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5권 – 7화 : 왜국의 비사(秘史)
왜국의 비사(秘史)
태을사자와는 다른 방향인 평양 방면으로 역병의 자 취를 추적해 간 흑호는 전에 만났던 그 왜병을 먼저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래 보아야 흑호는 중간계에서 정한 대로, 그 왜병에 대해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가 없었지만 마수가 그렇듯 기를 쓰고 쫓아간 녀석 의 정체가 무엇인지가 궁금해서였다.
그자는 물론 고니시가 보냈던 인자 겐키였다. 겐키 는 부상입고 지친 몸을 끌고 한시도 쉬지 않고 고니 시가 있는 평양으로만 향하고 있었다. 숙달된 인자 이니만큼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이동하였지만 물 론 흑호에게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조선의 산천초 목이 모두 흑호의 눈이었으니 말이다.
좌우간 흑호는 한편으로는 그자를 추적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주위에 돌고 있는 역병의 흔적을 좇으면 서 평양 부근에 당도하였다. 그자는 평양 부근에 오 자 성에 들어가지 않고 숲속에 처박혀 버렸다.
흑호는 조금 여유있게 평양 부근을 둘러보기 시작했 다. 이제 역병은 평양 부근까지 올라와 있었으며, 왜군들의 진중에까지 조금씩 그 증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때마침 흑호는 중요한 것을 발견하였는데, 역병이 자꾸 번져가는데도 역귀나 다른 마수의 흔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역귀는 이쪽으로 오지 않은 게 아닐까? 그냥 병만 옮아왔는가 보구먼. 그러면 병은 어떤 놈이 옮겨왔 누?’
흑호가 조사해 보건대 평양에 아직 남아 있는 조선 인들에게까지 병이 옮겨가지는 않은 듯했다. 오히려 왜군부대에는 조금씩 여역이 발생하고 있었다. 그것 으로 볼 때 병을 옮긴 것은 아마도 왜군부대 중에 있는 일원이 아닐까 싶었다. 게다가 평양에 있는 고 니시의 부대는 상당히 물자가 부족한 듯이 보였고 사병들의 건강상태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흠…… 아마도 이순신 때문에 보급을 못 받아서 저 렇게 누렇게들 떴나 보구먼. 히히, 꼴 좋다. 남의 나라에 와서 난리를 치니 벌을 받는 거여.’
흑호는 수하의 작은 금수들과 도깨비들을 풀어 남몰 래 왜군부대를 정탐하게 했다. 그 결과를 보니 아마 여역은 육로로 부산에서 올라온 왜병을 통해 옮긴 모양이었다.
‘그럼 누굴까? 어떤 놈이 병을 옮긴 걸까?’
분명 태을사자의 조사에 따르면 여역은 며칠 사이에 천리가 넘는 길을 지나 평양에 당도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어떤 왜병이 천 리가 넘는 길을 며칠만에 올 수 있었을까? 보급부대나 보충병이라면 그렇듯 빠 르게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할 텐데………
‘흠・・・・・・ 그러면 파발이 옮긴 걸까?’
파발은 기마로 빠르게 이동하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조금 더 치밀하게 생각해보니 그것 도 아니었다. 여역에 걸린 녀석이 무슨 용빼는 재주 가 있다고 말을 타고 하루에 수백리씩을 갈 수 있단 말인가?
‘가만… 그러면 이거 아무래도 사람이 옮긴 것 같 지는 않구먼. 흠냐…… 그러면 아무래도 마수나 그 끄나풀이 있는 모양인데…………. 근데 마수가 옮긴 거 라면 왜 왜군에게 옮긴 거지? 조선인들에게 옮기지 …….!
흑호는 생각을 해보았으나 생각할수록 이해가 되지 않고 의혹이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만 갔다. 한참을 생각해보던 흑호는 그래도 갈피가 잡히지 않아 다시 평양성의 내부를 어슬렁거려 보았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 밤이 되었다. 흑호는 둔갑법 으로 왜군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의 숙사까지 들어가 보았다. 그때 평양성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의 총 대장은 고니시였다.
