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 더 호라이즌 (Over the Horizon) – 3화 : 겨울의 지평선 (끝)
겨울의 지평선
백사자의 달 아흐렛날은 그 날짜가 가진 의미보다는 훨씬 평범하게 시작되었다.
그날 아침도 이미 우리에게서 해고되어 다시 전쟁에 돌입한 미레일 과 율피트는 서로의 전력과 전략을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도서관 서기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자신의 천직이라고 여기게 된 안셀은 도서 관 설립안을 손에 들고 시의원들의 집을 순례하고 있었다. 아인켈은 음 악가들에게 온 우편물이 담긴 행낭을 메고 시내를 돌아다녔고 버나드 교장은 자신의 학생들이 배움의 열의로 가득 차 있다는 착각에 기뻐 하고 있었다.
지극히도 평범한 그 아침, 그러나 이파리 보안관과 나는 이맛살을 찡그린 채 광장 한편에 우울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 주위에는 음악가들이 서 있었다.
정오 조금 전, 마차들이 도착했다.
줄줄이 늘어선 마차는 여섯 대였고 그 뒤로 하인들과 짐꾼들, 그리 고 짐수레 등이 어기적거리며 따르고 있었다. 이파리 보안관과 나는 서 로를 향해 굳은 얼굴을 돌려대며 언제쯤 그 일행이 끝날까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들은 100명은 됨직한 일행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아찔함을 느꼈다.
여섯 대의 마차들이 정렬하고 그 뒤로 수레와 짐 마차, 그리고 오래 도록 걸어온 사람 특유의 무관심한 얼굴의 사용인들이 멈춰 섰다. 마 차 한 대의 문이 열리며 엘프 하나가 뛰어내렸다. 그는 마차 안에서부 터 우리들을 보고 있었던 듯 곧장 우리에게로 걸어왔다. 손에 가방을 들고 다가오는 그의 얼굴은 의아해하는 기색이었다. 아마도 누가 보안 관인지 알 수 없어서 그랬던 모양이며, 그래서 그는 우리 둘 모두에게 질문을 던졌다.
“안녕하십니까? 보안관이시죠?”
“이파리 하드투스 보안관입니다. 이쪽은 제 조수인 티르 스트라이크이고요.”
“제 이름은 네지스입니다. 우리는 호라이즌 선생님과 그 제자들이며 이곳에 계신 랜돌 마타피 교수님을 방문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네지스는 루레인이 그랬던 것처럼 가방 속에서 서류들을 꺼내었다. 그가 루레인과 달랐던 것은 백여 명이나 되는 일행의 신분증명서와 여행증을 한꺼번에 꺼내 들었다는 점이다. 그 두툼한 서류 뭉치를
본 이파리 보안관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본 걸로 해두지요. 그걸 다 읽어보려면 나는 짜증이 날 테고 당신 들은 너무 오래 기다리게 될 테니까. 그리고 조사도 관두겠습니다. 대 신호라이즌 씨에게 이리 나오라고 하십시오.”
네지스는 당혹한 눈으로 보안관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보안관은 그 가 무슨 말을 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호라이즌 씨가 나와주면 간단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 서 류를 다 읽어보고 여러분들의 소지품도 다 조사해 봐야 합니다. 시간 이 너무 낭비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책임자를 만나서 짧게 끝낼 생각 입니다. 가서 그렇게 전하십시오.”
네지스는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순순히 물러났다. 그는 가장 앞쪽에 정차한 마차로 달려가 창문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잠시 후 그 문이 열리며 헌칠한 엘프 하나가 밖으로 나왔다.
나는 난생처음으로 늙어 보이는 엘프를 보게 되었다.
늙었다고 해도 다른 종족보다는 훨씬 젊은 모습이었다. 인간이라면 기운 넘치는 장년이라고 여겨질 듯한 용모였지만 선이 가늘고 부드러운 엘프의 모습에 익숙해 있던 보안관이나 나에겐 꽤 충격적이었다.
호라이즌은 네지스처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이파리 보안관 앞에서 정확히 걸음을 멈췄다.
“안녕하십니까. 호라이즌입니다.”
“이파리 하드투스 보안관입니다. 환영합니다.”
우리 주위에 있던 음악가들은 눈이 튀어나갈 정도로 긴장한 채 이 파리 보안관과 호라이즌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보안관을 밀치고 앞으 로 나서고 싶어 하는 얼굴들이었지만 보안관은 그들이 그러도록 내버 려 두지 않았다. 그는 장검에 두툼한 왼손을 얹은 채 오른손으론 오른 쪽 송곳니를 톡톡 두드렸다.
