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6권 – 4화 : 그로부터 5년


그로부터 5년

은동이 은둔에 들어간 다음 처음 얼마간은 흑호도, 태을사자도 찾아오지 않았다. 빛을 쏘이지 않아서 인지 은동의 병세는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 러나 얼마나 지났을지 모를 정도로 한참 시간이 흐 른 뒤에 흑호가 한 번 찾아왔다. 흑호는 동굴 밖에 서 우물쭈물하고 있어 은동은 흑호가 온 줄 몰랐다. 그러나 나중에 오엽이가 범쇠가 잠시 왔었다고 말 하여 은동은 흑호가 왔다간 줄 알게 되었다.

“범쇠 아저씨가 잘 있느냐고 묻더라구요. 그래서 나 도 반가워서, 불러줄까요? 했더니 됐다구하더니 그 냥 가버렸어요. 여기까지 와 놓고 왜 가느냐구 하니 까 그저 궁금해서 와본 거라구하면서 절대 이야기하 지 말라구 쩔쩔 매대요? 후훗, 덩치도 커다란 사람 이 어린아이처럼 부끄러워하기는…………….”

그 소리를 듣자 은동은 문득 흑호가 보고 싶어졌다. 비록 인간은 아닐지라도 자신을 생각해주는 정이 있 는 것이 틀림없지 않은가? 그러나 은동은 그런 내 색을 하지 않고 오엽에게 돌려보내기를 잘했다고 말 했다. 은동은 아무도 만나지 않을 결심으로 있었기 때문에 유정스님과 김덕령 등이 몇 번 왔었지만 그 들에게도 동굴 너머로 법력의 방법을 배우기만 했 을 뿐, 다른 이야기를 나누거나 직접 얼굴을 대하지 는 않았다. 다행히 유정스님 등도 은동의 그런결심 을 이해해 주었는지 굳이 은동에게 세상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은동이 만나는 것은 오직 오엽뿐인 셈이었는데 오엽이는 은동을 너무나 극진히 수발해 주었고 영리하게도 은동의 기분을 잘 맞 춰 주었다.

어느새 해가 넘어갔다. 태을사자와 흑호는 몇 번은 동을 찾아볼까 생각하였으나 결국은 그만두었다. 찾으려고 하면 금방 찾을 수 있었을 터였지만 그들 은 은동의 생각을 존중해 주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 었고, 또 그다지 큰 일은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 다. 사실 겉으로는 그래도 둘은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다.

흑호는 은동을 가엾게 여겨 암암리에 조선땅의 모든 짐승들에게 은동이를 해치지 않고 복종하라고 명을 내려둔 바 있었고, 은동이 그저 마음을 편하게 가지 고 돌아오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태을사자는 은동이 어른이 된 다음에 오히려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으 로 생각하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리 고 태을사자는 은동에게 매어 놓은 통천갑마가 있었기때문에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강제로 은동을 불 러올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 지만, 정작 급한 일이 생길 경우의 대비는 되는 셈 이니, 안심하고 은동을 내버려둘수 있었던 것이다.

흑호나 태을사자나 모두 인간이 아니라서 수없이 오 랜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에고작 몇 년 정도 기다리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별로 큰 일이 아 니었다. 더구나 마수들도 별반 출몰하지 않아 그들 은 계속 감시만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한편 조선의 의병들과 민병들, 그리고 이순신의 수 군은 왜군의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하여왜군의 진격 을 멈추게 하는 데 성공했다. 의병들은 요원의 불 길같이 일어나 왜군들에 맞섰고, 조직과 편제가 점 차 커져갔다. 전투도 전쟁 초기의 일방적인 국면에 서 벗어나고 있었다.

칠월 칠일에는 왜국의 승장 안고구지 에게이의 부대가 전주에 진격하였으나 웅치에서 김제군수 정담 (鄭湛), 동복현감 황진(黃進) 등이 지휘하는 의병에 게 공격을 받았다. 조선 의병들은 전원이 전사할 때 까지 싸우는, 무서운 투혼을 발휘하여 안고구지 에 게이는 전주 부근까지 진격하였음에도 기가 꺾이고 겁이 나서 퇴각해 버리고 말았다.

칠월 팔일에는 왜국에서도 맹장으로 일컬어지는 고 바야가와 다가가게의 제6군 1만 5천7백명의 부대 가 전주에 진격하였는데, 금산군과 완주의 경계인 배재(배고개. 기록에는 한자화하여이치[梨峙]로 기 록되어 있다)에서 권율이 지휘하는 1천3백명 정도 의 의병에게 반격을 받아패전하고 말았다. 이 배재 전투는 최초의 육상에서의 승리라 할 수 있으므로 소수의 조선군이 다수의 왜군을 물리친 면에서 그 의의가 컸다.

고바야가와 부대는 패전 후 금산을 점령하였는데 팔 월 십팔일에는 율곡 이이의 수제자인 조헌(趙憲)이 지휘하는 칠백명의 의병과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병 의 공격을 받았다. 조선의병은전원이 전사하였지만 왜군의 부대도 커다란 타격을 받고 진군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또 고경명(高敬命)이 지휘하는 7천여 명의 의병도 고바야가와 다가가게의 부대와 싸워 전원이 전사하였지만, 고바야가와의 부대는 거의 완 전히 무력화될 만큼의 타격을 주었다.

선봉장이던 고니시는 평양성에서 조승훈의 부대를 한때 격퇴하기는 했으나 여역과 탄약 부족, 굶주림 때문에 꼼짝도 못하고 있었고 또 다른 선봉장인 가 토는 함경도까지 진출하다가조선의 두 왕자, 임해군 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아 기가 하늘까지 뻗쳤다. 그러나 두 왕자는가토가 직접 잡은 것이 아니라 국 경인(鞠景仁)이라는 매국노가 잡아다 바친 것이었 다.

국경인은 문관이었다가 회령으로 유배되어 아전으로 있었는데, 조정에 대한 원망을 엉뚱하게 왕자와 수행대신들을 잡아다 바치는 것으로 풀려고 하였다. 그러나 국경인은 품관(品官)신세준(申世俊)이 일으 킨 의병에 의해 목이 잘렸다. 그리고 고니시보다 더 큰 공을 세웠다고의기양양하던 가토도 당시 도방의 일인자로, 정기룡과 더불어 양정이라 불리던 의병대 장 정문부(鄭文孚)에 의해 길주에서 참패하고 퇴각 하였다.

육상에서의 전투가 점점 왜군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가운데, 이순신은 이번에는 직접 왜군의 본거지인 부산포로 쳐들어가는 과감한 계획을 세웠 다. 이는 지난번 한산대첩 이후로 이순신은 아예 싸워볼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때문이었다. 왜군들 은 이순신의 이름만들어도 슬슬 피했으며 남해는 이순신의 완전한 장악하에 들어갔다. 이순신은 부산 포를 급습하였는데, 왜군은 수백 척이 넘는 배를 정박시켜 놓았음에도 ‘이순신’의 이름에 질려 버려 배를 타고 싸울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하고 그들이 축조해 놓은 왜성(倭城)에서 총포를 쏘아대며 저항했다.

덕분에 이순신의 함대는 무려 백여척이 넘는 군선을 깨뜨리는 큰 전과를 올렸지만 이제까지에 비해 비교 적 많은 사상자를 냈다. 왜군들은 지난번 부산포를 함락했을 때 노획하였던 총통을 사용하여 이순신의 조선군과 동등한 거리에서 사격을 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이순신 휘하의 가장 용맹한 장수 였던 녹도만호 정운이 목숨을 잃었다. 그는 조선군 의 포에 의해 이마에 철환이 관통하여 죽음을 당한 것이다. 정운의 죽음은 이제껏 이순신 함대가왜군에 게서 받은 가장 커다란 타격이었다. 흑호는 정운의 죽음을 보고 이렇게 한탄했다.

“정장군이 죽었네그려. 흐음….., 큰 일을 많이 할 사람이었는데… 죽으면 안 되는 사람이왜 죽었는 지 몰러.”

흑호는 정운에게 철환이 날아가는 광경까지 똑똑히 볼 수 있었으나 인간사에 영향을 끼치면안 된다는 생각에 정운이 죽는 모습을 눈을 뜬 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정운은 인품으로나 용맹으로나 이순신 의 휘하장수 중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었고 변장한 은동과 범쇠 등을 직접 받아들여 주기 도 한 사람이라 정이 깊었다. 만약 은동이 옆에 있 어서 이광경을 보았다면 정운을 구하려고 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흑호는 오랫동안 도를 닦은 짐승이 라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말을 옆에서 듣던 태을사자는 뭔가 잊고 있었던 것을 다시 기억해 냈다. 바로 〈해동감결〉 에 있던 예언 중 아직 뜻을 잘 알 수 없었던 구절을 생각해 낸 것이다.

— 죽지 않아야 할 자 셋이 죽고, 죽어야 할 자 셋이 죽지 않아야만 이 난리가 끝날 수 있다. 죽지도 않았고 살지도 않은 자 셋이,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자 셋을 이겨야 난리가 끝날 것이다.

‘천기에 의하면 죽지 않았어야 할 신립이 죽고, 정 운도 혹시 그런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닐지모르겠구 나. 죽어야 할 자가 죽지 않은 경우는 이미 박홍과…그렇지! 패주만 거듭하면서목숨만 부지했던 도 원수 김명원이 있겠구나…………. 그런데 죽지도 않았 고 살지도 않은 자는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 까? 또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자라면 그것은 또 누 구일까…….’

예전에 태을사자는 죽지도 않았고 살지도 않은 자들 이 바로 자신과 흑호, 호유화 등이 아닐까 생각했 다. 하지만 중간계에서의 재판을 거치면서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이난리는 생계에서의 일이며, 생계에서의 일을 예언한 것에 자신과 같은 다른 계의 존재들에대해 예언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해동감결>의 전문에서도 마수들 같은 존재를 언 급하거나자신들의 존재나 역할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부분은 없었다.

그렇다면 해동감결>의 그 구절에 나온 열두 명은 모두가 인간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은 인간이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자라는 것은 또 누구를 가리 키는 말인가? 태을사자는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없 었다. 더구나 <해동감결>의 내용은 중간계에서 정 한 대로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되어 버 렸으니 다른 자의 지혜를 빌릴 수도 없었다. 은동이 나 흑호는 자신이 지혜를 빌릴 만한 자들이 못되었 고 호유화는 이제 적이 되어 버렸으니………….

아무튼 이순신의 부산포 해전은 전세에 암암리에 커 다란 영향을 끼쳤으니, 그것은 바로 히데요시가 조 선으로 건너올 계획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다는 점 이다. 부산포해전 덕분에, 조선으로 건너와 고니시 등 적당하게 싸우려는 왜장들을 무섭게 내몰아칠 심 산으로 있었던 히데요시도 겁이 나서 건너오지 못했 다. 현해탄을 건너다가 이순신의 함대라도 만나는 날에는 날고 긴다는 히데요시라도 꼼짝없이 물귀신이 될 판이 아닌가? 이는 실로 왜란의 전황에 큰영향 을 끼쳤으니 히데요시가 온다 하고 오지 않자 모든 왜장들은 더 이상 진격할 의욕을 잃어 버리고 말았 다.

