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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236화


페인은 그렇게 말을 하며 큰 죄를 지은 양 고개를 숙인 데스티스의 어깨를 토닥였다.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 이드와 라미아는 페인으로부터 제로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이미 제로의 목적과 출신을 알고는 있었지만 페인은 그보다 좀 더 상세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렇다고 그 이야기 중에 제로의 자세한 조직 체계라던가, 거점 등의 핵심적이고 중요한 정보를 말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대충 제로라는 조직이 어떤 형태라는 것과 그들과 룬의 활동 내용 등 제로에 대해 좋은 쪽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두리뭉실하게 주절거렸다. 아마도 룬이 가진 검의 진짜 주인을 알고 있는 이드와 라미아에게 룬에 대한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원래 말재주가 없어 보이던 페인이었다. 잠시간 이야기를 끌어 나가던 페인은 곧 이야기 거리가 바닥났는지 입을 다물었고, 그때부터는 방 안에는 조용히 찻잔 딸깍거리는 소리만이 흘렀다. 그동안에도 데스티스의 고개는 여전히 숙여져 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 상당히 컸던 모양이었다. 또 그만큼 룬에 대한 믿음이 크다는 뜻이기도 했다. 과거 중원과 그레센에서도 보기 쉽지 않은 충성심이었다. 그런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든 것은 한참 시간이 흘러 무게 있게 앉아 있던 페인의 몸이 비비 꼬이다 못해 무너져 내리려 할 때쯤이었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연락을 위해 나갔던 퓨가 다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는 별다른 행동 없이 잠시 페인을 바라보다 온다 간다 말없이 다시 밖으로 스르륵 나가 버렸다. 왠지 머리 한구석에 커다란 땀방울이 맺히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마법사라던가 퓨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가 페인에게 뭔가 말을 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드 역시 앞서 경험한 적이 있었고, 또 이번에도 작은 마나의 흔들림을 보았다. 룬과 연락이 되어 그 내용을 말한 모양이다. 이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무슨 내용인지 빨리 말해 보라는 듯 반짝이는 눈으로 페인을 바라보았다. 페인은 그런 이드의 눈길이 부담스러웠던지 슬쩍 눈길을 피하며 퓨에게 들었던 말을 되풀이했다. 가끔 생각이 드는 것이지만, 이럴 때면 자신이 앵무새 같이 느껴지는 페인이었다.

“험… 퓨가 말하기를 일단 룬 님과 연결은 됐다는군. 자네가 했던 말도 전했고. 룬 님은 그 말을 듣고 깊게 생각하셨지만, 쉽게 결정을 내리시지 못하셨다네. 자네에게 전할 말도, 자네를 만날 것인지 말 것인지 하는 일도. 해서 한참을 생각하시던 룬 님은 오늘 내로 다시 연락하겠다고 하시고 연락을 마쳤다고 하네.”

페인의 말을 들은 이드는 볼을 긁적이며 입맛을 다셨다. 브리트니스가 있던 곳에서 왔던 사람들이란 말, 그러니까 이세계(異世界)에서 왔다는 말을 전하면 궁금해서라도 당장 달려올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대로의 반응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보통은 그런 말을 들으면 궁금해서라도 바로 달려오던가, 아니면 어떤 다른 반응을 보일 텐데 말이다. 뭐, 제로를 조직하고, 드래곤들만이 알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보통이 아니라고 볼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럼… 그쪽에서 연락을 할 때까지 기다려야 되겠네요.”

“그래도 상관은 없지만… 퓨의 말로는 일단 돌아갔다가 내일 다시 오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군. 뭐, 어떻게 하든 그쪽이 편한 대로 하게.”

“그럼… 내일 다시 오죠. 그래도 되죠? 이드 님.”

