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239화
문제의 두 사람은 결국 카제가 귀환할 때 같이 가기로 하고 한 옆으로 물러나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은 약간 애매한 표정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당장에 카제에게 벌을 받지 않아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주위의 불쌍한 시선이 뜻하는 대로 본부로 돌아가 카제에게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걱정해야 할지 마음이 심란한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런 사태의 결말을 가장 기뻐한 사람은 역시 페인이었다. 노이로제까지 걸리게 만든 문제 거리가 사라진다는 말에 그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어오르는 추태까지 보였다. 그 대가로 카제의 목검에 약간의 징계를 받긴 했지만, 페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가지고 있던 최고의 골칫거리가 사라진다는 사실이 너무도 반가웠던 때문이었다. 덕분에 페인은 카제로부터 좀 더 귀여움을 받고서야 감정을 추스르고 남은 비무를 진행해 나갔다. 남은 사람이라야 다섯 명. 비무는 길지 않았다. 앞서 두 조가 비무를 마치고 마지막 남은 사람은 페인을 상대로 비무를 끝낸 것이었다. 특히 갑자기 생긴 축하할 만한 일에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는 페인을 상대한 마지막 단원은 흥겨움에 힘 조절을 하지 않은 페인에게 단 십오 초 만에 패함으로써 비무를 빨리 끝내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 비무가 끝나자 페인은 그들을 카제 앞에 비무를 펼쳤던 상대자끼리 정렬시켰다.
“이것으로 선생님 앞에서의 재롱은 끝. 그럼 평가가 있겠다. 선생님.”
페인은 카제를 청하고는 옆으로 비켜나려 했다. 하지만 그런 그를 카제가 잡아 세웠다.
“네 녀석은 왜 따로 빠지느냐? 너도 비무를 했으니 저기로 가서 서!”
카제가 가리킨 곳은 페인과의 비참한 비무로 기가 죽은 단원이 혼자 서 있는 곳이었다. 카제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리던 페인의 얼굴에 황당한 기색이 떠올랐다.
“서, 선생님. 오늘 교육을 받는 건 여기 이 녀석들인데요. 전 단지 비무 상대가 없어서 잠시… 아, 알겠습니다. 갈게요.”
갑작스런 카제의 말에 당황해 뭐라 말을 하던 페인이었지만 말이 길어질수록 카제의 곧게 뻗은 눈썹이 치솟는 각도가 커지는 것을 보고는 조용히 카제가 가리키는 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모두 비무 하느라 수고했다. 평소의 노력이 보이는 좋은 실력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만큼 아쉬운 점도 많다. 일곱 번의 비무를 보며 느낀 것인데, 너희들 모두가 너무 강하게 밀어붙이려고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상대에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산을 밀어내려고 애쓰는… 억지스럽고, 허망한 그런 느낌 말이다. 그런 일은….”
말을 잠시 끊은 카제의 시선이 슬쩍 이드와 라미아를 향했다.
“그런 일은 주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절대 강자(絶對强子)를 상대하고 난 후에 생기는 일종의 후유증이라고 할 수 있지.”
“……..”
카제의 말에 단원들 모두는 침묵했다. 자신들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던 전날의 일을 카제가 정확히 집어내어 준 것이다. 그것은 하루가 아니라 몇 달이 지나더라도 지워지지 않을 기억이었다. 모두의 시선은 은밀하게 이드와 라미아를 향했다. 이드는 그 모두의 시선을 슬쩍 흘리며 앞에 서 있는 카제의 등을 바라보았다.
‘역시, 페인의 거짓말을 일부러 속아 넘어가 주신 모양이군. 속이 뜨끔하겠는데. 페인 씨.’
아닌 게 아니라 그때 페인은 당혹감과 불안에 솟아오른 진땀으로 등을 축축이 적시고 있었다. 카제가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다고 말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뜻을 가진 말을 했다는 것은 이미 짐작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거짓말은?
‘혹시 날 막내들과 같이 세우신 게… 거짓말한 것을 벌주시려고? 아니면…’
페인의 머릿속은 계속해서 솟아나는 불길한 생각들로 하나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카제는 전혀 그런 걸 생각하지 않는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후유증일 뿐 너희들이 깊게 생각할 일도, 오랫동안 기억할 만한 일도 아니다. 그 일은 너희들에게 그저 경험의 한 부분이 되면 되는 것이다. 너희들을 상대했던 상대의 강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그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고 배울 것을 찾는다. 그것이 너희들이 할 일이다. 집착하고 붙잡아 둘 일이 아니란 것이다. 알겠나?”
“네!!”
