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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184화


라미아의 침착한 설명과 질문에 뭔가 더 물으려던 오엘이 나직히 한숨을 내쉬며 이드를 한 번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부터 몇 백 년 전, 기록이 없어 그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지만 영국이 중원처럼 검을 사용할 때에 이곳을 찾은 검은머리의 이방인이 있었다고 한다.

이방인은 낯선 검과 낯선 옷을 걸친 중년의 여성이었는데, 나이에 비해 고운 모습과 보는 사람까지 차분히 만드는 분위기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그녀는 어디까지나 이방인.

마을 사람 중 그녀에게 쉽게 접근하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여관에서조차 그녀를 꺼림직 해 하는 모습에 오엘의 조상 중 한 사람이었던 드웰이라는 남자가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조금은 서투른 영어로 스스로 중원에서 왔다고 소개한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남옥빙이라고 했다.

“으음….”

가만히 오엘의 말을 듣고 있던 이드는 남옥빙의 이름이 나오자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발하고 말았다.

옥빙누님이 이 이국 땅에 왔었다니.

청옥신한공을 오엘이 익히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혹시나 하는 생각은 했었지만 정말 그녀가 이곳에 왔었을 줄이야.

그것도 중년의 나이라니…

이드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오엘의 이어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먼저였다.

드웰이라는 남자를 따라 들른 그의 집 식구들도 그녀를 가까이 하진 않았지만 최소한 마을 사람들처럼 피하진 않았다.

아니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분위기와 모습에 오히려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이 주 정도를 머무른 그녀는 더 머물러도 된다는 드웰의 말에도 불구하고 찾을 사람이 있다며 감사를 표하고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그 마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 개월 후였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때마침 드웰은 저번처럼 이방인을 도와주다 영주의 병사들에게 찍혀 몰매를 맞고 있었다.

하지만 주위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만 볼 뿐 직접 나서서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상대는 영주의 병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나타난 순간, 휙휙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둔탁한 격타음이 들렸다.

소리가 그친 후 사람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사지 중 어느 한곳이 부러진 채 땅바닥을 뒹굴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과 한쪽에서 드웰의 상처를 돌보고 있는 남옥빙의 모습이었다.

드웰의 상처를 대충 돌본 남옥빙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중에 드웰을 부축해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일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드웰을 때리던 병사들이 복수를 하겠답시고 다른 병사들을 동원해 온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 사이에 실력 차가 너무 컸다.

몰려온 병사들 역시 사지 중 한군데가 부러지고 나서야 아우성을 치며 돌아갔다.

그렇게 점점 수를 불려가며 병사들이 몰려오길 네 차례.

이번엔 남옥빙 그녀가 직접 영주의 성을 찾아가겠다며 드웰의 집을 나섰다.

무모한 짓이라고 말리고 따라가겠다고 나서는 드웰을 남겨둔 채 집을 나선 그녀가 다시 돌아온 것은 다음날 아침나절이었다.

상당히 피곤한 모습의 그녀는 궁금한 표정의 사람들을 뒤로 한 채 자신이 지내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 피곤한 듯 잠들었다고 한다.

그 후로는 마을에 영주의 성에서 왔다고 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이어 들려온 소문에 의하면, 영주의 성에 수십에 이르는 어쌔신들이 침입한 사건이 있었다고…

그리고 몇 일 후, 드웰은 그녀가 보는 앞에서 매끈하게 다듬은 목검을 들고 휘둘러야 했다.

거기서 말을 끊은 오엘이 수통의 뚜껑을 열고 물을 마셨다.

그 사이 디처의 팀원들과 제이나노에게서 이야기에 대한 감상평이 흘러나왔다.

“꽤 재밌는 이야기인데… 그게 실제 이야기란 말이지.”

“흠, 내가 들었던 옛날 이야기와 상당히 비슷한데… 주인공이 여자란 것만 빼면 말이야.”

“재밌네… 그럼 그 남옥빙이라는 사람이 그…. 청령신한심법인가 뭔가 하는 걸 오엘의 조상에게 전해 줬단 말이야?”

“그 뒤엔 어떻게 됐죠?”

이드가 뒷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 뒤의 이야기는 별거 없어.

남옥빙이라는 분이 이십 년 정도를 머무르며 그 드웰이라는 분을 가르쳤다는 것 정도?

아, 그러고 보니 그분은 중간중간에 짧게는 일 개월 정도, 길게는 칠 개월 정도씩 밖으로 다니셨다고 했어.

지금까지 그 이유를 몰랐지. 내가 집에 숨겨져 있던 청령신한공의 책을 펴기 전까지 말이야.”

그 책에 간단히 그 남옥빙이란 분의 유필이 남아 있었는데, 그 내용대로라면 실종된 친인을 찾고 계셨나 봐. 이름이…… 예천…. 화란 사람이던가?”