이드는 자신을 돌아보는 라미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언제 올지 정해지지도 않은 연락을 기다리는 것보다 돌아가 느긋하게 하루를 쉰 후 다시 오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이다. 룬을 만나는 일이 일분, 일초를 다투는 급한 일도 아니고, 제로가 도망갈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일단 그렇게 하기로 결정이 내려지자 이드와 라미아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바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서로 잘못 이해하고 있던 것들이 풀려 좋지 않은 감정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아직 서로에게 불편하다는 것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드와 라미아는 내일 오겠다는 말을 건네고는 건물을 나섰다.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제로의 단원들은 처음 올 때와는 달라진 시선으로 배웅했다. 무시와 호기심에서 경계와 경외감으로 변한 시선으로 말이다. 제로의 지부에서 나온 두 사람은 곧장 센티의 집으로 향했다. 오늘 아침 두 사람을 향해 걱정스런 눈길을 보내던 센티와 코제트들의 모습이 생각나서였다. 또 점심시간도 되었고 말이다. 집에 도착하자 과연, 센티와 코제트들이 많이 기다렸다는 듯 두 사람을 맞아 주었다. 그 모습이 꼭 전장에서 돌아온 가족을 맞이하는 것 같아서 조금은 우습기도 했지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신들을 이렇게 걱정해 준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기도 했다. 이드와 라미아는 자신들을 기다리느라 점심을 먹지 않은 사람들과 늦은 점심을 먹으며 제로 지부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센티들은 제로들과 싸웠다는 말에 굳은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했지만, 다친 사람이 없다는 말에 곧 표정을 풀고서 흥미진진한 모험담을 듣는 듯 전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재촉했다. 덕분에 이날 남아 있던 시간 동안 이드는 광대처럼 여러 가지 초식의 동작을 해 보이며 몇 번이고 이야기를 되풀이해야 했다. 그것도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킥킥대는 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서 말이다. 그리고 잘못된 음악 삽입으로 그날 밤 라미아는 이드와 같은 침대를 사용하지 못하고서 훌쩍였다나?

델프 씨 댁의 아침 식사는 상당히 부산하고 시끌벅적하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 밖에서 먹는 점심 식사를 제외하고 집에서의 식사 때는 항상 그렇다. 델프 씨 집안 식구들의 특징이랄 수도 있지만, 센티와 모르세이가 같이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단 두 명이긴 하지만 가족아닌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식사인 만큼 한층 더 떠들석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그 떠들석함 속에 끼어 정신없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온 이드와 라미아는 지금, 전날 제로의 단원들과 전투를 치루었던 연병장의 한쪽에 서 있었다. 그 옆으로는 페인과 데스티스를 비롯한 몇 몇의 제로 단원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런 모두의 시선은 연병장의 중앙으로 향해 있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퓨를 비롯한 몇 명의 마법사들이 정밀하게 그려내는 기아학적인 모양을 가진 눈부신 백색 마법진으로 시선이 모아져 있는 것이다. 이드가 연병장으로 들어서기전에 이미 그려 지고 있었던 마법진의 용도는 초장거리 이동에 사용되는 것으로 페인의 말로는 저것을 통해 제로의 본진쪽에서 누군가 올 것이라고 한다.
물론 그 누군가가 오는 이유는 다름 아닌 이드와 라미아, 그리고 룬이 가지고 있는 검 브리트니스의 문제 때문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페인의 말로는 이러한 내용이 전날 늦은 저녁 룬으로 부터 전달됐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이드로서는 룬이 바로 오지 않는 것이 좀 아쉽긴 했지만 이번에 오는 사람을 통해 룬을 바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은 기대하며 마법진이 완성되길 기다렸다.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 있던 마법진의 제작은 십 분이 조금 넘어 완벽하게 완성되었다. 퓨는 마법진이 완성되자 곧 지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본부 쪽에 마법진의 완성을 알리고 나온 것이다. 이쪽 마법진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려야 상대 쪽에서 이동해 올 테니 말이다.
또, 언제 이동되어 올 것인지 알아야 그때에 맞춰 마법진을 활성화시키고, 마법진에 마력을 주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 마법진에서 물러서. 퓨가 마법진을 활성화시킨다.”

