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45화
1480화
누구를 떠올리는지 검후의 표정이 썩어든다.
“누군진 몰라도 그런 분탕 종자는 가까이 두지 마.”
“그러려고 하는데 쉽지 않네요.”
거기에 이어지는 반응도 색달랐다.
쉽지 않다니. 검후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다고?
이드는 가만히 턱을 쓸었다.
검후에게 말을 전한 사람이 과연 누굴까?
‘일단 은색 기사단은 아니고.’
그들은 오로지 검후의 뜻에 죽고 사는 집단이다. 뜻을 거스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이런 사소한 일로 시시콜콜 검후를 귀찮게 하지도 않는다. 문제가 있다면 쉴라나 스폴 선에서 해결하면 되니까.
그렇게 은색 기사단을 제외하면 클라인 백작이 가장 유력하지만,
‘그렇게 한가한 양반이 아니지.’
농담이 아니라 최근엔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쁜 사람이 바로 클라인 백작이었다. 그렇게 하나둘 용의선상에서 빠지고, 결국 마지막에 하나의 얼굴이 남았고.
그 인물의 정체에 이드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반짝였다.
‘이야, 그렇단 말이지?’
이런 모습에 검후는 본능적으로 경계하기 시작했다.
“뭐에요? 지금 그 눈빛은.”
“아무것도, 그냥 천하의 검후님을 괴롭히는 인물이 누군가 궁금해서.”
“……그래서 누구인 거 같은데요?”
“모르겠더라고. 짐작 가는 사람이 없어.”
“눈빛은 아닌데요?”
“그건 네 착각이고, 무엇보다 큰 관심도 없다고. 아무렴 천하의 검후가 사람을 잘 못 봤을까.”
“……”
그저 별 뜻 없이 나온 말이었지만,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긁혀버린 검후의 눈길이 곱지 않게 변했다.
전혀 그런 뜻이 없었던 이드는 곤혹스러웠다.
“아, 진심이라니깐!”
이드도 스스로의 잘못을 깨달았다.
가까운 기사이자,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한 이보고 사람 볼 줄 안다고 하면, 그게 과연 칭찬으로 들릴까?
조롱으로 들리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하지만 이드는 진심이었다.
대체로 세상 경험이 많은 노인들일수록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한 편이다. 흔히 말하는 세월이 가져다주는 지혜랄까. 검후는 그런 세월의 힘을 가장 많이 쌓은 사람 중 하나였다. 백 년이 넘는 경험을 쌓았으니 말이다.
이런 검후에 있어 삼검왕은 실수였다.
아무렴 사람인데, 실수가 없을 수는 없지 않은가. 특히 오랜 시간 쌓인 정은 그 자체로 눈을 가리는 법. 검후가 삼검왕과 함께 한 시간이 얼마이던가.
삼검왕의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할 이유는 충분했다.
‘거기에 한 줄 더하자면 삼검왕을 고른 것은 검후가 아니라는 사실이지.’
그랬다. 삼검왕에 대한 사람 보는 눈을 따지려면 검후가 아니라, 전전대 황제를 불러 따져야 옳았다.
아무튼,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진심을 보인 후에야 검후의 눈꼬리가 내려왔다.
“다른 건 몰라도 삼검왕 이야기는 아직 힘들어요. 두고 볼 거에요.”
“알았어. 미안해. 진짜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연신 두 손을 모으는 이드에 검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럼 목적지는 정했어요?”
“정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 카논, 거기가 제일 의심스럽잖아.”
“그건 인정. 하지만 카논 전체라고 하면 너무 넓잖아요.”
“뭐, 그때그때 봐가면서 돌아보려고.”
“그건 너무 대충이잖아요?”
검후가 질색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단순 휴가나 관광을 위한 여행에도 계획을 세우고, 코스를 잡는다.
그런데 혼돈의 파편을 목적으로 둔 외유에 계획이 없다니. 다른 말로 작전도 없이 전쟁터로 돌진하겠다는 말과 다를 것이 뭔가. 이러한 비난에 이드도 할 말은 있었다.
