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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245화


톤트의 마을로 향한 일행은 산에서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만큼 톤트의 마을은 깊은 산속에 꼭꼭 숨어 있었다. 과연 예측했던 대로 산에는 몬스터가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지금처럼 몬스터들이 날뛰는 때에 이렇게 산속이 조용하다는 것이 신기했는데, 톤트의 마을에서는 이렇게 되기까지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했다. 그 외에도 톤트와 여러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냥 걷기만 하기에는 산행이 지루했기 때문이었다. 톤트에게는 그레센과 그곳에 살고 있는 드워프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드와 라미아에게는 이곳에 살고 있는 드워프들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고, 그것은 꽤 재미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 속에서 톤트가 일라이져를 숙녀라 칭하는 이유도 알 수 있었다. 바로 일라이져의 모습 자체가 여성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제작자가 만드는 검의 형태가 인간으로 치면 육체고, 그에 깃드는 신의 신성력이 영혼이라고 할 때 지금 일라이져가 취하고 있는 외형은 어디를 보나 여성이라는 것이다. 특히 드워프의 솜씨에 의해 만들어진 일라이져는 마음씨 고우면서도 생기발랄한 영락없는 향긋한 소녀의 모습 그것이라고, 톤트는 호언장담을 했다. 그냥 보기에도 일라이져 자체가 여성스럽기도 했다. 순간 이드는 일라이져도 라미아처럼 인간으로 변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떠오르기가 무섭게 이드의 머리에서 사라져야 했다. 다름 아니라 옆에서 그런 이드의 생각을 읽은 라미아의 샐쭉한 눈길 때문이었다.

‘휴, 라미아 하나도 제대로 감당 못 하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이드는 엉뚱한 생각에 잠시 사로잡혔던 스스로를 질책했다. 그리고 그럴수록 자신을 위해 주던 일리나가 생각나는 건 왜일런지……

우우우웅……

그때 일라이져의 낮은 검명이 울렸다. 이드의 생각을 읽어 위로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라미아처럼 되지 못해 아쉽다는 뜻인지…… 헷갈리는 묘한 음성이었다. 보통 에고 소드의 성격과 성질은 크게 세 가지 요소로 인해 정해진다. 그 첫째가 깃드는 힘의 원천에 따른 속성이고, 둘째가 그 힘이 깃드는 그릇인 검신이며, 셋째가 처음 정해지는 검의 주인을 포함한 세 명에 이르는 주인들의 행동과 성격이다. 사람으로 치자면 첫째가 사람이 타고나는 천성이고, 둘째가 남과 여, 힘이 강하고 약하다는 외형적인 요인이며, 셋째가 사회를 살아가면서 완성되는 인격이자 사고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에고 소드를 만드는 자들보다 그 후에 검을 사용하는 사람의 행동이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검이 보통 신검이라고 불린다. 위의 세 가지 경우에 따라 일라이져를 분석해 보면 여신의 힘이 깃들어 천성이 맑고 깨끗하며, 보이는 그대로 아름답고 고아한 품격을 가진 모습에 처음 여신에게 바쳐진 대로 고위 사제들의 손길이 깃들었으니 톤트의 말대로 교육 잘 받은 꽃다운 소녀가 맞았다. 물론 꼭 에고 소드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검을 만들 때 에고 소드에 제작자가 기억이나 영혼의 복사체를 함께 집어넣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할 경우에는 대부분 검에 깃들인 기억이나 성격이 검에 융합되지 못하고 주인을 잠식하거나 조종하려 들어 결국 폭주를 일삼게 되고 만다. 이런 검을 보통 마검이라 부른다. 위의 신검과 마검 모두 고위의 에고 소드일 때만 해당한다. 뭐…… 그 밑에 있는 것들도 다 거기서 거기지만 말이다. 톤트의 안내로 밤늦게 도착하게 된 마을은 과연 은밀하고 교묘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비좁은 협곡 사이 깊게 파인 공간을 넓혀 오밀조밀 자리한 마을은 동굴 속에 위치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한 명의 드워프와 그 일행은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마을에 일제히 불이 켜졌고, 드워프들이 뛰어 나왔다. 톤트는 연신 드워프들과 포옹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들에게 둘러싸여 해후의 기쁨을 만끽했다. 심지어 눈물을 흘리거나 격앙된 감정에 북받쳐 울음소리를 터트리는 드워프도 있었다. 어찌 기쁘지 않을 것인가. 종족의 미래와 직결된 그러나 결과를 예측할 수 없어 모험이나 다름없었던 인간 세계로의 외출. 최악의 경우에는 톤트가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는 결과를 상정할 수밖에 없었던 절대절명의 작전이었다. 그를 보내고 나서 이 마을이 얼마나 초조했을지는 이들의 상봉 장면만 보다라도 잘 알 수 있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던 대표자가 무사히 귀환했으니 이토록 기뻐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뿐인가. 이드와 라미아는 결계가 펼쳐진 후 처음 마을에 들어서는 인간들이었다. 인간을 받아들일 수 없는 영역이 둘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그들을 향한 환대는 그래서 더욱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톤트에게 도움-통역-을 준 사람이었기에, 또 마을과 인간 세계의 통로가 되어 줄 사람이기에 둘은 특히 주목받았다. 밤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마을에서는 축제가 벌어졌다. 드워프의 축제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춤이었고, 축제를 더욱 축제답게 만드는 것은 술이었다. 건배를 들고 시작된 대표자의 일장 연설은 마을의 모든 드워프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인간들은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았고, 인간들의 미래가 우리들의 미래와 맞물리게 되었다고 말할 때는 환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으며, 톤트를 환호하는 목소리들도 드높았다. 이드와 라미아는 톤트 다음 가는 주인공이 되어 밤이 새도록 계속된 마을의 축제를 함께 즐겼다. 다음날부터 이드와 라미아는 마을에서 이틀 동안 더 머물며 톤트가 제시한 조건들을 들어 주었다. 상급의 보석들과 마석들을 모아 통역 마법이 걸린 아티펙트와 두 개의 통신구가 한 쌍을 이루는 통신구 다수를 제작하고, 미랜드 숲의 좌표를 찾아 그들과의 통신 회선을 열어 주었다. 서비스로 통신구를 사용할 몇몇 드워프 부족에게 직접 통신구를 이동시켜 주기도 했다. 차원 이동에 대한 연구 자료를 가장 먼저 챙겨 둔 후의 일이다. 이틀 후 마을의 중앙 광장. 그 비좁은 광장에 마을의 드워프들이 다시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톤트를 비롯한 드워프들의 중심에 이드와 라미아가 서 있었다.