숨어서 그를 직접 보고 난 뒤 흑호는 혼자 실없이 웃었다. 그 왜장은 바로 지난번 탄금대에서 마주친 고니시였다. 흑호는 고니시와 맞닥뜨려 하마터면 싸 울 뻔한 일이 있었고 화살까지 한 방 먹은 일이 있 었다. 그때 유정스님에게서 구원을 받지 못했으면 속절없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몰랐다.
흑호는 둔갑법으로 장막 뒤에 숨어 혼자 앉아 있는 고니시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녀석.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 놈인데 그냥 콱 요절을 내버려? 제길헐. 중간계에서 인간은 아무두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 너 참 명이 긴 줄 알어 라.’
하지만 흑호가 보기에 고니시는 그때에 비해 몹시 쇠약해진 것 같았다.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지 얼굴도 야위고 머리도 센 것 같았다.
‘안 좋은 일을 허니깐 그 꼴이 되지. 고소허다, 히 히.’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흑호가 누군가 하여 그자를 바라보니, 그자는 바로 자기가 한산도에서부터 만나 추적해온 자였다.
‘음? 저자가 여긴 또 웬 일이람?’
그러나 흑호가 보고 있는지 알 리 없는 고니시는 겐키가 나타난 것을 보고 서서히 입을 열었다.
“겐키인가? 오래 걸렸구나.”
“‘예…”
“형제들은……?”
질문을 던진 고니시는 겐키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조용히 중얼거렸다.
“알겠다……”
고니시는 퍽 심신이 쇠약해진 상태였다. 겐키와 고 니시가 다시 만난 이때는 7월 하순, 고니시가 조승 훈이 이끄는 명나라 유격부대의 기습을 격퇴한 직후 였다.
조승훈의 부대는 수도 얼마 되지 않았으며, 조총에 대항할 만한 무장도, 훈련도 받지 못한 부대였다. 그 때문에 고니시는 별반 고생을 하지 않고 명군을 퇴각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고니시는 바야흐 로 명군이 직접적으로 조선의 편을 들어 개입을 하 기 시작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지금도 가뜩이나 보급이 부족한 판에 새로운 군대와 싸우게 된다면 앞날이 정말 불안했다. 조승훈의 부 대는 곧 사신을 보내어 철군할 것을 요청하였는데 고니시는 그들의 뒤를 쫓으려 하지 않았다. 얼마 되 지도 않는 수효의 군대를 굳이 뒤를 쫓으면서까지 섬멸할 생각도 없었고, 또 고니시 부대의 사정 또한 좋지 않아 추적할 엄두를 내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마음이 착잡한 고니시는 겐키의 얼굴을 보자 갑자기 명군측에서 사신으로 찾아왔던 자의 얼굴이 생각이 났다. 얼굴이 좁고 까마귀처럼 생긴 자였는데 그자 와 생김새가 비슷했던 것 같았다.
‘그자의 이름이 무엇이라고 했던가? 그래, 심유경이 라고 했다. 별 것 아닌 작자 같아 보였지만 눈빛이 이상하게 번득이고 있었지. 범상한 자는 아닐 것 같은데…….’
심유경이 별반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지만 고 니시는 몹시 피곤했다. 이상하게도 심유경이라는 자 는 만나는 사람을 견딜 수 없을 만큼 피곤하게 만드 는 작자였다.
그를 만나고 나서 다시 겐키를 만나자 고니시는 더 더욱 피곤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겐키의 정보는 소중한 것이 틀림없었다. 고니시는 잠시 생각을 정 리한 다음 말을 건넸다.
“알아낸 것이 있는가?”
드디어 겐키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형제들 의 죽음이 생각나서 마음이 아픈 것인지, 아니면 그 동안 입은 부상의 통증 때문인지 겐키의 음성은 이 어지지 않고 조금씩 끊어지는 듯했다.
“오다 가문과 아케치 가문의 내력을 조사하는 가운 데 자연히 간파쿠님의 내력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들은 풍문으로만 전해질 뿐, 정 확한 것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우연 히 센 리큐가 비밀리에 기록해 두었던 문서를 입수 하게 되었습니다. 그 문서는 조선으로 오는 도중 불 가사의한 존재에게 빼앗겨 불타 버렸습니다만, 저는 그 내용을 읽어 기억해 두었습니다.”