“흔히들 하는 말이지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어느 쪽부터 들으시겠습니까?”
호라이즌은 고개를 약간 갸웃했다.
“좋은 소식부터 듣겠습니다.”
“그럴까요. 좋은 소식은 이렇습니다. 여러분들이 불법 무기를 소지했 는지 확인해야겠지만, 여러분들은 그 인원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 고 따라서 무장 여부는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책임자로서 아무 분쟁도 없을 거라고 약속해 주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신사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습니다. 충분합니까?” “충분합니다. 그럼 나쁜 소식을 들려드릴 차례군요. 마타피 교수님 께 가면 들으실 수 있겠지만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스레일 치퍼티는 도난당했습니다.”
음악가들은 자신들이 그걸 훔쳐가기라도 했다는 듯 낭패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호라이즌의 차분한 얼굴에는 아무런 표 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직 회수되지 않은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당분간 회수될 가능성도 없습니까?”
“죄송하지만,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호라이즌은 가볍게 인사를 하고 나서 몸을 돌렸다. 음악가 들에게로 몸을 돌린 호라이즌은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까자리. 오래간만이군요, 케이토’ 하는 식이 었고, 그래서 보안관과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변으로 밀려났다. 그렇게 순식간에 우리를 방관자로 만들어놓은 호라이즌은 음악가들과 더불어 측백나무관 쪽으로 가버렸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우리에게 다시 네지스라는 젊은 엘프가 다가왔다. 네지스는 보안관에게 야영을 해도 되느냐고 질문했다.
“야영이요?”
“예. 인원들이 워낙 많다 보니 우리는 대개 생필품을 구하기 좋은 마 을 주변의 공터에서 야영을 하곤 합니다. 조금 전에 듣기로 측백나무 관은 약간 한적한 위치에 있다고 하니 그 주변에서 야영을 할까 합니 다만, 괜찮겠습니까?”
“도벌 금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요?”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사용할 연료는 모두 시내에서 구입할 겁니 다.”
“이곳에선 주로 석탄을 써요. 노천광이 몇 개 있어서 석탄은 야외에서 쓰긴 귀찮은 물건인데.”
“괜찮습니다. 석탄을 태우는 도구들도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네지스는 자신감 있는 태도로 말했다. 보안관은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그렇다면 문제 될 건 별로 없겠군요. 그곳엔 식수원이 있는 것도 아 니고 밭이 몇 개 있지만, 겨울이라 한적할 겁니다. 그러니 마타피 교수 가 허락한다면 나로선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가끔 나나 조수가 방문해 도 되겠지요? 뭐, 꼭 감시하겠다는 건 아닙니다만.”
“얼마든지 오십시오. 음악은 충분할 테니 다른 분들과 함께 구경 오 셔도 좋을 겁니다. 그리고 맛 좋은 술병을 들고 오신다면 더 큰 환영을 받으실 겁니다.”
그리고 네지스는 사용인들과 함께 상가쪽으로 걸어갔다. 아마도 먼 저 출발한 이들은 천막을 치고 네지스는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한 다 음 그 뒤를 따라갈 모양이다. 보안관은 그 모습을 보며 투덜거리듯 말 했다.
“팔자 좋은 방랑자들이군. 세상을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며 밤에는 모닥불 피워놓고 음악을 즐긴다는 건가? 완전히 집시잖아.”
“호라이즌의 이동식 음악 학교인가 보지요. 그런데 이 계절에 야영 이라니, 폭풍이 몰아치면 위험할지도 모르겠는데요?”
“괜찮을 거야. 저 사람들도 그렇게 많이 돌아다녔다면 폭풍을 피할 정도의 요령은 가지고 있겠지. 그건 그렇고 호라이즌은 왜 그렇게 태평 한 거지? 그자의 목적은 아스레일 치퍼티의 연주였잖아.”
보안관과 나는 짧게 토론해 보았지만 둘 중 누구도 쓸 만한 해석은 내놓지 못했고, 그래서 우리들은 호라이즌이 감정 표현을 적게 할수록 자기 값어치가 올라간다는 속설의 신봉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우리 둘 다 그 결론에 만족하지는 못했다.