한편 왜군은 남은 여력을 집결하여 아직 함락되지 않은 지역인 전라도를 공격하기에 총력을쏟으려 했 다. 전라도는 본디 조선의 곡창지대였고, 의병들과 이순신 덕분에 거의 전화(戰禍)를 입지 않아 많은 쌀이 수확된 상태였다. 그 덕에 조선군들은 어느 정도 보급을 받을 수있었던 반면, 왜군들은 점점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니 전라도의 쌀을 빼앗기 위해서라도 왜군은 반드시 전라도로 진격하 지 않을 수 없었다.

추수가 거의 끝난 시월 육일, 왜군은 나가오가 다다 오기(長岡忠興 장강충흥)를 필두로, 수많은 병력을 한데 규합하여 전라도와 근접하여 경상도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진주성으로 몰려들었다. 진주성은 진 주목사 김시민이 불과 삼천여명의 군대로 수비하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진주성으로 달려간 것은 바로 홍의장군으로 알려진 곽재우였다.

이때 왜군은 수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수적으로는 거의 상대가 되지 않았는데 김시민은 성안의 병사 들과 백성들 모두를 능란하게 지휘하여 총력으로 방 어전을 폈다. 그리고 곽재우의의병은 신출귀몰하는 유격전을 펼쳐서 전황을 변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 할을 하였다.

곽재우는 힘은 김덕령만 못하였지만 병법에 밝고 군 사를 부리기에는 더욱 능하여서 왜군을묶어두고 공 격하여 커다란 전과를 거두었다. 진주성의 군민은 수십배에 달하는 왜군과 눈물겹도록 처절한 방어전 을 펼친 끝에 마침내 승리하였다. 비록 가장 큰 공 로자인 김시민은 이싸움 막판에 이르러 총을 맞고 전사하였으나 진주성의 승전은 전황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왜군은 전라도를 넘보려던 계획을 완전히 포기할 수 밖에 없었으며 사기도 땅에 떨어져 버렸다. 이 싸움 에서는 곽재우와 김성일 외에도 김성일과 친하였던 조종도(趙宗道), 이로(李魯)등의 공이 컸는데 사람 들은 이 김성일, 조종도, 이로를 일컬어 3장사라 불 렀다. 특히 이로가써서 격문으로 돌린 창의통문(倡 義通文)은 백성들이 눈물없이는 읽지 못했다 할 정 도의 명문으로, 의병들을 모으고 사기를 진작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렇듯 당시 조선군의 사기는 다시 살아 올라가고 있었고 백성들은 비로소 제정 신을 차리고 침략자들을 있는 힘을다해 격퇴하기에 힘을 아까지 않았다. 이를 보고 있던 흑호나 냉랭 하기 그지없는 태을사자마저도 감동을 느낄 정도였 다.

해를 넘기자 비로소 명군이 참전을 했다. 명군은 이 여송을 대장으로 삼는 5만이 넘는 대군이었으며, 조선을 돕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와 평양을 공격했 다. 참전이 늦어진 이유는 대군이라 도하가 힘들어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렸다는 것이었다. 그 싸움에 서 이여송은 자신의직속부대인 요동병이 아니고 왜 구들과의 싸움에 경험이 많던 절강병들을 앞세웠다. 그 부대는 전에 이덕형이 명의 병부상서 석성에게 귀띔을 해준 것과 같이 조총의 공격을 방어할 수있 는 편제로 되어 있었으니 등패나 낭선, 당파의 사 용법 등은 이때 처음 사용되어 전해진것이다.

절강병들의 신병기의 공격을 당한 고니시의 부대는 대패했다. 게다가 서산대사와 유정이 이끄는 의병들 이 큰 역할을 해냈다. 그들은 첩보와 정탐에 능하 여, 항상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였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정은 의병들에게 정탐과 첩보 의 훈련을 시켜준, 은동의 아버지 강효식을 생각하 며 혼자 눈물을 흘렸다. 강효식의 힘이 없었더라 면 평양수복때 의병들의 공로는 이렇게 크지 못할 것이었다. 유정은 평양이 수복되자 몇몇 수하들과 함께 강효식의 영혼을 위로하는 재를 올렸다. 그러 면서 유정은 혼자 중얼거렸다.

‘은동이는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구나…. 은동이 가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강공도 눈을 편히 감 을 수 있을 것인데…………. 허나 은동이의 종적을 찾을 수가 없으니…….’

한편 패전을 한데다가 가뜩이나 역병과 굶주림으로 인해 고니시의 부대는 싸울 힘을 거의 잃고 있었다. 고니시의 부대는 병과 패전으로 삼분의 일로 줄어들 어 버렸으며

고니시 자신도 병이 위중해졌다. 지난날 마수의 예 언 그래도 같았다. 고니시는 더 이상 버틸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1593년 1월 8일에 평양을 철수하였 다. 이여송은 패주하는 고니시의부대를 급하게 뒤 쫓지 않을 테니 어서 도망가라는 호기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실은 이호기에는 심유경의 협잡이 끼어든 것이다.

심유경은 병부상서 석성의 지령을 받고 하루빨리 조 선과 왜국을 강화시키라는 밀명을 받고있었다. 또 한 그 자신도 이 전쟁을 스스로 결말지음으로써 명 예를 드높이겠다는 개인적인야심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이전부터 고니시와 은밀히 접촉해 왔었는데 고니시가 이여송에게 쫓겨 죽어 버리면 왜국측과 연 결되는 다리가 끊어지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겠는 가? 그래서 심유경은 이여송에게 암암리에 바람을 넣어 고니시가 죽지 않도록 해준 것이다.

태을사자와 흑호는 드디어 기다리던 명군이 참전하 여 대군이 평양성으로 몰려들자 이제 이난리도 끝 나는가 하고 기뻐했다. 흑호는 엉뚱하게 이여송도 이씨이니 왜란종결자가 이여송이 아니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군이 점차 승기를 잡아가 는 판에 대규모의명군이 밀려왔으니 마침내 난리가 끝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도 든 것이었다.

그러나 태을사자는 고개를 저었다.

“<해동감결>의 내용은 아직 다 이루어지지 않았 네. 더구나 〈해동감결>에서는 북을 믿지말고 남에 속지 말라, 남에서 일어난 것은 남에서 풀으리라고 하였네. 명군은 북에서 온 것이니 아무래도 조금 더 두고봐야 할 것이네.”

과연 태을사자의 생각은 적중하였다. 이여송은 비 참하게 패주해 가는 고니시의 뒤를 슬슬추격하면서 도 단숨에 한양을 탈환해 보이겠노라고 큰 소리를 쳤다. 이상하게도, 참으로 이상하게도 이여송은 그 런 만용을 부림으로써 고니시가 살아날 기회를 준 것이다. 고니시는 병에 걸려 있었고 부하들도 거의 전멸에 가깝게 되어 왜군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물론 고니시는 나름대로 이 전쟁을 끝나게 하려고 애를 쓰는 자이니만큼 태을사자나 흑호도 고니시가 죽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심유경 의 협잡이 있었다 해도 이여송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이여송과 협력하여 평양을 탈환하였 던 유정과 서산대사는 이여송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같이 진군하지 않고 평양에 남았다. 이여송의 행동에는아무래도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태을사자 는 그것이 혹시 마수들이 암암리에 부리는 수작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딱히 증거가 없었다.

아무튼 고니시의 뒤를 추격하던 이여송은 왜군을 얕 보고 자신의 직속부대인 요동병을 앞세워 전과를 노렸다. 그런데 요동병은 전통적인 편제를 한, 말하 자면 신립과 비슷한 편제의 부대였다. 그러나 평양 수복에 공을 세운 절강병은 이여송의 직속부대가 아 니라 차출된 부대였기에, 이여송은 자신의 직속부대 인 요동병에게도 공을 세울 기회를 주려고 그들을 앞세워고니시를 추격한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 고니시 외 다른 부대의 왜장들은 이를 갈며 이여송의 진격을 방해하려 했다. 특히 앞 서 전라도에서 거듭되는 퇴각을 한 고바야가와 다가 가게는 왜군 장수 중의 최연장자이자 최고참이었는 데 그 명예회복이 큰 문제였다. 명예만이 문제가 아니라 이제 이 전쟁에서 왜장들의 신임이 떨어지면 히데요시에게서 어떤 벌을 받을지 모르므로 목숨이 걸린문제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고바야가와는 고노시의 계책에 따라 벽제 관에서 잠복하여 아무런 대비없이 놀러가듯 고니시 부대를 쫓아오는 명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1월 27 일, 이여송의 부대는 벽제관에서왜군의 기습을 받아 막심한 피해를 입고 격퇴당했다. 고바야가와는 일 약 ‘명군을 패전시킨명장’이 되어 이름을 드날리게 되었고, 그에 반해 이여송은 겁에 질려 평양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남의 나라 힘은 도무지 믿을 게 못 된다니깐…… 에휴.”

태을사자와 흑호는 드디어 왜란이 끝나는가 싶어서 기뻐하였으나 일은 그렇듯 쉽게 풀리지않았다. 이 여송은 벽제관에서 패하여 평양성에 틀어박혀 더 이 상 싸우려하지 않고 있었으며그들의 민폐는 그야말 로 극에 달했다. 구원군이라는 생색을 내며 민가의 값나가는 물건을 약탈하고 반반해 보이는 여자를 희 롱하기는 다반사였으며, 민폐가 하도 심해지니 왜군 이 진주하였을 때에도 남아 버티던 백성들마저도 산 으로 도망칠 정도였다.

태을사자와 흑호는 그 모습을 보며 안쓰럽기 그지없 었지만 인간사에 개입해서는 안 되니 그저 손을 놓 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심유경이라는 자 가 명과 왜군 진지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에 주 목하고 있었다. 흑호는 심유경을 따라가서 그의 활 동을 정탐하고는 지금 평양성에서 태을사자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심유경 그자는 아무래도 양측을 강화시키려는 듯한데…… 허허…… 보통 인물은아닌 듯싶 네.”

그러자 흑호는 훙 하고 코웃음을 치며 이죽거렸다.

“당대의 협잡군이니 보통의 인물은 아닌 것 같수 …….”

“왜 그러는가?”

“내가 보니 그 강화는 성립될 가망이 없는 듯하우. 명에서는 체면 때문인지 무조건 왜군을물리라 하고, 왜국은 조선한테는 말도 안 되게 불리한 조건을 내 걸고 있수. 지금 전쟁은 잠시 뜸한 상태이지만………… 아무래도 불길하우. 이대로 난리가 끝날 것 같지는 않우. 그걸 뻔히 알면서도 설치고 큰 소리만 땅땅 쳐 대는 심유경이 협잡군이 아니고 뭐겠수?”

“흠….”

태을사자는 잠시 생각해 보고는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심유경 혼자 생각으로 그런 장담을 마구 할 만한 인물은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뒤에는 누군 가 있지 않을까 싶네. 명나라의 중요한 인물…………. 그렇지, 석성이 가장 의심되네만…………….”

명나라의 병부상서 석성은 벌써부터 남모를 계획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석성은 명나라의피해를 줄이 기 위해 이 난리를 대강대강 끝내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석성은심유경을 파견하여 고니 시와 수시로 밀담을 하게 하였다. 고니시는 부하들 을 매우 많이 잃었고 자신도 여역에 걸려 몹시 앓은 상태여서 난리라면 지긋지긋했다.

