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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종결자 4권 – 32화


고니시는 준비를 서두르는 부하들이 안쓰러웠다. 애 당초 본국에서출발하였던 그의 정예부하 일만 팔천 명은 일만 삼천 정도로 줄어들고있었다. 그 군사의 수에는 하인, 짐꾼, 노무자 등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니 비전투원의 숫자도 그만큼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내 부대에서만 6천 명이 죽고 다쳤다. 그리고 내가 물리친 조선군의 수효는 그 세 배가 넘고 조선 백성의 수효도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나는 얼마나 더 죄를 지어야 하는가? 얼마나 더…………….’

저녁 무렵이 될 때까지 고니시는 괴로운 마음을 가 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해가 지자 불안한 마음이 더욱 극심해져 왔다. 또 그 음산한목소리가 나타나지 않나 두려워 진 것이다. 전에 겐키의 일을 모방하여고니시는 자 신의 장막 안에 제단을 세우고, 속옷에 은밀히 ‘성 모경’ 등의 경문을 써넣었지만 별로 효과가 없는 듯 싶었다.

후지히데를 죽인 그 끔찍한 사건은 그후로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그음울한 목소리는 날만 저물면 나타나 고니시를 괴롭혔다. 어째서 살육을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 목소리는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죽 이고 또 죽이라고 마구 몰아붙였다.

그때마다 안간힘을 다하여 기도를 하고 그럭저럭 그 목소리에 버텨나가고는 있었으나, 정말로 끔찍스러 운 일이었다.

고니시는 밤이 두려웠다. 그때 기척이 나더니 장막 안으로 부관이들어왔다.

“따님을 모셔 왔습니다. 뵈옵게 하고 싶어서……” 

“딸?”

고니시는 의아해했다. 가족을 모두 본국에 남겨두고 왔는데?

그러나 이내 고니시는 낮의 일을 기억해냈다. 장수 가 부하에게 하는 말은 모두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부관이 충직하게 그 말을 지킨것임이 분명했다. 그 렇기로서니 부하 녀석에게 홧김에 한 말을 부관이이 토록 충직하게 지키리라고는 고니시는 미처 생각하 지 못했다.

사실 ‘가엾은 아이들을 내 딸처럼 생각하고 함부로 다루지 말라.’는의미에서 한 말이었는데, 그것이 조 금 왜곡된 것이다. 하여간 고니시는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기분이 묘했다.

‘졸지에 딸이 하나 생기게 되었구나. 우습다. 내진 짜 딸은 대마도주소오 요시도시(宗義智)에게 가 있 지 않은가? 이렇게 어린 딸이 새로 생기다니, 허허…….’

좌우간 부하들 앞에서 한 말을 번복할 수는 없었다. 고니시는 부관의 얼굴을 보았다. 부관은 웃는다거나 풀어진 기색이 전혀 없이 엄숙한 표정이었다. 그런 부관에게 이런 뜻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어쩌면부관 은 자신이 잘못했다 여기고 할복할지도 몰랐다. 

“데리고 오너라. 보고 싶구나.”

고니시는 어이가 없기도 하고 어찌할 수도 없어서 부관에게 말했다.

그러자 부관은 낮의 계집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 아이는 그 사이 몰라볼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깨끗이 씻기고 머리도 잘 빗었으며, 어디서 구했는지 고운 옷을 아이에게 입혀 아이의모습은 몹시 귀 여워 보였다. 그러나 아이는 어딘가 무섭고 불안한 듯, 서먹서먹하니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고니시도 마음이 좋아졌다. 조선인 이라 하나 굳이딸을 삼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 가?

“가엾은 것. 안심하거라, 안심해.”

고니시는 아이를 달랬으나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 리고 아이도 울먹이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말이 통 하지 않자 부관이 조선말을 할 줄아는 부하를 불러 왔다.

“왜 그리 울상을 짓느냐? 이제 아무 것도 겁내지 말아라.”