이파리 보안관이 집시라고 말한 것은 상당히 통찰력 있는 결론이었 다. 겨울의 얼어붙은 풍경 속으로 태양이 성의 없이 햇빛을 뿌리고 있 는 오후 그들의 야영장을 찾은 내가 처음 받은 인상이 바로 그러했다. 반원을 그리며 줄지어 선 마차와 짐수레들이 야영장의 경계를 표시 했고 그 안쪽으로는 여러 개의 천막과 모닥불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 었다.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만들어진 취사장에선 맛있는 냄새가 풍 겨왔고 엘프들은 놀랍게도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엘프들이 추위를 타 지 않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상의를 훌렁 벗은 채 눈밭에 드러누워 있 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보는 사람이 다 으슬으슬해질 지경이었다. 추위 를 적당히 타는 종족들은 모닥불 옆에 모여앉아 뭔가 이야기를 나누 거나 웃거나 했고 추위를 아주 많이 타는 이들은 담요를 잔뜩 두른 채 천막 안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자들의 모습에서도 이 야영장에 가득한 여유로움은 뚜렷이 찾아볼 수 있었다. 먼저 찾아왔던 방문객들 도 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바쁘게 구는 사람은 어디에 도 없었고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소곤거리는 듯한 목 소리와 낮은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 중간중간에 악기 를 튕기거나 불거나 두드리거나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연주한 다기보다는 손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들을 놀래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천천히, 우호적인 걸음걸이로 걸어갔지만, 곧 낭패한 심정으로 그들에게 내 존재를 알릴 방법이 없나 고민해야 했다. 그들은 그 겨울 오후를 여름 늦저녁처럼 즐기고 있었고 주변 일에 무관심했다.
다행히도 내가 헛기침을 좀 사납게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네 지스가 나를 발견했다. 한 손에 석탄 양동이를 든 채 야영장을 가로지 르던 네지스는 나를 발견하고 웃으며 걸어왔다.
“보안관 조수님이시군요. 티르 스트라이크 씨?”
“정확합니다, 네지스 씨.”
빙긋 웃던 네지스는 뭔가 생각난 것처럼 일광욕하는 엘프들을 훔쳐보고는 당혹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저, 풍기문란에 대해서라면……”
“까다롭게 굴진 않겠습니다. 여기는 시내도 아니고 저 모습을 보며 야릇한 생각을 할 사람보다는 감탄할 사람이 더 많을 것 같으니까요. 저만 해도 저걸 보고 있으니 이가 딱딱 부딪칠 지경입니다.”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실 저들은 오랜 여행 때문에 지저분 해지고 피로해진 몸을 눈으로 씻고 햇볕을 좀 쬐려고 저러는 겁니다. 내일이면 다시 점잖게 하고 다닐 겁니다.”
눈으로 몸을 씻는다는 말을 들으니 다시 이가 부딪칠 것 같은 기분 이 들었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고 나서 말했다.
“그런가요. 뭐 구경이나 할까 해서 왔습니다. 대충 훑어보니 밀도살 이나 도벌이나 황제 폐하에 대한 반란의 흔적 같은 건 안 보이는군요. 제가 더 꼼꼼하게 조사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런데 호라이즌 씨는 어디 계십니까?”
“저기 큰 천막에 계십니다. 안내해 드릴까요?”
나는 어쩔까 하다가 그러라고 했다. 이곳의 분위기가 자유롭다고 해 서 쉽게 격식을 포기하는 것은 좀 섣부른 행동일 것 같았다. 그래서 나 는 네지스의 뒤를 따라 야영장을 가로질렀다. 야영장 이곳저곳에 흩어 져 있는 음악가들은 내게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는 그중에서 케 이토를 발견하고 눈인사라도 보내려 했지만 몇 번을 시도했음에도 케 이토의 주의를 끄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큰 천막 안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소형 화로 같은 것이 가운데 놓여 있었고 천막 지붕엔 연기가 빠져나가는 구멍이 교묘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천막을 지은 솜씨가 썩 훌륭했던 것인지 안에는 연 기나 그을음 같은 것을 별로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안은 어둑어둑 했고 설맹에 걸릴 정도로 하얀 풍경에 익숙해 있던 나는 조금 후에야 안에 있는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마타피 교수였다. 교수가 왜 측백나무관이 아닌 이곳에 있는 것일까? 그리고 늙은 노움 까자리와 올바이드 남작 의 모습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그 뒤쪽으로 화로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호라이즌이 앉아 있었다. 호라이즌은 자라목 스웨터를 걸친, 어 찌 보면 소박해 보이는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하지만 내 눈길은 호라 이즌의 얼굴 위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다. 호라이즌의 왼편에는 루레 인이 앉아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천막 안의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꽤 난처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나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대화의 중간에 가끔 생길 수 있는 자연스러운 휴지(休)였던 모 양이다. 얼마 있지 않아 까자리가 무슨 말을 꺼내려 했던 것이다. 하지 만 나는 그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선생님, 보안관 조수이신 티르 스트라이크 씨가 오셨습니다.”
