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207화
켈렌의 입에서 처음으로 마법의 시동어 아닌 말이 흘러나왔다. 의외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누가 이길 것 같아?”
정신없이 두 사람의 싸움을 관전하고 있던 오엘은 건성으로 고개를 내 저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연신 검을 날리는 문옥련과 켈렌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잠시라도 눈을 땠다가는 중요한 순간을 놓쳐 버릴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실제 그들이 싸움을 시작한 것은 이 분, 그 짧은 시간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많은 충돌이 있었다.
“아뇨.”
이드는 생각도 하지 않고 고개를 저어대는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아주 싸움 구경에 푹 빠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런 걸 보면서 여러가지 방향에서 생각을 해보는 것도 좋은 수련의 방법이다. 이드는 노크하는 모양으로 그녀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같은 질문을 다시 던졌다.
“어떻게 생각하냐니까? 싸움을 구경하면서 그런걸 예측하는 것도 하나의 수련이야. 보면서 생각해봐.”
“음…. 제 생각엔…. 승부가 나지 않을 것 같은데요. 한 쪽은 공격만 해대고 한 쪽은 실드로 방어만 하고 있으니까. 지구력이 강한 사람이 이기는 거 아닌가요?”
확실히 지금의 상황이 그랬다. 이드는 혀를 쯧쯧 찼다. 그가 바란 대답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지금 그녀의 대답은 전투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오엘 정도의 사람이라면 좀 더 깊이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오엘, 그냥 눈으로만 보지 말고 싸우는 사람들을 느껴. 그래야 그 사람의 기량을 알수 있으니까. 두 사람 모두 수준급의 실력들이야. 그렇게 쉽게 끝나지는 않아. 좀 더 느끼고 생각해봐. 너 정도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그런걸 느낄 수 있으니까. 그리고 참고로 나는 이모님이 이길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앞으로….. 스무 초식 안에.”
오엘은 이드의 말에 문옥련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는 별다른 일이 없는데 이십 초 아니, 이제는 십 오 초만에 끝을 낸다? 오엘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문옥련만을 바라보았다.
이드의 말대로 그녀에게 무언가를 느끼려 애썼다. 이드가 이미 가능한 일이라고 했기에 더욱더 깊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무언가 꽉 막힌 듯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무언가 큰 것이 터지길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랄까?
사숙이 말했던 이십 초가 다되어 간다. 오 초, 사 초, 삼 초…. 순간 무언가 막혔던 것이 뚫리는 느낌과 함께 문옥련의 움직임이 폭발적으로 커지며 순식간에 켈렌에게로 이동했다. 어느새 켈렌도 실드를 거두고 검을 쥐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로는 여전히 소검이 날아다니며 그녀를 노렸고, 그 뒤를 이어 문옥련의 양 소매가 날아들었다.
꽈아아앙!!!
오엘은 한 순간 폭음에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폭음이 가라앉을 무렵 다시 뜨여진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옷의 여기저기가 조금 상하긴 했지만 처음 켈렌과 다를 바 없는 문옥련의 모습과 땅에 내동댕이쳐진 체 겨우 몸을 일으키는 켈렌의 모습이었다. 그녀가 쥐고 있던 검은 그녀의 한 참 뒤의 땅에 꽂혀 있었다. 아무리 봐도 더 이상의 싸움을 무리 같았다.
그것을 확인한 사제는 곧 문옥련의 승리를 알렸다.
“뭐 좀 느꼈어?”
오엘은 그제야 이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 생각해보니 제가 직접 싸울 때 이런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있어요. 그렇지만 이렇게 구경하면서 느껴본 건 처음 이예요.”
“당연하지. 전투 중엔 상대에게 집중하게 되니까 충분히 느낄 수 있지. 대게 실력이 되는 사람들은 상대를 알아본다는 말이 있지? 그게 대부분 아까 네가 느꼈던 것과 같은 그런 느낌으로 상대를 알아보는 거야. 상대의 강함을 느끼는 거지. 물론 자신보다 높은 경지의 사람들은 자신의 내력을 완전히 조절하기 때문에 느끼기 힘들지만 말이야.”
“그럼 사숙처럼 언제 승부가 날거란 건 또 어떻게 알 수 있죠?”