결국 고니시는 가토만 제외하고 다른 장수들을 비밀 리에 설득하여 강화회담을 벌이도록 하였다. 더구나 심유경은 자신이 중국황제를 설득할 것이니 고 니시에게는 히데요시를 설득하기만 하면 된다고 큰 소리를 쳤다. 그래서 고니시는 심유경에게 일루의 희망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강화교섭을 추진하는 중 이었다. 물론 일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태사자나 흑호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지만 일이 어째 위태 위태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무래도 불안했다.

“제길, 그러면 뭘하우? 인간들의 일은 우리가 개입 할 수 없잖수?”

“내가 걱정하는 것은 인간들의 일만이 아닐세. 마수 들이지.”

“마수들이 왜? 요즘은 쥐 죽은 듯 조용하잖수?”

“너무 조용하니 걱정이 되는 거야. 자, 보게. 우리 가 그동안 해치운 마수들의 수는 백면귀마, 홍두오 공, 계두사, 기, 시백령, 려 등 여섯 마리이네. 그런데 마수는 원래 열둘이었고 흑무유자가 다시 내려왔 으니 도합 열셋. 아직 일곱 마리의 마수가 남아 있 어. 그 중 분신귀, 인면지주, 풍생수나 소야차 등은 아직 잡지 못했고, 흑무유자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조차 없으며나머지 두 놈에 대해서는 정체조차 모르 고 있네. 놈들이 살아 있는 한, 분명히 무슨 일을 꾸밀 것인데…….. 그런데 너무 조용하단 말일세.”

“놈들이 두려워서 숨어 버린 것 아니겠수?”

“아닐걸세. 중간계의 재판 이후로 놈들은 외면적으 로는 별로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려를 시켜서 역병 을 퍼트리려 하지 않았는가? 분명 놈들은 무슨 일 을 꾸며. 이제 사계나 다른 계들이 모두 생계에 관 심을 집중하고 있으니만치, 드러내놓고 일을 꾸미 기는 어렵겠지. 그러나놈들은 절대 이대로 물러날 것 같지는 않아…………….”

“음냐, 그럼 무슨 종류의 일을 꾸미고 있는 걸까? 짚이는 데가 있수?”

흑호가 궁금해하자 태을사자는 눈빛을 빛냈다.

“아마도……… 인간 속에 파고들려 할 것이네.”

“인간에게?”

“그렇다네. 우리는 지금 놈들보다 훨씬 강하다고 볼 수 있네. 나만 해도 수많은 저승사자를부릴 수 있 는 염왕령을 부여받았고, 자네도 조선땅 금수의 우 두머리가 되지 않았나? 아마우리가 놈들이 있는 곳을 알아낸다면 숫자가 적은 놈들이 우리를 이기기 어려울 걸세. 그러나 우리의 약점은 다른 곳에 있 네.”

“인간들 일에 개입할 수 없다는 것 말유?”

“맞네. 놈들은 그런 우리의 약점을 노리려들 것이 틀림없어. 놈들은 인간들 사이에 파고들어계획을 꾸 민다면, 우리는 꼼짝할 수 없을 뿐더러 우리 이외 의 성계, 광계, 환계, 사계 등도개입할 수 없게 되 어 버리는 것이네…………….”

그러자 난데없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그 말이 맞아.”

흑호와 태을사자는 누구인가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은 어느 틈에 나타난 하일지달이었다.

“놀래라. 언제 왔수? 기척도 없이?”

“조금 됐어. 태을사자, 당신 정말 대단하군그래. 당신의 추리는 성계에서 내린 결론과 똑같아.”

그 말에 태을사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담담하게 되받았다.

“그렇소이까?”

“그래. 하지만 우리는 놈들이 어떻게 인간들을 조종 할 것인지, 또 누구에게 접근할 것인지조차 몰라. 아니, 알 수조차 없다고 보아야겠지. 그것을 알아 내는 것이 자네들이 할 일 같아.난 그 말을 전하러 왔어.”

“전하러 왔다면……………? 대모님의?”

“그래. 이제 사계와 유계의 전쟁은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 상태야. 환계가 도와주니 유계가 밀릴 수밖에 없지. 마계는 광계에서 맡아 포위하고 있으니 꼼짝 도 할 수 없을 테고 말이야. 실상 일은 거의 마무리 되어간다고도 볼 수 있지. 하지만………… 대모님의 생 각은 다르셔.”

그러자 태을사자가 조용히 물었다.

“암흑의 대주술 때문에 그들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오?”

“그래.”

“하긴………… 그 주술이 만약 정말 성공한다면…… 또 하나의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일 테니…… 어 둡고 사악한 세상이…………. 그러면 우주의 균형도 깨 어질 것이고 또…….”

태을사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하일지달은 흥흥하고 웃었다.

“그래그래. 그러나… 걱정되는 것이 또 있지.”

“그건 뭐유?”

이번에는 흑호가 물었다. 그러자 하일지달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너희들도 잘 아는 자의 일.”

“호유화 말유?”

고개를 끄덕이는 하일지달을 보며 흑호가 다시 나섰 다.

“호유화가 비록 은동이의 아버지를 죽였다 해두 마 수들을 돕지는 않을 거유. 이미 호유화는 마수들과 싸웠지 않수?”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그러나………… 지금 나는 이상한 사실을 알아냈거든.”

“그게 뭐유?”

하일지달은 웃음을 거두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난 평양을 자주 들락거렸어. 은동이 일도 있고 해 서…………. 근데 좀 이상한 것을 느꼈지. 뭐랄까………… 좀 묘한 기운 같은 것 말야. 알다시피 나는 용족이 어서 그런데는 좀 예민하거든.그런데…………….”

“뜸들이지 말구 빨리 말 좀 해보슈. 답답허네.”

흑호가 투덜거렸으나 하일지달은 들은 척도 않고 계 속 말했다.

“고니시 말이야. 고니시는 마수들에게 협박을 당하 고 있었어. 많은 사람을 해치고 전투를 크게 벌이라 고 말이야.”

“으음?”

흑호는 놀랐으나 태을사자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건 당연한 일이네. 마수들은 히데요시를 조종하 고 있을 정도이니 다른 자들에게 엉겨붙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런데… 고니시는 서방에서 전해진 종교를 상 당히 독실하게 믿고 있어. 그리고 뭐랄까….. 상 당히 순결한 영혼이 그 옆에 있어서 마수들이 섣불 리 침범할 수 없다고 할까? 그런데 이상한 존재가 나타나서 고니시의 마음을 흐트러뜨리고, 이번 평양 에서의 패전을 예언했어. 자기들의 말을 듣지 않는 대가로 부하들의 생명을 거두어가겠다고 말야.”

그 말을 듣고 흑호가 대경실색을 했다.

“으음?”

“왜 그리 놀라나?”

“흠, 마수들이 이제는 왜군의 영혼까지도 노리는 것이유?”

“그러나 잃어 버린 영혼은 없네. 왜국의 저승사자들 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거든.”

“그러면 다행이우. 그런데? 계속 해보슈, 하일지 달.”

“이번 평양에서의 싸움은 명군과 조선 승군이 잘 싸 우기는 했지만 고니시가 마음이 흐트러지고 병이 심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쉬운 싸움은 아니었을 지도 몰라. 그런데 아다시피마수들이 인간들의 마 음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줄 수는 있어도 고니시 같이 난리에 중요한 인물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는 없 거든.”

“그럴 능력이 부족하단 거유?”

“그럴 능력이야 있겠지. 그러나 그리 되면 우리 성계나 다른 계들도 직접 마수들의 행동을제지할 구 실이 생기거든. 그러면 놈들은 전멸이야. 그걸 알면 서 그런 바보짓을 하겠어? 더구나 고니시는 신앙심 이 강하고 곁에 있는 자 또한 장래 큰 인물이 될 것 이기 때문에 마수들의 기운이 그리 녹녹하게 침투 될 리 없거든.”

“허지만 고니시는 이미 영향을 받았다구 하지 않았수?”

“그래.”

“허지만 마수들은 고니시에게 직접 영향을 줄 수는 없다며?”

“그래.”

“뭐가 그래・・・・・・유? 말이 안 되지 않수?”

흑호가 계속 말꼬리를 늘이자 태을사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말이 안 되지는 않네. 그러나 설마………….”

“뭐가 설마유?”

“마수가 아닌, 그러니까 요기나 마기를 근본으로 하 지 않는 존재가 고니시에게 작용하여 영향을 주었다면………… 신앙심으로 무장한 고니시의 마음을 돌릴 수있을 것이란 말 아니오?”

하일지달은 근심된 눈빛을 띄며 태사자의 질문에 답했다.

“맞아…….”

흑호는 조금은 어리둥절하여 잠시 생각해 보다가 입을 열었다.

“가만…………… 마수가 아니며 요기나 마기를 근본으로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흑호는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에엑! 그럼 호유화가!”

그러자 하일지달은 조용히 말했다.

“고니시를 찾아온 존재는 처음에는 풍생수였던 것 같아. 하지만…. 얼마 전부터 고니시를협박하는 자 는 긴 백발을 드리운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이었던 것 같아. 더구나 마기를 띠지않고 고니시를 놀라게 할 정도의 자라면…… 환계의 자일 가능성이…….”

“에이! 설마 그럴 리가! 호유화는 이전부터 우리 와 함께 행동하였고 근래에는 계속 중간계에서….”

흑호는 그 말을 믿지 않으려 했지만 하일지달은 계속 천천히 말했다.

“고니시에게 그 백발의 여인이 나타난 것은 호유화가 성계를 떠난 다음부터야.”

“허어………그럴 리가…….”

계속 고개를 내젓는 흑호를 보며 태을사자는 하일지 달에게 물었다.

“그런데 고니시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어 떻게 알았소? 고니시의 마음을 읽기라도했소?”

태을사자의 질문에 하일지달은 고개를 저었다.

“난 인간의 일에 개입할 수 없는 거 알잖아. 그거 알아내느라고 고생 많이 했어.”

“도대체 어떻게 알았다는 말이오?”

“태을사자, 당신 고향도 잊었어? 사계에서 알아낸거야………….”

“사계에서?”

하일지달은 사계로 가서 이상하게 죽은 인간들의 영 혼을 만났다. 그리고 오랜 노력 끝에 그들 중 고니 시와 직접 접촉이 있었던 자들의 영혼을 찾아낸 것 이다. 즉, 고니시의 시동 후지히데의 영에게서는 과거 고니시가 마수들에게 협박당했다는 사실을 알아냈으며, 은동에게죽음을 당한 겐키에게서 그의 두 동생인 덴구와 기노시다야미가 마수의 습격을 받 아 죽었다는 것도 알아내었다.

