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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268화


  • 인간의 욕심이 숲에 상처를 입혔고, 그 욕심을 거두고서야 숲은 살아나게 된 것이다.

정령을 이용해 배를 움직이기 시작한 세 사람은 반나절 만에 페링을 건널 수 있었다.

사람이 조종해서 몰아야 했다면 원래는 한나절은 꼬박 걸려야 할 거리였지만 정령의 도움으로 빠르게 움직이자 그 절반의 시간 만에 페링을 가로지를 수 있었다.

평생 페링에서 배를 몰았던 선원이 이 광경을 본다면, ‘아이고, 스승님’ 하고 바지가랑이에 매달릴 노릇이었다.

타고 온 배는 다시 돌려줄 수 없어 내려선 호숫가 한산한 곳에다가 닻을 내려 놓았다.

외관상 한눈에 봐도 군사용 목적으로 쓰이는 배라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아무도 없다고 발견한 자가 함부로 주인이라 찜하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어쩌면 수색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를 텐데, 그렇다면 아마도 하루 이틀 뒤면 테이츠 영지에서 알아서 수거해 갈 것이라고 보았다. 혹시라도 누군가 이 배를 가로챌 요량이라면 드레인을 상대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모험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후, 골치야. 채이나! 이런 사태까지 일어났는데, 계속해서 걸어가는 걸 고집할 건가요?”

정말 한사코 도보만을 주장했던 채이나가 한없이 원망스러운 이드였다. 또 지금 당장이라도 라미아의 도움을 받아 텔레포트만을 사용해, 더 이상 사람들과 걸치적거리지 않고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이드였다.

“흠흠, 글쎄…… 나도 이렇게 무식한 일까지 일어날 줄은 정말 몰랐거든. 아무래도 네 말대로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 너한텐 정말 미안해.”

이드의 입술이 오물거리며 ‘말로만?’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뻔했다.

헌데 사과가 분명한 말임에는 틀림없었는데 그녀의 얼굴은 전혀 미안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것이 왠지 채이나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 같아 이드는 어이가 없기도 했다.

‘정말 일리나를 찾기만 해 봐.’

이드는 속으로 이렇게 가만히 다짐할 뿐이었다. 그런데…… 일리나를 찾으면 뭘 어쩌겠다는 것일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순식간에 스쳐 간 생각이라 라미아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미 벌어진 일은 해결해야 하잖아, 이번 기회에 라일론 제국 황궁에 들러보는 건 어때? 거기서 네 정체를 밝힌다면 어떻게 해결이 될 것도 같은데…….”

이드의 시커멓게 된 속도 모르고 현재 화살이 자신에게 쏠리게 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우물쭈물 말을 돌리는 채이나였다.

하지만 말을 돌리는 방향은 맞았어도 그 내용은 한참 잘못된 것이었다.

이드는 채이나의 말이 끝나자 퉁명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도 안 돼요. 그랬다간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구요.”

정말이었다. 다른 문제는 차후에 두더라도 이드 자신이 마인드 마스터 본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말이다.

백 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는데도 다른 사람들 일 년 분의 시간도 지나지 않은 듯한 자신의 모습을 말이다.

또 어떻게 해서 증명이 되더라도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증명이 된다고 그들이 ‘아. 그렇습니까. 마인드 마스터시군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하고 정중히 물러날 것인가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더 눈이 벌게져서는 물불 못 가리고 달려들 것이었다.

이드가 가진 지식을 익히게 될 경우 어떻게 된다는 것에 대한 증명을 이드 자신이 해 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 건 정말 사양하고픈 일이었다.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

채이나를 대할 때는 항상 고분고분하던 이드가 과장되게 으르렁거렸다.

조금 과민하게 나오는 이드의 반응에 채이나는 급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그녀도 자신이 원인이 되어 벌어진 일에 진심으로 이드에게 미안해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꼭 내가 아니라도 결국 싸움이 나면 들켰을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게 그녀의 표정과 미안한 진심을 일치시키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채이나는 그것을 마음속으로만 가지고 있어야 할 생각이라고 굳게 다짐했다. 표정에서 다 드러나긴 했지만 이렇게 열을 올리는 이드에게 입을 열어 말로 나왔다간 정말 저 순한 녀석이 폭발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채이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알았어. 다신 그런 이야기 하지 않을게. 그만 가자. 페링 호수를 건너긴 했지만, 사태가 사태이니 만큼 누가 또 우리를 쫓아오기 시작할지 몰라.”

그녀의 말대로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아니, 세 사람은 몰랐지만 벌써부터 세 사람에 대한 추적이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잠시 후 이드와 마오는 채이나를 앞에 두고 이곳까지 올 때처럼 그녀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휴, 이제 목적지도 멀지 않았으니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이드는 제발 더 이상의 별일이 없기만을 간절히 빌 뿐이었다. 같은 심정인 라미아와 마오가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역시 같은 심정인 건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마오는 레크널 영지 이후 자신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상황만 계속해서 벌어지는 통에 인간 세상의 험난함을 아주 실감 나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세 사람의 간절함이 하늘에 닿았는지 그들은 목적지에 닿을 때까지 아무런 일도 겪지 않아도 되었다.

