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4권 – 37화 : 중간계의 재판
중간계의 재판
태을사자와 흑호, 호유화와 은동이 모두 시간이 느 리게 가는 중간계에서 막 재판을 받는 동안 생계에 서는 이미 하루가 흘렀다. 5월 29일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의 주변에 잘 나타나지 않던 마수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더 이상은 기다릴 수가 없다.”
5월 29일 새벽, 이순신은 지병의 고통에 몸부림치 다가 부하들이 문안을 드리러 오자 말했다. 그때까 지 이순신은 이억기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던 탓에 몹시 마음이 급했다.
‘비록 내 몸에 병이 있지만… 어서 출발해야 하는데・・・……이억기는 대체 무엇을 한단 말인가?’
이순신은 차마 부하들에게 이야기는 할 수 없었지만 불안감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 순신의 휘하에 있는 전선은 불과이십오 척. 그가 지 휘할 수 있는 전라좌도 전체의 전선을 긁어모은 것 이었다. 그리고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여러 번 기별 을 했는데도 무슨이유에서인지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이억기가 온다면 오십 척에이르는 함대가 생길 터인데….
더구나 각 포구들이 아직도 불안에 떨고 있기 때문 에 그 얼마 안 되는 전선도 다 끌고 갈 수가 없었 다. 이순신은 나이와 기술자로서의 쓸모를 생각하여 조방장 정걸로 하여금 흥양에 머물러서 책략에 따라 사변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심한 번민에 빠져 있었다. 옥포해전에서 불과 스무 척의전선을 가지고 출전하여 비록 대공을 세우기는 했으나 그것만으로는불안하였다.
‘절대 져서는 아니 된다. 더구나 피해를 입어서도 아니 된다. 원균은도대체 아군인가 적군인가?’
이순신은 마음을 짓누르는 듯한 중압감과 싸웠다. 솔직히 말하자면한 번 싸움에서 크게 이겼지만 몸이 몹시 아팠다. 그런데 원균은 싸운답시고 고작 3척의 배만을 이끌고 와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적이출 몰한다는 정보만 가지고 와서 사방의 포구들을 불안 하게 만들었다.
그저 정보만 준다면야 고마운 일이겠지만 원균은 왜 싸우러 나가지않느냐고 아픈 이순신을 닦달하고, 불 만을 사방에 터뜨리고 다녔다.
결국 각 포구의 백성들이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 싸움에서 이순신은 지휘할 전선의 수효가 적 어서 어선들을징발하여 후방에 배치했다. 즉, 후군 처럼 보이게 하는 위계(僞)를 사용했으나 이번에 는 그럴 엄두조차 내지 않았다. 별로 효과를 거두지 도못했을 뿐더러, 어선에 탔던 어부들이 왜군 배의 숫자가 많음을 보고가서 떠들어댄 탓에 포구들은 한 층 불안에 휩싸였던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 원균은, 왜군 배가 나타났으니 싸우 러 가자고 성화를 부리며 이제 일은 글렀다느니, 전 라도 수군도 끝이라느니 하는 소리만 해대는 판이었으니…….
‘무엇을 가지고 싸운단 말인가? 한 번이라도 실수하 면 전라도 앞 바다 마저도 무인지경이 된다. 남해 수군이 궤멸되면 전라도는 물론, 조선 전체가 위험 에 빠지는 꼴이 아닌가? 그나마 간신히 보급로를 끊어놓았는데・・・・・・’
이순신은 신경이 바짝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러 자 또 뱃속이 꼬이고 곽란기가 일어났다. 이순신이 다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정결과 나대용, 정 운, 방답첨사 이순신 들이 놀라 이순신의 수족을 주 무르며 간호했다. 이들은 평소 엄하고 꼼꼼한 이순 신을 모시면서 그의성격과 체질을 이미 잘 알고 있 었다. 녹도만호 정운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문을 열 었다.
“수사 어르신, 몸이 이러고서야 어찌 출진하시렵니 까? 우수사 이억기가 올 때까지 조금 기다리소서.”
정운은 이순신의 신경성 증상에 대해 익히 경험했 던 터였다. 이순신은 머리가 몹시 뛰어난 사람이기 는 했으나 신경이 너무 예민하여 몸이쉬이 아팠다. 그러나 이순신은 애써 엷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미 나는 군령을 내렸다. 나 역시도 군령을 어길 수는 없으이. 그것을 모르는가?”
비록 미소를 지었으나 이순신의 마음은 참담했다.
