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5권 – 8화 : 역귀와의 싸움
역귀와의 싸움
한편 태을사자는 금강산에서 다른 저승사자들과 함 께 급히 한 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상해 보이는 기운을 감지한 저승사자 한 명의 보고를 받았기 때 문이다.
“려기입니다.”
과연 그 사자의 말대로 금강산 한 중턱 자락의 비탈 진 산모퉁이에서 검은 기운이 솟아나오고 있었다. 물론 보통 사람들의 눈으로 볼 수는 없는 요기였지 만, 태을사자 등의 저승사자들은 금방 알 수 있었 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몇 명의 승려가 그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행여 인간들의 눈 에 띄면 안 되지 않습니까?”
또 다른 저승사자 한 명이 말했다. 태을사자는 의아 해졌다. 도대체 누가 이 깊은 곳까지 왔단 말인가? 태을사자는 그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가 보았다. 그 런데 그 사람은 바로 유정, 즉 사명대사의 제자인 무애였던 것이다. 그는 험한 산길을 오르면서도 계 속 흥얼거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험디험한 이 산중에 무슨 원이 그리 쌓여 검은 기 운이 극성인가. 기다리게 기다리게. 조금만 더 기다 리게. 염불공덕 해탈공덕 극락왕생 될 것이니 기다 리게 기다리게. 금방 가네, 금방 가……………”
무애는 마치 무당이 굿거리 가락을 풀 듯이 흥얼흥 얼 그 특유의 노래를 부르면서 몇 명의 승려들에게 독경 도구를 들리고 산길을 계속 오르고 있었다. 아 마도 무애는 표훈사에서 우연히 산에서 치솟는 려기 를 느낀 모양이었다.
그러나 무애는 그것이 마수가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 지 않았으며, 역병으로 죽은 자의 원한이 쌓여 만들 어지는 기운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염불로 그 원한 을 없애주기 위해 산을 올라 그 기운을 찾아가는 것 이었다.
태을사자로서는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저승사자 들은 인간의 눈에 띄지 않을 것이지만, 역귀나 마수들이 저들에게 패악을 부리거나 인질로 삼는다면 어 떻게 할 것인가? 태을사자의 일은 엄격하게 인간의 일에 간섭해서는 안 되게 규정지어 있었으므로, 인 간들이 엮이게 된다면 그대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 다.
‘이거 야단이로군. 인간들과 접촉도 할 수 없으니. 그렇다고 저들에게 내려가 달라고 할 수도 없고……’
분명 여역의 근원인 역귀는 저 기운이 솟아나는 곳 에 있었다. 지금 역귀는 자신이 쫓긴다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놈을 잡기는 더더욱 어려워질 것이 분명했다. 할 수 없이 태을사 자는 은동을 떠올렸다.
‘은동이를 불러 저 승려들을 다른 곳으로 가게 만들자. 은동이는 인간사에 관여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태을사자는 통천갑마의 주문을 외 우기 시작했다. 원래는 명나라에 갔을 때 쓰려 한 주문이었지만 지금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순간이 었다.
좌수영 앞바다 돌산도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있던 은 동은 갑자기 어지러움을 느끼면서 그 자리에 털썩 넘어졌다. 오엽이가 놀라면서 얼른 은동이를 일으켰 지만 은동은 눈이 뒤집힌 채 정신을 차릴 줄 몰랐 다. 환자들은 큰일이 났다고 아우성을 쳤다. 멀리 금강산에 가 있는 태을사자가 주문을 외워 은동이의 혼을 잠시 데리고 간 사실을 그들이 알 리가 없었으니…….
오엽이는 의원 나으리가 너무 과로하여 저리 되었다 고 슬퍼하며 다른 사람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 다. 오엽이는 좀 건장한 난민 두어 명의 도움을 받 아 은동의 몸을 좌수영으로 옮겼다.
이순신과 나대용, 정운 등도 은동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놀랐다. 더구나 이순신은 은동이 무지한 난민 들을 치료해 주다가 과로하여 쓰러졌다는 말을 듣고 크게 감동을 받은 듯, 은동을 극진히 간호하라는 명 을 내렸다.
은동은 좌수영의 거처로 옮겨졌고 오엽의 극진한 간 호를 받게 되었는다. 오엽은 은동의 곁에 붙어서 밤 이고 낮이고 떠나지 않았다.
단걸음에 둔갑법을 써서 전라도까지 내달아 온 흑호 가 좌수영으로 뛰어든 것은 은동이 쓰러진 뒤의 일 이었다. 그리고 오엽이는 항상 은동의 옆을 떠나지 않았었는데, 그때는 잠시 밖으로 이유도 없이 나갔 다. 오엽이 나간 직후 흑호는 둔갑법을 쓴 채로 거 처에 들어가면서 소리쳤다.