겐키가 입을 열었지만 흑호는 왜국말을 몰랐기 때문 에 옆에 있던 흙덩이 하나를 집어 법력을 가했다. 그 법술은 이력채음술(以力菜音術)이란 것으로 물건 에 음성을 기록하는 법술이었다.
“센 리큐라고? 센 리큐는 간파쿠님의 다도(茶道)스승이 아니었더냐?”
“..예…….”
그리고 겐키는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센 리큐는 당대의 대학자로 알려진 인물로서, 이미 오다 시대에서부터 그 이름을 떨쳤다. 그런데 센리 큐는 히데요시와 단 둘이서 다도의 밀실에서 대화를 나눈 후 느닷없이 할복을 명 받았다.
그때 히데요시와 리큐가 나눈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으나, 리큐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히데요시와 이야기를 나누기 전 그가 알고 있는 것들을 기록해 두었다. 그것이 바로 센 리큐의 문서 로, 겐키가 그의 옛집에서 훔친 것이었다.
“그러면 센 리큐가 간파쿠님께 간했던 것이 무엇인 가? 무엇을 말하였기에 간파쿠님은 그에게 죽음을 내리신 것인가?”
“거기에는 계약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미지 의 존재와 간파쿠님, 아니 나아가서는 과거의 단조 추(노부나가를 일컬음)님이 하신 계약에 이르기까 …….”
“무엇에 대한 계약인가?”
리큐의 이야기는 과거로 조금 거슬러 올라갔다. 오 다 노부나가가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기습을 받 아 죽기 불과 며칠 전, 리큐는 우연히 에이산의 승 려를 만난 일이 있었다.
에이산은 일본 역대의 불문성지였는데 오다 노부나 가에 의해 대학살을 당해 거의 멸망했고 모든 승려 들이 죽음을 당했었다. 그 승려는 에이산에서 살아 남은 미치광이 같은 승려였는데, 그는 리큐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노부나가는 영혼을 팔았다. 지옥의 악귀와 계약을 맺은 것이다. 과거 다케다 신겐, 나가이 나가마사, 이미가와 요리도모 등의 협공을 받았을 때 오다가 문은 멸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노부나가 는 자신의 영혼을 팔고 행운을 받아 그 위기를 넘겼다. 다케다 신겐이 노부나가를 치려다가 진중에서 병이 도져 죽은 것도, 노부나가가 몇 번이나 암살의 위험에서 벗어난 것도 그들 악마의 힘을 빌린 운이 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그 대가를 치러야 했으며, 그 때문에 불문의 성지로 이름높던 에이산을 쳐 없 애고 삼천 명이 넘는 승려들을 죽였다.
또한 천하통일이 다가오자 그들 악마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수족과 같던 부하들을 하나둘씩 처단하여 갔 으며, 날이 갈수록 광기에 시달려 갔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아내고 미쓰히데는 스스로, 마귀가 되어가 는 노부나가를 멸하기 위해 모반을 일으킬 것이다. 그는 이미 그 악마의 존재를 눈치챈 많은 고승들의 법력을 받았다.’
당시 센 리큐는 집권층의 자리에 올라 있지 않은, 평범한 처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소리를 미친 중의 헛소리로 여겼다. 그러나 실제로 미쓰히 데가 이유를 알 수 없는 모반을 일으켜 노부나가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그 말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노부나가는 에이산을 불태 워 수많은 승려를 학살한바 있었으며 그 이유는 아 무도 알지 못했다.
또한 노부나가가 그를 위해 일해온 많은 중신들을 별다른 이유도 없이 학살하고 쫓아냈으며, 그로써 많은 반란이 일어나게 만든 것도 사실이었다. 그 승 려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리큐는 그때부터 관 심을 가지고 천하의 대세를 살펴보았다.
미쓰히데는 일단 노부나가를 죽이고 나자 이상한 행 동을 취했다. 군비를 강화하는 대신 불문(佛門)에 막대한 자금을 시주하였으며 마치 인생에 있어 할 일을 다해 버린 것 같은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그 당시 노부나가의 휘하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자는 미 쓰히데와 지금의 간파쿠인 당시 하시바(도요토미의 당시 이름)히데요시뿐이었다.
히데요시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진군하여 미쓰히데와 일전을 벌였는데, 미쓰히데는 별반 저항 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멸망되어 거의 스스로 죽 음을 당하다시피 했다.