뭔가 알 듯 모를 듯한 말이긴 했지만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끼는 단원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에 매달려 비무에까지 영향이 있다는 것은 너희들 정신 상태의 문제다. 그것은 실력을 키우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힘이 얼마만큼 커지든지 간에 그것을 다스리는 것은 정신이다. 커진 힘에 휘둘려서는 미치광이밖엔 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모두 자신의 정신을 성숙시키고, 마음을 다스려라. 고요한 명상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다스려 마음이 고요해지면, 힘의 제어뿐만 아니라 잡념이 사라지고, 싸움 중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자신이 걷는 길이 확실히 보여 실력을 높이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말은 비무를 했던 녀석들만이 아니라 지그레브의 모든 단원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그럼, 이제 비무를 마친 사람들에게 ‘숙제’를 내 주겠다. 숙제가 뭔지는 알겠지?”
“옛! 말씀하십시오.”
대답하는 목소리에 기합이 들어가 있다. 카제의 숙제란 자신이 가진 장점과 단점에 대해 신경 쓰고 단련하며, 노력하고, 발전시켜 카제가 보기에 균형 있고, 모자라지 않도록 수련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처음 카제에게 가르침을 받은 단원들이 학교 선생님이 내주는 과제물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었다. 단원들의 대답을 들은 카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단원들의 눈을 맞춰 가며 그 한 명, 한 명에게 하나씩의 단어를 선물했다. 강(剛), 유(有), 심(審), 정(正), 인(忍) 등등 총 열세 개의 단어가 순식간에 카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드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무언가 조언이 되기에는 너무나 짧은 단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르침을 주고, 가르침을 받기에 가장 좋은 것인지도 모른다. 가르치는 자가 바라보는 단어의 뜻과 가르침을 받는 자가 생각하는 단어의 뜻은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해 자세히 설명하더라도 알아듣지 못하는 수가 있고, 잘못하면 스스로 찾아야 하는 길을 막고 가르치는 자가 찾은 외길을 강요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카제가 말하는 이 짧은 단어에는 그런 것이 없다. 너무나 짧은 하나의 단어이지만 그것에서 나오는 수많은 해석과 뜻의 이해는 가르침을 받는 자 스스로가 찾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즉 그만큼 넓고, 다양한 길을 스스로 열어갈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되어 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방법은 옛날 대학자라 불리던 노선비나, 일부의 명문대파에서 지혜와 절기를 전할 때 쓰던 방법이었다. 카제 역시 그렇게 배웠거나, 단원들을 가르치는 동안 스스로 깨우쳤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 역시 사부들에게 저런 식으로 배웠으니 말이다. 그렇게 이드가 예전 중원의 일까지 생각해 내려 할 때 카제가 페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네 녀석에게는…”
꿀꺽.
‘제발… 제발…. 큰일이 아니기를…’
페인은 시선을 받고 바싹 말라 버린 입으로 마른침을 삼키며 간절히 누군가를 향해 빌었다. 그런데 그런 그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던 모양이다.
“내 도초(刀招) 하나를 알려 주마.”
“감사합니다. 도법을 가. 르.. 쳐…? 에… 에??”
카제의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던 페인이 경악에 가까운 표정으로 카제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도법이라니… 주위 사람들의 반응도 페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말 내 기도가 통했나?’
페인은 자신이 빌었던 존재가 누구인지 수첩에 적어 두자고 생각하며 재빨리 입을 열었다.
“서, 선생님. 갑자기 무슨… 저는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고 있긴 하지만 정식 제자도 아닌데 어떻게…”
“안다. 어차피 내가 가진 도법이다. 네게 가르친다고 뭐라고 따질 사람은 없지. 그리고 이 한 초식의 도법이 네게 내주는 숙제다.”
페인의 표정이 묘해졌다. 무공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배우고 싶어 하는 카제의 도법이다. 헌데 그걸 가르쳐 주신다고 하시고는 숙제라니.
“… 그거… 안 배우면 안 될까요?”
왠지 거부감이 든다. 하지만 지긋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카제의 눈길에 가만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자신이 미웠다.
“내가 내주는 숙제다. 이 녀석아! 넌 정신이 너무 산만해. 평소에도 그렇고, 내가 저 골칫덩이들을 데려간다고 할 때도 방방 뛰는 꼴이라니. 지그레브를 책임지는 대장 중 한 명이라는 녀석이 그렇게 촐랑대서야 되겠느냐. 머리 쓰는 일은 퓨와 데스티스가 다 하겠지만, 그래도 싸움에서 직접 움직일 때는 네가 지휘를 하는 만큼 신중하고, 진중해야 한다. 그러니 배워라. 내가 전해 줄 초식은 고요하고, 어두우며, 향기가 있는 것이다.”