“야야, 은동아! 큰일여! 네 아버지가………….”
그러다가 흑호는 은동이 기운을 잃고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고는 크게 놀랐다.
‘어이쿠! 이거 은동이가 아픈가?’
그러나 가만히 보니 은동은 아픈 게 아니라 혼이 빠 져나가 있는 상태 같았다. 그리고 조금 더 살펴보니 은동의 발목에는 태사자가 주었던 통천갑마가 매 어져 있었다.
‘으흠, 그럼 이거 태을사자가 은동이 힘이 필요해서 데리고 갔구먼. 아이구야, 왜 하필 이럴 때에…………….’
자칫 지체하다가는 강효식이 고니시에게 죽을 것 같 았기 때문에 서둘러 왔는데, 하필 또 이런 때 은동 이의 혼은 태을사자가 데리고 갔다니. 흑호는 답답 해서 가슴을 주먹으로 마구 두들겼다.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흑호는 침착하려고 했다. 당장이라도 태을사자와 은동이를 찾아가고 싶었지만, 눈여겨보니 은동의 몸과 이순신 을 지키는 자가 없었다. 마수 하나라도 들이닥치면 이순신만이 아니라 은동이의 몸까지 날아갈 판이라 흑호는 결정 내리기가 몹시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흑호는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필사적으 로 돌린 끝에 은동에게 주었던 을척을 꺼내 흔들었 다. 그러자 다시 독각도깨비가 나타났다.
“어이구, 주인이 자주 바뀌네유…….”
놈이 나타나자마자 능청을 피웠지만 흑호가 냅다 소 리를 질렀다.
“이놈! 여기서 눈 한 번 떼지 말고 잘 지켜. 그러 구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면 바로 나를 찾아 전달하 구!”
“뭘 지키라는 말씀인뎁쇼?”
“여기 말여! 그리고 만의 하나 마기나 요기가 느껴 지면 당장 나에게 기별하구. 내가 올 때꺼정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막으란 말여! 도깨비들이나 뭐나 있는 대로 다 불러서!”
“그런데 어디로 기별을 하면 되는뎁쇼?”
“이놈아! 나두 몰러! 네가 찾아내!”
흑호는 그 말만 남기고는 은동의 몸을 안고 퍼뜩 둔 갑술을 써서 사라져 버렸다. 처음에는 은동의 몸을 놓고 갈까 했지만 그러면 은동을 찾은 다음에 다시 은동의 혼을 데리고 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흑호는 은동의 몸을 안고 가기로 했다. 혼자 남은 독각도깨비는 눈만 끔벅거리면서 텅 빈 방을 둘러보 다가 중얼거렸다.
“지켜? 기냥 지키면 되는 건가? 제기럴, 이거 지루 하구먼.”
그때 은동이 있는 곳의 방문 밖에서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았다. 독각도깨비 는 원래 겁이 별로 없었지만, 밖에서 느껴지는 무엇 인가는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독각도깨비는 겁이 났지만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슬며시 방문 쪽으로 다가가 문 틈으로 눈을 들이밀었다.
은동은 한동안 어리둥절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 신은 분명 돌산도의 난민들을 치료해 주고 있을 참 이었는데, 지금 눈에 보이는 풍경은 돌산도의 모습 이 아니었다.
‘뭘까? 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은동이 잠시 어리둥절해 있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동아.”
은동이 고개를 들어보니 태을사자의 음성이었다. 은 동은 그제야 태을사자가 자신을 이리로 갑자기 불러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자님, 무슨 일인가요? 아이구…… 이렇게 갑자기 부르면……”
“미안하구나. 그러나 일이 급해서 말이다.”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조금 사정이 급하구나…..”
그러면서 태을사자는 급히 전심법으로 은동에게 지 금의 상황을 일러주었다. ‘려’를 추적하여 이제 막 잡으려는 순간인데, 승려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그 리로 가고 있으니 막아 달라는 사정을 듣자, 은동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승 려들의 모습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자 은동은 앗 하며 소리를 쳤다.
“어, 무애스님이에요. 제 은인이고 유정스님의 제자 이신데…………….”
“그러냐? 어찌 되었건 네가 좀 애써주어야겠다. 저 스님들이 그리로 가면 위험하단다. 더구나 자칫하면 려를 놓칠 우려도 있고…………….”
“그럼 가야죠.”
은동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은동의 몸은 영혼만 있었기 때문에 몸을 일으키는 순간 몸이 공중에 붕 떴다.
그 모양새를 보고 태을사자가 탄식했다.
“아차!”
“예?”
“너는 지금 영혼만 있지 않으냐? 그러면 말을 걸어 보아야 저 스님들이 알아듣지 못할 것인데…”
“아이구, 그러면 어떻게 하죠?”