덴구와 기노시다야미는 왜국에서 죽었는데, 그를 직접 처단한 것은 풍생수만이 아니었다.즉, 호유화가 그들을 해치는데 일조를 하고 그들의 머리를 베어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덴구와 기노시다야미는 뜻하지 않은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그들의 혼은 한 동안 원귀가 되어 방황하여 죽은 뒤에도 동강난 그 들의 머리에 붙어 다녔다. 그들의 머리는 호유화에 의해 고니시의 앞에서 녹아들었고, 그 이후 그들의 영혼은 사계로 옮겨진 것이다. 호유화는 마수들과 달라 영혼을 가져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 혼은 충격을 받았고 또 세심천의 물을 마신 이후였 기 때문에 하일지달도 성계의 존재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그들의 기억을 헤집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하일지달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이 있어. 이건 아직 성계에서도 추측만 할 뿐인 일인데… …….”

“무엇이오?”

“전에 성계 분들이 말씀하신거 기억나? 마수들은 영혼을 씨앗으로 하나의 세계를 만들려한다고 말 야.”

“기억하오.”

“그런데 조금 더 깊이 의논해본 결과 거기에는 모순 이 있어. 그들이 암흑의 대주술로 만들어낼 수 있 는 세계는 한계가 있거든. 그래서 왜 그들이 그런 짓을 하려는지 정말 알 수 없어서………….”

“왜 그들이 만들 그 세계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오?”

“세상의 이치를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어. 그림자는 어디서 생기지?”

“아하……. 흠…… 그러나 정말 그렇겠소?”

태을사자는 그 말만 듣고도 대강은 이해한 것 같았으나 흑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뭔 소리유?”

하일지달이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었다.

“그림자는 빛이 있어야 생기는 거야. 그러니 악의 세계라 할지언정 그 자체만으로는 그것은아무 것도 아니지. 마계는 성계 너머에 서 있는 일종의 저울추 같은 거야. 빛이 있어야 어둠이 있고 선이 있어야 악이 있는 것이 아니겠어? 그런데 마계는 악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며악을 행하지 않고는 존속될 수 없는 세계인데, 악으로만 이루어진 세계에서는 무 엇이 악이되고 무엇이 선이 되겠어? 그 때문에 그 들이 세계를 만든다 할지라도 그것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거야. 결국 마계가 조금 더 넓어지는 것밖에는 안 되는 것이지.”

“그러나 마계가 넓어지면 그들이 커지고 그들만의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 아니?”

“그들의 마계는 이미 공간적으로는 끝이 없는 세계 야. 그것을 구태여 늘리려 애쓸 필요도없어. 그러 니 그들이 그들만의 세계를 만든다는 것은 이해가 안 돼. 그러려면 선하거나 또는선악의 중간에 있는 존재의 조력이 없으면 안 될 거거든.”

“엑? 그럼 뭐유?”

하일지달은 긴장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건 어디까지나 하나의 추측일 뿐이야. 오직 하나 의……………. 우주 팔계를 다 생각해 보자구.생계나 사 계는 뭐 일단 제외해도 돼. 그리고 신계는 그럴 리 만무하지. 유계나 마계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성계 는 마계와 극성이니 결탁할 리가 없어. 그렇다 …….”

“환계? 아니 그럼 호유화가!!!”

“글쎄・・・……지금으로서는 그것밖에 생각할 길이 없어…….”

“그렇다면 호유화가 왜 그러는 거겠수? 난 도무지 이해되질 않어!”

흑호가 버럭 소리를 쳤다. 그러나 이해가 가지 않기 로는 태을사자나 하일지달도 마찬가지였다. 의혹은 점점 커져만 갔다. 마계가 아무리 암흑의 대주술을 쓴다 해도 만들어지는 세계는마계와 다를 것이 없 다. 악과 마만이 들끓는 세상을 마계의 존재가 만들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정사반반인 환계의 대존재인 호유화가 끼어든다면 이야기가 또 달라지는 것이 다…….

하지만 그들로서도 추측 이상의 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호유화는 워낙이 가공할 법력의 소유자인데다가 우주 제일의 둔갑술을 지니고 있어 거의 아무도 잡을 수가 없었다.

호유화가 은동을 찾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 지만 지난번 호유화가 강효식을 죽이고은동마저도 해치려 한 것을 생각해보면 그렇다고 볼 수도 없었 다. 결국 그들은 막연한 의혹만을 품고 사태의 추이 를 지켜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편 은동은 유정과 김덕령 등에게서 많은 술법을 배우기는 했지만 정작 마음은 딴 곳에 가있었다. 어 두운 곳에서 혼자서만 지내는 일이 어린아이에게 자 연스러울 리 없었다.

몇 번이고 은동은 박차고 나가 오엽과 놀고 싶었으 며, 또 바깥의 정황은 잘 돌아가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일이 꼬여서 조선이 이미 망해 버린 것은 아 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 물었으나 오엽은 아직 난리 가 끝나지 않았다는 대답만 했다.

하긴 오엽도 조그마한 산골 마을에서 매일 이곳만왕복하는 정도이니 세상일을 잘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걱정이 되네. 삼신할머니는 내가 중요한 역할을 할 거라 그러셨는데… 1…….. 내가 틀어박혔기 때문에 전쟁

이 꼬여가는 것은 혹시 아닐까?’

그러나 자기 같은 어린아이 한 명 때문에 일이 꼬 인다는 것을 믿기도 어려워서 은동은 통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기분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뛰어나가 태 을사자라도 찾아가서 사정을 알아보고 싶었다. 그러 나 은동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안 돼. ….나는 아직 법력을 이루지도 못했고 원 수를 갚지도 못했잖아? 그런데 이렇게 마음이 흔들 려서는 안 돼! 안 되고 말고!’

그러던 중 은동은 아버지를 꿈에서 보았다. 그저 보 기만 했을 뿐, 특별한 말을 나눈 꿈도 아니었는데도 은동은 깨어나서 엉엉 울었다. 그 꿈 덕분에 은동은 다시 아버지의 죽음과 호유화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너무 편안하게 지내 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동은 다음날 오엽이 와서 밥을 넣어주자 오엽을 소리쳐 불렀다.

“오엽아!”

“네?”

“음…… 할 말이 있는데………….”

“뭔데요?”

은동은 오엽에게 자신은 앞으로 어느 때가 될 때까지 아무도 만나지 않겠으며 아무와도 말을 하지 않 겠다는 맹세를 털어놓았다. 남과 이야기를 하면 마 음이 자꾸 헝클어질 것 같아서은동은 독한 결심을 한 것이다. 그 말에 오엽은 깜짝 놀랐다.

“그러면・・・・・・나도 안 되나요? 나하고도 이야기하지 않을 거예요?”

“너하고야 어찌 말을 안 할 수 있겠니? 다만 꼭 필 요한 이야기가 아니면 좀 삼가도록 하자.너는 나중에 유정스님이나 흑…………… 아니 범쇠나 태을서방이 오면 내가 아무도 만나고 싶지않아 한다고 전해주 려무나.”

일단 결심하기는 어려웠지만 마음을 정하고 나자 은 동은 다시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은동은 그렇 게 수많은 시간을 동굴 안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다만 오엽과 가끔 목소리만나누면서 보냈다.

은동은 스스로의 결심이 혹여 흔들릴까 봐 우려하여 날짜조차 세지를 않았다. 아직 법력을이루지도 못 했는데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게 되면 결심이 흔들릴 우려가 있다고 여겼기때문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은동은 차츰 자신의 몸이 변해가 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는 오엽이가 은동의 목소리 가 굵어졌다며 까르륵 웃는 소리도 들은 적이 있었 다. 그리고 예전에 비해 주위의사물들이 퍽 작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 번 운동은 과거에 입던 낡은 옷을 꺼내어 오엽이 지어다 준 지금 입고 있는 옷과 비교해보고 깜짝 놀 랐다. 어느새 자신은 두 배 정도나 키가 커져 있었 고, 덩치도 그만큼 커졌던 것이다. 그리고 오래 빛 을 보지 않아서인지 려가 가져다준 병도 어느 틈엔 가 거의 나아 있었다.

‘이제 나도 크는구나. 나도 어른이 되어가는 거야.’

은동은 몸의 변화를 느낀 이후부터 무예와 법력 훈 련만이 아니라 책도 구해달라 하여 읽기시작했다. 오엽은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끊임없이 은동 의 시중을 들었고, 유정과 김덕령, 곽재우는 계속 경전과 무예서 같은 것들을 은동에게 보냈다. 그래 도 은동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은동은 점점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 스스로 갈피 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면 도를 닦아야 하고, 그러 려면 잡념이 없어야 한다.’

마음을 굳힌 은동은 세상일에 대해서는 잠시 잊기로 하고 법력과 무예의 수련에만 힘을 기울였다. 하지 만 호유화에 대한 복수심만은 잊을 수 없었다. 오히 려 점점 나이가 들면서 은동의 마음속에 더욱더 사 무쳐 왔다.

은동은 시간이 지나 철이 들면서 오엽의 목소리와 간혹 물건을 넣어주는 오엽의 흰 손을 볼때마다 공 연히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알 수 없는 마음이 사람들이 이야기하던 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운동은 오엽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 만 그것을 느끼면서부터 과거에 호유화가 자신에게 느꼈던 것이 바로 정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고 보면 은동은 어리기는 했지만 자신의 마음속에도 그 런 마음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은동은 그런 마음을 애써 지우려 했다.

‘호유화는 원수야. 그리고 호유화는 믿을 수 없어. 뚜렷한 형체가 있지도 않고 마음대로 둔갑을 하니 무엇을 보고 정을 느낀단 말야. 호유화는 인간도 아니고………… 요사스러운 존재일뿐이야………….’

한때 좋아했고 정을 받았던 처지인지라 분노와 복수 심은 배반감과 합쳐져 더욱 은동을 격렬하게 만들어 갔다. 아무도 보는 이 없고 말할 상대도 없는 혼자 만의 생활이라 은동을 보다더 괴팍하게 만들어갔 다. 단 한 가지 은동의 낙이 있다면 오엽과 동굴 너머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이었다.

오엽에 대한 은동의 마음은 처음에는 고마움에서 점 차 정겨움으로, 그리고 보다 더 나아가려 하고 있 었다. 그러나 은동이 그렇게 나아갈수록 오엽은 점 차 은동과 거리를 두려고 하는것 같았다.

물론 은동에 대해 극진히 정성을 쏟는 것만은 변함 이 없었으나 은동이 감정이 복받쳐서 동굴을 뛰어나 가기라도 할작시면 오엽은 냉랭히 거절했다. 은동은 과거 오엽에게 호유화의 술법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 지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는데 은동이 망설일 때마 다 오엽은 은동을 다그치고 격려하였다.

“도련님 (나으리라 부르지 못하게 한 다음부터 오엽 은 은동을 도련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호유화의 술 법이 그렇게나 대단한데 도련님은 지금 호유화와 대 적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때까지는 아무 생각 마시고 수련에만 몰두하세요.”

그때마다 은동은 아무 말도 못하고 다시 동굴 벽을 바라보며 한숨만 내쉬었다. 어떨 때는이것저것 다 집어치우고 오엽이와 같이 산속에 숨어서 살까 하는 생각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산속으로 숨어 보았자 호유화가 마음 만 먹는다면 자신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결국 스스로를 위해서도 은동은 호유화를 상대할 만한 힘 을 길러야 했다.

