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1권 – 3화
태을사자(太乙使者)때는 선조 25년. 기원력(紀元曆) 으로는 1592년이다.
조선에서는 겉으로는 평화롭되 안으로는 연이은 사 화(禍)로 인해 나라가 멍들고 있을 때였다. 이러할 즈음 일본에서는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랜 기간의 싸움에서 얻은제 후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켜 일본 국내의 통일과 안전을도모하고 신흥세력을 억제하고자 대륙 침략을 감행하였다. 토요토미는 ‘정명가도’의 구실 을 앞세워, 마침내 4월 13일 부산포를 점령한 후승 승장구 북진을 감행하였다.
봄도 이미 중반으로 접어들어 따스한 햇살이 온 나 라를 훈훈히 덥히고 있었다. 아련히 피어오르는 아 지랑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들판천지에 초록 풀들이 산들거리고, 철이른 꽃들은 봉우리를 내리는 한편으 로 제 시절을 만난 들꽃들이 함초롬히 얼굴을 들이 밀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의 은총은 인간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듯했다. 인간들은 살육 으로 날을 지새우고 피비린내 나는 무질서와혼돈의 자욱을 사방 천지에 흩뿌리고 있었다.고니시 유키 나가(소서행장 小西行長)를 선봉으로 하는 제1군은 부산을 함락시키고 뒤따라 들어온 카토 키요마사(가 등청정 加藤淸正),쿠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과 합세, 다시 3군으로 나뉘어 제1군의고니시는 부산, 밀양, 대구, 상주, 문경을 거쳐 충주에 이르고, 제2 군의 카토는 울산, 영천을 거쳐 충주에서 제1군과 합세하여 서울로 진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쿠로다의 제3군은 김해를 지나 추풍령을 넘어 북상 하고 있었다.왜군이 지날 때마다 시산혈해의 눈 돌 리기 어려운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사방에 깔린 시 체는 누구 하나 수습해 주는 사람이 없이 까마귀 밥 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당시 명장으로 일컬어지던 신 립(申砬)을 도순변사로,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삼 아 일본군의 진로를 막게 하였다. 그러나 4월 24일, 이일은 상주에서 고니시가 거느린 대군과 싸워서대 패하고 만다. 이에 신립은 남은 휘하 장병들을 거느 리고 서울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충주 를 지키기 위해 최후의 힘을 모으고 있었다.
4월 24일 밤. 경상도 상주.
까아악. 까악.
갈가마귀의 울부짖음 소리가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른 다. 전화가 휩쓸고 간 벌판에는 시체들이 어지럽게 뒹굴고 있었다. 숯덩이로 화하기 전에 마지막 불똥 을 툭툭 튀기고 있는 허물어진 집채들이 풍경을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이제 이곳을 배회하는 사람 들은 하나도없었고, 다만 매캐한 연기 냄새와 피비 린내가 진동할 뿐이었다.그 벌판 위 허공에 두 개의 그림자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림자들은 무언가를 찾는 양, 잠시 멈추었다가 날 기를 거듭했다.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 아니, 단 한 번, 죽음 앞에 이르렀을 때 보게 된다 는 그림자.검은 갓에 검은 도포, 그리고 역시 검은 색의 길게 늘어진 두루마기자락을 휘날리면서 한 손 에 든 검은 색 부채를 연신 투덕거리고 있는창백한 얼굴의 두 남자.
바로 죽은 사람의 영을 저승으로 인도해 가는 저승 사자들이었다.
“태을사자………, 벌써 여러 번 찾아보지 않았소?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자칫 대왕의 노여움을 살까 저어 되오이다. 조금 있으면 새벽 닭이 운단 말이오.”
한 저승사자가 풀이 죽은 듯한, 다분히 체념 어린 소리로 태을사자라고 불린 또 한 명의 저승사자에게 말했다.
“낸들 급한 걸 왜 모르겠소? 하지만 이번 일은 아무래도 이상하외다. 도저히 이럴 수는 없는 것인데…………….”
“나도 태을사자의 심정은 알겠소. 그러나 도대체 없 어진 혼백을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이오? 혼백을 인 도하여 저승으로 안내하는 것이 우리의 소관이거늘, 도리어 우리가 혼백의 행방을 찾지 못하게 되었으니 나 또한 암담하지 않은 바 아니나, 이렇게 무작정 헤매어 본 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오?”
그의 어조에는 불평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러나 그 들의 대화는 보통사람들처럼 목울대를 통해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영력으로 전해지는 묘한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일반 사람들에게는 들리지가 않았다.