순간 태을사자는 머리를 굴렸다. 지금 은동의 몸을 가지고 오기에는 시간이 늦었다. 승려들은 조금만 있으면 려기가 뿜어져 나오는 동굴에 들어갈 판이었 던 것이다. 태을사자는 좀 불안하기는 했지만 과감 한 결단을 내렸다.
“할 수 없다. 저 승려들보다 우리가 먼저 치고 들어 간다! 은동아, 우리는 인간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수 없으니 네가 저 승려들을 들어가지 못하게 해라. 어떻게든 말이다. 알겠니?”
“네……? 네, 알았어요……”
그러자 태을사자는 사방에 모인 저승사자들에게 신 호를 하며 쏜살같이 동굴 안으로 치고 들어갔다. 그 리고 은동이도 급히 무애의 뒤를 따라갔다. 은동이 는 비록 영혼만 빠져나가 있었지만 술법이 그리 능 하지 않아서 무애의 뒤를 따라잡는 것만도 시간이 조금 걸렸다. 간신히 무애를 따라잡은 은동은 무애 의 앞을 막아서고 소리를 쳤다.
“가면 안 돼요! 스님! 가면 안 돼요!”
그러나 무애와 승려들의 몸은 은동의 앞으로 거침없 이 다가왔다. 은동의 영혼이 보이지 않았으니 당연 한 일이었다. 앞을 그냥 막아서고 싶었지만 그러면 자신이 승려들의 몸을 쑥 그대로 통과하여 지나쳐 버리거나 승려들의 혼과 부딪칠지도 몰라 두려워서 은동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아이구, 어떻게 하지?’
은동은 발만 구르다가 갑자기 묘안이 떠올랐다. 은 동은 오른손에서 육척홍창을 쏙 뽑아낸 다음 힘을 주어 주변에 있는 바위를 툭 건드려 보았다. 육척홍 창도 물론 영적인 물건이었지만 거기에는 법력이 깃 들어 있었기 때문에 힘을 받은 바위가 덜컥 하고 움 직였다.
은동은 됐다 싶어서 얼른 무애의 앞으로 돌아가서 육척홍창으로 땅을 파서 흙을 휙 뿌렸다. 난데없이 흙 세례를 받은 무애와 승려들은 깜짝 놀랐다.
“이게 뭐지?”
은동은 다시 흙을 뿌렸다. 그러자 겁 많은 승려 하나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이 밝은 대낮에 무슨 변고입니까? 사형? 귀신의 장난 아닐까요?”
‘귀신이라. 하긴 나는 지금 영혼만 있으니 귀신이나 마찬가지겠구나. 맞아요, 스님. 귀신 장난이에요. 그 러니 제발 가지 말라구요.’
은동은 승려들에 겁을 주려고 다시 휙휙 여러 번 흙 을 뿌려 던졌다. 그러자 승려들은 겁에 질렸으나 어 느 정도 법력이 있는 무애는 한바탕 껄껄 웃으며 말 했다.
“귀신이면 또 우리를 어쩌겠느냐? 불법에 몸담은 승려를 감히 귀신 따위가 해칠 수 있을 것 같으 냐?”
“하지만…………….”
“어차피 우리는 돌림병의 사악한 기운을 막으러 가는 것인데, 그 정도 일로 겁을 먹어서야 쓰겠느냐? 껄껄…….”
그러면서 무애는 겁도 없이 계속 동굴로 걸어가는 것이다. 이를 본 은동은 애가 탔다. 안 그래도 벌써 동굴 안에서는 사람에게는 보이거나 들리지 않을 것 이지만, 호통소리와 법력을 쓰는 기운이 솟구쳐 나 오고 있었다.
유정스님이나 김덕령, 곽재우 정도라면 몰라도 무애 정도의 법력으로는 그 싸움에 말려들었다가는 즉사 해 버리고 말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운동은 다시 무 애의 앞에 서서 육척홍창으로 땅에 글자를 생기기 시작했다.
“사…… 사형! 무애 사형! 저………… 저기! 저기!”
땅바닥에 저절로 써지는 글자를 먼저 발견한 승려 하나가 갑자기 그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소리를 질렀 다. 어지간히 담력이 큰 무애도 그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정말 땅바닥에 저절로 글씨가 새겨지고 있 는 것이 아닌가!
“불입(不入)? 가면 안 된다고?”
“무애 사형! 돌아가십시다! 이런 일은 본 적이 없 다구요!”
그러나 무애는 흥 하고 크게 코웃음을 치고는 그 자리에 단단히 버티고 서서 호령을 했다.
“너는 누구냐? 무엇인데 앞길을 막는 것이냐!”
‘음냐……………? 나는 은동이에요! 은동이!’
