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1권 – 11화


그러는 동안에도 태을사자는 사방을 빈틈 없이 살피 기 위해 주의를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윤걸은 겉 으로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호방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물론 조심하고있었 다. 오직 흑풍사자만은 속 편하게 보였다. 그는 세 상지간의 그 어떤 것도 사계의 존재를 놀라게 할 수 는 없다는 소신을 지니고 있기때문에 그런지, 태평 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흑풍사자가 윤걸에게 말을 걸었다.

“호랑이의 기운들이 많이 느껴지는군요.”

“그렇군요. 백두산이야 본래 호랑이가 많은 곳이니 까요.”

“저들도 우리의 기색을 느끼고 있을까요?”

“글쎄요. 원래 호랑이야 금수에 불과하니 모든 호랑 이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지금 있는 호랑이들은 모두 다 미물들뿐인 것 같소이다.그러나 원래 이곳 의 지리가 영험하니 영물로 변한 호랑이들도 꽤 있 을 것입니다. 우리가 찾는 호군도 그러한 영통한 존재라 할 수 있지요.”

말하는 것으로 보아, 윤걸은 호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물론 출발하기 전에 노서기와 이판 관으로부터 호군이 영통한 영물이라는 것은 들어 알 고 있었지만, 윤걸의 말은 그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음을 내비치고 있었다.

흑풍사자가 윤걸의 얼굴을 보며 궁금한 마음을 전달 하자 윤걸은씨익 웃으며 말했다. 물론 이들이 보내 는 웃음이나 궁금한 마음은 생계의 인간들과 같은 방식으로 표출되지는 않지만, 좌우간 마음과 마음으 로 전달되는 내용은 그러한 뉘앙스를 담고 있었다. 

“호군은 수령이 이미 팔백 년을 넘어섰다는 대호외 다. 조선 북부산맥에 사는 뭇 호랑이를 위시하여 많 은 영물들의 대장이라고 할 수있지요.”

“팔백 년이라….. 그렇다면 도력도 상당하겠군요.” 

“물론 팔백 년의 도를 닦았으니 범상하지야 않겠지 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 봐야 근본이 금수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일반 사람의 성정을 갖게 되기까지는 족히 삼사백 년은 소요되었을 것이고, 또 인간과 같은 가르침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대부분 스스로 깨우쳐야하니 말이나 기타의 것들을 깨우치 는 데도 백여 년은 실히 걸렸을 겁니다. 그러니 아 무리 팔백 년을 수련했다 해도 산신령의 수하 정도 에불과하겠지요.”

“하지만 그 정도 도력이라면 생계에서 큰 힘을 발휘 할 것이오. 그렇다면 우리가 찾는 괴수의 정체를 알 아내는 데에도 큰 도움을 얻을수 있겠구려.”

흑풍사자의 말을 듣자, 태을사자는 미간을 찌푸렸 다.

“흑풍사자. 우리는 지금 그 괴수가 대호와 흡사하다 는 말을 듣고호군을 찾아가는 길이오. 물론 그 괴수 가 호군과 아무 상관이 없다면호군이 큰 도움이 될 수도 있겠으나, 만약 그 괴수가 대호임이 밝혀지고 또 호군과 관계가 있다면 어찌하겠소이까?”

흑풍사자는 몹시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태을사자 가 말을 이었다.

“흑풍사자께서도 그러한 사정을 잘 알고 계실 터인 데, 어쩌자고 호군이 무조건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소이다. 우리는 호군에게 알 아 보러 가는 것이지 조력을 구하러 가는 것이 아닙 니다. 조력을 구하는 것은 호군과 그 괴수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이 밝혀진 이후에나 할 수 있는 일 이외다. 그렇지 않소이까?”

흑풍사자는 태을사자의 말에 아무런 대꾸를 못 하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이후로 셋은 거의 말을 하지 않은 채, 백두산 정상 을 오르는 일에만신경을 집중했다.

이제 조금 더 가면 백두산 꼭대기에 있는, 신령스러 운 호수인 천지(天池)가 나타날 것이었다.

듣기로, 호군의 거처는 천지의 가에 있는 숨겨진 동 굴이라고 했다한 굽이만 더 솟구쳐 올라가면 바야흐 로 천지의 정경을 한눈에 볼 수있는 것이다. 

“도착이오!”

