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262화
이 단어는 국제 문제에 있어 가장 까다로운 단어 중 하나다. 또 나라 간에 벌어지는 다툼의 핵심이기도 했다. 나라 간의 다툼이란 거의가 그 영토의 확장에 있는 것인데, 이 국경이란 것이 그 영토의 경계를 나누는 붉은 도화선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도 독도라는 작은 섬을 두고 저 밑의 섬나라와 이런 분쟁이 있었다고 했다. 명백히 한국 땅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그 아래 섬나라가 어거지를 부린 것이다.
결국 독도는 한국의 영토로 세계적으로 공인을 받게 되었지만, 워낙 생떼를 쓰는 게 몸에 밴 섬나라가 인정할 수 없다며 한동안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팽팽한 긴장감은 그 후로도 얼마간 계속되었다고 했다. 독도라는 섬이 국제적으로 관심을 끄는 바람에 한국의 영토로 결정되고 나서 결과적으로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 버렸는데, 한국 정부가 유독 섬나라 사람들에 대한 절차만은 까다롭게 한 것으로 유명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 붉은 경계선을 넘기란 여간 힘들고 까다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든 일이다 보니 국경을 넘기 위해 절차를 밟느라 며칠씩 입국 허가를 기다리는 건 기본이었다.
자연히 그 시간 동안 그들은 국경 부근의 도시에 머물면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흘러가고, 흘러들어오다 보니 자연히 도시는 발전하고 커져 갔다.
국경을 넘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그 도시들을 거쳐 가기 때문이었다. 유동인구가 많고, 외국에서 들어오는 물건들이 가장 먼저 풀려 나가는 곳이니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발전하는 속도가 가장 빠른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또 가장 위험한 곳이 국경 도시이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오십여 년간, 드레인을 마주하고 있는 라일론의 국경은 너무도 평안했다.
거대한 두 제국이 동맹을 맺은 이상 그 사이에 낀 소국들로서는 크게 숨도 내쉴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왕국에서는 알아서 조심하고, 제국에서는 욕심 부릴 상황이 아니니 두 나라 간의 국경이 불안한 채로 오래 평화를 구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넓지 않은 드레인의 국경을 담당하고 있는 두 곳의 거대한 국경 도시는 위험 없이 발전만을 계속하여 제2의 3대 대도시라고 불러도 될 만큼 그 몸집을 불려 나가고 있었다.
그 엄청난 도시에 떨어지다 보니 허공중에 갑자기 나타난 이드와 채이나, 마오는 헤맬 것도 없이 바로 도시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텔레포트를 끝마친 곳이 바로 거대한 국경 도시 중 하나인 필리오르의 상공이었기 때문이다.
이드 일행은 자신들의 발밑에 잘 정돈되고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도시가 펼쳐져 있자 인비져빌리티로 모습을 감추고서 필리오르의 으슥한 골목을 통해 도시에 들어섰다.
마법을 풀고 골목을 나선 일행은 제일 먼저 하룻밤 편히 쉴 숙소를 찾기 시작했다.
유동인구가 많은 국경 도시라 그런지 숙소는 주위에 수도 없이 널려 있었다.
이드는 그 중 크지도 작지도 않으면서 깨끗해 보이는 한 여관을 찾아 방을 잡고 짐을 풀었다.
그즈음 태양은 온전히 모습을 감추고 하늘은 저 멀리 검은 장막을 펼쳐 오고 있었다.
“맛있게 해 주세요.”
“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머리를 단정히 하고 앞치마를 두른 이십 대의 아가씨가 주문을 받고는 방긋 웃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가씨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채이나가 곧 시선을 돌려 식당 안을 가득 채운 손님들을 둘러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도 밝고, 깨끗하고, 꽤 좋은 곳이네. 너 여관 하난 잘 고른 것 같다.”
일 층에 식당을 함께 운영하는 이 여관이 꽤나 마음에 든다는 표정의 채이나였다.
이드도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끌벅적하지만 그렇다고 질서 없이 소란스럽지는 않고, 사람들이 북적대지만 깨끗한 홀과 깔끔한 인테리어 장식으로 미루어 이곳은 상당히 알려진 여관인 듯했다.