퓨가 건물에서 나와 바로 마법진 앞에 서자 페인이 주위 사람들을 향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 목소리에 맞춰 마법진을 조율하는 위치에 서있던 퓨가 서서히 마법진을 활성화시키며 마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 연락에서 이미 상대 쪽에선 모든 준비가 끝나서 이쪽에서 연락오기를 기다렸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마법진에 마력을 충전시킨 퓨는 뒤로 멀직이 물러났다. 마법진에 마력을 주입해 활성화시키는 것으로 그의 할 일은 끝났기 때문이었다.
이제 누군가 이동되어 오길 기다리며 혹시라도 어떤 미친놈이 자살을 기도(企圖)하며 마법진으로 뛰어드는 일만 경계하면 되는 것이다.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긴 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모르는 것. 혹시라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 미친 작자뿐 아니라 마법진을 이용하는 존재마저 가장 작은 세포이하 단위로 공중분해되어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주위에 특별한 위험이 없다 하더라도 주위를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주위를 경계하며 마법진으로 누군가 나타나길 기다린지 잠시. 어느 순간부터 백색의 마법진이 눈부신 황금빛을 뿜어내며 허공중에 금빛으로 이루어진 마법진을 만들어 냈다.
그와 동시에 황금빛의 중심으로 우유빛 광구가 생겨나 서서히 그 크기를 더해가기 시작했다.

“온다.”

츠팍 파파팟

누군가의 목소리를 신호로 우유빛 광구가 급속히 커져 나가며 허공에 새겨졌던 금빛 마법진을 산산이 찢어 버렸다. 허공중에 부셔진 황금빛 조각들은 사방으로 퍼져나가지 않고 마법진 가장자리를 돌며 주위의 시선으로부터 텔레포트 되는 순간을 가렸다. 아니, 황금빛 그물이 되어 광구의 우유빛 빛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는 것 같았다. 이렇게 화려하고 요란한 걸 보면 상당히 고급의 고위 마법진을 사용한 모양이다.
그렇게 모든 빛들이 아침안개가 스러지듯 사라지고 난 곳에는 빛의 화려함과 비교되는 간촐하고 수수한 모습의 노인이 서 있었다.
오랜 세월의 빛깔이 스며든 간촐하지만 단아한 맛이 느껴지는 옷에 하얀 서리가 내려앉은 머리카락과 멀리 높이 솟은 산을 바라보는 것 같은 깊은 눈동자. 가슴께까지 기른 멋드러진 은염(銀髥) 중앙부분의 손가락 굵기 정도가 검은색으로 남아 있어 더욱 멋있어 보이는 노인은 전체적으로 한마리 고고한 학을 연상케 하는 기풍(氣風)을 가진 대학사(大學士)와 같은 모습이었다.

‘흐음… 태산의 고요한 기세를 갈무리한 초극의 고수다. 저런 분도 제로에 있었나?’

이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이미 현경(玄境)의 깊은 경지에 들어서 자신의 실력을 깊이 갈무리해 밖으로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이 이룰수 있는 경지를 벚어났다고 할 수 있는 이드의 눈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사실 노인이 이룬 경지는 옛날 이드가 무림에서 활동하던 당시에도 단 열 명밖에 이루지 못한 대단한 것이었다. 헌데 그때보다 무공이 퇴보했다고 할 수 있는 지금에 저런 경지의 고수가 존재하고, 그 고수가 제로의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드로서도 의외였다.
현경이란 경지의 이름만으로도 한 단체의 수장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는 사람이 제로에서 란이라는 어린 여자아이의 명령을 받는다니 말이다. 혹시 진짜 제로를 운영하는 것은 저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치기까지 하는 이드였다. 그만큼 노인의 실력은 이 세계에 와서 본 인간들 중 가장 뛰어난 것이었다. 이드가 그렇게 상대를 평가하고 있는 사이 제로의 단원들이 정중히 노인을 맞이했다.
특히 페인을 비롯한 검을 사용하는 단원들은 오랜만에 제자를 찾아온 스승을 맞이하는 듯 최선을 다해 절도 있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으로 보아 제로에서도 꽤나 중요한 사람인 것 같았다. 노인에게 인사를 마친 페인은 그에게 다가가 잠시 뭔가 이야기를 건네었다. 노인은 페인의 말을 들으며 몇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이드와 라미아를 바라보며 묘한 눈빛을 반짝이더니 가만히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왔다.