흑풍사자가 가장 먼저 올라가면서 소리쳤고, 그 바 로 뒤로 윤걸이솟구쳐 올라갔다. 널따란 천지가 신령 스러운 기운을 뿜으며 펼쳐져 있었다. 흑풍사자와

윤걸의 입에서 동시에 탄성이 터져나왔다.

“오호…… 과연 천하의 절경이오.”

그러나 태을사자는 올라온 뒤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않고 한 곳을유심히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무 거운 소리를 내질렀다.

“경치를 볼 때가 아니오. 저쪽을 보시오.”

태을사자의 말에 흑풍사자와 윤걸은 태을사자가 가 리키는 곳으로고개를 돌리고는 안력(眼力)을 모았 다. 안력이 집중되자 멀리 있던 사물들이 주욱 앞으 로 당겨지듯이 눈앞에 펼쳐지며 지나갔다. 이윽고그 들의 눈에도 자그마한 노란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 다.

“저… 저것은…….”

흑풍사자가 놀란 듯이 소리쳤고 윤걸도 어깨를 흠칫 했다.

그들의 눈에, 이미 죽어서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수십 마리의 커다란 호랑이 시체들이 들어왔다. 호랑이의 시체들뿐 아니라 주변의나무와 돌들도 마구 부러지고 부숴지고 깨어져, 한마디로 엉망진창의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가 봅시다! 호군의 거처가 저런 일을 당하다니!” 

셋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힘을 집중하여, 호랑이들의 시체가 흩어져 있는 쪽을 향해 우뚝 선 자세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갔다.

사방에 널린 호랑이의 시체들은 비록 사람이 아닌 금수일망정 흉악하고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셋은 호랑이들의시체를 하나하나 살피 는 한편, 주위의 상황도 유심히 살펴보았다. 처음으로 만난 호랑이의 시체는 뛰어 달아나려다가 뒤에서 공격을 받은 듯 앞발을 쭉 뻗은 채 쓰러져 있 었는데, 등에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그것은 칼이 나 기타 병장기로 그어진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물 체에 맞아 으깨어진 연후에 주욱 찢어진 듯한 상처 였다. 그 상처를 살피면서 윤걸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의 짓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러자 태을사자가 긴장된 어조로 말했다.

“일반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많은 호랑이들을 해칠 수 있겠소이까?아무리 병장기를 지닌 사람이라도 대호 한 마리를 보면 오금이 저리고, 어지간한 간담을 가진 자가 아니고서는 감히 마주보고 서지도 못할 텐 데 말이외다.”

그 이야기를 듣고 윤걸은 고개를 끄덕일 뿐 달리 말 하지는 않았다.다른 호랑이의 시체들도 엇비슷했다. 그렇게 하나 하나 살펴 가다가 그들은 더욱 끔찍하 게 죽어 있는 시체를 발견했다. 거대한 힘을 지닌 어떤 것이 호랑이의 사지를 붙들고 무지막지한 힘으 로 주욱 찢어내 버린 것 같았다. 두 토막이 난 호랑 이의 시체가 석자 정도의 사이를 두고 떨어져 있었 고, 내장이 참혹하게 흩어져 있었다.

흑풍사자가 말했다.

“이건 금수가 할 수 있는 짓이 아닌데?”

윤걸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필경 사람의 형체를 지닌 것이 한 짓이오. 양 손으 로 잡고 당겨서찢어 버렸구려. 오우분시(五牛分屍) 나 차열형(車裂刑)같은 방법이오.”

“하지만 사람의 짓이 아닌 것은 분명하오. 사람이 호랑이를 잡는것은 가죽을 탐내어서일 것이오. 이런 식으로 호랑이를 죽일 리 없소.”

흑풍사자는 아까 태을사자가 했던 것처럼 인간을 변 호하는 말을했다.

태을사자는 주의 깊게 그 호랑이의 시체를 살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윤걸이 태을사자에게 말을 건넸 다.

“무얼 그리 꼼꼼이 보시오?”

“적의 크기를 재는 중이오.”

“크기를 잰다고요?”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좌우간 이 호랑이들 을 해친 자는 양손으로 부욱 찢은 것 같소. 그러고 난 다음에 손을 털 듯이 그 자리에시체를 버렸을 테 지요. 그렇다면……………”

“아하!”

그제서야 윤걸은 태을사자의 의도를 깨달을 수 있었 다. 태을사자의말대로라면 이 호랑이를 찢은 자의 어깨 넓이를 알 수 있을 것이기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윤걸은 미심쩍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으 며 말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폭이 너무 좁은 것 같소이다.”