“음…. 예를 들면 바둑같은 거야. 바둑을 두고 있는 두 사람보다 좀 더 높은 실력을 가진 사람이 바둑판을 보면 결과를 대충 예측할 수 있잖아. 그것과 같은 거지. 궁금하면 좀 더 실력을 키워봐.”
“결국… 더 수련하란 말이네요. 아, 또 시작이다.”
이드의 말에 입술을 비죽이던 오엘은 사제가 다시 더듬더듬 입을 여는 모습에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이번에 호명되어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세르네오였다. 그녀는 처음 일행들을 맞을 때와 색깔만 다른 붉은색 원피스에 은빛의 길고 긴 허리띠 액세서리를 하고 있었다. 첫 인상이 푸른색의 원피스에 귀엽고 환해 보이는 반면 이번 붉은색 원피스는 그녀의 짧은 붉은 머리와 어울려 요염해 보였다. 그녀의 상대로는 마법사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호명되었다.
세르네오는 상대와 마주하자 슬쩍 손을 허리띠의 끝을 잡았다. 그리고 사제의 시작신호와 함께 큰 호선을 그리며 휘둘러지는 그녀의 손길을 따라 맑은 쇠 구슬 굴러가는 소리에 듣기 좋게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허공을 수놓는 길고 긴 은빛의 빛 나는 빛줄기는 보는 이의 시선을 확 잡아 끌어들이고 있었다.
이드는 허공에 너울거리다 땅에 내려앉는 빛줄기의 정체에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허공을 수놓던 은빛의 빛줄기. 그것은 다름 아닌 손가락 굵기의 연검이었다. 그것도 언뜻 보더라도 이 미터 이상은 되어 보이는 엄청난 길이를 자랑하는 검이었다.
그 검은 다름 아닌 세르네오가 허리에 두르고 있던 허리띠 안에 꼽혀져 있었다. 즉 그녀가 원피스를 입으며 허리에 두르고 다니던 그 액세서리같은 허리띠가 바로 연검의 칼집이었던 것이다.
이드는 그 검과 검집을 만들어낸 제조 기술에 놀랐다. 또 저런 검을 다룰 줄 아는 세르네오에게 다시 한번 놀랐다. 연검은 그 하늘거리는 특성상 보통의 검 보다 더욱 다루기가 힘들다. 능숙히 다루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 한 것은 물론이고, 검의 본래 위력을 내기 위해서는 최소 검에 검기를 주입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야 가능하다.
그처럼 연검은 사용하기가 힘들지만, 일단 본래의 진정한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면 그만큼 현란하고 변칙적인 초식을 운용할 수 있는 무기도 드물다.
헌데 그런 어려운 연검의 길이가 무려 삼 미터에 가깝다니. 그리고 여기서 주목할 점이 바로 세르네오가 대표전에 저 검을 꺼내 들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만큼 저 검을 다룰 자신이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저런 검을 능숙히 다루는 세르네오의 모습이라. 잘 상상이 가지 않는 모습에 이드는 눈을 반짝이며 세르네오와 그녀의 검을 주시했다.
그럼 모습은 가디언 본부장인 놀랑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똑 같은 반응이었다.
다만, 그녀의 상대인 마법사만이 처음 보는 괴상한 무기에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싸움의 스타트는 그가 끊었다. 마치 뱀처럼 슬금슬금 움직이는 은 빛 검 날의 모습에 결국 먼저 손을 쓴 것이었다.
“한번에 끝을 내지. 바람을 태우는 불꽃이여 거대한 바람의 흐름을 타고 지금 나의 적을 소멸시켜라. 플레임 트위스터!!”
거대한 불의 폭풍. 멀리 떨어진 자신들이 있는 곳까지 덮쳐올 정도의 열기를 뿜어내며 세르네오에게 다가가는 거대한 불꽃의 회오리를 본 이드는 급히 세르네오를 시야에 담았다. 그녀가 어떻게 대처할 지가 궁금했다. 저 긴 연검으로 어떻게 대처 할 것인가.
이드는 기대를 담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연검은 그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다.
검의 회오리.