“본의는 아니지만 기다리게 한 것 같습니다. 본인은 마사키 카제라는 자로 제로에서 쓸데없이 밥만 축내고 있는 늙은이지요. 이렇게 귀한 분들과 만날 기회가 온 걸 보면 아무래도 늦복이 터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낯선 곳에서 오신 방문자 분들…”

말과 함께 약간 숙여지는 고개와 함께 자신을 카제라 밝힌 노인의 깊은 눈동자가 이드와 라미아의 전신을 스쳐 지나갔다. 이드는 척 보기에도 한참 어려 보이는 자신들에게 말을 높이고 고개를 숙이는 노인의 모습에서 상대방에게 깍듯하게 예를 표하던 동영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또 그의 말 중에서 “낯선 곳”이란 단어가 섞여 있는 것이 카제라는 노인이 자신과 라미아가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채운 것도 잠시 이드는 카제라는 노인을 향해 마주 고개를 숙여 보였다. 상대의 인사를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또 노인 뒤에서 빨리 고개를 숙이라는 듯 하나같이 눈에 힘을 주고서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페인을 비롯한 제로들의 시선도 있고 말이다.

“별말씀을… 오히려 제가 해야 할 말인 걸요. 현경이라니. 제가 이곳에 와서 만나 본 사람들 중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분입니다.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리고 편히 말씀하시죠. 아직 어린 나이라 카제 님의 높임말은 당혹스럽습니다.”

“허헛… 그럼… 편히 하지. 그리고 칭찬 고맙네. 늙은이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란 걸 알면서도 자네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구만. 허허헛!”

노인은 인상 좋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은 그렇게 편치 못했다. 이곳에 온 목적도 목적이지만, 자신이 도달한 경지를 너무 쉽게 짚어 내는 이드의 모습에 마음이 절로 긴장되어진 까닭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로 페인이 슬쩍 끼어 들었다.

“선생님 여기서 이러실 게 아니라, 들어가셔서 편히 이야기를 나누시죠.”

“그래. 안내하거라. 자, 나머지 이야기는 들어가서 하세나.”

노인의 말에 페인이 앞장서서 노인과 이드, 라미아를 안내했다. 그 뒤를 퓨와 데스티스가 조용히 뒤따랐다. 페인을 선두로 한 그들의 모습이 건물 안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연무장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제로 대원들도 하나, 둘 자신이 있던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음 몬스터가 나타날 때까지 시간을 때울 카제와 이드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한아름 가지고서 말이다.

페인이 일행을 안내한 곳은 건물의 5층, 이드와 라미아가 찾아 왔을 때 안내됐던 접객실의 정 반대편 위치한 방이었다. 이곳 역시 접객실로 사용하기 위한 것인지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기 편하도록 꾸며져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수선한 느낌이 드는 것이 사람을 대접하기엔 그다지 적당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오히려 친한 친구들끼리 모여 지나간 옛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당한 그런 느낌이 드는 방이었다. 페인의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선 카제 역시도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인지 페인이 권하는 자리에 엉덩이를 걸치며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

“흠, 페인아. 저번에 내가 들렸을 때는 이곳이 아니라 다른 접객실로 안내하지 않았었느냐? 이 방은… 손님을 대접하기엔 그다지 적당해 보이지 않는구나.”

그 말과 함께 잠시 몸을 숙인 카제의 손에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하얀 종이가 보라는 듯이 들려졌다. 페인은 그 모습에 재빠른 동작으로 카제의 손에 들린 종이를 빼앗듯이 넘겨받아 등 뒤로 감추고는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마치 가정 방문 온 선생님께 변명하는 초등학생과 같은 그 모습에 뒤에 있던 데스티스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하아… 저 덩치만 큰 바보!’

“아. 하. 하. 하. 그, 그게 말이죠. 선생님… 워, 원래 쓰던 접객실에 조금 문제가 생겨서 말입니다. 저기… 그래서 저희가 회의실로 사용하던 곳으로 안내한 건데… 조, 조금 지저분하더라도 이해해 주십시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도 이곳은 손님을 대접하기엔 그다지 적당해 보이지 않는구나. 나는 상관없지만 손님께는 실례되는 일이지. 사과는 내가 아니라 여기 두 사람에게 해야 할 게다. 그런데… 원래 접객실엔 무슨 문제더냐?”