“고맙네. 자네들이 만들어 준 아티펙트는 잘 쓰겠네. 지금 같은 때에 가장 필요한 물건인 듯해.”

약속을 지켜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악수를 건네는 톤트에게 이드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라고 하셨습니까. 또 저희들이야말로 필요한 걸 얻었습니다. 좋은 선물도 얻었구요.”

이드의 말대로 라미아의 머리를 단장하고 있는 몇 개의 아름다운 장식품이 눈에 띄었다. 그 외에도 몇 가지가 더 눈에 확연히 들어왔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그래야지. 그럼 다음에 언제라도 들려주게. 이것도 가져가고……”

턱 내미는 톤트의 손에 들린 것을 얼결에 받아든 라미아. 그녀의 손 위에는 손바닥만 한 수첩 모양의 은색 물품이 들려 있었다. 간간히 흰색과 검은색이 들어간 물건은 예쁘게도, 고급스럽게도 보였다.

“이걸 주시다니요?”

이드와 라미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톤트와 마을의 장로를 바라보았다. 물품의 정체를 알고 있는 두 사람으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다. 필요한 사람이 가지는 거니까. 우리 마을에선 쓸 사람이 없는 물건이지. 연구 자료를 가져가는 김에 같이 가져가. 이건 선조 분이 알아낸 물건에 대한 조사 내용이다.”

무뚝뚝한 장로의 말대로였다. 톤트가 건넨 물건. 그것이 바로 이드와 라미아를 흥분시킨 차원 이동으로 넘어온 물건이었던 것이다. 잠시 물건과 장로를 번갈아 보던 이드는 슬쩍 라미아에게 시선을 준 후 장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마을에 있을 때처럼 소중히 하겠습니다.”

“아아…… 필요 없다. 마음대로 해. 부숴 버려도 상관없다. 가 봐.”

“하핫…… 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다음에 뵐게요. 감사했습니다.”

라미아는 손에 든 물건을 품에 넣어 두고는 이드와 함께 약간 뒤로 물러섰다. 이어 낭랑한 라미아의 목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곧 마을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크하.”