“나도 그 생각을 했소이다. 폭이 석 자밖에 안 됩니다. 그래서 더욱무서운 것이오.”

“무슨 말씀이오?”

“그놈은 아주 작다는 뜻입니다. 같은 힘을 지녔다면 작은 것을 상대하기가 훨씬 어렵지 않소이까.” 윤걸은 나직하게 신음 소리를 냈다. 호랑이를 양 손 으로 찢을 만한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작은 것이 무엇이 있었던가? 윤걸은자신도 모르게 백아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불길하군요. 인간 세상에 그런 것이 있다니……”

“그대는 아시는 바가 없소? 아주 작으면서도 매우 강한 힘을 지닌짐승을?”

“호랑이를 이길 수 있는 짐승은 거의 없소이다.”

“그렇다면 마수(魔獸)는?”

“마수?”

윤걸이 흠칫 긴장하는 빛을 보였다.

“인간 세상에 마수가 나와 설치다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소이다.”

“하지만 과거 홍두오공의 경우는 어떻소이까? 그리 고 이번에 흑풍사자와 내가 맞붙어 싸웠던 괴수도, 결코 인간 세상의 것이라고는 볼수 없는 것이었소.” 

“허어……………”

윤걸은 다만 탄식할 따름이었다.

“마수의 종류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지 못하오. 나 는 아시다시피사계의 근위무사일 뿐이오. 마수와는 아직 한 번도 대적해 본 일이 없소이다.”

윤걸과 태을사자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동굴 안 을 엿보던 흑풍사자가 크게 소리를 쳤다.

흑풍사자의 목소리 또한 살아 있는 것들처럼 음파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마음이 하도 급박한 지라 주변 일대에 쏴 하고 작은바람을 몰아쳤다. 

“이리 와 보시오. 여기 호군이 있소!”

윤걸과 태을사자는 급히 신형을 이동하여 동굴의 입 구로 몸을 날렸다.

과연 동굴 안에는 거대한 늙은 호랑이 하나가 쓰러 져 있었다. 태을사자와 윤걸이 들어오자 흑풍사자가 망연한 듯이 중얼거렸다.

“이미 숨이 끊어졌소.”

윤걸은 찬찬히 호군의 시체를 살폈다.

팔백 년 동안 살면서 도를 닦아 영물의 경지에 들어 섰다는, 조선땅 금수들의 왕이었던 호군의 최후치고 는 너무도 비참했다. 호군의머리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는데, 거기에 선혈과 뇌수가 뒤엉킨채 말라 붙어 끔찍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호군의 얼 굴은 왠지평안해 보였다.

“이치에 맞지가 않소.”

윤걸이 호군의 시체를 보다 말고 소리쳤다. 흑풍사 자와 태을사자의시선이 윤걸에게로 향했다. 

“호군이 이렇게 평안한 얼굴로 죽다니……………. 다른 호 랑이들이 무참히 격살당하는 것을 보고도 호군이 그 냥 있었을 리는 만무하오. 그런데 이 얼굴이라니…….”

윤걸은 말이 나오지 않는지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소리쳤다.

“호군이 이런 평안한 얼굴로 죽었다는 것은 절대로 말이 되지 않소이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소이까? 이렇게 된 데에 는 뭔가 내막이있을 것이오.”

그때 동굴 안쪽으로 잠깐 시선을 돌렸던 흑풍사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저것 보시오!”

태을사자와 윤걸은 흑풍사자를 바라보았다. 흑풍사 자는 동굴 한쪽모서리를 가리켜 보였다.

“저기 뭔가 씌어 있소.”

정말로 그곳에는 기이한 형태의 자국이 남아 있었는데, 글씨 같기도 하고 그림이나 기호 같기도 했다. 

“뭐지?”

“알아볼 수 있겠소?”

셋은 서로를 쳐다보며 말했지만, 이내 모르겠다는 듯 셋 다 고개를가로 저었다. 그 글씨는 한문도 아 니고 언문도 아닌 기묘한 것이었다.

“호군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알리기 위 해 써 놓은 것일까?”

태을사자가 중얼거리자 윤걸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람도 아닌 호랑이가 문자를 알리 있겠소?”

“호군은 보통 호랑이가 아니오. 영통한 영물이니 그 정도는 할 수있을 것이오. 그나저나 이게 무슨 뜻인 지 알아볼 수 없으니……”

“혹, 이건 호랑이들만의 글씨가 아닐까요?”

