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1권 – 16화


흑풍사자는 흩어져 가는 몸의 기운을 바로잡으려 애 쓰면서 반사적으로 신형을 위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요기에 기습을 당한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다. 흑풍 사자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추스리면서 떨리는 손으 로 취루척을 꺼내 들고 제이차 공격에 대비하였다. 아니나 다를까제일격에 이어 두 번째의 요기가 바람 처럼 흩어진 흩어져서 쏘아져들어왔다. 흑풍사자는 간신히 그 공격을 취루척으로 막았으나 더 버티기가 힘들었다. 금방이라도 전신이 무로 변해져 흩어져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틈을 주지 않고 세 번째의 공격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요기가 여덟 가닥으로 갈라져 팔괘의 방위 에서 한꺼번에 쏘아져 들어오고있었다.

흑풍사자는 죽을 각오로 입술을 깨물고는 취루척에 자신의 모든기운을 쏟아 넣어 허공에 원을 그렸다. 그러자 취루척은 둥근 구(球)모양이 되어 흑풍사자 의 몸을 보호하는 막을 형성했다. 그러나 여덟가닥의 요기가 차례로 부딪침에 따라 흑풍사자를 둘러싼 막은 타격을받을 때마다 점점 강도가 약해졌다. 그러다가 마침내 일곱 번째의 공격이 가해지자, 취 루척은 힘을 잃고 원래의 막대 모양으로 변해 빙글 돌며 흑풍사자의 손으로 돌아왔다. 연이어 흑풍사자 의 어깨 부근에 강렬한 통증이 왔다. 한 가닥의 요기 가 적중된 것이다. 원래는 목을 겨냥하고 들어온 것 이었지만 흑풍사자가 있는 힘을 다해 신형을 이동시 켰기 때문에, 저승사자의 급소라 할 수 있는 인후 부근은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저승사자는 영기로 이루어진 존재라 상처를 입어도 영기만 잘 다스리면 사람의 상처가 아무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몸이 회복된다. 하지만 그러한 영 기의 몸에도 급소는 있었다. 인후에는 영기의 통로 가 있기 때문에, 다른 영기로 그곳을 적중당하면 사 람이 목을 가격당할 때와 비슷한 충격을 입는 것이 다.

‘이……… 이놈…… 전에 겨루었던 괴수와 비슷한 수 법이구나………….’

흑풍사자는 상처가 몹시 심해서 지금 당장 영기를 수습하지 않으면 자칫 신형이 흩어지고 만다는 것을 알았지만, 오기를 내어 요기가뿜어져 나오는 쪽으로 먼저 취루척을 날렸다. 그러나 요기가 또다시흑풍사 자의 몸으로 엄습해 들어오자, 이번에는 신형을 옮 겨 피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아슬아슬한 순간, 번쩍이는 흰 빛 한 줄기가 흑풍사 자의 주위를 둥글게 맴돌며 막을 치듯 흑풍사자를 보호했다. 요기가 그 흰 영기에 맞고 튕겨 나감과 동시에, 윤걸이 장막 안으로 뛰어들어 흑풍사자를 붙잡아 올렸다. 저승사자의 영은 무게가 없기 때문 에 손바닥을 대는 것만으로도 그 몸을 들어올릴 수 가 있다. 죽음 직전에 간신이 구출된 흑풍사자에게 윤걸이 재빨리 말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싸우면 이롭지 못하오. 밖으로 놈을 끌어냅시다.”

“저 안에 수상쩍은 여자의 혼이 있소. 그놈이 아무 래도……………”

전심법으로 대화를 나누며 몸을 빼는 사이에도 요기가 두 번씩이나 윤걸의 뒤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윤 걸이 백아검을 등 뒤로 날리자,백아검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윤걸의 등에 바싹 붙어서 그 요기를 일일이 막아내었다.

법기를 쓰는 영력 간의 싸움이라 서로가 뿜어내는 영기들이 물건들에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는 않았지 만, 장막 안은 돌개바람 같은 광풍에 휘말려 엉망진 창이 되었다. 우장창 하는 소리에 바깥에서 파수를 보던 병사들이 놀라 뛰어 들어오려다가 겁을 먹고는 장막 밖에서흠칫거리고 있었다.