방을 손쉽게 잡을 수 있었던 게 운이 좋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렇죠? 방도 편안해 보이더라고요. 이런 여관 흔치 않은데. 참, 그보다 내일 어쩔 거예요?”
“응? 내일 뭐?”
“국경 말이에요. 넘으려면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알다시피 오늘 있었던 일 때문에 허가서 받기가 좀…… 그렇잖아요?”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었다. 제국에 속한 기사단 하나를 쥐 잡듯 잡아 놓고 레크널의 관리에게 태연히 허가서를 받는 데는 문제가 있었다.
오늘 있었던 일이다 보니 하루 만에 국경까지 소식이 알려지지는 않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채이나는 물론 마오도 이드의 말에 전혀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느긋한 모습이었다.
“흐흥, 무슨 쓸데없는 걱정이야? 이렇게 내가 여기 있는데……. 넌 자꾸 내가 누군지 잊어 먹는 것 같다?”
채이나는 풍성하게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머리카락을 슬쩍 쓸어 보였다.
그러자 일부 머리카락에 가려 있던 길고 날렵하게 뻗은 엘프 특유의 귀가 파르르 떨며 모습을 드러냈다.
“아차……. 맞아요, 채이나가 있었죠.”
이드는 제 이마를 툭툭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디에도 엘프의 통행을 막아서는 나라는 없었다. 만국 공통의 프리패스랄까. 길의 영지에서야 그게 통하지 않아 약간의 문제가 있었지만, 그건 특이한 경우에 해당했고, 대부분의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엘프와 그 일행은 거의 백 퍼센트 확률로 무조건 통과가 허락된다.
당연히 국경을 넘을 때도 따로 허가서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이드가 다시 한 번 채이나의 종족이 가진 특별한 혜택에 대해 재인식할 때 주문을 받아 갔던 아가씨가 세 잔의 맥주를 내려놓았다. 여관의 서비스인 모양이었다.
잔을 내려놓은 아가씨는 완전히 밖으로 드러난 채이나의 귀를 보고 잠시 놀란 표정이더니 곧 미소를 지으며 돌아갔다. 괜히 엘프 손님을 발견했다고 호들갑을 떨지 않는 것도 이 여관의 철두철미한 서비스 교육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채이나는 잘 교육받은 웨이트리스의 제법 익숙한 모습을 대하자 빙긋 웃고는 그녀가 내려놓고 간 맥주잔을 쭉 들이켰다. 꽤나 술을 좋아하는 그녀였다.
“푸하, 시원하다. 마실 만한걸?”
차가운 맥주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는지 한 번에 잔을 비워 버리는 채이나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마오는 익숙한 동작으로 자신의 잔을 그녀에게 밀어 주었다.
“너희들도 마셔. 그리고 이드야.”
역시 익숙한 동작으로 마오의 잔을 받아 든 채이나가 이드를 불렀다. 참 죽이 잘 맞는 모자라고 생각하며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이제 어쩔 거야? 난 국경보다 오늘 있었던 네 문제가 더 신경이 쓰이는데.”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건 국경 문제보다 커도 수십 배, 수백 배 더 큰 문제였다.
하지만 채이나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이드는 별거 있느냐는 듯 양손을 털어 보였다.
“별수 있나요. 그냥 조심하는 게 상책이지.”
“그렇긴 하다만.”
“그래도 이번에 드레인으로 넘어가면 어느 정도 마음을 놔도 될 거예요. 제국도 괜히 시끄럽게 일을 벌이지는 않을 거고……. 뭣보다 나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면 그쪽도 곤란할 테니까요.”
이것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마인드 마스터 후예의 등장은 국가 전력에 관계되는 심각한 국제 문제로 대두될 수 있었다.
이드의 존재가 알려질 경우 서로 이드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난리를 칠 게 분명하니 라일론으로서는 소문이 퍼지지 않게 하는 게 최우선 사항일 것이다. 자연히 이드가 드레인으로 들어간 후에는 조심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야, 그게 그렇게 쉬운 문젠 줄 알아?”
