팔다리가 다 잘리면 기어가면 돼. 너의 주위엔 기어가는 너에게 보조 를 맞추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분명히. 너 때문에 죽을 뻔한 나를 봐라. 그리고 너를 위해 팔찌를 벗어주었다가 안셀의 약까지 먹게 된 케이토를 생각해 봐.
가슴 깊은 곳에서 킬킬거림이 솟아올랐다. 약을 먹고 야옹거리던 케이토의 모습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심심하면 꺼내보는 추억거리가 될 것 같다. 그리고 나를 죽일지도 모르는 친구를 더 사랑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고맙구나, 션. 네 덕택이야. 모두 다………….
몸이 굳으며 걸음이 멈춰졌다.
현기증이 더욱 심해지면서 몸이 차가워졌다. 꺼림칙하고 무시무시한 기분. 바람이 보리밭을 갈라놓았을 때 그 속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시 체를 보는 것 같았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에는 계속 두 개의 문장이 끊 임없이 메아리쳤다.
‘모두 네 덕택이야’
‘이어져야 해’
누군가가 내 팔을 툭 쳤다. 가까스로 아래를 바라보자 이파리 보안 관이 제자리에 멈춰선 나를 의아해하는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냐, 티르?”
“있었어…….”
“뭐?”
“보안관님, 션을 도우려던 사람은 어떻게 되었지요?”
“무슨 말이야?”
“제기랄! 션을 도우려던,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 말입니다! 션을 태어 나게 했던 부모는 곧장 죽었습니다. 션을 가르치려 했던 구스룬 프리모 도 죽었습니다. 션을 사랑했던 에이라 에존하우어도 죽었고요!”
“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을 열거하는 이유가 뭐야?”
“끝까지 들어보세요. 은팔찌로 녀석을 감시하려 했던 케이토는 고양이 흉내를 내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녀석을 감시하다가 케이토에게 죽을 뻔했습니다. 어쩌면 케이토가 죽었을지도 모르지요. 아, 하나 더 있습니다. 그를 돌봐주기 위해 찾아오던 까로 트랙스는 흑사병 에 걸렸습니다! 션을 사랑했던 자들은 죽었고 그를 도우려 했던 자들 은 위험에 빠졌습니다. 이게 뭘 의미합니까?”
이파리 보안관의 눈 주위가 꿈틀거렸다. 그는 낮은 으르렁거림을 내 며 내가 암시하는 바에 대한 불쾌감을 표시했다. 나 역시 지독한 불쾌 감을 느끼며 속에 있던 말을 토해 놓았다.
“마하단은 비정상적인 행운의 소유자를 찾았지만, 비정상적인 불운 도 정상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집니다. 션은, 그 녀석은……, 마 술사였어요! 마술사가 있었던 겁니다!”
“잠깐만. 네 말은 말이 되는 것 같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어. 션이 진짜 마술사였으면 그런 불행들이 생길 리가 없어 누구라도 무의식중에 자기를 돕는 방향으로 행동하게 되니까.”
“션도 그랬습니다. 션이 원한 대로 된 겁니다!”
“무슨 말이야?”
“션은 세상을 없애겠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자살을 유 아론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었어요. 아니, 그런 그레이엘프식 표현 때 문에 녀석의 생각이 그렇게 변했는지도 모르지요. 어떤 게 앞이고 어 떤 것이 뒤인지 모르지만, 션은 진짜 그걸 원했던 걸 겁니다. 주위를 파괴하길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녀석은 마술사였어 요. 그리고 까로 트랙스는 그걸 알았던 겁니다. 그래서 우리를 내보내 고・・・・・・・ 이런, 개자식!”
이파리 보안관은 갑자기 몸을 돌려 언덕을 달려 올라가는 조수의 모습에 꽤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 조수는 아직까지 불편한 상태였고 그래서 빠르게 달리진 못했다. 이파리 보안관은 씩씩거리며 내 뒤를 따라왔다.
“무슨 말이냐, 까로 트랙스가 우리를 내보내고 션에게 마술을 전수 하려 한다는 거냐? 하지만 트랙스가 그걸 알았다면 왜 우리에게 마술 사가 있는지를 물어본 거냐? 바로 자기 옆에 있는데?”
“션은 어린애 뺨 치고 과자 뺏은 다음 그걸 밟아 뭉개는 녀석이니까 요! 그런다는 인식도 없이!”
까로 트랙스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카 둠바의 14대 전수자, 공간 을 희롱하는 그 위대한 작자는 션을 보자마자 그가 마술사인 것을 알 았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션이 주위를 파괴하는 마술사라는 것도. 하지만, 마법을 전수할 다른 마술사가 없다는 것이 밝혀지자 그는 션에 게 마법을 전수하려는 것이다. 션이 어떤 해악을 끼칠지 상관하지 않고 그저 마법의 전통이 끊어지지 않게 하려고.