리큐는 이 점을 이상하게 여겼다. 미쓰히데만한 군 략과 재능을 가진 자의 최후치고 그의 마지막은 너 무도 무력했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존재의 힘이 아닐까? 미쓰히데 를 괴롭히고 그에게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도록 작용 하여 그를 멸망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그 중의 말 대로라면 노부나가에 붙어 있던 악귀가 노부나가를 죽인 데 대해 앙심을 품고 미쓰히데를 망하게 만든 것이 틀림없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한 센 리큐는 그 이후의 귀추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주목하였다. 히데요시는 미쓰히데를 물 리친 후, 거의 천하의 패자가 되었다. 단 한 명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 康)는 한동안 히데요시와 겨루어 히데요시의 공격을 계속 막아내는 데 성공하였으나 결국 히데요시와 강 화를 맺고 말았다.
히데요시의 행운은 누가 보아도 유별났다. 리큐는 이번에는 히데요시를 의심하게 되었다. 노부나가가 정말 악귀들과 그런 계약을 맺고 있었다면, 그 악귀 들은 노부나가가 세상에 없어진 지금, 히데요시와 계약을 맺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의심으로 리큐 는 히데요시의 과거를 조사했다.
히데요시의 과거도 행운의 연속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작고 힘없고 가난한 사나이는 천민으로 출생하였 다. 그러고도 노부나가의 눈에 들어 눈 깜짝할 사이 에 출세를 거듭하고 전공을 세워 노부나가 휘하의 제일의 대장으로까지 올랐다.
히데요시는 원래 노부나가의 신발 담당, 따지고 보면 하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러한 하인에게 군대를 주어 전투를 시키는 일 같은 것은 일본에서 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아무리 히데요시가 군 략이 뛰어나고 전술감각이 있다 해도, 그것은 병사 를 맡은 후에나 발휘될 수 있는 일이었다.
어찌하여 노부나가 같은 합리주의자가 히데요시 같 은 신발당번에게 전투를 선뜻 맡길 생각을 하게 되 었을까? 사람들은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신발 담 당이 된 후 맹목적인 충성을 하여 출세를 거듭한 것 에 탄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집안의 집사가 된 것도, 가노(家 奴)가 된 것도 아니다. 전투에서 공훈을 세웠기 때 문에 그토록 빠르게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떻 게 히데요시는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을까? 히데요 시는 죽을 위험을 넘기면서도 운이 너무나 좋았다.
예를 들면 가네가사키의 철수작전 때에, 이에야스와 미쓰히데는 어찌하여 목숨을 걸고 히데요시를 도왔 을까? 전국시대에 가장 재주가 뛰어났던 그 세 사 람이 힘을 합치지 않았다면 그 철수는 불가능했을 것이고 히데요시는 죽었을 터였다. 그것도 무언가의 힘이 개입한 때문은 아니었을까?
미쓰히데가 노부나가를 죽일 때, 히데요시는 서부의 강적인 모리 씨와 싸우고 있었는데, 모리 씨와의 화 평이 기적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히데요시는 대군을 끌고 미쓰히데와 싸울 수 있었다. 그때 수년에 걸쳐 전쟁을 해오던 모리 씨가 갑자기 히데요시와 화평을 한 것은 무슨 연유에서였을까?
히데요시는 어차피 미쓰히데와 싸울 수밖에 없었으 므로 화평을 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퇴각하는 길을 쳤더라면 모리 씨야말로 막대한 이득을 보았을 것이 다. 그러나 모리 씨는 힘없이 화평을 했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히데요시에게 멸망당해 버렸다. 어떤 힘이 그런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을까?
리큐의 의심은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의심을 하면 할수록 그는 더더욱 번민이 심해짐을 느꼈다. 도대 체 어디까지를 의심하고 어디까지를 진실로 보아야 할지를 모르게 되었다. 이에 리큐는 과감하게 히데 요시의 주변으로 가게 된다. 그의 학식을 이용하여 히데요시의 측근이 됨으로써 그 일을 더 조사해 보 기로 결심한 것이다.
“리큐님은…….”
겐끼는 긴 이야기가 힘겨운 듯 말을 이어나갔다.