지금 불평스런 투로 말하는 저승사자는 태을사자와 생김새가 거의 비슷했지만, 체구가 좀더 작고 날렵해보였다. 그리고 하관이 다소 길게 빠진 것이 상대적 으로 더 음험한 인상을 주었다. 그에 반해 태을사자 는 체구가 장대하며, 얼굴은 역시 밀랍같이 희다 못 해 파르스름한빛을 띠고 있었다. 눈썹은 먹처럼 검 었으며 입술은 연지를 칠한 것처럼 붉었지만 퍽이나 중후하고 신중한 인상을 주었다.
“내 흑풍사자(黑風使者)의 말을 모르는 것이 아니 오. 그러나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는단 말이오. 아 무리 난리가 벌어졌고 사람들이 빗방울 떨어지듯이 목숨을 잃는 전쟁터라고 해도 사십 명에 이르는 혼 백과 육신이 간 곳 없이 사라졌으니, 이를 대체 어 떻게 설명해야 한단말이오?”
“그건 나도 알지 못하오……. 그러나………….”
흑풍사자는 말하기가 난처한 듯 입술을 우물거리다 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없는 것을 어찌 하라는 말이오? 세상이 난 세이고 되니 명부의 일도 흐트러지는 겐가 보지. 그 러지 않고서야 망인첩(忘人帖)에기록되어 있는 인간 들이 도대체 어디로 갔다는 말이오?”
“그러니 이상하다는 말이오. 아무리 수백, 수천의 죽는다 하더라도 다들 저승의 질서에 생명이 따르게 되어 있는 법, 그 어떤 인간도 저승의 눈을 피해 갈 수는 없소이다. 그런데 하나 둘도 아니고사 십 명에 이르는 인간들이 간 곳이 없다니……. 이건 도대체가………….”
“하지만 어찌하겠소. 사실이 그러한 걸…….”
태을사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승의 망인첩에 나와 있기로는, 오늘 밤 안으로 거 두어 가야 하는영혼이 삼천 칠백 일흔 둘이었다. 그 들은 거의가 왜병의 조총과 도검에 참살당한 조선 군관들과 백성들의 영이었다. 왜인들도 약간의 사망 자를 내었지만, 왜인들은 이 저승사자들이 관할하지 않아도 되었다.
사망자가 무더기로 나오는 전쟁중인 만큼 지금 이 자리에서 수습하여 올려보낼 영혼의 숫자는 그들로 서도 감당하기 벅찰 만큼 많기는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태을사자의 소관으로 된 영혼이스 물 둘, 흑풍사자의 소관으로 되어 있던 영혼이 열여덟, 이렇게 도합 마흔 명의 영혼이 어디론가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흑풍사자는 조바심이 나는지 안절부절 못했다. 머지 않아 닭이 울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껏 닭이 울고 동이 트는 시간까지 저승사자들이 인간 세상에남아 있던 일은 없었다. 날이 밝은 뒤 죽은 사람들은 그 혼백이 구천의 중간에 떠돌게 되 고 그러면 저승사자들은 그 영혼을 데리고 오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오히려 쉬웠다. 반면에 날이 어두 워진 후에 죽은사람들은 저승사자가 기다리고 있다 가, 육신을 빠져나온 뒤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얼 떨떨해 있는 영들을 데리고 염라대왕에게 가면 된 다.
하지만 이토록 많은 영혼들을 빠트리고 가는 일은 없었다.
태을사자는 위기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인간 들이 사는 사바세계가 전쟁과 싸움이 끊이지 않는 반지옥의 상태가 된다고 해도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법도가 있다. 그 저승의 법도가 깨어져 나가는 것 같아서 불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그러나 흑풍사자는 그런 것보다는 당장 날이 밝은 뒤의 일 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태을사자, 영혼을 하나 둘도 아니고 수십 명씩이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책임이 얼마나 큰지는 나도 알고 있소이다. 아마도 하계(下界)로 가면 수장(守 將)이나 나아가서는 대왕의 호된 꾸지람이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대로 있다가 양기(陽氣)가 충만한 태양 빛을 받는다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외다!”
“나도 그것은 알고 있소……. 그렇지만…….”
태을사자는 무거운 안색으로 흑풍사자를 바라보앗 다.
“우리가 이대로 그냥 돌아가면 사십 명의 영혼은 어 찌 될 것이오? 무릇 인간의 영혼은 중요한 존재외다. 비록 몇몇은 극락에 머물 수도있고 몇몇은 지옥불에 떨어지기도 하겠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윤회를거듭 해야 하는 끝 없는 시험대에 올려진 존재들이오. 힘 은 없지만 가능성이 있는 존재들이란 말이오.”