이종족들이 푸른 호수의 숲이라 부르고, 인간들이 요정의 숲이라고 부르는 목적지에 드디어 도착을 한 것이다.

푸른 호수의 숲과 요정의 숲은 같은 곳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다만 이종족과 인간들이 부르는 이름의 차이일 뿐이다. 당연히 인간들은 자신의 소유가 아님을 나타내는 의미로 요정의 숲이라 부른다.

이 숲은 드레인의 이름 높은 호수인 블루 포레스트를 껴안은 형상으로 형성된 숲이었다. 숲 자체보다는 숲을 영롱하게 반사시켜 제 모습을 보여 주는 푸른 빛 호수와 그 호수를 찾는 이종족들로 인해 더 유명한 숲이었다.

특히 이종족들 중 숲의 자식이라 불리는 엘프가 자주 찾는 곳인 만큼 숲의 조화로움과 생기, 그리고 아름다움은 호수와 어울려 한 폭의 그림과 같다고 알려져 있었다.

때문에 옛날에는 이곳을 찾는 관광객도 많아 따로 관광 라인이 개척될 정도였다고 한다.

인간들의 잦은 발길이 오솔길을 내듯 관광 라인도 점점 넓어졌고, 그만큼 이종족과 숲의 아름다움을 보려 몰려온 사람들은 늘어만 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곳은 금지(禁地)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관광 라인을 따라 이종족을 발견하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너도나도 이종족을 만났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퍼져 나갔다. 보지 못했어도 숲을 들어갔다 나오면 으레 누구나 이종족에 대한 얘기를 꺼냄으로써 관광했다는 걸 자랑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그것들은 책으로까지 만들어져 관광 가이드 역할을 했지만, 대부분의 것은 허구와 상상력이 빚어낸 책들로, 있지도 않은 이종족을 수록하는 경우도 많았다.

헛된 상상력과 무지한 소문들은 결국 이 아름다운 숲에 잔인한 노예 사냥꾼이 눈독을 들이게 함으로써 파탄을 맞게 된다.

노예 사냥꾼은 조직적인 연대를 하거나 팀을 만들어 이종족을 잡으려고 열을 올렸으며, 그것은 결국 이종족과의 전투를 연발시키면서 졸지에 위험 지역으로 바뀌게 되었다.

가장 아름다운 숲이 가장 위험한 곳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자연 황폐화되기 시작한 숲을 보호하기 위한 움직임이 생겨났고, 숲에 펼쳐진 무수한 마법은 인간의 접근을 완전히 차단해 버렸다. 인간의 발길을 끊는 것이 숲을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고도 한동안은 숲에 대한 호기심이 여전히 인간의 모험에 불을 지폈지만 그렇게 들어간 인간들이 더 이상 숲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인간들의 발길이 끊기기 시작했다.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위험한 숲이라는 의미에서, 또 이곳에 대한 소유권을 요정에게 온전히 넘김으로써 숲은 다시금 재생되었다.

인간의 욕심이 숲에 상처를 입혔고, 그 욕심을 거두고서야 숲은 살아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숲으로 들어가는 인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목숨을 걸어야 했지만 그럴 필요가 있을 때는 누구도 또한 말릴 수 없는 법이었다. 아무튼 특별한 목적이 없다면 절대 찾을 곳이 아니었으므로, 드레인 사람들에게 이 숲은 금지(禁地)의 숲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관광 라인은 숲을 휘도는 호수를 따라 다시금 형성되어 숲이 보여 주는 풍경만을 감상하고 느끼게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인간은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이드는 이 악명 높기로 소문난 한편 아름답기로 명성이 높은 우여곡절의 숲으로 한 발 들어설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숲이 가진 한 가지 비밀도 들을 수 있었다.

“친구의 초대를 받은 자.”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족을 거부하는 이 숲에 인간이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하게 안전한 방법이자 조건이었다.

그것은 먼저 숲에 발을 들인 이종족이 친구의 이름으로 상대를 초대하는 것이었다.

이종족에게 진정한 친구로서 인정을 받은 자만이 들어올 수 있다는 건 어찌 보면 쉬워 보이기도 했지만 그런 일이 얼마나 드물 것인지는 누구나 아는 일이었다. 아무튼 그것을 만족시킨 인간에게만 숲은 순순히 출입을 허락했다.

이드는 그날 채이나의 친구로서 숲에게 허락을 받아 실로 오랜만에 숲 속에 인간의 흔적을 남기게 된 셈이었다.

세 사람이 숲에 들어가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드가 들어선 지점으로부터 동서로 각각 육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두 곳에서 은밀한 움직임이 생겨났다.

그들은 그 생김새도, 하는 행동 패턴도 사뭇 달랐지만 유사한 점이 몇 가지 있었다.

양측 모두 이드 일행의 뒤를 아주 멀리서 은밀하게 뒤따랐으며, 멀리 있는 물건을 볼 수 있다는 드워프제 망원경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그랬다.

