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4권 – 25화
지금의 전투기도 마찬가지지만, 적과 싸울 때 선회 반경이 작다는 것은실로 엄청난 잇점이 된다. 그런 데 거북배나 다른 판옥선들이 선회하는 것은 실로 믿어지지 않을만큼 날렵했으며 많은 움직임을 필요 로 하지 않았다. 호유화마저도 조금 멍해 있는 사이 거북배는 뒤로 돌아 다시 학익진의진중으로 돌아갔 다. 그리고 나서 다시 북소리가 들리자 전선들이 일 제히앞으로 전진해 갔다. 아마 원래대로라면 거북선 의 뒤를 쫓아 적선들이 돌진하는 것이겠지만, 나뭇 더미는 움직일 수 없으므로 판옥선들이 앞으로나아 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판옥선들은 앞으로 나아가 다가 일제히 화포를 쏘아댔다. 십여척의 전선이 화 포를 일제히 쏘자 장관이었다. 삽시간에나뭇더미들 은 퍽퍽 부서져 나가며, 빗나가더라도 물기둥이 솟 고 크게 휘청거렸다. 화포를 사격하며 나아가던 판 옥선들은 나뭇더미 부근에 이르자또 한 번 묘한 광경을 연출했다. 노를 일제히 옆으로 올려 세운 것이 다.
‘뭐하자는 거지?’
그런데 다음 순간, 그 노들은 나뭇더미와 부딪혀 졌 다. 그러나 노들은워낙이 굵은 재목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하나도 부러지거나 상하지 않았고도리어 나 뭇더미들이 휘청거리며 밀려났다. 조금 심하게 밀린 나뭇더미들은 뒤집어지기까지 했다.
‘오호라. 노를 무기로 사용하는구나!’
판옥선들은 나뭇더미를 노로 밀어내는 것만이 아니 라 옆에서 화포를 쏘아댔다. 그러자 나뭇더미들은 그야말로 지리멸렬하게 박살이 날 수 밖에없었다. 그러더니 이미 박살난 나뭇더미들을 향해 다시 노가 들려졌다. 이번에는 아까처럼 밀어내기로 조금만 들 려진 것이 아니라 번쩍 위로 치들려진 것이다. 그러 더니 노들은 이미 부서져 산산히 흩어진 나뭇더미들 을 노리고 일제히 아래로 내려쳐졌다.
(* 주 : 조선 노들은 일반적인 서양의 갤리선의 노 와는 구조가 다르다.)
본인도 과거에 보았던 영화나 많은 고증들이 이것을 밝히지 못하고 있는데, 조선식 노는 앉아서 앞뒤로 젓는 것이 아니라 노군들이 일어선 상태에서 노를 모두 물에 담그고 8자 형으로 긋는 것이다. 전통적 인 우리나라의작은 배에 배 뒤에 노 하나만을 달고 사공이 그 노를 이리저리 돌려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잇는데 그것이 바로 조선식의 노젓기이다. 또한 전선에 사용한 노는 하나하나가 매우 커서 노 하나를 보통 여섯명이 저었으며 노도 몹시 크고 두꺼워서 충분히 근거리 무기 사용될 수 있었다.)그것을 보자 호유화는 몸이 우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왜선들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말 조선수군의 전법은 대단하구나. 저 노로 후려갈기면 배는 부수 지 못할지라도 물에 빠진 적병 정도는한 방에 박살 을 내겠네. 정말 뛰어난 전술이구나.’
이미 나뭇더미들은 모두 박살이 나서 조류에 잔해만 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수군들의 훈련이 마쳐졌는 지, 이번에는 징소리가 울리며 판옥선들은다시 뒤로 돌아 천천히 나아갔다. 북소리가 전진이고 징소리가 퇴각이라는 것은 오래된 관습 같아서 천여년이 지나 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아 호유화도 알아들을 수 있었 다. 호유화는 휴우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혼자 생각 했다.
‘이순신은 확실히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저런 전법 을 써서 옥포에서왜선 사십척을 부순 것이 분명하구 나. 어디 그럼 좀 가까이 가 볼까?’
호유화는 다시 둔갑술을 써서 훌쩍, 대장선인 듯 보 이는 배에 올랐다.
그 배는 아까부터 진의 중앙에서 조금 뒤로 들어가 있었고 많은 깃발이 오르내리는 것으로 보아 대장선 임에 틀림 없었다. 호유화가 대장선의 지붕에 모습 을 보이지 않게 하여 오르고 귀를 기울이자 안의 소 리가 들려왔다.
“거북배의 속도가 조금 느린 것 같습니다. 돌격선으 로 속도가 느리면쓸모가 적어지지요.”
걸직한 목소리의 남자가 말하자 매우 나이가 많은 듯한 늙은 사람이 대답했다.