“그래서 어쨌단 말이오? 아무리 그래 봐야 그들은 미천한 족속들이오! 얼마 살지도 못하고 죽고 또 다시 태어나서 내내 고생만 하다가다시 죽고······. 도대체 그런 것들을 데려오는 것이 우리의 임무인 줄은 알겠으나, 왜 그런 하찮은 것들 몇몇 때문에 우리들이 위험을 무릅써야 하느냔 말이오? 대왕의 꾸지람이 무섭다고 한들 태양 빛을 받는것만 하겠 소?”
“지금 이렇게 그들의 자취를 찾아보자는 것은 꼭 대 왕의 꾸지람이무서워서가 아니외다. 그들을 안전하 게 데리고 저승에까지 인도하는것은 우리의 임무고, 나아가서는 비록 미천하나마 그들도 살아 있어야 할 값어치가 있기 때문이오.”
“살아 있는 가치? 살아 있다는 게 뭐 그리 중요하 오?”
“중요하다 마다요…………. 흑풍사자는 자신이 살아 있을 때의 기억이 없소?”
“하하하…..”
흑풍사자는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흑풍사자의 웃음 소리는 인간처럼 음파로 되어 울리 지는 않았지만, 돌연한 일진광풍이 되어 나뭇가지며 풀잎들을 휘말아 올렸다. 죽어서눈을 부릅뜨고 쓰러 진 시체의 얼굴 위로 바람에 날린 이파리 몇 개가마 치 얼굴을 가리듯이 덮옆다.
“나는 지금이 더 좋소이다……. 우리는 이 자체로 완성된 존재란말이오. 그 이상도 이하도 없소. 그러 4…….”
태을사자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그만듭시다. 지 금은 시간이 없소. 그러나 나는 좀더 찾아 봐야겠소 이다.”
“아직도 단념하지 않았소?”
“난 지금 묘한 생각이 드는구려… 그 생각이 맞다면 ・・・”
삽시간에 인간들의 영혼이 사라진 연고를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소.”
“음?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오?”
태을사자는 손에 쥐고 있던 부채를 들어서 땅바닥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저길 보시오.”
“음?”
태을사자가 가리킨 곳에는 거의 굳어 버린 검붉은 피뭉치가 도랑처럼 고여 있었다. 그리고 가장자리 흙 바닥에는 보일락 말락하게 몇가닥의 가느다란 흠 이 패여 있었다. 마치 써레질이나 쟁기질을 한 것처럼 ・・・
“저게 뭐요?”
태을사자는 조용히 그 앞으로 날아가서는, 선 자세 그대로 뻣뻣이몸을 엎드린 채 허공으로 떠 올랐다. 좀더 자세히 그 자국을 관찰하려는 것이다.
“발톱 자국이오.”
“발톱 자국?”
“그렇소. 폭이 넓구려……. 아주 조심스럽게 자국을 남기지 않으려고 했겠지만, 바닥에 쌓인 흙먼지 때 문에 흠이 난 것 같소. 여태 이근방을 이 잡듯이 뒤 졌지만 이것 하나밖에 발견하지 못했소. 그러니…..”
“그러니 뭐란 말이오? 그러면 금수의 소행이란 말이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소. 인간사에서 가장 무섭 다고 하는 전쟁터요. 어떤 인간이 감히 전쟁이 채 끝나지도 않은 싸움터로 들어와서 이런 일을 꾸몄겠 소? 이건 금수의 소행 같소이다.”
“하지만…… 그 발톱자국 하나로…………?”
“금수도 그냥 금수가 아니오. 놈은 사십 명이나 되 는 인간의 육신을 가져갔고…. 게다가 혼백마저도 가져갔소이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 고 기껏해야 이 작은 발톱 자국 하나를 남겼을뿐이 오・・・・・・・ 놈은 머리가 좋소.”
“머리? 머리라고 했소? 금수가 무슨 머리가 있고 지능이 있단 말이오?”
“있을 수 있소이다………….. 아주 오래 묵고…… 인간의 영향을 많이받은 영물들이라면……. 하지만 이 건…… 이건…”
태을사자는 다시 한 번 발톱자국을 유심히 들여다보 더니, 빙글 허공을 날아 원래의 선 자세로 돌아왔 다.
“대호의 발톱 자국이오.”
“대호? 그렇다면 이번 일이 호랑이의 소행이란 말 이오?”
“아직 확실한 것은 없소이다. 다만 이 발톱 자국 하 나만 보면 그렇다는 것이지요. 남은 게 이 발톱 자 국 하나밖에 없는데 어쩌겠소? 그래서….”
“호랑이가 인육을 먹는 일이 종종 있고 산신(山神) 들의 수하로 용맹을 떨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들 었소. 하지만 호랑이가 사람의 영혼을 훔친다는 말 은 금시초문이오.”