세르네오의 연검이 보여 주는 것은 말 그대로 검의 회오리였다. 불꽃의 회오리가 다가오자 세르네오의 팔은 하늘 저 높은 곳을 향해 들어 올려졌다. 그 후 강변의 갈대처럼 하늘거리는 그녀의 팔을 따라 축 늘어져 있던 연검이 허공에 유려한 은 빛 곡선을 수놓기 시작했다. 연검은 세르네오의 팔을 따라 점점 그녀 주위로 회전하다 결국에는 그녀를 은 빛 검막(劍幕)속에 가두어 버렸다. 그런 연검의 모습은 검이라기 보다는 채찍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잠시 후 그녀가 만들어낸 검막이 불꽃의 회오리가 맞다은 순간 은 빛의 검막은 그 색을 바꾸어 붉은 빛을 띠었다. 다름 아니라 세르네오의 검기가 발해진 것이다.
콰과과광… 후두둑…. 후두두둑…..
엄청난 폭음과 함께 마법과 검기의 막은 눈부신 빛을 뿜어내며 서로 상쇄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 강렬한 빛의 폭풍에 거의 모두가 눈을 돌렸지만 이드를 비롯한 몇몇 반은 그 빛 속을 바라볼 수 있었다. 폭발의 여파로 튕겨 올라간 돌과 흙이 소나기처럼 떨어지는 공간 사이로 빠르게 전진하며 검을 떨쳐내는 세르네오의 모습. 그것은 마치 회오리바람이 허공 중에 산산이 흩어지는 것처럼 현란하고, 복잡했다.
순식간에 수십 수백의 그림자를 만들어 낸 연검은 마법의 여파로 아직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마법사의 전신을 유린했고, 검 날 앞에 그대로 몸을 드러낸 마법사의 전신은 얇은 면도날에 베이듯 여기저기 베이며 붉은색 생명수를 흘려냈다.
“과연…. 저 정도면 정말 절정의 수준이야. 어쩌면 여기 본부장이라는 사람하고 맞먹을지도 모르겠는걸?”
이드는 세르네오를 높이 평가했다. 그 정도로 그녀의 실력은 뛰어났다. 특히 저 기형의 연검을 다루는 실력은 정말 탁월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만들 정도였다.
“우웃… 눈 부셔. 어엇? 어떻게 된 거죠? 상황이 벌써 끝나다니…”
부신 눈을 비비던 오엘은 방금 전 까지 검기와 마법이 회오리 치던 대지 위를 바라보았다. 이미 충격의 여파로 완전히 파 뒤집어진 대지 위엔 거지 누더기가 부러울 정도록 난자된 옷을 걸친 마법사가 앉아 헐떡이고 있었는데, 오엘이 바로 그 모습을 본 것이었다. 저 정도라면 이미 싸움의 승패는 결정이 난 것이었다.
그렇게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는 오엘의 귀로 이드의 충고가 들려왔다.
“앞으론 안력(眼力)수련도 같이해. 고작 그 정도의 빛에 눈을 감아버린다면, 이미 네 목은 없어. 저 마법사처럼 말이야.”
“….네.”
오엘이 이드의 말에 대답할 때 심판을 보던 사제는 급히 마법사에게 달려가며 더듬거리는 말로 급히 입을 열었다.
“이번 대표전은 세르네오님의 승리입니다. 그 보다 제로 쪽에서 마법사분이 있으시면 빨리 나와서 치료를 해주세요.”
과연 사제라서 인지 마법사의 상체에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만약 신성력과 반발하는 마법사만 아니라면 신성력으로 자신이 직접 치료를 했을 것이다.
마법사는 제로에서 달려나온 몇 명의 인원에 의해 제로의 진영쪽으로 옮겨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역시, 대단해. 저번에 봤을 때 보다 실력이 늘었는걸…. 잘했어.”
놀랑의 칭찬에 세르네오는 고개를 간단히 숙여 보이고는 곧 라미아를 찾아 유쾌하게 손으로 V자를 그리며 수다를 떨어댔다.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죽이 척척 맞는 두 사람이었다. 좌우간 이번의 승리로 인해 다음 한번만 가디언 측이 승리하게 되면 더 이상의 대표전은 필요도 없게된다.