“… 고요하고… 어두우며…. 향기가 있다면…. 시, 심혼암향도(深魂暗香刀)!!! 마, 말도 안 됩니다. 선생님.”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어 카제를 바라보며 페인이 악을 쓰듯 소리쳤다. 그의 모습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몰렸다. 페인은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흔들었다. 심혼암향도라니. 정말 말도 안 된다.
“안 될 것 없다. 익히기 어렵지만 익히기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바로 세워 잡는 데는 충분할 테니까.”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이야기하는 카제였다. 하지만 페인의 표정은 여전했고, 고개도 내저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페인은 의문이 가득 담긴 주위의 시선을 볼 수 있었다. 카제의 이야기에 당황해서 방금 전까지 의식하지 못했던 시선에 페인은 설명하듯 입을 열었다.
은하현천도예(銀河玄天刀藝). 바로 카제가 익혀서 사용하는 도법의 명칭이다. 이 도법은 오랜 옛날로부터 전해진 도법으로 지금에 와서는 그 기원조차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도법인데, 그 가진 바 위력과 현묘함이 가히 절대라고 말해도 부끄럽지 않을 엄청난 것들이다. 그것은 도법을 익힌 카제의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도법인 만큼 그 익히는 법 또한 거의 불가능하다 할 만큼 어렵고, 지난하다.
카제를 포함해 도법의 전승자 중 은하현천도예를 익힌 자는 정확하게 다섯 명밖에 되지 않을 정도였다.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을 내려온 중에 익힌 자가 다섯이라면 그 도법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없느니만 못한 것. 선대의 전승자들은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는 도법을 만들기 위해 은하현천도예를 연구하여 두 개의 도법으로 분리해 내게 되었다. 비록 분리되긴 했지만 그 모체가 절대의 도법이었기에 두 개의 도법 역시 그 위력이 엄청났다. 그때부터 전승자들이 실질적으로 익히는 도법은 그 두 개의 도법이 되었다. 은하현천도예는 두 개의 도법을 완전히 익힌 후에야 수련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되어 거의 익히는 자가 없는 도법이 되어 버린 것이다. 카제의 두 제자들도 이 두 개의 도법. 은하도결(銀河刀結)과 현천도결(玄天刀結)을 각각 배웠는데, 그들의 실력은 웬만한 대형 몬스터도 혼자서 가볍게 해결할 수 있을 정도다. 여기서 심혼암향도는 현천도결의 최고 초식인 단심도(斷心刀)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현천도결을 모두 익혀도 심혼암향도를 사용할 수 없어. 심혼암향도는 현천도결과 은하도결을 극상으로 익혀 조화시키고, 그 숨은 뜻을 깨달아야 사용할 수 있는 은하현천도예상의 도법이기 때문이지.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선생님처럼 높은 경지에 올라 은하현천도예를 익히지 않는 이상 배우는 게 불가능한 도법이란 말이 되는데… 도대체 어떻게 배우란 말입니까. 선생님!!!”
페인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리며 카제를 향했다. 이건 아무래도 자신을 골탕 먹이려 하는 일로밖엔 생각되지 않았다. 페인의 설명을 들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생각인 듯 카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정작 카제는 그런 시선 속에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한편으로는 한심한 듯 페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쯧쯧… 내가 네게 실없는 농담을 한 적이 있느냐? 내가 익힐 수 있다면 익힐 수 있는 것이다. 완벽히 익힐 필요도 없고, 기대도 않는다. 앞서 말했듯 네가 심혼암향에 입문만 하더라도 네 마음을 다스리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될 터.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다.”
“하, 하지만 전 그런 말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허허허… 네가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만, 이 녀석아. 잘 기억해 둬라. 은하현천도예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니라. 바로 나라는 것을.”
카제의 말대로였다. 자신에 대한 것은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 그렇다면 그 절대의 도법을 배우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예! 최선을 다해 배우겠습니다.”
페인은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 모습에 주위에 있던 단원들이 부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그들도 무인인데, 어떻게 최강의 무공이 탐나지 않겠는가. 카제는 그 모습을 보며 짧디짧은 그만의 목도를 다시 손에 들었다.
“구결은 이미 전했으니, 이제 초식을 펼쳐 도초의 형을 보여 주겠다. 주위에 있는 녀석들도 배워 보고 싶다면 보아도 좋다. 하지만 너희들의 실력이 페인과 같은 수준이 아니라면 알아보는 것도 힘들 것이다.”
그 말에 남의 일을 부러운 듯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대번에 카제의 몸에 고정되어 그의 몸 동작 하나하나를 살피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의 실력은 페인보다 뒤에 있지만 자신의 능력이 되지 않더라도, 한번쯤 도전해 보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이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그런데 구결이라면…”
페인이 의아한 듯 물었다. 카제가 이미 전했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분명 자신은 들은 기억이 없었다. 그 모습에 카제의 눈가에 빙긋 웃음이 떠올랐다.