흑풍사자에게는 아무래도 태을사자의 발상이 설득력 을 갖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태을사자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에, 미간을 조금 더 찌푸릴 뿐이었다.
“나도 그런 일을 보거나 들은 적은 없소. 호랑이에 게 당한 인간들의 영이 혹 창귀(脹鬼)나 호귀(虎鬼) 가 되어 호랑이의 주변을 떠나지않는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지어낸 말이지 실제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호랑이는 거의 없소. 그건 실상, 졸지에 목숨을 잃은 인간의 영혼이 충격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호랑이 근처을 떠도는 것이
지, 호랑이 자체가 그렇게 만드는 것은 아니란 말입 니다. 헌데…….”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사람의 영혼이 그 호랑이의 굴 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굴각, 이올, 죽혼 등의 이름을 가진 창귀 또는 호귀로 변하여다른 사람을 호랑이에 게 제물로 바치게 만든 후에야 호랑이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고 당시의 사람들은 이야기 하고 있다. 실제 로 조선조 당시의 호랑이에 의한 백성들의 피해는 상당한 숫자에 이르러서,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조 태종 2년 한 해에 강원, 경상 지역에서만 이백여명 에 이르는 사람들이 호랑이에게 물려갔다고 전하고 있다.”간혹 바보 같은 인간들이 저승의 명령을 거역 하는 일이 있는 것은알고 있지만… 아무리 영물이 라 한들 호랑이와 같은 한낱 금수가천리(天理)를 어 기고 사십 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영을 가져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상상하기가 어렵소이다.”
“나도 믿어지지가 않소. 그렇지만…………….”
태을사자는 또다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쳐들고는주변의 땅바닥을 가리켜 보였다.
“보시오. 이 주변은 먼지가 날아와 쌓여 있소. 이러 한 곳에 몸뚱이를 지니고 걸어왔다면 발자국이 남아 있어야 하오. 그런데 놈은 발톱자국을 남겼을 뿐, 발자국은 하나도 없소이다.”
흑풍사자는 태을사자의 말에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흑풍사자는 조금 떨리긴 했지만 태연을 가장 한 목소리로 지체 없이 대답했다.
“그건 바람이 불어서 발자국을 덮어 버렸기 때문이 아니겠소? 바람에 날린 먼지가 이곳에 쌓였을 수 E…….”
“그러면 발톱 자국은 어찌 남아 있소?”
“그건……”
뒷말을 잇지 못하는 흑풍사자를 쓱 쳐다본 뒤에, 태 을사자는 입술을 깨물며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틀림없소. 이놈은 마물(魔物)이오. 너무 오래 살았 거나, 아니면 무슨 연유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 겠으나 아무튼 신통력을 얻은 놈임에 틀림 없소.”
“마… 마물? 인간 세상에 말이오?”
“흑풍사자는 잊었소? 사바의 시간으로 백이십 년전 일어났던 홍두오공(紅頭蜈蚣)의 일을?”
“이번 일도 그와 비슷한 경우라는 것이오?”
흑풍사자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정확하게는 백이십오 년 전, 그러니까 단기 삼천팔 백년에 나타난홍두오공.
붉은 머리를 한 이 독지네는 일천 명의 사람을 죽이 고 일천 세계를도탄에 빠트리라는 암흑 대마황의 명 령을 받고 조선 땅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홍두오공 은 백팔십여 명을 학살하고 여덟 개의 변방 촌락을 폐허로 만드는 믿지 못할 힘과 신통력을 보였으나, 종국에는 조선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장사 에게 격살되었다.
이처럼 인간계에 가끔 가다가 마계의 괴수들이 나타 나는 일들이있었지만, 그 대부분은 계(界) 간의 결 계를 방황하다가 흘러들어오는것들로서, 인간들에게 잠시의 공포감은 주었지만 쉽게 물리칠 수 있는 것 들이었다.
그러나 이 홍두오공은 대단한 놈이었다. 오공은 몇몇 지방의 산신들마저 제압해 버리는 위세를 보였다.
오공이 격살된 후 인간 세상의 문제는 해결이 다 된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문제는 죽음 뒤에도 남아 있 었다. 오공은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는 혼백을 지니 고 있었던 것이다. 저승의 신장(神將)과 수장(守將) 들이 여럿 달려들었으나, 오공은 상상을 초월하는 둔갑술과 독연무로그들을 궁지에 몰아넣곤 했다. 한바탕 난리를 치른 끝에 간신히 오공의 영은 포박 되어 지금도 저승의 규환지옥 구석에 토막으로 나뉘 어져 갇혀 있다. 그 당시 오공에게 당한 백팔십여 인간의 영들은 구슬처럼 둥글게 뭉쳐서 오공의 머릿 속에 숨겨져 있었는데, 이 일을 들은 지장보살마저 도 한숨을 내쉬었다고 전해진다.