윤걸은 장막 밖으로 몸을 이동시킨 후 허공으로 떠 올라 공중에 머문 상태에서 흑풍사자를 내려 놓았 다. 그런 다음 기합을 크게 내지르고는 백아검을 허공에 던져 부상을 입은 흑풍사자를 둘러싸 보호하 게했다. 그리고 자신은 양 소매를 활짝 펼쳤다. 기 세는 좋았지만 완전무방비의 상태가 윤걸을, 흑풍사 자는 자신도 모르게 말리려고 했다.

“이놈! 썩 나서거라!”

윤걸의 일갈이 떨어지자마자, 아래쪽에서부터 푸른색의 돌개바람같은 기운이 치솟아 올라 윤걸을 덮치려 했다. 다음 순간, 옆에서부터붉고 날카로운 기운 이 솟구치며 푸른 기운을 치고 지나갔다.

윤걸은 백아검 외에도 또 하나의 법기를 지니고 있 었던 것이다. 그것은 육척홍창(六尺紅槍)이라는 이 름의 장창처럼 생긴 법기였는데,윤걸의 원래 법기는 바로 이 육척홍창이었고 백아검은 기연(奇緣)에의해 얻게 된 법기였다.

영적인 존재들 중 여러 개의 법기를 지니고 다니는 자들은 거의 없다. 법기는 곧 자신의 영력의 집결체 이니만큼, 수효가 많은 것보다 정심하게 하나로 힘 을 모을 수 있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윤걸은 일부러 허세를 부려 괴수를 유 인한 다음 또 하나의 법기를 떨쳐 냄으로써 이 정체 불명의 적을 기습한 것이다.

홍창에 적중된 푸른 기운이 급히 휘몰아치다가 비틀 거리며 진로를바꾸자, 윤걸은 육척홍창을 양 손에 쥐고 흑풍사자를 보호하기 위해남겨 두었던 백아검 을 회수하고는 괴수를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비록 부상을 당한 몸이긴 했지만, 흑풍사자도 힘을 내어 취루척에 온 영력을 실은 다음 괴수에게로 날렸다. 무사인 윤걸의 법기답게, 육척홍창은 마치 번개불처 럼 붉은 빛을무섭게 번득이며 숨이 막힐 듯한 영기 로 주위를 압도했다. 그리고 흑풍사자의 손에서 날 려진 취루척도 무섭게 회전하며 검은 원반처럼 쏘아 져 갔다.

그러자 푸른 돌개바람 같은 괴수는 힘을 양 쪽으로 나누어 둘의 합공을 막아 내었다. 셋의 힘이 부딪치 자 영력이 아우성치듯 회오리치며 위로 솟아 올랐 다. 괴수는 윤걸에게 조금 밀렸으나, 반면 취루척을 조금씩 밀어내고 있었다. 괴수의 영력은 놀라워서 자신의 힘을 둘로쪼개었음에도 윤걸과 흑풍사자의 공세에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일전에 태을사자가 말했던 것처럼, 일대일로 싸운다면 도저히 이길 수없을 듯한 상대였다.그때 생각지도 못한 세 번째 방향에서 공격이 있었다. 윤걸이 회수했던 백아검이 위에서 곧장 아래로 내리꽂히며 팽팽한 국면을 깨트 렸던 것이다. 괴수는 그것까지 방비할 여유가 없었다. 순식간에 푸른 돌개바람 같던 기운이 두 토막으 로 갈라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놈을 밀어붙이고 있 던 윤걸과 흑풍사자의 영력이 달려들었고, 놈은 몇 조각으로 박살이 나고 말았다. 여러 토막이 난 괴수 의 잔해가 스르르 흩어져 바람결에 날아가 버리는 것을 보고서, 흑풍사자는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 다.

“끝났소이다. 정말 위험했소.”

윤걸은 백아검을 받아들면서 흑풍사자를 걱정했다. 

“부상이 심하지는 않소이까?”

“기습을 당하기는 했지만 그리 큰 상처는 아닌 듯싶 소.”

그러자 윤걸은 씩 웃으며 말했다.

“어떤 놈인지 정체를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놈의 영 력은 정말 대단했소. 태을사자의 조언이 없었다면 이기기 힘들 뻔했소이다.”

“태을사자의 조언?”

“우리가 처음 길을 떠나기 전, 태을사자가 괴수에 대해 고민하다가 백아검을 보고 안심하는 눈빛을 보 이지 않았소이까? 그때 태을사자가 왜 안도의 표정을 지었는지, 제가 짐작하는 바를 말씀드렸는데 기 억하시겠지요? 자신의 영력이 통하지 않는 법기를 사용하면 영력이밀리더라도 대적할 수 있다는 것을 요.”