하지만 가볍게 대답하는 이드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채이나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이드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럼 뭐 다른 방법 있어요? 애초에 문제를 일으킨 건 채이나잖아요. 따지고 보면 모든 사건의 시작은 채이나라고요.”
이드가 드러난 계기가 된 것이 채이나가 일으킨 문제 때문이라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 없었다. 이드의 말대로 그게 모든 사건의 시작이고, 핵심이었다. 무슨 변명이나 논리를 들이댄다 해도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내 문제는 작은 영지의 문제고, 네 문제는 나라의 문제인데. 스케일부터가…… 크흠. 뭐, 좋아 그것보다…….”
명백한 사실 앞에서는 얼굴 피부가 두터운 그녀도 어쩔 수 없는지 맥주잔으로 슬그머니 얼굴을 가리며 말꼬리를 돌렸다. 이드의 눈매가 예사롭지 않게 가늘어졌다. 오랜만에 자신이 주도하게 된 말싸움이 즐거웠던 것이다.
“뭐예요?”
“아니, 그것보다…… 이쪽이 문제란 말이지. 내 말은.”
슬쩍 찔러 오는 이드의 말에 채이나는 필사적으로 말꼬리를 돌렸다.
그런 채이나의 손이 향한 곳에는 아름답고 붉은 검집에 싸여 이드의 양다리 위에 얌전히 올라앉아 있는 라미아가 있었다.
[……갑자기 전 또 왜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가 따로 없었다. 재밌게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던 라미아는 갑작스레 이야기의 흐름이 자신에게 향하자 왠지 모를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가만있는 라미아는 갑자기 왜요?”
부부일심동체라고, 그런 라미아의 심정을 확실히 전해 받은 이드가 따지듯 물었다.
‘나름대로 말 돌리기 성공이랄까?’
“큼, 왜는 왜야. 라미아 자체가 문제라니까. 너 생각해 봐. 그 길이라는 애송이 소영주가 어떻게 널 알아본 것 같아? 그게 다 라미아 때문이잖아.”
채이나는 주위를 의식했는지 슬쩍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채이나가 좀 과장되게 속삭이자 이드는 가만히 고개를 숙여 라미아를 바라보며 상황을 돌이켜 보았다.
채이나의 말은 난처한 입장을 피하기 위해 그러니까 말을 돌리기 위한 억지만은 아니었다. 길과의 만남을 생각해보면 라미아를 보고 나서 알게 된 것이 확실하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뭐, 그런 것도…… 같네요.”
“그런 게 아니라 확실해.”
“그래서요?”
“그래서요라니? 당연히 안 보이는 곳에 숨겨야지. 어디서 어떻게 라미아를 또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단 말이야. 특히 네가 실력 발휘하는 걸 보고 라미아를 보면 길 같은 놈이 또 달려들 거란 말이지.”
“그래서요?”
다음 말을 재촉하는 이드의 목소리가 삐딱하다. 상황이 순식간에 반전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미처 채이나를 궁지에 모는 즐거움을 느끼기도 전에! 방금 전 모든 일의 시작이 채이나라는 이드의 말을 채이나가 라미아에게 하고 있으니…… 왠지 기분이 무진장 나쁜 이드였다.
“……숨겨라. 천으로 감싸든지 상자에 넣든지. 아니면 검집을 바꾸든지. 그것도 아니면…… 아공간에 숨겨두거나.”
이드의 찜찜한 기분을 눈치챈 채이나의 말이 확 짧아지며 바로 결론이 나왔다.
그리고 그 결론과 함께 채이나에 의해 졸지에 ‘문제의 검’으로 몰린 라미아의 답도 함께 나왔다.
[싫어욧!]
단호한 한마디에 대한 역시 단호하고 확실한 거절이었다.
두 번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강렬한 거부였다.
인간이었다가 다시 검의 형태로 되돌아간 것만 해도 속상하고 왠지 억울하기까지 한데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눈에 띄지 말라니!
라미아로서는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말이었다.