“그…… 그렇다면 마계의 짓? 어떻게……?”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오. 그러나 한낱 금수가 이런 힘을 지니고있다는 것도 못 믿겠거니와, 더군다나 오랜 덕을 쌓은 영통한 영물이 이런 끔찍한 짓을 저 질렀다고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렵소이다. 그러니 결국은…….”
“흠…….”
흑풍사자의 안 그래도 파리한 얼굴이 더욱 새하얗게 질려갔다.
마계… …….
일반적으로 사바 세계의 인간들은 저승이나 지옥을 인간계와는 다른 또 하나의 세계로 여기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태을과 흑풍, 두 사자가 속해 있는 세계는 죽음의 세계인 사계(死界)였다. 사계에는 윤회부가 있고 또 한 윤회부 내에는 여러 저승과 지옥이 있는데, 둘은 그 중 조선을 관할하는 지옥에 속해 있다. 하지만그 들의 위치는 아주 미미했다.
그들은 언젠가 전 세계를 묘사한 노래가락을 들은 적이 있었다. 사계에 나와 있는 지장보살이 윤회를 거치고 있는 인간들의 깨달음을돕기 위해 직접 지은 노래라고 전해지지만, 열풍처럼 널리 인구에 회자되 고 있는 이 노래를 누가 지었는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자는아무도 없었다.
– 우주는 8계라네.
8계이며 9계이고 또 무한계라네.
모든 것은 돌고 돌아 처음이 끝이 되고, 시작이 마 지막이 되는 법이라네.
– 가장 중심, 우주의 중앙에 신계(神界)가 있으니, 신계의 모든 것은 신들 이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 고 누구도 범접하지 못한다네.
세상의 흐름은 신들이 엮어내는 것, 신의 의도는 누 구도 모른다네.
– 어질고 둥근 구(球)처럼 신계를 감싸고 성계(聖 界)가 있으니,성계에는 거룩한 덕과 지고한 이상만 이 있다네.
성계의 어느 것도 실체가 없지만 성계의 모든 것은 또 다른 하나의 세계라네.
– 성계의 바깥을 둘러싸고 광계(光界)가 있다네.
빛과 기쁨과 복락만이 있다네.
모든 것이 빛이고 빛줄기가 되어 가득 차 있다네. 광계의 바깥에서 생계(界)는 땀을 흘린다네.
– 광계로 들어가 해탈하기를,낳고 죽고 피고 지며 그들은 기다린다네.
기다린다네.
– 생계의 바깥은 사계(死界)가 싸고 있네.
산 것은 모든 것이 죽어야 한다네.
그리고 다시 태어나게 된다네.
사계는 어둡고 어두우며 슬프고 슬프다네.
그리고 항상 눈물을 흘린다네.
-사계의 바깥에는 유계(幽界)가 있다네. 사계의 눈물이 유계에서는 감로(甘露)라네. 유계는 울부짖고 있다네.
처음도 끝도 없고, 여기도 저기도 없다네.
– 유계의 너머에는 환계(幻界)가 있다네.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정말도 없고 거짓도 없다네.
환계의 모든 것은 없는 것이고 있는 것이라네.
– 환계 그 너머에 마계(魔界)가 있다네.
마계는 분노한, 너무도 분노한 붉고 붉은 세상이라네.
모든 것이 타오르고 타오르고 또 타오른다네.
마계는 모든 것을 부수고,그리고 자신마저 부수어 불살라 버리네.
– 마계의 그 너머에는 신계(神界)가 있다네.
신계의 그 너머에는 성계가 있다네.
그리고 그 너머에는 광계가 있다네. 끝이 없다네.
– 세상은 끝이 없다네.그러나 마음으로 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없다네.
아무 것도 없다네.
태을사자는 잠시 동안 공상에 빠져 있다가, 습관적 으로 눈을 질끈감고 고개를 몇 번 흔들었다. 몸이 몹시 피곤했다. 자신의 영이 속해있는 사계를 너무 오래 떠나 있었기 때문이리라. 사바 세계의 사람들 은 영을 육체와 정반대인 불사불멸의 존재로 알지 만, 꼭 그런 것만은아니다. 영도 쇠약해지고 피곤해 지며 때로는 소멸되기도 하는 존재인것이다.
“정말 마계의….?”
흑풍사자의 목소리에 두려운 기색이 역력히 묻어났다.