네지스가 말하기 전부터 호라이즌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가 미소를 지어 보인 건 네지스의 소개가 끝나고 나서였다. 호라이즌은 손 을 내밀어 보였고 그것은 어떻게 해석해도 앉으라는 의미 같아서 난 목 례하며 마타피 교수와 까자리 사이에 앉았다. 네지스는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가버렸고 호라이즌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기에 대화의 첫 삽은 내가 퍼올려야 했다. 나는 침묵의 동토에 힘차게 첫 삽을 꽂아 넣 었다.
“뭐 불편은 없으신가 해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건 보안관 사무 실에서 보내드리는 겁니다.”
나는 들고 갔던 바구니를 앞으로 내밀었다. 호라이즌은 바구니 안 에서 목도리들과 장갑 몇 벌을 발견하고 재미있다는 미소를 지었다. 마 타피 교수가 짧게 설명했다.
“귀한 걸 받으셨군요, 호라이즌, 하드투스 보안관과 스트라이크 보안 관보는 모두 수편에 상당한 조예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모조리 신전 부속 고아원에 보낼 뿐 친구들에게 선물하지는 않 습니다.”
스트라이크 보안관보 정식 명칭이야 그렇지만 정말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말이군. 교수의 설명을 들은 호라이즌은 가볍게 목례하며 말했다.
“이렇게 귀한 선물을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군요, 스트라이크 씨.”
“티르라고 부르시지요. 그리고 크게 부담 가지실 만한 물건은 못 됩 니다.”
“감사합니다, 티르 씨. 그렇게 말씀하십니다만, 방랑하는 처지인지 라 옷가지는 대단히 고마운 선물입니다.”
“예, 저희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걸로 골라봤습니다. 솜씨는 변변찮 습니다만 실은 좋은 걸 썼으니 그럭저럭 쓸만할 겁니다.”
호라이즌은 차분히 웃으며 바구니를 옆에 내려놓은 다음 천막 한쪽 에 놓여 있는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서 포도주 한 병을 꺼낸 호라이 즌은 보안관과 함께 맛이나 보라며 내게 건네었다. 그리고 나는 잠시 바보가 되기 위해 애써야 했다. 깡촌의 보안관 조수가 손에 들고 있는 포도주가 정말 명품이라는 것을 감정해 낸다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여 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까자리와 올바이드 남작은 감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 명품을 저급 밀주라도 되는 것처럼 대충 갈무리해 두고는 지나가는 말처럼 질문했다.
“단지 참고해 두기 위해 묻는 것입니다만, 이곳엔 얼마나 계실 예정이십니까?”
호라이즌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글쎄요. 원래 목적은 마타피 교수님께 허락을 얻어 아스레일 치퍼티를 연주해 보는 것이었습니다만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그건 불가능 해졌군요. 그래서 우리들은 여독이나 좀 치유하고 떠날 생각입니다. 네 지스 군에게 물어보시길 바랍니다. 우리들의 여행 계획을 작성하고 얼 마나 쉴 것인지 결정하는 건 모두 그 성실하고 현명한 젊은이의 일이지 요.”
“말씀하신 그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해서는 치안 책임자로서 깊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아스레일 치퍼티를 되찾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이 말을 하면서 나는 루레인을 훔쳐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루레 인은 차분히 화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호라이즌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제가 떠나기 전까지 아스레일 치퍼티가 회수된다면 교수님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제게도 다시없는 기쁨일 것입니다.”
나는 그쯤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호라이즌은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배웅해 드리고 싶군요.”
나는 주춤하며 호라이즌을 바라보았지만, 호라이즌은 이미 천막을 나서고 있었다. 나는 천막 안에 있는 사람들을 죽 둘러보았지만 모두 들 별 표정 없는 얼굴로 내게 작별 인사를 보내왔다. 루레인은 눈길 조 심해서 가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난 그들 모두에게 작별한 다음 천막 을 나왔다.
호라이즌은 밖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었다. 내가 나오는 것을 본 호라이즌은 별말 없이 걷기 시작했고 나는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가 지나감에 따라 음악가들과 제자들이 가볍게 인사를 보내오거나 했지만 내가 질투를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 중 몇몇은 아예 호라 이즌을 무시하고 있었고 호라이즌 역시 주위에 별 신경 쓰지 않은 채 야영장을 지나갔다.
