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246화
웅성웅성……
‘항상 그렇지만 언제나 시선 집중이군.’
이드는 몰려드는 시선을 쫓아내기 위해 일행이 앉아 있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옆에 붙어 있는 라미아 때문에 꾸역꾸역 몰려드는 시선이었다.
충분히 무시할 수 있지만 지금처럼 과하다 싶게 많이 모여 있다면 조금 불편한 게 사실이다.
보통 이렇게 모여든 시선은 지긋이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대부분 떨어진다.
물론 던져낸 요요처럼 금방 다시 몰려들기는 한다.
그러나 둘러보는 눈에 약간의 살벌한 기운을 실어 보낸다면…… 확실하게 대부분의 시선을 정리할 수 있다.
물론 그렇게까지 하는데도 완전히 떨어지지 않는 시선도 있긴 하다.
평범한 기운의 사람들을 생각해서 이드가 완연히 살기를 드러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이드가 본격적으로 이빨을 드러내 보인다면 그건 바로 대형 사고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일반인 용도의 살기를 견디는 사람도 그리 흔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이런 사람들도 그들이 느낀 이드의 만만치 않은 시선에 쉽게 시비를 걸지는 못한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다정한 한 쌍으로 보이는 두 사람에게 괜히 시비를 거는 것 자체가 쪽팔리는 일이었다.
아무리 라미아가 아름답다고 하지만…… 그런 짓은 정말 건달들이나 하는 파렴치한 짓인 것이다.
하지만 쉽게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니 어쩌겠는가.
지금 이 소호제일루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꽤나 눈에 띄었다.
지금 일행들은 소호의 동춘시에 들어와 있었다.
그것도 파유호의 안내로 소호에서도 첫 손가락에 꼽히는 규모와 요리 실력을 가진 이곳 소호제일루라는 옛스런 이름의 고급 요리집에 와 있는 것이다.
“호호, 살기를 능숙하게 잘 다루네요.
사숙님 말씀대로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나 봐요.”
까맣게 몰려든 시선들을 대충 정리한 이드를 바라보며 파유호가 빙긋 미소 지어 보였다.
그런 파유호의 옆 자리와 허리에는 차에서 봤던 미끈한 모양의 검과 소도가 걸려 있었다.
“뭐……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진 않을 정도는 되죠.”
점잖게 대답하는 이드의 말에 라미아가 속으로 고소를 터트렸다.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진 않는다.
말이 좋아 어디 가서지, 그 어디가 드래곤 레어가 될지 마계의 한 가운데가 될지 어떻게 알겠는가 말이다.
“겸양의 말이 심하네요.
사숙의 말씀으로는 무림의 후기지수로는 이드와 겨룰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하던걸요.”
파유호는 문옥련의 말이 맞는지 확인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이드를 은근한 눈길로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는 무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옅은 투기 같은 것이 엿보이고 있었다.
문옥련이 말했던 후기지수들 중에 그녀도 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들 중에서 수위로 꼽히는 실력을 가진 그녀니 만큼 문옥련이 극찬을 아끼지 않은 이드의 실력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성격이 차분하지 않고 조금만 급했다면 첫 대면에서 비무를 청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모님이 듣기 좋은 칭찬만 하신 모양이네요.”
“빈 소리는 하지 않는 분이죠.
앞으로 시간이 난다면 비무를 부탁드립니다.”
……
아무래도 꼭 차분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결국 이드에게 검을 청하는 파유호였다.
하지만 이드는 오히려 그런 파유호의 호기에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마치 옛 무림에서 활동하던 기개 있는 무인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이런 걸 보고 무림인의 본능이라고 하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야 언제든지 괜찮습니다.
얼마 동안 함께 움직일 테니 시간은 많겠죠.”
이드의 간단한 허락에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한 파유호가 이리저리 바쁜 점원에게 차를 주문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사숙께 두 사람의 안내를 부탁받긴 했지만…… 단순히 관광을 위해 온 것은 아닐 텐데……”
서로 말이 오고 가며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파유호는 궁금해하던 점을 물었다.
말 그대로 관광을 위해 두 사람이 오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 것이다.
“이드님과 제가 찾고 있는 건 제로예요.
알죠? 지금 한창 활동하고 있는……”
별로 숨길 이유가 없는 일이라 라미아는 말을 돌리지 않고 바로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이곳 식당까지 오면서 알았지만 동춘시는 의외로 상당히 복잡했다.