‘한 번 졌으니 왜군도 이번에는 대비를 단단히 했을 것이다. 지난번함대는 수송함대였지만 이번에는 어 떨지 모른다. 어선을 뒤에 깔아 보아야 잘못하다가 는 전멸할 뿐이다. 더구나 아군들이 한 번 이기기는 했지만 너무도 서툴고 겁이 많다. 전선 한 대라도 깨지면 걷잡을 수없이 무너져 버릴 것이다. 아 아…………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이순신의 가장 큰 고민은 거기에 있었다. 사실 조선 의 수군들을 그럭저럭 이순신이 훈련을 시켰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겁쟁이가 많았다.
수많은 세월 동안 평화롭게 살면서 훈련을 게을리 하는 것이 기본상식처럼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전선에서 차지하는 인원 중 3분의 2가 민간 에서 징발한 어부들이 대부분이었고 나머지만이 정 규 수군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이렇듯 군기를 엄하게 세우는데도 탈주자가 속출하여 이순신은 이 미 여러 명의 목을 베어 간신히 군기를 잡았다. 그러나 그 가족들이 할 원망을 생각하면……. 그러 한 병사들이니만큼 단 한 척이라도 파괴되어 사상자 가 많이 나오면 그때는 이 오합지졸의 진형 자체가 허물어져 버릴지도 몰랐다. 그 점이 바로 이순신의 근심이었다. 결국 피해를 거의 내지 않고서 이겨야 하는데, 그것은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상자 가 나오는 것은 어찌할 수 없지만,전선을 잃어서는 안 되었다.
배가 격침되는 일이 있기라도 한다면 아예 대부분의 군사들이 도망쳐 버릴지도 몰랐다. 수군은 바다에서 싸우니 만큼 배가 가라앉으면후퇴도 도망도 할 수 없이 거의 몰살될 뿐이니까. 그러니 배를 한 척도잃 지 않으면서, 난폭하고 목숨을 아끼지 않는 다수의 적과 싸워서 이겨야만 한다는 데에 이순신의 고민이 없는 노릇이었다.
“부축 좀 해주게.”
이순신은 나대용에게 손을 뻗었다. 나대용은 방답첨 사 이순신과 함께 이순신을 부축했다. 그리고 녹도 만호 정운이 직접 숙직군졸을 시키지 않고 이순신의 전복을 내왔다. 군졸들이 이순신이 아픈 것을 보면 좋지 않은 소문이 떠돌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프단 소리는 절대 하지 말게.”
“알겠사옵니다. 그러나 정말로 걱정이 되옵니다. 정 말로…….”
정운과 나대용 등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은 그야말 로 이순신의 지혜와 사람됨을 믿는 부하들이어서 이 순신의 안위를 심히 염려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순 신은 일단 일어나자 이를 악물고 몸 자세를 가다듬 었다.
“괜찮네. 어쨌거나 더 이상은 지체할 수 없네. 이억 기가 오건 안 오건 출격할 따름이야!”
이름 모를 목소리가 울려퍼지자 태을사자가 나서서 대답했다. 사실은동은 어린아이였고 흑호는 너무 단 순했으며, 호유화는 영리하기는했지만 성격이 너무 괴팍해서 답변 역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니태을 사자가 맡아서 대답을 하는 것이 옳았다.
“우리가 한 일이 무엇이기에 그러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다시,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목소리가 울 려퍼졌다.
“천기를 어그러뜨리려 한 일이다.”
그 소리에 호유화와 흑호가 울컥 신경질을 내려 했 지만 태을사자가조용히 대답했다.
“우리는 천기를 어그러뜨리려 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천기를 지키려 했을 뿐.”
“천기를 어떻게 지킨다는 것이냐?”
“그 전에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가능하겠사옵니까?”
그러자 목소리는 잠시 잠잠하다가 답했다.
“좋다. 우선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묻거라. 그러나 한가지만이다.”
태을사자가 지체없이 물었다.
“언뜻 듣기로 여기는 우주 팔계의 대표들이 모두 모여 있다고 했는데, 맞습니까?”
그 목소리도 즉각 답했다.
“그렇다. 팔계의 주재자들은 아니지만 조선과 관련된 팔계의 대표자들이 온 것만은 맞다.”
“그렇다면 마계의 대표자도 오셨겠군요?”
“그렇다.”
“좋습니다. 그러면 되었습니다.”
단호하게 되받은 태을사자에게 그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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