오엘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 이드는 저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 울컥하고 솟아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동시에 두 눈이 화끈거렸고, 콧날이 시큰해졌다. 겨우겨우 참고는 있지만 뭔가가 목을 통해 나오려고 하는 느낌에 이드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

그런 이드의 모습에 가만히 옆으로 다가선 라미아가 이드의 한쪽 팔을 잡아 안아 주었다.

주위에서 갑작스런 두 사람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라미아였다.

이어 그녀는 목이 매어 말을 하지 못하는 이드를 대신해 나머지 이야기를 물었다.

“그럼, 이십 년 후에는요? 이십 년 정도를 머무르신 후에는 어떻게 되셨죠?”

전혀 생각해 보지도 못한 이드의 반응에 잠시 멍해 있던 오엘은 이어진 라미아의 말에 반사적으로 대답해 버렸다.

“그, 그건…. 결국 예천화란 사람을 찾지 못한 그 분은 드웰님께 이런저런 당부를 남기시고 당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실 것이라며 떠나셨다고….”

“크윽….”

그녀의 말에 이드의 입에서 뭔가 눌러 참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 실례할게요.”

라미아는 그런 이드의 옆에서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자리를 피했다.

사람들이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는 곳에 왔을 때 라미아는 언제 흐르기 시작했는지 흐르고 있는 이드의 눈물을 가만히 닦아주며 그의 머리를 가슴에 앉았다.

그런 라미아의 머리 속으로는 지금 이드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전해지고 있었다.

갑자기 헤어져버린 친인들에 대한 그리움과 언제나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를 막막함과 향수(鄕愁).

그리고 이 먼 타향까지 자신을 찾아 나섰을 누님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 등.

지금까지 이런저런 큰 일을 한꺼번에 겪어 조금 뒤로 밀려 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버린 듯 너무나 격한 감정이 솟구쳤던 것이다.

그런 이드의 감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라미아는 가슴 가득 이드를 안아주며 그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괜찮아요. 이드님, 괜찮아요. 이드님이 어떤 곳에 가시건 어떤 상황이 되건 이드님 곁엔 제가 있고, 이제 아내가 된 일리나도 있잖아요.

그리고 이드님을 이렇게 걱정해 주시는 누나분들도요. 언젠가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이드님 가슴속 소중한 분들의 품으로. 그러니까 괜찮아요. 괜찮아요…..’

라미아는 이드의 마음을 향해 외치며 그를 꼬옥 보듬어 안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드의 마음이 진정된 듯 더 이상 자신에게 이드의 격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느끼는 순간 라미아는 어느새 몸을 추스린 이드가 자신을 꼬옥 안아오는 것을 느꼈다.

이제 상황이 바뀌어 라미아가 이드에게 안긴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드에게서 다시 전해지는 것은 너무나 따뜻하고 안온한 감정이었다.

또한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느낌.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

라미아는 그런 이드의 감정을 느끼며 사르르 얼굴을 붉혔다.

지금까지 이렇게 저렇게 붙어 다니긴 했지만, 지금처럼 크고 풍부한 감정의 교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의 감정을 모두 알게 됨으로써 정말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라미아에게 달콤하게 또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라미아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이드 역시 마찬가지로 라미아라는 존재가 정말 자신의 영혼과 하나가 되어 있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흠흠….. 돌아가야지? 사람들이 기다릴 텐데…”

라미아를 꼬옥 감고 있던 팔을 풀며 조금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해대는 이드였다.

그렇게 다시 사람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라미아와 걸음을 옮기던 이드는 부드러운 손길로 라미아의 은빛 찰랑이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 이드의 손길에 너무도 따뜻한 감정이 실려있었다.

다시 돌아온 두 사람을 보며 하거스들은 그 모습을 살필 뿐 뭐라고 묻거나 하진 못했다.

그들도 귀가 있고 눈이 있기에 이드가 울었다는 것 정도는 보지 않고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드와 라미아도 그것이 편했다. 왜 그러냐고 하면 할 말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한마디 정도 해두면 좋으리라. 라미아가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오엘씨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청령신한공을 익히셨던 이드님의 누님이 생각나셨나 봐요.

그리고 오엘씨? 아마 많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겠지만 오엘씨와 저희는 인연이 있나 봐요.

오엘씨는 직접 청령신한공을 익혔고, 저희는 그걸 계승하고 있었던 친인이 있었고 말이죠.”

오엘은 그녀의 말에 아직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직 생각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던 때문이었다. 아니, 생각이 정리가 되었다 해도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일인단맥의 청령신한공이 영국과 중국 양국에 동시에 전해져 왔었다니 말이다.

하지만 때맞춰 들려오는 출발 신호에 그녀는 더 이상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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