그때 세르네오의 뒤를 이어 싸움을 이어갈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사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 나서는 그는 가디언들의 환호를 받고 앞으로 나섰다. 이번에 그만 승리를 거두게 되면, 오늘의 전투는 모두 끝이 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행들의 기대가 지나쳐 부담이 되었을까?
세 번째 싸움에서는 가디언측이 제로에게 처절하게 깨지고 말았다. 처음으로 가디언 측에서 나선 마법사였는데, 상대편 마법사에게 아주 보기 좋게 두드려 맞아 버린 것이다.
말 그대로 마법사의 지팡이에 전신이 시퍼렇게 멍들도록 맞았다.
저 정도라면 마법으로 치료를 하더라도 아릿한 고통의 감각이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제 두 번의 전투가 남았다. 사제는 남은 네 장의 종이 중 아무 생각 없는 표정으로 두 장을 집어들었다. 무심코 종이를 펴보던 사제가 움찔했다. 그가 아는 인물인 모양이었다. 과연 그랬다. 그의 입에서 놀랑 본부장이 호명된 것이었다. 그의 이름이 불려지자 가디언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한 나라에서 본부장의 직위를 가진 사람들의 실력이 어떤지 아는 사람들이기에 이미 이번 전투는 다 이겨놓은 싸움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만 한 것이 놀랑은 검으로서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사람임과 동시에 바람의 정령을 다룰 줄 아는 정령검사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종종 예측하지 못 할 황당한 일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지금과 같이 검과 마법이 실제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황당한 일이 자주 일어난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도 아마 그런 특이하고 황당한 일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그럴 것이다. 분명 그래야 한다. 그래야지 지금 본부장의 목 앞에 다아 있는 파르스름하게 날이 선 검 날이 설명되기 때문이다. 프랑스 가디언 본부장인 놀랑의 목에 검을 들이대고 있는 상대는 고작 이십대 중반의 나이의 호리호리한 검사. 그런 그가 프랑스의 자존심이라 할 만한 인물을 제압하다니, 말도 되지 않는다. 가디언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간단했다.
놀랑이 호명을 받고 앞으로 나섰을 때 이에 대응해 상대편 제로의 진영에서 나오는 인영을 보고 가디언들 모두는 놀랑의 승리를 확신했다. 척 보이기에도 약해 보이는 상대 때문이었다. 더구나 싸움이 시작되었는데도 검기를 두르지 않고 검을 휘둘러 오는 모습에 그 확신은 믿음으로 변해갔다.
검기를 상용하지 않는 상대의 모습에 배려를 하려 함인지, 놀랑도 상대를 따라 덩달아 검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마 몇 초 정도 검을 썩어줄 생각이었을 것이다. 헌데, 다음에 일어난 상황은 그 것을 허락치 않았다.
사아아악!!!
까깡이 아니었다. 검과 검이 부딪히며 날카롭게 울려야 할 검의 울음소리 대신에 무언가 잘려져 나가는 듯한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상대의 검은 놀랑의 목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워낙 순식간에 또 예측하지 못한 일이 일어난 덕에 모두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무도 놀랑의 검이 잘려나가 버릴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 뒤를 이어 잘려진 놀랑의 검 조각이 사람의 귓가를 때리며 땅 바닥에 떨어졌다.
“으으…. 마, 말도 안돼.”
“이건 분명…. 마법으로 농간을 부린 거야.”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몇몇 가디언들은 고개를 돌리며 지금의 상황을 부정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지울 수는 없는 일. 사제의 승패를 결정짓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장면을 바라보던 이드의 마음속으로 라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그녀의 옆에는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본부장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던 세르네오가 황당한 표정으로 본부장과 그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 마법이에요.’
그럴 것 같았다. 이드가 보기에 놀랑을 상대한 남자의 실력이 그렇게 뛰어나 보이는 것도 아니었고, 그 들고 있는 검이 보검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드도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절삭성을 높이는 마법과 검의 강도를 높이는 마법을 사용했어요. 거기다 상대가 검에 마법을 건 것을 알지 못하도록 마나까지 숨겼어요. 하지만 정말 머리 잘 썼어요. 본부장의 상대로 저 사람이 지명되자마자 이런 방법을 사용한 걸 보면 말이예요.’