내가 몇 번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우리는 야영장 바깥에 이르렀 다. 나는 호라이즌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 했지만, 호라이즌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의 옆으로 따라붙으며 그의 옆얼굴을 향해 말 했다.
“이만 나오셔도 됩니다. 안에서 손님들이 기다리지 않습니까?” “좀 걷고 싶군요. 그들은 괜찮을 겁니다.”
호라이즌은 앞만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인 다음 들고 있던 포도주병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는 조용히 눈길을 걸어갔다. 스웨터를 걸친 채 눈길을 걸어가고 있는 호라이즌의 모습은 정말 산 책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고 그 모습을 본 사람은 누구나 근처에 그의 집이 있으리라 생각할 듯했다. 발아래에서 가볍게 들려오는 뽀드 득거리는 소리와 네펜지스 강 근처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우리들 과 동행했다. 기진맥진한 겨울 태양은 서녘의 잠자리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고 숲 사이에선 밤들이 스물스물 피어나고 있었지만, 아직 세상은 충분히 밝았다.
그리고 호라이즌은 차분하게 말했다.
“아름다운 곳에 살고 있군, 티르. 반쪽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충분히 아름답군.”
나는 그의 왼쪽 눈을 흘끔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지, 호라이즌.”
내 연적이었던 엘프는 오른쪽 눈으로만 미소지었다.
바람 소리가 제법 거세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네펜지스 강이 심술 을 부려 폭풍을 몰아오고 있는 듯했다. 호라이즌은 고개를 약간 떨군 채 걸었고 나는 뒤를 살짝 돌아보았다. 야영장은 이미 숲 저편으로 사 라져 보이지 않았다.
“왜 칼을 놓고 음악가가 되었지?”
“자네가 이 눈을 가져간 후 더 이상 칼을 쥘 수 없게 되었네. 한쪽 눈으론 거리를 맞출 수 없었어.”
“통하지도 않을 거짓말은 말아, 호라이즌, 내가 언제나 부러워했던 거지만 그 커다란 귀는 눈이나 다름없었지. 물론 원근감이 좀 나빠지 긴 했겠지만 두 눈 다 감고 상대의 맥박 소리나 숨소리만으로도 거리 를 맞추는 재주로 날 놀라게 했던 자네라면 그건 큰 문제가 아냐” 호라이즌은 씁쓸하게 웃었다.
“옛날이야기야. 이젠 그렇게 못해. 자네가 굳이 이유를 필요로 한다 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이유를 그대로 말해 주겠네. 더 이상 내게는 적수가 없었기 때문에. 물론 정확하게 말한다면 ‘자네가 사라 지고 나서’라는 말이 앞에 붙어야겠지만.”
“흥. 그녀는 잘 있나?”
“모르겠는걸. 자네가 마지막으로 그녀를 본 날짜와 내가 마지막으 로 본 날짜는 크게 차이 나지 않아.”
나는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호라이즌은 멈추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다시 발걸음을 떼며 말했다.
“바로 헤어졌단 말이야?”
“그래.”
“왜지? 그녀 때문에 눈알이 빠지고 나니 사랑이고 뭐고 다 식어버렸나?”
“애초에 그 천박한 여자에게 사랑 같은 감정 품어본 적 없어”
꽤 충격적일 수도 있는 말을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런 충격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타피 교수에게서 호라이즌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 을 때에도 그랬듯이. 그래서 나는 차분하게 질문했다.
“나와 싸우기 위해 그녀를 이용한 건가?”
“그래.”
“그리고 그걸로 모자랄까 봐 나를 고발했나?”
호라이즌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이유를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했지?”
“우정이 자네의 손목을 잡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내가 그 냥 그 여자를 빼앗았다면 자넨 웃으며 우리 둘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를 위인이지. 나는 자네가 아무런 거리낌 없는 순수한 살의로 나에 게 덤벼오길 원했기 때문에 그런 야비한 방법을 선택했네. 난 필요하다 고 생각되면 다 해볼 생각이었어. 만약 자네에게 가족이 있었다면 난 그들 또한 파멸시켰을 걸세.”
역시 충격은 없었다. 대신 추측이 사실로 확인되는 잔잔한 즐거움만이 찾아들었다.
“짐작은 했어. 그 빨강 머리는 내 취향일 수는 있어도 자네의 취향엔
안 맞는 여자였지. 이제 그렇게까지 나와 싸워보고 싶어 했던 이유를 들을 차례로군. 왜 그랬나?”
“지평선을 넘기 위해서지.”
나는 화내지 않았다. 절대로 화낼 생각은 없었다. 대신 길옆에 있던 측백나무를 걷어차 눈 한 무더기를 떨어지게 만들었다.