흑풍사자가 말했으나 태을사자는 고개를 저었다. 

“호랑이가 자기들만의 문자를 만들어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호군처럼 영통한 호랑이가 많 은 것도 아닌데, 한낱 금수에 불과한 호랑이들이 문 자를 만들어 소통하고 지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 소. 이 글자들이 호군이 적은 것이 맞다면, 그건 호 군이 사람에게 배운 글자들일 것이오. 호군은 수명 이 수백 년에 달했으니 과거의 기인이사(奇人異士) 에게 우연히 배워 두었을 수도 있지요.”

그때, 갑자기 먼 발치에서 산이 우르르 흔들릴 정도 로 요란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찌나 힘 이 있고 기운이 강한 소리였던지동굴의 내벽에서 흙 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뭔가 있소!”

윤걸은 재빨리 백아검을 뽑아들었다. 백아검에서 나오는 하얀 광채가 동굴 안을 채 비추기도 전에 태을 사자와 흑풍사자도 묵학선과 취루척을 뽑아들었다. 다음 순간, 셋은 어느 새 몸을 이동시켜서 동굴 밖 으로 나와 품品)자 형으로 대열을 이루어 섰다. 그 러나 대열이 완전히 갖추어지지 못한 짧은 순간, 그 들 앞으로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달려들었다. 미처 대형을 이루기도 전에 거대한 그림자의 습격을 받은 두 저승사자와 근위무사 윤걸은 어쩔 수 없이 품자 형의 진형을 포기하고 제각기 세 방향으로 몸 을 날려 피했다.

몸을 피함과 거의 동시에,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 거대한 물체 하나가 와 박혔다.

그것은 괴수가 아니라 커다란 나무 한 그루였다. 뿌 리채 뽑혀 던져진 듯, 무성했던 가지들이 땅에 반쯤 틀어박혀 풀썩 옆으로 쓰러지고있는 동안 나무의 뿌 리께에서는 아직도 젖은 흙덩어리가 떨어지고 있었 다.

셋은 크게 놀랐다. 저 나무를 집어 던진 자는 분명 생계에서의 힘을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을 알아보고 나무를 뽑아 던진 것일까?

그러나 다음 생각을 할 틈도 주지 않고 이번에는 사 람의 머리통만한 돌멩이들이 우르르 날아왔다.

흑풍사자는 돌멩이들을 보고 냉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서려 했다.

“이놈! 사계의 존재에게 그런 물건이 통할 줄 알았 더냐!”

그 순간, 재빨리 태을사자가 날아와서 흑풍사자를 밀쳤다. 둘은 물론 걸어다니거나 뛸 필요가 없는, 허공에 떠 다니는 영적인 존재들이었으므로 비틀거 린다거나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엉겁결에 밀쳐진 흑 풍사자는 뒤로 주욱 밀려났다. 흑풍사자를 맞추지 못한 돌멩이 우박은 그 뒤의 땅과 언덕배기의 바위 에 부딪쳐 돌가루와 먼지를 휘날리면서 부서지거나 깊이 박혀 버렸다.

“그냥 돌이 아니오!”

태을사자가 몸을 돌리면서 흑풍사자에게 소리쳤다. 

“그럼 ・・・・・・?”

“백(魄)을 감연(感連)시켜 물건을 부리는 것이오. 맞으면 영적으로도 타격을 받소!”

영)이란 것이 그 자체로도 여러 단계가 있으며 또한 여러 가지로 이루어져 있음은 사람의 육신을 이루는 것이 여러 가지인 것과 다를 바 없다. 그 중 에서 중요한 것이 혼(魂)과 백(魄)인데, 혼은 보다 정신적인 기운이 강한 일종의 기(氣)로 볼 수 있고, 백은 보다 물질에가까운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래 서 백은 물질계와 정신계를 잇는 중간 단계적인 성 격이 짙고, 따라서 영력을 백에 모아 힘을 쓰면 물 건을움직인다거나 조종하는 등의 일도 가능했다. 조선의 선비들은, 사람이 죽으면 몸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고 혼은하늘로 올라가며 백은 매장한 자리에 몇 년이상 남아 지기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 왔 다. 즉, 묘자리에 남아 있는 죽은 자의 백이 좋은지 기를 타게 하면 후손에게도 복을 줄 수 있다는 발상 이 그것인데, 이는 당시의 관점으로 보면 단순한 미 신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과학적근거를 지녔던 이론 이었다. 조선 사회에서 풍수나 묘자리에 대한 관심 이 높았던 것은 바로 이러한 백의 존재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백을 물건에 감연시켜 상대를 공격하면 물리적인 타격뿐만 아니라그 물건에 깃들 어 있는 백에 의해 영까지도 타격을 받게 된다는 것 을태을사자는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태을사자가 흑풍사자를 돕는 사이, 윤걸은 크게 소 리를 지르면서백아검을 겨눈 채 나무와 돌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윤걸은 일종의 신장이니 만큼, 몸을 날리자 마치 은빛 화살이 쏘아져 나가는 것으로 보일 만큼 그 행동이 빨랐다. 그리고 몸에서 도 전에 보지못한 은은한 빛이 떠도는 것 같았다. 그와 더불어 윤걸의 손에 들려있는 백아검이 일순 윤걸의 손과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태을사자는 언뜻 보았다.