그러나 은동은 물론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조금 생각해보다가 은동은 꾀를 내어 이렇게 썼다.
– 나는 산신령이다(我則山神).
그것을 보고 무애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산신령이라면 어찌하여 이런 해괴한 짓을 하시오?”
은동은 다시 즉각 대답했다.
–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서다.
“정말 산신령이시오?”
무애의 사제로 보이는 다른 승려가 말하자 은동은 은근히 재미가 생겨서 다시 썼다.
– 대낮에 잡귀가 나오는 것을 보았느냐?
“그건 그렇소. 사형, 산신령이 맞는 것 같구려.”
“그런데 무슨 위험이 있다는 것이오?”
무애가 묻자 은동은 다시 급하게 휘갈겨 썼다.
– 이곳에서 일다경(一茶頃 : 차 한 잔 마실 시간)만 기다리면 가르쳐 주마.
“여기서 기다리라고요?”
– 그렇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이오?”
그 질문을 받자 은동은 답답해졌다.
‘아이구, 답답해라! 어떻게 그걸 다 이야기한단 말이에요!’
마수의 이야기를 다 해줄 시간도 없었을 뿐더러 그 런 것을 이야기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은동은 할 수 없이 다시 말을 지어냈다.
– 지금 저 앞에서 산신들과 요물간의 싸움이 있다. 그러나 너희는 끼어들 수 없으며 위험하니 일다경만 기다려라.
대강 지어낸 말이었지만 무애는 그것을 보고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우선 자신들도 심상치 않 은 기운을 느끼고 그것을 물리치려 온 것이 아닌 가?
‘혹시 이 존재가 요물은 아닐까?’
하지만 만약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존재가 요물이 라면 자신들을 벌써 해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무애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이 존재는 악의를 가진 것 같지는 않았다.
“좋소, 우리가 여기서 일다경만 기다리리다. 그러나 일다경이 지나도 소식이 없으면 요물이 이기고 있는 것을 생각하고 우리도 들어가겠소. 요물이건 마귀건 부처님의 법력 앞에는 당할 수 없으리라 여기오.”
그 말을 듣고 은동은 아차 싶었다. 일다경이 아니라 한 사오다경 정도로 해둘 것을…………. 하지만 이미 한 말을 물리는 것은 산신령답지 않았기 때문에 은동은 짧게 답했다.
– 좋다.
그러자 무애는 그 자리에 승려들을 앉게 한 다음 법 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뒤의 승려들은 기가 질리고 무섭기도 하여 벌벌 떨고 있었으나 무애는 태연했 다. 그러자 은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무애 일행을 잡아 놓았으니 다행이라 여기면서…………….
그런데 다음 순간, 동굴 안에서 저승사자 하나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튀어나왔다. 은동은 그 모습을 보 고 태을사자가 아닌가 하여 깜짝 놀라 몸을 이동시 켜갔다.
그 사자는 힘을 잃고 허공에 둥둥 떠 있었는데 다행 히 태을사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사자의 모습은 정말 끔찍했다. 인간처럼 피를 흘리는 것은 아니었 지만, 온몸에 조그마한 구멍이 잔뜩 뚫려 벌집 같이 되어 있는 모습은 정말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아이구, 저 안의 마수가 굉장히 센가 보다! 태을사 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지?’
은동은 부상당한 사자에게 마수에 대해 물어보려 했 지만, 그 사자는 그럴 겨를도 없이 몸을 부르르 떨 고 투명해지며 사라져갔다. 소멸되어 버린 것이다.
은동은 두려웠지만 더 이상 방관할 수가 없어서 육척홍창을 다시 몸 안으로 회수하고 유화궁을 꺼냈 다.
은동이 혼만 빠져 왔어도 은동이 지닌 물건 중 영력 을 지닌 물건은 그대로 따라왔다. 즉, 원래 사계의 물건이었던 화수대와 그 안에 든 물건 중 사계의 두 루마리, 유화궁 등등은 그냥 따라온 것이다. 물론 생계에서 훔쳐온 약장 등의 물건은 없어져 있었다.
은동은 화수대 안에서 을척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 았지만 그냥 을척도 생계의 물건이니 그랬겠다 여기 고 유화궁을 꺼내 들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은동은 깜짝 놀랐다. 그 동굴의 안은 밖에서 보기보다 무척 넓었는데, 그 안에서는 지독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태을사자 가 데려온 대여섯 명의 저승사자들은 이미 모조리 중상을 입고 한편 구석에 떠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태을사자는 백아검을 쥐고 벽을 등지고 있었는데 그 얼굴에도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또한 그 앞에는 거의 홍두오공만큼이나 거대한 검은 덩어리가 떠 있었는데 그 덩어리는 인간과 비슷해 보였다. 은동은 놀라서 잠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용기를 내려 애썼다. 지난번 한산대첩 때 이후로 은 동의 용기는 퍽 줄어들었지만 은동은 억지로 애를 써서 증성악신인의 주술을 써서 화살 한 대를 손에 쥐었다.