“기억하다 마다요.”

“사실 방금 전의 방법은 바로 그런 점을 순간적으로 떠올렸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오. 이 백아검은 그 자체로도 심령에 통해 있는 대단히 희귀한 법기인데 적이 그 내력을 알 리는 없지 않소이까? 그래서이 를 이용하여 기습을 한 것이 다행히 성공한 것이외 다.”

윤걸은 매우 기뻐했다. 강적을 머리를 써서 쉽게 물 리쳤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흡족하게 느껴지는 모양 이었다. 흑풍사자는 상처 자리가몹시 쑤셨으나 자랑 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바보 같은 년! 그것은 곧 신립을 죽이라는 뜻이여! 아울러 조선군의 씨를 말리자는 거구! 지 지 않아도 될 전쟁에서 지게 되고, 결국엔 도성 한 양도 함락된단 말여!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며얼마나 많은 집들이 불탈 것인지, 넌 그런 것은 생각도 해 보지 않았단 말여?”

“저는…… 저는…………….”

“그리고 그것은 천기를 어기는 짓이여! 천기를 어 기게 한 인간이 어떤 신벌을 받는지 알어? 그것도 사사로운 일도 아니고 일국의 수많은 생명이 걸린 일을 어그러지게 한다면 그 벌은 수십만 년, 수억 년을 받아도 모자랄 것이여!”

“그러나 저는…. 아무 것도……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오로지 신 장군…… 그분만…… 그분 …….”

흑호는 더 이상 화가 치밀지도 않았다. 이 여인의 영에게는 이성(理性)의 능력이 없는 것 같았다. 오 랜 시간 동안 연모의 마음만 곱씹고곱씹어서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 다.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흑호는 오히려 이 여인 이 가련해졌다. 도대체 인간사에서 연모의 정이 얼 마나 깊었으면 스스로의 이성마저도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중한 벌을 준다고 한들, 이 여인에게는 대수로운 일이 아니리라. 오로지 신립과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아…… 이 바보 같은 여인네야………….”

흑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법도대로라면 이 크나큰 죄를 저지른 여인의 영을 당장 요절 내거나 저승사자에게 일러 사계로 송환하 여야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이 여인이 너무도 가 련했다. 이미 이 여인은 벌을 충분히 받을 만큼받은 것이 아닐까? 흑호는 저승사자도 아니고 심판을 내 리는 판관도아니었으니 당연히 그들에게 넘겨야 마 땅할 것이지만, 이번만은 그냥넘어갈 수가 없었다. 

“너를 그냥 놓아줄 수는 없어. 소행을 보아서는 당 장 잡아 먹어야되겠지만………… 좀더 두고 볼 것이여. 일단 내 꼬리에 들어가 찍 소리말구 있어. 사자들한 테는 내가 잡아 먹었다고 할 테니깐.”

“신 장군을………. 신 장군을 뵐 수 있을까요?”

“아, 그 얼빠진 소리 좀 작작해! 일단 나한테 맡기 구 들어가 있으라구! 안 그러면 정말 잡아 먹고 말 거여!”

영통한 호랑이들은 굴귀, 창귀와 같은 작은 귀신들 을 거느릴 수도있었으며, 영을 제압하여 가두어 둘 수도 있었다. 원래 호랑이는 사람을 해치면 그 영을 굴각이나 창귀로 만드는 것이 보통이지만, 흑호는도 를 닦느라 아직 한 번도 사람의 목숨을 해친 일이 없었다.

흑호는 이 여인의 영을 꼬리에 가두기로 했다. 귀신 을 가두고 다닌다는 것에 약간의 흥미가 일기도 하 고, 또한 이 가여운 여인에게 뭔가해주고 싶기 때문 이었다. 물론 흑풍사자나 판관들이 이 일을 알게 되 면 불벼락이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흑호는 신립이 죽은 후에라도 그와 이 여인을 꼭 대면시켜 주고, 그런 연후에 벌을 내리든 말든 해야한다고 생각했 다.

물론 신립의 이번 패전만은 어떻게든 막아서 천기를 지켜야 했다.그러나 이 여인의 영만은 별개의 것으 로 해 두고 싶었다. 그러면서 흑호는 문득 자기가 자기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사사로운마 음과는 관련이 없는, 아니 오히려 인간을 싫어하는 자신이 왜 이런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풍생수란 뭐여?”