윤걸이 검을 휘두르며 뛰어든 방향은 태고적부터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던 울창한 침엽수림 속이었다. 윤걸이 그 숲 속으로 뛰어듦과동시에 두 그루의 거 대한 낙락장송이 스르르 허물어지듯 미끄러져 내렸 다. 윤걸이 휘두른 백아검에 베어진 것이다. 그것을 보고 흑풍사자는 혀를 찼다.

“저런 저런……. 영력으로 싸우지 않고 검의 기를 빌어 휘두르다니. 아무리 수목(樹木)에 불과하다지만 산 것들을 해치면 나중에 징계를당할 터인데……….”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계제가 아니오. 우리도 가 서 도와야 합니다!”

태을사자는 흑풍사자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자 신의 법기인 묵학선을 펴들면서 윤걸이 몸을 날린 방향으로 훌쩍 신형을 이동시켰다. 흑풍사자도 법기 인 취루척을 손 안에서 한 번 빙그르르 돌리면서그 뒤를 따랐다.

태을사자와 흑풍사자가 막 숲으로 뛰어들려고 하는 순간, 윤걸이숲에서 스윽 빠져왔다. 그와 동시에 베 어진 두 그루의 나무가 지축을뒤흔드는 요란한 소리 를 내면서 넘어졌다.

윤걸은 뒤로 신형을 물리면서 다시금 백아검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방금 전 숲 속에서 검은 그림자 와 세 합을 겨루어 보았으나, 사계의 근위무사인 윤 걸조차도 그 검은 그림자의 힘에 밀려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검은 그림자의 모습을 윤걸이 아 직도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언뜻 스 쳐 지나가며 보기로는, 인간의 형체와 흡사하기는 하나 인간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인간의 힘이나 인 간이 쓰는 무기로는 영(靈)으로 신체를 이루고 있는 신장의 힘을 막거나 상처 줄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 검은 그림자도 영체이거나 아니면도력이나 불력, 공력 등과 같은 내적인 힘을 깃들여 윤걸을 공격했 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그 그림자가 쏟아내는 힘은 생계의 물리력을 동반한 막강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 다.

윤걸이 뒤로 물러선 틈을 타서, 흑풍사자가 신형을 검은 수레바퀴모양으로 변환시키며 날아들었다. 흑풍사자는 생계의 힘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근처 의 수목이나 자연물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으나, 역 시 영적인 존재인 윤걸의 눈에는흑풍사자의 기세가 자못 대단해 보였다.

흑풍사자가 덮쳐오자 검은 그림자는 몸을 흠칫 세우 면서 거대한몸을 펴고는 길게 포효했다. 그러자 어헝 하는 소리가 산을 우르릉 울렸다. 흑풍사자는 그 기합성에 타격을 받고 물러나, 방향을 튼 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윤걸의 옆에 앉았다.

그때 태을사자의 묵학선이 묵학환출의 수법을 펼쳐 검은 학의 모습으로 화하더니 하늘을 뒤덮을 듯한 기세로 날아들었다. 검은 그림자는 인간처럼 서 있 다가 갑자기 엎드린 짐승처럼 몸을 웅크리더니위로 몸을 솟구쳐 올려 묵학선의 기운을 피했다. 그제서야 셋은 상대의 정체를 볼 수 있었다. 키가 1 장에 가까운 거한으로 인간과 같은 육체에 낡고 찢 어져 밧줄로 얼기설기 엮은 검은옷을 걸치고 있었지 만, 그 자의 얼굴은 분명 호랑이였다. 그리고 팔과 손등 또한 형태는 인간의 그것과 같았으나 호랑이 특유의 얼룩 무늬가 그려져 있는 기이한 괴물이었 다.