문득 은동이 동굴에 들어온 것을 보고 태을사자는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은동아! 어서 나가라! 저놈은……!”
“염려 마세요!”
은동은 소리를 치면서 재빨리 화살을 쏘아 붙였다.
비록 성성대룡의 술수는 다 써 버렸지만 이 한방으로 놈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은동의 화살은 놈에게 맞았지만 놈의 몸을 그대로 스르르 통과해 버리지를 않는가. 그 자리에 구멍도 나지 않았고, 놈은 마치 아무 것도 맞지 않았다는 듯 멀쩡한 모습이었다.
은동은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려는 은동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음산한 목소리로 웃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놈은 입이 없는데도 웃음소리를 낸 것이 다. 그것도 전심법 같은 마음으로 울리는 소리가 아 니라 실제의 소리를…………. 마치 그 소리는 놈의 입이 아니라 온몸에서 울려퍼지는 듯했고, 한 놈에게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여럿이 내는 소리처럼 웃음소리 에 층이 져 있었다.
은동은 놈이 노려보자 몸이 얼어붙을 것 같았지만놈과의 거리가 한참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태을사자에게 소리를 쳤다.
“사자님! 전 괜찮아요!”
“은동아! 어서 피해! 네가 당할 놈이 아니다! 놈의 몸은…….”
순간 놈은 은동을 향해 팔을 주욱 뻗었다. 그런데 그 팔은 순식간에 수없이 많은 조각으로 나뉘어지면 서 은동을 향해 돌개바람처럼 달려드는 것이었다!
은동은 기겁을 하여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지만 자신 도 모르는 새 비추무나리의 술법을 외웠다.
‘비추무나리!’
주문을 외운 지 찰나도 지나지 않은 눈 깜짝할 사 이, 은동의 몸에 수없이 많은 타격이 와르르 쏟아졌다. 하나하나의 타격도 작지 않은 것이었는데, 은동의 온몸에 무수한 타격이 바늘처럼 파고들며 쏟아져 들어왔다.
려는 하나의 마수로 된 존재가 아니었다. 놈은 수억 마리의 작고 작은 벌레(려충:?蟲)같은 것이 모여 서 이루어진 존재였다. 그러니 화살이나 검 같은 무 기들이 전혀 소용없는 것이 당연했고 법력이 막강한 태을사자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추무나리의 방어를 입고 있어 직접 타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은동의 몸은 거의 바위벽에 묻힐 정도로 밀려나 버렸고, 은동은 기절할 듯이 놀랐다.
“은동아!”
태을사자는 백아검을 휘두르며 소맷자락을 떨쳐내었 다. 그러자 검에서 안개 같은 것이 뭉텅 쏟아져나와 은동의 주변에 맴돌던 려충들을 밀어냈다. 그 일격으로 수백마리의 려충들이 죽어 땅에 까맣게 떨어진뒤 곧바로 소멸되었으나, 겨우 놈의 털 하나를 뽑은 정도밖에는 타격을 주지 못했다.
그 사이 태을사자는 번개같이 은동의 몸을 끼고 원 래의 위치, 즉 다른 부상 입은 저승사자들의 앞을 막아선 자세로 돌아왔다.
“다치지는 않았느냐?”
“…예∙∙∙∙∙∙, 술법으로………….”
그러나 려는 은동이 자신의 일격을 몸으로 버텨낸 것을 보고 호기심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이상하게도 두 가지의 말이 동시에 섞여서 들려왔다.
– 거 대단하군!
– 꼬마녀석이 상당하구나.
려가 잠시 주춤하자 태을사자가 전심법으로 속삭였다.
‘이거 야단이구나. 놈의 법력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몸이 수억 마리의 벌레로 되어 있으니 모 두 없앨 방도가 없다. 역귀에서 흑역귀로 변한 것이 다시 충역귀(蟲疫鬼)로까지 간 놈이야. 너 그런데 왜 성성대룡의 술법을 쓰지 않았느냐?’
그러자 은동도 급히 마음속으로 외쳤다.
‘마수들과 싸우느라 이미 다 써버렸어요!’
‘큰일이구나. 놈을 한번에 해치우려면 불로 태워야 하는데…………. 하다 못해 묵학선만 있었어도…..!
태을사자는 사계의 음기로 이루어진 존재라 불과는 상극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불을 피울 수도 없었으며 불로 이루어진 술수를 쓰지도 못하는 것이다. 염왕령을 사용하여 저승사자들을 더 불러모은다 해 도 희생자만 늘어날 뿐,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흑호라면 생계의 존재이니 불을 쓸 수 있지 않을 까? 흑호가 있었다면…………….’