“그… 그게… 저기… 그러니까 수, 수련 중에. 예, 수련 중에 사고로 접객실의 벼, 벽이 부서지는 사고가 있었거든요. 아하하하….”

여전히 굳은 얼굴로 웃어 보이는 페인으로서는 최선을 다한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이드와 라미아의 한마디에 바로 탄로 날 수 있다는 생각에 벼랑 끝에 서 있는 듯 조마조마한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이드와 라미아는 그 거짓말을 모르는 척 넘기기로 했다. 다름 아니라 더듬거리며 말을 지어내는 페인의 이마와 콧등엔 솟아 있는 새하얀 땀방울 때문이었다. 노력이 가상해 보여서라고나 할까? 좌우간 두 사람이 묵인해 준 거짓말에 카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멋들어진 수염을 쓸어 내렸다.

“으음… 조심하지 않고.”

“아하하하…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페인은 카제의 말에 그제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긴장하고 있던 마음이 타악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로서는 이드와 라미아를 공격했던 사실을 카제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말이다. 이드와 라미아에 대한 공격은 제로의 뜻이 아니라 페인과 데스티스, 퓨. 이 세 사람의 독단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헌데, 지금 그 공격했던 상대가 제로의 중요한 손님으로 제로에서도 큰 스승으로 있는 카제가 직접 맞이하고 있으니 페인으로서는 혹여 카제가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길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첫 공격이 비겁한 기습이었다는 것을 예(禮)와 의(義)를 중시하는 카제가 알게 된다면…

‘으…. 생각하기도 싫지만, 보나마나 수련을 빙자한 지옥일주(地獄一周)를 하게 될 거야.’

진실이 밝혀질 경우의 결과에 가볍게 진저리를 친 페인은 데스티스와 퓨를 앞세우고 함께 접객실을 나섰다. 카제가 직접 말을 하진 않았지만 이드와 라미아와의 이야기를 위해 자리를 비켜 주었으면 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카제가 방을 나서는 세 사람을 잡지 않은 것을 보면 페인이 그의 뜻을 제대로 읽은 것 같았다. 하여튼 이로서 자신들이 할 일은 끝이니 쉬기만 하면 된다. 라고 생각하며 막 페인이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페인. 간단한 차를 좀 준비해 다오.”

“네,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 아무래도 차 시중을 든 후에 쉬어야 할 것 같다. 물론 그 후에도 쉴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직접 가르친 적이 있어서 그런지 이곳에 오면 페인만을 찾는 카제였다. 덕분에 페인은 그가 와 있는 동안엔 항상 대기 상태에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동료들은 슬금슬금 그를 피해 다닌다. 괜히 곁에 있으면 같이 피곤해지기 때문이었다. 데스티스와 퓨도 이미 자리를 피하고 없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페인은 알 수 없는 외로움과 배신감에 몸을 떨어야 했다.

페인의 기척이 방에서 멀어지자 카제가 이드와 라미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간단히 전해 듣긴 했지만 정말 아름답게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흐뭇한 것이 절로 축복해 주고 싶은 남녀.

‘그런 두 사람이 다른 세상에서 온 존재라…’

카제는 어제 밤 브리트니스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이야기하던 란을 떠올렸다. 다른 세계(異世界).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녀의 무기이며, 이제는 그녀의 상징과 같은 브리트니스가 다른 세계의 검이라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믿지 못하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그녀와 브리트니스가 만들어 내는 엄청나다고 밖엔 말할 수 없는 능력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해가 되는 말이기도 했다. 단지 의외의 사실에 잠시 당황했을 뿐. 더구나 지금의 세상은 봉인이 풀려 생전 접해 보지 못한 몬스터를 비롯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그렇게 보기보다는 다른 세계와 합쳐졌다고 느끼고 생각하고 있었다. 복잡하게 봉인의 작용이 어떻다 저렇다 하기보다는 그쪽이 훨씬 받아들이기 편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다른 세계란 단어가 낯설지 않다는 말이다. 그리고 카제 또한 그런 사람들처럼 편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란의 이계인(異界人)이란 말 역시 그의 마음에 강하게 와닿지 않았다. 특히 이계인이라는 이질감 대신 이드와 라미아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친근감-정확히 느낀 거지만 말이다.-에 그런 마음은 더했다. 솔직히 이계인이란 것보다 현경에 오른 자신도 파악할 수 없는 두 사람의 힘과 브리트니스를 찾는 목적이 훨씬 더 신경 쓰이는 카제였다. 하지만 그런 카제의 생각을 알 수 없는 이드와 라미아로서는 유심히 자신들을 바라보는 카제의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웠기에 먼저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흠, 흠! 뭔가 말씀하시고 싶은 것이 있는 듯한데… 말씀하시죠. 그렇게 바라만 보시면 저희가 부담스럽습니다.”