“네놈은 마계의 괴수렸다!”

태을사자가 마음으로부터 전달되는 소리를 크게 내 지르는 사이, 윤걸은 백아검에 기를 모아 검과 손이 하나로 합쳐진 상태에서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그러고는 공중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리려고 하는 괴물 을 향해 곧바로 쏘아져 나갔다. 그 뒤에서 흑풍사자 가 취루척의 기운을 불어 윤걸의 몸이 나아가는 것 을 도와 힘껏 밀어붙였다. 그러자윤걸은 아찔할 정 도의 속도로 신형을 소용돌이처럼 회전시키면서 괴 물에게로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그 순간, 괴물은 아래로 떨어져 내리다가 허공에 대 고 팔을 휙 휘둘렀다. 그러자 떨어져 내리던 괴물의 방향이 틀어지면서, 윤걸은 아슬아슬한 차이로 괴물 을 빗나가고 말았다.

윤걸이 다시 방향을 돌리는 사이, 태을사자는 눈을 감고 양 손을짝 하고 마주치면서 잘 사용하지 않던 묵학선의 기법 중 ‘환)’자의법을 사용했다. 공중 에서 날아들던 묵학선이 팍 하고 사라졌다. 그러자 떨어져 내리던 괴물은 놀랐는지 잠시 몸을 주춤하다 가 때마침 부근에 있던 높은 나무의 꼭대기에 사뿐 히 내려 앉았다. 괴물은 긴장된 표정을 지으며 날카 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때 ‘환’자법에 따라 사라졌던 묵학선이 괴물의 바로 옆에 나타나면서 삽시간에 다시 검은 묵학의 모습으로 변하여 괴물을 감싸 안듯이 둘러싸 버렸 다.

“잡았다!”

흑풍사자가 취루척을 막 던지려다 말고 기쁨의 소리 를 질렀으나,괴물은 묵학에 잡힌 것을 개의치 않고 한쪽 팔을 쭉 빼더니 학의 날개를 잡아 가볍게 쩌억 벌렸다.

흑풍사자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저 괴물의 힘은얼마나 엄청나기에 사계의 사자 중에 서도 결코 약하지 않은 영력을지닌 태사자의 법술 을 단지 힘만으로 깨부순단 말인가.

“저….. 저럴 수가!”

묵학을 조종하던 태을사자는 자신의 술법이 엄청난 힘에 의해 봉쇄당하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학과 정신적으로 일치되어 있는 자신의 팔이 확 벌려지는 것을 느꼈다. 순간, 태을사자의 술법이 깨어지면서 묵학선은 부채로 화하여 괴물의 손아귀에 움켜쥐어졌다.

태을사자는 타격을 입고 잠시 몸을 주춤하였으나 곧 자세를 수습했다.

그 사이, 아까 신형이 빗나갔던 윤걸이 몸을 돌려 괴물 쪽으로 쏘아져 왔다.

괴물은 마치 날렵한 고양이처럼 나무 위에서 아래로 몸을 날렸다.그리고 아래로 막 떨어지려는 찰나, 등 뒤로 왼손을 뻗어 자신이 방금까지 올라타고 있던 나무의 기둥을 붙잡았다. 순간, 푸직 하는 소리와함 께 날카로운 손톱이 나무 속으로 푹 파고 들었고, 괴물은 떨어지다말고 그 자리에 정지했다. 곧바로 괴물은 다리를 튕겨 나무를 밟았다.그러자 그 엄청 난 힘을 받고, 괴물이 발을 튕긴 부분이 우지직 소 리를내며 순식간에 부러져 버렸다. 괴물의 힘이 정 말로 무시무시한 것은, 그 나무가 아무리 윗부분만 부러졌다고는 하나 두께가 한 뼘 반은 넘을 정도로 두껍고 가지가 많이 달린 무거운 나무라는 사실에서 도 알수 있었다.

괴물은 아래로 떨어져 내림과 동시에 자기 쪽을 향 해 쏘아져 들어오는 윤걸을 향해, 자신이 방금 통째로 분질러 버린 그 두꺼운 나무를마치 도끼로 장작 배기를 패듯이 휘둘렀다. 다음 순간 놀라운 결과가 벌어졌다. 보통 나무를 휘둘렀다면 사계의 존재인 윤걸의 몸을 투시하여 그대로 지나쳤을 터인데, 그 부러진 나무는 날아오는 윤걸의 몸을 맞추어 땅으로 떨구어 버렸다.