시내 지리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없다면 꼼짝없이 길을 잃어버릴 판이었다.
이런 곳에서 무언가를 찾고자 한다면 동춘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파유호의 적절한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응? 하지만 이곳엔 제로가 들어서지 않았는걸요??”
라미아의 대답에 파유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되어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기로는 제로는 이곳에 들어서지 않았다.
“꼭 제로가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서만 움직이는 건 아니니까요.”
“아,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파유호는 바로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로가 이종족도 아니고, 스스로 ‘내가 제로다’ 하고 광고라도 하고 다니지 않는 이상 알아볼 방법은 없었다.
제로와 가디언을 딱 나누어 이마에 소속을 써 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 이상에는 그 사람이 가디언인지, 능력자인지, 제로인지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라면 내가 특별히 도움 줄 만한 게 아닌데…… 아, 말 편히 하세요.
괜히 나 때문에 같이 말을 높이지 않아도 되니까.”
파유호의 권유에 이드와 라미아는 호칭만 누나와 언니로 정하기로 했다.
상대가 말을 놓지 않는데, 이쪽만 말을 놓는 것은 상당히 보기가 좋지 않았다.
“언니는 안내만 해줘도 큰 도움이 돼요.
오면서 봤지만 이 도시는 너무 복잡한 것 같아서…… 금방 길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니까요.”
파유호의 말에 바로 언니라고 호칭해 버리는 라미아였다.
파유호는 오히려 그런 라미아의 말이 듣기 좋았기에 호호호 웃으며 좋아했다.
“좀 그런 면이 있죠.
사람이 많이 몰리다 보니 그렇게 된 거예요.”
“뭐…… 그런데 언니는 여기서 사나요?
이모님께 듣기로는 검월선문은 하남에 있다고 들었는데……”
“그건 나도 궁금한데요.”
라미아의 말에 이드도 관심을 보였다.
“맞아요.
본문은 하남에 있죠.
저는 단지 이곳에 파견 나와 있는 것뿐이랍니다.”
“파견?”
“그래요.
검월선문을 대표해서 몇 명의 사제들과 함께 파견 나와 있답니다.
이곳엔 제로뿐만 아니라 가디언도 없으니까요.”
“에…… 예에? 가디언이…… 없다구요?”
이드와 라미아는 생각도 못한 이야기에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처음 제로가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디언에 속한 문옥련과 같은 사문의 파유호가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해 가디언이 동춘시에 상주하며 몬스터를 막고 있으려니 짐작했었다.
또 꼭 제로가 장악하고 있는 곳이 아니더라도, 가디언이 머무는 도시에 제로가 숨어 있다는 것이 크게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무림이 등장한 중국에서 누가 가디언이고, 누가 제로인지 어떻게 정확하게 가려내겠는가.
당연히 조용히만 있다면 알아볼 사람이 없다.
또 등하불명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오히려 가디언들이 장악한 곳에 숨어 있는 게 하나의 계책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제로뿐만 아니라 가디언도 없다니……
그럼 몬스터의 습격은 누가 막아준다는 말인가?
이드와 라미아가 지금까지 거쳐 온 크고 작은 마을에는 거의 모두 가디언 또는 제로의 지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주 작은 마을이나 가까운 곳에 지부가 있는 마을이라면 몰라도 도시라고 할 만큼 규모가 큰 곳에는 거의 당연하게 자리 잡고 있는 두 집단이었다.
그런데 이 동춘시에! 그것도 인구 밀도도 높고 번화한 도시에 가디언도, 제로도 없다니……
“어떻게 된 거죠!”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급하게 말을 뱉어내는 이드와 라미아였다.
하지만 파유호는 오히려 입을 가리고 쿡쿡쿡 웃는다.
당황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던 모양이었다.
“호호홋, 웃어서 미안해요.
그렇게 놀라다니…… 두 사람 다 몰랐나 보군요.
이곳엔 가디언도 제로도 없답니다.
필요가 없으니까요.”
“필요가…… 없다?”
조금 애매하지만 확실한 대답이었다.
모든 것은 필요에 의해 생겨나고 배치된다.
필요에 의해 집이 생겼고, 필요에 의해 글이 생겼고, 필요에 의해 검이 생겨났고, 저 밥 먹을 때 쓰는 수저까지도 밥 먹는 데 필요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당연히 가디언과 제로도 필요에 의해 생겨났다.
뭐…… 제로는 복수와 자신들의 이념 때문이라는 이유가 좀 더 강하긴 했지만 가디언은 확실히 몬스터에 대항하기 위해 필요했고, 그 때문에 생겨났다.