“고요하고, 어두우며, 향기롭다. 그것이 심혼암향도의 구결이다.”
“에… 예에?”
모두의 얼굴에 황당한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제는 전혀 그런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서 라미아와 꼭 붙어 있는 이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럼 이드 군. 수고스럽겠지만 잠시 도와주겠나? 내 이 한 수만 받아 주면 고맙겠네만.”
이드는 그의 말에 그의 손에 들린 목도를 바라보았다. 목도에는 어느새 수많은 별빛이 모여 압축되어 만들어진 듯한 밝은 회색의 강기가 뭉클거리며 일렁이고 있었다.
순간 장내로 바늘 하나 떨어트리기 무서울 정도의 정적이 흘렀다. 지그레브의 모든 단원들이 태어날 때부터 입이 없었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꿀꺽
누군가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갑자기 거론된 비무. 그것이 단 한 수에 그치는 것이라고 하지만, 자신들은 감히 예측조차 불가능한 절대 고수들 간의 비무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에 단원들의 가슴 가득 흥분이 들어찼다. 더구나 그 비무의 당사자들이 누구인가. 한쪽은 단원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실력을 가진 카제였고, 다른 한쪽은 전날 자신들을 상처 하나 입히지 않고 제압해 버린 정체불명의 손님이지 않은가 말이다. 지금 단원들의 심정은 아이돌의 슈퍼 콘서트가 시작되길 기다리는 골수팬의 그것과 같았다. 그 콘서트의 성사 여부는 지금 한 사람의 대답에 달려 있다. 모두의 시선이 함껏 기대를 담아 이드를 향했다. 자신들이 전날 이드에게 철저하게 깨졌다는 사실도 모두 잊어버렸는지 간절한 눈빛들이었다.
“제가 방어만 하면 되는 건가요?”
꼬리치는 강아지 같은 부담스러운 눈길들에 이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허락을 뜻하는 동작이었다.
“아무래도 좋네. 방어만을 해도 좋고, 마주 공격을 해도 좋아. 심혼암향도는 그 형이 정확하게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아서 그때그때의 상황과 주위의 대기에 따라 펼쳐 내는 초식이지. 그저 동작 몇 가지를 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네. 그것보다는 직접 도가 부딪히는 모습을 보여 그 속에서 스스로 도의 길을 느끼고 찾아내게 해야지. 심혼암향도를 얼마만큼 익힐 수 있는가는 배우는 사람이 얼마만큼 검을 보는 눈이 있는가에 달렸다고 할 수 있네. 하지만 그렇게 하자면 무엇보다 심혼암향도를 받아 주는 상대가 있어야 하는데 그 상대를 찾기가 어렵지. 헌데 오늘 자네 같은 좋은 상대가 나타났기에 이렇게 부탁하는 것이라네, 허허허.”
기분 좋게 웃어 보이는 카제의 입가에는 완전히 숨기지 못한 호승심 같은 것이 깃들어 있었다.
“그럼…… 잠시 검을 들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심혼암향도라는 것을 견식해 보고 싶으니까요.”
불끈
이드의 대답을 기다리던 단원들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드디어 승낙함으로써 고대하던 슈퍼 콘서트…… 아니 절대의 비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누군가의 지시도 없이 연무장은 순식간에 비워지고 그 안에 있던 단원들은 모두 외곽으로 물러나 벌써 자세를 바로 하고 관전 준비에 들어가 있었다.
비무를 재촉하듯 비워진 연무장으로 들어선 이드는 유연한 동작으로 일라이저를 뽑아 허공에 살짝 던져 올렸다 손에 들었다. 순간 일라이저의 검신이 허공에 아름다운 은색의 곡선을 그려 냈다.
“아!”
이드를 바라보던 카제와 단원들로부터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눈에 들어온 일라이저는 도저히 그냥 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특히나 지그레브의 단원들은 전날 자신들을 두들긴 검이 아름다운 일라이저라는 사실에 묘한 기쁨으로 몸을 떠는 것이 마조히즘의 끼마저 보였다.
“자네 좋은 검을 가지고 있군. 정말 내 생애 처음 보는 아름다운 검이야.”
카제의 입에서 진심을 담은 탐성이 흘러나왔다. 이드는 빙긋이 미소 지었다.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검을 칭찬하는 말에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 딸을 칭찬하는 소리를 들은 부모의 심정이 이럴까.
“칭찬 감사합니다. 일라이저도 카제 님의 칭찬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일라이저의 검신을 가볍게 튕겨 맑고 깨끗한 검명을 일으켰다.