헌데 그렇게 두 사람이 사라진 순간 마을 중앙에 모인 몇몇 드워프로부터 복잡한 심경을 담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혹시 짧은 순간 라미아의 미모에 반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다. 아마 그렇게 묻는다면 그는 드워프의 뜨거운 눈길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실은 그들 몇몇이 남손영과 같은 일을 당했다는 것을…… 라미아의 주머니가 유난히 무거워 보였다는 것을…… 그리고 그 덕분에 인간들인 가디언에 대한 경계가 더욱 강화된 것을 말이다.

소호. 중국 안휘성에 자리한 가장 아름다운 호수의 이름이었다. 안휘라는 이름이 거론될 때에는 항상 소호라는 이름도 함께 했는데, 호수 주변의 경관이 그림을 펼쳐 놓은 듯 유려하고 그로 인해 주위에는 자연스레 형성된 전통 어린 문물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성도인 합비와도 가까워 안휘를 찾는 사람이면 꼭 들르는 곳 중의 하나로, 중국의 수많은 볼거리 중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 바로 이 소호다. 몬스터들이 제 철 만난 물고기처럼 떼 마냥 한창 날뛰는 지금도 장관을 이루고 있는 소호의 경관은 여전했다. 예전과 같이 변함없는 수려함을 자랑하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활기차게 움직이는 소호였다. 아니, 호수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는 결계가 해제되고 난 뒤 더욱 아름다워지고 풍요로워져 있었다. 사람들에 의해 파괴되고 변형되어진 것들이 제 모습을 되찾았다고나 할까. 하나 둘 사람들의 손을 타기 시작했을 때보다 소호는 확실히 생기 있어 보였다. 수려한 소호를 중심으로 생겨난 마을과 도시들은 많았다. 동춘도 그런 도시들 중 하나다. 소호를 중심으로 한 도시들 중 두 번째로 크고 번화한 곳이 바로 동춘이었다. 특히 이름 그대로 동춘에서 맞이하는 소호의 봄은 그 어느 도시나 마을보다 빼어나다. 이때만큼은 성도인 합비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제2의 성도라 불리기도 했다. 멀리 동춘시가 아스라이 바라보이는 산야의 한 곳. 막 산에서 뛰어내리며 차갑게 몸을 식힌 물줄기가 작은 내를 이루며 맑게 맑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내가 막 고개를 비트는 곳에서 위로 한참. 까마득한 상공에서 갑자기 일이 일어났다.

파아아앗

너무 높아 무심코 지나친다면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찬란한 빛. 신비로운 오색의 빛이 갑자기 허공 중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빛은 순간 맑은 하늘의 한 부분을 밝히고는 순식간에 사방으로 녹아들며 사라졌다. 대신 빛을 그대로 사라지기가 섭섭했는지 자신을 대신해 작은 그림자 두 개를 그 자리에 토해 냈다. 헌데 무게가 없는 빛과는 달리 빛이 남긴 두 그림자는 무게가 있는 것 같았다. 빛이 남긴 두 그림자가 잠깐 허공 중에 떠 있는 듯하더니 그대로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두 그림자는 떨어지면서 점점 그 속도를 더했고, 지면과 가까워질수록 그 크기도 차츰 더했다. 그리고 간간히 두 그림자로부터 알아들을 수 없는 희미한 소리도 흘러나오며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했다. 마치 투닥거리는 아이들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그림자들과 땅과의 거리는 점차 그 거리를 줄여 갔고, 서서히 두 그림자의 형상이 눈에 들어올 정도가 되었다. 토닥이던 한 그림자가 다른 그림자를 품에 안아 들었다. 두 그림자가 하나가 되는 순간 마치 허공에 멈추기라도 하는 것처럼 낙하하는 속도가 현저히 떨어졌다. 처음부터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다면 신기해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곧 고개를 쯧쯧거리며 고개를 흔들 것이다. 그 하나 된 그림자들이 떨어질 곳에 차가운 내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저렇게 떨어지다 보면 물에 빠질 것은 자명한 사실.

하지만 세상은 꼭 순리대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떨어지던 속고가 둘고 굴어, 허공을 나는 깃털처럼 유유히 떨어지던 두 그림자. 놀랍게도 한 사람을 품에 안은 사람이 천천히 물 위로 내려서며 수표면 약간 위에서 정지하듯 서버린 것이다.