거꾸로 말해보면 필요가 없다는 말은……
‘…… 여기에는 몬스터가 없다는 말?’
‘아니요, 가깝지는 않지만 소호와 동춘시 주변에 몬스터의 존재가 잡혀요.’
재빨리 마법을 사용해 이드의 생각을 확인한 라미아의 말이었다.
이드는 그 말에 생각을 약간 틀었다.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생겨난 가디언이 몬스터가 있는데도 필요가 없어졌다.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서 가디언이 필요한 이유는 보통 사람이 상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가디언이 생겼다.
그럼 이곳 동춘시에서는 보통 사람도 몬스터를 상대할 정도가 되나? 아니다.
오면서 봤지만 그냥 보통 사람들이다.
그럼……
그렇게 생각을 이어 갈 때 라미아의 목소리가 이드의 머리를 두드렸다.
‘잠깐만요, 이드님.
방금 유호 언니가 파견이라고 했지 않아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파견이라.
그 말이 뜻하는 바와 필요 없다는 말을 섞으면……
“가디언이나 제로가 아니라도 동춘시를 몬스터로부터 온전히 보호할 사람이 있기 때문에 가디언이 필요 없다?
누나같이 파견 나온?”
“어머, 금방 맞추네요.
맞아요.”
산수 문제를 풀어낸 유치원생에게 ‘참 잘했어요’라고 칭찬하는 분위기의 파유호였다.
하지만 입가에 걸린 단아한 미소에 불쾌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냥 윗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기분이랄까.
어디 학교에서 선생을 하면 딱일 것 같다는 생각이 순간 스치고 지나갔다.
“무림인들이 수호하는 도시라……”
“모르고 있었다면 신기할 거예요.
동춘시에는 저를 포함해서 상당히 많은 무림인들이 머무르고 있어요.
바로 그들이 이 동춘시를 몬스터의 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는 거죠.
때문에 가디언이나 제로가 이곳에 자리를 잡을 이유가 없는 거예요.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중원에서는 이렇게 무림인들에 의해서 지켜지는 도시가 몇 있어요.
특히 무림의 유명 문파가 자리한 도시는 오히려 가디언들이 지키고 있는 곳보다 더 안전한 곳도 있으니까요.”
이드는 그 말에 수긍을 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호의 무림이란 곳을 품에 안고 있는 중국이니 만큼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이었다.
단순히 무공을 익힌 무인의 수만 따진다면 가장 많은 무인들이 중국에 속해 있을 것이다.
바로 강호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인 것이다.
과거 관에서 손대지 못하던 녹림도나 악랄한 마인들로부터 마을이나 도시를 지키기도 했던 강호 무림.
그 무림이 몬스터의 등장으로 다시 세상에 나와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 파견이라는 것도 가디언을 대신해서……”
이드가 상황을 이해함과 동시에 자연스레 같이 상황을 인식한 라미아가 확인하듯 파유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파유호의 대답 이전에 이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신이 무림에 활동할 때와 지금의 상황이 많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파유호의 파견이란 말도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겠지.
더불어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활동하면서 문파의 이름도 알리고 명성도 높이고.
보통은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는 명성을 좀 더 중요시하는 게 무림이거든.”
이드는 옛날의 무림을 생각하고는 그렇게 말했다.
그때도 어떤 곳에 위험한 일이 생겼다 하면 우르르 몰려오는 무림인이 많았다.
그 중 대부분이 그 일을 해결함으로 해서 자신의 이름을, 또는 문파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 달려온 무인들이었다.
물론 그들 속에는 무공을 아예 모르는 사람들과 세상을 생각해서 그 위험을 해결하기 위해 나선 사람도 있겠지만 그 수는 정말 극소수였다.
생각해보면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개인이든 무림 문파든 간에 스스로 장사를 하거나 농사를 지어 생계를 잇고 자금을 모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는 곳이 있다고 해도 그 수는 지극히 소수였다.
대부분 기부해 오는 자금으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이름을 날려야 그 이름을 보고 그들에게 투자하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 아닌가 말이다.
무인이라고 흙 파먹고 사는 것은 아닌 것이다.
“흠흠……”
하지만 이런 사실은 무림인을 앞에 두고 하기엔 조금은 직설적인 내용들이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파유호가 살짝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을 하며 불편한 마음을 내비친 것이다.