“어차피 예방적인 목적이라고. 뭐라도 있어야 목적지를 잡지. 지금은 그냥 운에 맡겨놓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단 말이지.”
사실이었다.
혼돈의 파편으로 의심되던 카논의 암살 사건도 지금에는 조용하다고 했다. 무엇보다 그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상태에서 어딜 노려야 할까.
“카논의 황궁에는 뭔가 있지 않겠어요?”
“너, 무서운 말을 하네.”
이드는 검후가 내놓은 답에 혀를 내둘렀다.
카논의 황궁이라면 황제를 포함한 주요 대신들과 황족을 말하는 것이다. 또는 황궁 안에 숨겨진 장소를 말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를 살펴보겠다고 하면 과연 쉽게 허락을 해 줄까? 그것도 아나크렌 제국의 명예 후작을 황궁으로 들여서?
어림도 없다! 아나크렌은 지금 본 제국을 조롱하는 것인가!
쩌렁쩌렁 대전을 울릴 카논 제국 황제의 노호성이 귓가에서 자동 재생되는 기분이다. 그야말로 뻔한 결과.
이걸 넘어 황궁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결국 힘으로 찍어누르는 수밖에 없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드에겐 충분히 그만한 힘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 뒤는?
위엄이 꺾이고, 무단침입을 당한 제국의 명예는 어쩌란 말인가? 그런 부작용이 가져올 결과는 하나뿐이다.
전쟁. 결코 전쟁!
현재 아나크렌과 마스가 열심히 눈치를 보며 벌이고 있는 국지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전면 전쟁이다. 거기에 모욕을 당한 카논의 황제라면 어느 한쪽이 멸망하기 전에는 전쟁을 끝내려 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
아이러니라면 이것을 대륙에서 가장 고귀한 황족인 검후가 입에 올렸다는 사실이다. 황제와 제국의 자존심이 얼마나 대단한 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말이다.
그러나 검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와인을 홀짝거렸다.
“이드도 의심스럽긴 하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전쟁으로 이어질 게 너무 뻔하잖아.”
“그게 걱정이라면 저도 같이 가요. 제가 카논의 핏줄과 귀족들을 다 날려버릴 테니까. 그럼 전쟁도 없어요.”
“일단 황제는 좋아할 것 같은데…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한순간에 지배자를 잃은 카논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특히 황제만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대신들도 같이 사라진다면 더욱더.
카논이 아무리 제국이라지만 머리가 사라진 짐승은 좋은 먹잇감일 뿐이다. 아마 사방에서 카논을 잡아먹기 위해 날뛸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아나크렌이 가장 큰 고깃덩이를 가져가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전쟁만큼은 아니라도 수많은 피가 흐를 것은 뻔한 일.
하지만 검후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백 년 전에 끝냈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전.”
“…….”
검후는 단호했다.
과거 카논 제국과 자신이 모르는 어떤 문제가 있었나 싶을 정도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검후의 말에 틀린 부분도 없었다. 세상이 망할 뻔한 위기였다. 그리고 그 위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런 위험을 세상에 풀어놓은 것이 바로 카논이다.
그 죄의 무게를 따지면 카논이라는 나라가 수십 번을 망해도 충분하지 않다. 물론 그들 입장에선 억울할 것이다. 혼돈의 파편의 봉인을 풀어낸 것은 그들이 존경하는 마법사의 독단에 가까웠으니까.
뭐, 그렇다고 연구비를 지원한 이상 완전히 관계가 없다고도 할 수 없기도 하다.
“그리고 어차피 조금 빠르냐 늦냐의 차이 말고는 일어날 일이지 않겠어요? 이미 이드가 한번 다녀오기도 했잖아요.”
그 결과가 바로 스케스틱이니까.
하지만 이드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리 내키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뭔가 남아 있겠어?”
“반대로 그런 일도 있었으니, 더한 것도 남아 있을 수 있지 않겠어요? 개인적으로 로드와 드래곤들이 돌아온다면 가장 먼저 뒤져봐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인정이지.”