덕분에 그 강렬한 울림을 견디지 못한 세 사람은 잠시간 머리를 움켜쥐어야 했다.
“끙, 싫다네요.”
“싫어도 할 수 없어. 귀찮은 놈들이 또 엉겨 붙으면 그땐 어쩔 건데? 아우, 머리야. 기집애 목소리 하난 되게 크네. 아들 괜찮니?”
“아아…… 예.”
마오가 여전히 머리를 움켜쥔 채로 도리도리 고갯짓을 하자 채이나는 눈을 흘기며 라미아를 노려보았다. 자연히 그런 따가운 시선을 받은 라미아의 반응이 고울 수 없다.
[그렇게 봐도 싫은 건 싫은 거라구요.]
톡톡 쏘는 듯한 라미아의 말에 이드는 슬그머니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냥 두었다가는 상상 불허의 한바탕 난리가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 자. 둘 다 그만 진정해요. 지금 생각난 건데 적당한 방법이 있을 것 같아.”
“숨기는 것 말고 무슨 방법?”
[이드! 분명히 말해 두는데 나 따로 떨어져 있는 건 싫어요.]
이드는 입을 열긴 했지만 자신의 고집들을 전혀 굽힐 생각이 없어 보이는 채이나와 라미아의 말에 쓰게 웃어 보였다.
두 사람의 성격이 성격이다 보니 한번 붙었다 하면 어느 쪽도 쉽게 물러나려 하지 않는 것이다. 한쪽에서 이 일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편히 앉아 관망하는 마오가 갑자기 부러워지는 이드였다.
“확실한 방법이 있죠. 아직 좀 불안정하긴 하지만 여기 라미아의 모습을 바꿀 수 있거든요. 검이 아니라 특정한 부분을 가리는 갑옷이나 액세서리로요. 뭐, 액세서리는 아직 좀 힘들려나?”
[깍! 정말이요? 이제 어느 정도 컨트롤이 가능한 거예요?]
라미아가 대뜸 환호성을 질렀다. 어쨌든 이드와 가장 가까운 만큼 라미아는 정확하게 이드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무엇보다 지금 이드가 말하는 것은 라미아가 가장 바라고 있던 대답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라미아가 다시 인간의 모습을 취할 수 있는 방법!
지금 이드의 말은 그 방법의 기초를 습득했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다시 인간의 모습이 되기를 바라는 라미아에게는 이만한 희소식도 없다고 할 수 있겠다. 당연히 환호성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덕분에 채이나야말로 오히려 어리둥절할 뿐이다.
“갑자기 뭐야? 그게 무슨 말이냐고.”
이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채이나와 역시 비슷한 마오의 얼굴을 보고는 편하게 웃으며 사정 이야기를 했다. 라미아가 저토록 좋아하니 더불어 기분이 좋아지는 이드였다.
“둘 다 내가 이야기했었죠? 지금까지 이계에 있었다고. 정확히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곳에서는 라미아가 인간의 모습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대륙으로 돌아오니까 다시 검의 모습이 되어 버린 거죠. 그리고 이제 다시 인간의 모습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요.”
이드는 라미아의 사정을 전음으로 전했다. 다른 이야기들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지만 이번 이야기는 함부로 남 귀에 흘러가면 곤란한 말이기 때문이었다.
이드의 사정 설명에 채이나와 마오는 잠시 놀란 듯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긍했다.
‘이세계로 날아가는 것이나 검이 인간이 되는 것이나 똑같이 놀라운 일이라는 생각에서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야 아무 문제 없지. 아예 다른 것이 된다는데 그런데 어떤 모양으로 바꿀 생각이야?”
[귀걸이요. 귓가를 아름답게 감싸는 모습으로 하고 싶어요.]
채이나의 물음에 이드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라미아가 먼저 답을 내놓았다. 꽤나 화려하고 감각적인 것을 원하는 라미아였다.
하지만 이드로서는 뭐라고 단정적으로 대답하기 곤란한 요청이었다. 배에서 라미아에게 말을 듣고 틈틈이 시간 나는 대로 마음의 공부를 통해 변형이 가능할 것 같아 말을 꺼내긴 했지만 그리 자신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런 복잡한 요청이라니…….