카제는 빙긋이 웃고는 목도를 들었다. 한데 그의 목도에 서려 있는 강기는 앞서 흘러나왔던 은빛이 아니라 모든 빛을 거부하는 듯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 회색빛도 잠시, 나뭇가지가 바람에 살랑대는 양 목도가 가볍고 부드럽게 흔들리는 순간 회색빛이 허공 중으로 녹아내리듯 사라져 버렸다.
이드는 가볍게 눈을 빛내며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이 심혼입니까?”
카제는 역시라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이 일도는 페인에게 전하기보다는 자신의 눈으로도 전혀 확인이 되지 않는 이드의 실력을 가늠해 보기 위한 것이었다. 한데 도법을 시전하기도 전에 그 첫 번째 요결을 정확하게 집어내는 이드였으니…… 카제는 목도를 잡은 손에 한층 더 내력을 더했다.
“이제 암향이 남았으니 받아 보게나.”
그 말과 동시에 그의 몸이 한 발 나섰다. 그리고 또 그와 동시에 목도를 들고 있던 한 손이 유연하게 허공을 갈랐다. 그것이 끝이었다. 이드에게 달려 나가지도 않았고,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통 사람이 보았을 때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단순하고 쉬운 두 동작 너머의 움직임 너무도 복잡하고 은밀하며 순수한 강함의 칼날이 복잡하게 엉키는 모습. 이드는 그 모습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혼암향도
그 이름 그대로 깊이 가라앉은 어둠처럼 내밀하며 은은하지만 사람을 취하게 하는 향기와 같은 움직임을 품고 있는 초식이다.
“정말 절정에 이른 도초군요. 마침 제게 이와 상대할 좋은 검초가 있습니다. 난화십이검의 잠영과 비혼이란 꽃입니다.”
이드의 여유로운 목소리와 함께 일라이저의 검신이 허공에 은빛 꽃송이를 그려 낸다. 앞선 카제보다는 복잡하고 화려한 동작이지만 그 후에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의 상황이다.
“호오, 과연! 심혼암향이 최고의 호적수를 만난 듯 하구만.”
카제가 텅 빈 허공에 시선을 두며 감탄성을 터트렸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듣고 있는 제로 단원들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두 절대 고수의 대결에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니.
비록 앞서 알아보기 힘들다는 말을 카제가 하긴 했지만 이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고대하던 콘서트에서 가장 중요한 가수가 빠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느껴질 듯 느껴지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하면 어느새 은밀히 온몸의 솜털을 자극하는 감각은 시냇가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과 같은 묘한 느낌이었다.
카제의 숙제를 받아든 페인은 그 느낌에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지금 눈앞의 두 사람이 펼쳐 내는 검초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란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대단한 걸. 이미 현경의 끝에 서 있는 것 같은데. 천운이 따른다면 원경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지도……’
이드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카제와 자신 사이에 비어 있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검강과 도강이 은밀하고도 현란한 나비의 군무를 추고 있었다.
소리 없이 부딪치고 깨어지는 검강과 도강의 모습은 나비의 날개와 같았고, 흩어지는 파편은 꽃가루와 같았다. 하지만 그런 꽃가루 같은 강기도 사방으로 날려지며 사라지듯 허공 중에 녹아든다. 그것은 강기를 발하는 두 사람이 극도로 강기를 조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덕분엔 주변엔 그 흔한 압력으로 인한 흙먼지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두 사람의 실력이 극에 이르렀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러길 잠시간, 별다른 변화가 없는 상황에 이드가 막아 놨던 물길을 여는 기분으로 내력을 더했다.
쿠웅
이드의 검강 한 줄기 한 줄기마다 묵직한 바위 덩이가 떨어져 내렸다. 그 묵직한 소리는 오직 카제의 마음속에만 들려왔다. 동시에 팽팽히 균형을 유지하던 도강이 순식간에 뒤로 밀려 버렸다.
“흐음…… 굉장한 압력을 담은 강기군. 이렇게 쉽게 밀려 버리다니!”
카제는 예상을 넘어선 상황에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서는 방금 전까지 머물러 있던 여유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드의 반응을 기다리며 그의 힘에 균형을 맞추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 한순간에 밀려나다니…… 자신이 상상하던 것 이상의 힘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잠시 깊은 눈으로 코앞에서 벌어지는 강기의 산란을 바라보던 카제는 목도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처음부터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기고자 한 일은 아니지만 이대로 물러설 생각도 없었다.
그런 카제의 생각과 동시에 주위에 둘러선 단원들로부터 갑작스런 탄성이 흘러나왔다.
“우와와와!”