지금은 호유화가 은동에 대해서 잊은 듯 자신을 찾 지 않는 것 같았고, 그 점이 조금 의아하기는 했으 나 은동은 그저 다행이라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세월이 지나 은동은 몸이 커지면서 법력이 부쩍부쩍 늘어가는 것을 느꼈다. 은동이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일이 수월하게 풀려가고 있었다. 그리 고 은동은 식욕도 왕성해졌다.동굴 구멍으로 비치는 빛으로 볼 때 날이 밝은데도 낮에만 밥을 세 번씩이 나 먹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은동은 자신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혼자서 가늠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 은동은 법력이 늘어나는 것을 느끼면서 점점 기뻤다. 신도 났고 뭔가 가슴속에서부터 뿌듯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이대로라면 호유화에게 복수를 할 날도 멀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금씩 법력이 깊어지고 수련의 정도가 올라갈수록 은동은 모든 것이 허무하지 않는가 하는생각도 간혹 하게 되었다.

이제 법력이 어느 정도 수준에 다다르자 실제로 술법을 써보기에 동굴 안은 너무도 좁아졌다. 하지만 은동이 생각할 때 아직도 호유화와 상대하기에는 힘 들 것 같아서 조금 더, 조금만 더 참자고 하면서 이제는 조용히 좌선하고 법력을 키우는 데에만 정신 을 쏟아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 결엔가 은동은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고, 잠을 자지 않아도 졸립지가 않았 다. 그리고 정신도 명경지수처럼 맑아져서 스스로의 마음을 통제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그렇게 은동의 몸은 점차 초인의 경지로 들어갔으나 은동의 정신은 여전히 복수심 등이 얽힌 인간적인 감정을 펼쳐 버 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간 전황은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1593년 2월에는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왜병수만을 무찌르는 큰 공적을 올렸는데, 이것이 바로 행주대 첩이다. 그런데 이 행주대첩에는이순신의 부하 정 걸이 큰 공을 세웠다.

그 연유는 이러하다. 한참 싸움이 절정에 올랐을 때 조선군은 화살이 떨어지고 말았다. 때마침 조방장으 로 주로 연락책을 담당하고 있던 이순신의 부하 정 걸의 판옥선이 싸움이 일어난것을 보고 수로로 행주 산성으로 접근하여 화살을 보급하게 되었다.

판옥선 한 척에 실린 화살의 양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조선군이 수로로 보급을 받는것을 본 왜 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져, 결국 전세에 결정적인 영 향을 주었다.

그해 김덕령도 의병을 일으켰으며 각지는 의병들이 난무하여 왜군들은 이제 간신히 경상도연안만 지킬 지경이 되었다. 더구나 이순신의 활약으로 보급이 완전히 끊어진 왜장들은 히데요시의 분노가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더 견딜 수 없어서 공모하고 1593 년 4월에 한양에서 탈출하여 대퇴각을 하기에 이르 렀다.

그런데 정작 조선에 도움을 주어야 할 명나라는 다 른 꿍꿍이를 품고 있었다. 명의 병부상서석성의 지 령으로 파견된 심유경은 나름대로는 열심히 활약을 했으나 그의 활약은 협잡에 가까운 것이었다. 전쟁 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게 된 고니시와 심유경은 결 탁하여 강화를 하려했으나 히데요시의 고집은 만만 치 않았다.

더구나 히데요시가 내건 조건과 명국이 내건 강화의 조건은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궁지에 몰린 그들은 마침내는 엄청난 협잡을 생각해 냈다. 바로 히데요시가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약점 을 이용하여 히데요시를 속여서 거짓된 조건으로 강 화를 하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중간에 알게 된 조선과 명국의 사 신들은 모두 겁을 먹고 일을 떠넘기거나 시간을 끌어 회담은 점점 늦어져만 갔다. 조선은 이제 다 이겨가는 판에 이루어지려는 강화에 커다란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 중 가장 펄쩍 뛴 인물은 바로 상감인 선조였다. 그 선조를 보고 태을사자는 흑호에게 이렇게 말했 다.

“저 사람은 일국의 왕으로서는 너무 도량이 좁고 의 심이 많으며 계략을 꾸며 사람을 해치기를 좋아하는 성격인 것 같네. 예전부터 저 사람의 주변에 알 수 없는 요기가 흐르는 것을느낀바 있는데 아무래도 걱정이 되네. 인간의 일이니 간섭을 할 수는 없지만 마수들이 관여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흑호의 의견은 달랐다.

“그건 나두 느꼈수. 그렇지만 마수들이 그리 큰 영 향을 끼치는 것은 아닌 듯허우. 뭐 좀 모자라기는하지만 그렇다구 왜국에 항복을 하는 것도 아니고, 대강대강 꾸려나가기는 하잖수?”

태을사자는 심각한 목소리로 되받았다.

“마수들의 계략은 그리 빤히 들여다보이는 투로 이 루어지지는 않네. 이미 신립의 예에서 그교활함을 보지 않았는가? 놈들은 분명 상감을 통해 무슨 일 을 꾸밀 것인데………. 아무래도예감이 불길하군.”

아무튼 일은 어느 정도 해결되어 가려는 듯이 보였 다. 명나라측에서는 심유경이, 왜국측에서는 고니시 가나와 1593년 3월 7일 경에 휴전회담이 이루어졌는데 이때의 합의 내용은 대강다음과 같았다.

– 포로가 된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 및 그 수행원을 석방한다.

– 왜군은 4월 8일 한양에서 철수한다.

– 명군은 귀국한다.

– 명의 강화사(講和使)를 왜국으로 보낸다.

그러나 이해 5월 23일, 왜국 나고야성에서 진행된 강화회담에서 심유경은 난처한 처지에 부닥쳤다.

명측의 요구조건은 원래 다음과 같았다.

– 왜국은 점령한 조선 전체를 반환한다.

– 두 왕자를 즉각 석방한다.

– 풍신수길은 이 전쟁의 책임을 지고 사죄한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들떠하며 내놓은 국서의 내용은 전혀 이치에 닿지도 않는 것이었다.

– 명국의 공주를 일본의 황후로 하게끔 준비할 것.

– 명국과 일본은 교역을 할 것.

-명 ·일 간에 우호관계가 변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할 것.

– 조선 8도 중 경기, 충청, 전라, 경상도는 일본의 차지로 할 것.

– 작년에 생포한 두 왕자는 돌려보내나 조선왕자와 대신들은 인질로 일본으로 올 것.

– 조선왕과 대신은 앞으로 변심하지 않겠다고 서면으로 약속할 것.

이런 말도 되지 않는 내용을 가지고 명국으로 가면 심유경은 즉각 목이 달아날 판이었다.그러나 심유 경은 그렇다고 ‘이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소’ 라고 말할 처지도 못 되었다. 그리되면 아마도 심유경은히데요시에 의해 그 자리에서 목이 달아났을 테니까.

궁지에 몰린 심유경은 고니시와 짜고 부산에서 히데 요시의 문서를 변조하기에 이르른다. 즉,각 조항을 모두 빼고 ‘나를 일본국왕으로 봉해달라’ 라는 내용 만으로 국서를 변조한 것이다.

이 과정을 태을사자와 흑호는 다 지켜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저런 식으로 부린 협잡이 끝이 좋을 리가 없네. 이 거 난리가 또 나겠구먼…….”

그뒤로 심유경은 있는 힘을 다해 시간을 끌기에만 급급했다. 사실 그 와중에도 왜군은 6월23일, 비 열하게도 진주성을 급습하여 함락시키고 수많은 군 민을 몰살시키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이로써 조선은 더 이상 이런 강화조약 따위는 별볼일 없다는 경각 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를 틈타 벌어진 왜군의 진주성 공격은 체면 회 복을 위한 비겁한 수단일 뿐이었다. 왜군은 남은 모 든 여력을 몰아 진주성을 함락했던 것이며, 곧이어 왜군의 부대가 거의 퇴각하여본토로 돌아가고 만다. 그러나 이때 왜군의 상태는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 다.

이와는 달리, 조선은 그 참담한 꼴을 보고 이런 같 잖은 강화회담 따위는 별볼일 없을 것이라는 것을 누구나 느끼고, 나름대로 군비확충에 힘쓰게 되었 다. 특히 이순신은 이전부터 구상해 오던 전선 이 백오십척의 대함대를 편성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 을 아끼지 않았다. 그원동력은 이순신의 이름을 보 고 모여드는 수많은 난민들이었다.

허나 이순신은 그들에게도 식량을 공급해야 했고 승전을 거둘 기회가 없어지자 노획할 물자도 없어져서 군량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더구나 여역의 기승 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고 병마에 시달려서 가뜩이나 마음이 약한 이순신은 심한 신경쇠약에 다 시 시달리게 되었다.

게다가 이순신의 신경증을 돌보아 주던 은동이 사 라져 버린 후라 이순신의 용태는 더더욱나빠졌다.

한편 왜국에서 고니시의 수하인 고니시 죠안(小西 如安)이라는 자가 북경에 변조된 문서를들고 가니 당시 명나라의 신종황제는 의아하게 여겼다. 그러나 고니시죠안이 대강 둘러대어 위기를 넘겼다.

이로써 명나라는 이미 왜국이 항복했다고 믿고는 전 승축하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결국왜국과 영국 이 두 나라 모두 이겼다고 잔치를 벌이는 우습지도 않은 일이 벌어졌으니, 이를바라보는 태을사자와 흑 호는 점점 더 우울해질 뿐이었다. 이런 짓을 하는데 결말이 좋게 날리 없다고 둘은 확신했던 것이다.

또한 신종황제는 다시 왜국으로 정사 이종성, 부사 양방형과 수행원으로 심유경을 보냈는데, 이종성은 그 어마어마한 협잡의 음모를 알고는 부산에서 그대 로 도망쳐 버렸다. 얼마나 그협잡에 질렸으면 자기 나라도 아닌 말도 안 통하는 타국에서 도망쳐 버렸 을까? 덕분에 강화회담은 또다시 시간을 끌게 되었 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조선의 선조는 이러한 강화에 노발대발하면서 남은 왜군을 모조리 몰살하라는 명 령을 수도 없이 내려보냈다. 왜군은 대부분의 군대 가 철수하였지만 수많은 곳에작은 왜성(倭城)들을 쌓고 있었으며 제해권 확보에 신경을 써서 남해의 많은 작은 섬에 성을 쌓고 웅거하였던 것이다.

한편 태을사자와 흑호는 근심이 끊이질 않았다. 마 수들의 발로는 거의 그쳤지만, 어디에 숨었는지 나타나지도 않았다. 더구나 그들을 돕는 조력자마저 생겼으니 그는 바로 중국에서무신(武神)으로 숭앙 받는 관우(關羽)였다. 삼국시대의 명장이었던 관우 는 중국인들에게서 대단히 숭앙받다가 명군의 파병 을 타고 이 땅에까지 전파되었다.

관우는 명군의 싸움에 많은 영험을 보여 사람들이 극진히 섬겼고 우리나라의 일부 사람들도절반은 관 우의 영험함 때문에, 절반은 명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관우의 사당을 수없이 세웠다. 이를 ‘관왕묘’ 라고도 부르고 ‘관제묘,’ ‘동묘’라고도 불렀는데 그 유적은 지금도 남아있다.