“저도 모릅니다. 다만 불사(不死)의………… 불사의 마수라고만…….”

“불사의 마수?”

갑자기 흑호는 불안해졌다. 불사의 마수라니? 천지 간의 어떤 것도완전히 불멸인 것은 없다. 그러나 불사’라는 말을 붙였다면…………. 비록 윤걸과 흑풍사 자가 불의의 기습을 성공시켰다고는 하지만,풍생수 가 너무 쉽게 무너진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의심이 들자, 흑호는 윤걸과 흑풍사자의 기운이 느 껴지는지 반사적으로 정신을 집중시켜 보았다. 놀랍 게도 윤걸과 흑풍사자의 기운은아주 쇠잔해서 거의 느껴질 듯 말 듯했다.

‘위험하다!’

그리고 태을사자의 기운도 지척에서 느껴졌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꼬여 간다고 생각한 흑호는 여인의 영을 꼬리에 봉인하고는 급히 신형을 이동시켜 위로 떠 올랐다.

영이 빠져나가자 강효식은 정신을 잃고 땅바닥에 쿵하고 쓰러졌고, 놀란 기마 부대의 병사들이 강효식 의 주위로 와르르 몰려들었다.

태을사자는 사계에서 이판관에게 청원한 것이 거절 당하자 한시 바삐 증거를 수집하고자 급히 흑풍사자 가 있는 곳으로 몸을 전이하여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에는 흑풍과 윤걸 외에 다른 존재가 있었다.그냥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 존재는 흑풍과 윤걸을 거의 반죽음 상태로 만들어 놓고 있 었다. 전이를 마친 태을사자는 이 믿기지 않는 광경 을 보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서고 말았다.

태을사자 앞의 허공에서 푸른 빛이 전신에 감도는 커다란 괴수 한마리가 바람을 타고 유유히 나부끼듯 떠 있었는데, 그 괴수의 앞발에는 윤걸의 몸이 축 늘어진 채 들려 있었고 꼬리에는 흑풍사자가 목이감 긴 채 역시 송장처럼 늘어져 있었다. 둘 다 기운이 아주 쇠약하게느껴지는 것이, 커다란 상처를 입어 금방이라도 영기가 흩어져 버릴것 같아 보였다. “네 이놈! 감히 마수 놈이……………!”

태을사자는 눈에서 불똥이 튈 만큼 분노했고, 한편 으로는 이 기막힌 장면 앞에 어이가 없었다. 애당 초부터 마계의 괴수 소행임을 눈치채고는 있었지만, 막상 눈으로 확인하고 보니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지 얼떨떨하기만 했다.

물론 마계의 괴수들이 가끔 생계에 출몰하는 일은 예전부터 있어왔다. 홍두오공이 그런 예였다. 하지 만 마계의 괴수가 생계의 일에 직접 관여하여 음모 를 꾸민다거나, 생계에서 저승사자나 저승의 근위무 사를 선제 공격하여 거의 소멸에 이르게 한 일은 전 무후무한 일이었다. 마수도 영적인 존재인 만큼 영 혼의 존재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바가 있어, 비록 마 수와 신장이 겨룰지라도 서로가 서로의 영을 다치지 않도록 다만 포박하여 가두거나 힘을 빼앗는 등의 조치밖에는 취하지 않는 게 상례였다. 그래서 사계에 서도 수천 년 동안 잡아 둔 마수들을소멸시키지 않 고 저승의 십구 층 뇌옥 깊숙한 곳에 가두어 두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렇듯 저승의 존재들을 거리 낌 없이 해치는 광경은눈으로 보았기에 망정이지 보지 않았으면 믿기 힘든 일이었다.

그때 놀랍게도 괴수가 전심법을 사용하여 의사를 전달해 왔다. 이것만 보더라도 보통의 괴수가 아니라 높은 지능을 지닌 괴수임을 알수 있었다.

“네가 일전에 감히 나를 추적했던 놈이로구나. 흐흐…….”

인간의 형상조차 하고 있지 않은 괴수에게서 음산한 어조의 말이전달되어 오자, 태을사자는 몸을 흠칫 떨었다.

