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50화
1485화
“솔직히 겁이 많이 났습니다.”
스폴이 무서웠다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라미아 님의 마법이라면 몰라도 평범한 마법사들이 차원진을 극복하고 공간이동을 해결했다는데, 이걸 믿을 수가 있어야죠.”
자국 마법사를 깔아뭉개는 발언에 한쪽으로 물러서 있던 베오론 남작의 목덜미가 붉어졌다. 그러나 상대는 은색 기사단의 스폴.
이에 감히 반박하지 못하고 그냥 질끈 눈을 감는다.
또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차원진이 발생한 초기에 이를 극복할 방법을 찾지 못한 것 때문에 대륙의 모든 공간이동이 멈춰버렸다. 사실 이건 절대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공간이동이다.
평민들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귀족들도 평생 사용할 일이 없는 것이 공간이동이다. 그럼 이런 공간이동을 사용하는 사람은 누구이고, 또 그런 이들이 움직이는 게 얼마나 중요한 안건일까. 그걸 생각하면 공간이동이 멈춤으로 인해서 생기는 혼란이 얼마나 컸을지 대충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일 년이 지나며 겨우 어찌어찌 방법을 찾아낸 상황. 유의미한 결과를 얻기는 했지만, 유능하다는 소리를 듣긴 어려웠다. 이젠 차원진도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무도 베오론 남작을 신경 쓰지 않는 가운데 이드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말로는 못 믿겠다면서, 결국은 사용한 모양이네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먼저 가서 호위대를 꾸려야 했으니까요. 제가 못 가겠다면 다른 사람을 보낸다는데.”
이드 님의 호위를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죠.라면서 턱을 치켜들고 콧김을 뿜는 스폴이었다.
이드는 그 모습에 퍽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언제나 검후를 최우선 하는 은색 기사단이 검후를 두고 자신을 위해 먼 길을 달려온 것은, 그만큼 자신에게 정성을 다하고 있다는 증명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함께 전장을 달린 전우라는 마음과 함께 검후를 구해 준 은인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출발 준비는 다 된 겁니까?”
“준비는 완벽합니다. 명령만 하시면 언제든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
“우하!”
스폴의 마차 뒤로 도열해 있던 기사들과 병사들이 척척 발을 구르며 답했다. 숫자는 많지 않았다.
기사 일곱에 병사가 스물이었다. 훈련이 잘된 병사들은 무장까지 충실했지만, 사신을 호위하기엔 아무래도 많이 초라한 병력이었다. 하지만 이런 구성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안전보다는 속도가 우선이라고 하셔서 호위단을 이렇게 구성했습니다.”
이런 스폴의 말과 함께 마흔 마리의 말이 나타났다. 기사와 병사들이 탈 말이었다. 속도가 우선이라는 말에 스폴이 모든 병력을 말을 탈 수 있는 인원으로 꾸린 것. 특히 이동 중에 갈아탈 생각으로 예비마까지 준비한 상황.
저런 구성이라면 정말 라일론의 황성까지 쉬지 않고 달려도 될 것 같았다. 물론 호위대에 있어서는 끔찍한 소리였다.
좌우간 이드는 이런 구성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좋군요. 그럼 말이 나온 김에 바로 출발할 수 있겠죠?”
“가능합니다만…….”
스폴의 얼굴에 얼핏 당혹감이 스친다. 지금 막 도착했으면서 바로 이동이라니. 휴식은 둘째치고 기다리고 있을 크람의 영주도 보지 않고 바로 출발하자고 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럼 바로 출발하죠.”
“큼, 알겠습니다.”
하지만 스폴의 대답에 망설임은 없었다. 그녀는 곧장 호위대를 말에 오르게 했다. 곧이어 이드 부부가 마차에 오르고 마차가 천천히 크람의 내성을 빠져나갔다. 이 속도로 외성을 지나 국경을 넘은 후 본격적으로 속도를 높여 달릴 것이다.
그렇게 한바탕 스치는 바람처럼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진 이드 일행.
베오론 남작은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푹하고 참았던 한숨을 쏟아냈다. 그것은 안도와 걱정이 뒤섞인 한숨이었다.
“하아~ 영주님께는 어떻게 말씀드려야 하나……………..”
이 상황을 최대한 기분 나쁘지 않게 꾸밀 생각에 머리가 무거운 베오론 남작이었다.
***
그렇게 이드가 국경을 넘고 있을 때,
같은 날 라일론 제국 가일라에서도 이드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는 황궁에 있는 황제의 개인 집무실에서였다. 이 집무실은 황제가 사용하는 것임에도 그리 넓지 않았다.
사실 황궁에는 황제가 사용하는 집무실이 여럿 있었다. 황제의 기분과 용도에 따라 만든 것이며, 동시에 안전을 위해 만들어진 집무실. 그중 몇 개 되지 않는 개인 집무실은 대개 그 규모가 크지 않았으며, 동시에 이곳으로 출입이 허락된 사람도 극히 제한적이다.
그리고 그 많지 않은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나람 공작이었다.
나람 데이츠 코레인. 무려 대전에서 검의 소지를 허락받았을 정도로 황제의 신임을 얻고 있는 제국의 공작.