그런데 이 관우라는 인물은 특별한 인물로서 그는 일종의 원혼으로 승천하지 않고 남아 있는 터였다. 관우는 당시 자신이 섬기던 황제이자 형이던 유비의 적수인 손권에게 죽음을 당하였는데, 그 원통함에 사무쳐 구천을 방황하다가 승천하지 못하고 그대로 땅에 남은 것이다. 그 이후 시대가 바뀌고 사람들이 올리는 제사를 받자 관우는 스스로의 영혼을 달래어 사람들을 돕는 방면으로 나섰다. 그리고 이번의 난리 때에 관우의 영혼은 조선으로 건너왔다.

그와 태을사자, 흑호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의 영력은 과연 비범한 데가 있었다. 흑호는관우의 도 움을 받으면 어떨까 하였으나 태을사자는 아무도 이 일을 더 알게 해서는 안 된다는 신계의 엄명을 떠올 리고 흑호를 만류하였다.

그러나 관우의 영혼은 어느 계에서도 속하지 않은 다소 특이한 존재였으며 관우는 흑호를마음에 들어 했다. 그의 의제(義弟)였던 장비와 성격이 닮은 데 가 있다고 하여 그런 것인데, 그런 연유로 하여 관 우는 일이 되는 대로 태을사자의 일을 도와주곤 했 다.

강화회담이 진행중인 동안에도 크고 작은 사건은 끝없이 벌어졌고 싸움도 끊이지 않았다.그 당시 이순신은 신경증의 악화로 몹시 고통받고 있었으며, 소심하고 너무나 정확한 것을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사소한 일에 있어 수없이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원균과의 다툼인데, 원래 원균을 체질적으로 싫어하던 이순신은 원균과큰 다툼을 벌 이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원균이 나이 어린 자신 의 아들이 전쟁에서 공을 세웠다고 허위보고를 한 것을 이순신이 조정에 그대로 고한 것이다. 그 탓에 오히려 이순신은 ‘공을 탐내고 시기심이 많은 인물’ 로 찍혀 버리는 결과만 낳았다. 그것을 보고 흑호는 혀를끌끌 찼다.

“공연히 왜 저런 것을 가지고 저러는지 몰러. 왜란종결자가 왜 저리 속이 좁나 몰러?”

그러나 태을사자의 의견은 달랐다.

“이순신은 지금 정신적으로 위기 상황이네. 그는 불안해하고 있어.”

“무엇으로 말이우?”

“글쎄…. 이순신은 지금 너무 유명해져 있으니……그리고 원래 원균을 싫어하지 않았는가?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는 게지. 저렇게라도 하여 배 출하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원균에대한 증오의 감정 을 풀어 버릴 수 없어서 그런지도 몰라. 이순신은 그런 생각도 해보지 않고 일을 저지를 인물은 아니 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겠지.”

태을사자의 지적은 맞았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이 더 있었으니, 이순신의 불안증은 단순히 원균을 미 워하는 데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자 신이 너무 유명해지는 것이 불안했다.

선조의 됨됨이는 신하가 출중해지는 것을 누구보다 못마땅해하는 편이었으니, 이순신은 자신이 몹시 불안한 처지에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러 나 멋모르는 백성들은 이순신을 숭상하여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그것이 반갑지 않은 바는 아니었으되 이순신은 바로그것이 불안했다.

비록 많은 신하들이 애써서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 사라는 해군의 최고 실력자가 되기는 했으되, 선조 의 심기가 불편한 것을 유성룡을 통해 누구보다도 명확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그러다 보니 이순신 은 어떻게 해서든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야 빌 미를 잡히지 않는다는일종의 불안증과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순신은 태을사자도 감탄하였듯이 무장으로서의 능 력뿐만 아니라 행정가로서의 능력이 놀라울 정도로 뛰어났는데, 그 정도가 지나쳐서 지나치게 원칙주의 에 흐르고 있었다. 아주 작고 사소한 일이라도 이 순신에게는 예외가 없었으며, 어떤 일이라도 불합리 한 점이 발견되면절대 그대로 보아 넘기지 않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많은 적을 만드는 것임을 모르는 이순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가뜩이나 소심한데다가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이순신의 정신상태는 몹시 쇠약해져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텨나갈 수 없 는 상태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던 중 1594년 4월에 태을사자와 흑호 둘다 를 놀라게 한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바로이순신이 사명대사, 즉 유정의 비행을 조정에 고발한 사건이 었다. 유정은 너무 나이가 든 서산대사에게서 승병 의 지휘권을 일임받아 마음껏 활약하고 있었으며, 보통 사람들은 이제 유정을 사명대사라고 불렀다.

그런데 사명대사가 승군을 초모하는 방법에서 당시 체찰사이던 윤두수의 공문을 받아 승군을 모집한 사실이 이순신에게 알려진 것이다.

그 모집된 승군 중에는 이순신의 관할 하에 있던 승려들도 몇 있었는데, 바로 여기에도 이순신의 소심 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사명대사가 걸출한 인 물이며 애국자라는 것을 모를리 없는 이순신은 ‘그 래도 원칙은 원칙이다. 내 소관의 사람을 빼앗아간 것은 불법이고 조정에 알려야만 한다’고 하여 장계 를 올려 사명대사를 고발했다.

물론 윤두수의 힘으로 이 일은 유야무야가 되었으나 윤두수는 이순신을 이때부터 몹시 괘씸하게 여기게 되었다.

흑호는 다시 이순신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참 갈수록 태산이우. 이순신이 왜란종결자 맞 우? 세상에 그까짓 일을 가지고 고자질을 하다 니…………. 유정스님이 승군을 좀 모집하더라도 난리 중에는 정법이 아니라 편법으로해결할 일도 좀 있 는 법인데… 좀 심한 것 아닌지 몰러. 저렇게 꽉 막혀서야… 흠흠…….”

그러나 태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까지 나온 이순신의 행동은 이순신의 신경상태가 거 의 파탄 직전까지 갔다는 것을 의미했다. 태을사자 는 그 점을 생각하며 몹시 불안해졌다.

그해 3월, 이순신의 함대는 당항포에서 왜선 30여 척을 깨트리는 승리를 거두는데, 이때 결국이순신과 원균은 정면으로 충돌하고 만다. 이때까지 참고 참 았던 감정이 더 이상 타협하지못하고 정면으로 튀 어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원균에게 정면으로 말을 할 만한 트인 성격이 못 되어서 결국 남들의 비웃음을 사는 ‘고자질’의 형태로 원균을 고발하게 되었다.

원균은 이때의 전승보고를 자기가 있는 경상도의 장 수들이 모두 깨트린 것처럼 써서 보냈는데, 이순신 은 이를 ‘그 때문에 진중의 모든 장수들이 괘씸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사오니조정에서는 참고하여 시행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여 노골적으로 원균을 공격했다. 덕분에원균은 이순신에게 행패를 부리기 시작하여 이순신의 신경은 더욱 헝클어졌다.

1594년에는 이순신과 김덕령, 곽재우가 함께 만날 기회가 처음으로 생겼다. 조정의 명은 장문포 산성 을 공격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이순신은 신 경쇠약으로 시달리고 있었고, 김덕령과 곽재우는 이 순신이 대단한 인물이라 여기고 이순신을 만났으나 그를 보고는 실망해버렸다.

이순신은 단순히, 무력도 얼마 없고 그리 용맹해 보 이지도 않는, 몸 약하고 신경질적인 인물에 불과해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이순신이 유정을 고발하고 원균을 고발하는 등의 행동은 ‘옳기는 하나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사 내답지 못하다.’는 평을 들어 곽재우나 김덕령만한 인물도 이순신을 좋게 보지않았다.

더구나 장문포에서는 왜군이 아예 진격할 길목을 완 전히 차단하고 있었기에 공격할 수조차없었다. 그 리고 이순신은 우리 군사들의 피해를 내느니 돌아가 자고 계속 주장하였는데, 이순신의 전공을 이야기로 만 들은 곽재우나 김덕령이 듣기에는 마치 겁쟁이의 말투 같아 실망할수밖에 없었다.

왜군은 슬쩍 싸움을 걸긴 했어도 이순신과 석저장 군, 홍의장군이 함께 왔다는 소리만 듣고아예 싸움 에 응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김덕령은 그 엄청난 신력으로 너무나 유명해져 왜군들은 석저장군의 이 름 자체만으로도 무서워하여 어이없게도 김덕령은 한 번도 왜군과 직접싸울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것 이다. 그래서 그들은 헛되이 되돌아오고 말았는데, 김덕령은 이순신에 대해 완전히 실망했다.

또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태을사자와 흑호 역시 낙담하였다. 대단한도력을 지닌 그들이 이순신을 그렇게 평가한다면 앞으로의 길이 험난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거 이순신, 이순신해서 대단한 인물인 줄 알았는데 헛소문인가 보우. 어디 닭 잡을 힘이나있겠소?”

김덕령은 장문포에서 철군하면서 곽재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곽재우는 신중하게 되받았다.

“그러나 나는 이순신을 조금 달리 보네. 수많은 백 성들이 그를 보고 한산도에 머물며 떠나지 않지 않 는가? 그리고 건조중인 수많은 군선들을 보게나. 이 순신이 그리 큰 인물 같지는 않지만, 그리 얕잡아 볼 인물이 아닌지도 모르이.”

“나는 과거 그 이상한 존재들이 왜란종결자 운운하 여 이순신이 왜란종결자인 줄 알았수. 근데 아닌 모 양이우.”

“그렇긴 하지. 이순신의 공이 크지만 정말 그런 공을 세울 인물이라고는 나로서도 보이지않던걸?”

결국 곽재우 역시 그저 이순신에 대해 완전한 악평 을 하지 않는 정도로 일을 끝내게 되었다. 태을사자 와 흑호가 알고 있던 유정, 김덕령, 곽재우 등은 모 두 이순신을 별볼일 없는 인물로 치부하게 되자 흑 호는 몹시 안쓰러워했다. 더구나 그해 11월, 이순신 과원균의 불화는극에 달하였다.

마침내 이순신은 더 이상 허물어지는 신경을 견디지 못하고 원균과 같이 있게 할 바에는 삼도수군통제사 의 직을 면직시켜 달라고 조정에 요청을 하기에 이 르렀다. 그러나 선조는 이순신이 제 마음대로 이래 라저래라 한다며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조정의 많은 대신들은 이순신이 실제 로 공을 세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결국 원균은 3개월 후 충청병사로 이임되어 드디어 이 순신의 곁을 떠난다. 계속 신경을 거슬리던 원균이 없어지자 이순신은 자못 홀가분한 기분이 되어 다 시 수군의 정비에힘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 사이 협잡이나마 강화회담이 끌어진 덕분에 조 선에서는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큰 싸움없이 지낼 수 있었다. 조선군은 조선군대로, 왜군은 왜군대로 그 시기 동안 다시 군비를 쌓고 병사들을 정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협잡은 들통났는데, 그 경 과 또한 장난과 같다.

고니시는 히데요시가 까막눈인 점을 이용, 히데요시 에게 명에서 전해진 국서를 읽어주는 자에게 국서를 변조하여 읽어줄 것을 당부하였으나 그자는 두려움 때문에 말을 더듬다가 결국은 원래의 내용대로 읽고 말았다. 히데요시가 노발대발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히데요시는 당장 고니시를 목베라 하였으나 고니시는 침착하게 ‘나 혼자 한 일이 아니오!’