“황송하옵게도 간파쿠님이 그런 계약을 맺은 것이 틀림없다고 단언을 내리기에 이르렀습니다. 수십년 에 걸쳐서 세세히 관찰한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그 것은 이번 전쟁의 원인이 되었습니다만…………….”
고니시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말을 듣고 있는 것인지, 앉은 채 정신이 나가 버린 것인지 모를 정도 였다. 그러나 겐키는 꾹 참으며 계속 말했다. 그는 말해야만 했다. 불경이 되었건, 반역이 되었건 이는 자신이 두 명의 형제의 목숨을 바치며 알아낸 정보 였다.
“간파쿠님은 아이를 가지실 수 없다고 씌어 있었습 니다. 그런데도 쓰루마쓰님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그 악귀들과의 계약에 의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 대가로 그 악귀들은 거대한 피를 볼 일, 말하자면 이 난리를 일으키도록 부추긴 것입니다.”
“그만… 그만 하여라……. 믿을 수가…… 믿을 수 가 없다!”
고니시는 거의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도대체 자신은 누구를 위해 싸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싸운 것이란 말인가? 그러나 겐키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간파쿠님으로서도 전쟁을 일으키는 것만은 무리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간파쿠님께 그 악귀들이 끊 임없이 출몰하여 약속을 지키라 한다 했습니다. 그 렇지 않으면 쓰루마쓰공을 도로 앗아가겠다고 말입 니다. 센 리큐님은 그러면 안 된다고 여기시고, 마 지막으로 그러한 모든 악귀와의 계약을 무효로 돌릴 것과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말을 간파쿠님께 전하려 하셨습니다. 그 말을 하기 직전, 써서 남겨 둔 것이 바로 제가 읽은 문서입니다…………..”
“그럴 수가……”
고니시가 몸을 부르르 떨자 겐키가 말했다.
“그 이후의 일은 아시겠지요? 센 리큐는 역시 간파 쿠님의 비위를 거슬려 다실에서 이야기를 나눈 직후 자결을 명 받고 죽었습니다. 그것이 작년(1591년) 2월 말입니다. 그리고 쓰루마쓰님은 작년 8월에 갑자기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직후부터 간파쿠님 은 조선 출병을 결심하셨고, 결국 전쟁이 일어났습 니다. 저는 인자입니다. 정보를 전할 때 그 내용을 잊지 않으며, 이 내용 역시 제가 읽은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센 리큐님의 글을 믿 습니다. 믿어지지 않지만 믿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 입니다…………..”
그것은 고니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에게 나타나는 악마들을 보고 혹시나 하여 조사를 시킨 것이지만 그 결과는 너무도 믿기 힘든 것이었다. 아니, 누구 에게 말조차 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모든 의문이 풀리게 된다. 그 때문에 겐 키는 믿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고, 고니시의 생각 또한 그러했다.
고니시가 멍하니 있자 겐키는 천천히 고니시에게 절 을 올렸다.
“제가 아는 것은 이로써 모두 전달했습니다. 제가 돌아오는 길에도 악귀들이 저를 끊임없이 습격했으 며, 두 형제는 죽었습니다. 이 또한 크나큰 증거가 된다고 믿습니다.”
그것도 그러했다. 고니시 본인만 해도 이미 수없는 유혹과 협박에 시달리고 있지 않는가?
겐키는 작은 칼을 꺼내어 조용히 자신의 배에 대었 다. 이렇게 중대한 기밀을 조사한 자는 일을 마친 후에는 자결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말이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고니시는 멍한 와 중에도 겐키를 말렸다.
“안 된다. 너는 아직 할 일이 있다.”
겐키는 주인이 제지하자 다시 공손히 엎드렸다. 항 상 장난스럽고 어딘가 조롱하는 듯한 태도를 지니던 겐키도 지금만큼은 엄숙하기 한이 없었다. 고니시는 혼자 무엇인가 한참 생각하더니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이 전쟁은 미친 짓이야. 미친 짓………… 그 만두어야 한다. 반드시 그만두어야…….”
중얼거리다가 고니시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은 듯 겐 키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겐키! 이 일은 절대 말하지 말라. 그리고 너에게 는 아직 할 일이 있다.”