“지평선은 넘을 수 없어 보이긴 해도 닿을 순 없는 거라고. 그게 보 인다는 이유로 정말 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했네.”
“지평선을 넘기 위해선 도덕이고 윤리고 선이고 다 필요 없단 말인가?”
“알면서 묻지 말게, 티르 그건 지평선 이쪽에 있는 것들이야.”
왠지 목마른 기분이 느껴졌다. 난 눈을 한 움큼 집어 든 다음 그걸 매만지며 말했다.
“나를 그렇게까지 인정해 줬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난 속 좁은 위인인지라 자네를 계속 증오하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좋을 대로. 하지만 자넨 내 마지막 희망이었고 자네가 떠난 이후로 나는 칼을 통해선 지평선을 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걸 알게 되었 어. 포기할 수밖에.”
“그래서 악기로 바꿨나?”
“그래.”
“그 많은 명기들이 죽어 나간 이유를 알겠군. 넘을 수도 없는 걸 넘어보자고 그렇게 졸라댔으니 기가 막혀 입을 다물 수밖에.”
“나도 잘 모르겠네, 티르. 하지만 자네 말이 맞을 것 같아. 넘을 수 없다는 부분엔 찬성하지 않지만.”
“보인다고 해서 다 도달할 수는 없어, 호라이즌.”
호라이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말을 하긴 했지만 내가 바 라는 말은 아니었다. 호라이즌은 오른쪽 눈으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지?”
“무슨 말이야?”
“자네가 아스레일 치퍼티를 훔친 거지? 그게 나에 대한 복수였는지 자네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서였는지는 묻지 않겠어. 나로선 관심 없는 일이니까. 자네가 훔쳤다는 것만 인정해 주게. 자네지?”
“그렇다면 어쩔 건가?”
“돌려주게”
“나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았어. 하지만 내가 훔쳤다 쳐도, 자네가 돌려달라고 말하는 건 이상하군. 마타피 교수에게 돌려줘야 되는 것 아닌가?”
“쓸데없는 말 하지 마. 마타피 교수는 그걸 내게 줄 거야. 몇 년 동안 봐온 사이니 나보다 자네가 더 잘 알 텐데. 생각해 봐.”
하지만 나는 마타피 교수에 대해 생각하지는 않았다. 대신 나는 그 여유롭고 느긋했던 야영장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람은 자기가 추구할 수 없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을 보면 자기가 추구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 목표를 비웃고 무시하고 평가절하하는 법이다. 무의식중에라도.
“불쌍한 녀석들.”
“뭐라고 했나?”
“별말 아니야. 이만 돌아가게.”
나는 멈춰섰고 호라이즌이 더 이상 걸어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 다. 나는 충분히 단단해진 눈덩이를 씹으며 기다렸다. 몇 발자국 더 걸 어가던 호라이즌은 기어코 발걸음을 멈춘 다음 몸을 돌렸다. 내 앞을 가로막듯이 선 그는 한쪽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티르, 그걸 돌려줘.”
나는 어깨를 으쓱인 다음 씹고 있던 눈덩이를 호라이즌에게 집어던 졌다. 살짝 피한 호라이즌은 웃지도 않으며 말했다.
“이것 말고.”
“그럼 뭐?”
“그러지 말게, 티르 자넨 항상 그랬지만, 이번만은 농담이나 장난으로 넘어가려는 건 통하지 않아.”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물론 그건 지나 친 모욕이었고 호라이즌의 얼굴엔 미미한 분노의 기색이 떠올랐다. 하 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온화했다.
“돈이 필요한 거라면 자네가 부르는 값에 그걸 사겠네. 자네는 그런 고악기를 어떻게 팔아야 하는지도 모르잖나. 만약 나에게 복수하려는 거라면 그건 부당한 복수심이라고 말해 주겠네. 이 왼쪽 눈으로 충분 하지 않다고 말할 건가?”
좋은 유혹이다. 하지만 난 심술궂은 어투로 대답했다.
“사명감을 느낀다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가 닿을 수 없는 지평의 도약대로 이용하려는 녀석에게서 모든 사람을 위해 노래해야 할 악기를 지켜야겠다고 믿게 된 거라면? 그녀 석은 항상 도약하지만, 지평에 닿는 대신 언제나 추락하여 도약대를 박살 낸다고.”
“나는 가 닿을 거야.”
“뜨개질을 시도해 봐. 악기는 그만 죽이고.”