공방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둘은 달리기를 멈췄다.
공방 앞에선 난쟁이가 검을 빼든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안 관과 나는 거리를 충분히 둔 채 멈춰섰다. 하지만 마하단에게 공격 의 사는 없었던 듯했다. 우리가 격해진 호흡을 고르는 동안 마하단은 음 울하게 말했다.
“주인님께서는 당신들을 죽이라 하셨소.”
“죽인다고?”
“주인님은 고통 속에서도 당신들이 틀림없이 알아챌 것임을 예지하 셨지요. 그리고 당신들의 존재가 제15대 전수자 션 그웬에게 방해될 것이 분명하다 판단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게 그런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하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았고 지금도 당신들을 죽일 생각은 없습니 다.”
마하단은 검을 힘 있게 쥐어 올렸다.
“다만 저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은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보안관이 먼저 장검을 뽑아 들었고 뒤이어 나도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달려들 생각은 두 사람 모두에게 없었다. 나는 검을 내리며 마 하단에게 말했다.
“마하단, 자네가 그걸 얼마나 원하는지는 알지만, 그 마법이 션에게 전수되어선 안 돼.”
“그럼 누구에게? 이곳엔 션 그웬밖에 없어.”
“굶어 죽을 지경이라고 해서 독약을 먹는 건 바보짓이야! 그 전수 자체에 반대하는 건 아냐. 하지만 션은 안 돼. 자네 주인을 말려. 병이 나을 수도 있잖아. 그다음에 다른 마술사를 찾으라고!”
“너무 위험이 커. 주인님이 나을 가능성도 다른 마술사를 찾을 가능성도 모두 낮아. 하지만 션 그웬은 바로 이곳에 있어.”
“션에게 전수될 바엔 그 전통이 끊어지는 편이 훨씬 나아!”
마하단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넨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있어, 티르. 자네는 우리의 후손들 수천만, 아니 어쩌면 수천억 명의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는 힘을 포기하라고 말하고 있어. 자네에게 그 많은 이들을 대신하여 판단 할 권리가 있다는 건가?”
“권리라고? 있어! 자네도 가지고 있는 바로 그 권리가 있어.”
“무슨 말인가?”
“판단한 것에 책임을 질 작정인 자가 가지는 권리! 나는 션이 주위 를 파괴하는 마술사라고 판단했어. 이제야 깨달았어. 녀석은 자기에게 손 내미는 사람의 손가락을 깨물어가며 자신을 고독하게 만드는 녀석 이야 그러곤 세상이 자기 팔다리를 다 잘랐다고 칭얼거리지. 많은 사 람들이 그렇게 하지만, 아니 모든 사람에게 그런 경향이 약간씩은 있지 만, 마술사인 션의 경우엔 그 정도가 더 심해! 다른 누구라도 좋지만, 그 녀석에게 전수하면 안 돼! 녀석은 세상을 파괴한 다음 세상이 자기 를 버렸다고 말할 놈이야!”
이파리 보안관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마하단 역시 질린 표정이었지만, 그러나 검을 내리지는 않았다.
“……주인님께서 그에게 바라는 것은 16대 전수자를 찾을 때까지의 징검다리 역할이지. 내가 그의 곁에서 그 과정을 관리할 거야. 그 기간 이 짧아지도록 노력하겠어. 그 외엔 더 해줄 말이 없군.”
그를 향해 다시 고함을 지르려다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마하단 은 나와 논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시간을 끌고 있을 뿐 이다. 까로 트랙스가 션에게 마법을 전수할 수 있도록. 그렇다면 그를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물리력으로는? 어쨌든 마하단이 시간을 끄는 것은 우리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 우리를 두려워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말로도, 검으로도 마하단을 굴복시킬 수 없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마하단은 갑자기 검을 내뻗는 내 모습에 긴장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그 검 끝이 엉뚱한 곳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에 당황했다. 이파리 보안관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티르, 뭐 하는 거냐?”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검으로 공방을 겨냥한 채 계속 같은 말 을 중얼거렸다. 도대체 말이 되지 않았지만, 될지 안 될지 의심하는 것 조차 두려운 상황에서 나는 스스로를 윽박지르고 협박하고 탄압했다. 된다. 분명히 된다. 이렇게 하면 된다. 제기랄, 안 되면 안 돼!
그리고 그것은 이루어졌다. 먼 곳에서 질풍같이 달려오는 발소리와 함께 사랑하는 친구의 포효가 들려왔을 때, 나는 눈물이라도 쏟아내 고 싶은 반가움과 이제 다 살았다는 절망감을 동시에 느끼며 몸을 떨 었다. 어쨌든 한 가지 사실은 확실했다. 이 소도시의 보안관 조수의 시 간제 업무에 마술사의 역할을 덧붙일 시간이다.
오우우우……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