더구나 그 모습이 단단한 땅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너무도 편해 보였다.

그때 사람으로 확인된 그들로부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이그…… 고집하고는. 저렇게 높은 곳에서는 경공보다는 마법이 더 맞다니까 끝까지 말도 안 듣고 정말……”

정말 못 당하겠다는 듯 투덜대는 이드의 목소리.

허공 중에서 울린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소리의 정체는 이드와 라미아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그랬다. 공중에서 투닥대던 두 사람의 정체는 다름 아닌 중국으로 날아온 이드와 라미아였던 것이다.

“헤헷…… 하지만 이렇게 있는 게 기분은 더 좋다구요. 솔직히 이드님도 저랑 붙어 있는 게 기분 좋잖아요.”

“에구구……”

못 말리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이드는 앞으로도 라미아에게는 당하지 못할 것 같아 보였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라미아를 안고 있는 기분이 좋지 않을 리가 없다.

두 사람은 중국으로 이동하면서 그 이동 위치를 아주 높게 잡고 있었다. 어디로 이동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 높이의 산이 있더라도 무슨 일이 없도록 그런 것이다.

당연히 투닥거린 것도 비행마법을 쓰라는 이드의 말에 라미아가 자신을 안고 내려가자고 떼를 쓴 탓이었다.

정말 잘도 투닥대는 두 사람이었다.

이드는 천천히 물 위를 걸어 나와 라미아를 내려주며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안휘의 소호라. 제로가 경치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는걸.”

저 높은 하늘에 텔레포트 된 덕분에 소호를 알아본 이드였다.

비록 세월이 지나고, 결계가 풀려 많은 변화를 이룬 주위 경관이지만, 그 크기와 형태에 있어서는 크게 변하지 않은 소호에 금방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본 것이었다.

“와본 적 있던 곳이죠? 여기.”

이드의 생각을 넘겨받은 라미아였다. 잔잔히 흘러가는 냇물 같은 마음은 서로 공유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응, 체란 누님을 따라서 와봤지. 누나의 집이 가까이 있기도 했고, 안휘에 온 이상 소호를 보지 않을 수는 없었으니까. 얼핏 본 거지만 이곳은 여전히 아름다운 것 같았어.”

“흐음…… 그럼 조금 있다 같이 확인해봐요. 이드님이 기억하는 그때 그대로인지 말예요.”

단순히 확인 차원이라기보다는 관광에 그 목적이 있는 듯한 라미아의 의도적인 발언이었다.

하지만 반대할 생각이 없는 이드였다. 자신도 이곳이 얼마나 변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또 제로를 찾기로 하자면 자연스레 둘러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런데…… 안내인이 없네요. 도착하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하더니……”

라미아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눈앞에 나타나 있지 않은 누군가를 향해 투덜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한국에 있는 그 누군가는 몬스터와의 싸움을 준비하다 가려워지는 귓속을 열심히 긁어댔다.

“뭐, 일단은 기다려 보자. 오늘 만나기로만 했지, 정확한 시간은 정하지 않았잖아.”

사실이었다. 앞서 남손영에게 말할 때 오늘 출발할 거라고는 말했지만, 정확히 언제 중국에 도착하게 될지 알 수 없어서 정확한 시간은 잡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하면 안내인, 그러니까 고용인이 고용주를 미리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에 라미아의 투덜거림도 꼭 잘못되었다고만은 볼 수 없었다.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인 만큼 미리 고용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당장 기다려야 할 사람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이드는 냇가에 제법 시원하게 생긴 자리를 향해 발을 구르며 정령의 힘을 소환했다.

쿠구구구……

이드의 발끝을 따라 뻗어나간 대지의 기운이 순간 어떤 형태를 취하며 솟아올랐다.

그러자 그 자리에는 방금 전까지 없었던 빛깔 좋은 갈색의 황토 빛 벤치가 생겨나 있었다.

예전 연영이 했던 것과 같은 정령의 힘만을 불러들인 정령술이었다.

활짝 웃으며 라미아가 이드의 팔을 잡고 통통 튀는 걸음으로 벤치로 가 앉았다.

여기에 맛있는 음식을 담은 바구니 하나만 있다면 주변의 자연경관과 어울려 ‘즐거운 소풍날’이 완성될 것 같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소풍 바구니가 준비되지 못했다.

대신 두 사람의 주목을 끌 만한 물건은 있었다.