태을사자는 하는 수 없이 부상을 입은 저승사자 중 비교적 상세가 경미한 자 하나에게 급히 말했다.
“자네, 어서 조선 땅 금수의 우두머리인 흑호를 찾 아오게! 내 말을 한다면 즉시 달려올 것이니, 어서 서두르게!”
부상 입은 저승사자가 즉시 나가려 하자 려는 다시 소리쳤다.
– 어딜 도망 가려구!
려는 다시 우르르 수없이 많은 려충을 저승사자의 뒤로 내쏘았으나 태을사자는 다시 예의 검은 안개를 내쏘아 간신히 놈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시간이라도 끌자!’
태을사자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백아검을 평소와는 다르게 무시무시한 속도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는 대뜸 은동에게 속삭였다.
“은동아, 내 뒤에 바짝 붙어라!”
말을 마치기 무섭게 태을사자는 왼손으로 무시무시 한 검은 안개를 연속 세 방이나 내쏘았다. 엄청난 풍압에 밀려 려가 잠시 비틀하자 태을사자는 출구 쪽을 막아서고는 더욱 무섭게 백아검을 회전시켰다. 려는 화가 난 듯 려충을 태을사자에게 내쏘며 소리 를 질렀다.
– 썩 비키지 못해!
– 모조리 없애 주겠다!
그러나 태을사자는 있는 힘을 다해 회전시킨 백아검 으로 려의 공격을 막았다. 팅팅팅 하며 콩 볶은 소 리 같은 것이 들리면서 삽시간에 수백 마리의 려충 이 태을사자의 검을 뚫지 못하고 잘라지고 부서져서 사라져 갔다.
– 훌륭한 수법이군! 그러나 이것도 당해내나 보 자!
려는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몸 전체를 위쪽으로 솟 구쳐 올렸다. 뭉클하며 려의 몸이 마치 살아 있는 액체처럼 꿈틀하더? 삽시간에 일곱 줄기로 나뉘어져 사방에서 태을사자를 덮쳐왔다.
그러나 태을사자도 지지 않고 있는 법력을 모조리 백아검에 끌어넣어 허공에 백아검을 던지면서 양손 으로 검은 안개를 내쏘았다. 두 줄기의 려충이 안개 에 밀려 흩어지면서 다섯 줄기의 려충이 덮쳐 들었 지만 백아검은 회전하면서 태을사자의 몸 전체를 싸 고 마치 위성처럼 돌며 나머지의 공격을 퉁겨내었 다.
그 뒤에 숨은 은동도 열심히 유화궁을 휘둘러 몇 마 리 스며드는 려충들을 쳐냈다. 비록 려의 공격을 다 시 막아내었지만 법력의 소모가 막심하여 태을사자 는 안색이 점차 희게 변해갔다. 그것을 보고 려는 껄껄 웃으며 층진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 그래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겠나?
– 저놈 법력은 이제껏 내가 본 자들 중 가장 높구나.
– 하지만 나에게는 이길 수 없어.
– 어서 비키는 것이 어때?
그러나 비록 법력의 소모가 커서 얼굴빛이 변했지만 태을사자의 눈은 번득이며 빛나고 있었다. 태을사자 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두 가지 생각만이 맴돌았다. 첫 번째는 시간을 끌어 흑호가 오기를 기다려야 한 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놈에게서 어떻게든 마수들 이 꾸미는 음모를 알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순간 태을사자는 려의 모습을 보면서 떠오르는 것이 있었 다.
‘놈은 수많은 려충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그렇다 면 ・・・・・・ . ‘
그리 생각한 태을사자는 난데없이 려에게 소리쳐 물 었다.
“네 놈이 조선땅에 역병을 일으킨 놈이 맞지?”
– 무슨 소리냐?
– 시간을 끌려는 것이냐?
– 대답할 수 없다!
거의 동시에 나온 대답이었지만 태을사자는 놈에게 서 조금 갈라진 대답이 나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네 놈은 조선땅에 온 마수들 중 가장 낮은 녀석이 지?”
그러자 처음으로 엇갈린 대답이 나왔다.
– 무엇이? 저놈이!
– 대답할 수 없다!
– 아니다. 나는..!
‘틀림없다! 놈은 수없이 많은 존재가 쌓여서 된 놈. 당연히 의식이 여러 개 있을 것이다. 놈을 혼란시켜 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러 면 놈은 멍청한 짓밖에 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의 의식으로 합쳐지면 또렷한 생각을 하겠지만 여럿인 상태에서는 분별이 없을 것이다!’
“네 놈은 너무 약하고 잡다한 놈이어서 마계의 계획 같은 것은 하나도 모르겠구나!”
– 무슨 소리냐! 나도 다 알고 있다!
