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1권 – 15화
얼마 동안이나 이렇게 꿈도 꾸지 않고 잤을가?
은동은 몽롱한 상태에서 잠을 깼다. 금세라도 어머니의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올 것 같았다.
– 우리 은동이 잘 잤니? 날이 이렇게 밝았는데 늦잠 잤구나…….
은동이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자, 자기 방의 누렇게 바랜 벽지 대신동이 막 트기 시작한 새벽 하늘이 보 였다.
은동은 다시 눈을 감았다. 어젯밤의 끔찍한 기억이 진짜 현실일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 나 자고 나면 잊혀지는 꿈이어야 했다.
‘꿈이야, 꿈….’
은동은 잠시 후 질끈 감은 눈을 떴다. 그러나 여전 히 위로는 맑은하늘만이 펼쳐져 있을 따름이었다. 은동은 후다닥 상체를 일으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어느산비탈의 외딴 소롯길 옆이었다. 수양버 들과 소나무들이 미풍에 한들한들 가지를 흔들고 있 었다. 사방은 희부염한 새벽빛이 들고 있었지만 아 직은 어두웠다.
은동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낡고 흙이 묻은 승복이 덮여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다 타서 재가 되어 가는 모닥불터가 남아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내가 어째서…..?’
순간, 어젯밤 벌어졌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은동의 머릿속을 스치고지나갔다. 죽어 넘어진 박서방, 불 타는 마을, 무애라는 승려, 어머니의잘려진 코……. 은동은 승복자락을 걷고 일어나 고개를 들고 사방을 둘러보았다.저만치에,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명 의 승려가 보였다. 한 명은 어제 보았던 무애였고, 다른 한 명은 처음 보는 승려였는데 중년의 나이로 보이는 것이 무애보다 어른인 것 같았다.
둘은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은동이 일어난 것을 먼저 본 중년승려가 손가락으로 이쪽을 가리켜 보였 다. 그리고 둘은 천천히 은동에게로 걸어왔다. 중년 승려가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름이 무엇이냐?”
중년 승려의 얼굴은 그야말로 인자해 보였고, 나이에 비해 풍채가비할 데 없이 준수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위엄이 느껴져, 은동은 말을 더듬었다.
“본명은…… 강・・・・・・강은호라고 하고…… 아명은 은…………… 은동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중년 승려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했다.
“그러면 그냥 은동이라고 하마. 달리 갈 곳이 있느 냐?”
은동은 그 말에 가슴이 꽉 막혀 오는 것을 느꼈다. 이제 비로소 은동은 어머니가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어머니는 은동을놓치자 인파를 헤치면 서 다시 마을 쪽으로 갔을 것이고, 왜병을 만나변을 당했을 것이다.
외갓집 동네는 이미 불바다가 되어 버렸으니 그리로 갈 수는 없었다. 한양에 있던 집은 아버지가 변방으 로 가시기 전 처분해 버렸고,가까이 지내는 친척도 거의 없었다. 아버지가 계신 병영 말고는 아무데도 갈 곳이 없었다.
은동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말했다.
“아버님이……… 군관이십니다. 신립 장군을 따라 변방에 나가 계신것으로 아는데……….”
그 말을 듣자 중년 승려는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아미타불………. 신립 장군은 지금 변방에 계시지 않단다.”
놀란 은동은 눈물에 젖은 눈을 들어 중년 승려를 올 려다보았다.
“신립 장군은 왜병을 막기 위해 급히 군사를 몰아 충청도로 내려가셨다. 신립 장군의 부장인 이일이 상주에서 적을 막으려 했으나 일패도지했다고 하더 구나. 너의 집도 상주에 있지 않았느냐?”
은동은 그 말에 대답은 않고 중년 승려에게 물었다.
“신립 장군이 패했습니까?”
“아직 패하지는 않았다만…, 문경새재에 진을 치 면 패하지는 않을 것이요, 탄금대에 진을 쳤다면 전 멸하기 십상일 것이야…………. 어찌천기가 이 모양이 되는지………… 아미타불…….”
중년 승려가 불호를 외우자 은동을 데리고 왔던 무 애가 눈을 크게떴다.
“천기라니요? 그리고 탄금대에 진을 치면 전멸이라 는 말씀은 또 무엇이오니까?”
그러자 중년 승려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어젯밤 노스님(서산대사)께서 다시 기를 짚으시고 무엇인가 크게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내셨다네. 조 선 천지의 기가 흔들리고 있고천기가 어지러워지고 있어. 원래대로라면 신립 장군은 새재에서 적을며칠 막다가 한강으로 진을 옮겨 도원수 김명원과 합세하 게 되어 있네. 그건 병법상으로나 이치상으로나 당 연한 수순이지. 그러면 왜군도 기세가 꺾일 것인데, 어찌 된 일인지 신립 장군이 갑자기 진을 탄금대로 옮기는 것 같다 하셨네.”