평범한 액세서리로라도 가능할지 어떨지 모르는 상황에서 말이다.
“우선 방에서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지 해 보고. 될지 안 될지 모르겠지만 해 보고 되면 그렇게 해 줄게.”
그렇다고 무턱대고 고개를 저을 수는 없는 일이라 이드는 우선 적당히 성의 표시를 했다.
[에잇! 그럼 지금 당장 방에 올라가서 해 봐요.]
라미아는 쇠뿔도 단김에 빼고 싶은 만큼 급하게 이드를 재촉했다.
‘선물을 받고 당장 풀어 보고 싶은 아이의 심정과 하나 다를 게 없는 게 지금 라미아의 심정이다.’
이드는 들떠 있는 라미아를 살살 달래며 식사가 나오길 기다렸다. 뭘 해도 밥은 먹어야 할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리고 그러는 중에도 자신이 얼마 후에 그처럼 눈에 확 띄는 장신구를 하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는 이드였다.
라미아와 이드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방법을 시험하기 위해 일단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채이나와 마오는 완전히 소외된 채 주변만 멀뚱멀뚱거릴 뿐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 아니 정확히는 한 사람만이 궁시렁궁시렁 떠드는 이상한 짓으로 안 그래도 북적거리는 식당의 소음에 한몫을 하고 있는 사이 이곳 못지않게 시끄럽고 떠들썩한 곳이 이 나라 라일론에 또 한 곳 있었다.
바로 나라의 중심이자 모든 국가 운영의 핵이며, 그래서 가장 엄숙해야 할 장소인 황궁이었다.
탕 탕 탕
정확히는 황궁 중에서도 심장부에 위치한 작은 소회의실이 그 소란의 진원지였다.
지금 이곳에서는 무식한 힘으로 아무 죄 없는 책상을 마구 두드려 대는 짜증과 답답함이 가득했다.
“일단 조용히들 좀 하세요. 그리고 도대체가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한 설명부터 해 보란 말입니다.”
아마람 공작은 사방에서 제각각 떠들어 대는 소란에 제국의 무게추라 불리는 그답지 않게 언성을 높이며 회의실에 모인 귀족들을 다그쳤다.
웅성웅성
평소와 같지 않은 신경질적인 음성이 터지고 나서야 그제야 한여름 시장통 같던 소란스러움이 푹 꺼지듯 가라앉았다.
상황이 끝난 건 아니지만 일단 진정된 상태를 확인하고 아마람 공작은 자리에 앉으며 큰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자리에 앉으시오, 휴우. 그리고 누가 자세한 사정 설명을 해 주겠소?”
아마람은 대충 앉으라는 손짓을 하고는 아무나 빨리 대답해 보라는 듯이 귀족들을 돌아보며 재촉했다.
하지만 신경이 곤두선 공작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귀족들은 스스로 나설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으며 다만 일제히 그들 사이에 앉아 있는 한 장년의 귀족을 바라보았다.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각하!”
약간은 긴장된 말투로 몸을 세운 이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큰 키를 가진 장년의 파이네르 폰 디온 백작이었다.
그는 제국의 모든 정보를 총괄하는 자리에 있으며, 아마람과 황제의 직속 정보통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제국의 크고 작은 정보들이 그를 통해 취합되고, 또 그를 통해 분류되며 정리되어 보고까지 이루어지는 시스템 속에서 그는 언제나 사건의 일차적인 보고자였다.
“그럼 말해 보게. 내가 달려오기 전에 듣기로는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는 자에게 공격을 당했다고 들었고, 이곳에 와서는 우리 기사단이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는 자에게 공격을 가했다는 소리를 들었네. 도대체 무슨 일인가? 또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는 뭐고? 설마 그 후예라는 것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오?”
일단 파이네르가 나서자 고개를 끄덕이던 아마람이 궁금해하던 것들을 먼저 쏟아내듯 늘어놓았다.