흑풍사자는 괴물의 무지무지한 힘을 보고는 다시 달 려들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눈 으로 멍하니 보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저런 힘을 지닌 괴물이 있다니…………!”

윤걸이 아래로 떨어지려는 찰나, 몸을 날린 태을사 자가 윤걸을 훌쩍 받아들고는 다시 몸을 띄워 흑풍 사자가 있는 곳까지 단숨에 날아왔다.

그러자 거대한 호랑이 얼굴의 괴물도 나뭇덩이를 내 던지고 가볍게땅 위에 내려섰다. 괴물이 착지한 뒤 로, 괴물이 집어던진 나뭇덩이가와지직 소리를 내며 다른 나뭇가지들을 부러뜨리고는 땅에 떨어졌다.그 리고 푸른 이파리들이 가을 낙엽처럼 사방에 어지러 이 휘날렸다.

흑풍사자가 취루척을 던져 다시 괴물을 공격하려는 순간, 태을사자가 그것을 말렸다.

“왜 그러시오?”

“저 자는 마수가 아니오. 생계의 영통한 생물일 것이오.”

“무슨 말씀이오?”

“저 자는 방금 나무를 꺾어 윤 무사를 내리쳤소. 그 러나 흑풍사자도 잘 아다시피 나무 같은 물질적인 것들은 우리의 몸을 맞출 수 없소이다. 그런데도 윤 무사가 저것에 맞고 쓰러졌다는 것은 나무에 깃든정 령이 저자의 힘에 감연되어 도움을 주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소.그렇다면 저자는 마수가 아니라 생 계의 영통한 자일 게요. 정령이 마수의 의식에 동조 할 리는 없으니까. 더구나………..”

말로는 길지만 영적인 존재들의 의사 소통은 마음으 로 직접 전달되는 것이라 별로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태을사자는 말을 끊고호랑이 형상의 괴물 쪽으로 눈짓을 했다. 흑풍사자의 눈에 호랑이 괴물 의 머리와 어깨 위로 나뭇잎이 수북이 쌓이는 모습이 보였다.

흑풍사자는 태을사자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 다. 만약 저 괴물이 진짜 마수라고 한다면 당연히 나뭇잎 같은 물건들은 그냥 통과되어 땅바닥에 쌓이 지 저렇게 머리와 어깨 위에 쌓일 리는 없기 때문이 었다.

흑풍사자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렇다면 저자가 우리를 공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너희는 어째서 우리 일족들을 해쳤는가?” 

흑풍사자가 중얼거린 소리는 전심법에 의해 마음으 로 전달한 것이었는데, 놀랍게도 호랑이 괴물은 그 말을 알아듣고 비슷한 전심법으로 물어 왔다. 그러 자 태을사자가 한 발자국 나서면서 말했다. 

“전심법을 할 줄 아는가?”

“이 빌어먹을 놈들아. 어째서 우리의 일족을 해쳤는 지부터 말해라!”

그제서야 태을사자는 저 호랑이가 뭔가 오해하고 있 음을 깨달았다.비록 인간의 몸처럼 모습이 변해 있지만, 저 자는 호랑이의 일족임에분명했다. 그는 지 금 호랑이들이 죽어 있는 광경을 보고 태을사자 일 행을 범인으로 오해하고 무작정 달려든 것이 틀림 없었다.

“누가 너의 일족을 해쳤단 말인가?”

“너희 말고 여기 누가 있다는 말이냐? 어헝…… 낌 새가 좋지 않아인간으로 탈태하는 것을 중도에 포기 하고 와 보았더니 이런 끔찍한일이…………. 이놈들아, 도대체 왜…………!”

자세히 보니 호랑이의 눈빛은 분명히 불타오르고 있 었지만, 그것은단순한 분노의 빛만이 아니라 슬픔의 빛도 띠고 있었다. 태을사자는길게 한숨을 내쉬었 다.

“우리가 한 일이 아니다. 우리도 지금 막 도착해서 이 광경을 보고는 놀라는 중이었다.”

“너희가 아니라고……? 거짓말!”

“우리가 그랬다는 증거가 있는가?”

태을사자가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호랑이는 태을사자를 한 번노려보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나는 동족의 위급함을 듣고 달려 왔다. 그런데 일 족이 모두 처참하게 죽어 있고…… 그 자리에 너희 가 있었다……. 나는 인간들을 결코 믿지 않는다.” “허,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고 해도 그러는구나. 그 리고 우리는 인간도 아니다.”