“그럼 안내인을 기다리는 동안 저희들은 이 물건에 대해서 알아봐요, 이드님.”

라미아의 손에 들린 물건.

그것은 다름 아니라 중국으로 출발하기 전 톤트에게서 받은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이계의 물건이었다.

마법에 심혈을 기울였던 드워프의 연구 결과 자료를 건네받을 때도 보긴 했지만, 애초에 받기로 했던 물건이 아니었기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손에 들어오고 보니 자연스레 그 용도에 궁금증이 일어났다.

마침 시간도 남겠다.

할 일도 없겠다.

두 사람은 곧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의 용도를 파헤치기 위해 노련한 형사의 눈으로 조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손에 처음으로 잡힌 단서는 당연히 드워프 마을의 장로에게서 받았던 물건에 대한 조사서였다.

하지만 책을 펴기가 무섭게 두 사람의 예리해졌던 눈이 힘없이 풀려버렸다.

“에잇…… 드워프 언어잖아.”

당연한 일이지만 그랬다.

그냥은 알아볼 수 없는 책이었던 것이다.

잔뜩 심각하게 잡아놓은 분위기가 한 순간에 날아가고, 그 자리로 차가운 바람이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한 순간에 흐트러져버린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드와 라미아는 곧 그 장난 같은 분위기를 걷어내고 바로 마법을 시전했다.

통역마법보다 두 단계나 더 높고 복잡하기는 서너 단계나 더 높은 문자의 해석에 대한 마법이었다.

그러나 라미아가 누구던가.

마법의 지배자라 불리는 드래곤과 같은 레벨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그녀다.

워낙에 복잡한 마법이라 여타의 마법보다 조금 시간이 더 걸렸지만, 보통의 인간 마법사에 비한다면 시동어만으로 발현되는 것과 같은 속도로 마법을 시동시켰다.

조금 전까지 드워프 마을에 머물며 그들의 언어를 들었기에, 그것을 기초로 이루어진 라미아의 마법은 좀더 유연하고, 정확하게 펼쳐졌다.

해석마법도 통역마법과 비슷했다.

책에 써진 글씨 자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귓가에서 누군가 책을 읽어주는 그런 느낌이었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머릿속으로 직접 책의 내용이 울려왔다.

그런 때문인지 책장은 빠르게 넘어갔다.

직접 읽는 것보다는 읽어주는 게 빨랐다.

금세 책은 그 끝을 보이며 자신의 속살을 감추었다.

하지만 이미 내용에 대해서는 이드와 라미아의 머릿속에 그대로 남게 되어버린 후였다.

두 사람 모두 한번만 듣고도 그 내용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외워버릴 정도의 능력이 충분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책을 덮고 잠시 조사서에 적혀 있던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동시에 떠오르는 한 가지 결론을 느끼며 서로의 눈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컴퓨터지?”

“일종의 전자수첩을 겸한 컴퓨터네요.”

이드와 라미아의 입에서 똑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하나의 물건에 대한 정의였다.

당연히 그 물건은 방금 전까지 용도를 알 수 없었던 이계의 물건이었다.

어쩌면 조금 허탈한 결론이기도 했다.

명색이 차원이동 마법으로 소환되어 나온 물건이 고작 컴퓨터라니…… 물론 두 사람의 초인적인 두뇌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나 잘못 내려진 결정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조사내용을 살짝 공개해 본다면 누구나 컴퓨터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엔 없을 것이었다.

일기장 기능을 선두로, 사진기, 비디오카메라, 임시 데이터 저장장치, 생활 매니저를 비롯한 잡다한 기능들.

그것이 바로 조사서에 기록된 이계의 낯선 물건이 가진 기능이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세상의 디지털 기술이 총화된 종합선물세트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이 물건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에 가장 가까운 것이 바로 컴퓨터였던 것이다.

또 조사서에 나온 사실로 알 수 있었는데, 이 기계의 주인은 그 세계의 고위 군사 장교라고 했다.

정확한 명칭은 델타-페이브에 1030이며, 일명 ‘휴’로 불린다는 이 컴퓨터가 가장 잘 사용된 부분이 바로 일기장이기 때문에 알 수 있었던 사실이었다.

영상과 함께 기록된 일기는 한 사람의 전기와도 같이 자세하고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기록의 끝은 무시무시한 전쟁……

이 물건, 휴가 차원의 틈에 빠진 것도 이 전쟁 중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 짐작된다.