이드도 그러한 부분에선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크렌의 명예 후작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간다면 전쟁이라는 결과를 낳겠지만, 수십 마리 드래곤들이 황궁 위로 날아온다면 그건 자연재해이고, 재앙이며 신의 분노다.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일이란 말이다.
그렇기에 이드도 카논의 황궁에 대한 실력 행사는 드래곤들이 돌아온 후로 정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 내 계획에는 황궁은 미포함이야.”
“이드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어쩔 수 없다는 검후의 얼굴에 짙은 아쉬움이 그득했다.
혼돈의 파편에 대한 아쉬움인지, 카논 황실에 대한 아쉬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모습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황궁은 빼더라도 카논이라면 중요 영지만 돌아도 시간이 모자라겠어요.”
“괜찮아. 일종의 사전 탐색의 느낌이니까. 대충 돌아보는 것뿐이야. 그래서 라일론도 염두에 두고 있거든.”
“……잠잘 시간은 있겠어요?”
카논만 해도 그 크기가 엄청난 제국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제국인 라일론까지 생각하고 있다니.
그야말로 멈추지 않고 이동만 해도 수년의 시간이 필요한 일.
이쯤이면 아무리 이드라도 이게 가능한가 하는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이번 외유를 2년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죠?”
“아니야. 아무리 길어도 넉 달은 넘지 않을 거야.”
그전에는 무조건 돌아온다.
아무리 늦어도 넉 달 안에는 드래곤들이 돌아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드의 대답에 검후는 팔짱을 끼고는 넉 달이라는 기간을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그 기간 자신과 소드 팰러스의 일정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출발은?”
“글쎄. 대충 이번 달 안으로는 움직이지 않을까? 이르면 다음 주? 라미아와 일리나도 괜찮지? 괜찮죠?”
“문제없어요.”
“준비는 언제나 만전이니까요.”
언제나처럼 믿음이 실린 든든한 대답이다.
더불어 말뿐인 대답도 아니었다. 충실할 정도로 사실에 근거한 대답이었다. 무엇보다 긴 여정에 있어 가장 중요한 돈과 준비물과 장비들이 모두 라미아의 아공간 안에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 지국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바리바리 쌓아 놓은 아공간은 무인도에서도 왕이 부럽지 않은 생활을 가능하게 해 줄 정도였다. 되돌아보면 에단의 요청을 받아 숲을 떠나 소드 팰러스로 향할 때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더랬다.
“그럼, 말만 준비하면 되겠네요.”
“그런데 왜 그렇게 꼼꼼히 물어보는 건데?”
“저도 같이 갈 거니까요.”
당연한 일을 뭘 묻고 있냐는 검후,
그에 두어 번 말없이 눈을 깜빡인 이드가 귀찮은 얼굴로 이마를 쓸었다.
“그사이 까먹은 모양인데, 이번엔 우리만 움직인다니까. 단출하고, 스피디하게.”
“저도 스피디하게 움직일 수 있어요. 그러니까 같이 가요.”
묘하게 고집을 부리는 검후다.
“왜 같이 가려는 건데? 그리고 지금 소드 팰러스에는 네가 있어야 하잖아. 소드 팰러스에 있어 지금이 굉장히 중요한 시점이잖아.”
비록 검후의 복귀와 멜팅 블러드로 인해 화제의 중심이 된 소드 팰러스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결코 안심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삼검왕의 배신이 준 충격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니까. 그런 시점에 검후가 사라진다면 어떤 소리가 나올까?
“아무리 생각해도 클라인 백작이 허락할 것 같지가 않은데?”
“상관없어요. 넉 달 정도 자리를 비워 흔들릴 소드 팰러스라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진짜 웬 고집이야?”
“……그냥, 그냥 그래요. 어쩐지 이대로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구요.”
살짝 볼을 붉히며 진실을 털어놓는 검후.
그 모습에 이드와 일리나, 라미아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