태을사자는 새삼 신경을 곤두세우고는, 주의 깊게 다시 한 번 발톱자국이 나 있는 피웅덩이를 들여다 보았다.
그 순간 새벽닭의 울음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동 틀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태을사자! 첫 닭이 울었소!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소이다! 어서사계로 돌아갑시다!”
“아아…… 이런…, 지금 이곳을 비워두고 그냥 떠 나면 우리가 수습하지 못한 마흔 명의 영은 영원히 수습할 기회가 없어질지도 모르는데……. 흑풍사자, 이런 흔적이나마 발견했을 때 무슨 조치는 취해야 하지 않겠소?”
“이거 보시오, 태을사자! 조금만 있으면 동이 트고 날이 밝게 된단말이오! 광계의 빛인 태양의 빛을 받는 즉시 우리 사계의 존재들은소멸하고 만다는 것 을 모르고 하는 말씀이시오?”
“아아……”
태을사자는 흑풍사자의 말을 듣고,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때, 순간적으로 태을사자의 눈이 이상하게 빛났음을 흑풍사자는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태을사자의 눈빛은 대호의 발톱 자국이 나 있는 피 웅덩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한 그루의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 뒤를 향하고 있었다
그 나무에도 전쟁이 휩쓸고 간 상처가 여기저기 새 겨져 있었다. 부러진 화살대들이 몇 개나 꽂혀 있었 고, 창이나 칼에 패인 자국으로 껍질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나마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언뜻 보아도 인간 어른의 팔로 세 아름은 됨직 한 그 우람함 때문일 것이다.
그 뒤편에서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는 것을 태을사자 는 놓치지 않았다.
태을사자의 입술 끝이 살짝 말려올라가 미소와 같은 표정을 지었으나, 그것을 보지 못한 흑풍사자는 다 시금 태을사자를 재촉했다.
“어서 가십시다. 더 지체하다가는 큰 변이 생길지도 모르겠소. 머뭇거릴 여유가 없어요. 그러니 어서…….”
흑풍사자가 채 말을 잇기도 전에, 태을사자는 이미 체념했다는 듯이 뜻밖에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좋소. 가십시다.”
갑자기 변한 태을사자의 목소리를 듣고 흑풍사자가 눈썹을 치켜뜨는 순간, 태을사자에게서 벼락 같은 소리가 터져나왔다.
“가더라도 이놈은 잡고 가야지요!”
태을사자는 일갈과 동시에 신형을 날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검은색의 안개 뭉치로 변화하여 아름드리 나무 쪽으로 곧장 쏘아져 날아갔다.
흑풍사자가 멈칫하며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종잡 기도 전에, 검은 기운이 번쩍 하고 잔영을 남기면서 아름드리 나무를 꿰뚫고 그 반대쪽으로 쏘아져 나왔 다. 이어서 그 검은 기운은 삽시간에 다시 형상이 뭉쳐져서 태을사자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이놈! 수목의 정(精)을 방패막이로 한다고 네깟 놈의 은신술(隱身術)을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그제서야 흑풍사자도 눈치를 챘다.
태을사자의 호통이 막 끝나자마자 이파리로 우거진 나무 윗부분에서 무언가가 번득이며 허공으로 솟구 쳐 올랐다. 그것을 본 흑풍사자가 오른손 소매를 휘 저었다. 그와 동시에 흑풍이라는 이름에 걸맞게새까 만 구름이 빠른 속도로 날아 올라 그 번득이는 형체 의 위를 가로막았다.
위로 솟구치려던 물체는 뜻밖의 장애물에 부딪치자 잽싸게 방향을바꾸어 옆으로 날아갔다. 흑풍사자는 자신의 술수를 상대가 알아채고피한 것에 노하여 벼 락처럼 기합을 내질렀다.
“이위(位) 천라지망(天羅之網)!”
흑풍사자의 기합이 터져나오는 순간, 나무 위를 뒤 덮고 있던 검은구름은 뭉클 하고 뭉치더니 역시 검 은 색의 거미줄과 같은 미세한 망으로 형태를 변화 하여 다시 화살처럼 달아나는 형체의 뒤를 ᄍ아 날 아갔다.
태을사자도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태을사자 는 손에 쥔 검은 색의 부채를 앞으로 향하여 손바닥 에 탁 소리가 나게 튕겼고, 그러자 부챗살처럼 생긴 길쭉한 검은 막대기 하나가 튀어나갔다.
“묵학환출(墨鶴幻出)!”