그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생각에 빠져 있던 카제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내가 너무 내 생각에 빠져서 실수를 했구만. 손님을 앞에 두고… 미안하네.”

“아니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보다는 뭔가 이야기 거리가 있는 듯한데. 말씀해 주시겠어요?”

라미아가 카제의 말을 받으며 그가 입을 열기를 재촉했다. 누가 뭐래도 이드와 라미아는 질문을 던진 입장이고, 카제는 그 질문에 답해야 하는 입장이니 먼저 말을 꺼내라는 뜻이었다. 어찌 보면 무례해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카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남자들이라면 거의 모두가 그런 것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흔한 말로 미녀는 뭘 해도 용서가 되니까 말이다. 오히려 도도해 보인다고 좋아하는 녀석들이 있을지도… 좌우간. 이런 라미아의 말이 신호가 되었는지 카제가 자세를 바로하며 입을 열었다.

“우선 자네들이 확인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답해 주겠네. 자네들이 찾는다는 브리트니스라는 검과 란 님이 현재 소유하고 있는 브리트니스는 동일한 물건이었네.”

과연.

끄덕. 끄덕.

이드와 라미아는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사실이라고 확신(確信)하고 있던 일을 확인(確認)받은 것이다.

“그리고 브리트니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네. 답해 주겠나?”

이어진 카제의 말에 이드와 라미아가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저희가 대답해 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요.”

“자네들도 들어 알겠지만 제로라는 단체는 국가에 이용당하고 있던 능력자들이 그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단체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란 님도 마찬가지였었지. 그분이 가진 투시(透視)와 투심(透心), 그리고 독특한 표현 방식의 염력 때문에 미국이라는 거대한 괴물에게 잡혀 계셨었지. 그러던 중 우연히 그분은 브리트니스를 얻게 되셨고, 그분이 가진 능력으로 브리트니스라는 검에 대해 알게 되셨지. 그렇게 해서 알게 된 것 중 가장 흥미 있는 사실이 바로 다른 세계의 물건이란 점이었네.”

카제는 그렇게 말하며 방금 페인이 급히 내려두고 나간 찻잔을 들었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며 의자에 편히 몸을 기대었다.

‘아, 아~ 빙빙 돌려서 이야기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저런 말은 말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듣는 사람도 머리 굴리게 만들어서 싫어하는 이드였다. 그때 그런 이드의 마음의 소리를 들었는지 카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도 그와 비슷한 뜻을 돌려서 전한 적이 있지. 브리트니스를 찾고 있다니 확인하는 셈치고 묻겠네. 자네도 브리트니스와 같이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가?”

“……..”

이드는 그 말에 대답하려다 순간 떠오른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막상 네라고 대답하려니 정말 내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자신이 그레센에서 넘어오긴 했지만 그 이전엔 중원의 무림. 바로 이 세계의 과거에 살고 있었지 않은가 말이다.

‘왜 그러세요. 이드 님.’

갑자기 생각에 빠진 이드의 모습에 라미아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이드는 그녀의 모습에 별일 아니라는 듯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네. 저희들은 지금 이 세상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확실히 지금 시대는 이드가 존재하던 곳이 아니었다. 이드의 말을 들은 카제는 잠시 망설인 이드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긴 했지만 별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이어진 질문 내용들도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쉬운 내용이었다. 언제 이곳으로 왔는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가, 제로와는 왜 싸우는가 등의 사소한 것이었기에 이드와 라미아는 사실대로 답해 주었다. 카제도 두 사람이 대답하는 내용을 기억하려는 듯 귀담아 들었다.