평소의 위엄은 어디다 잠시 맡겨 두었는지 다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을 대하자 파이네르의 심사가 복잡해졌다. 그 역시 저택에서 쉬고 있다가 난데없이 들려온 소식을 듣고 달려오기는 했으나, 대충의 사정만 전해 들었을 뿐 아직 정확하게 사태 파악조차 하지 못한 상태였다.
“각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마인드 마스터 이드의 후계자입니다.”
“크음, 계속해 보시오.”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는 백작을 보는 아마람은 머리가 복잡하다는 듯이 미간을 쓰다듬었다.
“처음 보고는 약 육일 전 레크널 영지의 길 더 레크널에게서 올라왔습니다.”
백작은 정보를 다루는 고위직에 있는 만큼 그다지 많지 않은 정보량으로도 길의 이름을 시작으로 그가 보고 들은 것까지 함께 거론하며 아주 자세하게 상황을 그려 나가듯 설명해 나갔다.
그리 복잡할 것도 없는 보고였지만, 듣고 있는 아마람에게는 그게 아닌지 미간을 문지르는 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한참 동안 이어진 백작의 설명이 길에 의한 마지막 보고로 끝을 맺자 아마람은 자신이 앉은 의자에 깊이 몸을 파묻으며 머리를 기댔다.
그의 입에서 신음하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골치 아프게 됐군…….”
——
상업 도시 필리오르는 이른 아침부터 바빴다.
상인들이 관문처럼 꼭 거쳐 가는 거점인 만큼 새벽부터 출발을 위해 서두르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에 덩달아 이드와 채이나, 마오도 이른 시각부터 서둘러 떠날 준비를 했다. 좋은 게 좋다고 괜히 꾸물거리다 문제라도 일어나면 곤란해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보니 머뭇거릴 필요 없이 곧바로 국경을 넘으려는 생각에서였다.
아공간과 정령이 있는 일행들에겐 따로 준비해야 할 것들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이 아침을 먹고 있을 때 이미 준비를 다 마친 다음 여관에서 준비한 도시락을 들고 거리로 나설 수 있었다.
벌써부터 상인의 행렬이 길을 따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흘러가고 있었다.
이드 일행의 앞뒤로도 소규모 상인들의 상단이 보였다. 규모가 작은 그들은 대상인들보다 기동성을 가지고 가장 작은 시장까지 파고들며 오로지 시간과 속도로 돈을 버는 자들이었다.
언제나 그들은 대상단보다 먼저 움직였으며, 그들이 미치지 못하는 오지까지 들어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데, 지금도 사방으로 뻗은 광장을 통해 순식간에 흩어지고 있었다.
일행들은 처음 보는 상단의 행렬에 흥미를 가지고 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목적지까지 이르는 동안 상인들의 일상이라고 할 수 있는 과장된 무용담과 소문들, 괴이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가게 되었다.
자칫 무료해질 수도 있었을 그들의 여행이 다소 활력을 얻으며 가게 되었으니 꽤 만족스러운 동행이랄 수 있었다.
게다가 덤이 생기기도 했다. 채이나의 아름다움에 반한 상인들이 때로는 집요한 장사치로 돌변하게 마련인 성정을 잠시 비껴 두고 선심을 쓰기도 해서 이름 모를 달콤한 과일을 얻을 수 있었다. 채이나는 과일 값을 미소로 대신하고는 상인에게서 받은 과일을 이드와 마오에게 건네주었다.
“헤, 고마워요. 덕분에 이런 것도 얻어먹네요.”
이드는 채이나에게서 받아든 과일을 베어 물고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과즙이 풍부하고 달콤한 이 과일이 썩 마음에 들었다.
채이나는 입술 사이로 과즙이 흘러내리는 것도 아랑곳없이 맛있게 먹는 이드가 귀엽다는 듯 바라보고는 자신이 먹을 과일을 마오에게 건네주었다.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이 있는 거니까. 그보다 가다가 무기를 취급하는 상인이 있으면 네 검도 하나 마련해야겠다.”
채이나가 다소 측은하다는 표정으로 검 얘기를 꺼내자 이드는 허전한 기분이 드는 허리를 내려다보았다.