호라이즌은 묵묵히 나를 바라보다가 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티르, 이건 마지막 제안이야. 아스레일 치퍼티 이외에도 세상엔 아 직 명기가 많이 있어. 자네가 그걸 내놓지 않더라도 나는 약간의 아쉬 움만 느낀 다음 다른 악기들을 향해 떠나버리면 그만이야. 그렇잖아도 제린다 공국에서 세람브로스의 14번 시리즈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네. 내 다음 목표지. 내가 자네에게서 아스레일 치퍼티를 사겠다 는 건, 자네라는 존재가 내 속에서 가지는, 혹은 가졌던 의미에 대해 표 하는 경의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야, 티르 내가 자네에게 경의를 표하도 록 허락하게.”
나는 잠시 대답을 보류한 채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해는 이제 측백나무 저편으로 완전히 사라졌고 하늘엔 부옇게 흩어진 빛들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마주 보는 동안 나는 대답을 떠올릴 수 있었다.
“호라이즌, 자넨 너무 늙었어. 나보다도 더.”
호라이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지적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말했다.
“엘프가 인간보다 더 빨리 늙은 이유는 한 가지뿐이야, 호라이즌 자 넨 악기뿐만이 아니라 자네 자신도 죽이고 있어. 지평선을 넘을 순 없 다는 것을 인정하게 보인다고 해서 전부 다 닿을 수 있는 건 아냐”
호라이즌은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앞쪽으로 걸어왔다. 나 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의 옛 모습을 떠올려 보려 했다.
호라이즌은 내 옆을 지나쳤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눈을 밟는 호라이즌의 발소리가 모든 것을 말했다. 확고하고 뚜렷한 발걸음 소리였다. 그리고 멀어지고 있 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폭풍이 시작되고 있었다.
백사자의 달 스무날째, 호라이즌 일행은 우리 도시를 떠나갔다. 나는 두 번 다시 호라이즌을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호라이즌도 나 를 찾아오지 않았다. 호라이즌의 일행들은 그들을 찾아간 우리 시민들 과 더불어 노래하고 춤추고 연주하며 작은 잔치도 몇 번 벌였고 여러 가지 재미있는 추억도 남겼지만, 결과적으로는 마치 오지 않았던 것처럼 되어버렸다. 다만 네지스가 떠나기 직전 우리에게 아스레일 치퍼티가 발견되면 연락해 달라고 주소 하나를 남겨두었다. 나는 그것을 잊어버리기로 했다.
호라이즌 일행이 떠남과 동시에 남아 있던 음악가들도 우리 도시를 떠나갔다. 며칠 동안 노래와 연주에 취해 있던 그 음악가들은 호라이 즌 일행이 떠나자 갑자기 가족들과 함께 새해를 맞이하고 싶다는 욕망 에 휩싸였다. 그 변화를 보는 건 재미있는 일이었지만, 우리들은 예의 바르게 그들을 전송했다.
케이토는 지데의 가족과 자신의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낸 다음 측백 나무관에 남았다. 덕분에 난 꽤 긴장감 넘치는 나날을 보내었다. 왜 돌 아가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가 성의 있는 대답을 한 적은 없었다. 다만 그는 지나가는 말처럼 “당분간 지데의 무덤을 돌보며 마음을 정 리하려고”라고 말했고 그 말이 퍼지자마자 우리 도시의 좀 지나치게 발랄한 처녀들은 이 우수 어린 위어울프를 위로해 주고 싶다는 모성애 적 욕망에 불타게 되었다. 케이토는 처녀들의 육탄 돌격에 가까운 접근 에 당혹해했고 난 스스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처녀들에 대한 내 감 시망을 완화시켜 주었다. 처녀들의 추격에서 도망쳐다니려면 케이토는 내 목을 베러 올 시간을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측백나무관에 남은 사람은 하나 더 있었다.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깜빡 잊었을 때 그 사람은 나를 찾아왔다.
“어서 와요, 루레인. 교수님과 케이토는 잘 있습니까?”
루레인은 보안관 사무실의 문 앞에서 발을 털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간만에 폭풍을 동반하지 않은 눈이 내리고 있어서 시내는 고요했다.
“보안관님은 안 계신가 보군요.”
“예, 순찰 나갔습니다.”
루레인은 외투를 벗어 벽걸이에 건 다음 내 곁으로 걸어왔다. 그러 곤 난로 옆의 의자에 걸터앉아서 나를 쳐다보았다. 난 잠시 그녀의 말 을 기다리다가 포기하곤 대바늘을 다시 집어 들었다. 하지만 내가 대 여섯 코쯤 떴을 때 루레인이 갑작스럽게 말했다.