“인간이 아니라고……? 응……?”

호랑이는 그제서야 태을사자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리고 셋의 발이 허공에 떠 있음을 깨달았다. 호랑 이는 그래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코를 쫑긋거려 보 았다. 체취를 맡아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 존재 들인 그들에게서 냄새가 날 리 없었다.

호랑이는 비로소 긴장을 푸는지 표정을 누그러뜨렸 다.

“나는 명부의 사자인 태을이고 이분은 흑풍, 그리고 저분은 사계의근위무사인 윤 무사시다. 우리가 무슨 이유로 생계의 존재들을 해치겠는가?”

“명부? 사계? 인간의 영혼을 다루는 곳 말인가?”

태을의 옆에 있던 흑풍사자가 대신 말했다.

“그렇다.”

그러나 호랑이는 아직도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태을사자는 저승사자들의 일과 명부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명부는 사람의 영을 다스 리는 곳이고 짐승이나 정령들은자연스럽게 윤회가 되기 때문에, 호랑이가 명부와 같은 것에 대해 잘알 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태을사자의 설명 이 끝나자, 호랑이는 그제서야 납득이 가는지 고개 를 끄덕였다.

“그랬군………. 그것도 모르고 다짜고짜 덤벼 미안허 우.”

“괜찮다. 그런데 네가 인간으로 탈태하려고 하다가 포기했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나는 팔백 년 동안 도력을 쌓았수. 증조부 호군님 의 당부셨지. 인간으로 변하여 앞으로 일족을 위해 뭐든 이로운 일을 하라고 그러셨거든. 그래서 개골 산(금강산)에서 도를 쌓아 거의 마무리가 되는 참이 었는데 화급한 기운이 느껴져서…….”

“화급한 기운? 여기 백두산에서 개골산까지는 꽤 먼 거리인데 어떻게 그런 것을 느꼈지? 천안통(天 眼通)의 법이라도 익혔는가?”

“변괴가 있었수. 개골산의 구백 년 묵은 노루인 널 신이 나에게 변괴가 있다고 말했수. 그러니 얼른 증 조부를 찾아 보라구 했수. 증조부는 조선 천지의 자 연과 금수를 관할하는 분이시지. 증조부는 조선 땅 의 모든 금수와 정령들과 통해 있거든.”

“그랬구나. 하긴 네 힘은 정말 대단했다.” 

태을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호랑이는 보통의 존재가 아니었다. 조선 땅 정령의 우두머리라면 필시 호군을 지칭하는 것일 터 이고, 그렇다면 이 호랑이는 호군의 증손자뻘이 분 명했다. 더구나 머리는 그리 잘 돌아가는 것 같지않 지만, 타고난 그 놀라운 괴력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래서호군은 이 호랑이로 하여금 도를 닦 아 인간으로 탈태하게 한 뒤 일족이 인간에게 해침 을 당하는 일을 막으려고 했을 것이다.

“네 이름은 뭐냐? 이름은 있는가?”

“있수. 흑호라고 하우.”

드디어 호랑이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보통의 금 수들은 이름 같은 것을 지니지 않지만, 역시 이 흑 호는 일족을 대표하여 도를 닦던존재이니만큼 이름 이 있었다. 이제 와서 보니 검은 옷을 걸친 것도 실 제의 옷이 아니라 도력으로 막을 친 것이었다.

잠시 후, 태을사자와의 대화에 정신을 놓고 있던 흑 호가 경황을 되찾았는지 외쳤다.

“그런데 댁들은 왜 여기 왔수?”

“호군에게 물어 볼 것이 있어서니라. 우리는 공식적 으로 사계의 임무를 띠고 온 것이다.”

호군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갑자기 흑호는 호군의 안위가 생각났는지 큰 소리로 외쳤다.

“아참 이런! 내 증조부님은?”

“증조부님이라면 ・・・・……호군 말씀이냐?”

흑호는 크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태을과 흑풍, 그리고 윤걸은 생사를 초탈한 사계의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감정의 기복이 없었으나, 지금 이 순간 상당히 안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흑풍사자가 묵묵히 고개를 옆으로 젓자, 흑호는 돌연 얼굴이 울상이 되더니 어헝 하고 큰 소리를 지르 면서 호군의 거처인 동굴 쪽으로뛰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