허리에 항상 걸려 있던 라미아는 물론 검이란 무기 자체가 걸려 있지 않았다.
“뭐 어쩔 수 없죠. 라미아를 그대로 드러내 놓고 다닐 수는 없다는 게 중요하니까요.”
이드는 아쉽다는 듯이 대답하고는 자신의 오른쪽 팔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어제까지만 해도 보지 못했던 것이 걸쳐져 있었다. 목이 시작되는 지점에서부터 팔꿈치를 둥글게 감싸는 붉은색을 띤 것. 단순한 가죽을 댄 것 같은 그것은 일종의 파츠 아머로 보였다.
“그렇지, 라미아?”
그것은 다름 아니라 어제 밤늦도록 이드가 심력을 기울여 변형시킨 라미아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네, 그렇지만 일라이져까지 사용하지 말라는 건 좀 너무한 건 아닌지 몰라요.]
투덜대는 어투가 확연했지만 묘하게 밝게 들렸다. 아주 썩 만족스럽진 않더라도 모습이 변했다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운 듯했다.
“만사불여튼튼! 미리미리 조심해야지. 너도 유명하지만 일라이져도 너 못지않아.”
라미아가 얘기 꺼낸 김에 일라이져를 꺼내 들려던 이드를 말린 채이나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드의 곁으로 다가간 채이나는 아침에도 살펴봤던 라미아를 다시 요리조리 살펴보며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슬금슬금 문질러 보았다.
“그나저나 정말 신기해. 분명 감촉은 금속인데…… 움직이는 건 두터운 가죽 같거든.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채이나의 말마따나 라미아가 지금 취하고 있는 형태는 상당히 이상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일단 기본 형태는 어깨와 팔을 보호하는 파츠 아머의 일종이 분명해 보였다. 파츠 아머란 마인드 로드와 기본 검술의 업그레이드로 나온 고위 검사들을 위한 갑옷의 일종이었다.
사실 내력을 능숙하게 사용하기 시작하면 갑옷은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단순한 쇠로 만들어진 갑옷으로는 검기를 비롯해서 마나를 사용한 여러 가지 수법을 견디기가 어려워 거의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무림이라는 곳이다.
무림에서 갑옷을 입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느 정도 내력의 수발이 자유로워지면 검기를 사용하니, 갑옷이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바위를 베고, 쇠를 잘라 버리는 검기 앞에 방어용 재질로 사용되는 쇠는 거의 있으나 마나 한 것이고, 빠르고 변화가 많은 검술은 갑옷의 빈틈을 잘도 찾아 찔러 댔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육중한 갑옷의 무게로 인해 걸리적거리거나 움직임을 제한받아 득(得)은 적고, 실(失)은 크니 누가 갑옷을 찾아 입겠는가 말이다.
그런 무림의 사정처럼 마인드 로드와 높은 수준의 검술이 전해지자 그레센의 기사들에게도 똑같은 상황이 생겨났다. 온몸을 둘러싸던 여러 다양한 갑옷들이 졸지에 애물단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가장 실력이 뛰어난 자부터 하나 둘 갑옷을 벗어던지기 시작해서 지금은 웬만한 기사들까지 착용하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역시 오랜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 무림의 세상과 그레센은 여전히 검술 기반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으므로 모든 기사들이 갑옷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중원의 무림과 달리 그레센 대륙의 검사들에겐 인간만이 싸움의 상대가 아니니까 말이다.
또한 많은 병력이 작전을 수행하는 대규모 전투를 빈번하게 치러야 했고, 무엇보다 마법의 존재가 그레센 대륙으로 하여금 여전히 갑옷의 소용을 남겨 두고 있었다.
중원과 달리 갑옷에 마법을 걸어 특별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요즈음 갑옷의 용도를 바꾸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검의 경지에 오른 실력자들에게는 이 역시 해당 사항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이 파츠 아머였다.