“호라이즌은 끝내 아스레일 치퍼티를 연주하지 못했군요.”
“예.”
“왜 그에게 아스레일 치퍼티를 내주지 않았지요?”
“무슨 말입니까?”
루레인은 한숨을 쉰 다음 주머니 속에서 곱게 접은 손수건을 꺼내었다. 그리고 그것을 내게 내밀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가지세요. 선물하겠습니다.”
루레인은 고개를 약간 갸웃한 채 나를 바라보다가 손수건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내 의문을 무시하며 말했다.
“그것을 지켜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싶어요. 하지만 당신의 사 리사욕을 위해 쓰려는 거라면 용납할 수 없어요. 그러니 돌려받아야겠 군요. 영원히 노래를 못하게 될 운명에서 벗어났으니 이제 그것은 영원 히 노래해야 해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루레인은 난로 위에 있던 주전자를 들어 올려 직접 차를 따라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 숨겨두셨지요? 그들은 이 도시를 이 잡듯이 뒤졌는데.”
나는 빙그레 웃었다. 호라이즌 일행은 우리 시민들과 어울리는 척하 며 열하루 동안 우리 도시를 샅샅이 수색했다. 가장 많이 수색한 것은 내 집이었다. 나는 그들이 수색을 끝낸 다음 깨끗이 정돈해 놓고 떠났 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루레인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그 사람들이 그걸 찾지 못하도록 상온이 아닌 곳, 그러니까 땅속이 나 야외 같은 곳에 숨겨두었다면 정말 큰 일인데요. 그건 악기를 완전 히 망치는 일이에요.”
그것은 유도 신문이라 할 만한 말이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 았다. 루레인은 약간 슬픈 듯 말했다.
“내놓지 않을 건가요?”
“루레인,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루레인은 이 뻔뻔스러움에 질렸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았지만 나는 잠자코 대바늘만 놀렸다.
“어쩔 건가요? 이 도시에서 그걸 팔 수도 없을 텐데. 아하, 이곳을 떠날 생각인가요? 봄이 오면 그걸 가지고 떠나겠다는 거예요?”
나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루레인은 기어코 화를 냈다.
“대답해요!”
“당신이 바라는 건 뭡니까?”
“예?”
“당신이 아스레일 치퍼티에게 바라는 건 뭐냐고 물었습니다.”
“말했잖아요? 영원히 노래하는 것을 원해요.”
“수억 년을 통탕거리는 개울물처럼? 수억 년을 떨어지는 낙수처럼?”
루레인은 뭐라고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담담히 그 눈길을 받으며 말했다.
“언젠가 말했지만, 악기는 생명이 없어요. 악기 살해라는 것도 없고. 그 악기들은 훌륭히 연주되고 있는 거지요.”
“무슨 말을 하는 거지요?”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나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그 악기들은 훌륭하다. 그 명기들은 연주자의 영원한 자기 혐오와 좌절을 정확한 음으로 연주하고 있다. 단 지 똑같이 영원한 자기 혐오와 좌절 속에 빠진 청중들이 듣지 못할 뿐 이다.
루레인은 굳은 결심이 비치는 얼굴로 말했다.
“좋아요. 내가 그걸 찾아 보이죠. 봄이 오려면 아직 많이 남았으니 까. 호라이즌과 그 제자들이 못 찾았다는 건 내 의지를 꺾지 못해요. 나는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해요. 그들이 찾지 않았던 곳만 찾아보면 될테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바라는 바를 이루길 기원하죠.”
나를 쏘아보던 루레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눈 깜빡할 사이에 외투를 챙겨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그녀가 너무 세차게 문을 여닫는 바람에 몇 개의 눈송이와 함께 찬바람이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나는 뜨개질감을 내려놓은 다음 난로의 불을 약간 높였다.
도로 의자에 앉은 나는 뜨개질감을 들어 올리는 대신 호라이즌의 어리석음을 동정했다. 자기가 바라는 것도 잘 모르는 얼간이 같으니. 그리고 나는 ‘그들이 찾지 않았던 곳만 찾겠다는 루레인도 아스레일 치퍼티를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잔파드로스 신관은 고아들을 돌보느라 바빠서 제단을 돌볼 틈이 없다. 그리고 그 점 이외에도 제단은 참으로 어울리는 장소다. 신 을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그곳은.
언젠가 안셀이 자신을 타고난 바이올리니스트라고 생각하는 날도 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날, 안셀은 괜찮아 보이는 바이올린 한 대를 선물 받을 것이다.
나는 다시 뜨개질감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