– 넘어가지 마라! 놈은 우릴 이용하려고 한다!
– 내가 약하다고? 맛 좀 볼 테냐?
이번 태을사자의 물음에 놈에게서는 세 가지 대답이 나왔다. 그리고 한 줄기의 공격이 태을사자에게 날 아왔지만 일부분만의 반응이어서인지 공격이 그리 강하지는 않았다. 려의 공격을 막아낸 태을사자는 다시 소리쳤다.
“하나로 뭉쳐서 공격을 해야 효력이 있을걸!”
– 맞아! 그렇다!
– 아니야! 적의 말은 믿을 수 없다!
– 적이지만 말은 맞다!
– 놈은 우리를 노리는 거라구!
려의 의견은 점점 갈라지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도 좋은 결과였다. 태을사자는 조금만 더 하면 놈에게 서 정보까지도 얻어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태을사자는 조금 더 넘겨짚기로 했다.
“네놈들이 병을 다 퍼뜨린 다음이면 아마 모두 죽음 을 당할걸? 흑무유자 놈이 너와 조선을 바꾸기로 했단 말이다.”
– 헛소리 마라!
-흑무유자님이 어찌 너 같은 놈과 거래를 한단 말이냐!
– 어어…… 그럴 리가…………….
다시 조금 혼란된 소리가 나오는 것을 듣고 태을사자는 이번에는 틈도 주지 않고 외쳤다.
“흑무유자는 이미 마계에서 쫓겨나 갈 데가 없는 처 지이다! 놈은 마계로 돌아가는 대신 너희들 마수들 을 모두 우리에게 넘겨주기로 했단 말이다!”
– 말도 안 된다! 말도 안 된다!
– 멍청한 소리!
– 저놈이 수작을 부리는 거다! 믿지 마라!
– 흑무유자님은 우리와 함께 새 세상을 만들기…….
놈들 중의 한 줄기가 악에 받쳤는지 소리를 지르는 것을 태을사자는 놓치지 않았다.
“인간들의 영혼을 모아 새 세상을 만든단 거냐? 영 혼을 증식시켜서? 그게 말이 된다고 여기나?”
– 닥쳐!
– 네 놈이 뭘 안다고 그러냐?
– 증식시키는 건 아니지만 힘을 떼어 모으면 된다!
– 새 세상은 반드시 온다! 반드시 만들어져!
려는 점점 혼란스러워져서 의견이 분분해지는 것 같았다.
‘힘을 떼어 모은다고? 그렇구나! 역시…………!’
“떼어 모은 힘이 너희에게 있느냐? 흑무유자가 모조리 가지고 말 것이다!”
– 닥쳐라! 그분을 욕되게 하면・・・・・・!
– 힘은 이미 배분되었다!
– 더 이상의 힘은………….. 영혼의 조각은 그분이 가지고 계시다!
– 네 놈 따위는 평생을 찾아도 못 찾을 것이다!
간신히 들려온 작은 소리를 듣고 태을사자는 흥분했 다.
‘놈들이 얻어낸 영혼의 힘은 일부는 배분되었지만 대부분 흑무유자에게 집중되었구나! 그리고 그놈은 어디 깊숙한 곳에 숨은 것이 분명하다! 어디에 숨 었을까!’
태을사자는 놈의 말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예전에 하일지달이 마수들의 힘이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고 한 것, 그리고 흑무유자가 생계에 내려와 숨어 있다 는 것, 그리고 그 힘으로 자신들이 말하는 신세계를 창조하려 한다는 것 등등………….
그렇다면 흑무유자만 잡으면 놈들의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 아닌가! 그런데 놈은 도대체 어디에 숨은 것일까? 그러나 그 사이 려에게서도 변 화가 생겼다.
– 다들 닥쳐! 뭐 하는 짓이야!
– 입을 놀리지 마라!
– 그래! 입을 놀리지 마라!
어느새 놈들도 태을사자의 유도심문에 말려들고 있 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놈들은 붕붕거리며 떠 들다가 갑자기 전체 려충이 부르르 떨었다.
– 입을 다물어라! 다물어라!
– 더 이상 말하지 말라! 말라!
– 저놈들을 모두 없애라! 모두 없애라!
모든 려충이 같은 음조로 마치 주문을 외듯이 말했다. 그것을 보고 은동이 속삭였다.
“놈들에게 두목이 있나 봐요!”
“그래, 벌이나 개미처럼 두목 격인 대왕 려충이 있 나 보군!”
하지만 태을사자도, 은동도 그 수많은 려충 중에 어 느 놈이 대왕 려충인지 알 방법이 없었다. 다음 순 간, 모든 려충이 한데 모이더니 무시무시한 기세로 태을사자를 향해 덮쳐들었다. 도저히 당해낼 수 없 을 만큼 흉흉한 기세여서 태을사자는 얼른 은동을 옆구리에 끼고는 순간적으로 몸을 날렸다.