검사에게 약한 부분에 부분적으로 갑옷을 입혀서 행동의 제약을 최소화시키는 범위 내에서 방어력을 높인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이런 부분적인 방어를 위한 갑옷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파츠 아머는 특별했다. 바로 파츠 아머에 마법을 걸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실드 마법을 걸어 사용하는 방법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장갑의 경우 범위가 작지만 단단한 실드의 마법을 만들어 웬만한 검에도 방어가 가능할 정도로 방패를 대신해 사용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또는 헤이스트나 슬립을 비롯한 보조 마법을 걸어 사용하기도 했다.
덕분에 파츠 아머는 좋은 검 못지않게 중요하게 인식되어지기 시작했으며 확실히 전신 갑옷을 대신해 기사들의 새로운 수호자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파츠 아머의 용도와 생겨난 배경에 대해서는 전날 식당에서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방으로 들기 전 라미아의 변화된 모습으로 어떤 것이 좋을지 이런저런 의견을 나누던 중에 그날 식당에서 보았던 기사들의 복장을 유심히 보게 되면서 그것은 거의 정해졌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있었던 레크널 영지의 기사들이 입고 있던 갑옷까지 생각이 떠올랐고, 사람들에게 자세하게 물어 파츠 아머의 전모에 대해 알게 되었다.
물론 이때까지도 라미아의 목표는 여전히 최고급의 아름다운 귀걸이이긴 했지만.
또 방으로 들어가서 처음 시도한 것도 액세서리 모양이었다. 하지만 처음 시도하는 변신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이드의 끈기와 라미아의 고집에 꼬박 두 시간을 투자했지만 라미아가 바라는 형태는 기어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그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했다는 게 적당한 표현일 것이다.
반지를 목표로 했을 때는 허리띠만 하게 나오고, 목걸이를 만들었을 때는 목걸이 안쪽에 검 날이 생겨났다.
서클렛을 만드니 무게가 수십 킬로그램이나 나가고, 팔찌를 만드니 토시가 만들어졌으니 더 말해 뭐하겠는가. 이드와 라미아는 목표로 했던 귀걸이는 시도도 해 보지 못하고 포기해 버렸다.
결국 올라오기 전에 이야기했던 파츠 아머를 새로운 목표로 잡았다. 그중에서도 어깨를 감싸는 견갑(肩鉀)을 목표로 했다.
물론 이러한 대안도 바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다시 두 시간을 넘게 끙끙대고서야 겨우 적당한 모습으로 바꿀 수 있었다. 독특한 형태도 문양도 없는 그저 그런 밋밋한 모습을 만들어 낸 것이다.
더구나 갑옷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층도 단 하나도 없는 매끄러운 모양이라 과연 이걸 입고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지나 의문이었다.
이드는 다시 모습을 바꿔야 하는 게 아닌가 하면서 견갑을 걸쳤다. 헌데 입고 보니 신기했다. 마치 매끄러운 살결처럼 몸에 착 달라붙는 건 둘째치고 움직임에 아무런 불편이 없었던 것이다. 마치 부드럽고 가벼운 비단 옷을 입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아무튼 이리저리 팔을 휘둘러 봐도 전혀 불편함을 느낄 수 없었다. 신기한 감촉에 모양이 이상하지만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여러 가지 형태의 파츠 아머와 망토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모양도 좀 이상하고 재질도 엉뚱했지만 확실히 기존에 존재하는 것을 초월하는 성능 이상의 기능들을 보여 주었다.
실제로 망토를 만들고 나서 일라이져로 그어 보았는데 조금도 흔적이 남지 않았다.
그런 현상을 보게 되자 이드와 라미아는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드에 의해 변하는 라미아의 모습은 과정 이전에 이드의 뜻에 가장 충실해진다고.’
물론 지금 채이나처럼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는 이드였지만 말이다.
이드가 어찌 설명을 해야 되나 영 자신 없는 얼굴로 시선을 돌리자 채이나는 아예 대답 듣기를 포기하고 쿡쿡거리며 웃다가 다시 상인에게로 다가갔다.
나름대로 대륙에 떠도는 정보에 빠삭한 그들인데 이 참에 지난 몇십 년간 잊고 지냈던 인간 세상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모두 듣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