환호하는 단원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 그곳엔 회색빛 강기가 허공에서 외롭게 부서지고 있었던 것이다. 카제가 마음을 다잡는 잠시의 틈을 비집고 강기가 면모를 내보인 것이다. 하지만 곧 카제가 마음을 다잡자 강기는 다시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이미 강기를 확인한 단원들의 시선은 그곳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더구나 아무 일도 없던 조금 전과는 달리 강기가 사라진 위치로 빨려 들어가며 가루로 부서지는 크고 작은 돌멩이들의 살아있는 듯한 모습은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사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갑자기 상승한 두 사람의 강기의 위력과 서로 소멸하며 일어나는 에너지의 인력에 의한 조금 복잡하고 복합적인 현상의 결과였다. 하지만 그런 어려운 말을 집어치우고서도 충분히 흥미로운 장면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정작 주위의 시선을 끌어모은 카제는 그런 것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다잡은 마음으로 상승의 공력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 힘 어디까지인지 시험해 주리라.’
조용하고 굳은 카제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강렬한 회색의 강기가 반격을 시작했다. 조금 전 이드와 같은 힘으로, 아니 그 두 배의 힘에서 네 배의 힘으로, 또 여섯 배의 힘으로 차츰차츰 그 강도를 더하여 반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것은 거의 한순간에 이루어진 반격이었다. 좀 전 이드의 공격으로 보아 보통의 힘으로는 그를 압박하기 힘들 것이란 판단에서 과도하게 펼쳐 낸 공격이었다. 또한 그것은 보통의 상대라면 한순간에 짓부수어져 버릴 가공할 힘으로, 그만큼 이드의 강함을 믿고 펼쳐 낸 공격이었던 것이다.
그런 카제의 믿음이 통했는지 이드는 멀쩡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멀쩡해도 너무 멀쩡했던 것이다. 이드에 대한 카제의 믿음이 오판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완전히 결판을 내긴 어려워도, 현 상황의 역전은 가능하리라 생각한 연타와 같은 공격이 다시 평수를 이루는 정도에서 끝나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크흠!”
카제는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토했다. 현 상황이 그의 예상을 확실하게 벗어나 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이 상대와 상황을 파악하는 눈이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상대의 힘을 예측하는 데 있어서는 벌써 두 번이나 실패하고 말았다. 처음엔 스스로 당황할 만큼 쉽게 뒤로 밀려 버렸고, 지금은 겨우 평수를 이루어 아무런 득도 보지 못하는 결과가 되었으니…… 이렇게 되면 이드의 힘을 보겠다는 목적 이전에 카제가 가진 무인으로서의 자존심 문제가 된다. 스스로 최강의 반열에 올랐다 생각한 자신의 두 번에 이르는 실수.
정당히 싸워지는 것보다 더욱 화가 나는 일인 것이다. 특히 그 실수가,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이드의 실력과 어딜 보더라도 어려 보이는 상대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마음 한켠에 생겨난 방심에서 일어났기에 카제는 스스로에게 더욱더 화가 난 것이었다. 아무리 직접 겪어 보지 못했다지만, 이미 제자들을 통해 그 경악할 만한 위력에 대해 들었던 자신인데 말이다.
“허허허……”
이드는 갑작스런 카제의 웃음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대비하고 있었던지라 조금 밀리긴 했지만, 여유 있게 카제의 공격을 받아 낸 그였다. 그리고 당연히 그 공격의 뒤를 이을 후속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데 기다리는 후속타는 없고, 상대는 이유 모를 웃음만 짓고 있으니 이드로서는 정녕 이해 불가였다.
‘도대체 왜 웃는 거지?’
하지만 이드는 그 의문을 풀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막 물어보려던 찰나에 카제의 웃음이 그쳐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을 기준으로 그의 기도가 칼날처럼 날카로워지며 엄청난 위력의 공격들이 퍼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드가 보기에 그것은 카제의 진심이 담긴 공격으로 앞서의 그것들과는 그 위력이나 현란함에서 몇 배나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슈아아아악
“……뒤……물러…….”
“우……블……”
커다란 제트기의 엔진 소리 같은 시끄러운 소리가 연무장을 가득 메웠다. 그 엄청난 소음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묻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소리에 비례해 강해진 흡입력은 마치 작은 블랙홀을 연상시키며 주위에 떨어진 돌멩이나 나뭇가지 등 웬만한 무게가 있는 것들을 순식간에 빨아들였다. 연무장 주위로는 갑자기 커져 버린 흡입력에 당황한 단원들이 급히 뒤로 물러나는 모습이 수두룩했다.
‘이거 이거…… 뒤로 숨은 공격이 서로 부딪치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처음 알았는걸.’