그러자 아이는 망설이는 듯하다가 뭐라고 중얼거렸 다. 중얼거리는소리에 통역하는 부하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고니시가 얼굴을찌푸리며 물었다. 

“이 아이가 무어라 하느냐? 그대 전하라.”

“어서 그대로 전하라. 괜찮다.”

통역을 맡은 부하가 우물쭈물하다가 간신히 입을 떼었다.

“이…… 아이는・・・・・・ 고니시님을 보고 욕을 하는 것입니다.”

“욕? 어째서?”

“왜군이 쳐들어와서 농사를 짓지 못하고 식량을 모 두 빼앗겨서 온집안식구가 굶어 죽었답니다. 그래 *…….”

고니시는 조금 침울해졌지만 그럴 법도 했다. 전쟁 의 고통을 고니시는 이미 본국에 있을 때부터 잘 알 고 있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흐음…… 계속하라.”

“예?”

“계속하라고 했다!”

고니시의 호통에 통역 부하가 묻자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계속이야기를 했다. 이 아이는 언년이라 고 했는데, 조선에서 농사짓고 사는 낙향한 시골 선 비의 딸이었다. 가난할지언정 농사를 지으며 그런대로 평화롭게 살아왔고 또한 집안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아서인지 아이는 또랑또랑했다.

그렇게 살아오다가 왜군이 쳐들어와 농사가 쑥밭이 되고 온 집안의물건과 식량을 모두 빼앗겼다. 그러 던 중에 어머니가 먼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앓다 가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근 한달 전부터 아버지와함 께 유랑하는 신세가 되어 한양까지 흘러 들어오게 되었다.

언년이의 아버지는 간혹 먹을 것이 생기면 자신은 먹지 않고 언년이에게 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 지는 결국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언년이를 살리고…………….

“……자신은 나쁜 아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멋도 모 르고 배고픔 때문에 먹을 것을 사양하지 않아서………… 아비를 죽였다고 하는군요. 제발소원이 있는데 어서 자신도 죽여서 아비 곁에 묻어 달라고 합니다.”

옆에 있던 언년이는 서러움을 이기지 못해 엉엉 소 리내어 울었다.

통역하던 부하 역시 언년이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이 글썽글썽해졌다.

비록 전쟁을 치르고는 있지만 왜병들도 인간임에는 틀림없었고 본국에는 부모형제들과 아내, 자식이 있 는 몸이었다. 고니시도 몹시 슬퍼졌지만 부하들 앞 이라 애써 참았다.

“낮에 보았던 이 아이 아비의 시체가 있느냐? 잘 묻어 주거라. 그리고 그만 물러들 가라.”

고니시는 통역을 맡은 부하와 부관을 모두 나가게 했다. 언년이는계속 서럽게 울었고 고니시는 그런 언년이에게 뭐라 할말이 없어서 언년이를 바라보았 다. 결국 고니시의 눈에서도 참았던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언년이는 계속 울다가 고니시에게 가까이 와서 무어 라 했다. 그러나 고니시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하느냐?”

고니시가 알아듣지 못하자, 언년이는 울면서 고니시 가 찬 칼을 가리키더니 다시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어서 죽여 달라는 뜻 같았다.

고니시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언년이를 조심스럽게 다독거려 주려 했으나 언년이는 자신의 손을 휙 피해 버렸다. 언년이는 재빨리 장막 구석으로 피해 몸을 잔뜩 웅크리고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고니시 는 씁쓸하게 몸을 돌려 묵주를 꺼냈다. 그러고는 장 막 안에 차려놓은제단에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자비로우신 마리아님, 이 무의미한 전쟁이 빨리 끝 나도록 해주소서. 이렇듯 불쌍한 아이가 더 이상은 나오지 않게 해주소서. 피를 보지않고도 살아갈 수 있게 해주소서.’

고니시는 진정으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그리고 얼마나 기도를드렸는지 몰랐다. 그러다가 다시 정신 을 차려 눈을 떠보니, 언년이는장막 구석에서 지친 듯 쓰러져 잠이 들어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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