조사서를 기록한 드워프는 그 일기를 보며 그 세계의 발달된 문명에 놀라워했고,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흔들기도 했다고 마지막 장에 적혀 있었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먼 미래에나 펼쳐질 그 문명들의 향연을 중세 시대와 같았을 드워프 생활에서 어찌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다만 조사서를 작성한 드워프는 이 휴의 동력원에 대해서는 대략 이해할 수 있었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세계의 간단한 기술을 이해하지 못한 드워프가 그 세계의 가장 하이 레벨에 위치한 기술을 이해한 것이다.

참으로 재미있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다름 아닌 휴의 동력원으로 사용된 것이 바로 마나였기 때문이었다.

바로 마나를 에너지로 이용한 기계의 작동.

그렇기 때문에 마법사인 드워프가 이해한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사실이었다.

만약 이 조사서와 휴가 이곳 마법사의 손에 들어갔다면 세상이 뒤집히는 혁명을 불러올 수 있는 그런 엄청난 일이었다.

만약에 마법사의 손에 들어갔다면…… 말이다.

그들에겐 아쉬운 일이지만 지금 휴를 손에 넣은 사람은 다름 아닌 이드와 라미아였다.

이 세계의 일에 되도록이면 관여하지 않기로 한 두 사람이 바로 이 대단한 물건을 손에 넣고 있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지금 내막을 알고 라미아와 이드의 곁에 있었다면 이드가 이 물건을 어떻게 처분할지 심히 궁금해하리라.

가디언에게 줄지, 아니면 그 기술을 이용해서 뭔가를 해볼지 말이다.

“쩝, 별로 쓸모도 없을 것 같은데…… 그냥 아공간 한쪽에 처박아 놔.”

휴를 휙휙 돌려보다 라미아에게 툭 던져버리는 이드였다.

이드의 한마디에 아공간 한구석에 영원히 처박힐 뻔했던 휴는 그러나 라미아의 손에 의해 구해졌다.

원래 거들떠보지 않던 물건이라 하더라도, 일단 자신의 손에 들어오면 저절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인지 라미아가 휴가 가진 기능들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

사실 지금 휴에서 건질 거라곤 휴가 가진 원래 기능들과 마나에 대한 전자적 테크놀로지 기술뿐이었다.

휴의 기억에 담겨 있었을 그 많은 자료들은…… 이미 드워프 마법사가 조사서를 꾸밀 때 그의 손에 의해 모두 날아가버린 후였던 것이다.

그래서 더욱 이드가 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이다.

물론 마나를 에너지로 기계를 움직이는 것 하나만 해도 엄청난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때 라미아가 나섰다.

원래 마법에 정통한 그녀인 만큼 휴가 그다지 필요치 않았다.

휴가 가진 거의 모든 기능들을 라미아가 직접 펼쳐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단 손에 들어오면 시선이 가고, 쓰게 되는 것이 사람인 만큼 라미아는 휴의 기능 중에서도 사진 기능과 동영상 저장 기능, 한마디로 캠코더의 기능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현재 휴로 동영상을 연속 저장할 경우 3년이란 시간을 온전히 기억할 수 있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기록의 양이라고 할 수 있었다.

라미아는 이런 엄청난 용량을 가지고 TV나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이드의 추억들을 일기장이나 사진첩처럼 기록해놓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언제 다시 검으로 돌아갈지 모르는 자신과 이드의 모습을 추억으로 기록해놓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좌우간 라미아의 의견으로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 절차에 들어갔다.

조사서에 나온 대로 휴로 하여금 이드와 라미아를 주인으로 인식시켜야 했다.

“그럼 조사서에 나온 대로 휴의 동력원인 마나를 결계로 차단해서 동작을 중지시키고……”

부우웅

라미아의 손 안에 있던 휴가 그녀의 마법에 의해 유백색 원구 안에 갇혀 은색이 아닌 회색으로 변해 갔다.

“다음으로 휴가 저장하고 있는 마나를 모두 제거함으로써 강제적인 초기화를 시킨다.”

파아앗

휴를 감싼 유백색의 원구가 순간 은색으로 변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휴 역시 다시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다만 처음과는 느낌에서 달랐다.

처음의 은색을 어딘지 모르게 신비로웠다면, 지금의 은색은 그저 딱딱한 금속의 느낌이라고 할까, 그랬다.

