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4권 – 36화
은동은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아직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많았지만 재판에서 자신의 증언이 중요할 것 같다는 사실만은 눈치챌수 있었다. 우주 가 개벽한 이래 인간으로서는 처음으로 회의에 참석 한것이라니 말이다. 그러나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대해서는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런데 하일지달이 천만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너를 데려오라고 한 건 또 한 가지 미안한 게 있어서인데…………. 저들은 몹시 시간이 바쁜 것 같았 거든. 너도 그러니, 꼬마야?”
“네? 아, 네. 그건 당연하죠. 조선은 지금 전쟁중이 에요. 특히 왜란종결자를 찾아야 하고, 그래야 이 난리가…….”
“음……,그런데 사실 여기는 생계보다 훨씬 시간이 빨리 흐른단다. 그러나 난 저들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해 주지 못했어.”
은동은 하일지달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네? 시간이 빨리 간다구요?”
“그래. 너는 여기 온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고 여기겠지만, 사실아래에서는 벌써 며칠이 흘렀을 거 야. 성계와 생계 사이에 있는 중간계는 시간이 수백 배나 빨리 지나가고, 유계와 생계 사이에 있는 중간 계는 시간이 훨씬 느리게 가거든. 그러나 그 이야기 를 먼저 했다면 저들은 바빠서 나와 함께 오려 하지 도 않았을 거구, 그럼 싸웠을지도 몰라. 난 명령을 수행해야 하니까…………. 하지만 저들이 너무 센 것 같 아서난 솔직히 싸우기가 두려웠거든…………….”
하일지달은 정말 미안한 듯 말끝을 흐렸다. 은동은 나이도 어린데다가 하일지달의 말이 워낙 길어서 잘 이해할 수 없었으나, 조금 여유를 두고 생각을 정리 해 보았다. 비로소 아래의 생계, 즉 조선에서는 시 간이 휙휙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옛말에 신선이 바둑두는 것을 구경하다 보니 시간이 너무 흘러서자기도 모르는 새 도끼자루가 썩어 버렸 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던가?
바로 그런 식으로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구! 그러면 우리가 여기 있는 사이에 시간이 막 지나간다면…. 자칫하다가 우리가 없는 사이에 난리가 더욱 커지면 어떻게한다지? 왜란종결자를 찾지도 못하고 그리고……………. 아이구………….. 왜국이그냥 이겨 버린다면!’
은동은 바싹 애가 탔다. 다른 이야기는 뭐가 뭔지 잘 몰랐지만 시간이 마구 흐르고 있다는 이야기만으 로도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더구나 어떻 게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한 심정은 한층 더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천둥 소리 같은 목소리가느껴졌다.
“네가 이들이 이야기하는 아이냐?”
은동은 얼이 빠져서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데 하일지달이 슬쩍눈짓을 해주었다. 은동이 엉겁결에 대답했다.
“아…… 예, 그렇습니다.”
대답을 한 순간, 은동은 자신이 어느 사이엔가 팔각형의 중앙에 서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놀라워 정신조차 차릴 수 없었다. 과거 유정스님이 축지법 을 써서 달릴 때에도 정신이 없었지만, 이건 아예 시간이 전혀 걸리지 않고 몸이 순간이동되는 것이었 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은동의 옆에는 태을사자와 흑 호, 호유화가 모두 서 있었다. 은동은 태을사자를 보자 반가웠지만 태을사자의 표정은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래서 반갑다는 말을 하기가 겸연쩍어 은 동은 흑호의 엄청나게 큰 손을 잡고 흔들었다.
“흑호님! 반가워요. 태을사자님도요.”
“흐음…… 그려. 근데 어떻게 너까지 여기 왔니? 들으니 태을사자는팔신장에게 잡혀 왔고, 나하고 호 유화는 하일지달을 만나 스스로 왔지만. 너는?”
흑호는 표정이 다소 심각했지만 그래도 험상궂은 얼 굴로 히죽 웃었다. 웃는다기보다는 찡그리는 것에 가까워 오히려 무서워 보였다. 그래도 은동은 흑호 가 마음 좋은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반 갑기만 했다. 은동은 삼심할머니, 아니 삼신대모님 이 자신을 급히 데리고 왔다고만 말했다. 그러자 호유화가 은동을 보고 활짝 웃으며 말을건넸다.
“근데 은동아. 나한테는 안 물어봐?”
은동은 사실 호유화의 얼굴을 보니 반가웠지만 내색 은 하지 않고오히려 훙 하고 코웃음을치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호유화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둘의 모습을 보고 흑호가 물었다.
“어? 왜 그러냐? 둘이 싸웠니?”
“몰라요.”
흑호는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랐지만, 풀이 꺾인 호유화의모습을 보니 기분이 고소했다. 흑호는 히죽 웃으면서 은동에게 귓속말을 했다.
“여자들이란 다 그래. 좌우간…….”
흑호가 더 말을 하려는데 별안간 태을사자가 소매를 내저었다.
“쉿.”
그러자 흑호가 조금 성질을 냈다.
“왜 그려? 난 할말 못하고는 못 살어. 그러니 …….”
흑호가 말을 이으려는데 다시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렸다.
“이제부터 너희에게 묻겠다. 너희가 한 짓을 너희가 아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