고니시가 자신을 믿어준다고 여기자 겐키는 마음이 조금 격동되었다. 인자는 보통 소모품에 지나지 않 았다. 일을 마치고 비밀이 샐 우려가 있으면 자결을 명하거나 죽이면 그만이다. 그 대신 인자의 고향 가 족 친지들은 그가 죽은 보수로 더욱 편하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겐키도 죽는 것이 좋지는 않았고, 고니시가 자기를 믿고 다음 일을 또 맡기려 한다는 것이 은근히 기뻤다.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아직 큰 적이 있다. 전투를 그만두려 해도 우리는 지금 같아서는 도망칠 수도 없다. 바다 의 제해권이 조선군의 손아귀에 있기 때문이다. 그 것이 누구인지 아느냐?”
“..예……………. 이순신이라는 무서운 장수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자가 문제다. 너는 지금부터 모든 수 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자를 암살해라.”
만약 흑호가 고니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면 놀라서 펄쩍 뛰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에서도 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흑 호는 멍하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흑호는 그들의 이야기가 무슨 왜국의 정보 같은 것이라 는 착각을 하고 있었고 술법을 쓰는 것 또한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마수가 저자를 해치려 하지 않았다면 아예 관심도 없었을 터였다. 오히려 흑호는 그동안 내내 그자의 주위를 경계함으로써 마수들이 다시 접근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 마디 로 겐키의 목숨은 흑호가 구해준 것이었으나, 겐키 는 흑호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이순신을 암살 하려 하고 있었다.
얄궂은 운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흑호는 겐 키가 사라지자 아무 생각 없이 술법을 거두고 그동 안의 대화가 담긴 흙덩이를 아무렇게나 집어넣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가 고니시에게 보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겐키는 밖에서 인기척이 있자 곧 스르르 사라지듯 모습을 감추었고, 고니시는 아직도 조금 얼빠진 듯한 표정으로 외쳤다.
“무슨 일이냐?”
겐키가 사라지자 흑호도 이젠 볼일을 다 보았다 여 기고는 나가려 했다. 그런데 고니시는 달려들어온 군졸의 보고를 듣고는 급히 밖으로 나갔다.
그 장면을 보고 흑호도 조금 호기심이 생겨서 토둔 법을 써서 고니시의 뒤를 따라갔다. 고니시는 부대 의 외곽 쪽에 위치한, 삼엄하게 경비를 서는 어느 집 한 채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서자 부하장교가 고니시에게 설명을 했다.
“우리의 방어상황을 정탐하기 위해 숨어 들어온 자 들입니다. 매우 기민해서 잡기가 몹시 힘들었습니 다.”
“조선인들인가?”
“그렇습니다.”
고니시의 뒤를 따라 흑호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 흑 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곳에는 다른 몇 명의 조선인과 함께 꽁꽁 묶은 강효식을 왜군들 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어라라! 저건 은동이 아버지 아녀! 저 사람이 여 기 왜 있담!’
흑호가 놀라서 보고 있는 사이 고니시는 조선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훑어보았다. 모두 다섯 명이 잡혀 있었는데 두 명은 머리카락이 없는 것으로 보아 승 려인 것 같았고 두 명은 젊은이였다. 그리고 강효식 이 그 중 나이가 가장 많았다.
고니시는 강효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통역을 불렀다.
원래 흑호는 성질이 불 같아 당장이라도 뛰어나가 모두 때려 죽여버리고 강효식을 구하고 싶었다. 그 러나 그때 갑자기 흑호의 머릿속에는 ‘인간의 일에 는 절대로 직접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신계의 전 언이 떠올랐다.
‘제………제기럴!’
흑호는 잠시 고민했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 까? 당장이라도 뛰어들어서 강효식을 구해내야 할 까 아니면 참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흑호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은동이를 데리고 오면 되는 것이 다! 은동이는 인간이니 인간의 일에 개입할 수 있 지 않은가?
은동이는 자신의 아버지인 강효식이 붙잡혀 있는 것 을 그냥 두고보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은동이는 천하장사의 신력을 지니고 있으니 여기 있는 자들 몇 명쯤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빨리 가자!’
흑호는 결심을 굳히고 재빨리 다시 좌수영으로 돌아 가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흑호는 고니시와 강효식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들을 수 없었으며 고니 시와 겐키의 대화를 흙덩이에 기록했던 일마저도 까 맣게 잊어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