“흠… 그렇군. 그럼 마지막으로 묻지. 자네 제로를 어떻게 생각하나?”

“별로… 이렇다 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요.”

이드는 이번에도 간단히 답했다. 하지만 그 말이 너무 간단했는지 카제는 잠시 멍한 눈으로 이드를 바라보던 카제는 라미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앞서의 질문에서도 너무 짧은 답에는 그녀가 보충 설명을 해 주었던 때문이었다. 그 시선에 라미아는 이드를 향해 입술을 삐죽여 보이고는 귀찮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드 님이 말을 다시 말하면 제로를 좋게 보지도 나쁘게 보지도 않는다는 거예요. 그저 가디언처럼 하나의 단체로 생각한다는 거죠. 앞서도 말했지만 저희들은 이 세계에 되도록이면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그런 상황에서 제로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결론 내릴 이유가 없으니까요.”

“잘 알았네. 대답해 줘서 고맙네. 그럼 자네들이 말하고 싶어 하는 브리트니스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지. 하지만 그 전에… 차가 좀 더 필요한 것 같구만.”

그의 말대로 세 사람의 찻잔이 비어 있었다. 겉모습에 맞지 않게 페인이 끓인 차의 맛이 꽤나 괜찮았던 탓이었다. 카제는 다시 페인을 부르려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페인을 부르기 위해 호출기를 찾는 듯했다. 하지만 방 안엔 호출기는커녕 전화기도 보이지 않았다. 카제는 그 모습에 끌끌 혀를 차고는 품속에서 짙은 갈색의 목도를 꺼내 들었다. 오랫동안 사용한 때문인지 손때 묻은 목도는 어린아이의 팔 길이보다 짧아 목도라기보다는 목비도라고 부르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짧은 목도를 꺼내 든 카제는 앉은 자세 그대로 목도를 들고 바닥을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그러나 그 가벼운 행동의 결과는 결코 가볍지가 않았다. 그의 도가 바닥에 부딪힐 때마다 마치 북소리 마냥 바닥이 투웅하고 울렸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돌팔매에 번지는 파문처럼 그 충격파가 5층 바닥 전체로 퍼져 나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5층 바닥 전체를 도처럼 사용한 엄청난 짓을 저지른 것이다. 사람 한 명을 부르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 모습에 이드가 고개를 끄덕일 때 아래층으로부터 경악성을 비롯한 가지각색의 소리들이 들려와 이드와 라미아를 미소짓게 만들었다. 아마 갑자기 무너질 듯 울어대는 천정에 기겁해서 일어난 소동이리라. 보지 않아도 당황해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상상되는 듯했다. 페인은 그런 아래층의 소란이 가라앉기도 전에 검을 들고 방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자신들의 기습과 이드의 검 솜씨를 기억하고 있는 그로서는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일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비웃듯이 라미아의 웃음이 흐르는 방 안의 분위기에 페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쯧쯧… 녀석아. 뭘 그리 두리번거리느냐. 검까지 들고서.”

카제는 그런 페인의 모습이 한심해 보였는지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아,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라. 이곳을 중심으로 마치 검탄(劍彈)과 같은 충격파가 일어나서. 선생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페인이 검을 내리고 물었다. 하지만 그에게 카제에서 날아온 것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세 개의 찻잔이었다.

“그건 내가 널 부른 소리였으니 신경 쓸 것 없다. 그보다 차나 다시 좀 끓여 오너라. 차 맛이 꽤나 마음에 드는구나.”

“하아?!?!”

페인은 황당하다는 듯 카제를 바라보았다.

“녀석. 거기서 계속 서 있을 테냐?”

멍하니 서 있다 다시 한번 재촉하는 카제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문을 닫은 페인은 멍하니 품에 들린 찻잔을 바라보다 한탄 섞인 한 숨을 내쉬었다.

“흐아아… 선생님. 손님도 있는데 좀 봐주시라 구요.”

그런 페인의 발길은 주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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