태을사자의 기합과 함께,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튀 어나가던 검은부챗살이 화르륵 펼쳐져 긴 날개를 뻗 더니 곧 이어 긴 부리와,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긴 다리를 지닌 검은 학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묵학(墨 鶴)은 길다란 소리를 지르면서 그 형체를 향해 쏜살 같이 덮쳐들었다. 두 저승사자의 신통력을 지닌 법 기器)들이 곧바로 그 검은 형체를 둘러쌌고, 금 세라도 그것을 잡아챌 듯이 보였다.
순간, 괴형체는 문득 달아나기를 멈추고 방향을 바 꾸더니 제 자리에서 무서운 속도로 맴을 돌기 시작 했다. 그러자 거센 돌풍이 회오리치면서 마치 둥근 유리병 모양의 바람벽을 눈깜짝할 사이에 만들어냈 다. 두 저승사자의 법기는 바람벽을 향해 거칠게 쏘 아져 들어갔으나그 벽을 뚫지 못하고 뒤로 튕겨나갔 다. 그러고는 다시 본래의 구름과막대기의 모습으로 변하여 원래 있었던 소맷자락과 부채 속으로 재빠르 게 스며들었다.
“아니!”
“괘씸한 것!”
태을사자와 흑풍사자의 목소리에는 똑같이 놀라움과 분노가 담겨있었다. 상대의 응수에 허를 찔린 것이 다. 사계(死界)의 물건들은 이승의 것들과 달리 물질 적인 재료로 이루어지지 않고, 갖가지 영을 뭉쳐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사계에도 땅이나 수목, 금속이나 물과 같은 것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실상 아주 하급의 영, 그러니까 자연계의 정령이라 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자연계의 정령은 이승에서의 물이나 금속 등의 성질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서 사 계에 이르러서도 생계에서의 용도나 본질을 그대로 쓸수 있다.
그러나 사계에서는 다른 영을 부려서 물건으로 화하 게 하는 기술을 주로 쓰는데, 저승사자들은 그처럼 특별한 영으로 만들어진 법기를 하나씩 지니고 다녔 다. 이것들은 영을 포획하여 잡아들이는 쓰임새로 사용되곤 했는데, 쓰는 사람의 기술에 따라 여러 가 지로, 때에 따라서는 수십 가지의 형태와 크기, 기능 을 가진 물건으로 변화하여사용될 수 있는 특이하고 귀중한 물건들이었다.
그런데 이렇듯 신비한 힘을 지닌 두 법기의 합공을 저 회오리치는형체는 간단히 되튕겨 버렸다. 두 저 승사자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제껏 듣도 보도 못 한 일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사계와 유계 (幽界)의 접경에서 가끔 일어나는 유혼(幽魂)들과의 충돌이나 마계(魔界)에서 떨어져 나온 마물들과의 싸움이라면 혹 모를 일이지만, 여기는 어디까지나 인간들이 살아가는 생계(界)가 아닌가.
“마물이 틀림없소이다! 세상의 법도를 무너뜨리고 나타난 놈이니속히 요절을 내야 할 것이오!”
흑풍사자는 소리치면서 양 소매를 동시에 펼쳤다. 그러자 아까보다세 배는 넘어 보일 듯한 검은 구름 이 솟아나와 허공에서 뭉치더니 거대한 수레바퀴와 같은 형상으로 변했다.
태을사자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들고 있던 부채를 활짝 펴서 허공에 던지면서 소리쳤다.
“저놈이야말로 인간들의 영을 집어삼킨 놈이 틀림없 소. 교활하게도 저놈은 인간의 몸과 영을 삼킨 뒤에 저 나무의 수목의 정을 방패막이로 하여 숨어 있다 가 우리가 계명(鷄鳴: 닭 우는 소리)에 밀려 떠나 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오! 괘씸한 놈 같으니라 고. 저놈은 반드시잡아야 하오!”
흑풍사자는 태을사자의 놀라운 관찰력에 새삼 감탄 하면서, 다시 소매를 활짝 휘둘러 양손으로 무엇인 가를 받드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태을사자의 말대로 라면 지금 저놈이야말로 사십여 명의 영을 훔친 녀 석임에 틀림없을 것이고, 저놈을 보지 못했다면 모 르되 일단 꼬리를잡은 이상 반드시 잡아야만 했다. 그러나 동이 트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 황이었다.
태을사자는 손가락을 세워 빙빙돌리는 듯한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러자 태을사자의 부채가 미친 듯이 빙 글빙글 돌다가 하나의 검은 원이 되어 바람을 몰면 서 가로로 누워서 날아갔다.
“손에 정(情)을 둘 필요는 없소!”
“물론이오!”