“그 후 비어버린 휴의 마나 탱크에 주인 될 사람의 속성 마나를 주입시켜서 가동을……”

조사서에 내용에 따라 유백색 원구가 사라진 휴의 몸체에 마나를 주입한 라미아는 계속 기억 속에 있는 방법대로 휴를 조작해 나갔다.

중간 중간 휴의 몸체 위로 일루젼과 같은 홀로그램이 떠오르기도 하고, 제복을 입은 한 여성의 모습이 연속적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그렇게 두 시간이 흘러서야 라미아는 모든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작업을 마친 라미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옆에서 계속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이드를 자신과 같은 휴의 주인으로 인식시키는 일이었다.

[제2 등록자를 마스터 등록합니다. 마스터의 마나를 주입해 주십시오.]
이드의 앞으로 내밀어진 라미아의 손 위에는 깔끔하고 멋진 제복 차림의 상반신 여성이 떠올라 있는 휴가 놓여 있었다.

마나를 요청하는 목소리는 그 여성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인간미는 없지만 아름답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긁적긁적

두 시간 동안 라미아가 하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던 이드는 갑작스런 그 말에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고는 한 손가락에 내공을 살풋 주입한 후 홀로그램의 여성이 가리키는 휴의 흰색 부분에 가져다 대었다.

순간 아주 극미량의 내력이 살짝 휴에게로 빠져나갔다.

[확인되었습니다.

마스터의 이름을 말씀해주십시오.]

“이드라고 불러줘.”

[네, 마스터 이드.

저는 휴라고 합니다.

많이 사랑해주십시오.]

데이터 입력을 완료한 휴는 허리를 꾸벅 숙여보리고는 스르륵 휴의 표면에서 사라졌다.

만족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던 라미아는 곧 다시 휴를 작동시키고는 이드의 곁으로 바싹 붙어 앉으며 한 팔을 껴안았다.

“아, 이드님.

저희 사진 찍어요.

휴, 사진 부탁해.”

[네, 마스터.]

휴에서 공손한 대답과 함께 손바닥 만한 크기의 화면이 다시 생기며 그 안으로 함께 앉아 있는 이드와 라미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자…… 이드님.

웃어요.

처음 찍는 사진이니까 기왕이면 멋지게.

그렇지, 스마일!”

라미아는 TV에서 본 적이 있었는지 스마일을 외치며 이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드는 그녀의 귀여운 행동에 기분 좋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스마일!”

[찍습니다.

3.2.1 찰칵.]

휴에게서 나왔다고 보기엔 어색한 찰칵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계속해서 움직이던 두 사람의 영상이 한 순간 고정되었다.

이드와 라미아.

첫 사진엔 그렇게 두 사람의 다정한 포즈가 담겼다.

‘중국의 안휘에서, 이드님과 라미아.’

잠시 후 사진을 찍은 라미아가 정한 첫 사진의 제목이었다.

찰칵찰칵 디리링 딸랑

라미아가 이곳저곳을 향해 휴를 향하며 사진을 찍었다.

일루젼 계열의 마법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는데 첫 사진을 시작으로 사진이 찍히는 소리까지 바꿔가며 십여 장의 사진을 연거푸 더 찍어댔다.

그 대부분이 이드와 함께한 사진이었다.

처음 사진을 다루는 사람답지 않게 라미아가 찍은 것들은 모두 수준급의 작품들이었다.

아니, 직접 구도를 잡고 찍는 것은 휴이니 휴의 실력이 좋다고 해야 하나?

좌우간 라미아가 사진에 흥미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찍어볼 마음을 먹었을 때쯤이었다.

부우우우……

멀리서부터 요란한 엔진소리와 함께 희끄무례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햇살을 받아 하얗게 번쩍이는 차는 똑바로 현재 이드와 라미아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아! 이제 안내인이 오나 봐요.”

딸랑

차를 향해 다시 한 번 휴의 셔터가 움직였다.

왠지 사진에 열을 올리는 라미아 때문에 조금 시달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언뜻 머리를 스치는 이드였다.

하지만 그런다고 자신이 라미아를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곧 그런 생각을 머리에서 지워버리고 말았다.

라미아의 말대로 멀리 보이던 밴 스타일의 차는 안내인이 몰고 오는 차였는지 정확하게 두 사람 앞으로 와서는 멈추어섰다.