이드의 말대로라면 그녀도 사람들의 생명보단 문파의 명성을 위해 이 동춘시에 파견 나온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라미아의 말에 무심결에 대답하다 보니…… 사과드립니다.”
이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포권을 해보였다.
“흠흠, 사과 잘 받았어요.
사실 이드의 말이 크게 틀린 것도 아니니까 어쩔 수 없죠.
그동안 여러 가지 일로 조용히 지내야 했던 만큼 더 인정받고 싶어 하고들 있으니까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조심해야 해요.
함부로 그런 말을 하다가는 당장에 시비가 붙을 거예요.”
“물론이죠.”
그건 이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생판 모르는 무림인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가는 시비가 아니라 당장 칼부림이 날 수도 있는 일인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편히 넘어가 주는 파유호가 고마운 일이었다.
그리고 이드는 잘 몰랐지만 여러 문파의 상황도 꽤나 바뀌어 있었다.
그동안 이름도 바로 세우지 못하고 조용히 뒤로 물러나 있어야 했던 그들인 만큼 그 긴 시간 동안 어떻게든 스스로 문파를 운영할 자금을 마련해야 했던 것이다.
더 이상 그들에게 돈을 투자하는 곳이 없어진 때문이었다.
제자를 내보내 작은 사업도 해보고, 이런 저런 곳에 힘을 빌려주기도 하는 등 문파를 이어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던 것이 현실이었다.
덕분에 지금에 와서는 그런 노력들로 인해 문파에서는 별달리 돈 걱정을 하지 않게 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과거와는 달리 지금 활동하는 무인들은 명성 그 자체를 우선하여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바뀐 점은 꽤 있었다.
무림의 변천에서 현재 무림에 대한 이야기까지 대화가 오고 가는 사이 시간이 꽤나 흘렀는지 파유호가 앉은 자리에서 식사를 주문했다.
유명한 일류 요리집의 위세를 대변하듯 요리의 가지수가 한눈에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많았고, 그만큼 가격도 상당했다.
“우선 여기서 점심을 먹고 움직이도록 해요.
식사를 마친 후 숙소에서 묵고 있는 사제들을 소개시켜 줄게요.
내가 생각하기에 오늘은 그냥 쉬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요.
내일 사제들을 통해 제로가 있을 만한 건물을 알아본 후에 움직이는 게 좋겠어요.”
이드와 라미아가 동의하며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나가서 찾아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죠.
그럼 오랜만에 그리운 중화요리나 맘껏 먹어보죠.”
이드는 허리에 걸려 있던 일라이져를 풀어 옆의 의자에 내려놓았다.
정말 작정하고 양껏 먹어볼 심산이었다.
‘파유호, 지갑 걱정을 해야 하지 않을까?’
오랜만에 마음껏 중화요리를 맛본 이드는 든든해진 배를 안고 검월선문의 제자들이 머무르는 숙소로 향했다.
넉넉히 나온 요리의 양에 비해 예상보다 가격이 지나치게 비싸지 않아 다행이었다.
파유호도 지갑을 무사히 사수할 수 있어 두 사람 모두 만족스런 점심이었다.
다만 라미아만이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았는지 괜히 이드의 옆구리를 찌르며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파유호의 안내로 도착한 곳은 고급 호텔이었다.
그것도 최고급 호텔 중 하나였다.
당연히 외관부터 화려하고 고급스럽기 그지없었다.
‘도대체 그동안 돈을 얼마나 벌어 두었길래……’
호텔의 웅장한 외관을 아래위로 훑으며 이드와 라미아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두 사람을 마중 나올 때 타고 나온 차도 꽤나 고급이었고, 처음 동춘시에 들어선 두 사람을 안내한 곳도 최고급 요리집이었다.
그리고 숙소까지 이런 고급 호텔이라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뒤로 물러나 있으면서 뭘 했길래 제자들을 이렇게 비싼 호텔에 머무르게 하는 것인지.
그러나 두 사람의 생각은 틀린 것이었다.
이것은 문파가 가진 돈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이상의 특별한 이유가 존재했다.
무엇보다 이 엄청난 돈을 잡아먹을 듯한 호텔의 모든 것이 이들 검월선문 제자들에겐 ‘공짜’라는 것이다.
아니, 꼭 검월선문의 제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만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른 문파의 제자나 이름 있는 무림인의 경우에도 호텔이 나서서 머무르도록 유치하고 최상의 서비스를 공짜로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다른 숙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호텔의 이런 불합리할 정도로 적극적인 무림인 유치 경쟁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 무림인이 머무름으로 해서 몬스터에 대한 그 호텔의 안전이 확실하게 보장이 되기 때문이었다.