흑풍사자가 이번에는 받든 모양의 자세를 바꾸어 두 손을 박수 치듯이 앞으로 내밀자 큰 수레바퀴 모양 의 기운이 세로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흑풍사자의 둥근 기운이 괴형체를 향해 거세게 굴러감과 동시 에, 태을사자의 부채가 만들어낸 둥근 원도 날카로 운 파공음을 내면서 날아들었다.
“굉(轟)!”
“섬(閃)!”
두 사자의 고함 소리와 함께 두 개의 검은 법기가 회오리의 바람벽으로 막 덮쳐들 찰나였다.
순간, 회오리도 휙 모양을 바꾸어 칼날과 같이 날카 로운 가느다란바람 줄기로 변하여 사방으로 뻗어 나 갔다.
“도망치는군!”
흑풍사자는 자신의 수레바퀴와 같은 기운이 바위산 과 충돌하려고하자 손바닥을 활짝 폈다. 검은 바퀴 는 다시 검은 구름으로 변한 뒤네 갈래로 갈라져서 바람 줄기를 쫓아갔다.
“화(化)!”
태을사자가 외치자, 그의 둥근 원은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급히 방향을 틀어 허공으로 떠올랐다.
태을사자의 눈빛이 번뜩하면서갈라져 나간 바람 줄 기의 수효를 세었다. 모두 여덟 갈래였다.
“산(散)!”
태을사자가 고함과 함께 양 손바닥으로 짝 하고 박 수를 치자, 둥근원에서 총알처럼 네 가닥의 부챗살 이 뻗어나와 흑풍사자의 기운이 쫓아가지 못하는 나 머지 네 개의 바람 줄기를 향해 일제히 쏘아 들어갔 다.
허공에서 콰쾅 하는 소리와 함께 여덟 곳에서 폭발 이 일고, 바람의뭉치가 터져나가는 듯한 회오리가 맴을 돌면서 주변의 풀이파리들을휘날렸다. 영적으 로는 엄청난 타격의 힘이었지만 물질로 이루어진 생 계, 즉 이승의 존재들에게는 그 힘들이 격돌하는 모 습이나 저승사자의 모습들까지는 보이지 않을 터였 다. 다만 여기저기서 요란한 광풍이 일어나는 것과, 음울하고 이상한 기운들이 마구 뻗치는 것 정도가느 껴질까?
잠시 후, 여덟 곳에서 일어났던 폭발의 소용돌이가 잦아들고 검은기운들이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변해 주인들에게로 돌아오자, 두 저승사자는 허공에 우뚝 선 채로 날면서 회오리의 형체가 있었던 곳을살폈 다.
“허! 이런! 도망쳐 버렸소!”
“보통놈이 아니오. 십화변신(十化變身)으로 열 개로 변하여 도망쳤는데 그 수법이 놀랍소. 우리 눈을 속 여 여덟 개로 보이게 하다니……. 우리가 본 여덟 개는 허상이었고, 나머지 두 개가 진짜인 것 같소이 다! 하지만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요!”
태을사자가 급히 몸을 움직이려는데 멀리서 또다시 닭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되오, 태을사자! 두 번째 닭 울음 소리요!”
“어허…………, 이…… 이런…….”
태을사자는 낭패라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두 번째 로 닭이 울었으니 곧 세 번째 울음 소리가 들릴 것 이다. 세 번째의 닭 울음 소리가들리기 전까지 사계 의 모든 존재들은 생계를 떠나 있어야 하는 것이세 상의 불문율이었다.
“저놈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내지도 못하고 헛되이 돌아가야 하다니! 이건…….”
“상심마시오, 태을사자. 적어도 저놈이 사계의 존재 가 아니라는 건확인했잖소. 저놈은 필시 마계의 존 재일 터인데, 그렇다면 어쩜 우리둘의 힘으로 대적 하기 힘들지도 모르는 일이오. 하물며 이렇게 날이 밝아오고 있소이다. 마계의 존재들은 양광(陽光)아 래서도 활동할 수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오. 일 단 돌아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지원을 받아 다시 오 면 되지 않겠소?”
태을사자는 습관적으로 부채를 툭툭 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입술 사이로 무거운 한숨이 새어나왔 다.
그때 태을사자의 눈에 기묘한 것이 잡혔다. 푸른 빛 깔을 띤, 아주가느다란 털 같은 것이었다.
“이건…….”
태을사자가 손바닥을 펴서 흡물공(吸物攻)을 발휘하 자, 털오라기가태을사자의 손으로 빨려 올라왔다. 그런 광경을 본체만체, 흑풍사자는 다급한 나머지 태을사자의 옷 소매를 당기는 동시에 영체를 전이(傳)시키면서 외쳤다.
“어서…………… 어서 갑시다!”
태을사자도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서히 자신의 영체를사계로 전이시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