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4권 – 31화 : 조선국의 풍운
조선국의 풍운
한편, 한양에 주둔해 있던 고니시는 초조하여 몸둘 바를 몰랐다. 옥포해전에서 구루시마 미지후사(來島 通總 내도통)의 부대가 패전하여보급품이 오지 않 았기 때문에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는 이미 잠시 한양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의 부 대가 동해안 쪽을 따라 북진을 시작한 다음이었다. 가토 부대는 한양에 있어 봐야 보급이 도착하지 않 을 것을 알고는 북상하여 동해안 쪽에서 보급을 받 기위해 먼저 출발한 것이다.
그러나 고니시는 ‘승전장군’으로 계속 조선임금의 어가를 노리고북상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조선임금은 지금 평양에 있다 합니다. 그리고 그 길목에 별다른 조선부대는 있지 않는 것 같았습니 다.”
정탐꾼들은 고니시 부대가 며칠 휴식하는 동안 그러 한 첩보를 보내왔다. 그러자 고니시는 상당히 마음 속으로 갈등을 겪게 되었다. 군량의 양이 상당히 불 안정했던 탓이었다.
전쟁 전에 히데요시는 ‘조선국은 군량이 흔한 나라 이므로 자체 조달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실제의 양상은 달랐다.
난리가 4월 말에서 5월 초에 걸쳐 일어났기 때문에 조선의 논들은거의 일손이 닿지 않아 메말라 있어 식량을 얻을 수 없는 판이었다.
게다가 왜국에서 지니고 온 식량이 지금은 거의 소 모되었으며, 육로를 통해 조금씩 전해오는 양은 도저 히 수만 군대의 수요를 채울 정도가되지 못했다. 서해안을 통해 보급될 식량만을 오로지 믿었는데, 불행히도 조선수군이 그 수송선단을 격파함으로써 보급로가 끊겨 버리고 말았다. 그런상황에서 진군을 계속하여야 하는 것인지, 고니시는 차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진군하라면 진군할 수는 있다. 그러나 보급을 받아 야 부대가 싸울것이 아닌가? 굶주린 부대가 승리했 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고니시는 부하 몇 명만을 거느리고 한양 거리를 거 닐며 혼자 생각에 잠겼다.
전투행위 이외의 민간에는 피해를 주지 말라던 히데 요시의 명령이결국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고 있었다. 군량이 모자라니 조선백성의 것을 징발하는 길밖에 는 없었다. 그러나 그 행위는 조선백성을 죽이는것이나 다름없었다. 농사조차 짓지 못하는 판에 그나 마 남아 있는 비축미를 빼앗는 것은 잔혹한 일이었 으나, 일단 자신의 부하들이 굶주리는 판이니 어찌 할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끊이지 않았으며, 조 선백성들은 산같은 곳으로 숨어 들어가고, 혹은 저 항하다가 맞아 죽기도 하면서 그수가 줄어들고 있었 다. 이래서는 조선 ?퓽막 삼아 명을 정복한다는 계획은 말짱 헛것이 될 수밖에 없을지도 몰랐다. 고니시는 점차 좌절해 가고 있었다. 다른 무장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않은 인물은 단순한 가토 기요마사 정도일 까? 좌우간 다른 부대들은 이미 뿔뿔이 흩어져 식 량징발을 위해 사방으로 나갔으며, 이제는 고니시가 나설 차례였다.
‘처음의 목적은 이제 무의미하게 되었다. 이런 판에 무엇을 위해 싸운단 말인가?’
고니시는 빈 성이 되어 버린 을씨년스러운 한양 거 리를 내다보면서쓸쓸히 중얼거렸다. 이제 한양의 식량사정은 거의 무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더 찾아보 아야 나올 것이 없었다.