은동은 그들이 하는 말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앉 은 자리에서 천리 밖의 일을 어찌 내다볼 수 있단 말인가? 그 노스님이라는 분은 사람이 아니란 말인 가?
무애는 놀라서 안색마저 변하더니 다시 물었다.
“탄금대에 진을 치면 왜 안 되는지요?”
“천기를 어기는 짓이지. 천기를 거슬려서 제대로 되는 일이 없느니…………. 좌우간 큰일일세.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참,자네, 감결은 잘 가 져왔는가?”
“예. 해동밀교는 찾기가 워낙 까다로왔습니다만, 애 써 찾은 보람이있었습니다. 해동밀교에서는 노스님 과 유정스님의 이름을 듣고는 곧빌려주셨습니다.”
“다행한 일이군. 좀 보여 주겠는가?”
무애는 깊은 품 속에 천으로 동여매 두었던 책 한 권을 꺼내어 유정에게 건네주었다. 겉에 <해동감 결〉이라는 네 글자가 씌어 있는 것을 은동도 볼 수 있었으나, 은동은 그런 책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다만 신립 장군을 따라 전쟁터에 나가 있을 아버지의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중년 승려는 책을 펴 보고는 안색이 흐려졌다.
“허허………… 이것은 알아 볼 수가 없군. 고문자로 되어 있으니 말이야.”
무애가 물었다.
“스님께서도 모르시옵니까?”
“이것은 실전된 지 오래된 조선의 옛 문자일세. 흠…. 혹 노스님은 아실는지…..”
중년 승려는 불호를 한 번 외우고는 무애에게 〈해 동감결>을 건네주며 말했다.
“무애, 너는 몹시 지쳤으니 감결을 지니고 이 아이 와 함께 일단 금강산으로 올라가도록 해라. 나는 충 주로 가서 신 장군의 전황이 어찌될지 알아 봐야겠 다. 아마 네가 금강산에 도착하는 시간과 비슷하게 도착할 것이다.”
그 말을 듣자 무애는 부끄러운 듯 합장을 하고 깊이 고개를 숙이며말했다.
“빈승이 재주 없어 대사께 누를 끼치게 되었습니 다.”
그러자 중년 승려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 다.
“네가 밤잠을 자지 않고 난을 당한 사람들의 시신을 수급하느라 늦은 것은 잘 알고 있다. 칭찬을 받아 마땅한 일이지. 그리고 내가 가는것은 신 장군의 승패 여부에 따라 이번 전쟁이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 기 때문에 그러는 게야. 어제 노스님께서도 그리 당 부하시길래 오늘새벽 일찍 금강산을 내려온 것이란 다.”
은동은 다시 한 번 믿기지가 않아서 눈을 크게 떴 다. 자신은 어제까지 경상도 상주에 있었으니 무애 가 아무리 걸음이 빠르다고 해도 기껏해야 이곳은 충청도 부근일 텐데, 오늘 새벽에 금강산에서 떠난 중년 승려가 어떻게 이곳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도 달했단 말인가? 그러나 유정은 은동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랑곳 않고 계속 말했다.
“아울러, 가는 길에 이 아이의 부친에 대해서도 한 번 알아 볼 수있으면 알아 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중년 승려는 은동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짓고 말했다.
“은동아, 나는 금강산에 있는 유정이라고 한다. 네 부친의 함자는어찌 되시느냐? 내 가능한 한 알아 보고 오마.”
은동은 고마운 마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의 부친의 함자는 강자, 효자, 식자 쓰십니다.”
“그래, 총명하구나, 허허허…. 선재라, 선재라…….”
은동아, 너는지금 갈 곳이 없으니 일단 금강 산으로 가도록 해라. 만약 너의 부친을만나게 된다 면 내 전갈을 해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금강산 에 있으면서 서서히 부친을 찾아보도록 하자꾸나.” 그 말에 은동은 자신이 조금 건방진 것 같다는 생각 이 들었지만 참지 못하고 말대꾸를 했다.
“금강산에 있으면서 어찌 부친을 찾습니까?”
유정은 껄껄 웃고는 말을 이었다.
“우리는 금강산에만 있을 것이 아니란다. 승병을 조 직하여 팔도를누비게 될 것이니 우리를 따라다니는 것이 너 혼자 헤매이는 것보다훨씬 낫지 않겠느 냐?”
말을 마치고나서 유정은 합장을 한 후, 무척 귀엽다 는 듯 은동의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등을 돌 리려 했다. 그때 은동이 갑자기소리쳤다.
“스님! 스님!”
유정은 막 길을 가려다가 은동이 부르는 소리에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느냐?”
“스님, 제발 저를 데리고 같이 가 주세요. 아버님을 만나뵙고 싶습니다……………..”
은동은 또다시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유정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될 말이야. 전쟁터에 어찌 어린 몸이 들어간단 말이냐?”