라고 외치며 당시 국서를 변조할 때 수많은 다른 장수들이 찬성하였다는 증명서류를 꺼내보였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그 많은 수하들을 모조리 죽일 수도 없어서 씩씩거리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런 그를 히데요시의 첩인 요도기미(殿 정전)와 가장 촉망받는 신하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이 잘 달래어 결국 히데요시는 고니시를 용서하기에 이른 다.

요도기미는 당시 일본 제일의 미녀로 일컬어진 여인 이었으며, 히데요시의 두 번째 아이 히데요리를 낳 아 그 총애가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 덕에 히데요 시는 고니시를 용서하여 고니시는 간신히 목이 다시 붙은 셈이 되었다.

하지만 심유경의 운명은 그렇지 못했다. 심유경은 협잡이 드러나자 본국으로 송환되어 결국처형되었으며, 병부상서 석성도 투옥된 후에 정유재란이 일어 난 다음에 옥사하고 만다.

태을사자와 흑호는 이러한 과정을 대강 알 수 있었 다. 물론 태을사자나 흑호는 조선땅을 떠나 왜국으 로 가지는 못했으되, 많은 저승사자 등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소상히 들을 수 있었다.

태을사자는 그 이야기를 듣고 흑호에게 이런 말을 했다.

“기억나는가? 자네가 들었다던 고니시와 자객의 대 화 내용 말일세…………. 그리고 난리 초기부터 히데요 시는 자식이 죽어서 미쳤다고들 말했지. 만약 마수 들의 농간이 거기에 개입되어있다면………… 히데요시 가 두 번째 아이를 가진 것은 이 난리를 일으킨 것 에 대한 보상이 아니었을까?”

히데요시가 쓰루마쓰가 죽은 이후, 요도기미에게서 두 번째 아이인 히데요리를 얻은 것은 1593년 8월 3일이었다. 그렇다면 히데요리의 잉태는 1592년 11월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당시 히데요시는 자 식을 얻기 위해 2백여명의 여자들과 관계를 가졌으 나 성공하지 못해 그의 성기능은 지극히 의심스러운 상태였다.

더구나 그의 나이가 57세여서 아이를 가지기에 거 의 불가능한 나이였다는 사실도 그러하다.물론 57 세라고 아이를 가지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어째서 그동안 그렇게 애를 써도 생기지않던 아이가 하필 환갑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생길 이유가 있으랴?

태을사자의 생각에 히데요리는 필경 히데요시의 아 이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요도기미가 바람을 피웠 거나 아니면 의식적으로 아이를 낳기 위해 씨받이를 썼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몽마夢 꿈에 나타나서 치정을 조장 한다는 악몽의 유령.) 류의 마수들이 무엇인가를 조작한것이 틀림없었다.

아무튼 어찌되었건 히데요시는 혈육으로서의 아이보 다는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 즉 자신이 이룩한 것을 유지시킬 존재로서의 자식이 필요했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부정이 있었든마수가 관계했든 개의치 않고 미친 듯이 기뻐했으며, 요도기미의 말이라면 무엇이건 들어주었다. 고니시가 목숨을 건진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다.

바깥일이 그렇게 돌아가는데도 은동은 얼마만한 세 월이 흘렀는지도 몰랐다. 은동의 법력은나날이 발 전되어 이제는 거의 인간세상에서는 적수를 찾을 수 없는 경지에까지 도달하였다.게다가 법력을 이루면 이룰수록 그 위력에 점점 놀라게 된 은동은 스스로 에 대해 점점 기가질리고 있었다.

은동은 꽤 오랜 시간 동굴 안에서 법력을 연마하였 다. 아마도 그런지 몇 년은 지났을 터였다. 그런데 어느 시기가 지나자 일사천리로 늘어가던 법력의 진 도가 갑자기 느려졌다.

그러다가 마침내 법력의 상승이 어느 고비에 이르러 뭔가가 꽉 막힌 듯이 진도가 잘 나가지 않게 되자 은 동은 몹시 괴로웠다. 그것은 바로 도가에서 이야기 하는 임, 독 양맥의 관통이었는데 이것이 몹시도 어 려웠다.

사실 이는 인간이 일생을 두고 수련해도 될까말까 할 정도로 몹시 어려운 일이었으나, 은동은 특별히 스승을 둔 것도 아니고 해서 그런 사실은 알지도 못 했다. 오히려 운동은 뻔히 책에 나와 있는 것조차 수련하지 못한다고 하여 스스로를 몹시 부끄럽게 여 기기까지 했다.

은동은 수십일이나 노력을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 했으며 그때마다 몸에 부작용이 와서 극심한 고통 을 느끼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은동은 오엽에게 푸념하듯이 이야기를 걸었다.

“나는 영 재주가 없나봐…………. 잘 되지가 않아.”

“무엇이 잘 안 되는데 그러세요, 도련님?”

오엽은 은동이 나으리라고 부르는 것을 금한 이후로 은동을 도련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말해도 오엽이는 모를 거야. 좌우간 잘 안돼…..”

“더 열심히 해보시면……”

“좌우간 안 돼! 안 되는 걸 날 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야!”

“안 될 리가 있나요? 도련님은…….”

“난 안 돼! 나 같은 건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구!”

은동이 소리를 높이자 오엽은 차근차근한 말투로 은 동을 달랬다.

“도련님이 쓸모없다면 세상에 쓸모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도련님은 자질이 뛰어나시고영리하시니 틀림없이 큰 일을 이루실 수 있을 거예요…..”

은동처럼 오엽도 그동안 나이를 먹어 목소리가 예전 의 귀여운 음성에서 나긋나긋하여 녹아내릴 듯한 음성으로 바뀌어 있었다. 특히 지금은 더욱 그러했 다.

은동은 그 목소리를 듣자 자신도 모르게 찔끔했다. 목 언저리부터 가슴까지가 뜨거운 물이흘러내리는 듯이 찌르르했다.

“네 까짓 게 뭘 안다고 그래! 난 다 틀렸어! 이젠 다 쓸데없는 짓이라구!”

은동은 오히려 화를 벌컥 냈다. 부끄러운 감정을 감추려고 더욱 일부러 화를 냈다는 편이맞다. 사실 은동은 마음속으로는 오엽에게 화를 내고 싶은 기분 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일이 잘 되지 않 자 목소리부터 높아졌다. 이러면 안 된다고 마음을 다잡으려 하면서도잘 되지 않았다. 사실 은동은 바 야흐로 사춘기에 접어든 것이다.

실제로 은동은 오엽이를 은근히 좋아하게 되었는데 도(하긴 오엽이말고 다른 대상은 있지도않았지만) 그것을 똑바로 표현하지 못하고 뭔가 비뚤게 표현했 다.

은동이 소리를 치자 오엽이가 대들려고 하자 은동과 오엽은 한바탕 말싸움을 벌였다. 평소의 은동이 같았으면 누구와 말다툼을 할 성격도 아니었지만 동굴 안에서만 혼자 지내면서은동은 성격이 꽤 괴팍 해진 것이다.

거의 제정신이 아니게 된 은동은 더욱더 소리를 지 르며 동굴벽을 치며 외쳤다.

“관둬! 다 그만두라구! 썩 물러가! 그리구 앞으로 는 다시 올 필요도 없어!”

은동이 그리 외치자 오엽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 러갔다. 오엽이 떠나자 은동은 이상하게도 가슴이 울컥하여 엉엉 소리를 내며 동굴 구석에 처박혀서 울었다. 왜 자신이 그랬는지스스로도 도무지 알 수 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싫어서 견딜 수 없 었다.

게다가 해야 할 일들이 은동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 러 은동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은동은아무 것도 하지 않고 먹지도, 자지도 않으며 그저 죽은 사람처럼 괴로워하며 누워만 있었다. 오엽도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덕령이 밤중에 찾아왔다. 그러고 는 은동에게 슬며시 몇 구절의 법문을 일러주고 돌 아갔는데, 일러준 방법대로 하자 조금씩 경맥이 열 리는 것 같은 조짐이 들었다. 은동은 조금 기분이 좋아져 다시 수련에 들어갔다.

하지만 오엽은 그날 이후 마음의 상처를 입었는지 말을 하려 하지 않아 은동은 몹시 답답했다.

그 다음날 밤의 일이었다. 은동이 혼자 괴로워하고 있는데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직접 소리 가 들렸다기보다는 심상치 않은 느낌이 왔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 느낌이 이상하여 은동은 귀를 기울여 보았다.

은동의 법력은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해 있었기 때문에 직접 귀로 듣지 않아도 상황을느낌으로 알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만, 아직 습관이 남아 있어 귀를 기울인 것이다. 그런데가냘픈 오엽의 목소리 가 들려왔다.

“도련님・・・……도련님 ・・……구해줘요…….'”

그와 동시에 무엇인가 사나운 기운 같은 것이 느껴 졌다. 잘은 몰라도 오엽이 위급한 상황에몰린 것이 틀림없었다. 은동은 그 순간 맹세도 잊고 동굴문을 막았던 바위를 단번에 차내며밖으로 뛰쳐나왔다. 바 위는 은동의 일격에 박살이 나서 그 자리에서 가루 로 변해 버렸다.

밖으로 나온 은동은 차가운 밤공기와 오랜만에 보 는 별이 뜬 밤하늘을 잠시 바라보았으나그렇다고 한가로이 밤의 정취를 즐길 때가 아니었다. 은동이 힘을 주어 몇 걸음을 뛰자 어느새 오엽이의 소리가 들려오는 곳에 도달해 있었다.

“오엽아!”

그곳에는 한 명의 여인이 쓰러져 있었다. 바로 오엽 이었다. 오엽이는 기운을 잃고 혼절한 것같았다. 그 리고 여인의 앞에는 한 마리의 사나운 곰이 으르렁 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은동은 쓰러진 오엽이 의 앞을 막아서며 피식 웃었다.

“나는 또 마수가 나타난 줄 알았는데…고작 곰이었구나.”

은동은 오랫동안 혼자 지내다 보니 혼잣말을 할 때 가 많았고 그런 습관 때문에 곰에게도 마치 사람처 럼 이야기를 했다.

“이봐, 쓸데없이 사람을 해치려 하지 말고 썩 물러 가라.”

그러나 곰은 무척 흥분한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가만 보니 곰은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은듯, 움직임 을 보아 하니 조금씩 절름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보 고 은동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엇에 이리 상처를 입었을까? 좌우간 상처를 입 었으니 사납기는 하겠구나.”

그때였다. 까무러친 줄만 알았던 오엽이 번쩍 고개 를 들어 운동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은동은 말문 이 턱 막혔다. 그간 오엽은 정말로 아름답게 성장한 것이 틀림없었다. 전에만 하더라도 귀엽기는 하였으 되치기어린 아이의 얼굴이던 옛 모습이 그대로 남 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사한 자태에 은동은 그만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더구나 옷속에 감추어져 있기는 했으나 오엽의 몸매 또한 아름답게 성장하여 완전히 성숙한티를 드러내고 있었다. 대뜸 오엽이 다시 까무러치듯 은동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도련님! 도련님! 저…… 곰……! 저 곰이…………..!”