괴수의 몸뚱아리는 호랑이와 흡사하였으나, 어울리 지 않게 큰 눈은파충류의 그것처럼 생겼고, 목이 상 당히 긴 것이 생계의 짐승과는 달랐다. 전체적으로 는 푸른 색을 띠고 있었으며 등에는 역시 푸른 색의 표범 얼룩무늬 같은 반점이 있었다. 그리고 네 발 부근에는 구름 같은기운이 엉켜 있었고, 몸뚱아리 주변에서도 보이지 않는 기류 같은 것이 소용돌이치 고 있었다. 태을사자는 전에 얻었던 그 정체불명의 푸른 털이 바로 이 놈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언뜻 허공에 버려져 있는 윤걸의 백아검이 눈에 들 어왔다. 백아검도 일종의 법기이니만큼 무게가 없었 고, 그래서 허공에 버려지면 그공간에 그대로 떠 있 게 되는 것이다. 태을사자는 이를 갈면서 백아검을 흡물공으로 빨아들여 손에 쥐었다. 이 괴물과 일대 일로 대적하기위해서는 도움이 될 만한 것이면 뭐든 지 거두어 들일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것을 보면서도 괴수는 코웃음을 칠 뿐 저지하려하지 않았다.

“네놈은 무엇이냐?”

“나는 풍생수라고 한다. 일개 저승사자 주제에 나한 테 하대를 하고반말을 쓰다니, 소멸하고 싶어 환장 했나 보군.”

“어서 썩 윤무사와 흑풍사자를 놓아 주렸다! 그렇 지 않으면 내 용서치 않겠다.”

“용서? 우하하하…………….”

괴수는 커다란 소리로 웃어젖혔다. 웃는 소리는 마 치사람과 같았는데, 괴수가 웃자 주변에서 소용돌 이 바람이 일었다.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은 너다. 한낱 사계의 저승사자가 불사의 몸인 나에게 대적을 하겠다구? 하하하・・・・・・.”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알 일!”

태을사자는 소매를 펼쳐 묵학선을 재빨리 날리는 동 시에, 백아검을양손으로 쥐고 풍생수 쪽으로 날아 들었다. 태을사자로서는 일종의도박인 셈이었다. 풍 생수는 자신이 윤 무사와 흑풍사자의 목숨을 쥐고 있는 이상 태을사자가 감히 덤비지 못할 것이라 생 각하고 있을 터이고, 또 둘을 한꺼번에 쥐고 있으니 만큼 행동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노린 것이 다. 태을사자의 생각이 적중하였는지 묵학선은 학의 모습으로 변하지 않고 뾰족한 화살 같은 모습으로 변하여 맴을 돌면서 풍생수에게로 날아 들더니 그대 로 풍생수의 허리께를 꿰뚫었다.

“이놈!”

이어서 태을사자는 백아검을 예리하게 휘둘러 세 방 위를 차단하면서 흰 빛을 뿌렸다. 태을사자는 전에 윤걸이 이야기했던 대로 만검의달인이었으나 지금은 그럴 계제가 아니어서 자신이 펼 수 있는 최고의 쾌 검술을 펼친 것이다. 풍생수는 주춤하며 뒤로 물러 서려 했으나, 예리한 백아검이 풍생수의 앞다리 하나 를 베고 지나갔다. 그러자 풍생수는 목 주변의 갈기 를 곤두세워서 바늘처럼 태을사자에게 내쏘았으나, 태을사자는 풍생수의 몸을 뚫고 돌아온 묵학선을 회 수하자마자그것을 둥근 원 모양으로 벌려 방패처럼 만들어 풍생수의 갈기털을모두 튕겨내고 뒤로 물러 섰다.

“조금 낫기는 하군. 하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 다.”

급습이 성공했다고 여기고 있는 터에 풍생수의 여유 있는 목소리가 전달되어 오자 태을사자는 내심 긴장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말과동시에 소용돌이가 한 번 일어나자, 풍생수의 몸에 났던 구멍이 스르르 메 꾸어지고 잘라졌던 발이 제자리로 가서 달라붙었다. 

“저…… 저럴 수가…….”

“내 이름이 달리 풍생수인 줄 아느냐? 보았다시피 너에게는 승산이 없다. 안 그런가?”

태을사자는 맥이 풀렸다. 저 괴수의 이름이 풍생수 인 것은 몸이 바람으로 이루어졌다는 의미일까? 바 람을 칼로 벨 수 없는 것처럼, 그렇다면 풍생수와 대적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단 말인가? 저 놈의 몸이 바람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흑호가 일전에 놈의 털에 서 바람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했던 것일까? 태을사 자는 자신도 모르게 백아검을 쥔 손에서 힘이 풀려 나갔다.