현재 동춘시를 습격하는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이 거의 전적으로 무림인에게 맡겨져 있다 보니, 그들이 머무르고 있는 곳이 가장 안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실제로 얼마 전 가고일의 습격에서도 그런 사실이 확실하게 증명되었는데, 하늘로부터의 갑작스런 습격에 여러 곳에서 상당한 피해가 났지만, 유독 무림인들이 머무르고 있는 호텔들은 거의 아무런 피해 없이 무사했던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유명한 고급 호텔들의 입장에서는 안전을 보장해 주는 것이 최고의 광고가 되었고, 이러한 마케팅을 위해서는 무림인들이 필수적이었다.
유명한 문파의 제자나 이름 있는 무림인을 서로 자신들의 호텔로 모시는 것은 이래서 당연한 일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이름 있는 무인이나 문파가 머물고 있다는 것이 호텔 홍보용 책자에도 버젓이 들어가게 되는 실정이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뛰어나다고 알려진 검월선문의 전 제자들도 이곳 호텔로 모셔와 묵게 된 것이다.
“어쩌면 가디언보다 더 대우가 좋을지도……”
사정 설명을 들은 이드의 생각이었다.
조직적인 관리 체계 속에서 공무를 수행하는 가디언보다 이들이 더 편해 보이기도 했다.
“대사저!”
막 호텔 로비로 들어서던 일행은 갑작스런 고음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그대로 멈춰 섰다.
그러자 뭔가 빽 소리를 내며 휙 하고 지나가더니 그대로 파유호의 품속으로 달려들어 안겨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드와 라미아는 갑작스런 상황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파유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두 사람과 달리 살짝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그녀의 품에는 열대여섯 정도 되어 보이는 단발머리의 소녀가 안겨 있었다.
분명히 방금 전 휙 하고 지나간 물체의 정체가 분명했다.
“휴, 나나! 내가 예의를 지키라고 몇 번을 말했잖니…… 정말……”
파유호는 놀란 얼굴로 자신을 돌아보는 두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며 품에 안긴 소녀에게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엔 전혀 힘이 들어가 있질 않았다.
스스로 이 작은 소녀에게 자신의 말이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조용한 성격이지만 때에 따라 단호히 화도 낼 줄 아는 파유호의 엄격한 성격에 문내의 제자들 대부분이 말을 잘 들었지만 유독 이 소녀, 나나만은 자신의 말이 먹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크게 눈 밖에 나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또 하는 짓이 때때로 귀엽고 심성도 맑은 나나라 크게 야단도 칠 수 없었다.
그저 이렇게 잊지 않고 주의를 주는 것이 전부였다.
“헤에, 대사저.
기다렸다구요.
다른 사저들은 모두 나나랑 놀아주지도 않고, 나나 심심했단 말예요.”
역시나 자신의 말은 전혀 듣지 않는 나나였다.
“내가 오늘은 귀한 손님이 오신다고 했지 않니.
그러니 얌전히 있어야 한다고.”
“부! 하지만 심심한 걸요.
근데…… 저 언니, 오빠가 손님이에요?
별로 귀해 보이진 않는데.
안녕.
이쁜 언니, 오빠.
난 나나.
만나서 반가워요.”
“나나! 손님들께 그게 무슨 예의 없는 행동이니.
그리고 제대로 인사해야지.”
투타탁 마구잡이로 쏘아대는 나나의 말에 파유호가 다시 주의를 주었다.
파유호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톡톡톡 뛰어 다가오는 나나의 거침없는 모습에 이드와 라미아는 움찔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같이 휘말려 버리면 엄청나게 귀찮아질 게 분명하다.
두 사람의 본능이 나나에 대해서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아…… 안녕.”
삐질
땀을 흘리며 나나의 말에 황급히 대답하는 이드였다.
그 뒤로 ‘만나서 반가워.
이번이 첫 만남이자 마지막 만남이길 바래’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면서 말이다.
“미안해요.
나나가 워낙에 활달하다 보니 조금 예의가 없어요.
하지만 나쁜 아이는 아니랍니다.”
파유호는 당황하는 두 사람을 보고는 나나의 뒤로 다가와 제대로 인사를 시켰다.
“다시 인사드릴게요.
검월선문의 영호 나나라고 합니다.