“염려 말아라.”

곰은 오엽이 일어나자 다시 울부짖으며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은동은 곰이 달려들까봐 두려워 곰에게 달려들었다. 곰은 앞발을 휘둘러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날렵한동작이었지만 은동의 눈에는 한없이 느리게만 느껴졌다.

곰의 앞발을 가볍게 피한 은동은 곰의 아랫배를 일 부러 손바닥으로 쳤다. 주먹으로 치면 타격이 너무 클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도 곰은 괴성을 지르더니 저만치 밀려나가 털썩 쓰러져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은동은 공연한 살생을 한 것이 아닌가 하여 조금 꺼림칙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오엽이를 무사히 구해낸 것이 뿌듯하기도 했다. 이미 곰이 죽었는데도 오엽 이는 울먹거리고 있다가 은동이가 이제 됐다고 말하 자 울음을 터뜨리며 은동에게 와락 안겼다. 오엽이 의 부드러운 몸이 안기자 은동은 갑자기 온몸이 나 른해지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오엽을 밀 어 버리려 했으나 손이 잘 말을 듣지 않았다.

오엽은 더더욱 은동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은동은 고개를 들어 하늘 위의 맑게 떠 있는 달과 별들을 바라보았다. 흐뭇한 기분이 온몸을 휘감았 다.

‘그래・・・・이렇구나………. 산다는 건 이런 것이로구 …….!’

홀연히 은동이는 모든 것이 귀찮다고 생각되었다. 난리고 천기고 다 신경 쓰기 싫었고 모든것이 조그맣고 하찮게만 느껴졌다. 이렇듯 느긋하게, 오엽이 와 같이 지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 순간만큼은 은동은 호유화에 대한 복수심도, 천기 에 대한 걱정도, 왜군에대한 증오심도 모두 잊어 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있노라니 오엽이도 어느새 울음을 그 쳤지만 은동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하지않았다. 은 동은 조용히 오엽에게 속삭였다.

“오엽아…… 지난번에는 미안했다.”

그러자 오엽이 조그맣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오엽아…………… 우리 산에 숨어 둘이서만 살자꾸나. 어떠냐?”

“도련님・・・”

오엽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아버님의 복수는 어쩌시려구요?”

“상관없다. 이제 와서 복수를 한들 아버님이 살아나 시겠느냐?”

“그….. 호유화라는 요물이 도련님에게 다시 나타나 면 어쩌시려구요?”

“그건 모르겠다만… 이제껏 나를 찾지 않았는데 설마 다시 찾기야 하겠느냐?”

“그러면 호유화를 찾지 않으실 건가요?”

“구태여 찾아보고 싶지는 않구나・・・・・・.”

은동은 중얼거리며 다시 오엽이를 꼭 끌어안았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오엽 이도 조금 주춤거리는 듯했지만 얌전히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행복한 시간은 두런거리는 소리에 깨 져 버리고 말았다. 먼발치에서 사람들이올라오는 소 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은동은 조금 놀라 오엽을 떼어내고 말했다.

“누가 온다. 누굴까?”

은동은 다시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러자 먼발치에 서 올라오는 사람의 발소리와 나지막한목소리까지 확실히 들려왔다. 어느새 은동은 천이통(天耳通)이 나 순풍이(順風耳)의 경지에까지 이른 것이다. 놀란 은동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내가 어느새 이렇게 법력이 강해졌던가? 임독맥을 관통시키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은동은 이상하여 시험삼아 조심스레 진기를 유통시 켜 보았다. 그런데 정말 거짓말처럼 임독맥은 물론 이고, 생사현관(生死玄關)까지도 막힘없이 뚫려 거 침없이 되어 있었다. 은동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전설에나 나올 법한 활연관통의 도력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어어… 내가 어느새…….”

정말 모를 일이었다. 은동은 무슨 수를 써도 임독맥 이 뚫리지 않아 고생하고 낙담까지 했는데 어느새 이렇게 되었을까. 그러나 은동은 한편 기쁘기도 했 다. 더 이상 호유화와 싸울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 었다.

하지만 이 경지까지 올라갔다면 나중에 숨어 살다가 태을사자나 흑호가 자신을 찾으려 해도그들에게조차 몸을 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호유화도 자신을 찾아내지 못할 것 같았다. 이제 은동은 정말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될 힘을 얻은 것이다.

‘잘되었구나. 그런데…… 어쩌다가 아무런 힘도 쓰 지 않았는데 내가 이리 된 것일까……. 이상하구 나.’

은동은 혼자 중얼거리다가 다시 올라오고 있는 사 람들에게 생각이 미치자 귀를 기울였다.가만 들어 보니 그 목소리는 잘 아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바로 유정의 목소리였다.

“어어, 저건 유정스님이야!”

은동이 기뻐서 소리치자 갑자기 오엽의 안색이 조 금 어두워졌다. 느닷없이 오엽이 은동을더 꽉 껴안 았다.

“가지 마세요.”

“왜 그러느냐? 유정스님은 나의 스승님이나 다를 바 없지 않아?”

“좌우간 지금은 가지 마세요, 네?”

그러나 운동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참에 은동 은 아예 오엽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 버릴 생 각을 하던 중이었다. 그러면 유정스님과는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아닌가. 게다가 자신을 주로 가르 친 것은 유정스님이었다.

기왕에 유정스님이 여기까지 온 이상 그를 만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은동은오엽을 내 려놓으며 말했다.

“가서 인사만 드리고 올게. 알았지?”

“도련님!”

오엽은 울먹일 듯하며 애타게 불렀으나 은동은 미소 를 지으며 조금만 기다리라는 듯 손짓을하고 발길을 옮겼다. 그런 은동을 바라보는 오엽의 얼굴에 슬픔 과 실망감과 허탈감만이 가득 어려 있었다. 하지만 은동은 그 얼굴을 보지 못했다.

“아니, 누구신가?”

유정은 난데없는 장부 하나가 자신의 앞에 불쑥 나 타나자 깜짝 놀랐다. 분명 주위에 아무도없다고 생 각했는데 이 사람은 인기척 하나 내지 않고 귀신처 럼 홀연히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한 술 더 떠서 넓죽 유정에게 절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유정스님, 그간 별래무양하셨사옵니까?”

유정은 얼떨떨한 김에 합장을 하여 절을 받았다. 그의 옆에 서 있는 처영과 다른 승려들도얼떨떨하기 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댁은 뉘신가?”

유정이 조심스레 묻자 은동은 웃으며 되받았다.

“저를 잊으셨습니까? 이런 참, 농담도 잘하십니다.”

은동은 자신이 동굴에서 나오지 않고 동굴 너머로 이야기만 나눈 탓에 유정이 성장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으로만 여겼다.

“저입니다. 은동이에요.”

그러자 유정은 깜짝 놀라며 다시 은동의 얼굴을 찬 찬히 뜯어보았다. 은동은 키가 크고 많이 성숙해졌지만 아직 이십세가 되지 않은 용모를 지니고 있어 과거의 어릴 적 은동이의 모습이 얼굴에 제법 남아 있 었다. 유정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허, 아미타불. 정말로 은동이가 맞구나! 허 …….”

유정은 그제야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한 빛을 띠 며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허허, 정말 놀랍구나. 그 사이 무척이나 자랐구나. 아주 장한이 되었어. 허허허…..”

“감사합니다, 대사님. 저를 직접 보시는 것도 퍽 오랜만이지요?”

유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럼그럼. 강공이 돌아가신 후로 너를 찾지 못해 무척이나 걱정을 했단다. 컸으니……. 허허…….”

그런데 이렇게훌륭하게 아버지의 말이 나오자 은동은 조금 마음이 무거워 졌지만 그것을 떨쳐내려 애썼다. 유정은 연신 감탄 을 금치 못하며 은동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도력을 무척이나 쌓았구나. 놀라운 일이로고. 선재 라, 선재…….”

유정이 연신 감탄하자 은동은 겸연쩍어 하며 말했 다.

“놀리시지 마십시오. 아직 별로 이룬 것이 없습니 다.”

유정은 은동을 조금 더 찬찬히 짚어보다가 놀란 빛을 드러냈다. 거의 경악에 가까울 정도였다.

“어허……………. 이럴 수가 있는가? 은동이 너 어떻게………어떻게 이렇듯 엄청난 공력을 익혔느냐?

정말로 놀랍구나!”

은동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분명 자신은 유정이 가 져다 준 비급과 설명해준 수련법으로 간신히 그것 을 익힌 것에 지나지 않았는데 유정은 왜 이토록 놀 라는 것일까?

“뭘 그리 놀라십니까? 간신히 써 있는 대로 익힌 것뿐입니다…”

그러나 유정은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놀라움을 감추 지 못하였다.

“네가 이 정도의 기도(氣道)가 있다면 임독맥이 관통되었을지도 모르겠구나…… 맞느냐?”

‘예? 예. 간신히 관통했습니다만………… 생사현관과 십이중루, 기경팔맥 등등도 모두 관통되었는데요?

다행히 모두 한 번에 관통되었습니다만…….”

하지만 은동의 이야기를 유정은 더 이상 듣고 있지 않았다. 은동은 지금 얼마나 엄청난 말을 하고 있 는 것일까? 도방의 권위자라는 정문부나 정기룡은 물론이고 곽재우나 김덕령, 그리고 유정 자신도 아 직 그 경지는커녕 그 발끝만큼도 가지 못한 상태였 다.

곽재우의 진도가 가장 빨라 이대로만 노력한다면 죽 기 전까지는 임독맥을 뚫어 신선의 도를이룰 수 있 을지도 몰랐지만, 생사현관의 타통은 다시 한 번 태어나지 않는 이상은 어림도없는 일이었다. 그런 데 은동의 말을 들으니 모든 혈도와 맥이 모조리 뚫 린, 그야말로 인간의경지를 넘어선 곳까지 발전해 있는 것이 아닌가?

“너……… 너는 정말・・・・・・ 정말로 놀라운 아이로구나! 아미타불! 아미타불!”

은동은 도무지 이상하기만 할 뿐이었다. 유정이 분 명 그런 것을 자신에게 세세히 지도해 주었으니 자 신보다 그 내용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어찌 이렇듯 놀라는 것일까?

“유정스님, 어이 그리도 놀라십니까? 다 스님께서 가르쳐 주신 덕분입니다.”

그러자 유정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내가 언제 너를 가르쳤느냐?”

은동은 유정이 농담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스스럼 없이 대답했다.

“스님이 이전부터 제게 찾아오셔서 비급과 구결들을 전수해 주셨지 않습니까? 석저장군께서도 찾아오셔서………… 그렇지. 어제 오셔서 가르쳐주신 법문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은동의 말이 계속되자 유정은 점점 더 놀라는 얼굴 이 되더니 김덕령 이야기가 나오자 깜짝놀랐다.

“너・・・・・・ 너 지금 석저장군 김덕령, 김공을 말하는 것이냐?”

“‘예……, 그렇습니다만………….”

유정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그 말에 은동은 충격을 받아 자칫 기절할 정도로놀랐다.

“나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구나. 나는 너를 가르친 적도 없으며 오년 전 이후로 너를 만난적도 없다. 그리고 김공이라면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신 분인 데, 어찌 어제 너에게 나타날수 있단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