그야말로 처음 보는 현상에 이드의 눈이 흥미로 반짝였다. 하지만 그런 호기심은 천천히 알아볼 일이다. 우선은 지금의 겨루기가 먼저였다. 그렇게 생각한 이드는 다시 카제에게 눈을 돌렸다.
“과연…… 대단한 도초네요. 잠영과 비혼으론 부족하니…… 뇌정화와 백화난무로 갑니다.”
이드는 소음에 묻혀 전혀 전달되지 않는 말을 스스로에게 되뇌듯 말하며 지금까지 일렁이던 일라이저의 궤적을 격렬하게 바꾸었다. 그러자 밋밋하던 연무장이 순식간에 붉은색으로 물들어 버렸다.
쩌저저정
그 속에서 붉은 번개가 번쩍이며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그 엄청나던 흡입력을 한순간에 무너트려 버렸다. 그리곤 빨려 들던 힘을 그대로 밖으로 내뿜었다. 그렇게 되자 흡입력에 몰려들었던 돌과 나무들이 그 충격에 작은 먼지가 되어 연무장을 가득 채워 버리는 것이었다.
“우…… 우왁!”
“젠장! 눈 감고, 코 막고, 입 막아.”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흥미롭게 구경 중이던 단원들과 라미아, 페인들은 난리가 났다. 생각도 못한 사태로 미처 방비를 못 해 꼼짝없이 먼지를 뒤집어쓰는 꼴이 되기 직전이라 마음이 급했던 것이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모를 단원들의 고함에 모두 옷가지나 손 등으로 얼굴을 가렸다. 개중에는 먼지를 덜 뒤집어쓰겠다고 쪼그려 앉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코앞까지 다가온 먼지구름에 숨까지 멈춰 버렸다.
‘온다…… 온다…… 온다…… 엥? 안 오네. 이상하다. 덮칠 때가 됐는데?’
이제나저제나 괴물 같은 먼지가 덮칠까 대비하고 있던 모두의 머리 위로 알 수 없다는 듯 물음표가 떠올랐다. 하지만 누구 하나 쉽게 고개를 들지 못했다. 모두의 머릿속에 거의 비슷한 만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빼꼼 고개를 드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덮쳐드는 파이 조각과 케이크, 나무판자. 망치, 모루 등에 맞아 쓰러지는 고양이, 톰의 몰골이. 하지만 지금은 만화가 아닌 현실. 더구나 덮쳐 들어야 할 먼지를 대신에 들리는 기묘한 소리에 모두의 머리 위에 떠 있던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며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들로부터 크고 작은 탄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탄성에 이끌려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던 한 단원 역시 오오, 하는 소리를 발하고 말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5미터에 이르는 커다란 갈색 구형의 먼지구름 때문이었다. 단원들 모두를 금방이라도 덮쳐 버릴 듯하던 그 보얀 먼지들이 마치 보이지 않는 풍선 속에 갇혀 버린 듯 이드와 카제 사이에 떠 있었다. 사실 그 먼지 구는 카제의 심혼암향도에 의한 당기는 힘과 백화난무의 외부로 밀어내는 힘이 어느 선에서 평형을 이룬 덕분에 생겨난 것으로 언제든지 그 힘의 균형이 깨어지면 터져 버릴 풍선과 같은 상태였다. 단원들 역시 그런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인지 하나둘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임의 평형이란 말이지……’
뿌연 먼지구름 사이로 백화난무의 꽃잎들을 뿌려 대던 이드는 이번 대결에서 다시 보게 되는 흥미로운 경험에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앞서도 그랬지만 이 재밌는 흥밋거리는 이번 일이 끝난 뒤에나 생각해 볼 일. 이미 카제의 전력이 어떠한지도 대충 알았고, 그가 원하는 만큼 심혼암향도를 충분히 받아 주었으니 이쯤에서 그만 대결을 끝낼 생각을 가진 이드였다. 그랬다. 카제가 이드의 실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 시작된 일이 오히려 이드가 그의 실력을 대충 알아 버리는 상황으로 변해 있었다. 그렇다고 카제가 건진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드의 실력이 확실하게 자신의 위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쿠합! 수라삼도 연환격! 수라섬광단! 수라만마무! 수라참마인!”
쩌저저정
이드의 작은 기합 소리와 함께 마치 공간이 부서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거친 바람 소리를 끊고 단원들의 귓가를 쨍쨍 울렸다. 그러자 지금까지 아름다운 붉은 빛을 뿜어 내던 일라이저의 검신이 피를 머금은 듯 스산한 빛을 토하며 붉고 촘촘한 그물을 만들어 냈다. 분수에서 물이 뿜어지는 듯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간 그 물은 그대로 카제와 먼지구름을 안아 버리며 휘감아들었다. 하지만 상대는 이미 현경의 정점에 서 있는 카제. 이드의 공격에 쉽게 당할 인물이 아닌 것이다.