굶주림에 시달려 길가를 헤매는 유령과도 같은 조선 인 몇 명이 눈에 띄었다. 고니시는 그 모습을 보고 는 마음이 쓰라려 눈을 질끈 감았다. 난폭한 가토와 는 달리, 고니시에게는 어느 정도의 인정이 있었다. 그가 믿는 천주교 교리에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다. 그런데…..
‘떠나야겠다. 한양에 더 있어 봐야 굶어죽거나 고립 되는 길밖에 없다. 지금 이 상태로 싸우기는 힘들지 만 평양으로 진군할 수밖에 없다.’
참담한 상념에 젖어 있던 고니시는 눈을 떴다. 갑자 기 가녀린 울음소리가 서럽게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조금 아까 비틀거리며 걸어오던 굶주린 남자가 길가 에 쓰러져 있었고, 그 옆에 자그마하고 누추한 어린 아이가 통곡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고니시의 여린 마음이 움직였다.
“저자들을 데려와라.”
왜군은 조선땅에서 포로로 삼는 것을 꼭 군사들에 한정하지는 않았다. 남자든 여자든 간에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다 싶으면 닥치는 대로잡아 들였다.
도공들은 최우선으로 꼽히는 포로였으며, 미색이 반 반한 여인들이그 다음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학식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을잡아갔다. 왜국은 아직 싸움으로 거칠어진 세상이어서 학식이 있는 자들은 제법 대우받는 상황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신체 건강한 장정. 이들은 왜국의 일 꾼으로 쓰기 위함이었고 마지막으로는 아이들이었 다. 이 아이들은 노예로 팔기 위해서, 혹은 왜군들 의 하인으로 부리기 위하여 잡아가는 경우가 많았 다.
부관은 고니시가 그들을 단순히 포로로 삼으려는 줄 을 알고 즉시부하를 시켜 그 아이와 쓰러진 남자를 데려오게 했다. 그러나 고니시는 그 뜻이 아니었다. 아무튼 부하가 가까이 다가서 보더니 고개를 저었 다. 남자는 이미숨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아이는 남 자 곁에서 울며 떨어지지 않으려했으나 부하가 아이 를 번쩍 들어서 데리고 왔다.
“계집아이입니다. 헤헤……..”
부하는 누런 이를 내보이며 흉한 눈매로 웃었다. 그 아이는 여자아이였으며, 굶주림에 지치고 얼굴도 검 댕이 묻어 보기 흉한 몰골이었다. 그러나 눈물로 검 댕이 지워진 자국을 보니 피부가 뽀얗고 고운 것이 꽤나 예뻤다.
고니시는 그 아이를 이렇게 만든 것은 자신이 아닐 까 하는 회오가잠시 일었지만 애써 무덤덤하게 말했 다.
“계집아이냐?”
“예, 헤헤……….저는 척 보면 압니다. 자색이 곱습니다.”
부하놈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이의 얼굴을 닦아 보이며 다시 흉물스럽게 웃었다.
왜국은 조선과는 달리 성풍습이 문란하여 어린아이 를 희롱한다거나 남색(男色) 같은 일이 흔히 벌어지 고 있었다. 그러니 이놈은 이 아이가 제법 반반하니 노리개로 삼아도 좋을 것이라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고니시도 그 뜻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독실한 천주교신자인 고니시는 그런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울컥 속 이상해진 고니시는 그 부하에게 말했다.
“이제 너는 이 아이를 맡는다. 이 아이는 내 딸이 다. 알겠느냐?”
“예……? 예?”
“이 아이는 이제부터 내 딸이라고 했다! 이 아이에 게 잘못하는 것은나에게 잘못하는 것이다!”
고니시는 내뱉듯이 말하고는 휙 고개를 돌렸다. 그 것은 충동적인일이었으며, 이 전쟁을 치르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경멸감의 발로였다. 착잡한 심정 으로 고니시는 진중으로 곧장 들어와 출발 준비를갖 출 것을 명했다.
‘가자. 하는 수 없다. 나는 무장이다. 가는 데까지 가야만 한다. 그것이 나의 운명이다.’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