그때 풍생수가 앞발로 쥐고 있던 윤걸을 태을사자 쪽으로 집어 던졌다. 태을사자가 놀라서 윤걸의 몸 을 받아들려고 하는데, 풍생수는또다시 흑풍사자의 몸을 집어 던지고는 맹렬하게 태을사자 쪽으로 달려 들었다. 

‘낭패다!’

태을사자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미 힘 이 풀린데다가,윤걸의 몸을 받느라 당황하여 자세를 완전히 흐트러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흑풍사 자의 몸이 풍생수 앞을 가리고 있어서 반격할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태을사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지 눈을 질끈 감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갑자기 캥 하는 소리와 함께 태을사 자에게 달려들던 풍생수의 몸이 옆으로 주루룩 밀렸 다. 태을사자는 눈을 뜨고 옆을보았다. 저 아래쪽에 서 돌멩이들이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돌멩 이들은 아무렇게나 던져진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교묘하게 서로부딪치며 어지럽게 방향을 바꾸면서 풍생수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풍생수는 바람으 로 만들어진 생물이기는 하나 이상하게도 그 돌멩이 들에게는 타격을 받는 것 같았다. 재빨리 신형을 나 누어 소용돌이 모습으로 변한 뒤 몇 개의 돌멩이들 을 피하기는 했지만, 풍생수는돌멩이의 어지러운 타 격을 받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선 뒤에 다시 자세를 가다듬는 것 같았다.

태을사자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백아검에 기를 불어 넣어 풍생수에게로 던졌다. 막 자세를 가다듬 던 풍생수는 갑자기 날아든 백아검을 피하지 못하고 미간에 백아검을 맞았다. 순간, 백아검은 딱 하는소 리와 함께 튕겨나갔고, 풍생수는 고통스럽다는 듯 크게 울부짖으며앞발로 이마를 감쌌다.

그런데 백아검에 적중되었던 풍생수의 이마에서 놀랍게도 무엇인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가만히 보 니, 그것들은 모두가 인간의 영들이었다.

“크아아! 두…… 두고 보자!”

풍생수는 이마를 감싸쥐어 인간의 영들을 놓치지 않 으려 발버둥을치다가, 이내 모습을 전환하여 십방전 위(十方傳位)의 술수를 써서 바람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 뒤를 향해 돌멩이들이 날아갔지만 풍생 수를 맞추지는 못했다. 태을사자는 윤걸과 흑풍사자 의 몸을 들고있으면서도 풍생수를 추적하려다가, 문 득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동작을 뚝 멈추었 다.

‘이러다가 날이 밝는 것은 아닐까?’

애초에 이곳에 도착할 때부터, 날이 밝을 시간이 얼 마 남지 않았었다. 그런데 풍생수와 대적하느라 많 은 시간을 허비했다. 만약 닭이 울고 새벽 빛이 자 신의 몸에 쏘여진다면…… …….

태을사자는 급히 하늘을 보았다. 벌써 새벽빛이 밝 아오고 있었고,금방이라도 아침해가 얼굴을 내밀 것 같았다.사계의 존재들은 단 한 줄기라도 태양빛에 쏘이는 것이 풍생수 백마리의 공격을 받는 것보다 더 위험했다. 사계의 존재는 음의 기운이 결집된 것 이고, 태양빛은 양의 기운 중 으뜸의 것이기 때문이 었다. 더구나 사계로 몸을 전이시키에도 이미 늦어 버렸다.

‘낭패다!’

순간 아래쪽에서 또다시 돌멩이 한 개가 휙 하고 날 아들었다. 적의를 가진 것 같지는 않고 무슨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사계로 몸을전이시킬 시간은 없 었지만 돌멩이가 날아온 지점까지 갈 시간은 있을것 같았다. 기왕 생계에서 나가지 못하게 된 바에는 어 찌되었든 햇빛을 받는 것만은 피해야 했다. 태을사자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 힘을 다하여 돌멩이 가 솟아올랐던쪽으로 신형을 이동했고, 그 바로 뒤 를 쫓아 어김 없는 천지간의 순리에 따라 아침 태양 이 떠 오르고 있었다.

태양빛이 최초의 광명을 태을사자의 등덜미에 뿌리 는 순간, 태을사자는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 아래쪽 숲으로 곧바로 추락하며 그대로 정신을 잃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