“심혼암향 출!”
묵직한 카제의 외침과 함께 모습을 숨기고 있던 회색의 도강이 소리 없이 나타나 붉은 그물 안에서 나가기 위해 날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과는 이미 나와 있는 일이었다. 한동안 엎치락뒤치락 하던 두 기운은 어느 순간 멈칫하더니 반항을 포기한 물고기를 잡아챈 그물처럼 먼지구름 속으로 스르륵 스며들며 토오옹 하는 스케일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내고는 별안간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왠지 허탈한 기분이 들게 하는 결말이었다. 하지만 지켜보고 있던 단원들에겐 허탈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여유 따위는 전혀 없었다.
투화아아악
바로 방방한 풍선 속에 압축되어 있던 먼지구름이 그들을 덮쳐 버린 탓이었다. 어느 정도 뒤로 물러나 있었지만 엄청나게 압축되어 있던 먼지구름은 그들을 결코 놓치지 않고 본부 일대를 온통 뿌연 갈색의 먼지로 뒤덮어 버린 것이다. 그 광경에 주위를 지나던 지그레브 시민들의 시선까지 모여 들었고, 그들은 그 뿌연 먼지 속에서 쿨럭거리는 격렬한 기침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소환 실프. 이곳의 먼지를 가라앉혀 한 곳에 모아 줘. 부탁해.”
기침 소리만이 가득한 먼지 더미 속에서 맑은 이드의 목소리가 울리자, 슈우욱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먼지는 빠르게 한 곳으로 모여들며 가라앉기 시작했다. 잠시 뒤 그 속에서 뽀얀 갈색 먼지로 뒤범벅이 된 제로 본부와 단원들의 볼썽사나운 몰골을 드러냈다. 단원들은 제 꼴들과 뽀얀 얼굴에 눈과 입만 보이는 동료들을 번갈아 보며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연신 기침만 해 댈 뿐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서도 먼저 폭탄을 피한 사람들은 있었으니, 바로 이 먼지 폭탄의 창조주인 카제와 이드, 그리고 라미아와 데스티스였다. 앞의 두 사람은 대결을 펼치며 호신강기로 몸을 감싸 먼지를 피했고, 뒤의 두 사람의 경우는 이드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라미아의 적절한 실드 마법으로 먼지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뭐, 실드의 혜택을 보지 못한 페인과 퓨를 비롯한 몇몇 남성들이 두 사람에게 잠시 원망 어린 눈빛을 보냈지만, 이젠 기침하기 바빠 따지지도 못하고 있으니 신경 쓸 여유도 없을 듯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결이 막을 내리자 단원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세면장을 찾아 본부로 들어갔다. 온몸에 가득 달라붙은 먼지를 씻어 내기 위해서였다. 한 걸음씩 내딛는 그들의 발아래로 한 웅큼씩의 먼지가 흘러 내리는 걸 보면 한참을 씻어야 할 것 같아 보였다. 그 뒤를 카제가 대단하단 말을 남기고 따라 들어갔다. 그런 그의 얼굴엔 표현하기 힘든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아무리 수양을 쌓아 마음을 다잡은 그라도 이렇게 쉽게 패해 버린 상황에선 쉽게 마음이 정리되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칫, 너무하셨어요. 그냥 비겨 줄 수도 있었으면서…… 심술쟁이 같아요.”
카제를 바라보던 라미아가 쪼르르 이드 곁으로 다가와 얄밉다는 듯 흘겨보며 말했다.
“하하, 그럼 오히려 화내실 걸.”
이드는 싱긋 웃으며 라미아의 말에 간신히 대답했다. 라미아 역시 그럴 거란 걸 알면서 건넨 농담이었기 때문이었다. 카제의 경우처럼 오랜 수련으로 경지에 이른 인물들에게 적당히 해서 비기는 것은 오히려 그를 농락하는 일이라는 것을 두 사람 다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진실한 실력을 보여 주는 게 서로에게 좋은 일이다. 어쩌면 이번 일로 카제는 원경이란 벽을 깰 수 있을지도 모를 테고 말이다.
“저희들도 그만 본부로 들어가죠.”
여느 때처럼 말장난을 하려는 두 사람 사이로 데스티스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드와 라미아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몸을 돌려 본부 건물로 들어가는 데스티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마지막 두 사람까지 사라져 버린 연무장엔 작은 바람과 함께 뽀얀 먼지가 날리며 오래된 서부 영화의 스산한 한 장면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