또 이드가 숲 속으로 사라지자 어딘가를 향해 각자의 방법들로 연락을 하는 점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 우연인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들이 보내고 있는 내용 중에 똑같이 언급된 몇 가지 단어가 또 똑같았다. 그 몇 가지는 다음과 같았다.

요정의 숲.

다크 엘프.

세 명.

붉고 화려한 귀걸이를 한 청년.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

그 다섯 가지 단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긴 문장이 어딘가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스으으읍.”

요정의 숲을 걷던 이드는 숲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입가에 생기 가득한 웃음을 띠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때문일까? 아니면 엘프의 손길이 늘 닿은 때문일까?

요정의 숲이 주는 맑은 공기와 푸르른 생명력은 이드의 호흡을 저절로 깊어지게 만들었고, 마음과 몸을 가볍게 풀어 주었다.

지구에 있던 산림욕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알 만했다. 하지만 지구에서 말하는 산림욕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런 곳에 산다면 저절로 병이 나을 것만 같은 푸른 생명력이 가득했다.

“어때? 둘 다 기분 좋지? 몸 안에 힘이 가득한 느낌일 거야.”

“네, 어머니. 몸 안에 생명력이 가득해요. 헌데 어떻게 된 겁니까? 이 숲. 넘치는 생명력만이 아니라 이렇게 풍부한 정령력이라니……. 마치 다른 세상 같아요.”

끄덕끄덕.

마오가 신기해하며 소감을 밝히자 이드와 라미아도 동감을 표했다.

채이나는 그런 모습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일행과 마찬가지로 숲의 기운을 받은 그녀는 더욱 화사한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더구나 저 평온한 표정이라니. 고집스런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자연스럽게 떠올라 있었다.

“호호호, 우리 아들 똑똑한데. 그 말이 맞아. 이 숲 속엔 다른 세상이 숨어 있어, 너희들이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그것이 진실이야.”

[다른 세상이요?]

이드와 함께 가장 감각이 예민한 라미아가 물었다.

그녀는 처음 그녀가 원하던 모습인 화려한 붉은색 귀걸이가 되어 이드의 왼쪽 귀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었다.

표면에 이해하기 힘든 세밀한 문양이 새겨진 세 개의 붉은 보석 같은 금속이 이드의 귀를 잡고, 그 세 금속으로 이어진 붉은 실 같은 크기의 아름다운 사슬이 이드의 뺨을 타고 목까지 늘어져 아른거리는 모습.

그것이 현재의 라미아였다.

사별삼일에 일취월장이 뭔지 확실히 보여 주는 속도로 라미아의 모습은 변해 가고 있었다.

“내가 말했었지? 이곳에 우리들이 모이는 곳이 있다고. 그래서 소문이 저절로 모이는 곳이 있다고.”

“당연하죠. 그 소문을 듣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 거니까요.”

라일론 제국과 문제까지 일으켜 가며 이곳까지 온 이유가 그 소문의 한 자락을 잡기 위해서이지 않은가 말이다. 잊을 턱이 없다.

“그래, 요정의 광장. 우리는 그곳을 그렇게 불러.”

“……요정의 광장?”

“그래, 요정의 광장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러면서 여전히 이 세상에 속한 곳이기도 하지. 그래서 특별한 곳. 우리가 가는 곳은 그런 곳이야.”

그녀의 말에 이드의 시선과 감각이 반사적으로 주위를 살피고, 또 느꼈다.

“우리가 찾아가는 그 요정의 광장이란 곳이 이 숲에 있는 것 아니었어요? 지금 하는 말이 묘한 뉘앙스가 있네요. 마치 다른 곳에 있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은근히 불안해지는 이드의 목소리였다. 이 요정의 숲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는가.

그건 어찌 보면 순전히 채이나에게서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있었다. 매번 자신의 고집과 생각대로 움직였던 채이나였기에 그녀의 묘한 느낌을 주는 말에 또 불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쿠쿡, 걱정 마. 이 숲 안에 분명 있으니까. 하지만 숲 속에 있는 것은 아냐.”

이게 또 무슨 말장난인가. 아까부터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이 세상에 없다, 숲 안에 있으면서도 숲 속에 있는 것은 아니라니.

들을수록 애매하고 헷갈리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점점 인내의 한계를 건드리고 있었다.

이건 단순히 궁금함 때문이 아니었고, 그걸 채이나 또한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오랜 여정의 목적지에서 갑자기 연막을 치는 듯하니 조바심이 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냥 쉽게 이야기해 줘요, 채이나.]

라미아가 이드의 심정을 대변하며 보챘다.

“호호호, 난 사실대로 말해 줬어. 너희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뿐이지. 뭐, 이 정도로 이해할 수 없다면 직접 보는 수밖에 없겠지? 자, 가자!”

채이나는 물음표만 자꾸 만들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거리는가 하면 기분이 좋을 때 곧잘 내는 웃음소리까지 터트렸다. 발걸음도 마치 미끄러지듯이 경쾌하고 재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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