하지만 아무리 그런 그라도 개인 집무실을 방문할 때는 검을 소지하고 있지는 못했다. 뭐, 그만한 경지에 오른 기사인 그에게 검의 유무는 특별히 의미가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오랜만에 마음이 심란하군. 그렇지 않소?”
“…….”
“그렇게 손에 넣고 싶어 애를 썼던 사람을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다니 말이오.”
“・・・・・・폐하의 마음을 이리 어지럽히는 자라면, 만나지 않는 것도 방법입니다. 명하신다면 제가 그를 상대하겠습니다.”
마치 대리석 석상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나람 공작의 모습에선 호승심도 충성심도 찾기 어려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황제를 향한 충성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극히 무표정한 것이 그의 특징일 뿐.
“아니, 다른 이도 아니고 검후의 사신인데, 그렇게 대할 수야 없지. 그래서야 이렇게 미리 연락까지 한 검후를 무시한 꼴이 되지 않는가.”
그 말과 함께 황제의 손에서 팔랑거리는 종이 한 장.
그건 다름 아닌 짧은 안부와 함께 사신을 보내겠다는 검후의 자필 편지였다.
“겨우 이 짧은 글 몇 자를 보내자고, 아나크렌이 공간이동 능력을 회복했음을 알려오지 않았나.”
그랬다.
이 자필 편지는 공간이동 마법을 통해 소드 팰러스에서 라일론의 황궁으로 배송된 것이었다. 겨우 한 장의 편지를 보내기 위해서 상당한 예산이 소모되었으며, 그 이상으로 국가의 핵심 정보 하나가 밝혀졌다.
바로 공간이동 말이다.
공간이동이 어려워진 상황에 그것을 극복하고 다시 공간을 열었다는 사실은 전략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비록 그것이 적국이 아닌 동맹국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 정보 값은 해야지.”
“어차피 저희 라일론에서도 조만간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나람 공작의 말대로였다.
각국은 차원진을 극복하고 공간이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라일론 제국도 얼마간의 소득이 있어 조만간 방법을 찾아낼 상황이었다. 아나크렌과 비교하면 대략 한 달 정도의 차이.
다시 말하지만, 동맹이 아닌 전쟁 중의 적국이었다면 전황마저 뒤집을 정도의 가치 있는 사건이었다.
“알고 있네. 하지만 이번에도 아나크렌보다 늦었지.”
“……송구합니다.”
“훗, 왜 마법사도 아닌, 자네가 그러나. 그리고 마법사들도 이번 일로 느끼는 바가 있겠지.”
아닌 게 아니라, 라일론의 마법사들은 현재 자존심이 매우 구겨진 상태로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나름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아나크렌의 마법사들보다 한발 뒤처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부분을 다 떠나서 솔직히 나도 직접 만나보고 싶어졌네.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를 말이야.”
“위험할 수…… 있습니다.”
“하하하. 설마, 그럴 리가. 겨우 그런 얄팍한 암살을 하자고 검후가 직접 펜을 들었을까.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는 몰라도 검후는 나도 잘 알아. 절대 그럴 위인이 아니지. 그건 공작 그대도 잘 알 것이고.”
“…….”
나람 공작도 한때 검후에게 검을 배웠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그녀의 됨됨이를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암살을 조심하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람 공작의 눈가로 그림자가 졌다. 여간해선 감정을 보이지 않는 그의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황제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나람 공작의 이런 모습이 얼마 만이던가. 이전엔 거의 볼 수 없었던 반응. 그러나 최근 들어 벌써 몇 번을 확인하게 된다.
정확한 전후 사정을 알 수 없는 대형 사건들. 특히 마스 왕국에서 일어난 두 건의 일들은 그 규모 때문에 본인조차 섬뜩함을 느낄 정도였다. 과연 세어 가든을 날려버린 사건이 황궁 앞에서 벌어진다면, 제국은 그것을 막아낼 수 있을까? 때때로 그런 의문이 치솟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대부분의 사건에 얽혀 있는 인물.
나람 공작의 굳센 마음에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인물.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
“아직도 그때의 일이 신경이 쓰이는가. 이드 명예 후작을 놓쳐버린 그 일 말이오.”
“송구합니다.”
나람 공작의 얼굴에 든 그림자가 더욱 짙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제국 땅에 있을 때 그는 평민이었다. 하지만 그를 놓쳐 버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아나크렌의 명예 후작이 되어 다시 나타났다. 그것은 누가 뭐래도 오롯이 나람 공작의 실책이었다.
“그댈 질책하고자 함이 아니오. 솔직히 그때는 그런 마음이 없지는 않았으나, 이후 일어나는 사건을 보자면 오히려 불가능한 명령을 내린 내 책임이 컸지. 다만 아쉬움일 뿐이오. 그때 그대가 아니라 내가 직접 갔다면. 힘이 아니라 정성을 다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아나크렌이 아니라 라일론에 명예 후작이 한 명 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최근 들어오는 보고를 통해 엿보이는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가진 힘. 그 편린을 본 후, 황제는 지난 일에 대한 아쉬움을 이렇게 종종 드러내곤 했다.