‘동감이다. 하지만 이런 방법을 쓸 수 있다는 것도 실력이지.’
확실히 그랬다. 검에 마법을 걸지 말라는 규칙은 애초에 없었다. 때문에 가디언 측에서는 아무도 따지지 못했다. 검에 마법이 걸린 걸 알아보지 못 한 이쪽의 실수인 것이다.
하지만 억울하고 분한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마치 어린 아니가 입에 물고 있던 사탕을 억지로 빼앗긴 기분이랄까?
순식간에 대표전은 원점으로 돌아와 단판 승부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제 양측의 마지막 대표에 의해 결정이 나게 될 것이다.
문옥련이 이드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이드의 손을 꼭 쥐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다치지 말고 잘해라.”
“에… 에? 그게 무슨….”
이드는 갑작스런 문옥련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때였다. 벌써 다섯 번째건만 여전히 더듬거리는 말투인 사제로부터 마지막 대전자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그… 그럼 이번 승부를… 결정지을 양측의 대전자입니다….. 가디언 측의 대표로는 한국의 이드님이, 제로 측의 대표로는…. 단님이 되겠습니다. 두 분은 앞으로 나와주세요.”
“그, 그런…..”
이드는 자신의 양 귀로 들어온 사제의 목소리에 문옥련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녀가 했던 말이 이해가 갔다. 아마 회의를 진행한 사람들 중의 한 명으로 대표 다섯 명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을 그녀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다. 이드는 제로와 별로 손을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이드는 그런 자신의 생각을 문옥련에게 전했다. 그 사이 상대는 이미 앞으로 나와 있었다. 완고한 인상에 일본도를 든 반백의 사내였다. 그는 전혀 내력을 갈무리하지 않았는지 전신으로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이모님….”
축쳐진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이드의 모습에 문옥련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대표로 뽑긴 했지만, 당사자에게 물어보지 않은 실수가 지금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대표를 교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제로 쪽에서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휴~ 미안해. 먼저 물어봤어야 하는 건데. 그렇지만 어쩔 수 없잔니.”
이드는 눈 꼬리가 축 늘어지는 문옥련의 모습에 괜히 자신이 그녀를 다그치는 것 같은 기분에 머리를 긁적이며 몸을 돌렸다.
“뭐… 어쩔 수 없죠. 이렇게 된거…. 하는 수밖에. 걱정 마세요. 라미아, 갔다올게.”
“어려운 상대는 아닌 것 같지만 조심하세요.”
라미아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간 이드는 그대로 사제가 있는 곳까지 걸어나갔다. 단은 이미 자신의 일본도를 꺼내들고 있었는데, 엄청난 공을 들인 것 검인 듯 검인(劍刃)으로부터 파르스름한 예기가 흘렀다. 칼의 재질은 모르겠지만 파르라니 흐르는 저 예기만은 명검에 뒤지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이드의 사과에도 단이란 사람은 아무런 표정도 말도 하지 않았다. 이드는 꽤나 어려운 사람이라 생각하며 일라이져를 뽑아 들었다. 순간 사제와 단으로부터 동시에 반응이 왔다.
단은 일라이져라는 검의 우수함에, 사제는 일라이져에 은은히 흐르는 신성한 은빛에.
하지만 자신의 일을 잊지는 않았는지 사제는 뒤로 물러서며 이드와 단에게 싸움의 시작을 알렸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드는 포권을 해 보이며 일라이져를 바로잡았다. 그러나 단은 이드의 이런 인사에도 전혀 그런 것에 상관하지 않는 모습으로 자신의 도를 끌어당겼다. 이드도 인사를 바라고 한 것이 아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대개 저런 류의 사람은 자신이 인정하는 상대가 아니면 본 척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제로에 있다. 그렇다면 그 룬이라는 소녀는 저 사람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소리다.
‘꽤 대단한 아이인가 보네.’
이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들고 있던 일라이져를 슬쩍 내려 뜨렸다. 상대에게 먼저 공격을 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단은 이번에도 그런 이드의 뜻을 본체도 하지 않고서, 검을 들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자존심일 것이다. 자신의 하수로 보이는 상대에게 먼저 선공을 가하지 않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자 이드는 재밌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그럼 누가 먼저 손을 쓰는지 두고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