“스님께서 법력이 높으셔서 금강산서 하루만에 여기 까지 오실 정도라면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 아닙니까? 그리고 전쟁터가그리 위험하다면 스님은 어찌 혼자 가시려 하십니까?”
무애는 은동이 당돌하게 말하자 입을 막으려 하였으 나, 유정은 그냥 두라며 무애를 제지하고는 빙긋이 웃었다. 은동은 그 자리에 엎드려 절을 하며 계속 애원했다.
“전쟁터에 나간 아버님이 걱정되어 죽을 지경입니 다. 제발, 제발 부탁입니다, 스님. 제발………….”
말을 하다 말고 은동은 목을 놓아 울음을 터트렸다.
서럽디 서러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럭저럭 잘 참고 따라오던 은동이 갑자기 목을 놓 아 울자 무애는당황스럽기도 하고 불쌍하기도하여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유정만 쳐다보았다. 유정은 계속 염주알을 굴리면서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 러다가 유정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중얼 거렸다.
“제 부모를 보고 싶다는 마음을 내 어찌 막으랴. 우 리가 만난 것도다 인연일 터이니…………. 울음을 그치 거라. 아미타불…………….”
그러나 은동은 금방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한참 동 안을 흐느끼다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유정이 인 자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허나 나를 따라 가려면 두 가지 약속을 해야 한다. 그럴 수 있겠느냐?”
“흑흑….. 무엇이라도………… 하겠습니다. 꼭…… 꼭 데리고 가 주세요……. 흑흑…….”
“그래 그래. 우선 첫째로 내 전장으로 가기는 간다만은 이미 싸움이 시작되었으면 네 아비를 찾지 못할 수도 있느니라. 그것을 꼭 단정지어 약속할 수는
없구나. 그래도 가겠느냐?”
“가겠습니다. 가겠어요!”
“그래. 그리고 내 축지법을 써서 갈 것인데 이는 금 기이니 남의 눈에 뜨이면 안 되는 법. 가는 동안 절 대 소리를 내어 다른 사람이 보게하면 안 되고 이후 에도 그러한 법력을 쓰는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면안 되느니라. 그럴 수 있겠느냐?”
은동은 원래 성격이 굳은 아이였다. 다른 보통 아이 들 같으면 하고싶은 일을 위해서라면 일단 약속부터 하고 보겠지만, 은동은 자신이정말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인지 차분히 생각해 보고, 그러고 나서 각오를 단단히 한 연후에 대답을 하였다. 유정은 도 력이 높았기 때문에 이 어린아이가 숨김이 없고 또 한 의외로 심지가 굳은 것을 단번에 알아 보았다. 유정은 은동이 점점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좋다! 그러면 우리 가도록 하자!”
“왜 그러느냐?”
“무애스님이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인사를 드려야…….”
그러자 유정은 감탄한 듯 웃으며 말했다.
“네 성정이 지극히 착하구나. 그래, 갈 길이 아무리 급해도 도리를잊어서는 아니되겠지. 어서 인사드리 고 오너라.”
그 말과 동시에 유정은 은동에게 보여 줄 겸, 무릎 도 놀리지 않고축지의 법을 써서 순식간에 저편으 로 몇 장 물러서 버렸다. 뛰어 오르지도 않고 몸을 옆으로 이동해 간 것이다. 은동은 하도 놀라 유정이 가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다가, 잠시 후 무 애에게 물었다.
“저…… 저 스님의 거…… 걸음이………….”
무애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축지법이란다. 유정 큰스님은 밀법의 진전을 이어 받아 법력이 고명하기 이를 데 없으시지. 내가 곧장 금강산으로 간다고 해도 탄금대를 들렸다 오시는 유 정스님보다 더 늦을 게다.”
“세상에 그런・・・……그런 재주도 있나요?”
“더 놀라운 재주도 많단다. 불도를 닦는 분 외에 도 가(道家) 쪽 수련을 하는 분들 중에도 고명하신 분 들이 꽤 많지. 좌우간 너는 복이많구나. 유정 큰스 님을 가까이서 뫼시게 되다니 말이다. 그렇지만 유 정 큰스님께 폐를 끼치면 안 된다.”
“아까 노스님이 계시다고 한 것 같은데 그분의 법력 은 더 고명하신가요?”
“노스님은 서산대사라고 하는 분이신데 유정 큰스님 의 스승이시지.나에게는 사조(師祖)님이 되는 셈이 니 그분의 법력을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단 다.”
은동은 속으로 몹시 기뻤다. 저렇게 도통한 분을 따 라다니다가 때를 보아 재주를 익힌다면 왜병들을 모 조리 자기 손으로 때려잡아 복수를 할 수 있을 거라 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은동은 무애에게 서둘러 인사를 하고는 유정에게로 갔다. 유정은 은동을 옆구리에 끼고는 날 듯이 산을 누비는데, 그 속도가 무애의 등에 탔을 때에 비길 것이 아니었다. 은동은 유정에게 말을 붙여 보기는 커녕 거의 까무라치다시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