사숙님으로부터 이야기 들은 분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그런데…… 언니 정말 예쁘다.
특히 반짝거리는 그 은발은 너무 부러워요.
오빠도 그렇고.
그렇죠, 대사저!”
“나나야……”
잘 나가다가 다시 삐딱선을 타는 나나였다.
하지만 그 하는 짓이 밉지 않고 귀엽게만 보였다.
예의 없어 보인다기보다는 오히려 솔직하게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파유호나 검월선문의 어른들이 어쩌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번 휘말리면 쉽게 헤어 나오질 못하는 거지.
정말 요주의 인물이다.
그렇지?’
‘맞아요.
시르피보다 더욱 주의해야 할 것 같아요.’
시르피는 이드가 그레센에서 구해주었던 크라인 황태자의 하나뿐인 여동생이었다.
평소에는 이드의 말에 잘 따랐지만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분명히 하고 마는 고집 센 성격이었다.
그런 시르피도 지금의 나나처럼 귀엽기만 했다.
어딘지 비슷해 보이는 두 사람이었기에 이드와 라미아는 웬만하면 가까워지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에? 나나 인사 받아 주지 않는 거예요?”
불쑥
이드와 라미아가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 눈을 동그랗게 뜬 나나가 볼을 뽈록 부풀린 채 두 사람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짓이 장난치기 직전의 시르피와 어찌나 완벽하게 겹치는지.
이드는 엄마, 뜨거라 하면서 급히 입을 열었다.
그런 이드의 입가로는 파르르 떨리는 미소가 달려 있었다.
“아, 미안.
나나가 너무 귀여워서 말이야.
내 이름은 예천화.
하지만 이드라고 불러 주면 좋겠네.
만나서 반가워.”
거침없이 다가오는 나나의 저돌적인 모습에 절로 반말이 나오는 이드였다.
라미아는 속으로, 이드님 너무 다정해 보여요, 라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저런 아이에게 그렇게 부드럽고 다정한 모습으로 보이면……
“와, 고마워요.
오빠도 멋있어요.
나나하고 친하게 지내요.”
…… 한순간에 가까워져 버린다구요.
‘나도 지금 후회 중이야.’
이드는 자신의 곁에 바짝 다가온 나나에게 손을 잡혀 흔들리며 스스로의 행동을 후회했다.
그러나 어차피 일어난 일.
후회해 봐도 소용없게 되었다.
대신 시르피 때처럼 나나에게 휘둘리지는 않을 거라고 속으로 다짐해 보는 이드였다.
과연 그런 다짐이 뜻대로 잘 지켜질지는 두고 볼 일이었지만 말이다.
잠시 동안의 등장만으로 순식간에 세 사람을 어수선하게 만들어 버린 나나는 한참을 그렇게 이드의 손을 흔들더니 뭔가 생각났는지 손뼉을 짝짝 치며 파유호를 돌아보았다.
“참 참, 대사저.
느끼 공자와 도사 남매가 와서 기다려요.
대사저가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서 왔는데…… 참, 느끼 공자 질리지도 않나 봐요.
매일매일 찾아오고 말예요.”
나나는 또 다른 재미난 거리를 말하는 듯 흥흥거리며 파유호에게 소식을 전했다.
파유호는 느끼 공자란 말에 나나에게 다시 주의를 주면서 살짝 인상을 썼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게 버릇없이 말하는 나나 때문인지, 나나가 느끼 공자라고 일컬은 그 사람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후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약간 찡그린 표정은 나나를 향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나야, 남궁 공자께 그런 말 쓰지 말라고 했지 않니.
초씨 남매에게도.
자, 그만하고 올라가자.
손님들을 많이 기다리게 한 것 같구나.
이드, 라미아, 올라가요.
제가 사제들과 남궁가의 자제분, 그리고 무당파의 자제분을 소개시켜 줄게요.”
얼굴을 찌푸리던 파유호는 금방 표정을 바로 하고는 나나와 함께 두 사람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가며 이드는 볼을 긁적이더니 슬쩍 라미아를 바라보았다.
‘남궁씨라는 이름이었지?’
‘네, 느끼 공자…… 남궁 공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유호 언니의 얼굴이 좋지 않았어요.’
이드는 남궁씨라는 말에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중원에서의 남궁체란과 좋았던 오누이의 인연.
그런데 이곳에서 다시 나온 남궁 성씨가 파유호에게 좋지 않게 인식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이드도 자신이 아는 인연이 자신의 새로운 인연과 좋은 관계를 가지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