태을사자가 막 다른 편으로 이동한 순간, 려는 다시 몸을 수십 개의 가닥으로 나누어서 태을사자와 은동 을 노리고 덮쳐 들어왔다. 태을사자로서도 피할 도리가 없었다.
바로 그때, 은동이 확 태을사자의 앞을 막아서면서 비추무나리의 주문을 다시 외웠다. 그러자 수십 가 닥으로 가해진 공격은 은동의 몸에 부딪쳐 팅팅 퉁 겨나왔다. 간신히 려의 공격을 막아낸 은동은 울상 을 지으며 태을사자에게 외쳤다.
“이젠 어떡하죠?”
이제 은동은 중간계에서 부여받은 비추무나리의 술 법을 세 번 모두 써 버린 것이다. 태을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술을 악물더니 뒤미처 들이닥치는 려충의 술법을 검은 안개를 뿜어내어 막아내었다.
려는 태을사자와 은동을 슬슬 놀리면서 없애려는 듯, 그렇게 치열한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을사자는 계속 되는 려의 공격에 점점 법력이 빠 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백아검의 회전도 이제는 훨씬 느린 속도가 되었다. 은동도 유화궁과 육척홍창을 빼들고 있는 힘껏 휘둘러보았으나 별 도움이 되 지 못했다.
“어떻게 해요?”
“흠…… 흑호를 불러오려면 아직 멀었을 텐데…..”
그때 갑자기 동굴 안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퍼 졌다.
“은동아아!!”
그 소리를 듣고 은동은 얼굴이 환해졌다.
“어! 흑호 아저씨다!”
태을사자도 놀랐다. 아무리 저승사자를 풀어 부르게 했다지만 흑호가 이렇게 빨리 오다니? 그러나 흑호는 애당초 은동의 몸을 안고 이쪽으로 달려오던 중이었기에 이렇듯 일찍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흑호가 은동의 몸까지 안고 오는 것을 보고 은동과 태을사자 모두가 놀랐다. 흑호도 은동이를 부르며 막 둔갑술을 풀다가 눈앞에 괴이하게 생긴 괴물이 있는 것을 보고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이눔이……?”
그러자 태을사자는 소리를 쳤다.
“흑호! 불의 술법을 쓰게!”
“불?”
흑호가 대답하기도 전에 려는 이 새로운 적의 출현 을 느끼고 휙 하니 공격을 가했다. 흑호는 행여 은 동의 몸이 다칠까 봐 은동의 몸을 뒤로 돌렸다. 그리고 어흥 소리를 지르면서 주먹으로 려의 공격을 받아치려고 했으나 려의 공격은 수십 줄기로 나눠지 고 말았다.
하마터면 흑호는 려충들에게 몸이 벌집이 될 뻔했으 나 아슬아슬하게 몸을 다섯 바퀴나 돌려 간신히 피 할 수 있었다.
“뭐 이런게 다 있누!”
“흑호! 불을!”
그러나 흑호는 다시 려의 공격을 피하면서 불만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제길! 짐승이 불 쓰는 것 봤수!”
“어허! 이런!”
태을사자는 낙담한 듯 소리쳤지만 다시 호기있게 다시 백아검을 치켜들었다.
“하는 수 없군! 하루종일이 걸리더라도 모조리 없애는 수밖에!”
그러자 은동이 자신의 몸을 보고는 외쳤다.
“제가 몸에만 도로 들어가면 불을 피울 수 있어 요!”
“그렇구나!”
태을사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려의 공격을 안 개로 받아 쳐냈다. 그리고는 흑호에게 눈짓을 하며 은동을 잡고 몸을 날렸다. 그러자 흑호도 눈치를 채 고는 역시 태을사자 쪽으로 몸을 날렸다.
려는 새카맣게 몰려들어 방해하려 했으나 흑호가 뿜어낸 강한 바람과 태을사자의 안개로 밀려나 버렸다. 그 사이 태을사자는 재빨리 은동의 혼을 은동의 몸에 밀어넣으며 외쳤다.
“어서 나가서 불을 피워 오너라! 불이 크면 클수록 좋다!”
그러자 흑호는 은동의 몸을 동굴 밖으로 휙 집어던 지고는 태을사자와 함께 동굴의 입구를 막아섰다.
“뭐 저딴 놈이 다 있수?”
흑호가 외치자 태을사자도 같이 소리쳤다.
“놈은 충역귀일세! 놈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버텨야 하네!”
그리고 둘은 각자 있는 대로 법력을 일으켜 려충들 을 공격했다. 아니,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려충들을 막아내느라고 있는 힘을 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