“역시 철갑을 씌우는 것은 무리인 듯 싶구려. 지난 번 싸움을 치러보니왜선에는 화포가 없는 것 같았는 데, 그렇다면 굳이 철갑을 씌울 필요는 없을 것 같 구려. 조총 탄이라면 방패나 나무갑판으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으니까.”
그 사람들의 음성은 한 사람은 너무 정정했고 한 사 람은 너무 늙어 둘다 이순신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호유화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선에 화포가 없다니? 그럼 왜선들은 화포를 사용하지 않고 싸웠다는 말인 가? 그러나호유화가 엿듣고 있는 것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은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걸걸한 목소리의 남자가 말했다.
“좌우간 쇠가 부족한 판이요. 조정은 이미 평양까지 쫓겨가고 더 밀려날 것 같으니, 나라의 창고에서 쇠 가 내려오기를 기다릴 수는 없을 듯 싶소. 허나 전 선을 건조하여도 화포가 없으면 무용지물이 아닙니 까? 조방장께서는 그에 대한 대책은 있으십니까?”
그러자 늙은 목소리의 남자가 말했다. 그 사람이 바 로 조방장인 모양이었다.
“거북배의 철갑을 벗기어 정련하면 화포를 몇 문 더 만들 수 있을 것이고, 돌산도 앞의 쇠사슬을 녹이면 또 여러문의 화포를 만들 수 있을지 모르오. 화포를 만들만큼 쇠가 좋을런지는 해 봐야 알겠소만.”
“아직 쇠사슬을 풀면 안됩니다. 비록 한 번 승전하 였지만, 왜선이 이곳을 습격하면 어쩌려고 하십니 까? 적의 배를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하지 않겠습니 까?”
호유화는 그제서야 뭔가 깨달을 수 있었다. 자기가 타고 돌산도로 건너갔던 그 쇠사슬다리는 실은 적선 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방어도구였던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자 영악한 호유화는 왜 쇠사슬이 허공에 솟아 올라있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쇠사슬을 물 아래 늘어트리면 적선을 확실히 막겠지 만 많은 배가 밀어닥치면 쇠사슬이 끊어지거나 기대 가부서질 것이다. 그러나 쇠사슬을 적절히 공중에 띄워 놓으면 돛대만이 걸리게 되고 돛대가 모두 부 러져서 그 배는 조종이 불가능한 섬이나 암초 같이 되어 버릴 것이었다. 호유화는 조선군의 판옥선이 모두 돛대를 눕힐 수있게 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생각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로감탄할 만한 착상이었다.
그러자 늙은 남자가 껄껄 웃었다.
“나(羅)군관은 지난 번 싸움에서 수사의 지휘를 보 지 못하셨소? 왜병들은 참패당했으니 이곳까지 오 지 못할 거이오. 사방에 깔아 놓은 척후들이미리 보 고를 할 것이니…”
“좌우간 조방장. 왜구들의 배가 아니라 정식 왜선들 과 싸워 보시니 어떠하십니까? 판옥선에 아직 개조 할 부분이 더 있는지요? 직접 설계하신 것이니 더 잘 아실 것 아닙니까?”
그 말을 듣고 호유화는 눈을 크게 떴다.
‘어. 그러면 저 조방장이란 사람이 이 판옥선을 발 명한 장본인이란 말인가? 이 사람도 보통 사람같지 는 않네.’
지금 대장선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늙은 사람이 야말로 판옥선의 설계자인 조방장 정걸이었던 것 이다. 정 걸은 이미 나이가 일흔여덟, 80을바라보는 노구였으나 아직도 자못 정정했으며 불굴의 의지로 이순신의 옆에서 직접 전선을 지휘하며 싸움에 임하 고 있었다. 조방장 정걸은 판옥선뿐만이 아니라 뛰 어난 창의력으로 대총통, 철익전(날개를 붙여 멀리 나가게 만든, 지금의 미사일과 비슷한 포탄이다.), 화전 등의 독창적 무기를많이 만들기도 했다. 그러 나 그에 대답하는 정걸의 말은 더더욱 놀라웠다. “나야 뭐 이제 늙어서 무엇을 알겠는가? 물건을 만 드는 일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수사 어른을 만나보고 나는 사람 위에 사람있다는 것을 알았네. 거북배나 그 쇠사슬 다리나, 그리고 염초를 만드는방법이나, 세상에 그게 아무나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이던가? 염초를 만드는 방법 덕분에 우리들은 화약걱정을 하지 않지 않는가?” ‘어라라? 그럼 거북배(*주: 거북배를 만든 것은 엉뚱하게도 일부에서는 군관인 나대용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그것은 이순신의 독창적인 착안에 의한 것이며 본인의 생각으로는 당시 조방장으로 이순신 의 곁에 있던판옥선의 발명자 정걸의 조력이 있었다고 추정한다.)나 쇠사슬다리를 생각해 낸 사람이 이순신이란 말야? 음.. 그리고 염초를 만들어서 화약 걱정을 하지 않는다? 그것도 이순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