솔직히 아무것도 없는 이곳을 향해 달려올 차라고는 두 사람이 기다리던 안내인 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곳으로 달려온 안내인도 조금 당황해할지 모를 일이었다.

보통 처음 만나는 일반적인 장소, 즉 카페나 공공장소가 아닌 이런 황량한 곳에서 만나고자 하는 의뢰인이라니 말이다.

“한국에서 오신 가디언 분들이신가요?”

뽀얀 먼지와 함께 멈춰선 차에서 내린 여성이 물었다.

상당한 교육을 받은 듯 낮으면서도 단정한 목소리의 여성이었다.

“네, 맞습니다.

헌데…… 안내인이…… 아니신가…… 요?”

이드는 묘하게 말을 끌며 대답하고는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안내인이라……

아무리 봐도 저 외모로만 봐서는 도무지 안내인으로 생각되지 않는 이드였다.

단아하게 빗어 한쪽으로 묶어내린 긴 생머리에, 전체적으로 옛날 무림의 여협들이 즐겨 입던 궁장을 생각나게 하는 형태의 가는 선이 돋보이는 하늘색 옷을 걸친 여성이라니, 말도 안 된다.

특히 옷은 궁장과 현대의 캐주얼복과 정장을 적당히 합치고 변형시킨 듯한 스타일이었다.

요즘 안내인들이 언제 저런 복장으로 옷을 통일했단 말인가?

특히 그녀의 뒤로 세워둔 차 속에서 언뜻 보이는 검 한 자루까지……

‘안내인은 절대 아니다.

무슨 안내인이 저런 뛰어난 외모에 고급스런 복장을 하고 검까지 들고 다녀?

만약 진짜 안내인이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안 그래?’

누구나 이드의 말을 들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 앞에 선 여성도 고개를 끄덕였다.

“옥련 사부님으로부터 두 분을 안내해달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검월선문의 제자 파유호라고 해요.”

“아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드와 라미아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다름 아닌 옥련 사숙이란 대상과 검월선문이란 말 때문이었다.

검월선문의 옥련이라면 저절로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예전에 염명대와 함께 중국에 와서 이모, 조카 사이가 된 다정선사 문옥련.

그녀가 속한 문파가 검월선문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거기서 나온 사람이라니……

“이런, 그저 평범한 안내인이 나올 줄 알았는데…… 예천화라고 합니다.

이드라고 불러주세요.

그리고 이쪽은 라미아라고 합니다.”

“라미아라고 해요.”

“이모님이 보내셨다구요?”

이드는 파유호의 예의바른 인사에 함께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문옥련을 생각하고 다시 바라본 파유호라는 여성은 과연 검월선문의 제자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했다.

고운 얼굴선에 단아한 몸가짐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 어딘가 모르게 문옥련이 입던 옷과 비슷했던 것이다.

“그래요.

사숙께선 한국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지만 몬스터 전투 때문에 바쁘신 관계로 소호로 나와 있던 제가 나오게 되었어요.

사숙께서 직접 오시지 못해 미안하다고 전하라고 하셨답니다.”

이드는 그때서야 남손영이 일부러 문옥련에게 연락을 넣은 것을 알았다.

아마 문옥련과 이드가 이모, 조카하며 친하게 지내던 것을 기억했을 것이다.

“이모님은 별말씀을…… 이렇게 신경 써주신 것만도 고마운데.

유호님도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말씀 편히 하세요.

아직 저와 라미아가 어립니다.”

이드의 말대로 이제 막 이십대에 들어선 그녀가 계속 말을 높일 필요는 없었다.

더구나 이드가 문옥련을 이모님이라 부르니 배분도 엇비슷하게 맞아 들어간다.

굳이 따져보자면 파유호의 사제 정도가 될까?

물론, 실제로는 절대 그렇게 될 수 없지만 말이다.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자, 차에 타세요.

이곳보다는 동춘 시내로 들어가서 쉬면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파유호의 배려에 고마워하며 이드와 라미아는 얼른 차에 올라탔다.

말도 낮추지 않고 부드럽게 미소 짓는 파유호의 성품은 무림의 여인이라기보다는 사제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스르륵

그렇게 세 사람이 차를 타고 떠나가 그때까지 단단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흙 벤치가 백사장의 모래성처럼 부서져 내리며 그 형태를 감추고, 방금 전까지 사람이 있었다는 흔적을 지워나갔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